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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이대흠 시인

by 부흐고비 2022. 3. 23.

이대흠 시인
1968년 전남 장흥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목포대 석사과정. 1994년 《창작과 비평》에 6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시집 『당신은 북천에서 온 사람』, 『귀가 서럽다』, 『눈물 속에는 고래가 산다』, 『상처가 나를 살린다』, 『물 속의 불』 등과 산문집 『탐진강 추억 한 사발 삼천 원』, 『이름만 이삐먼 머한다요』, 『그리운 사람은 기차를 타고 온다』, 장편소설 『청앵』, 연구서 『문학파의 문학세계 연구』, 시쓰기 교재 『시톡』 1,2,3 산문집 등을 출간하였다. 육사시문학상, 젊은시인상, 애지문학상, 조태일문학상, 전남문화상, 공간시낭독회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꽃섬 / 이대흠
먼 데 섬은 먹색이다/ 들어가면 꽃섬이다//

아름다운 위반 / 이대흠
기사 양반! 저짝으로 쪼까 돌아서 갑시다/ 어칳게 그란다요. 뻐스가 머 택신지 아요?/ 아따 늙은이가 물팍이 애링께 그라제/ 쓰잘데기 읎는 소리하지 마쇼/ 저번챀에 기사는 돌아가드마는…/ 그 기사가 미쳤능갑소// 노인네가 갈수록 눈이 어둡당께/ 저번챀에도/ 내가/ 모셔다 드렸는디//

마음의 호랑에서 코끼리 떼가 쏟아질 때 / 이대흠
당신에게서 문득 파닥이는 꽃을 받았습니다// 5초간,/ 감정의 국경을 침범하지 않을 방법을 연구합니다// 당신이 내민 꽃 떼를 받지 않을 수 없어서 나는 이름에 갇힌 죄들을 모두 풀어 버렸습니다// 이러다 꽃에 물리면 온통 당신의 향기가 독처럼 퍼질 것입니다// 지금 떠나시렵니까?// 나의 마음은 충분히 방목 중입니다//

불 속으로, 그 남자 / 이대흠
마음속 우거진 슬픔을 누가/ 벌초해주리 그 남자/ 함부로 돋아나는 슬픔의 밑동을 자르며/ 불 속으로 그 남자 세상 속으로 온몸을/ 불 속으로 밀며 나사처럼 야위어/ 어긋난 세상에서 헛돌며 자꾸/ 헛돌며 뱅뱅 불 속에서 세상/ 속에서 헛돌며 슬픔은 나비떼 뱅뱅/ 날아오르고 아찔해 그 남자/ 세상의 불 속으로 걸어가네 흐느낌 없는/ 세상은 뜨거워 그 남자 헐거운 몸으로/ 세상을 조이고 있네 세상 속에서/ 불 속에서 녹슬지 않는 몸으로/ 그 남자//

에서의 산책 / 이대흠
당신을 볼 수 없을 때는 바람의 줄기를 헤아립니다/ 국숫발처럼 쏟아지는 바람 중 어느 한 줄기는 당신과 이어져 있을 것입니다 햇살이 내 살을 만질 때면/ 어떤 기척이 왔다는 것을 압니다/ 당신의 작은 미동이 내게 전달된 것이겠지요// 꽃을 보기 위해 세수를 합니다/ 신앙이 아니어도 아름다움에 대한 예의는 필요합니다/ 영업을 하러 가는 사람처럼 나는 준비합니다 나는 꽃에게 가장 좋은 살을 보일 것입니다// 당신 앞에 선 듯 꽃 앞에 선 나는 몇 가지 표정을 지어보입니다/ 거짓말을 할 수는 있지만 살의 말을 숨기기는 어렵습니다 살의 떨림과 살의 향기를 그대로 노출합니다// 당신이 살로 왔을 때 꽃으로 반응하던 내 살의 떨림을 어떻게 기록할 수 있을까요?// 살이 말하고 살이 듣습니다// 입술보다 먼저 눈동자보다 빨리 살은 소통합니다// 당신이 꽃 피어서 나는 웃습니다//

늙음에게 / 이대흠
눈이 먼 것이 아니라/ 눈이 가려 봅니다// 귀가 먼 것이 아니라/ 귀도 제 생각이 있어서/ 제가 듣고 싶은 것만 듣습니다// 다 내 것이라 여겼던 손발인데/ 손은 손대로 하고 싶은 것 하게 하고/ 발도 제 뜻대로 하라고 그냥 둡니다// 내 맘대로 이리저리 부리면/ 말을 듣지 않습니다// 눈이 보여준 것만 보고/ 귀가 들려준 것만 듣고 삽니다// 다만 꽃이 지는 소리를/ 눈으로 듣습니다.// 눈으로 듣고 귀로 보고/ 손으로는 마음을 만집니다// 발은 또 천리 밖을 다녀와/ 걸음이 무겁습니다//

외꽃 피었다 / 이대흠
꽃과 가시가 한 어원에서 비롯되었다는 글을 읽는 동안/ 지금은 다른 몸이 한몸에서 갈라져나온 시간을 생각하는 동안/ 꽃을 사랑하는 일은 결국 가시를 품는 것이라는 것을 새기는 동안// 꽃이 오셨다// 어쩌지 못하고 물외처럼 순해지며 아픈 내 마음이며/ 줄기와 잎이 가시로 덮였어도 외꽃처럼 고울 그대에 대한 생각이며/ 견디지 못할 것 같았던 몸의 그리움을 마음의 그늘로 염하는 시간이며//

귀가 서럽다 / 이대흠
강물은 이미 지나온 곳으로 가지 않나니/ 또 한 해가 갈 것 같은 시월쯤이면/ 문득 나는 눈시울이 붉어지네/ 사랑했던가 아팠던가/ 목숨을 걸고 고백했던 시절도 지나고/ 지금은 다만/ 세상으로 내가 아픈 시절/ 저녁은 빨리 오고/ 슬픔을 아는 자는 황혼을 보네/ 울혈 든 데 많은 하늘에서/ 가는 실 같은 바람이 불어오느니/ 국화꽃 그림자가 창에 어리고/ 향기는 번져 노을이 스네/ 꽃 같은 잎 같은 뿌리 같은/ 인연들을 생각하거니// 귀가 서럽네//

비가 오신다 / 이대흠
서울이나 광주에서는/ 비가 온다는 말의 뜻을/ 알 수가 없다/ 비가 온다는 말은/ 장흥이나 강진 그도 아니면/ 구강포쯤 가야 이해가 된다/ 내리는 비야 내리는 비이지만 비가/ 걸어서 오거나 달려오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어떨 때 비는 싸우러 오는 병사처럼/ 씩씩거리며 다가오기도 하고/ 또 어떨 때는 그 병사의 아내가/ 지아비를 전쟁터에 보내고 돌아서서/ 골목길을 걸어오는/ 그 터벅거림으로 온다/ 그리고 또 어떨 때는/ 새색시 기다리는 신랑처럼/ 풀 나무 입술이 보타 있을 때/ 산모롱이에 얼비치는 진달래 치마로/ 멀미나는 꽃내를/ 몰고 오시기도 하는 것이다//

시간의 뿌리 / 이대흠
마루 끝을 햇살이 콕콕콕 쪼아댑니다 백 년이 넘어서인지 햇살의 부리가 닿는 곳은 둥글어져 있습니다 아이에게 밥을 먹이고 나서 흘린 것들을 걸레로 닦아 냅니다 벌어진 나무 틈새를 후비다보니 묵은 때들이 길게 빠져 나옵니다 검게 뻗은 시간의 뿌리입니다// 오래된 것은 지나온 세월만큼 얼굴이 검습니다 하찮은 것도 쉬이 흘리지 못하고 받아들인 덕분입니다 고목나무 뿌리가 저렇게 검은 것도 돌이 되어 가라앉는 누군가의 속울음에 귀를 세웠기 때문입니다//

곰소에서 / 이대흠
나무를 덧대어 만든 커다란 소금창고는 기울어져 있었다 평생을 물에서 오신 소금을 모신 곳이었으니 여전히 물이 들어오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물이 들어와 있을 때보다 썰물 때 더 기울어져 있었다// 내게 남은 것은 그대가 남기고 간 한줌 소금 같은 그리움이니!// 베인 상처에 갯물이 들 때처럼 마음 안이 쓰리고/ 그대 떠나고 나도 그대 쪽으로 기울어졌다// 해가 질 것이고 바닷바람에 나는 낡아갈 것이다/ 조금 더 기울어질 것이다//

젖몸살 / 이대흠
오래전에 가지가 잘려나갔으리라// 팽나무 중동에 옹이 두 개 나란히 박혀 있다/ 젖몸살을 앓는 여자의 검붉은 젖꼭지처럼 망울져 있다/ 슴벅슴벅 아리는 쓰라림을 함께 앓아/ 보이지 않는 가지로 여전히 아프다는 듯이/ 환지통을 앓는 사람의 어깨처럼/ 쭈글쭈글한 상흔// 놓친 가지를 향한 그리움과 애탐이 옹이로 뭉치도록/ 얼마나 속앓이를 하였으랴/ 타버린 속이 시커멓게 비어 있다// 그리움 쪽으로 기어이 고개 내밀고 있는 옹이들/ 딱딱하게 굳은 옹이의 꼭지에는 무언가가 이어져/ 가만가만 손짓하고 있다// 명절 전날이면 신작로 쪽으로 몸이 쏠린 노인들이/ 그 나무 아래에서 웅성거리곤 하였다//

물의 길 / 이대흠
누런 저 황룡강을 더럽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식수는커녕 발도 못 씻을 물이라고// 물이라면/ 투명하고 맑아야 하는 것이라고// 정수기 거치거나 끓인 후라야/ 먹을 물 되는 것이라고// 죄송하여라/ 흐려서 깨끗한 물이여// 저 누런 물/ 논고랑 밭고랑 일일이 손 뻗어/ 어린 뿌리 병든 뿌리 어루만지고// 고름 든 새의 다리엔/ 입 대었으리//

울 엄니 / 이대흠
울 엄니 오래 사실 게다/ 콩 까투리에서 막 나온 듯/ 자잘한 새끼들/ 뿌리 잘 내리는가 보고 가시려고/ 팔순 넘어 구순 넘어도/ 눈 못 감으실 게다// 울 엄니 돌아가시면/ 저승에 못 가실 게다/ 제 몸 헐어 만든 자식들/ 북돋아주시려고/ 쇠스랑 같은 손으로/ 흙이나 파고 계실 게다// 울 엄니 제삿날이면/ 절대 오지 않을 게다/ 마침내 든 편안한 잠/ 깨고 싶지 않을 게다/ 이승서 밀린 잠 자다/ 저승 생일도 잊을 게다//

어머니 / 이대흠
나는 나만 앓아도 이렇게 무거운데/ 도대체 바위는 누구를 그리 앓았나,// 저 바위/ 같은 사람을 알고 있다,// 받아들인 근심의 무게로/ 딱딱하게 굳어,// 묻혀가는,/ 저//

어머니라는 말 / 이대흠
어머니라는 말을 떠올려보면/ 입이 울리고 코가 울리고 머리가 울리고/ 이내 가슴속에서 낮은 종소리가 울려나온다// 어머니라는 말을 가만히 떠올려보면/ 웅웅거리는 종소리 온몸을 물들이고// 어와 머 사이 머와 니 사이/ 어머니의 굵은 주름살 같은 그 말의 사이에// 따스함이라든가 한없음이라든가/ 이런 말들이 고랑고랑 이랑이랑// 어머니란 말을 나직히 발음해보면/ 입속에 잔잔한 물결이 일고// 웅얼웅얼 생기는 파문을 따라/ 보고픔이나 그리움 같은 게 고요고요 번진다// 어머니란 말을 또 혀로 굴리다보면/ 물결소리 출렁출렁 너울거리고/ 맘속 깊은 바람에 파도가 인다// 그렇게 출렁대는 파도소리 아래엔/ 멸치도 갈치도 무럭무럭 자라는 바다의 깊은 속내/ 어머니라는 말 어머니라는// 그 바다 깊은 속에는/ 성난 마음 녹이는 물의 숨결 들어 있고/ 모난 마음 다듬어주는 매운 파도의 외침이 있다//

어머니의 나라 / 이대흠
어머니의 나라에서는 뜨거운 물을 땅바닥에 버리지 않는다 수챗구멍에도 끓는 물을 붓지 않는다 땅속에 살아있을 굼벵이 지렁이나 각종 미생물들이 행여 델까 고것들 모다 지앙신 자석들이라 지앙신이 이녁 자석들 해꼬지 한다고 노하면 집이 망해분단다 어머니의 나라에서는// 남은 음식을 버리지 않는다 그 나라 부엌의 수챗구멍 밑에는 염라대왕이 젝기장 들고 앉아 누가 먹을 것을 버리는지 살피고 있다 죽어 저승 갔을 때 한 톨 쌀을 한 가마로 쳐서 고걸 드는 벌을 슨단다 귀한 음석 함부로 하먼 쓴다냐 어머니의// 나라에서는 감을 딸 때도 까치밥 두어 개는 반드시 남겨 둔다 배고픈 까치는 물론 까마귀 참새 들까지 모두 제 밥이다 날아와 먹는다 가을걷이할 때는 까막까치 참새를 다 쫓지만 그 어느 것이라도 굶어죽는 건 우리 몸의 일부가 떨어지는 것이기에// 먹을 것 귀한 겨울에는 산 가까이에 시래기나 생선뼈를 놓아두기도 한다 배고픈 산짐승들 그걸 먹고 겨울 난다 때로 산토끼를 잡기도 하고 들고양이를 쫓기도 하지만 제아무리 고방 생선 훔쳐먹는 도둑괭이라도 새끼 밴 암컷에겐 생선 대가리를 내어준다 행에나 새끼 밴 짐승 죽게 하먼 사람 새끼도 온전치 못하는 벱이다// 어머니의 나라에서는 똥오줌이 오물로 버려지지 않는다 땅에서 온 모든 것 땅에게 돌려준다 그마저 생오줌이나 생똥으로 갚는 게 아니다 사람이란 독한 짐승이라 사람 침에 뱀이 죽고 사람 발에 풀이 죽고 생똥 생오줌에 채소가 녹기에// 생오줌은 합수통에서 지글지글 끓여서 독기 다 뺀 후 무 배추 밑 돋우는 거름으로 쓰고 생똥은 짚풀과 섞어 한 육 개월 푹 삭힌다 어머니의 나라에서는// 나무 한 그루 함부로 베어내지 않는다 나무마다 신이 있어서 허락없이 베어내면 살(煞) 맞아 사람 목숨 하나가 끊어지기에 정히 나무 필요할 때면 막걸리 두 되쯤 바친 후 나무신 마음 먼저 풀어주고 톱 댄다// 죽어 땅으로 돌아갈 때도 잡초 우거진 빈 땅이라고 함부로 구덩이 만들지 않는다 파낸 자리마다 무덤자리라 뜻 없이 파낸 자리엔 사람 목숨 하나 눕게 된다는 머나먼 어머니의 나라에서는//

동그라미 / 이대흠
어머니는 말을 둥글게 하는 버릇이 있다/ 오느냐 가느냐라는 말이 어머니의 입을 거치면 옹가 강가가 되고 자느냐 사느냐라는 말은 장가 상가가 된다 나무의 잎도 그저 푸른 것만은 아니어서 밤낭구 잎은 푸르딩딩해지고 밭에서 일 하는 사람을 보면 일항가 댕가 하기에 장가 가는가라는 말은 장가 강가가 되고 애기 낳는가라는 말은 아 낭가가 된다// 강강 낭가 당가 랑가 망가가 수시로 사용되는 어머니의 말에는/ 한사코 o이 다른 것들을 떠받들고 있다// 남한테 해꼬지 한 번 안 하고 살았다는 어머니/ 일생을 흙 속에서 산,// 무장 허리가 굽어져 한쪽만 뚫린 동그라미 꼴이 된 몸으로/ 어머니는 아직도 당신이 가진 것을 퍼 주신다/ 머리가 발에 닿아 둥글어질 때까지/ C자의 열린 구멍에서는 살리는 것들이 쏟아질 것이다// 우리들의 받침인 어머니/ 어머니는 한사코/ 오순도순 살어라이 당부를 한다// 어머니는 모든 것을 둥글게 하는 버릇이 있다//

 

밥과 쓰레기 / 이대흠
날 지난 우유를 보며 머뭇거리는 어머니에게/ 버리부씨요! 나는 말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이의 과자를 모으면서/ 맴생이 갖다줘야 쓰겄다/ 갈치 살 좀 봐라, 강아지 있으면 잘 묵겄다/ 우유는 디아지 줬으면 쓰겄다마/는 신 짐치들은 모태갖고 떠작되작 지쳐사 쓰겄다// 어머니의 말 사이사이 내가 했던 말은/ 버리부씨요!/ 단 한마디// 아이가 남긴 밥과 식은 밥 한덩이를/ 미역국에 말아 후루룩 드시는 어머니// 무다아 버려야,/ 이녁 식구가 묵던 것인디// 아따! 버려불제는,/ 하다가 문득.....// 그래서 나는/ 어미가 되지 못하는 것//

두개의 무덤 / 이대흠
1/어머니이 젖 무덤은/ 오래된 무덤이다/ 봉분이 다 가라앉아/ 평지와 구별되지 않는다.//
2/ 이 땅의 여자들/ 두 개의/ 무덤을 가지고 다닌다// (하나는 사랑을 잠재우기 위해/ 다른 하나는 자신을 묻기 위해)//

아버지의 지게질 / 이대흠
쟁기질 써레질은 한번도 해보지 않았던 아버지가 지게질을 한 적이 딱 한 번 있었다고 하였다// 결혼하고 맞은 첫 겨울 혼자 까끔을 긁어 솔가리 나무를 했던 어머니는/ 남 보기 슳어서 아버지에게 함께 나르자고 했단다// 아버지 지게에 석단을 징끼고 어머니 머리에는 넉단을 이었다// 캄캄해진 산길을 내려오는데 앞선 어머니 귀에 탁탁탁 아버지 지겟발을 돌부리들이 시비 거는 소리가 들렸다// 집에 와 나뭇간에 짐 부릴 때 보니 아버지 지게에서는 새끼줄만 달랑 떨어졌다//

비빔밥 / 이대흠
비빔밥에 잡다한 것이 들어가야 한다. 싱건지나 묵은 김치도 좋고 숙주노물이나 콩노물도 좋다. 나물이나 노무새도 좋고 실가리나 씨래기 시락국 건덕지도 좋다. 먹다 남은 찌개 찌그래기나 달걀을 넣어도 좋지만 빼먹지 않아야 할 것은 고추장이다. 더러 막걸리를 넣거나 된장국을 흥창하게 넣는 사람도 있는데 그것은 취향일 뿐 그렇다고 국밥이 되는 것은 아니다.// 비빔밥엔 가지가지 반찬에 참기름과 고추장이 들어가야 하지만 정작 비빈 밥이 비빔밥이 되기 위해서는 풋것이 필요하다. 손으로 버성버성 자른 배춧잎이나 무잎 혹은 상추잎이 들어가야 비빔밥답게 된다. 다 된 반찬이 아니라 밥 과 어우러지며 익어갈 것들이 있어야 한다. 묵은 것 새것 눅은 것 언 것 삭은 것 그렇게 오랜 세월이 함께해야 한다.// 하지만 재료만 늘어놓는다고 비빔밥이 되는 것은 아니다. 비빔밥을 만들기 위해서는 요령이 필요하다. 비빈다는 말은 으깬다는 것이 아니다. 비빌 때에는 누르거나 짓이겨서는 안된다 밥알의 형태가 으스러지지 않도록 살살 들어주듯이 달래야 한다 어느 하나 다치지 않게 슬슬 틀어 올려 떠받들어야 한다.// 손과 손은 맞재고 비비듯 입술과 입술을 대고 속삭이듯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우려 이미 분리할 수 없게 그렇게/ 그렇게 나는 너를 배고/ 너는 내게 밴 상태라야 비빔밥이라고 할 수 있다.// 우는 사람아 비빔밥을 먹을래/ 내가 너에게 듣고 싶다.//

내게 사랑이 있다면 / 이대흠
아득히 멀리 휘어진 길 같은 것이라고/ 띠풀 사이 논둑길 지나/ 장끼 소리 흘러내리는 솔숲 아래/ 시리게 피어 겨운 쑥부쟁이꽃 같은 것이라고/ 또랑을 건너면 집이 나오고 집은 외딴집 허물어져가는/ 논일을 마치고 오는 노인 부부가/ 부끄러이 등 뒤에서 손을 맞잡고/ 도란거리며 새립으로 들어서는/ 적막한 오후 같은 것이라고//

별의 문장 / 이대흠
서늘하고 구름 없는 밤입니다 별을 보다가 문득 하늘에 돋은 별들이 점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래전부터 너무 많은 이들이 더듬어 저리 반짝이는 것이겠지요// 사랑에 눈먼 나는 한참 동안 별자리를 더텼습니다 나는 두려움을 읽었는데 당신은 무엇을 보았는지요// 은행나무 잎새 사이로 별들은 또 자리를 바꿉니다//

광양 여자 1 / 이대흠
청보리 필 때는 청보리처럼 푸르게 웃음짓던 여자/ 빈 들 보리밭 가 점심 굶고 걸어도 마냥 나를 배부르게 하였던 여자/ 쓸쓸함이 산수유 꽃그늘 같아서 열에 들뜬 내 머리를 가만히 다스려주고/ 쉬운 분노와 잦은 뉘우침을 반복하던 나에게 가시몸 속 탱자꽃을 보여주던 여자// 내 오래 절망했을 때 치약처럼 상큼한 냄새로 제 몸이 걸레되어/ 더께 낀 내 속을 찬찬히 닦아주던 여자 내가 아플 때면/ 메꽃잎 같은 손으로 상처의 뿌리를 매만져주던 여자 눈동자가/ 초꼬지불 같아서 어둠속을 초롱초롱 빛내던 여자 그 눈동자에/ 눈부처로 있는 게 즐거워 오래도록 눈 마주보았던 여자// 불경 같은 여자 연꽃 같은 여자 숯불 같은 여자 차심 같은 여자/ 짐승 같은 여자// 마른 낙엽 밑 돌멩이처럼 감추어진 여자 잔바람에도 쉬 드러나 찢긴 내 맨살을 아리게 하는 여자 덖은 찻잎에 숨은 그늘처럼 오래도록 감추어져 있다가 맑은 찻물로 우려지곤 하는 여자 내 오래 사랑하였고 한번도 미워한 적 없었던 여자 너무 깊이/ 사랑했으므로 보낼 수밖에 없었던// 그 여자 모두에게 버림받고 아파 울더라도 곁에 두고 싶었던 여자 몸 영 못 가누게 되어 기저귀 차고 지내게 되면 내 손수 기저귀 갈아주고 고운 노래 불러주고 싶었던 여자 내 숨막힌 세월 숨통 터주고 제 아픔 하나도 나누어주지 않았던// 나쁜 그 여자, 생각하면 목련길이 떠올라서 세상의 모든 밤을 봄밤으로 만드는 여자 꽃에 허기진 나를 밤 깊도록 잠 못 이루게 하고 검게 바랜 목련 꽃잎에 눈물 떨구게 하는 여자// 과냥과냥 불러보면 어느날 문득/ 자응자응 대답할 그 여자//

광양 여자 2 / 이대흠
쓸쓸함이 노을 든 억새꽃 같은 여자와/ 살고 싶었네 쭈구러지기 시작한 피부에/ 물고기 눈처럼 순한 눈망울을 끔벅거리던 여자/ 산죽처럼 서걱거리는 연애로 청춘을 다 탕진하고/ 세상 밖으로 가는 길을 손목에 새기려 했던 여자/ 나는 맹감잎 같은 귀로 그녀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지만/ 어쩌지 못한 가시가 그녀를 다치게 하였네// 사랑한다 말하면 밥 뜸들일 때의 숯불처럼/ 자분자분 끓어오르는 여자/ 그 여자를 생각하면/ 분홍이나 노랑이라는 단어가 떠올라서/ 외풍 심한 겨울밤에도 마음 한쪽에 아랫목이 생겼네/ 연두 뚝뚝 떨어질 듯 연한 감잎처럼 순한 귀를 가진 여자// 그 여자와 어느 산 아래 흙집 지어 살림 차리고/ 찰방거리는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주고 소꼴을 베러/ 새벽이슬 깨뜨리며 바지게 지고 들로 나가리/ 익은 낫질에 후딱 오른 한 바지게 풀짐에선/ 아직은 좀 비릿한 그녀의 살냄새 나리/ 그런 날이면 밥상도 제쳐두고 그녀의 몸내 맡으리/ 그녀가 등목을 해주는 여름이 오면/ 별 낮은 밤하늘 반딧불이처럼/ 깜박깜박 서로의 반짝임을 바라보리// 몸물이 올라 가을이면 노란 산국이 되는 여자/ 그 여자 어깨를 주물러주며 함께 늙어가고 싶었네/ 아이 둘 낳기에는 너무 늦은 여자/ 여전히 순정은 치자꽃 같아서 스치기만 하여도/ 달큼한 향내를 풍기는 여자 그 여자 낯빛에 스민 그늘/ 그 그늘 아래서는 슬픔도 마냥 슬픈 것만이 아니고/ 기쁨도 그저 환한 것만이 아니라서/ 따뜻한 슬픔에 마음은 그저 노곤해지고/ 행여 다툰 날이면 그 여자 눈동자 속 눈부처 향해 절을 하리// 그녀는 이내 순하게 무릎을 꿇겠지 그러다보면/ 버석거리는 마음에도 단풍 들리라/ 서로의 아픈 데를 어루만져주며/ 조금씩 잎을 떨구는 감나무들처럼 담담히/ 나란히 빈 몸으로 겨울을 맞고 싶었네//

한라수목원에서 / 이대흠
1// 알겠습니다, 내 그리움이 너무 우거졌다는 것을/ 아무렇게나 자라나는 그리움을 방치해두고서는/ 그대 발 디딜 곳이 없다는 것을/ 그리움도 솎아내지 않으면 그대 맨살 다치게 하는/ 땅가시나 키우게 된다는 것을//
2// 담팔수 잎은 하루에 하나씩 진다고 합니다/ 우리 사이 이별은 그러했으면/ 하루 한 잎씩 지면서 무성해졌으면……/ 오래전의 생각입니다// 다만 한 잎이 떨어졌을 뿐인데 나무가 출렁거립니다/ 바람 때문에 나무가 흔들리는 것이라고/ 했던 생각을 지웁니다//
3// 송두리째 잘린 나무의 그루터기를 봅니다/ 나이테마다 맺힌, 투명한, 그 방울들//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며/ 먼 데 보는 눈동자에 맺힌, 그 짠물// 서랍에 담긴 먹처럼 가만 나는 놓여 있습니다​//

애월(涯月)에서 / 이대흠
당신의 발길이 끊어지고부터 달의 빛나지 않는 부분을 오래 보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무른 마음은 초름한 꽃만 보아도 시려옵니다 마음 그림자 같은 달의 표면에는 얼마나 많은 그리움의 발자국이 있을까요// 파도는 제 몸의 마려움을 밀어내며 먼 곳에서 옵니다 항구에는 지친 배들이 서로의 몸을 빌려 울어댑니다 살 그리운 몸은 불 닿은 노래기처럼 안으로만 파고듭니다// 아무리 날카로운 불빛도 물에 발을 들여놓으면 초가집 모서리처럼 순해집니다 먼 곳에서 온 달빛이 물을 만나 문자가 됩니다 가장 깊이 기록되는 달의 문장을 어둠에 눅은 나는 읽을 수 없습니다// 달의 난간에 마음을 두고 오늘도 마음 밖을 다니는 발걸음만 분주합니다//

윗세오름 가는 길 / 이대흠
산정으로 가는 길이 없는 건 아닙니다 다만/ 산이 너무 아파 막아두었을 뿐입니다/ 헤어지자는 그대의 말을 듣고/ 윗세오름으로 갑니다// 바다로부터 먼 곳으로 왔는데/ 등성이에 오르니 바다가 금방 엎질러질 듯/ 가까이 있습니다 소리 없는 파도는/ 거세어집니다 아무리 파도가 높아도/ 수평선은 미동이 없습니다// 잎 떨어진 나무의 가지 틈틈이/ 하늘이 보입니다/ 시로미 잎마다 맺힌 비이슬/ 그 이슬 내 눈에 들어/ 열기를 식힙니다// 까칠한 수풀 너머에서/ 까마귀 한 마리 날아오릅니다// 하늘이 하도나 맑습니다/ 참 많이 우셨나봅니다//

감정의 적도를 지나다 / 이대흠
적도를 지난 적은 있지만 주소지로 두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은 바람이 한 댓잎을 스치는 순간처럼 순식간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머뭇거림은 감정의 적도라 불러야 합니다 느낄 수는 있어도 머물지는 못합니다// 그대에게 묻습니다/ 그 때 그 순간을 아바나의 말레이시아라 불러도 되겠습니까 벗어둔 브래지어에 담긴 호수의 물결이라고 기억합니다 노랑이었습니다 그대의 혀에서는 물푸레 물푸레 수많은 잎들이 돋았습니다// 기억의 퍼즐은 한 번도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오답만으로 채워진 사랑도 가능하리라 믿으며 감정의 좌표를 바라봅니다 어떤 위도에서는 예측할 수 없는 폭풍이 일어납니다 그대를 잃어버렸으나 사랑을 잃지는 않았습니다// 오래 전의 그날을,/ 그 밤의 설렘을 지금으로 데려오는 건/ 호안끼엠 호수에서 잃어버린 단추를 찾아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날의 입술과 숨결과 커다란 나뭇잎과 물에 젖은 망사 같은 공기만 떠오릅니다 나는 사랑의 지도를 완성할 수 없습니다 극을 향해 달려가기도 했습니다만 나를 떠나지는 않았습니다 감정의 적도는 굵은 허리를 도는 훌라후프처럼 여전히 움직입니다//

칠거리 / 이대흠
섬사람들은 낙지발처럼 끈적거리는 길이라 했고 산골 사람들은 고구마뿌랭이 같은 데라 했다 한번 발 딛으면 쉽게 빠져 나갈 수 없고 더 들어가면 건질 게 하도 많아 아조 앉은뱅이가 된다는 곳// 간다간다 강진장/ 마라마라 마량장/ 치라치라 칠량장/ 대다대다 대덕장/ 펴자마자 장평장/ 버성버성 보성장/ 도라도라 도암장// 다 돌아다닌 장똘뱅이가 장에 왔다가 벚꽃 향기에 취했는지 치마에 파묻혀 닷새를 자고서야 다시 장을 보았다는// 장흥 장터의 이마빡 같은 곳// 고쌈하는 날이면 아이들은 용꼬리의 끄트머리 새끼줄 하나 달랑 쥐고서 이겨보겠다고 목숨을 걸었다 장동 장평 관산 대덕 용산 유치에 강진 영암 보성 화순의 모든 길이 모여드는 곳// 대처로 나가는 외길도 거기였다// 빨치산의 아내에서 경찰 각시가 되었던 여자가 사십 년 서방이 죽자 꼭 일곱 말 닷 되의 눈물을 빼고 가더란다 신청 퇴물 소리꾼 여자가 서른 해 국밥집을 하고서야 소리가 터졌다는 곳도 칠거리였다//

천관天冠 / 이대흠
강으로 간 새들이/ 강을 물고 돌아오는 저물녘에 차를 마신다// 막 돋아난 개밥바라기를 보며/ 별의 뒤편 그들을 생각하는 동안// 노을은 바위에 들고 바위는 노을을 새긴다// 오랜만에 바위와 놀 빛처럼 마주 앉은 그대와 나는 말이 없고// 먼 데 갔다 온 새들이/ 어둠에 덧칠된다// 참 멀리 갔구나 싶어도 거기 있고 참 멀리 왔구나 싶어도/ 여기 있다//

마음의 호랑에서 코끼리 떼가 쏟아질 때 / 이대흠
당신에게서 문득 파닥이는 꽃을 받았습니다// 5초간,/ 감정의 국경을 침범하지 않을 방법을 연구합니다// 당신이 내민 꽃 떼를 받지 않을 수 없어서 나는 이름에 갇힌 죄들을 모두 풀어 버렸습니다// 이러다 꽃에 물리면 온통 당신의 향기가 독처럼 퍼질 것입니다// 지금 떠나시렵니까?// 나의 마음은 충분히 방목 중입니다//

그리움의 탈색 현상에 대한 연구 / 이대흠
내가 아는 한 최고의 염색 기술자는 곡성에 사는 정옥기 선생이지만/ 탈색 기술에 대해서라면 그리움을 이길 자가 없습니다// 흐려지면서 또렷해지고/ 지워지면서 선명해지는 기술//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살아나는 체온이 있습니다/ 여전히 느껴지는 것 같은 섬찟함// 추억에 물방울이 번지면서 몰래 뭉클해지는 오후가 있습니다// 이봐! 라고 부르면/ 50년 후쯤에 대답을 할 것만 같은 풍경에 대해서는/ 대답을 회피하겠습니다// 물을 뿌리면 돋아나는 레몬 글씨처럼// 별의 뿌리에서는 물 냄새가 난다고/ 부치지 않을 편지를 쓰는 봄밤입니다//

사계리 발자국 화석 / 이대흠
다녀가셨군요 당신// 당신이 오지 않는다고/ 달만 보며 지낸 밤이 얼마였는데/ 당신이 다녀간 흔적이/ 이렇게 선명히 남아있다니요// 물방울이 바위에 닿듯/ 당신은 투명한 마음 발자국을 남기었으니/ 그 발자국 몇 번이나 찍혔기에/ 화석이 되었을까요// 다녀갈 때마다 당신은 또 얼마나 울었을까요/ 아파서 말을 잃은 당신/ 눈이 멀도록 그저 바라다보기만 하였을 당신/ 몹쓸 바람 모슬포 바람에 당신 귀는/ 또 얼마나 쇠었을까요// 사랑이 깊어지면 말을 잃는 법이라고/ 마음 벼랑에 우두커니 서 있던 나를 데려와/ 당신의 발자국 위에 세워봅니다// 소금 간 들어 썩지 않을 그리움/ 입 잃고 눈 먼 사랑 하나/ 당신이 남긴 발자국에 새겨봅니다// 다녀가셨군요 당신//

바닥 / 이대흠
외가가 있는 강진 미산마을 사람들은/ 바다와 뻘을 바닥이라고 한다/ 바닥에서 태어난 그곳 여자들은/ 널을 타고 바닥에 나가/ 조개를 캐고 굴을 따고 낙지를 잡는다/ 살아 바닥에서 널 타고 보내다/ 죽어 널 타고 바닥에 눕는다// 바닥에서 태어난 어머니 시집올 때/ 질기고 끈끈한 그 바닥을 끄집고 왔다/ 구강포 너른 뻘밭/ 길게도 잡아당긴 탐진강 상류에서/ 당겨도 당겨도 무거워지기만 한 노동의 진창/ 어머니의 손을 거쳐 간 바닥은 몇 평쯤일까/ 발이 가고 손이 가고 마침내는/ 몸이 갈 바닥/ 오랜만에 찾아간 외가 마을 바닥/ 뻘밭에 꼼지락거리는 것은 죄다/ 어머니 전기문의 활자들 아니겠는가/ 저 낮은 곳에서 온갖 것 다 받아들였으니/ 어찌 바닷물이 짜지 않을 수 있겠는가// 봄은 하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바닥에서 시작된다//

베릿내에서는 별들이 뿌리를 씻는다 / 이대흠
이 여윈 숲 그늘에 꽃 피어날 때의 꽃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작은 방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거기에서 당신의 무릎을 바라보며 세월이 어떻게 동그란 무늬로 익어가는지 천천히 지켜보다가 달빛 내리는 언덕을 쳐다보며 꽃의 고통과 꽃의 숨결로 살아가는 일의 어려움에 대해 가만 생각해 보았으면 하는 것이다// 먼 데 있는 강물은 제 소리를 지우며 흘러가고 베릿내 골짜기에는 지친 별들이 내려와 제 뿌리를 씻을 것이다 그런 날엔 삶의 난간을 겨우 넘어온 당신에게 가장 높은 난간이 별에 더 가까운 것이라고 그래서 살아 있는 새들은 하늘 한 칸 얻어 집을 짓는 것이라고 눈으로 말해주고 싶다// 서러운 날들은 입김에 지워지는 성에꽃처럼 잠시 머물 뿐 창을 지우지는 못한다 우리의 삶은 쉬 더러워지는 창이지만 먼지가 끼더라도 눈비를 맞더라도 창이 아니었던 적은 없었으니 뜨거운 눈물로 서러움을 씻고 맨발로 맨몸으로 꽃 세상을 만드는 저 동백처럼 더 푸르게 울어버리자고 그리하면 어둠에 뿌리내린 별들이 더 빛나듯 울 일 많았던 우리의 눈동자가 더 반짝일 것이라고//

옛날 우표 / 이대흠
혀가 풀이었던 시절이 있었지/ 먼 데 있는 그대에게 나를 태워 보낼 때/ 우표를 혀끝으로 붙이면/ 내 마음도 찰싹 붙어서 그대를 내 쪽으로/ 끌어당길 수 있었지 혀가 풀이 되어/ 그대와 나를 이었던 옛날 우표// 그건 다만 추억 속에서나 있었을 뿐이지/ 어떤 본드나 풀보다도 더 단단히/ 서로를 묶을 수 있었던 시절// 혀가 풀이어서/ 그대가 아무리 먼 곳에 있더라도/ 우리는 떨어질 수 없었지// 혀가 풀이었던 시절이 있었지/ 사람의 말이 푸르게 돋아/ 순이 되고 싹이 되고/ 이파리가 되어 펄럭이다가/ 마침내 꽃으로 달아올랐던 시절// 그대의 손끝에서 만져질 때마다/ 내 혀는 얼마나 달아올랐을까/ 그대 혀가 내게로 올 때마다/ 나는 얼마나 뜨거운 꿈을 꾸었던가// 그대의 말과 나의 꿈이 초원을 이루고/ 이따끔은 배부른 말떼가 언덕을 오르곤 하였지/ 세상에서 가장 맑은 바람이 혀로 들고/ 세상에서 가장 순한 귀들이 풀로 듣던 시절// 그런 옛날이 내게도 있었지//

얼룩의 얼굴 / 이대흠
장구를 치다가 가죽에 번져 있는 얼룩을 본 적이 있다 커다란 몸뚱이를 감쌌던 소가죽이 몸을 다 잃고 매 맞아가면서도 놓지 않아 말라붙은 소 울음소리// 그날의 소리는 죽지 않았고 떠나간 자들은 아주 떠나지 못한다// 누군가를 오래 그리다보면 문득 그의 얼굴이 얼룩 속에서 살아난다 때로는 마음에 두지 않았던 열굴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뜻하지 않았을지라도 모르는 얼굴은 아니다 잊힌 한때에 내가 그리워했던 얼굴이거나 나를 잊지 못한 누군가가 난데없이 방문한 것// 바람이 비의 몸으로 와서 남긴 발자국이라는 증언이 있었다 꽃의 숨결이 향기로 와서 쓰러진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몇 개의 인과는 바람에 꽃잎이 떨어지는 것과 같은 법, 그것들은 어떤 것에 대한 이야기일 뿐 모든 것을 증명할 수 없다// 내가 꽃의 혀를 건네면 너도 꽃의 말을 걸어온다 잎이거나 가시이거나 내가 준 것을 너는 갚으러 온다 지금이 아니라도 언젠가는 돌아온다 너와 나 사이에 있는 터뜨릴 수 없고 말랑한 벽, 거기서 얼룩이 태어난다// 눌어붙은 주검이 있었던 검은 바닥에서 고양이 한마리 불쑥 튀어나와 담 너머로 사라진다//

목련 / 이대흠
사무쳐 잊히지 않는 이름이 있다면 목련이라 해야겠다 애써 지우려 하면 오히려 음각으로 새겨지는 그 이름을 연꽃으로 모시지 않으면 어떻게 견딜 수 있으랴 한때 내 그리움은 겨울 목련처럼 앙상하였으나 치통처럼 저리 다시 꽃 돋는 것이니// 그 이름이 하 맑아 그대로 둘 수가 없으면 그 사람은 그냥 푸른 하늘로 놓아두고 맺히는 내 마음만 꽃받침이 되어야지 목련꽃 송이마다 마음을 달아두고 하늘빛 같은 그 사람을 꽃자리에 앉혀야지 그리움이 아니었다면 어찌 꽃이 폈겠냐고 그리 오래 허공으로 계시면 내가 어찌 꽃으로 울지 않겠냐고 흔들려도 봐야지// 또 바람에 쓸쓸히 질 것이라고/ 이건 다만 사랑의 습관이라고//

물은 왜 너에게서 나에게로 흘러오나 ㅡ탐진시편 6 / 이대흠
그녀는 내게 손목을 주었을 뿐인데 내 손바닥에 강이 생겼다 어린 그녀의 손금 같은 강이 흐르고 강가의 돌멩이처럼 작아진 나는 굳어버린 귀로 물소리를 흘리고 있었다 손금의 강에 스며든 말은 얼마나 많은 모래 알갱이가 되었을까 희미하게 그녀가 모래알처럼 웃을 때 나는 모래알 같은 그녀의 웃음에 조금씩 부서져내렸다 그녀의 손목이 모래톱 같다고 느꼈던 그 순간에 내일은 모래가 되고 오지 않을 손목에 머리를 기대고 싶었던 나는 울며 졸이며 굳어가는 조청 같은 나의 생을 보면서 세상에서 가장 여린 손목 하나를 강으로 놓아두었다//

​보림사, 얼굴 없는 부처 ㅡ탐진시편 17 / 이대흠
보림사에 가면 목이 뚝 잘린/ 부처가 있다니까/ 얼굴이 없으니 부처상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사람 몸 같은 돌덩이 하나 있다니까// 안타깝게도 두상이 사라져서/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떨어진다고/ 장모창 학예사가 말을 하지만/ 사실은,// 돌부처가 제 얼굴을 버린 거야// 천년을 묵언수행했지만/ 도부지 제 눈도 밝힐 수 없어/ 자기 목을 그만 뎅겅 잘라낸 거지// 얼굴이었던 돌멩이는/ 어느 집 죽담에 굄돌로 주고/ 기다렸던 거야// 어디 살아 있는 부처가 없나 하고//

때안쓰는 살살 쳐사 쓴당께는 / 이대흠
김막내 여사 뽀두락지처럼/ 말이 불켰다// 영감이 미쳤는갑네/ 이 나이에 무신 사랑이라고/ 언제 문턱 넘다가 자뿌라질지도 몰름서……// 황씨의 고백을/ 헌신짝 버리듯 밀쳐두고/ 콩밭 매는 며칠 동안/ 엉뎅이는 쌜룩/ 마음속 스텝이 자꾸 엉켰다// 그래도 황씨가 댄스 추다가/ 발목이 접질려 입원했다는 말 듣고/ 젤 싸게 온 건 김 여사였다// 새카매진 김막내 여사 들어선 병실/ 침대 모서리가 갑자기 환해졌다/ 막내님이 안 나와서/ 박 여사랑 추다가 그랬당께// 영감이 미쳤능갑네이/ 때안쓰는 맞춰감서 살살 쳐사 쓴당께는/ 아무 디나 밟고 댕김서 이 지랄이여!// 참말로 내가 미치겄네이잉//

당신은 북천에서 온 사람 / 이대흠
당신은 북천에서 온 사람/ 이마에서 북천의 맑은 물이 출렁거린다/ 그 무엇도 미워하는 법을 모르기에/ 당신은 사랑만 하고/ 아파하지는 않는다// 당신의 말은 향기로 시작되어/ 아주 작은 씨앗으로 사라진다// 누군가가 북천으로 가는 길을 물으면/ 당신은 그의 눈동자를 들여다본다/ 거기 이미 출렁거리는 북천이 있다며/ 먼 하늘을 보듯이 당신은/ 물의 눈으로 바라본다// 그러는 순간 그는/ 당신의 눈동자 속에 풍덩 빠진다// 북천은 걸어서 가거나/ 헤엄쳐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 당신 눈동자를 거치면/ 바로 갈 수 있지만/ 사람들은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고/ 걷거나 헤엄을 치다가/ 되돌아나온다// 당신은 북천에서 온 사람// 사랑을 할 줄만 알아서/ 무엇이든 다 주고/ 자신마저 남기지 않는다//

북천의 봄 / 이대흠
미안하지만 북천엔/ 봄이 오지 않는다// 너의 맑은 눈동자 같은 씨앗은/ 영원히 묻힌다// 유일한 희망은 적멸이라/ 나무들은 나이테를 가지지 못한다/ 자라는 순간 죽음으로 가는 말의 나무들// 무서운 소문을 몰고 다녔던 바람은/ 얼음 골짜기에서 얼고// 울음 속으로 들어간 자들은/ 얼어서 말이 없고// 다른 별의 고요를 다 데려와도/ 북천에서는 시끄러울 뿐이다// 북천에서는 그대가/ 그대로 있는 것만이 사랑이다//

북천에서 쓴 편지 / 이대흠
북천에서 쓴 편지는 햇살에 녹아요/ 밤이 오면 다시 얼고 낮이면 또 녹지요// 북천에서 쓴 편지는/ 언제 도착할지 알 수 없어요/ 북천에선 백년쯤이 순식간에 지나가죠/ 사앙의 말 두어자 적는 동안에 몇 생이 후딱 스쳐가버리죠// 북천에는 문자가 없어요/ 어떻게 마음을 옮겨 적을 수 있을까요?// 북천에서 쓴 편지는/ 마음이 그대로 흘러가는 것이지요// 그래요/ 사랑의 말을 편지로 쓴다는 건/ 얼고 녹고 부서지고 타버려도/ 사라지지 않을 알갱이 하나 전하는 것이지요// 사람의 말이 얼었다가 녹았다가/ 싹이 돋았다가 지지요// 그러는 동안에/ 당신이 죽어도 변하지 않을 살아 있는/ 말의 숲이 되는 거지요// 말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풀이 되고 나무가 되고 나비가 되어/ 스미는 것이지요//

북천의 달빛 / 이대흠
달이 빛나서 북천이 밝습니다/ 북천이 밝아서 당신이 보입니다/ 나를 보고 웃는 낯빛이 고요합니다// 단 하나의 사랑을 지어 달로 띄워 올립니다//

두만강 푸른 물 / 이대흠
파고다 공원에 갔지 비오는 일요일 오후 늙은 색소폰 연주자가 온몸으로 두만강 푸른 물을 불어 대고 있었어 출렁출렁 모여든 사람들 그 푸른 물 속에 섞이고 있었지 두 손을 꼭 쥐고 나는 푸른 물이 쏟아져 나오는 색소폰의 주둥이 그 깊은 샘을 바라보았지 백두산 천지처럼 움푹 패인 색소폰 속에서 하늘 한 자락 잘게 부수며 맑은 물이 흘러나오고 아아 두만강 푸른 물에 님 싣고 떠난 그 배는 아직도 오지 않아 아직도 먼 두만강 축축한 그 색소폰 소리에 나는 취해 늙은 연주자를 보고 있었네 은행나무 잎새들 노오랗게 물들이고 가을비는 천천히 늙은 몸을 적시고 있었지 비는 그의 눈을 적시며 눈물처럼 아롱졌어 색소폰 소리 하염없을 듯 출렁이며 그 늙은 사내 오래도록 색소폰을 불었네//

작침鵲枕 / 이대흠
어떤 사람이 떠나고 그 사람이 그립다면/ 그 사람이 멀리 있다고 생각 마라/ 그리운 것은 내 안으로 떠나는 것이다// 다만 나는/ 내 속을 보지 못한다//
* 작침: 까치 베개. 까치가 집을 지을 때 풀이나 나뭇가지 사이에 집어넣는 작은 돌. 그 돌을 품에 가지고 다니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게 된다함.

​연꽃 피네 / 이대흠
덕진공원 호수에 연숲이 있네/ 그 위로 녹슨 철교 흔들거리네/ 도 미 솔 화음 속 입맞추며 남녀들/ 세상의 철교 건너네/ 불현듯 연숲으로 달디단 바람 불고/ 엉덩이만한 잎새들/ 깔깔깔 들썩이네/ 팔월 땡볕/ 하늘이 쩌억 갈라져 자꾸/ 재채기 나오려 하네/ 햇살, 양수처럼 뿌려지네// 연꽃 피네//

먹어도 먹어도 / 이대흠
먹어도 먹어도 배부르지 않다는 농심 새우깡처럼, 아무리 그리워해도 나의 그리움은, 채워지지 않고, 바삭바삭 금방 무너질 듯 마른기침을 토하며, 그리워 그리워해도 그리움은, 질리지 않고, 물 같은 당신께 닿으면 한꺼번에 녹아 버릴 듯, 왠지 당신의 이름만 떠올라도 불길처럼, 먹어도 먹어도 배부르지 않는 그리움은,//

​사람의 체온 / 이대흠
아파트 공사장에서 몇 달을 지내다보면/ 내 조그만 월세방에서 밥 먹고/ 잠잘 수 있다는 것이/ 고맙게 여겨집니다/ 전철 공사장에서 또 몇 달 보내고 나면/ 전철 타는 게/ 예사롭게 생각되지 않습니다/ 야근과 특근, 때론 밤샘으로/ 위태롭게 쏟아부은 피곤의 무게가/ 그토록 부드러운 바퀴로/ 굴러가는 것을 보면/ 허무라든가 절망이라는 말들이/ 쥐새끼처럼 달아납니다/ 현장에서 몇 년을 비비다보니/ 어디서건 노동은 따스함으로 다가섭니다/ 집들이에 가거나 개업식에 가서/ 수도꼭지를 틀어보기라도 하면/ 나와 같은 노동자들의 땀방울이/ 콸콸 흘러나와/ 때묻은 내 손을 닦아줍니다/ 밤늦어 귀가하여 전등을 켜면/ 딱딱한 스위치에서/ 전기 통하듯 찌릿찌릿 느껴지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버려진 것들은 / 이대흠
버려진 것들은 얼마나/ 조용한가 낡은 몸 한 모퉁이에/ 납 같은 추억을 되새김질하면서/ 제 무게에 자기 육신이 무너지면서/ 천천히 먼지 쌓이는 걸/ 거부하지 않으며 과거의 반짝임을/ 떠벌리지 않는 것들은 얼마나 깊이/ 생각에 잠겨 있는가// 세상의 물을 다 끓여보았다는 듯/ 웃는 저 구리 주전자/ 허공이나 일구어야겠다는 듯/ 녹슨 날을 버리지 않는 쇠스랑// 세상 밖으로 버려지지 못하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데 잠자코/ 독이 되어가는 것들은 얼마나 오래도록/ 칼 갈고 있는가 삭아지지 않는 분노를/ 다시 씹으며// 자기를 버린 자 쪽으로 악취 흘리며/ 이 악물어 말하지 않는 것들은/ 얼마나 지독한가 버린 자를 버리기 위해/ 그들 속으로 썩어가는 것들은//

​저 포크레인 / 이대흠
긁히고 상처난 팔로/ 그렁대는 포크레인// 뼛속 비어가도/ 그저 기름 있으면 일은 멈추지 않는/ 싸워 뺏을 줄도/ 등쳐먹을 줄도 모르는/ 일한 것마저 다 챙기지 못하는/ 저 대책없는// 트럭이나 불도저 같은 형제들보다 먼저/ 험한 땅에 발 딛고/ 뒤따른 트럭에 한짐씩 채워주는/ 채워주고 채워줬다는 말도 못하는/ 내 큰형 같은// 숨은 턱에 차 컥컥대면서/ 쉬지는 않는/ 일구어 온 세월의 허방으로/ 힘겨운 노동의 댓가는 흘러가는데/ 일 욕심만 많은/ 저 미련한 노동자// 가꾸어온 것 다 비워버리고/ 겨운 제 팔에 온몸을 기대고/ 푸욱푹 담배를 피워대는/ 저 중년 사내// 또 어디 가서 일에 미칠 궁리 하는지/ 주둥이는 조그만데 팔뚝만 커진/ 저 인간//

​애벌레들 / 이대흠
점심 먹고 쉴 참이라 굴다리 아래/ 스티로폴 깔고 드러눕는다 불볕이라/ 가만히 있어도 땀이// 방에 들어서듯/ 스티로폴 밖의 땅에 신발을 벗어두고/ 양말을 벗고 드러눕는 사람들/ 한 채의 집, 한 채의 널, 한 채의// 소금꽃 핀/ 작업복 묻어 있던 먼지/ 반쯤 미친 불운이 함께 누워// 뒤척이다 가만 보니 스티로폴은/ 무슨 벌집 같은 무늬를 가지고 있네/ 그 안의 희고 둥근 애벌레/ 꿈틀거리지 않고/ 날아갈 날을 잠자코 기다리는지// 스티로폴 깔고 누운 우리들도/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 날아갈 꿈 없이,/ 애벌레 같네// 바람은 불지 않아/ 더위 날릴 바람은 불지 않아/ 이 일상에는 낡은 허물 벗어버릴/바람이//

​오월 / 이대흠
추모합시다 추모합시다/ 라고 말하면 퉤 퉤 침 뱉듯/ 진달래 진다// 정처 없는 노래 부르며 우리는/ 오월을 말하지만 어떤 외침으로도/ 어떤 고백으로도/ 오월에는/ 뉘우침의 끝에 닿을 수 없다//

봄은 / 이대흠
조용한 오후다/ 무슨 큰 일이 닥칠 것 같다/ 나무의 가지들 세상곳곳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다// 숨쉬지 말라./ 그대 언 영혼을 향해/ 언제 방아쇠가 당겨질 지 알 수 없다./ 마침내 곳곳에서 탕,탕,탕,탕/ 세상을 향해 쏘아대는 저 꽃들/ 피할 새도 없이/ 하늘과 땅에 저 꽃들/ 전쟁은 시작되었다/ 전쟁이다.//

​그해 봄은 / 이대흠
살점이듯 진달래꽃 떨어질 때마다/ 총성이 울렸다 뉴스를 감추며 신문은/ 발행되었고 광주에 간 형은/ 돌아오지 않았다 부고 없는 죽음이/ 마을의 집 사이에 꽂히고/ 함석 쪼가리 같은 어머니 가슴에 안겨 나는/ 어머니가 녹스는 소리를/ 환청으로 들었다 세상은 아득하여/ 날아갈 방향을 허공에 물으며 새가 울고/ 흉측한 날들이 내 곁을 지나갔다/ 전화는 불통되었고/ 치욕의 자궁 속에서 책가방을 윗목에 두고 나는/ 무서운 소문들이 울퉁불퉁한 마을의 길을/ 서성거렸다//

어떤 겨울 / 이대흠
눈이 내렸다/ 대입 원서를 들고 형은/ 서울에 갔다/ 떨어졌으면 좋겠다고/ 아버지가 말했다 어머니는/ 지문을 풀어/ 멍석을 짜나갔다/ 찢긴 손가락을/ 전선용 테이프로 감았다/ 고지서는 눈처럼 쌓여갔다// 합격 통지서를 받은 형은/ 공장으로 갔다/ 아버지는 끊었던/ 술을 마셨다/ 날리는 눈들이/ 백기처럼 느껴졌다//

​그 가을을 기록한다 / 이대흠
그 가을, 숙모는 외출한 지 이 년이 넘었고 술 취한 숙부는 이년이년 욕해댔다 어떤 날, 불빛은 밤새도록 하수구로 흘렀고 더러운 먼지들이 먼 곳까지 날아갔다 대륙의 한켠에선 시장경제가 부활했고 거리의 사람들은 대개 우익에 가방을 메고 다녔다 서울의 변두리 죽을동과 살동의 사이, 열차는 쇠사슬 끄는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자본 없이 늦도록 자본론을 읽으며 나는 그을음처럼 천장으로 올라갔다 나의 길은 보이지 않았고 잠든 아우를 덮은 이불이 무덤 같았다//

​자리잡다 / 이대흠
푸른 사마귀가 목뒤에 자리잡은 그는 과묵한 사람이었다 은행나무 커다란 집에서 그는 아버지처럼 부지런을 부적으로 안고 살았다 한 이십여 년 논밭 깊게 쟁기질해 빛만 심은 그가 고향을 떠났던 때는 은행잎 노랗게 달 뜬 보름이었다 떠나기 전 집집을 돌며 소주 몇 잔 걸치고 아재아짐자리잡고설에올께라이 그의 말처럼 은행잎은 뚝뚝 떨어지고 몇 년이 지나도 그는 오지 않았다 그에 관나한 이야기는 봄날 눈발처럼 전해졌다 서울 어딘가서 미장이 일을 한다는 그는 아들 둘을 대학까지 보냈단다 그가 살던 낮은 집 은행나무 옆은 쓰레기장 되고 그가 돌아온 것은 십오 년 만의 일이었다 그 동안 자리를 잡긴 잡았는지 커다란 차에서 자식 손주 십여 명이 우르르 내렸다 그는 말이 없었다 살았던 집을 한바퀴 돌고 무슨 할말 있는 것처럼 퍼렇게 우거진 은행나무 곁을 지나 더는 흔들리지 않을 자리를 잡았다, 누웠다 무덤 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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