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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년쯤 전이었을까? 오래 이어오는 한 정기모임에서 “아이고, 그 반지 예뻐요. 어디서 샀어요?” 한 선생님이 내 손에 낀 반지를 보며 하는 말이었다. 본래 장신구 착용을 좋아하지 않으나 이따금 기분이 내키면 손쉽게 살 수 있는 것을 사서 끼거나 걸고 나가 자랑을 할 때도 있다. 그날이 그런 날이었다.
매주 토요일이면 경기전 주차장에서 열리는 프리마켓에서 압화가 든 초록색 반지를 하나 사서 처음 끼고 나간 날, 구순에 가까운 선생님의 간절한 눈빛에 끼고 있던 반지를 빼서 드렸다. 처음에는 비슷한 것이 있나 토요일이면 나가 돌아보기도 했지만, 어느 때 인가부터 아예 잊어버리고 살았다. 그리고 며칠 전 선생님으로부터 택배 하나를 받았다. 고운 한지함 속에 정겨운 손글씨 편지와 함께 그 옛날 빼 드렸던 반지가 곱게 싸여 있었다.
장롱에 넣어 두고 그리도 좋아했지만, 요즘은 지팡이에 의지해 간신히 생활하다 보니 돌려줄 때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보낸다고 했다. 딸이나 며느리에게 줄 수도 있지만, 의미가 없어 꼭 내게 주고 싶어 보낸다며 한지에 또박또박 쓴 글씨는 평소 선생님 성정과 닮아 있어 몇 번을 읽고 또 읽었다.
거절할 수도 없는 상황에 선생님이 주신 선물로 생각하고 오래 간직하겠다는 답을 쓸 수밖에 없었다. 답례로 함께 보낸 작은 선물에 손수 만든 한지 팔각찻상을 보내며
또 선물을 보내면 되돌려 주겠다는 엄포로 마무리를 지어주시는 바람에 수지맞는 인생이란 이런 게 아닐까? 하면서 ‘되로 주고 말로 받았다. 고 주위에 자랑을 얼마나 했던지.
올해 아흔셋 되신 선생님은 팔순에 모 일간신문 신춘문예 당선과 이름있는 문학상 공모에서 대상을 받으며 많은 이를 놀라게 하고 부럽게 했다.
여린 몸매와 조용한 성품은 날고뛰는 문우들 사이에서 튀지 않으면서도 확실한 존재감을 보였다. 그분 앞에서는 옷깃을 여미며 말 한마디 함부로 해선 안 될 것 같은 위엄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누구에게도 서운하지 않게 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란 주는 것 없이 미운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로 크고 작은 일로 감사할 일도 많다. 다만, 내가 다른 이에게 어떤 사람일까를 생각해 볼 때가 있다. 쓸데없이 헤프거나 냉정하거나 모가 나지는 않는가. 겉 포장은 그럴듯하게 하고서 빈 강정 같은 속을 가지지는 않았는가.
유리 덮개를 해야 오래 쓴다며 본((本) 까지 떠 보내주셔서 맞추고 보니 한결 빛이 나는 찻상을 거실에 앉혀 놓았다. 흰 바탕에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모란이 가운데 자리하고 환한 파란색 선을 둘렀다. 팔각기둥에는 아기자기한 꽃과 글씨로 채워져 도배한 지 오래된 작은 거실에 밝은 기운이 쏟아졌다. 들고나며 세상 다 가진 듯 행복했다. 그렇게 사나흘이 흐르자 나도 선생님 흉내가 내고 싶어졌다고 할까.
전통적인 물건에 관심 많은 며느리를 주면 나보다 더 오래 간직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금방 결심으로 굳어졌다.
설이 한 달 남았다. 아들 부부가 코로나로 몇 번의 귀성을 생략할 때도 이렇게 기다리지 않았는데 요즘은 하루가 여삼추다. 며느리는 분명 좋아할 게다. 선생님도 분명 싫어하시지 않으리라. 더 오래 간직하며 아낄 사람에게 물려준다는 생각으로 매일 들뜨는 일상에 신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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