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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바다는 고독하다. 몽롱하던 봄의 입김도, 뜨겁게 달구던 여름의 정렬도, 가을의 낭만적 휘파람도 사라졌다. 냉기로 가득 찬 파도만이 거칠게 출렁이고 있었다. 그 소리는 흐느껴 우는 여인의 소리 같기도 하고 사자의 성난 소리 같기도 하였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소리는 세상 소리를 모두 받아들인 아픔이었다.

검은 바위에서는 강한 마찰음이 이어졌다. 마치 성난 아버지가 내려치는 회초리의 힘과 잘못한 것이 없다고 버티는 당찬 아들의 갈등 같았다. 하늘로 치솟은 물기둥이 하얗게 부서지며 내려앉고 다시 전장을 갖추고 밀려들어 기어이 부서지고야 마는 파도가 온 바다를 멍 들여놓았다.

궤도를 벗어난 허전한 마음이 자리 잡지 못하고 폴폴 날아다녔다. 나의 항구는 어디쯤일까. 표류하는 마음을 잡아줄 항구는 어디일까! 수도 없이 항구를 들락거리다 맹방해변이 내려다보이는 덕봉산을 올랐다.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백사장은 사구를 만들며 길게 늘어져 있었다.

얼마나 많은 모래가 모여야 저 언덕을 만들 수 있을까.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는 말처럼 마음만 먹으면 못할 것이 없다지 않던가!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몸을 맡기고, 거친 파도가 밀어내면 밀려나고, 성난 발길에 차이면 그 발길에 날아가며 견뎌낸 세월의 흔적이리라.

큰 바윗돌이 부서져 작은 알갱이로 남는 동안의 그 아픔 누가 알까. 깊은 산골짜기에서 울퉁불퉁 제 모양을 갖고 세상에 나왔지만 부서지고 부서지다 겨우 모래알로 남았을 테지. 강한 물살에 의해 밀려나기도 하고 높은 언덕에서 떨어져 부서지기도 하며 이 바다까지 굴러오게 되었을 테지. 이 먼바다까지 오는 동안 얼마나 많은 이별의 아픔을 겪었을까.

이별은 언제나 아픔을 안긴다. 익숙한 모습, 편안한 환경에서 벗어나는 외로움이다. 하루아침에 겪는 사별의 아픔도 있고, 매일 만나던 이웃과 낯선 사람 대하듯 고개를 돌려야 하는 이별도 있다. 절대로 떠나지 않겠다던 첫사랑과의 이별은 삶을 바꾸어 놓기도 하였다. 둘 사이를 비집고 들어서는 강한 힘을 어쩌겠는가.

다정하던 언어가 식어버리고 따듯하던 모습에서 언뜻언뜻 비치는 차가움을 감지할 때 이별의 그림자를 느꼈다. 아니기를 바라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변심을 확인하는 순간 가녀린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여지를 남기는 이중적인 마음을 자르고 버스에 올랐다. 오가던 마음 길을 자르고 나니 피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치지 않은 눈물이 두꺼비 눈을 만들었고 마음자리 한구석에 들어앉았다. 차가워진 마음은 다시 데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 어린 나이에 알았다.

이별을 만나면 산더미 같은 파도처럼 분노가 치솟다가, 내 탓이 아니라며 원망으로 울부짖다가, 말수가 줄어들고 이별을 인정하게 되지. 그리고 서서히 잊힌다. 달콤하던 순간도 이별의 아픔도 모두 잊히고야 만다.

‘마음이 부리는 도술에 속지 말라’는 k 선생님의 시구가 가슴에 박힌다. 눈으로 볼 수도 없는 그 마음이라는 게 또 맘대로 되질 않는다. 마술사 손의 도구처럼 제 맘대로 들락거린다. 화려하게 꽃을 피우다 사라져버리는 그 도술이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기다란 백사장을 터벅터벅 걷는다. 쓸쓸한 해방감을 느끼며 홀로 걷는다. 텅 비어버린 마음으로 바람이 지나간다. 건조한 마음이 사람을 밀어내듯 바싹 마른 모래가 다가서는 발길을 밀어낸다. 발이 쑥쑥 빠지며 몸이 비틀댄다.

파도가 적셔놓은 젖은 모래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젖은 모래사장을 걷기가 한결 수월하다. 단단해진 모래밭이 체중을 견딘다. 담금질에 강해지는 쇠붙이처럼, 파도가 할퀴는 아픔을 견디며 단단해졌나 보다. 강한 파도가 달려들어 끌고 가려하면 스르륵 따라가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기를 반복한다. 거친 파도와 맞서지 않고 힘을 빼며 성난 마음을 품어 안는다.

몸이 깎이는 고통을 견뎌냈을 작은 입자가 햇살을 받아 반짝인다. 세찬 파도와 바람에도 더는 부서지지 않는다. 부서져 버리면 모래가 되지 못하고 펄이 되었을 테지. 작은 몸으로 서로의 언덕이 되어주며 강한 파도에도 끌려가지 않고 있었다.

젖은 모래의 언어가 내 안 깊숙이 스며들어온다. 바싹 말라버린 마음에서 비틀거리지 말고 촉촉한 감성으로 감싸 안으면 이별의 아픔에 빠지지 않는다고 속삭인다. 모래와 파도의 속삭임이 멜로디가 되어 빈 마음을 채운다. 인연이 다하면 멀어지는 이치를 다시 일깨워준다.

모래 위에 남겨진 발자국을 파도가 달려 나와 쓱 지워버린다. 길게 써 내려간 문장이 엔터 하나로 한순간에 사라지듯 내 어지러운 발자국을 지워 버렸다. 걷던 길을 돌아보니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그간의 아픔을 바다가 가져갔다. 파란 바다에 내 멍 하나를 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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