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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윤중목 시인

부흐고비 2022. 3. 21. 21:11

윤중목 시인, 영화평론가
1962년 태어났다. 고려대 경영학과와 헬싱키경제경영대학원을 졸업하였다. 1989년 7편의 연작시 「그대들아」로 제2회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나왔다. 저서로는 시집 『밥격』과 2000년대 개봉된 20편의 한국장편상업영화를 대상으로 역사, 철학, 문학, 즉 인문학과 영화의 크로스오버를 시도한 저서 『인문씨, 영화양을 만나다』, 에세이집 『수세식 똥, 재래식 똥』, 영화평론집 『지슬에서 청야까지』, 시사경제서 『캐나다 경제, 글로벌 다크호스』 등이 있으며, 엮은 책으로 『독립영화워크숍, 그 30년을 말하다』가 있다. 현재 한국작가회의 이사, 영화공동체 대표, 그리고 문화그룹 목선재 대표로 있다.

 



밥격 / 윤중목
내가 오늘의 점심메뉴로/ 800원짜리 또 컵라면을 먹든/ 8,000원짜리 불고기백반을 먹든/ 80,000원 짜리 특회정식을 먹든/ 밥값에 매겨진 0의 개수로/ 제발 나의 인간자격을 논하지 마라./ 그것은 식탁 위에 또아리를 틀고 앉아/ 입과 혀를 교란 시키는 한낱 숫자일 뿐./ 식도의 끈적끈적한 벽을 타고/ 위장으로 내려가는 동안/ 앞대가리 8자들은 모조리 떨어져나가고/ 고소장에서 대장에서 직장으로/ 울룩불룩 창자의 주름을 빠져나갈 때/ 나머지 그 잘난 0자들도 모조리 떨어져 나가고./ 밥격과 인격은 절대 친인척도/ 사돈에 팔촌도, 이웃사촌도 아니다.//

사람 / 윤중목
사람들, 사람들이 그리워진다/ 하루의 수고가 가파를수록/ 눈길 부디 나직한 사람들이/ 그리워진다, 문득 해 떨어져/ 골목골목 담벼락 외등 켜질 때면/ 그네들 얼굴도 하나둘씩 켜진다/ 밥 냄새 모락모락 새어 나오는/ 그네들 말소리 귀를 두드린다// 사람들 그리움이 갈근갈근/ 마른 목젖에 걸리운 저녁이면/ 천상 나도 사람인가 보다, 사람//

 

밥 / 윤중목
밥은 사랑이다.// 한술 더 뜨라고, 한술만 더 뜨라고/ 옆에서 귀찮도록 구숭거리는 여인네의 채근은/ 세상 가장 찰지고 기름진 사랑이다.// 그래서 밥이 사랑처럼 여인처럼 따순 이유다./ 그 여인 떠난 후 주르르륵 눈물밥을 삼키는 이유다.// 밥은 사랑이다.// 다소곳 지켜 앉아 밥숟갈에 촉촉한 눈길 얹어주는/ 여인의 밥은 이 세상 최고의 사랑이다.//

무덤 앞에서 / 윤중목
잔솔나무 빼곡한 산 아래턱/ 양지바른 자리는 용케 잡았소./ 구색은 갖춥네 봉분 앞자락에/ 매끔한 흰 비석도 하나 세웠소.// 논밭갈이 자식갈이에 일평생/ 등날 퍼런 농투성이 張三李四로/ 이름 석 자 흙 속에 묻고 살더니/ 죽어서야 몸뚱이도 땅에 묻었소.// 이생 등진 관 속에도 세월은 슬어/ 베옷 동인 육골은 이미 썩고 삭고,/ 철따라 무덤가에 들꽃 향기 그윽해도/ 고향 떠난 자손들 낫질 끊긴 지 오래./ 바람 불어 뗏장이 어질러진 밤이면/ 뒷산 칡넝쿨 사납게 얼크러졌소.//

오만원 / 윤중목
오랜만에 서울 올라와 만난 친구가/ 이거 한 번 읽어보라며 옆구리에/ 푹 찔러준 책/ 헤어져 내려가는 고속버스 밤차 안에서/ 앞뒤로 뒤적뒤적 넘겨 보다 발견한/ 책갈피에 끼워져 있는 구깃한/ 편지봉투 하나/ 그 속에 빳빳한 만 원짜리 신권 다섯 장/ 문디 자슥, 지도 어렵다/ 안했나/ 차창 밖 어둠을 말아대며/ 버스는/ 성을 내듯 사납게 내달리고/ 얼비치는 부연 독서등 아래/ 책장 글씨들 그렁저렁 눈망울에 맺히고//

나의 기도 / 윤중목
처음으로 여인의 벗은 몸을 만졌을 때처럼/ 처음으로 파도치는 바다를 보았을 때처럼/ 처음으로 백범일지를 읽엇을 때처럼// 다시금 심장의 고동소리가 듣고 싶다/ 매순간 제발 두근대다 살고 싶다//

약속 / 윤중목
그대 떠나는 빈자리에/ 우리 한 그루 나무를 심자./ 센바람에 빛 고운 꿈을/ 가슴 속 깊이 싶어 간직하자./ 그래서 그대 돌아올 먼 날,/ 궁근 땅에도 잎새 우거진/ 그 늠름한 나무를 노래부르자./ 푸르러진 가슴을 열어 우리/ 못다 한 꿈을 다시 피우자.//

대설大雪 / 윤중목
땅 위에 곤두선 모든 숨붙이들아/ 하늘의 명령이다/ 무장해제하라//

커피 한 잔 / 윤중목
펄시스터즈라고 옛날에 듀엣 자매가수가 있었는데요/ 언니는 동아건설 최 회장님의 부인이 되셨고요/ 지금으로 치자면 아이돌 걸그룹인 셈이었는데요/ 근데 초대형 히트곡이 〈커피 한 잔〉이었는데요/ 신중현 씨가 작곡 작사 다 한 노래였구요/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그대 오기를 기다려봐도/ 웬일인지 오지를 않네 내 속을 태우는구려/ 뭐 이런 가사였는데요/ 기다림이란 게 데이트하는 거면 설렘이라도 있지요/ 이게 철석같이 입금하기로 한 돈 기다릴 때는요/ 그거 받자마자 나도 딴 데 당장 부쳐야 하는데/ 아 얼마 되도 않는 거/ 이 시간까지 안 보내고 뭘 하고 자빠진 건지/ 만만한 NH농협 인터넷뱅킹만요/ 들어가봤다 들어가봤다 또 들어가봤다/ 잔액은 달랑 그대로 변동 없구요/ 노트북 바짝 더 끌어댕겨서/ 들어가봤다 들어가봤다 또 들어가봤다/ 채신머리없이 연방 연신 그래봐도요/ 웬일인지 돈 아직 오지를 않네/ 이거 정말 내 속을 태우는구려/ 커피보다 열 배는 더 쓰게요/ 스무 배 서른 배는 더 쓰리게요/ 웬일인지 돈 아직 오지를 않네/ 이거 정말 내 속을 태우는구려//

고향 열차 / 윤중목
그저 주머니에 담배 한 갑이면 좋다./ 가고 오는 왕복 기찻삯에다/ 출출하면 사먹을 한 그릇 국수값이면 족하다./ 거칠 것 없이 가난한 몸을 싣고/ 겨우내 웃자란 볼그라니 생각들일랑/ 봄바람에 훌훌 털어 떠날 일이다.// 창쪽 자리면 더욱 좋다./ 달려드는 산이며 물이며 들길 따라/ 오므라든 숨구멍을 마음껏 벌름대련다./ 따스한 햇살에 졸음이라도 내려/ 차창을 베개 삼아 꾸버꾸벅한들/ 누구하나 뭐랄 사람도 없잖나.// 고개 들어 휙 하니 주위를 둘러보면/ 모두가 낯익은 말투, 옷차림, 얼굴 표정들./ 덥석 손이라도 잡아끌고 싶어진다./ 고향으로 가는 열차 안에는 벌써/ 고향 마을 흙냄새며 고향 사람 살냄새가/ 흐드러진 들꽃처럼 피어오른다.//

부럼 / 윤중목
음력 정월 대보름날 아침/ 부스스 잠에서 깬 나에게/ 아내가 호두 두 알 쥐어주며/ 내 더위 가져가라!/ 훠이훠이 외치라 하네.// 그깟 것 더위 따위 뭔 대수라고/ 나에게 가져갈 건 따로 있는데./ 온몸 상피에 오글오글 들붙어있는/ 이놈의 찰거머리 가난이나 가져가지.// 호두껍데기 창밖으로 휘익 내던지며/ 내 가난 가져가라!/ 내 가난 좀 가져가라!/ 꺼이꺼이 외치고 또 외쳤네.//

 

침묵 / 윤중목
침묵에도 소리가 있다./ 풀밭 미끄러지는 바람소리처럼/ 쉭쉭 고막을 마찰하는 소리가 있다./ 귀를 막아도 눈을 가려도/ 넝쿨처럼 기어붙는 소리가 있다./ 침묵하게 만든 자들의 거기/ 불안한 가슴팍에 마침내/ 비수로 꽂히는 소리가 있다.// 침묵에도 소리가 있다./ 소리보다 더 곤두선 소리가 있다.//

옥수동 비둘기 / 윤중목
옥수동 병순이네 다가구주택 옥상 베란다는 동네 비둘기들의 휴게소가 되어버렸다. 하루는 구구 구구구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와서는 조쪽 갔다 요쪽 갔다 베란다 위에서 종종걸음을 쳐대길래 어제 병순이가 먹고 남긴 포테토칩 부스러길 뿌려줘 봤거든. 그랬더니 황사먼지 소복이 쌓인 시멘트 바닥에 연방 부리를 콕콕 거리며 포테토칩 알갱이만 솜씨 좋게 잘도 발라먹더라구. 그렇게 하길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또 그다음 날에도.... 이제는 숫제 식구 몇까지 데리고서 한 대여섯 마리가 아침이면 쭈우욱 베란다로 모여드는 거야. 김광섭의 성북동 비둘기는 콩알 하나 찍어 먹지 못하고 채석장 포성에 피난하듯 쫓겨 다녔다는데 병순이네 옥수동 비둘기는 그나마 다행일까. 포테토칩 부스러기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푸드덕 지붕마루에 올라앉아 희뿌연 공기에 근시로 변해버린 쌀톨 같은 눈알을 껌벅껌벅하며 떠나온 성북동 파란 하늘을 그리워한다.//

군중 / 윤중목
아뿔짜, 브레이크페달이 떼어진 채/ 무한궤도를 무한질주하는, 글로벌/ 무한경쟁시대의 단말마적 아우성!// 오싹한 그 격투장으로 불려나와/ 숨 한번 크게 쉬지 못하고 별안간/ 밟혀 죽고 찔려 죽고 맞아 죽는// 저 무수히 많은, 총알받이 인/ 저 무수히 많은, 싸구려 인/ 저 무수히 많은, 바로 나인//


아스팔트도 자연이다 / 윤중목
아내가 문득 연애 시절을 돌이켜/ 내가 했다던 말끝을 꼬집고 나선다./ 글쎄. 아스팔트도 자연이랬다고,/ 그런 비상식적 궤변이 어디 있냐고,/ 비상식이든 숫제 아주 몰상식이든/ 허나 내 육골의 성분이 그러한 것을./ 유년과 소년과 청년 시절 모두를/ 도시의 아스팔트 새까만 타마구 속에/ 어느덧 중년인지 장년인지 까지도/ 고스란히 파종해 심어버린 나에겐/ 그 거북이 등딱지 같은 아스팔트가/ 사시사철 내 밑동이 뿌리박고 흡수한/ 무기질 토양이요 거름이자 양분인 것을./ 수수십 년 그 위를 찍고 지나간/ 사방팔방 신발 자국과 타이어 자국이/ 내 발육과 성장과 이제는 노화까지의/ 전 과정 다큐멘터리 생태화석인 것을./ 그래서 아스팔트도 자연이다./ 때론 비극적으로, 때론 희극적으로/ 그래서 내겐 아스팔트도 자연이다.//

향기 / 윤중목
장미꽃, 백합꽃 같은/ 꽃송이, 꽃봉오리에서만/ 깊은 향기가 나는 게 아니다.// 화장품, 향수라든지/ 방향제, 방향초라든지/ 내지는 갓 구운 빵,/ 갓 내린 커피에서만/ 짙은 향기가 나는 게 아니다.// 분명 사람에게도,/ 삼태기 같은 너른 그의 앞자락에/ 세상 모질고 험한 숱한 이야기들을/ 온몸으로 쓸어 담은 사람에게도/ 그윽하게 피어나는 향기가 있다.// 그의 존재, 그의 이름만으로도/ 사나운 세파가 죽죽 그어댄/ 푹 팬 상처들이 아물려지는/ 취할 것 같은 향기가 있다.// 제발, 내가 그런 사람,/ 그런 향기이고 싶다!//

상처 / 윤중목
오늘 입은 상처는/ 오늘을 넘기지 마라./ 오늘 지나 내일이면/ 굼실굼실 계속해 기어 나오는/ 짤부대의 짤벌레들처럼 또 다른/ 내일의 상처가 파고드는 법./ 온몸의 힘을 다해/ 온정신을 쏟아부어/ 오늘 받은 상처를/ 오늘 안에 꼭 아물게 하라./ 오늘의 이 상처는, 쉿!/ 잠시 후 자정이 데드라인이다.//

바퀴 / 윤중목
바퀴는 둥글다네/ 세모도 네모도 아니고/ 오로지 둥글 뿐이네/ 반반한 길이건/ 울퉁한 길이건/ 둥글어야만 앞으로/ 쉬이 잘 굴러가네// 그러니 행여 볼그라진 속일랑/ 꽁하고 뾰조록한 생각일랑/ 갈고 자르고 두들겨/ 둥글게 더 둥글게/ 마름질할 일이네// 모난 세상 그것이/ 전진하는 자의 바로/ 탄탄한 내면공학이라네//

리어카 / 윤중목
할아버진 리어카쟁이셨네./ 역전앞 도로나 시장통 거리에/ 요즘으로 치자면 용달차 짐꾼 정도?/ 젊은 날 높은 학식 다 집어던지고/ 길고 긴 역마살 이십 년 객지 생활 끝에/ 돌아와 고작 바꿔 탄 말이 리어카셨네./ 그나마 근력은 아직 쓸 만하다는/ 표시셨네, 남은 생 의지할 단 하나뿐인.// 할아버지 어쩌다가 쉬시는 날이면/ 리어카는 자연 나의 독차지였네./ 신나는 전액 무료 놀이기구 차였네./ 할아버지 나 난짝 들어 태우시고/ 온 동네 길이란 길은 들어갔다 나왔다/ 부릉부릉 입으로 찻소리 흉내까지 내가며/ 리어카를 부리셨네,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세상 최고의 브이아이피 꼬마 승객을 위해/ 당신의 육신 같은 리어카를 밀고 끌고 하셨네.// 할아버지 스러지는 노년의 끝자락과/ 파릇파릇 돋아나는 내 유년의 앞자락에/ 아릿한 두 줄 바퀴자국을 찍어놓은 리어카,/ 할아버지 죽어 남긴 단 하나의 유품이셨네.//

으악새 / 윤중목
아버지 읍내 친구집에 돈 빌리러 가시던 날,/ 엄마는 서둘러 기지바지를 다리셨고./ 광 구석대기에 쑤셔 박아둔 구두짝도 꺼내어/ 켜 쌓인 먼지 손으로 털어 툇돌 위에 올려놓으셨고./ 돈 꾸러 가지 선보러 가느냐며/ 아버지 짐짓 귀찮다는 듯 툴툴거리셨고./ 그래도 또 아버진 아버지대로/ 상자곽에 꾹꾹 곶감을 눌러 담아 보자기로 싸셨고./ 그것 들고 아버지 잰걸음으로 집문을 나서셨고.// 온종일 맵싸한 벌바람이 살갗을 그어대던/ 그날, 늦은 밤이 다 되어서야/ 아버지 만취해 집으로 돌아오셨고./ 아침에 들고나간 보자기 꾸러미/ 싼 채로 그냥 그대로 다시 들고 오셨고./ 엄마는 저녁상 차릴까 여쭤보셨고./ 아버지 생각 없다며 손을 가로저으셨고./ 비틀비틀 방으로 드시다 말고/ 툇돌 맨바닥에 철퍼덕 내려앉으셨고.// 술기운에 꾸부정한 음정, 박자로/ '아아,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 '아아,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 당신의 18번지 고복수 씨 노래 첫 소절만/ 계속 계속 토악질하듯 꺽꺽거리셨고./ 찬 밤공기에 입김이 바스락거릴 때까지/ 희뿌연 달빛 아래 오토리버스처럼/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꺽꺽거리셨고.//

생업은 소중한 것이여 / 윤중목
우리 것은 소중한 것이여/ 박 모 명창의 청심환 광고 가락을 본떠/ 생업은 소중한 것이여// 아이들과 아내가/ 세상없는 아빠와 남편으로/ 여전히 나를 믿고 바라보는 한/ 생업은 소중한 것이여// 순진한 그 믿음 차마 허물 수 없어/ 어제도 오늘도 신발코 앞에 툭하고 던져지는/ 이종격투기 헤드록 같은 구속과 때론 굴욕까지도/ 목울대에 울컥울컥 치밀어 오르는/ 남자의 성기 같다는 욕지거리도/ 늘상 입는 옷가지와 액세서리쯤으로 여겨야 하는 한/ 생업은 소중한 것이여// 그 옷가지 나날이 두툼해지는 한/ 훌훌 벗어던져 버리기엔 어느덧/ 내 알몸이 너무도 배싹 말라 보이는 한/ 그럴수록 이빠이 더 목청을 돋워/ 생업은 소중한 것이여//

삼수갑산 / 윤중목
나는야 오늘 낮에 책방엘 갔었네./ 나흘 동안 꼬박 밤새워 번 돈/ 18만 5천원을 몽땅 털어서.../ 이 코너 저 코너 휘젓고 다니며/ 책, 책을 샀네, 숫제 반항적으로 샀네./ 도합 16권이었네./ 그 흔한 만 원짜리 한 장이 아쉬워/ 새 책을 사본 지가 어언 9개월./ 돈 없어 밥 굶는 설움만큼은 아닐 테지만/ 돈 없어 책 굶는 설움도 보통이 아니란 걸/ 질겅질겅 씹어온 지난 내 9개월이었네./ 중년의 허리춤에 둥지를 튼 이 몹쓸 궁핍이/ 얼마를 더 길게 갈지 가늠이 안 되거늘,/ 당장 또 며칠 내로 내야 할 이번 달 월세도/ 어디 가서 구해야 할지 묘책이 안 서거늘,/ 예라이, 배짱 좋게 호사 한번 부려봤네./ 내일이면 헉-헉-헉- 삼수갑산을 갈망정/ 오늘 나는 허-허-허- 산천 구경을 갔었네./ 산천보다 그윽하게 우거진 책방엘 갔었네.//

불행에 대하여 / 윤중목
불행은 직선으로 오지 않는다./ 때로는 사선으로 때론 곡선으로/ 늘, 불침번 선 눈의 정면을 비끼어 온다./ 불행이 드디어 가시각도로 들어온 때,/ 몸에는 이미 이곳저곳/ 젤리 같은 빨판들이 호스를 박고 있다./ 쭈욱- 쭈우욱-/ 죽지 않을 만큼의 피와/ 죽지 않을 만큼의 진액을/ 뽑아 먹고 나서야 불행은 비로소/ 퉁퉁 불은 빨판을 거둔다. 갈 때도/ 불행은 직선으로 가지 않는다./ 물러나는 동선을 좌우로 비틀며 간다./ 그렇게 최후까지 제 수명을 늘인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 윤중목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때 묻은 허물 한 겹 벗어/ 한 살 한 살 또 그렇게/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차마도 이루지 못한 꿈이기에/ 초조하게 긴 밤 뒤척이며/ 뼈마디 삭히는 것이 아니요/ 세월이 무지러진 가슴을 쓸어/ 잔잔하게 돌아점을 배우는 것이라고/ 험한 세상 끌어안은 속내 깊은 산처럼/ 묵묵하게 돌아점을 배우는 것이라고// 그리하여 그 돌아서는 뒷 모습에/ 한 뼘 더 길어진/ 더 그러운 그림자 드리우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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