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시詩 느낌

염창권 시인

부흐고비 2022. 4. 1. 11:54

염창권 시인
1960년 전남 보성 출생. 광주교육대학교와 교원대학교 대학원 졸업(교육학 박사). 신춘문예에 시조(1990 《동아일보》), 동시(1991 《소년중앙》), 시(1996 《서울신문》) 등과 신인상에 평론(1992 《겨례시조》)이 각각 당선되었다. 시집으로 『그리움이 때로 힘이 된다면』, 『일상들』, 『한밤의 우편취급소』와 시조집으로 『햇살의 길』, 『숨』, 『호두껍질 속의 별』, 『마음의 음력』이 있고, 평론집으로 『존재의 기척』 등이 있다. 한국비평문학상(우수상), 한국시조시인협회상, 중앙시조대상, 오늘의시조문학상, 노산시조문학상, 광주펜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소금 창고 / 염창권
길 위에서 바람의 체액을 묻혀 왔다./ 놀빛 물든 머리칼이 바람에 섞어들 때 넌 울면서 혼자인 몸 열었다 닫는다, 당겼다 풀어준 맘 달이 는 비릿한 꿈, 또 그립다 네 맘이 열어놓은 빗장 아랜 육면체인 기억의 모서리가 서걱댄다, 그 음지의 둘레에서 타오르는 불꽃들/ 흰 몸을 공중에 내건다./ 벗은 날이 뜨겁다.//

철근 / 염창권
굴삭기가 허물고 간 뒤,/ 시멘트더미에서 비어져 나와/ 뭉툭하게 잘린 손가락을/ 허공의 곳곳에 쑤셔 넣고 있다/ 벌건 수심을 흘리며/ 구부러져 가던 저 노령의 건물을 버팅긴 것은/ 바람 든 뼈대가 아니라/ 기억의 끈을 조이는 철근의 인장력이었으니/ 먼지 속에 풀썩 주저앉은/ 철거민의 몸에도/ 수천의 신경선이 가닥가닥 꽂혀 있는 것인데/ 모래먼지 같은 살 틈에서/ 乙자로 구부러진 채 팽팽한/ 이 견딤은/ 내던져질 때마다 상처를 들쑤시며/ 목을 빳빳이 세우는//

비 / 염창권
태막을 뚫고 얼굴을 내민 송아지, 미끄러지면서 일어나기를 반복한다 힘을 받지 못한 무릎 관절이 자꾸 꺾인다 여린 조개 같은 발굽으로 버티는 것 좀 봐라 부르르 떠는 것이 비 쫄딱 맞은 모양새다./ 태어나는 것들은 모두 축축하다./ 그 축축한 태생을 혀로 끌어들이는 어미 소, 맞춤한 키 높이에 고무장갑 같은 젖꼭지를 매달고 있다./ 함께, 서로, 축축해지는 것은 태생의 반복일까?/ 혀를 섞었던 기억을 통음痛飮하듯 비가 내 몸을 핥아댄다 부르르, 사랑이라는 이 진저리!//

후원(後園)의 가을 / 염창권
장광 위로 불어오는 바람이 소삽하다/ 적막한 마음은 허공중에 길을 트고/ 손바닥 펼쳐든 잎들이/ 하늘빛을 닦고 있다// 잎 그물에 걸려서 너울대는 빛의 질량/ 햇살 받아 물드는 나뭇잎의 신경선 따라/ 후일의 먼 선로를 딛고/ 내생의 문 열어본다.//

수몰 이후 / 염창권
물이 차오르면서/ 수심이 닿는 곳까지 폐허가 되었다/ 가문 날들이 많아서인지/ 달은 강바닥에 떨어져 죽는다/ 사람들이 물을/ 마구 끌어다 쓰면서/ 길은 저수(貯水) 밖으로 걸어나와/ 20년 전 내가 집으로 걸어갔던/ 장소의 부패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거품을 물고 뭍으로 기어오르면서/ 강은 능욕 다음의 처참을 받아들인다/ 떠난 것들이 돌아와서/ 붉어진 얼굴을 내밀 때/ 나는 그들을 볼 낯이 없다/ 내가 미안하다//

냉담이 물끄러미 서 있었다 / 염창권
어둠은 아직 서쪽 어둠을 향해 몰려갔다/ 기차는 떠났다, 플랫폼을 스치며/ 상처가 긴 터널을 뚫는다, 행선지가 또 어둡다// 당신을 찾아온 이곳은 십 년 전이다,/ 두툼한 어둠의 봉투 같은 객석에는 섬세한 누벨바그, 감수성이 접속된다, 희붐한 새벽빛이 철길을 밀고 나갈 때 평행으로 이어진 슬픔, 그걸 통과하는데/ 날아든 새 울음소리가 묘석 위로 떨어진다,// 외등을 켠 눈빛으로 널 찾았던 기억처럼/ 십 년의,/ 딱딱해진 척추를 펴며 일어설 때/ 흐릿한 입간판 너머로 눈발이 붐비는지// 영화관 귀퉁이에 냉담이 서 있었다,/ 갸웃이 일어서던 지평선이 잦아들더니, 후각과 촉각이 저지르는 진동음은 가상이 아니었다, 실물 그대로의// 싸늘한 스크린 밖에서 감정을 쬐며 녹였다.//

아무 것도 아닌 날, 네가 보여 / 염창권
희미한 풍경 뒤엔 눈시울 깊은 네가 보이지// 문 앞에 느낌표처럼 서 있어 넌 언제나, 정해진 건 없지만 먼저라는 말은 일종의 배신, 더러워진 운동화에 땀에 전 셔츠 차림으로 꼬리를 잘라내듯 마을 밖으로 나와서, 구겨진 물병처럼 길바닥에 부어졌지, 얼마 뒤에 너도 결국 따라나섰겠지만, 아무것도 아닌 형태로 마주쳐야 할 도시에서 아무것도 아닌 성분을 바꿀 순 없었어, 그날 이후 널 못 만나 시간을 놓쳤거든// 네가 날 지켜본다 해도, 아무것도 아닌//

덩굴손 / 염창권
어린 딸의 하루하루를 맡겨두는 이웃집/ 구석진 벽으로 가서 덩굴손을 묻고 울던 걸/ 못 본 척 돌아선 출근길/ 종일 가슴 아프더니/ 담벽을 타고 넘어온 포도 넝쿨 하나/ 잎을 들추니 까맣게 타들어간 덩굴손/ 해종일 바지랑대를 찾는/ 안타까운 몸짓/ 저물어서야 너를 찾아 집으로 돌아가는구나/ 촉촉한 네 눈자위를 꼬옥 부여잡고 걸으면/ "아침에 울어서 미안해요"/ 아빠를 위로하는구나//


고인돌 / 염창권
죽음이 너무나 가벼워서/ 날아가지 않게 하려고/ 돌로 눌러 두었다/ 그의 귀가 밝아서/ 들억새 서걱이는 소리까지/ 뼈에 사무칠 것이므로/ 편안한 잠이 들도록/ 돌이불을 덮어 주었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그대 기다리며/ 천 년을 견딜 수 있는가.//

저기, 빈 의자가 / 염창권
의자는/ 감정보다 태도에 가깝다/ 얼굴에 흘러내린다// 뻑뻑하게 굳은 그가/ 발가벗겨진 허물을 발가벗으려 할 때/ 가파른 절벽이 등에 매달렸다// 아직 발가벗기지 않은/ 구린 의자는/ 동류의 똥 냄새를 맡기라도 한 듯/ 적대적인 태도로 고쳐 앉는다// 지금까지 의자였지만/ 앉을 곳이 필요한/ 발가벗긴 남자의 무릎을 닮은/ 저기에,/ 빈 의자가//

가판대 / 염창권
신어보지 못한 길이 나란히 놓여 있다// 배고픈 혓바닥 같은 회색빛 쪼리가 먼지를 탁탁 부쳐대며 다 닳은 길 핥고 간다, 진열된 몇 켤레의 샌들이 나를 본다, 병든 것이 마음인지 너덜대는 육신인지 내 살아온 문수까지 재어보는 표정이다// 공복(空腹)인 혀의 길이 멀다/ 허겁지겁, 이란 의태어, 또 갈아 신는다.//

급식 / 염창권
날개를 단 것들이 날 향해 달려왔다,// 부화 후 모이를 주어왔던, 어미 없는 몸들 춥지 않게 비닐 막을 둘러 주었던, 붙잡아서 껴안아 주거나 수컷 둘을 골라 싸움을 시켰던 , 저것들이// 보이지 않는 고무줄을 팽팽히 당기면서 땅을 박차는 힘으로 10센티쯤은 공중을 날아서 푸덕이며 달려왔다, 막 하교 중인 나는 줄 게 없으니 위협적으로 쫓아 보는 시늉을 했으니// 멀뚱멀뚱한 눈알들을 둥글리면서 보상이 없는 경우를 궁리하는 듯했다, 마지못해 보릿겨 몇 움큼을 던져 주었지만, 더 바랄게 있다는 듯 내 곁을 기웃거렸다// 선착하여 가로채려는 야생이 복재된 것일까,// 은행 창구를 드나들 때나 대출을 기웃거릴 때 혹은 부동산 이야기를 들을 때, 눈알이 멀쑥해지면서// 공중에 팽팽한 신경선이걸린다, 번호표를 뽑는다.//

한밤의 우편취급소 / 염창권
소리나는 쪽으로 한쪽 귀가 쏠렸어,// 가랑비 속으로 누군가 오고 있는데 뿔이 달렸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어. 마른 낙엽 긁어모으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은데 너는 올 수가 없으니 반짝이는 빈 우산을 펼쳐둔 곳에 네 자리를 정해 놓고 기다릴게// 경적도 없이 바퀴가 지나가는 우편취급소엔 잉크가 말라붙은 종이가 잠들어 있지. 희붐한 창문 아래 색깔도 감촉도 중력도 없이 잠들어 있는 넌, 내 허무와 비참의 수신처일 터인데// 잠이 덜 깬 공복감, 비릿한 키스, 아니면 입술 맛 같은 건 포장할 수 없지, 단지 네게 보내려는 건 타다 만 검은 심지, 빈 접시에 남겨진 얼룩, 뭉개진 칫솔, 끈 풀린 속옷가지// 벌써부터 영원에 홀려버린 엽서들은, 맥박이 마구 뛰면서 날아가려고 파닥여서 물에 불은 커다란 우표로 눌러두었지, 그때에 톡, 톡, 이교도의 손가락이 아프게 내 가슴골을 노크했어,// 두 번의 충격으로 심박기가 출렁이고 눈에 비친 유리창 너머로 검은…… 얼굴이, 문자로 전송할 수 없는 사물과 신체들이 쌓여 있는 복도를 스쳐갔지,// 그게 너야?//

언젠가는 / 염창권
을숙도에선가 넌 내 입술에 이를 맞부딪쳤다,// "괜찮아요?" 서로가 센 목소리로 걱정한 뒤, 우리는 덜걱거리는 관절을 운반하듯이 새를 보러 갔다, 나이스 맨 나이스 걸, 통용될 수 없는 언어로 서로를 설득했다. 하류(下流)의 풀숲에 몰려있는 페트병들, 밀집된 공기가 붕붕 공중을 떠다녔다, 아름다운 당신, 닿지 못했던 우리의 퀸, 먹먹한 뇌성이 지나간 듯 귀 어두운//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그 기억들 속에서//

밤의 전설 / 염창권
한 여자의 그늘 밑에 여름이 머물렀다/ 못물엔 침례 중인 길이 여럿 떠올랐다/ 나무는 몸을 뒤집어 물의 집을 다 지었다// 숲에 든 어둠이 슬슬 몸을 가려주던 날/ 밤안개 빗장 풀고 뭉텅뭉텅 밀려들었다/ 몸 안에 기르던 달빛이 큰 똬리를 틀었다// 눈 감으면 붉은 혀 꿈틀꿈틀 살아나서/ 생피 쏟는 성냥처럼 몸빛이 반짝거렸다/ 익명의 어둠이었다, 가지가 툭 부러졌다//

밤의 목소리 / 염창권
경희궁 후원으로 행차하다가/ 낭하 밑에 잠자코 섰던 것은/ 어둠 속에 뚜렷이 배기는/ 너의 그림자를 어루만지고자 함이다/ 미리내 깊은 물을 퍼 올릴 /듯 두 손바닥을 어둔 물속에 담가둔다/ 너울대는 달빛이 추녀 위의 기왓장을 어루만지는 시간/ 돌 밑에 깔려 파닥인다 간신히/ 얼굴 내미는 그 목소리/ 우물가에 앉아 천지간 흘러넘치는 물소리로/ 날 것인 몸 씻는/ 두꺼운 팔뚝과 그 억센 어깨 밑으로 유선이 흐르고/ 끝내 마르지 않을 우물에 대고/ 귀신을 불러낼 듯 귀엣말로 속삭이는/ 밤 그늘 아래, 치렁한 별빛을 끌고 와 퍼질러 앉은 채/ 소스라치는 너,/ 무수리// 그 깊은 우물에 띄운 얼굴/ 불복하니, 나/ 일월오봉에 네 목소리 가득하다//

오후의 시차 / 염창권
오후에 걸었다, 아직 일과 전이었고/ 시차를 읽어가듯이 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잠복된 척후병의 눈빛이/ 내 안에서 날 겨눴다// 구시가지는 총 맞은 표정으로 쓰러졌다/ 마스크를 쓴 형해(形骸)가 크게 구멍을 파고 있다/ 추렴한 영수증처럼 눈앞이 희다, 또 붉다// 새 몇 마리 낟알을 쪼고 있다, 딱딱한/ 바닥에 부리가 조이 닿는다, 그 기세로/ 피 묻은 온도가 오른다, 볕 그늘이 성글다.//

물소가죽 소파 / 염창권
1./ 에티오피아 초원을 지날 때/ 검은 햇살이 따갑게 쏘여왔다/ 늘어진 생활의 진자 같은 순환의 길에서/ 물소 떼들이 강을 찾아서 몰려간다/ 나는 불어오는 먼지 속에서/ 허옇게 바랜 입술 축이려고/ 날카로운 혀를 내밀었다/ 강물이 내 발밑에서 맴돌았다/ 이때 좌우로 출렁이던 시간의 피부가/ 물소가죽처럼 두꺼워졌던 것이다/ 햇살은 얇은 박막처럼 벗겨지면서/ 붉은 휘장을 드리운다/ 태양 마주하고 눈을 감으면/ 결국 암흑의 본질이 붉다는 것을/ 역으로 붉게 솟구치는 것들의/ 뇌수 속에 암흑이 깊히 박혀 있다는 것을/ 찬란 저쪽을 차단하듯 남루와 비굴이/ 늘어진 살갗처럼 출렁이고 있음을/ 솔직히 고백하듯,/ 전봇대 쪽 골목을 향해 하루가 저물어 간다/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그 골목을 등지고 걷는다/ 캄캄히 저물어 가는/ 등 뒤의 집은 붉다.//
2./ 아내가 놓아둔/ 물소가죽 소파 위에서/ 고질적인 음주 후 공기의 순환을 견디며/ 잠을 잔다 내 콧구멍 속으로/ 물소 한 마리가 들락거린다/ 유월의 태양이 내 등 뒤에서/ 붉게 버무려지고 있다/ 내 잠은 점차 딱딱하게 발기하면서/ 건기의 황량을 견딘다/ 꿈의 지평을 넘어서면 물 없는 사막이다/ 등가죽을 타고 검은 햇살이 흘러내리면서/ 지도에 없는 유적지를 물소 떼가 지나고 있다/ 그곳에서 뼈 없는 내 잠이/ 한 장 박막처럼 벗겨지면서/ 하얗게 말라붙는다// 내 등을 타고 걸어가는/ 물소 한 마리/ 모래 언덕길이 푹푹 패인다.//

선사시대의 시인을 기억함 / 염창권
괴로웠을 것이다, 큰 돌 하나가 끌려가는 동안/ 무모했던 부족장을 위한 추도사 한 구절을 위해// 혓바늘 돋아난 붉은 입으로/ 저 너머를 말해 보려고...// 그러나, 그가 불러들이는 구름과 천둥은 메말라 있어/ 부족들은 그를 나무에 매달아 두었을 것이다.// 어둠을 파먹으러 새 한 마리/ 날아들었을 것이다.//

나무경(經) / 염창권
나무에 새겨진/ 마음의 갈피를 짐작한다./ 흘러가는 것들/ 나부끼는 것들/ 햇살과 모래의 길들/ 퇴적된 시간의 강에서/ 나무들이 자란다.// 봄바람에 속곳 풀어헤치는/ 연둣빛 이파리이다가/ 물빛 밤을 어루어보는/ 뉘우침의 바람이었다가/ 시간의 늪을 지나면/ 감겨오는 나이테.// 메마른 허공 향해 여린 가지 내밀 듯/ 공기의 층층마다 꽃봉오리 피워 올리듯/ 공중에 연등을 내걸면/ 사람도 나무가 된다.//

운천리 길 / 염창권
1// 고향이 그리운 노인들 운천리에 모여 산다/ 삶은 늘 깃이 짧아 겹겹으로 껴입은 속옷들/ 고스란히 드러내보이지만/ 가슴 속을 흐르는 고향 생각만은/ 꼭꼭 여미며 산다.// 함석지붕에 나무들이/ 자꾸 손가락을 다치는 입동 무렵/ 군장을 꾸린 아침 행렬을 보며 노인들은/ 담벽에 붙어 모락모락 하얀 안개꽃을/ 피워 올리거나 떠나온 마을 이야기로/ 잠시 마음이 산란해지기도 한다/ 민통선을 건너온 바람의 기별에/ 길 이쪽과 저쪽에 늘어선 하얀 억새꽃이/ 무시로 흔들리며 휘어지는데/ 대체 마음 어느 깊은 곳을 강물이 흐르기에/ 사람들은 저마다 조그만 안개를/ 피워올리는 것일까/ 강물 끝을 따라가 보는 것일까/ 싸늘한 아침 빛이 나무들의 어깨를 돌아/ 행렬의 입입마다 하얗게 부서질 때/ 길은 강을 이루며 흘러가고 있으니/ 운천리를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 이야기들/ 문해리 자일리 옹기종기 마을을 이루며/ 길을 트고 있으니// 보육원을 빠져나온 아이가 망연히/ 사병들의 행렬을 바라볼 때 소매깃을/ 빠져나온 내복이 시린 손등을 덮어줄 때/ 쇠붙이처럼 희고 단단한 운천의 하늘에/ 조그만 입김의 안개를 보탠다.//
2// 삼팔교 난간 밑으로/ 어둑히 풀리는 한탄강을 건너/ 여전히 사병 혼자 집총 차렷 자세인/ 검문소를 지나면/ 그곳에 운천리로 가는 길이 있다./ 한떼의 눈발이 퍼붓다가 문득 고요해지면/ 그만큼 길은 더 쓸쓸히 깊어가고/ 들판은 희고 검게 덮인 잔설로 딱딱하게 굳어/ 오래도록 녹지 않는다/ 대공포 사격 소리에 놀라 흩뿌리듯 날아가는 텃새들/ 나무는 자꾸 손을 다치고/ 캐터필러 발자국이 움켜쥐고 있는 불임의 세월들/ 나무는 자꾸 발이 아프고/ 길을 따라 걷는 노인들 걷다가 잠깐 서 있다가/ 지치면 길 밖으로 나와 그들의 길을 벗어들고/ 살아온 나날만큼 막막히 나무에 기대어/ 쓰디쓴 한 모금의 안개를 피워 물 때/ 누군들 가슴 속 뜨거운 강물이 넘쳐 흐르지 않으랴/ 누군들 함께 섞여 어디론가 가야 할 곳으로/ 흘러가지 않으랴// 노인들 운천리에 모여 살고 운천리 가슴속에/ 깊고 그윽한 강물 하나 가꾸며 산다/ 서로의 뿌리를 잇대고 산다//

습관성 이별 / 염창권
꽂아놓은 꽃에서 홍어 삭힌 냄새가 났다/ 가까이 둔 죽음처럼 시간이 시들거렸다/ 붉은 입, 곳곳에 피어 무섭고도 유독有毒했다.//

마른 갈대에 내리는 비 / 염창권
유리창 안쪽에서 날 내다보고 있었다/ 그 사람의 눈 속에서 걸어가다 나왔을 때/ 천변의 살얼음 낀 곳에 그 얼굴이 어른댔다// 물가에 선 갈대군락의 발목이 거뭇했다/ 노인처럼 한쪽으로 낮고 길게 휘어졌다/ 무거운 빗줄기 속에서 무언가를 기다리며,//

꽁초 / 염창권
갈증을 그어대는 입술에 핀 불의 혀/ 까맣게 타들어간 자학의 연기 속에/ 자꾸만 짧아지는 길, 그 갓길에 팽개친// 씹다버린 껌처럼 달라붙는 생업의 몸/ 질겅질겅 밟아대는 맨바닥에 엎드려서/ 끝끝내 증언하듯이 노려보는 표정들// 공평한 보상체계는 세상사엔 없는 거라/ 거두어줄 손길 없는 노여움을 삭이면서/ 저기 저, 가문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가.//

한 줌 / 염창권
가문 햇살 비껴가던 시멘트벽에 씨 맺혔다/ 흙먼지 모아 뿌리박고 퍼질러 앉았던 곳/ 겨우내 시든 풀줄기가 허리 굽은 장모 같다// 쪽방에 세든 몸들이 이불깃을 당기면서/ 이곳 너무 좁다고 이사 갈 곳 찾아보자고/ 담 벽을 기어오르다가 엉성하게 말라붙은// 그 입들이 차가워진 겨울을 다 넘긴 뒤에/ 눅눅해진 몸 허물어 먼지의 품 넓혀가며/ 너희가 깃들 방이야, 뿌리를 내려 봐.//

숨 / 염창권
빙판길을 걸어가다 큰 물확을 만났다// 축축하게 젖어 있는 강의 입술, 우물이다/ 밤새워 달려온 강물이 가쁜 숨을 쿨럭인다// 숨결마다 달려드는 눈보라 속 헤맬 때/ 자욱한 물소리로 천지간에 떠 있다가/ 흉통을 딛고 솟구치는/ 치사량의 기억들!// 숨 돌리며 강안을 휘감는 흰 입김의 늪/ 허공에 뜬 네 얼굴이 차고 맑게 일렁인다// 온혈의 이 거듭된 호흡./ 홈 깊어진 상처다.//

이 거리의 쓸쓸함을 말하지 않기로 했다 / 염창권
이 길을 걸어간 사람을 알지 못한다/ 이 순간의 행적도 곧 단서 없이 사라질 것/ 그 꽃이 상했는지 어떤지, 나밖에는 모른다// 길이 가진 내부의 문제와 무관심을/ 탁, 탁, 소리를 반사하는 신경증을/ 견디며 걷고 있을 때 반향 되어 떠도는 것// 수소문한 그 꽃이 날 기다리다 저물어도/ 내 미처 닿기 전에 떠난 뒤라 할 것이니/ 비껴간 햇살 뒤쪽이 더 어둡다 할지라도,//

존중받지 못한 죽음 / 염창권
수용소의 유대인이 울먹이며 땅을 팠다/ 발밑에서 흔들리는 죽음을 퍼 올리다가/ 이름이 지워진 채로 그 구덩이에 묻혔다// 잘려나간 길의 꼬리가 벌떡벌떡 일어설 때/ 불운이 날 겨눈다면 흙바닥을 뒹굴겠지만/ 난 어떤 무덤 지으려고 지금껏 살아왔을까// 내 죽음을 존중받고 또 은폐를 위해서도/ 내가 파낼 구덩이는 그리 크지도 않을 터/ 매장된 번호표 찾아, 빛 없는 길 따라서//

밥 먹는 시간 / 염창권
으깨어진 감자알을 위장 속에 넣는다/ 별거 뒤의 긴 시간을 괄호 속에 넣는다/ 식탁에 시체가 쌓인다, 생생한 날것이다// 내 앞에 피와 살이 담겨진 그릇이 있다/ 언젠가는 똥오줌 엎질러질 그릇이 있다/ 성聖 식사, 세 번씩 죽는 베드로의 무덤이다//

간판 ㅡ여행자의 골목 1 / 염창권
낯선 말이 내부에 침투하기 시작했다./ 부음이라도 받은 듯한 명조도착의 거리였다/ 침울한 간판 밑에서 쇠 냄새를 맡았다// 성당 옆 편의점은 24시간 점멸 중이다/ 필기체는 쥐꼬리만 한 뒷맛으로 남았고/ 묵중한 고덕체 문은 완강하게 거부했다// 길바닥을 구르는 신문 쪼가리 같은 날들/ 스튜디오 “Who am I” 네온 빛 너머에는/ 해독이 정지된 언어로 어제들이 걸려 있다//

맨홀 ㅡ여행자의 골목 2 / 염창권
점액질이 흐르는 도시의 하복부에서// 얼굴 하나 갓 솟은 꽃처럼 떠올랐다, 지하 관을 따라가다 모서리를 잃었는지 길바닥을 굴러가는 바퀴처럼 위태했다. 생애의 자궁 속으로 울음을 쏟아붓는// 구멍을 매달고 있는 검은 꽃잎, 입술들//

철제 난간 ㅡ여행자의 골목 3 / 염창권
트랩에 오르기도 전, 후각이 다녀갔다/ 은회색의 감촉이 손바닥을 스쳐간 듯/ 뭉뭉한 젖비린내였다. 그리웠던 낯선 몸의// 계단 밑에 공복이 벌겋게 꽃피었다/ 다 닳은 몸에서 짜낸 혈액의 성분으로/ 일몰이 흩뿌려졌고, 저물은 곧 어두웠다// 영혼을 투과하는 툰드라의 바람 같은/ 쇠 냄새를 맡은 건 네 가파른 몸에서였다/ 비탈진 몸을 숙이고, 너를 앓는 밤이다//

영안반점 / 염창권
비에 젖은 꽃잎들이 낙진처럼 흐려져서/ 입간판을 흔들며 계절풍에 쓸려갈 때/ 밀반죽 치대는 주방에 기름 솥이 끓는다// 주린 창자 꾸불꾸불 채워가는 창밖에는/ 꽃 진 허공 자리마다 손자국이 남아 있어/ 떠나간 널 기억하며 눈시울이 젖는다// 널 향해 다가선 길 문득 끊겨 아득할 때/ 하룻밤 묵어가는 영화관 골목에 핀/ 영안의 깊은 허공 향한, 점멸(點滅)의 꽃잎들!//

연립주택 / 염창권
날 길어져 아직 밝다/ 저분에겐 차마 눈길 주지 못 하겠다/ 환영이라도 씌운 듯/ 흰 상여, 꽃길을 따라가는데/ 종이꽃 우수수 바람에 휩싸여 간다/ 그 주렴 걷어 올리면,/ 구개부 뒤쪽으로 조음이 몰리던 그는/ 평안도 방언에다/ 늘그막에는 말도 좀 새고 왼쪽을 절었다/ 한 지붕 아래서/ 외지인끼리 이름을 모르니 죽도록 익명이다/ 필생은 불과/ 몇 사람에게만 허락될 터인데/ 그중 하나가/ 뜰에서 비탈로 비탈에서 뜰로 옮겨가며/ 위층에다 대고 무어라 소리친다/ 연립,/ 나란히 서거나 층을 두더라도 경계는 분명하다/ 허나, 세상일에 어중간한 지점이 있다/ 이웃들! 이번 일에서 보듯/ 한 보이는 곳에서 손을 붙잡고 있다/ 그걸 알았는지/ 길옆 번지 하늘색 지붕이/ 아래층 위층을 합하여 꼭 끌어안는다.//

그릇 / 염창권
무덤 속에 그름을 넣어둔 건/ 가는 길에 누굴 만나거든/ 물과 곡식과 고기를 나누어/ 먹고 마시라는 뜻이니// 분화구 같은 이 사발 속엔/ 오랜 침묵의 행로가 담겨 있네/ 사랑에는 늘상,/ 허기지는 날이 많아서/ 서로 만나 어루만질 때조차/ 갈증이 치미는 것// 저승길에/ 덜 춥고 배부르더라도/ 이 접시를 깨지는 말게// 노을 문에는/ 외젓가락빗장이 걸려 있으니/ 접시 위에/ 그대 눈물 올려놓게나//

거미줄 / 염창권
장마 그친 뒤/ 이파리와 이파리 사이/ 가지와 가지 사이/ 실비단 손수건 하나 걸려 있다.// 바람이 그 허공을 들여다보며 펄럭거린다./ 햇살이 은빛 천 위에 부서지며 땀을 닦는다./ 그가 번지점프를 하듯 허공을 건널 때/ 바람의 실낱같은 희망이 풀려 나오면서/ 직선으로 대각선으로 때로는 타원형으로/ 몸을 겹치거나 만나거나 이윽고 헤어지며 짜올린 덫./ 그 덫에 내가 갇혀서 허우적거리며 거미를 기다린다./ 허공에 길을 이어가는 것만이/ 유일한 삶의 방식이라 주장하는 거미의 행적/ 저 부유스런 꿈의 파동들.// 청명하게 엇갈린 햇살 틈으로/ 바람의 맨발이 넘나들고/ 풀려 나온 꿈의 입자들은 가볍기만 하다./ 어느덧 끈적이다가 낡아버린 꿈의 실꾸리를/ 이제는 거두어들일 수 없다./ 햇살 속에서 곱게 삭아갈 것이다.//

거미집 / 염창권
저 아주머니,/ 허공에 거미집을 지었다/ 시든 배춧잎 같은 발자국들이/ 황망하게 돌아서는/ 말바우 시장의 파장 무렵/ 성글게 비어져 나와/ 허공에 걸리는 머리카락들/ 고무밴드를 입술에 지그시 물고/ 갈퀴처럼 손가락으로 훑어 내리면서/ 파마 기운 풀린 머리칼을 헤치자/ 가는 을 가닥 가닥마다 석양빛이 걸린다/ 철사보다 강하게/ 허공을 버팅기는 저 생활의 근력들,/ 허공이 거미줄에 걸려 버등거린다/ 부유하는 시간들이/ 눈쩔미 곱게 내려앉는다/ 그 기운을 알아채기라도 하듯/ 고무밴드로 후려잡아 질끈 동인다/ 그러나 머리에 인 함지박 밑으로/ 짧게 비어져 나온 머리칼이 있어/ 역광으로 희게 부서진다/ 함께 동여 버릴 수 없는 것들이/ 마침내 바람 속에 몸을 부실 때는/ 눈이 시리다/ 내 동창이었던 여자,/ 전봇대 쪽 골목을 돌아가서//

하루 / 염창권
뒷집 마당에/ 검은 구덩이 새로 패였다// 줄을 서서 배웅하던 나무들/ 말을 잃고 묵묵히 젖은 산그늘을 끌어 덮었다// 담벼락에 나란히 기댄 의자들도/ 햇볕에 졸던 한쪽 귀를 벌써 어둠에 묻었다// 굴뚝에서 거먼 길이/ 흘러나올 때/ 다리를 저는 그림자가 잠깐 다녀간 듯// 우물가에 체인이 벗겨진 자전거,/ 녹슬어서// 여기까지 온 것만도 애쓴 거라고/ 눈두덩이 부은 저녁이/ 길가에 한참 서 있다가 들어갔다//

논어論語 / 염창권
말의 가시를 뽑으려다/ 가시에 찔렸다/ 말로 인해 몸이 아프다/ 내 살 속에서 네가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아프니 너 또한 아프지 않은가/ 바늘 같은 가시 둘을 나란히 놓아둔다/ 아프지 않는 말은 인하지 않다는 듯,/ 가시를 견디려면/ 아프게 이야기해야 한다// 네가 준 말을/ 살 속에 깊이 묻어둔다//

아픈 것들 / 염창권
벽에 기댄 손수레에 이른 눈발 붐비고/ 개집 앞 빈 그릇이 허공을 핥아댈 때/ 로드 킬 자국 아래로 살얼음이 스민다// 꼬깃꼬깃 접힌 지폐 그 헐한 마음으로/ 손에 쥐어 당부하며 건네 준 찻삯 같은/ 후두둑 눈물 떨구며 그 온기로 전하는,// 흘러가는 것이 어찌 들판의 강물뿐일까/ 인파의 거리에서 끈 잘린 부표처럼/ 점점이 섬으로 떠서 쓸려가는 몸짓들// 피라미 떼 지나간 물너울에 띄운 얼굴/ 서리 물든 풀잎처럼 서글피 저문 밤엔/ 흰 입김 피워 올리는 강물 곁에 눕는다//

늪 / 염창권
저, 고요의 흡반 둘레를 쩔쩔매고 있는데,/ 그 소요를 짐작하듯 입술 파문 번지며 물낯 위에 깔아놓은 연잎방석 들썩인다. 벌건 대낮에 진홍꽃잎 자명하듯 뗏목 아랜 첩첩한 허방의 길 걸린다. 살비듬이 가라앉은 생애의 저수장에 물색없는 기다림만 퇴적된 채 못물 밀린다. 배롱 꽃이 봄유 건너 자맥질 하는 중에 부들 창포 줄기가 빳빳이 일어선다/ 곁에서 널 생각하다가 수련꽃 핀다/ 울컥 진다//

언덕 ㅡ비어 있는 병을 위하여 8 / 염창권
창밖엔 시린 바람의 속살조차 투명하다/ 지난날을 생각하면/ 물무늬 지는 생의 언덕// 억새꽃/ 흰 목수건 풀고/ 언덕을 넘어간다//

빈집 ㅡ비어 있는 병을 위하여 9 / 염창권
바람이 깃들면 빈집도 사람답다/ 영혼의 어귀마다/ 숨결 묵힌 이야기들// 길옆에 웅크리고 앉은/ 저 늙은 기억의 숲//

구월의 저녁 / 염창권
이제 저녁을 노래할 때가 되었다.// 지나간 일들은 결코 멈춤 없이 흘러가서/ 하늘 끝에 가 닿는다./ 세월의 강을 훌쩍 건너간 이들의/ 손사래도 함께 노을빛으로 퍼진다/ 강물과 바람은 부지런한 우체부처럼/ 쉬지도 않고 지상의 온갖 일들을 실어가서/ 저 노을 물든 하늘가에다 새롭게 펼쳐 놓는다/ 저물어 가는 마음은 길을 따라 이어지고/ 전선 위에는 노을의 눈시울이 내려앉아/ 한 순간의 광휘로 허공의 강을 놓는다/ 나는 저녁 안개가 피어오를 때를 기다려/ 숲 사이로 난 길을 걸으면서/ 이파리들이 길어 올리는/ 강물소리를 받아 적는다/ 무엇보다도 구월의 하루를 지나면/ 물빛이 투명해지기 시작해서/ 강물의 처소에 깃들인 물고기들의/ 꿈까지 얼핏 들여다보인다/ 그 물빛 나날의 갈피에 섞여드는/ 새 몇 마리 허술한 날개를 펄럭이며/ 미루나무 숲으로 날아들어/ 하루의 소식을 펼쳐놓는다// 저물녘이면 지상의 사물들이/ 조금씩 자리를 옮겨 앉는다.//

11월 / 염창권
그림자를 앞세우는 날들이 잦아졌다/ 캄캄한 지층으로 몰려가는 가랑잎들/ 골목엔 눈자위 검은 등불 하나 켜진다/ 잎 다 지운 느티나무 그 밑둥에 기대면/ 쓸쓸히 저물어간 이번 생의 전언이듯/ 어둔 밤 몸 뒤척이는 강물소리 들린다/ 몸 아픈 것들이 짚더미에 불 지피며/ 뚜렷이 드러난 제 갈비뼈 만져볼 때/ 맨발로 걷는 하늘엔 그믐달이 돋는다/ 젖 물릴 듯 다가오는 이 무형의 느낌은/ 흰 손으로 덥석 안아 날 데려갈 그것은/ 아마도, 오기로 하면 이맘쯤일 것이다//

잉크 / 염창권
시간의 몰약 같은 강물 빛이 고여 있다.// 흡혈의 영혼들이 쓰러져 누운/ 저탄장貯炭場에// 네 혀는 검고 말라서, 수유는 길고 진해서//

구술(口述) / 염창권
닭이 알 낳을 때/ 항문을 몇 차례 주억거리듯이/ 말을 낳으려고/ 입술주름 몇 가닥 채 일어선다// 뭉뭉하고 통통한/ 말마디/ 어르듯 감싸고 조였다가/ 밀어내며 떨구면// 자의식의 투명한 관을/ 뛰쳐나와/ 첨벙,/ 물낮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자맥질하는/ 말!// 자궁이 헐어서/ 잠시 앉았다 가는 입이여// 그 자리, 텅 비어 있다.//

강물에 뜬 페트병은 어디로 갔을까 / 염창권
비어 있는 것들/ 빡빡하게 밀집되지 못한 것들/ 힘을 잃고 갑자기 주글주글해지면서 작아지는 것들/ 깔깔거리는 소녀들의 치기어린 배웅으로 얼굴이 얻어터지면서/ 발기불능의 침을 뱉듯 강물에 던져진다/ 겉껍질뿐인 저 페트병은 어디로 흘러서 가는 것일까/ 내부엔 공허를 가득 채웠으니/ 출렁이며 이동하는 외부의 밀집성과의 가혹한 단절!/ 표류하면서도 제 무게에 의해 가라앉지 못할/ 결코 풀어버릴 수 없는/ 치밀한 속박,//

무중력의 시 / 염창권
무개념의 사색을 하던/ 풀잠자리 한 마리/ 날아가다가 급선회 하는 모니터 안에서/ 갑자기 빗방울의 세례 퍼붓고/ 천의 눈망울을 굴려서 일제히 반사시키는/ 월인천강의 물방울들 혹은 숫자의 반짝임/ 이처럼 아주 작고 둥근 시야의 세계에서/ 저 어린 것들을/ 아래로 아래로 흘러가게 하여/ 낮은 것들이 더욱 낮아져서/ 겸손히 무릎 꿇게 하는/ 하오의 시간/ 그리고 화면 뒤쪽의 수식數式들// 지상 중력이 미치지 않는 가상공간에서/ 상처 난 것들이 마구 떨어져 쌓이면서/ 상처가 상처를 으깨고 짓이기는/ 낙화만발의 중력장/ 이윽고 검은 손들이 서서히 들려 올라오면서/ 검은색 바탕의 화면을 부수어갈 때/ 문득,/ 그 검은 손들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규약/ 혹은 그와 같은 수식에 의해/ 수면유도제를 투약 받는/ 풀잠자리 떼.//

가구의 현존 / 염창권
그녀 곁에서 오려붙인 가구처럼 잠자코 있었다/ 호들갑 속에 결말이 삼십분이나 지연되었던/ 전화를 끊고 장부를 덮을 때까지// 눈짓으로 방향을 가리킬 때/ 앉아야할 듯 말아야할 듯 엉거주춤한 가구를 향해/ 턱으로 다시 한 번 신호를 보낼 때// 아직 낯설기만 한 그녀가/ 이런 방식으로/ 가구에게 말을 걸어오다니!// 친밀하게 혹은 엉큼한 손가락으로/ <가구의 지퍼>라는 질적인 상징을 사용한다 해도/ 가구의 자존은 크게 상처를 받았다// 은폐된 상처를 껴입기 위해/ 마취제처럼 흡입력 있는 새로운 공기가 필요하다/ 순간, 멱살을 잡아채듯 달려와/ 거만해진 손가락으로 가구의 문을 따고/ 입방체 안으로 쏘옥 들어가는/ 그녀의 활기찬 용적률// 차단된 구석으로 쫓겨난 채/ 낯설어진 그녀의 문고리를 붙잡고/ 틈입을 망설이는 가구의 현존.//

단백질의 촉감 / 염창권
탄력 있게 움직이는 돼지 뒷다리를 잡았을 때/ 버둥거리면서 비명을 질러댔던 것인데/ 그의 단백질 구조층에 신경섬유가 박혀 있어서/ 절명의 신호를 보냈기 때문이야// 너의 손을 잡으려다 그만 둔 것은/ 네 신호 체계를 해독하려 골몰하는 중에/ 시지각視知覺만으로 네 단백질의 촉감을/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야/ 네가 분장하듯 얼굴을 두껍게 발라/ 시지각의 침투를 고의적으로 방해한 것처럼/ 자꾸 얼굴을 돌리고 싶은 것은/ 내 느낌을 은폐하기 위한 것이었어// 팬에 올린 살코기를 가위로 자르는/ 네 손목이 나를 향해 아름답게 물결치고 있으니/ 커다란 플라스틱 통처럼 네 앞에 앉아/ 나의 밀집된 체중을 채우기도 하지만/ 우리의 단백질 구조층에 은밀히/ 신경 섬유가 닿아서 서로 감각한다는 걸/ 혹은 부정의 징후를/ 네가 알아차린다면 말이지…….//

정부미 / 염창권
정부미를 담았던 쌀부대가/ 구석지에 개켜져 있다/ 그 안에서 조금씩 허공이 허물어지며/ 눅어가던 세월이 있다/ 그걸 손가락셈으로 헤아려보던 날들이 많았다/ 속엣 걸 뒤집어 털어내면/ 몇 톨의 낟알이 튕겨져 나왔다/ 거 봐-/ 실밥 틈에 아직 몇 개는 박혀 있으므로/ 완전히 빈 것이 아니라는 듯,/ 허기진 손바닥을 모으듯/ 허공 귀퉁이를 부여잡던 세월이었다/ 아주 말라서/ 부풀려 먹을 수 있는 시간들/ 밥에서 눅진 땀 냄새가 나던/ 정부미-/ 해갈하듯 위장을 급히 채우다가/ 널 향해 잠시 웃기도 했던//

환벽당(環璧堂) / 염창권
그리움이 때로 힘이 된다면/ 나는 너를 그리워할 수 있겠다./ 캄캄한 절망뿐인 푸른 감옥을 건너/ 누덕누덕 기운 세상 쪽으로/ 한 사람이 걸어간다./ 그는 저 푸른 잎으로부터 걸어나왔을 것이다./ 널빤지를 잘라 마룻장을 놓고/ 세상의 이욕으로 훈습된 기왓장도 올리며/ 손 차양을 하고 미래의 평안을 내다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누덕진 몸을 이끌고/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는 중이다./ 그 누추한 정신이 나를 황홀하게 물들인다./ 그는 이제 나에게 누워 푸른 감옥 속에 갇힌다./ 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것은/ 싸늘한 마룻장 위에 온몸을/ 펼쳐 보이는 것만큼 서글픈 일이다./ 이제 그는 나로부터 빠져나갈 수가 없다./ 두 팔을 펴서 등을 기대고/ 멀리 허공을 응시한 채로/ 이 푸른 감옥의 주인이 된다./ 내가 너를 그리워하듯/ 그도 또한 허기 가득한/ 푸른 허공을 들여다보고 있다.//

증심사 가는 길 / 염창권
산밭에 묻어둔 수저 한 벌/ 배고플까,/ 비탈진 생각은 저문 강을 다 건넜다 /네 간 곳, 차마 묻지 못한다/ 찬 빗돌을 올려준다/ 돌을 쪼아 탑이나 부도를 세운 곳은/ 그 중심에 고요의 심지가 꽂혀 있다/ 흰 실을 붙들고 피는 꽃/ 젖은 몸이 뜨겁다/ 너라는 절 하나를 마음속에 지은 뒤로/ 시들지 않는 꽃이나 죄가 자꾸 피었다/ 오후의 불티 속에서/ 증심證心에 핀, 꽃잎들!//

슬픈 부도(浮屠) / 염창권
세월을 견디는 몸짓으로/ 침묵만한 것이 없음을 알겠다/ 연꽃 무늬 위에 커다란 마침표로 앉아 있는/ 부도 한 점/ 나뭇잎들은 떨어져 쌓인 후/ 얼마나 빨리 부패의 길을 건너갔던가/ 사람들은 또 얼마나 손쉽게 늙어갔던가/ 사실 그리움이란 이미 시들어버린 나뭇잎과 같은 것이다./ 응혈진 살덩이가 사리 한 과 빚는가 싶었으나/ 그대를 좇다가 바위에 부딪쳐 부서진/ 무릎뼈 한 조각 육신 속에 닳고닳다가/ 희고 동그란 마침표 하나 만드는 것을/ 정신이나 영혼은 우리가 배웠던 부도附圖 책과 같아서/ 살덩이를 따라가면서 너무나 쉽사리 흐무러져버리네/ 살 떨리던 그대와의 입맞춤/ 허파꽈리까지 온통 초록빛으로 반짝이던 그 순간은/ 해탈의 순간과도 같았을 것이나/ 그대 떠난 후 느낌은 오래지 않아 사라지고/ 메마르고 부르튼 입술만 남았다/ 버석이는 나뭇잎들이 바람에 쓸리는/ 가을 한나절,/ 탁 탁卓卓 정적을 때리며 밤톨이 떨어진다.//

목어(木魚) / 염창권
하늘을 날아가는 물고기를 바라본다/ 내장을 도려내고 텅 빈 채 맑아져서/ 바람의 결 따라 일구는 가슴 환한 물소리// 잠들지 않으려고 눈꺼풀을 떼어내도/ 책상 위에 머리 찧듯 닿지 못한 질문 앞에/ 하늘의 여울을 건너는 지느러미 보인다// 깃털조차 가라앉는 삼도내의 언덕에서/ 날개 잃은 종소리가 무성으로 흔들릴 때/ 무욕의 강 너머에서 눈을 뜨는 물고기//

간월도 / 염창권
살다 보면 그리움에 저당 잡힐 때가 있다/ 물들고 물들어서 올 길 갈 길 모두 끊고/ 달빛에 암자 한 채씩/ 지었다가 허물다가// 내 마음의 우기雨期 건너 첩첩하게 비 내린다/ 헝클어진 실타래를 밀썰물에 씻어 널고/ 그믐달 심지를 돋아/ 등을 켜는 삭망의 섬// 수평선을 끌어당겨 길을 막고 돌아서면/ 갈 길 모른 파도마저 돌려세운 부표의 닻/ 그 질긴 끈을 잘라내면/ 건너야 할 섬은 없다//

폐허의 내력 / 염창권
인부들이 건물의 타일벽을 벗겨내고/ 대리석으로 마감한다/ 이를테면 리모델링/ 시멘트 균열 사이의 쇳물자국을 덮는다/ 재생을 꿈꾸는 계단을 부산하게 오르내리며/ 건물의 틈에서 새어나오는/ 먼지와 녹 냄새를 맡는다// 학생시절 물건을 팔러 갔다가 퇴짜 맞고/ 계단 밖으로 물러선 뒤로/ 이곳을 지나칠 때마다 상처가 욱신거렸다/ 누추 다음으로 비참했던,/ 이십 수년 전에 이 거리를 떠난 뒤로/ 내 기억 속에 숨겨져 있던/ 폐허 한 채를 찾아 이제야 돌아왔다// ‘신사정장 바겐세일’ 현수막을/ 바람이 부풀리고 있는 한림모텔 사거리// 관절 부딪는 소리가 나는 문을 열고/ 사람들이 들어간다,/ 나온다,/ 몸에서 녹냄새가 난다.//

매미 / 염창권
그 여름이 오기전/ 나는 움트는 날개가 간지러워/ 땅속의 연한 흙들만 연신 축내고 있었다./ 나의 순한 발들은 자꾸만 꼼지락거리며/ 빗줄기가 쿵쾅거리며 뛰어가는 소리를 따라가고,/ 그러다가 그가 기다리고 있을 어느 가난한/ 지붕에서인지 발을 헛디딘 빗방울이 열꽃 핀/ 내 이마에 차갑게 떨어지기도 했다./ 나무의 실핏줄에서 길어온/ 강물 소리가 내 작은 창자와 큰창자를 돌아/ 보송한 솜털들을 부풀릴 때/ 한 잎 분량의 손바닥이 햇살로 내리며/ 나의 등을 따스하게 덮어주고 있었다./ 그 따스함이 전신을 그리움으로 물들이자/ 등에서는 그를 향한 작은 소망들이/ 연한 새 잎으로 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황홀한 햇살의 날에/ 내몸의 햇살조차 죄다 흘러나왔을 때/ 나는 가벼워진 몸으로 처음이자 마지막인/ 그를 위해 직조한 날개옷을 입고/ 그와 공명을 이루리라, 노래의 파장을 그으면서/ 그 여름을 지치도록 날아 올랐다.//

낭하(廊下) / 염창권
그녀는 그 여름의 날개를 책상 위에 올려 놓는다./ 백련사 뜰 앞 후박나무에 걸어놓고 간 날벌레의 옷 한 벌./ 조그만 머리핀 같은 여섯개의 다리가 매끄러운 유리 표면에서 기우뚱./ 날개의 하중을 받치고 있다./ 그녀의 손길이 스치자 마른 나뭇잎 처럼 날개의 한 켠이 소리 없이 부서진다./ 그여름의 낭하 끝으로..// 그녀는 천천히 나날들을 허물어뜨린다./ 오오, 숲속의 직녀여! 그가 불렀던 노래의 한 소절이 뜯겨진다.그녀는 기억 속에서 바스락거리는 그 일기를 부수어 낭하 밑으로 흩어지게 한다./ 그 여름의 갈피를 펼쳐 기울이자 그대여, 저 햇살 속, 둘이서,라는 어휘와 그의 입술이 주루룩 모래처럼 쏟아진다./ 그러나 그먼지는 흩어지면서 다시 그녀의 가슴에 쌓인다./ 그녀의 메마른 두 장 손바닥이 끝내 슬픔의 낭하인 입을 가리며,/ 우수수 흔들린다.//

강물이 숨을 쉰다 / 염창권
강물이 나직한 소리로/ 숨을 쉬고 있다.// 겨울이 한 자 두께로 얼음장을 깔아도/ 그 밑으로 깊이깊이 물줄기가 흘러간다/ 추운 날 손 입김을 불 듯/ 아침 강에서 안개가 피어오르는 곳이 있다/ 강이 정수리에/ 숨구멍 하나를 열어두기 때문이다/ 고래가 물구멍으로 물방울들을 내뿜듯/ 밤새 그 구멍으로/ 가쁜 숨을 돌려놓기 때문이다// 내 가슴 속을 흐르는 사람이 있다.//

강가에서 / 염창권
철 지난 가슴으로 강가에 나앉으면/ 갈대숲은 새 떼를 희게 날려 보내고/ 우리의 아픔은 끝내 물비늘로 저민다// 들판에 홀로 서서 낮은 하늘 바라보다/ 손사래 여는 눈빛 떠나가던 무딘 팔뚝/ 보인다, 강울음으로 일어서는 몸짓이// 밤의 끝엔 길눈 덮는 눈발이 몇 자나 될까/ 흰옷의 말씀으로 세상이 문득 밝는/ 기러기 무리져 내려 뉘여 보는 바람숲을// 굽 도는 마음마다 깊디깊은 흐름으로/ 이제는 돌아가서 돌아설 듯 멈추리라/ 동백꽃 붉은 가슴에 등불 켜는 그 목소리//

천변 풍경 / 염창권
물가에 앉아 있다가/ 자전거 한 대가 천천히 지나가는 걸 본다/ 그 뒤에 따라오던 것이 무찔러 간다/ 길이 낯설다/ 내 앞으로는 줄곧 무색의 냇물이 흘러가고 있다/ 내재된 것이 많은 무거운 물이 냇바닥을 짓누르며 흘러간다/ 턱수염처럼 듬성듬성 돋아난 억새와 갈대군락에서/ 눈이 침침한 굴뚝새 한 마리 솟구쳤다가 금방 가라앉는다/ 간판 집에서 얇은 함석이 부딪는 소리가 햇살을 찌르고 간다/ 물가에 오래 앉아 있는 것은 미친 짓이다/ 무색의 물 낯바닥에 속아서 발을 담그는 것도 미친 짓이다/ 이걸 분명히 알고 있는지 흉내 내는 사람은 없다/ 나는 할 수 없이 그만 두기로 한다/ 누군가는 다리 밑 안 보이는 곳에 박스 하나쯤은/ 찔러두었을지도 모른다/ 안쪽으로 부풀린 주름이 상처 난 것들을 완충할 때마다/ 빈 박스처럼 뻑뻑하게 접혀지는 나날들-/ 두엇 달리는 사람이 내 앞을 지나갔으나/ 근육과 심장 쪽으로 내면의 눈을 박았기에/ 그들의 눈에는 거울 같은 공허가 담겨져 있다/ 냇가에서 사람들이 살지 않는다/ 길이 낯설다/ 길에서 머무르지 않는다/ 지나간다//

입동 / 염창권
감잎 한 장에/ 만 평 적막이 깃들어 있다// 하늘길을 펄럭이며/ 기러기 날아와 등짐을 벗을 때까지/ 허공은 그걸 받아주려고/ 아래쪽 날줄을 팽팽히 잡아당길 것이다// 나무가 매달았던 눅눅한 손자국들/ 우수수 바람에 쏠리며/ 서리 빗겨간 지상의 길을 동무 삼는다// 흰 이마에 햇살 머물다 가듯/ 감잎 떨어져 누운 자리/ 밝다./ 그 온기에 잠시 손을 쬐어본다//

호두껍질 속의 별 / 염창권
껍질 속은 굴곡이 많은 별빛으로 채워졌다/ 빡빡한 뇌수처럼 생은 좀체 휴식이 없다/ 별빛을 헤아려 본다/ 부유하는 먼지 같은…,// 우주는 딱딱한 두개골처럼 소리가 난다/ 반짝이는 머리통 속 질량은 충분하다/ 욕정의 신호나 되듯/ 은밀한 느낌이다.// 금기의 강이 있다, 건너지 못하는/ 미확인의 진실이지만/ 그들은 서로 잇닿아 있다/ 별들도 사랑을 나눈다/ 눈빛을 보면 안다.// 호두껍질을 두드려서 잠든 별을 깨운다/ 기억의 숲 속으로 번개가 지나가듯/ 어둠이 파동 치며 긁힌다/ ​이젠 추억의 힘이다//

감 잎 / 염창권
하늘 접시에 담겨진 감잎이 불타고 있다/ 가을 들판 한 채가 조용히 기울고 있다/ 적막한 마음의 길들 슬픔을 견디고 있다// 이슥한 햇살 틈으로만 걸어오는 그대여/ 가을은 한 올 한 올 바람을 쓸어넘기네/ 無明의 등불을 걸어 그대 발길 비추네// 감잎은 떨어져서 지상에놓인다/ 나무들은 따뜻한 가로등을 매달고 있어/ 처음인 저 몸짓을 보고/ 말을 건넨다/ 고요한 빛//

제라늄 / 염창권
후각이 발달한 저 여자의 몸에는/ 푸르게 덧칠된 시간들이 고여 있다/ 뼈마디 툭툭 분질러 꽂아두면 꽃 피운다// 가문 땅에 발목 묻고 꽃대를 밀어 올려/ 성치 않은 뿌리로도 홍어맛을 쟁인다/ 살 냄새 맡은 것처럼/ 아려오는 이 독성// 기다려온 시간만큼 푸석하게 피워낸 꽃/ 마른 침을 삼키면서 탐조들을 밝힐 때/ 네 몸이 우려내는 향은,/ 한 종지의 달인 피.//

망초꽃 / 염창권
흰 꽃잎, 조금씩 장맛비에 비벼졌다/ 허공에 버무려진 가늘게 핀 슬픔들/ 어렴풋 기척이 있어/ 귀 모은다. 멀리서....// 첩첩한 페이지 속 길이 문득 일어서면/ 흙 묻은 신을 신고 떠나는 이 보인다/ 앉았다 떠난 자리에 두고 간,/ 흰 손들!//

복사꽃 지고 / 염창권
복사꽃 지고 새가 울더라/ 이제 곧 지나가버릴 사십 줄이니/ 하냥 짧은 봄날이 지나면/ 열매 맺히겠네 새 울겠네/ 열매 맺혀도 새가 울어도/ 해 지고 바람 불었다 그친 뒤/ 뭉게뭉게 여름 오면 뭘 하나/ 분홍빛 연등 달면 뭘 하나/ 달랑달랑 내걸기만 하면 뭘 하나/ 고와도 너무 고운 복사꽃 지는데/ 열매 맺히면 뭘 하나 뭘 하나/ 땡감처럼 후두둑 떨어져 버리는/ 떫디떫은 열매 맺히면 뭘 하나/ 복사꽃 지고 새가 울더니/ 이제 사십 줄도 하냥 지나갔네/ 열매 따서 동생 줄까 누이 줄까/ 꽃은 꽃대로 열매는 열매대로인 걸/ 내 꽃 지고 누이 열매 맺히겠네/ 복사꽃 지고 열매 맺히니/ 동생이 먼저 오십 줄에 들어섰네/ 동생도 아니고 누이도 아니고/ 풋것들이 아주 떨어져 내리는/ 길 위에서 날 불러 형이야 오빠야 하네/ 열대 떨어지는 길을 따라가면/ 장마 지겠네 장마 지겠네/ 물 불어 강 따라 흘러가면 뭘 하나/ 육십이고 칠십이고 구십이고/ 구만리장천이 다 한 길인데/ 다만 연분홍 복사꽃 지고 있으니/ 복사꽃 지면 열매 맺히겠네/ 열매 맺히면 뭘 하나 뭘 하나/ 복사꽃은 지고 있는데/ 복사꽃은 지고 있는데//

옻나무 / 염창권
가문 날들이 많아서인지/ 가문가문한 가을 길들이 자꾸 끊어진다/ 옻나무 가지가 내 팔뚝을 긁고 지나간다// 줄기에는 독을 한 사발 품고 있으리니/ 내 몸에도 곧이어 홍조가 들 것이다// 그녀가 끝내 허락되지 않았을 때/ 몸 안에서 검은 담즙을 뱉어낸 일이 있다// 옻나무보다/ 맑고 선연하게 걸러낸 단풍 빛을 여직 본 적이 없다// 독을 품고 있을 때/ 사람들은 지독하게 맑아져서/ 그 안을 모두 들여다 볼 수 있다//

실뱀장어 낚기 / 염창권
선착장가로 밀물이 드니/ 누이야 밤바다로 나서자/ 강기슭을 간질이며 숭어 떼가 찾아들고 있으니/ 밤바다에 나가 실뱀장어를 낚아보자/ 준비할 것은 시간의 물살을 걸러낼 뜰망과/ 어둠 속에서 다가올 인연을 분별할 불빛뿐이니/ 누이야 내 손을 잡고/ 어서 밤 바닷가로 나서자/ 낚이면 억만 시간 중의 일초가 만드는/ 인연으로 남을 실뱀장어를 아예/ 그 애라고 부르는 게 좋겠구나/ 나이트 불빛을 켜서 너의 얼굴을 비추니/ 화들짝 피어나는 봄꽃처럼 예쁘구나/ 불빛은 배터리에 가득 담겨 있으니/ 벙벙히 차오르는 밀물이 모두 지날 때까지/ 오늘 밤 불빛 아래 그 애를 찾아보자/ 단 일초만에 지나가 버리는 그 애를 만나려면/ 물위에 실밥처럼 떠올라 고물거리며/ 꽃처럼 피어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말아야겠네/ 오늘은 해풍이 불어와 물살을 흐려놓고 있으니/ 뜰망이 닿도록 가까이 떠오르지를 못 하는구나/ 그러나 누이야 실망일랑 하지 말아다오/ 인연은 언제나 천천히 다가오는 법이니!/ 연실 같은 실꾸리가 저 바다 끝까지 이어졌으니/ 만남이 금방 찾아들지 않아도 시간은 넉넉하구나/ 누이야 불빛을 따라 벙벙히 차오르며/ 밀물 드는 바닷가의 밤을 보아라/ 하늘의 별들이 자꾸만 쏟아져 내리는구나/ 마을로 떨어진 별들은 따뜻한 등불로 내어 걸리고/ 바다에 풍당퐁당 떨어진 별은/ 조개들이 키워줄 테니/ 밀물 드는 밤 보름달 같은 누이야.//

 

공중보도(空中步道) / 염창권
극세사의 유리 표면에 얼굴이 달라붙었다// 바다 밑이 들여다보이는 서슬푸른 날이다. 주머니에 넣어둔 카드키 두 장이 내가 가진 공간 정체성을 암시한다. 거리에선 0.25㎡ 용적의 몸들이 소음과 바퀴들을 겁내며 걷고 있다. 나는 건물에서 건물로 이동한다. 대출된 그는 내 몸속에 틈입해 있는 중,// 안쪽의 길과 바깥의 허공이 유리 난간을 사이에 두고 투명하게 접혀 있다// 이 공중 정원과 건축물들 사이에서 내가 가진 시간은 기호화되었다. 늙음을 돌보는 인부가 두엇은 더 있지만, 의심이나 회의는 습관처럼 다가온다. 바닷바람이 창틀에 진득하게 눌어붙는다. 섬이 보이다가 안개에 가려 보이는 날 많다.// 잠시간, 그의 얼굴을 떠올려 본다. 피부 아래 늙음이 들끓고 있다./ 그는 바로 나다.//

어느 날 사라져버린 보행자에 대한 기억 / 염창권
엎드려 가랑이를 벌리고 있는/ 길을 보며 그는 점잖게 사유한다.// 저 매끄럽고 탄력적인 길은 충분히 유혹적이나/ 적은 언제나 심복의 비수처럼 돌발적이다./ 피로한 구름이 날아와/ 저 벌거벗음을 누추로 적셔버릴 때까지/ 길은 자신의 충실함을 맹서라도 하듯/ 그를 위해 열어둘 것이다. 그러나 길은/ 자꾸 엇갈린 방향을 손짓으로 가리키며/ 길 위에서 사람들을 지쳐 눕게 한다./ 유혹이 꽤나 깊이 있게 진행되었던 듯/ 이 행성은 길의 손아귀에 단단히 붙들려 있다./ 때로 여름 숲은 푸른 망사의 잎과 향기로/ 길을 수식하기도 한다./ 안개 속에서의 보행은 즐거우나/ 그는 안개와 숲의 길을 걸어서 사라지고 없다./ 그는 이제 '사라졌다'라는 기호로만 남았다./ 길은 세상의 모든 건물과 사람과 새들을 양육한다./ 그들에게 근육과 살을 붙여주었으나/ 맑은 피로 헹구어낸 땀의 대가로/ 길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한다.// 길에 매달린 사람들은 길의 자식이자 숙주이다. 오늘은 길이 나를 요구한다.//

'시詩 느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현국 시인  (0) 2022.04.06
윤보영 시인  (0) 2022.04.05
이대흠 시인  (0) 2022.03.23
윤중목 시인  (0) 2022.03.21
김도연 시인  (0) 2022.03.19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