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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돈벼락 / 문해성

부흐고비 2022. 3. 21. 08:34

15억 8,600만 달러!

차를 타고 가다 전광판 광고에 눈이 멈췄다. 역대 당첨금 중에서 가장 크다며 연일 화젯거리인 파워볼의 기세가 놀라웠다. 남편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나 보다. 숫자에 끌려서 그 복권을 샀다. 미국에서 처음 사보는 것이라 우리는 많이 들떴다. 행운은 뜬금없이 찾아오는 것, 무슨 특별한 꿈은 꾸지 않았지만, 느낌이 좋았다. 가슴은 점점 부풀어 행운이 우리에게 올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머릿속 계좌에는 이미 그 돈이 들어와 있었다.

당첨되면 제일 먼저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남편에게 물었다.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회사에 사표를 쓰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얼마나 그런 날을 원했으면 마치 주머니에 준비해두었던 사표를 꺼내듯 내뱉나 싶었다. 정말 그 소원이 이루어졌으면 했다. 그의 어깨에 실린 무게가 느껴졌다. 고맙고 미안했다.

같은 질문을 나 자신에게도 해보았다. 평소에는 쓸 곳이 넘치도록 많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엄청난 돈 앞에서 망설여졌다. 현실 상황처럼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인 탓이었는지 모른다. 큰 복권에 당첨되고 인생을 망쳤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지 않았던가. 행운을 행복으로 만들 지혜가 필요할 것 같았다. 15억 달러, 한화 약 1조 8,000억 원의 큰돈 앞에서 갑자기 현기증이 일었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복권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당첨되면 뭘 할지 찬찬히 생각해 보았다. 아무리 궁리를 해봐도 숫자에 약한 나로서는 그 큰 금액을 혼자 감당할 수가 없었다. 유능한 변호사를 선임해야 할 것 같다. 그렇다고 해도 대략적인 사용계획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갖고 싶은 것을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우선 경치 좋은 곳에 별장 몇 채를 사야겠다. 호화로운 보트도 집 앞에 띄워두어야겠다. 그리고 시간과 돈 걱정 없이 언제 어디로든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자유. 다음은, 글쎄….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든든한 호주머니에 벌써 욕구가 다 채워졌나 싶어 혼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가장 큰 문제는 어떻게 자식들에게 돈을 나누어 줄 것인지였다. 얼마씩 주어야 하나. 그렇게 큰돈이 생기면 지금까지 잘 다니던 직장을 당장 그만둔다고 할지 몰라. 아무리 많이 준다고 해도 방탕한 생활로 돈을 모두 날리고…. 돈 때문에 자식들 앞날이 불행해진다면 복권 당첨은 행운이 아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상상은 꼬리를 물고 나를 괴롭혔다. 그런데도 한 번쯤 그런 돈벼락을 맞아보고 싶었다.

밤새도록 허공에 떠 있는 돈을 생각하느라 잠도 못 자고 뒤척였다. 그리고 허망한 꿈처럼 아침이 왔다. 처음부터 내 돈이 아닌 것에 쓸데없이 기운만 뺐다 싶었다. 감당할 수도 없는 돈 앞에서 속물 같은 욕망이 꿈틀거렸다. 그 욕심은 나와 가족만을 생각하다 한 발도 더 나아가지 못했다. 만약 이런 내 모습을 돈이 보고 있었다면 무슨 생각을 했을까. 돈은 정말 자신이 쓰이고 싶어 하는 곳을 말하는데 나는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닌지. 내 안의 나를 들여다본 것 같아 부끄러웠다.

한국에서 로또가 한창 유행하던 때 아버지에게 사보라고 한 적이 있다. 그런 것에 전혀 관심이 없던 사람이 처음으로 샀는데 행운을 잡았다는 드라마틱한 공상을 하면서. 하지만 아버지의 반응은 예상한 대로였다. 왜 돈을 그런 헛된 곳에 낭비하느냐고 호통을 쳤다. 올해 87세가 되는 아버지는 아직 한 번도 복권을 산 적이 없다. 아마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런 아버지를 답답하게 여기면서도, 잠시나마 일확천금을 꿈꿨던 나의 사행심을 반성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복권을 사는 일이 어쩐지 떳떳하지 않은 것처럼 생각되었다.

최근 한국 텔레비전 방송을 보다가 깜짝 놀랐다. 이젠 TV에서 복권까지 선전하나 싶어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세히 들어보니 그 수익금이 저소득층 가정의 어린이나 노인복지에 사용된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당첨금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 그 쓰임에는 관심이 없었다. 사용처를 알고 나니 복권 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것은 행복을 나누는 작은 일이었다. 당첨되지 않아도 실망할 일이 아니었다. 그날 하루만이라도 억만장자가 되는 꿈을 꿀 수 있지 않았는가.

차에 기름을 넣기 위해 주유소에 들렀다. 유혹하듯 깜빡이는 창문의 숫자로 시선이 갔다. 남편에게 복권을 사자고 했더니 액수가 너무 적다고 했다. 300만 달러가 적다고? 남편은 5억 달러 이상일 때만 사겠단다. 나는 20달러로 개꿈도 꾸고 행복도 나눌 거라 했다. 남편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복권 수익금의 용도에 관해 설명해주려다 그만두었다.

꿈도 꾸고, 좋은 일도 하고, 의미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가 따라 웃는다.


문해성 님은 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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