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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오늘도 꽝이다 / 선우 혜숙

부흐고비 2022. 4. 4. 08:33

돼지 한 마리가 내게로 왔다. 아들이 직장에서 근속 10주년으로 받았다며 조그마한 순금돼지를 내밀었다. 사회에 첫발을 내딛고 시행착오를 겪으며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속으로 사표를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며 보낸 세월의 보상이다. 그것을 알기에 대견하기도 하고 마음이 짠했다. 그런데 그걸 기꺼이 나에게 주겠단다. 반짝반짝 빛나는 돼지를 보자 평소에 관심도 없던 로또가 사고 싶어졌다. 마침 가족과 아산 삽교천에 가기로 했는데, 가는 길에 1등 당첨이 자주 나오는 유명한 로또 판매점이 있다. 혹시 내 행운이 거기에?

길이 밀린다. 로또 명당이라고 소문난 곳이라 주차하려는 많은 차량들로 인해 토요일은 항상 교통이 정체된다. 차는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겨우 도착했다. 로또점 밖까지 길게 줄이 늘어서 있다. 하지만 기다리는 사람들 표정엔 지루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유명한 맛집 앞에서 한 시간을 기다리는 건 그렇게 투덜대면서 여기서는 행여 순서가 바뀌어 내 행운이 다른 사람에게로 갈까 봐서인지 불평 하나 없이 묵묵히 앞줄을 따라간다. 나도 기꺼이 긴 줄에 합류했다. 줄이 좀 길면 어떠랴. 로또에 당첨만 된다면 이깟 줄 서기가 무슨 대수인가. 나는 당첨 운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해 로또를 산 적이 별로 없다. 주말에 아들이 집에 오면서 가끔 로또 한두 장을 선물이라며 줄 때가 있는데, 혹시나 하고 맞춰보면 역시나 대박 운은 내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꼭 사보고 싶다. 아들의 효심과 황금돼지가 행운으로 느껴져 기쁜 일이 있을 것만 같다. 나는 빳빳한 지폐에 좋은 기운을 듬뿍 담아 가족들에게도 선심을 썼다. 같이 팔자 한번 고쳐보자며.

가게 곳곳에 인생역전, 인생대박이라고 붙어 있는 걸 보니 당첨만 되면 인생이 바뀌는 게 맞나 보다. 로또용지를 받는 순간까지 경건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사람, 자기만의 과학적인 분석을 총동원해 번호를 고르는 사람, 모두 신중하고 간절하다. 우리도손바닥보다 작은 로또용지에 각자의 꿈과 희망을 걸었다.

“1등만 되면 직장 그만두고 몰디브에 가서 일단 한 달 동안 푹 쉬고 무얼 할까 생각해야지.”

“나는 집 한 채 사고, 어려운 사람 후원하고 살 거야.”

“1등만 되면 당신은 2억, 아들은 1억, 며느리도 1억, 내가 쏜다.”

모두 당첨이라도 된 듯 마음이 넓어지고 배포도 커진다.

문득, 오래전 아들 모습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나왔다.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꿈에 나타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숫자 다섯 개를 말해주고 가셨단다. 잠에서 깨어 로또 생각이 났는지 “남은 번호도 마저 말해주고 가시지.” 하며 무척 아쉬워했다. 바로 복권을 샀고 며칠을 희망에 부풀어 지냈는데, 그중에 맞는 번호가 하나도 없었다며 “할머니한테 속았어.” 하여 한바탕 웃은 적이 있다.

전에는 몇 십억 당첨자가 나왔대도 ‘그 사람 운 좋네.’하는 정도였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해 부럽지도 않았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가니 아픈 데는 자꾸 생기고 치과에 가서 임플란트 몇 개만 해도 돈 새는 소리가 펑펑 들리니 이래서 로또 당첨의 대박을 기대하게 되나 보다.

지인 돌잔치에 간 적이 있다. 진행자의 추첨으로 축하객에게 선물을 주는데 로또복권이 단연 인기였다.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꼴찌로 당첨되어 복권 한 장을 손에 쥐었다. 기대하지도 않았던 로또 한 장은 일등 그릇세트도 부럽지 않았다. 마치 횡재라도 한 듯 기분이 들떴다. 그날 저녁, 한 장의 종이는 꾸깃꾸깃 휴지통 속으로 들어갔지만 설렘과 기대 속에 하루가 행복했다. 사람들이 로또에 열광하는 이유를 알았다.

사람들은 농담으로 “돈벼락이나 맞았으면 좋겠다.”라고 말한다. 돈벼락이면 뭐 하나, 벼락 맞으면 인생 진짜 끝인데.

돈이 무슨 소용 있냐고 하는 사람이 있다. 건강이 우선이고 가정의 화목이 중요하다는 그 사람에게 어떤 이는 돈이 있어야 검진도 받고, 질병을 발견해야 치료도 하고, 보약도 먹어야 건강하게 행복한 삶을 살수 있다고 한다.

나는 가진 것이 없으니 누가 집을 샀다, 땅을 샀다, 재테크를 해서 얼마를 벌었다고 해도 별 관심이 없다. 크게 욕심이 없으니 그저 먹고 싶은 것 먹고, 가고 싶은 데나 다니면서, 아플 때 자식에게 손 벌리지 않고 병원 다닐 수 있을 정도의 돈만 있으면 된다는 내 말에 지인은 그게 본인의 소원이라며 더 이상 뭐가 필요하냐고 한다. 생각해 보니 나는 그동안 욕심인 줄도 모르고 욕심을 부렸던 거다. 로또를 사고 보니 내 안에 꽁꽁 숨어있던 욕심들이 슬금슬금 기어 나와 나를 일깨워준다.

아들의 따뜻한 마음과 돼지의 운을 담아 샀던 로또복권 덕에 상상이지만 넉넉한 부자도 되어보고, 나눔을 실천하는 착한 이웃도 되어 잠시나마 즐거움을 만끽했다. 로또 1등보다 몸과 마음의 건강이 우선이라고 생각하며 위안을 삼는다. 돈 벌어 병원 다닐 생각 말고 건강을 지키는 것이 일확천금을 얻은 것보다 더 큰 복이 아닐까. 더 이상 욕심내지 않는다면 지금 이대로도 충분히 행복하다. 그래도 꿈에서 돼지를 열 마리쯤 보게 된다면 다시 한번 도전은 해보고 싶다. 내가 산 로또복권은 오늘도 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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