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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김도연 시인

부흐고비 2022. 3. 19. 22:23

 

 

김도연 시인
1968년 충남 연기에서 출생.

2012년 《시사사》를 통해 등단.

시집 『엄마를 베꼈다』

 

 

 

엄마를 베꼈다 / 김도연
-언젠간 알게 될 것이여/ 씻지도 않은 씀바귀 뿌리를 잘근잘근 씹으며/ 엄니는 알듯 모를 듯 혀를 찼다/ 그때마다 내 목구멍에도 씀바귀가 뿌리를 내렸지만/ 파란 대문을 떠나는 순간까지도 나는/ 씀바귀의 쓴 맛을 알지 못했다// 그 후/ 밤마다 꿈속까지 뻗어 내려온 씀바귀 뿌리가/ 나를 파란 대문으로 인도했지만/ 세월의 속살은 아직 부드러웠고/ 파란 대문은 이미/ 닿을 수 없는 고향집이 되어 있었다// 별을 따고 싶었지만/ 도시의 별은 너무 높이 떠 있었다/ 파랑새는 차츰 말을 잃어 갔으며/ 눈은 점점 깊어만 갔다/ 결국 나는 내 슬픈 눈망울에 별을 그려 준다는 남자와/ 살림을 차렸다// 세월은 저희들끼리만 행복했다/ 남자의 언약은 언제나 공수표였다// 별을 보기 위해선 눈을 감아야 했다/ 별보다 더 높은 하늘에 파란 대문이 걸려 있었다/ 세월이 알게 해 준다던 엄니는 그 세월에 막혀/ 끝내 파란 대문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도깨비 바늘만 무더기로 피어/ 함부로 고향집을 넘보고 있었다//

나의 별서 / 김도연
기다리면 오는 것이지만 그녀는 오고야 말았다/ 목련꽃 하얗게 침입한 오늘 아침 이 순간에도/ 창가에 부딪히는 그 모든 풍광이 지겹지 않다/ 봄날은 가는 것이고/ 또 내년을 기다리지 않아도/ 한순간 애틋한 문을 열었다가 닫을 것이고/ 닫힌 문을 바라보며 무심하게/ 또 옷깃 여며야 함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슬픔은/ 서럽다거나 애틋함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나의 별서이므로/ 후회의 밤은 그래서/ 길다// 논산역 귀퉁이 작은 플랫폼 뒤꼍에 엄마는 피어났고 봄꽃처럼 그렇게 떠나보냈었다. 그때 웃으며 붉은 눈시울 꾹꾹 참아가며 등 돌리는 엄마의 모습을 보고야 말았다. 그리고 며칠 전 우리 집 뜰에 다시 제비꽃이 피었다. 살아낸다는 것은 이 문과 저 문 사이를 부지런히 통과해서 무심히 사라져가는 것이라고 엄마는 말했다. 너무 슬퍼하지도 아파하지도 말자. 엄마를 만나고 엄마를 보내며 사는 일이 슬픔을 비껴서며 외로움을 견디는 나의 별서 아니었던가. 그렇게 엄마는 엄마의 논리로 엄마답게 봄을 건넜고, 나는 참으로 무덤덤하게 엄마를 만나고 보내는 중이라고 애써 말하고 싶은 것이다.//

전언 / 김도연
아가, 오늘이 니 귀 빠진 날인디 미역국은 챙겨 묵었냐, 나가 엄동설한에 느그 오빠랑 니를 낳아 이리 꼴딱꼴딱 아픈가 보다. 날갯죽지가 있음 훨훨 날아가 고깃점 쑹쑹 썰어 넣고 미역국맛나게 끓여주고 올낀데 이젠 눈도 어둡고, 쩌기 날아댕기는 새만 보면 부러워 죽겄당께, 아가, 남들은 살도 통통하게 찌고 이쁘게 화장도 하고 다니더구만 무슨 샛바람에 공부를 한다고 밤늦게까지 잠도 안 자고 머리털 다 빠지게시리 삐쩍 곯아서 다니누. 죽도 못 얻어 먹은 사람처럼, 시 나부랭이는 호랭이나 처먹으라고 줘버리고 맛난 것도 사먹고 새처럼 훨훨 날아 댕기거라 잉, 시절 금방 간다야, 금방 늙어 빠져서 아무도 안 쳐다본땅께, 지금이 얼마나 이쁠 나인디, 똥개도 복슬복슬한 이쁜 놈만 따라다니지 털 숭숭 빠져버린 개새끼는 쳐다보지도 안 한당께, 똥개는 뭐 눈꾸멍이 없깐? 이제 나이도 한 살 더 먹었으니께 좋은 놈 만나 연애도 하고 그놈이 속 썩이걸랑 이 에미한테 델꼬와라 잉! 나가 다리몽댕이를 똑 분질러 놓을 테니께, 나가 니 가졌을 때 하늘에서 내려 오는 조롱박을 치마 가득 따는 꿈을 꿔서 너는 어느 놈을 만나도 잘 살끼다, 나가 죽어서도 니 생일날 미역국 먹나 안 먹나 눈 요래 치켜 뜨고 지켜볼란다. 아따 근디 저놈의 똥개는 왜 저리 지랄 염병을 떨어쌌는지 모르것다. 밥 달라는갑다, 아가, 이만 전화 끊어야 쓰겄다. 에미 말 명심허고,//

고추벌레 / 김도연
말라가는/ 고추 속을 들여다보니/ 붉은 고추보다/ 더 바싹/ 말라가고 있는 고추벌레// 염천 속에 들어/ 고추씨만 파먹고 있다//

슬픔을 덧칠한 슬픔에게 / 김도연
온몸으로 꽃을 피우다/ 와르르 억장 무너지는 슬픔의 본성 때문에/ 먼 산을 향해 입술만 달싹거린다 모두들/ 이렇게 머물러 있는 이곳/ 여기는/ 묵정밭을 닮아 천백 일 일하고도/ 하루가 지나도록 밭을 갈아야 허공에 헛손질하는 날들을/ 떠나보낼 수 있다고// 깊은 한숨에 간절히 원하는 것들을 찾아/ 우리는/ 너무 멀리 와 있다// 별들은 서로의 호칭을 부르다가 서로를 버텨내겠지// 밀어내는 슬픔과 밀려오는 슬픔이 자꾸 늘어나는 것을/ 온전히 누구의 탓으로 돌릴 것인지/ 떠나갈 것들 앞에 햇살은 앞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질겅질겅/ 슬픔을 씹어대고 있다// 겨울과 가을이 엎치락뒤치락 천일의 시간을 수놓고 있는데/ 기억을 잊은 파랑새가/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슬픔 하나를 부리에 물고 찾아올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지금 당신은/ 그 먼 곳에서 번쩍/ 두 손 흔들며 나를 부르시겠죠?//

쉰 / 김도연
하 수상하게몹시 또렷한 의식/ 그러나/ 쉰// 무언가 참견하고 싶어져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기도 하는/ 쉰// 꽃을 버린 수선화가/ 더 충만해 보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축복 아니냐고/ 되살리고 싶은 기억들만/ 떠오르는// 쉰,/ 수선화의 꽃그늘이라고 쓴다//

아무도 모르게 나이가 들어갈 무렵 / 김도연
거울 앞에 적막이 앉아 있다/ 습관처럼 제 몸을 끌어안고 웅크리고 있다/ 강아지 코코도, 코코의 그림자도/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덮어둔 시집도/ 습관처럼 적막을 닮아간다// 그렇게 모두들 아무도 모르게 나이가 들어갈 무렵// 꽃들은 참 용감하게도/ 피었다/ 진다//

젖은 꽃잎이 다 마르기 전에 / 김도연
이슬방울 하나가 구르고 굴러/ 무사히 지상에 안착할 때까지/ 풀잎 하나가 기꺼이 제 몸을 낮춰주던 것처럼/ 나를 위해 스스로 암흑이 되어버린 그림자가 젖은 풀잎처럼/ 내 곁에 눕습니다/ 가벼운 침실에 둘은 너무 무거운데/ 어쩌자고 달빛은 또 이렇게 무분별하게 번져오는지/ 어쩌자고 봄날은/ 아무 대책도 없이 랄랄라 랄랄라 웃고만 있는지/ 눈 질끈 감고/ 나를 지탱하는 흔들리는 당신에게 위로도 해보지만/ 그래요, 그것이 나를 향한 연민이라면 이대로 폭삭/ 늙어가도 좋아요/ 주인없는 어둠을 지우며/ 내 속에 웅크린 나 자신을 향한 눈먼 안부쯤이야/ 지구 한 바퀴를 돌아온들 어때요/ 구차한 변명처럼 자장가를 부르던 날들이 랄랄라/ 늘어가겠지만/ 뭐, 괜찮아요!/ 어제의 기억은 내일도 부재중일 테니까요/ 젖은 풀잎이 다 마르기 전에/ 나 홀로/ 어느 먼 나라로 여행을 떠나 이슬처럼 구르고 구른다 해도/ 지상의 침실은/ 언제나/ 늘 그랬던 것처럼//

쪽파의 진실 / 김도연
쪽파를 다듬다가/ 뽀얀 속살을 보며/ 우리도 저런 순하고 간지러운 시절 있었지 생각했다// 얌념을 골고루 섞어가며/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굴리고 포개지며/ 쪽파가 파김치로 거듭나는 과정을 지켜보다가// 너와 나의 여정도 오랫동안/ 쓰라리고 아파하며 저려지고 숨죽이며/ 여기까지 도착했구나 생각했다// 시퍼런 숨, 죽이며/ 붉은 양념들 온몸에 덕지덕지 바르고/ 얌전히 누운 쪽파의 실체/ 너를 위해 오른쪽과 왼쪽 자리까지 양보했다면/ 서로 상처 줄 일 없었을 것을,// 이제야 실천에 옮긴다/ 죽어야 살아나는 쪽파의 진실이/ 맵고 무섭다//

첫사랑 / 김도연
오빠 없는/ 오빠 방에서 오빠를 베꼈다// 아무도 찾지 않는 오후의 예배당 그림자가/ 한 송이 사과꽃을 매달고/ 비스듬히/ 일기장 위에 기댄다// 오빠 없는 방에서 오빠를 찾는/ 오빠 없는 나는// 오빠가 알지 못할 이상한 사람이었다//

꽃들은 고개를 북으로 꺾고 / 김도연
태양의 골목길 끝에서 꽃들은 고개를 북으로 꺾는다// 수직으로/ 수직으로 떨어지는/ 빗방울// 수런거리다가 햇살에 녹은 봄날의 강물은/ 얼굴 치켜들고// 긴 겨울 침묵했던 입술을 닦는다// 갑작스런 사월의 강설/ 모질게도 꽃잎 짓밟아 한동안 소란 피우고난 뒤에서야 바람에/ 날개 접는 꽃들/ 꽃들은/ 죽어서도 꽃무덤 공동체를 이루고/ 노래는 비에 젖어 시체로 눕는 다는 것을/ 계절은 알고 있었을까// 태양은 골목길 끝자락에 와서 고개를 동남향으로 돌리려다가/ 떠나기 싫은지 투닥투닥/ 오가는 빗줄기 사이사이 꽃의 행간을 넘나드는/ 새들은 하얗게/ 하얀 기억을 쏟아 붓는다// 석 달 열흘간 기차와 버스를 갈아타고 꿈속의 계단을 찾아 힘겹게/ 물병자리에 올라온 나는/ 왜 여기서/ 홰를 치는 것일까// 간결한 눈망울 빤한 거짓말로 밝은 표정을 짓는 데이지 꽃이/ 파랑새가 되어/ 날개 파닥이는 봄날// 꽃들은 고개를 북으로 꺾고 날아간다//

독백, 바코드 / 김도연
오후 세 시가 지나가는 소파에 앉아/ 어항 속 금붕어와 수다를 떨고 있는 고양이를 본다/ 가슴에 구멍이 생기면 혼잣말이 많아지지/ 고양이가 창가 쪽으로 귀를 접어버린다// 떠다니는 오후가 구름빵을 뜯는다 나는 고양이 발톱에 매니큐어를 발라준다 햇볕이 하얀 털을 쓸고 있다 시간의 부스러기가 크림거품처럼 부풀어 오른다 시계바늘은 거품 속으로 째깍째깍, 고양이가 빵을 물고 낮잠에 빠진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잠의 층적운 속으로 뛰어든/ 고양이 울음, 야옹// 잠시/ 내가 고양이의 고향인지, 고양이가 내 할머니인지// 아무도 오지 않고 아무것도 남지 않고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사물들의 오후가 떠다닌다//

키치* / 김도연
인디언 나라에 배꼽이 깊고 푸른 달 떴다/ 세 마리 거위가 끄는 수레/ 찬드라의 눈부신 전언을 손끝으로 받아 적으면/ 아주 오래전/ 죽은 사내가 나타난다// 달빛 지자 풀잎에 새겨진 수바시따 펼쳐진다/ 종착역에 닿기 전/ 경전 속에 갇힌 새들을 날려 보내야지/ 울지 못하는 새의 몸엔/ 산 자의 영혼이 깃들지 못한다// 악귀가 창궐하는 깊은 계곡/ 바가바드기따의 눈 아픈 전언을 두 개의 무덤 속에 새겨 넣어야 한다// 대지에 떠도는 용사의 귀환을 위해 세 마리 거위가 끄는 수레 아홉 번째 돌산을 넘는다//
* 키치: 존재와 망각 사이의 환승역

낙루의 DNA / 김도연
최초의 울음은 에덴에서 왔다/ 내 전생은 먼 좀생이별에서 왔을 것이다/ 높이로만 가늠되는 슬픔의 성분들/ 억수의 빗줄기로 뛰어내린다/ 신성한 것은 원시적인 것/ 좀생이별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나선의 물이랑을 지우며/ 연잎 위로 뛰어든 빗방울/ 둥근 흔적으로 몰려다닌다/ 그 방향을 따라가 보면/ 흔적 없는 흔적들/ 찾아갈 주소가 없다/ 연꽃들은 저들끼리 수런거리며/ 몸을 납작 기울인다// 분간 없이 쏟아지는 빗속에서 좀생이별을 찾아 나선 길/ 젖은 것들이 길을 떠메고 사라진다//

마이사 능소화 / 김도연
멀고 먼 별에서 편지가 왔다/ 꽃에게 다가가려 노력하면 할수록 첫 발자국부터 발걸음 무거워진다/ 바람은 햇살의 연인 햇살은 능소화 꽃술에 보이지 않는 과녁, 꽃의 심장에/ 화살을 겨눈다/ 오래오래 오랜 생각 끝에 간절히 다가서며/ 무장을 푼 짙은 향기, 능소화는 어느새 입맞춤하려고/ 눈을 감는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하늘 언저리 멀리 두고 온 애절한 사연 속으로 별이 지고/ 별이 진 허공에 몸을 매달아놓은 능소화 입술 붉은 꽃/ 상처 입은 꽃은 날개가 있어도 날지 못하고/ 붉은 뺨에 키스를 퍼붓는 햇살 속으로/ 손을 흔든다/ 그러다가 예고도 없이 툭 떨어지는/ 붉은 꽃 모가지 기다림의 온도가 꽃 속에 식어가고// 낯선 별에서 편지가 날아온다//

내게 새를 가르쳐 준 사람 / 김도연
회화나무 높은 가지에 둥지를 틀었다/ 아직도 남은 생을 정성껏/ 보듬기 위해/ 차가운 부리를 밤새 깃털 속에 파묻었다// 따뜻한 숨결로 남아있다고 믿는/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는 당신/ 있고도 없는 당신이라는 존재를/ 세상 모든 이들이 몰라봐도 상관은 없었다// 아무도 모르게 봄꿈은 야위어가고/ 눈부신 계절이 환희 속에 시들어 갔었고/ 혼자 남아 매일 매일 작별을 한다고 해도/ 당신 곁에 오래오래/ 남아있고 싶을 뿐// 한 번도 내 것인 적이 없었지만 언제나/ 내 것이라 착각하며/ 한 순간 한 순간 내 것으로 품어 안은 시간들이/ 이번 생에 울다웃다 갔다고 믿고 싶었다// 만삭달이 그믐달로 변해갔어도/ 한 겨울 추위 속에 처음의 새벽 종소리를 기억하며// 우리는 한통속 함께 두 눈 질끈 감고 중얼거렸다/ ‘누가 파랑새를 훔쳐갔을까’//

선인장에 꽃이 피면 / 김도연
선인장에 꽃이 피면 가시는 비극일까, 희극일까// 좌절감에 흠뻑 억눌린 그날 이후// 타로점괘에 나타난 사람을 운명인 듯/ 직녀처럼/ 기다렸지만/ 칠월의 밤은 쉽게 오지 않는다// 당연한 습관처럼/ 농담이 듯/ 팔월의 장맛비가 ‘늑대의 발톱’*을 들쑤셔/ 지근지근 속눈썹 떨린다// 뜬금없이 잦아드는 우울이라는 불청객과/ 천만 개로 주름지는 불안감// 선인장에 꽃이 피면 그 많은 가시는 비극일까/ 싱거운 희극일까//
* 늑대의 발톱: 피부 발진이 늑대 발자국을 닮아 ‘루프스(lupus)’라고 불리는 만성 자가면역질환.

꽃처럼 잠든 너를 / 김도연
누군가 꽃처럼 쉽게 잠든 너를 하늘 아래 구름처럼 내려놓고/ 라일락 꽃그늘에 휘감기도록/ 방치하는 일// 꽃처럼 나른하게 잠든 네 모습을 삽화로 고정시키는 일// 놀란 네가/ 햇볕의 쪽문을 열고 도망치도록 모르는 척 내버려두는 일// 잘 배열된 총상꽃차례 꽃잎들이 변심한 홀씨들로 수많은/ 깃털 나부껴 어제의 뜰이 되도록/ 배려하는 일// 습관처럼 안개비는 내리고/ 미래를 알 수 없는 까마귀 울음소리가 들려도/ 아무 상관하지 않는 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겨우 끊어진 시간을 잇대며/ 불순한 계절에도 흰 종이학 날아오를 때를/ 꽃잎처럼 기다리는 일// 기다리며 너의 이름을 부르는 일// 너를 다독이다가 정지된 시간 속으로 익숙한 발길 돌려/ 꽃이 돼버리는 일//

봄, 접선 중이다 / 김도연
초대하지 않아도 어디든 잘 찾아온다/ 삼월의 별들과 삼월의 꽃들// 봄꽃은/ 아무 데나 나타나/ 별점 꽃점/ 비밀의 문 열어젖히듯 흩어지게 핀다// 찬바람에 전신을 내맡긴 너도바람꽃의 얇은 몸짓/ 눈 위의 황제복수초는 계절 밖에서도 의연하다/ 괴불주머니는 아직도 온전한 사랑을 찾아 헤매지만/ 이른 봄 꽃마리꽃들은 동쪽 일곱 시 방향에/ 처녀꽃자리// 천상의 별자리를 만든다/ 저마다 꿈속에 신화 같은 별자리 하나씩 품어온 꽃들/ 3월의 꽃들은/ 타로점을 치듯 툭툭 붉어진 꽃자리에/ 비밀한 봄밤을 꾸민다// 나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 하나/ 처녀자리 백양자리 물병자리 산양자리 어디를 둘러봐도/ 내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없는 별자리를 찾아 떠도는 별 하나로 반짝/ 아직은 봄,/ 봄이 끝나기 전에/ 내가 설 자리를 찾아 궤도 진입을 서둘러야 한다// 봄에 접선, 접신 중이다//

화려한 색상은 죽음을 부른다 / 김도연
남아메리카 물포나비*가/ 죽음을 부르는 화려한 색상의 나비가/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보단/ 화려함을 뽐내다가/ 사랑의 메신저만 하다가// 떠다니는 새털구름처럼/ 마치 파도를 치듯이 나는 모습에/ 바다는 새소리를 냈다// 그래서 제일 먼저 죽는다//
* 남아메리카 물포나비: 날개 윗면, 풀빛 여린 코발트블루 투명한 광택이 나며 아랫면은 어둠 속 갈색의 독특한 눈알 모양의 무늬를 지니고 있다.

피카츄의 사기 / 김도연
내 몸 곳곳에 우글거리는 귀여운 악마들 언제 불쑥 튀어나올지 배꼽 긁어도 알 수 없어요 서랍 속에 숨긴 엄마의 통장을 훔쳐 샴고양이 예삐에게 리본을 사 줄까요 예삐와 함께 멀리 아주 멀리 떠나버리고 싶은 맘 돌아올 수 없는 거기는 찬란할까요 그랜드캐논 콜로라도 깊은 골짜기에서 사억 오천년 전 외계인과 외눈박이 사랑을 나누다가 여우별에게 들키고 싶어요 여름날엔 악마의 심장도 뜨거워져 소낙비 속에 와글와글 모여 들겠죠 꼬리 긴 도마뱀의 몸통처럼 오그라든 몸을 계곡에 숨기다 절벽 아래로 떨어지면 영혼도 날아가겠죠 아뇨 착하게 살게요 엄마와 약속한 1초 만에 변심한 마음을 사탄에게 반납하라고 닦달하겠어요// 아이스크림이 녹아버리듯 쉽게 잠들어 깨지 않는 밤// 불온한 연애지침서를 탐독하다가 잠깐 순해졌던 것도 같아요 사람들은 기적을 꿈꿨고 난 희망을 고무풍선껌 띄워 허영심을 부풀렸죠 하지만 책갈피 속에 숨은 네잎클로버는 사라진지 오래 매일매일 화장을 지우고 하루하루를 불태워버리면 이별은 메이크업 진한 축제에 불과 할뿐 나를 떠난 예삐의 빈자리엔 레퀴엠이 흐르고, 그럴 때마다 귀여운 악마들은 천사의 위선을 조롱해요. 사랑해요! 속삭이지만 나는 원초적 본능에 길든 사람, 사랑해요 갑자기 불경한 연애에 푹 빠져 돌아오고 싶지 않아요 아제 아제 바라아제//

내일이라는 버스 / 김도연
막차를 놓친 손에/ 승차권이 아닌 바퀴가 달렸으면 좋겠어./ 다음 버스는 내일./ 희망 버스는 내일./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벚나무 꽃잎들이 우르르 몰려온다./ 캄캄한 의자에 앉아 꽃잎을 센다.// 꽃잎 셋, 꽃잎 아홉, 꽃잎 열다섯, 꽃잎 서른둘/ 내일을 기다리면 열매가 될 수 있을까./ 오늘 버스가 영영 사라지면/ 내일 버스엔/ 무엇을 실을 수 있을까.// 늙어버린 그믐달. 찌그러진 그믐달. 내일이 없는 그믐달./ 그러나 울지 않는 그믐달./ 아주 조금, 먼 내일/ 혼자 늙어버린 저 쓸쓸한 그믐달이 끝끝내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것처럼/ 버스에도 생애가 있었으면 좋겠어.// 다음 버스는 내일./ 내일은 희망이 태양을 만나러 가는 날./ 오늘 마감인 이력서가/ 내일도 버스를 기다리는 날./ 내일 버스는 희망.// 국적도 없이 떠도는 캄캄한 고양이들. 내일을 믿지 않는 캄캄한 고양이들./ 그런데 너희들의 나라는 어디니?/ 이 승차권을 너에게 주마.//

참나리꽃 속에 핀 여름 / 김도연
쨍그랑 금방이라도 실금이 갈듯 팽팽한 긴장감 속에/ 햇볕 부서진다/ 어디선가 그늘이 깨지고 균형 무너져/ 바스락거리는 오후// 쨍그랑 금 간 일상이 사금파리마다 은빛 꽃가루를 입힌다/ 갈피 모르는 시간이 아무데서나 뒹굴고/ 희망은 그 때/ 붉은 꽃을 피워 진하고도 독한 향기 내뿜다가/ 무더기로 시들지// 슬픔이란 그런 것이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우연히 찾아왔다가 뚜렷한 목적 없이/ 진득하게 기다려주기도 하다가/ 망설임 끝에 불쑥/ 앞단추 하나 툭 떨어뜨리는 여인의 운명처럼/ 불운을 만나도 어이없이/ 웃어야 한다// 오늘아침 거울을 박살내려다가 그 대신 거울 앞에서 정중히/ 긴 머리카락을 싹둑/ 잘라버렸다/ 애지중지 길러온 머리카락/ 때늦은 후회로 밤낮이 연일 무겁게 바뀌고/ 마른침 삼키며 뜬 눈으로 불면증을/ 견뎌야 한다// 쨍그랑 생활에 금이 가고 나도 모르는 통증을 호소하면/ 오소소 이빨 빠지는 악몽/ 사정없이 부는 태풍은 모질게 어린 꽃잎을 흔들고/ 덜컹덜컹 몸을 떠는 창가에서 마냥/ 게을러 터져 더디 가는/ 여름//

별 호우주의보 / 김도연
오늘처럼 떠나고 싶을 때/ 당신의 눈동자는 빛난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 손금안에/ 뜨거운 당신의 심장이 자세한 별의 지도를/ 펼치고 있는 거라고/ 믿었죠// 당신이 끌어안고 떠난 0.01그럠의 눈물은 반짝 빛났고/ 헤어진 그 밤길을 걷고 또 걸어/ 기억을 되돌리는/ 그때// 겹겹이 파고 드는 불안속에서도 약속을 지키려/ 전속력으로 달려 나갔죠// 소심한 당신의 입술에 들뜬 내 마음을 포갤 수 있을 때까지/ 우리라는 우리는 잠들지 않기로 약속했죠/ 사랑과 이별 그 찰나의 차이는/ 불과/ 0.0001mm의 간격// 사랑의 주파수에 걸려든 잡음이 잘못 끼어들어도/ 그믐달 사이로/ 차갑게 쏟아지는 저 별들이/ 그리움 속으로 차분히 옮겨 앉듯이//

진달래 백서 / 김도연
붉은 입술만 보면 빠져 죽고 싶다던 취중진담을 아무렇지 않게/ 발설하던/ k의 이야기가 문득 생각나는 밤// 굳게 닫힌 열하고도 아홉 번째 쪽문을 열고 그가 오고야 말았다// 분명 내 것이 아니었는데 끝내 내 것이 되고야 말았다/ 엔틸로프캐년에서 빛과 붉은 사암이 만들어내는 초현실적 세상에/ 빨려 들어가듯 그렇게 국경도 없는/ 신비로운 나라에 안착하고 말았다// 훔쳐보는 시선이 싫지 않다// 숨소리조차 새털 같은 시간 앞에 눈꺼풀은 떨리고// 언제 그와 나란히 누워 본 적 있었던가 몸의 비망록은 따습고/ 지독하다고 나는 적는다/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면 할수록 캄캄하게 그리워지는 속성을 잘 알기에/ 슬픔을 감싸 안고 더 붉게/ 물들어 가는 통증을 그냥 지켜보기로 했다// 그와 몸 비벼 내는 물의 소리는 수줍고 낯선 직립이다/ 누군가 또 훔쳐보고 있다// 봄이 익어가는 동안/ 속눈썹을 그리던 금요일은 빈혈을 앓고// 그림자 속 진진홍 지도를 펼쳐놓고 소쩍새가 가는 길을/ 잃어버렸다고 고백하는 그녀는 연분홍 얼굴/ 배시시 웃는다//

흔해빠진 연애 / 김도연
남의 집 강아지들은 연애질도 잘한다.// 옆집 방실이는 어느새 여섯 번째 새끼를 낳았다./ 머윗대 농사로 한몫 본 이장님 댁 야옹이는/ 밤마다 온갖 교태/ 담장을 뛰어넘어 딴 동네로 떠났다 싶더니 어느 날/ 귀여운 새끼 다섯 마리를 데리고/ 양지쪽을 차지했다.// 봄날의 꽃바람/ 봄 향기는 휘날려/ 꽃가루 퍼지는데 흔해빠진 연애는 어디로 가나.// 사랑 따위 연애 따위 아무 관심 없는 척하던/ 우리 집 몽순이 녀석./ 철장 밖에서 발톱에 피멍 들도록 흙구덩이 파고 들어온/ 유기견 봉달이와 눈이 맞아/ 줄행랑을 쳤다.// 흔해빠진 연애란 스스로의 수위를 높이는 것.// 늦은 나이에 처녀딱지를 떼고 돌아온/ 늙다리 몽순이/ 사타구니가 닳도록 둔부를 핥다가 계면쩍은 듯 흘깃/ 주인의 눈치를 살핀다.// 연애하기 가장 좋다는 호시절의 화양연화/ 나비처럼 팔랑팔랑 날고 싶은/ 봄날.// 불완전한 완창(完唱), 마흔 몇 번째 노래가 시든다.//

양촌리 / 김도연
오늘도 늦은 저녁입니다.// 요양병원 어머니를 퇴소시켜 목욕/ 잠자리 봐 드리고/ 하루 종일 목줄 매여 시달린 강아지 산책 시킨 뒤// 이제야/ 무거운 엉덩이를 풀어 놓습니다.// 모든 걸 내려놓고 싶은 하루.// 우렁쌈장 우겨넣어/ 허기를 달래며/ 모처럼 양촌리쌀막걸리 한 모금에 마른 목을 축이면/ 잠에 쏠려 미개 눈뚜껑/ 주저앉을 판.// 그래도 제 술 한 잔 받으셔야죠!/ 아부하듯 떠오르는 시상(詩想)에 옷매무새 고쳐 앉는/ 저녁.// 시심을 수놓은 좀생이별들 흰 백지 위에 맘껏/ 쏟아져 내립니다.// 떠오르는 시상은 황송할 뿐인데 무거운 피로에/ 떨어뜨린/ 볼펜 굴러가다가 멈춰선 책상다리 저 쪽/ 그늘 짙은 거기// 당신이 서 있습니다.// 원고지 밖에서 당신이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밤이 거기 있습니다.//

그냥 불행한 이야기예요 / 김도연
그렇게 살 줄 몰랐죠// 한밤 TV 속 어느 미혼모의 독백처럼/ 무표정한 보름달의 낯빛은/ 징하게도 창백했죠// 그날도 저런 밤이었겠죠/ 화사(花蛇) 한 마리 꽃 허물을 벗어두고/ 길을 떠났을 테죠// 생(生) 자체가 구불구불한/ 오직 그 선택만이/ 살아남는 길인 줄 착각했을 테지요// 몸에 새긴 무늬*가/ 덫이 되어 목을 조여 올 때// 불멸이란 이런 것일 테죠// 이승에서의 꽃길은/ 내 것이 될 수 없는 전말일 뿐// 꽃은 개에게나 주라고 하세요//
* 고영 시인의 「물에 새긴 무늬」 변용.

제목은 미정인데요 / 김도연
제목은 아직 미정인데요, 상처를 노래하다가 생뚱맞게/ 나쁜 연애가/ 이 가을날 찾아오고 있었다// 그리운 것들은 그렇지만 그렇게나 꽁꽁 얼어붙어도/ 그리운 것일 뿐인데요// 달달한 막대사탕처럼 거짓 포장된 단맛인 줄 알았더라도/ 어리석은 척 끌어안고 싶은 게 사랑인데요/ 심금을 울리다가 헝클어진 마음 뒤틀리게 하던/ 연애詩는 한물간 사랑/ 변심한 계절의 간이역으로 돌아갔다// 어설프게 떠나보낸 사랑의 후생이 아무래도 궁금해서/ 나뭇잎 점괘를 펼치다가/ 이제야 알겠군, 뒤늦게// 인연이란 길들여지지 않는 것 매정하게 헤어지고 나서도/ 지쳐버리도록 방치해둔 지 오래/ 오랫동안 오지 않을 사랑을 부질없이 나 혼자/ 불러들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무 일도 아닌 척// 못 이기는 척 사랑시 한 편 눌러쓰다가/ 첫눈 위의 발자국이 자꾸만 되 밟히는 성가신 새벽이라고/ 말해버리고 싶은 겨울이 왔다// 한밤중인데요,/ 머리맡에 문득 떨어진 별 하나가 미열을 짚고 일어서는데/ 이렇게 끄적거린 시의 제목은// 그냥 열일곱 살 미정이라고만 해두고 싶을 뿐인데요//

내 가문 손의 삽화(揷畵) / 김도연
내가 지금 저문 들녘을 바라보며 기껏 할 수 있는 일이란/ 누군가를 간절히 기다리는 것/ 하물며 당신이라면, 하는 기대마저도 기다리는 일/ 그것이 나의 방심(放心)/ 당신의 배후에서 일렁이는 노을빛을 관찰하는 일조차도 기꺼워하며/ 나의 눈빛은 복숭아나무에 닿는다/ 복숭아나무의 최선은 도달할 수 없는 거리(距離)에 열매를 맺는 일/ 천도와 천도 사이에서 온 그 영롱한 빛을/ 내 가문 손으로 영접하는 일이란/ 당신이라는 머나먼 슬픔에 밑줄을 긋는 것/ 그것이 나의 방심(放心)/ 내 가문 손의 마지막 삽화(揷畵)는/ 서산에 남아 있는 일말의 온기를 보듬는 일/ 그리고 아무 망설임 없이 혼자만의 시간 속으로 침잠하는 일//

사선으로 사는 여자 / 김도연
저기/ 비탈에 서 있는 여자/ 평생을 평지에 서 본 적이 없다// 왼손은 허공을 휘젓고 오른손으로 땅을 지탱/ 거센 폭풍우에도 흔들림 없이/ 실팍한 엉덩이는 땅속 깊이 뿌리 뻗어 당당하게/ 사선을 지키며 살아냈다// 불시착한 계절은 가끔 매몰차게 차가운 우박 뿌려/ 겁을 주지만/ 연약한 날개의 배추흰나비가/ 길 없는 공중에 발자국 찍으며 길을 내 날 듯이/ 금방 헤어져 이별할 것 같다가/ 그러나 이별 없이 길고도/ 지루했던 여름날// 죄없는 비밀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흙 속으로/ 파고든 건 아닌데/ 숲을 흔드는 어설픈 사랑/ 일평생 뒤틀린 몸으로 이렇게나 초라하지만/ 포기할 줄 모르고 여기까지 걸어온 길/ 고집부리 듯/ 비탈도 마다하지 않고 막무가내 거칠게/ 기어가는 여자// 저기 가파른 산기슭/ 풀벌레 소리 온몸에 적시며 넝쿨 손 멀리 뻗는/ 외로움에 잘 길들여진 저 칡꽃여자!//

그림자놀이 / 김도연
소나기 긋고 지나간 뒤/ 비에 씻긴 회화나무 그림자가/ 조금 더 깨끗해졌습니다// 회화나무 밑에 숨어 있던 나뭇잎 그림자 물고기들이/ 움츠렸던 지느러미를 털며/ 하나둘씩 깨어납니다// 그림자 물고기 위에/ 물고기 그림자/ 실잠자리 그림자 위에/ 그림자 물고기// 지느러미가 날개를 업고/ 날개가 지느러미를 업고 하나가 되는/ 저 회화나무 그늘 속으로/ 나는 별리(別離)의 몸으로 차마 들어설 수 없습니다/ 가엾게도 누군가 몹시 그리워지는 계절이니까요// 아직 다 떠나지 못한 사람의 그림자를 업고/ 나는 맨발로/ 소나기 긋고 지나간 회화나무 아래를 서성입니다// 지금 이 순간을/ 가장 설레고 따사로운 숨결이라 기록합니다//

그 속은 아무도 모른다 / 김도연
꽃은 생각의 소실점이다/ 욕망의 원뿔이다/ 幻환을 향한 직선과 곡선이다// 그러나 그 속은 아무도 모른다// 꽃은 다만 모든 것들이/ 붉게 한줄기로 피어나길 손꼽아 기다린다/ 화장기 지워진 얼굴 부끄럼 없이/ 맨살 맨발로/ 바람 속을 걸어 나오는 겹겹의 무게이다// 바람에 흠뻑 젖어 뿌리의 밑바닥까지/ 걸어 돌아오는 별들의/ 서럽고 시린 발자국이다// 뾰족한 햇살이 마음으로 여며드는 계절/ 삐걱이는 꽃잎마다 비가 내리고/ 꽃은 욕망의 소실점이다/ 생각의 원뿔이다/ 滅멸을 향한 직선과 곡선이다// 그러나 그 속은 아무도 모른다//

안나 카레니나를 읽는 밤 / 김도연
사랑은 한순간/ 달콤한 솜사탕 같은 것// 불행을 잉태하고 사라질 사랑에겐 처음부터/ 눈길도 보내지 말았어야 했다// 그때 좀 더 철이 들었더라면/ 운명의 화살표를/ 멀리 날려 보낼 수 있었을 터인데// 365일 후회 없는 행복만을 기대했던/ 안나 카레니나// 당신과 내가 꿈꾸는/ 안식처란 애초부터 인간이 만든 어두운 다락방/ 거기에 숨어든 빛 조각 같은 것// 이별은 이별일 뿐이라고/ 어둠의 어머니 같은 긴 그림자가/ 창가에 기댄 나의 몸뚱이를 산 채로 묻어버린/ 함박눈 쏟아붓는 밤// 까마귀 울음소리에 통점을 찍는 부스럼처럼/ 안나 카레니나의 일대기를 읽는다//

검은 우雨요일 / 김도연
바람이나 겨우 걸을 수 있는 좁은 통로를 지나/ 반지하로 몇 계단 밟고 내려가면/ 그 여자의 방이 나온다/ 자신의 냄새에 꽃들이 질식해 죽을까봐/ 흔해빠진 선인장 하나 키우지 않는 그녀의 방에는/ 젖은 먼지만이 꽃을 피우고 있다/ -잘 지냈어요?/ 눈썹도 채 그리지 못한 그녀의 아련한 눈빛에서/ 모나리자의 오래된 침묵을 읽는다/ 커튼도 없는 야윈 창가로/ 시도 때도 없이 쳐들어오는 낯선 발자국, 발자국 소리/ 저 무례한 소리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그녀는 얼마나 깊이 이불 속을 파고들었던가/ 침대 가운데가 푹 꺼져 있다/ -커피 할래?/ 캄캄한 커피가 싫다/ 조용히 사그라지는 애정불감증처럼/ 가스레인지는 쉽사리 불꽃을 일으키지 않는다/ 체념보다 더 무서운 건/ 차갑게 식어버린 몸뚱어리의 변심/ 모나리자 티슈의 하얀 목덜미만 밝게 빛나는/ 반지하 그 여자의 유화 같은 방에/ 검은 비가 내린다//

동박새를 사랑한 소녀는 / 김도연
꽃이 흔들리는 것은/ 누군가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열여섯 살 작문 시간에 선생님은 삼십년후의 자기모습을/ 그려보라 하셨다 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마릴린 먼로도/ 나이팅게일도 무용가도 아닌 현모양처라고 썼다/ 단발머리 친구들과 선생님은 나의 생뚱맞은 이야기에 모두/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진실로 나는, 한 남자의 좋은 아내가 되고 싶었다// 어둠이 쇠잔한 길목에서 아침을 기다리듯/ 나는 진실로 소망했지만/ 언제나 발칙한 몽상뿐/ 모든 것은 아차, 하는 순간 떠났고/ 그래, 하는 순간 곁에 없었다/ 카시오페이아는 늘 저 혼자 빛났으며/ 좋은 아내는/ 좋은 엄마일 뿐이었다/ 동박새를 사랑한 소녀는 이제 동박꽃을 사랑한다// 죽는 순간이 가장 아름다운/ 그래서 더더욱 붉게 흔들리는 동박꽃 아래서/ 편지를 쓴다// 아무도 기다리지 마라//

물수제비 뜨는 저녁 / 김도연
공중 높이 뜬 무지개가 보고 싶은 날엔/ 샛강에 나가/ 물수제비를 떴지// 애먼 돌멩이를 주워서 자꾸자꾸 강물로 던졌지/ 죄없는 강물에 돌팔매질 첨벙첨벙/ 물수제비를 뜨면/ 자기애에 빠진 위험천만한 소녀들이/ 물 위에 뜨곤 했지// 비눗방울 같은/ 무지갯빛 꿈에 매몰당한 소녀들/ 징검다리 건너/ 모두 다 어디로 갔는지// 가슴만 부풀면 어른이 되는 줄 알고/ 물가에 모여 앉아/ 집 떠날 궁리에 해 지는 줄도 모르던/ 그 강가, 그 자리에서/ 물수제비 뜨다 보니// 샛강 너머 저 멀리/ 돌멩이가 날아가 박힌 노을빛이/ 후회만큼/ 붉네//

명자나무 아래서 명자 씨와 함께 / 김도연
명자 씨를 만나면 발톱까지 빨개져요/ 달구어진 입술에서 튀어나오는 말씨조차 붉어져요/ 나를 가둬두려는 봄날의 기분/ 붉디붉은 울렁증의 원인은 햇빛촌 우체국 앞을/ 이유 없이 서성대던 이력 때문이라는군요/ 우표 없는 편지들 때문이라는데// 어쩌면 좋죠!/ 발가락마다 발톱에 주홍 지문. 그것의 반쪽만이라도 뜯어내/ 명자 씨의 꿈속까지 드나들고 싶은데/ 그녀는 주인 없는 성 안에 밤마다 깊숙이 진입해/ 이마가 붉은 아이를 낳고/ 불어터진 젖을 먹어 속성으로 자란 탓에/ 아이들은 너무 빨리 어른이 되어서 봄날을 맞겠지만// 어쩌면 좋죠!/ 긴장감 속에서도 망설임 없이 자지러지는/ 그녀의 뽕짝/ 그 장단에 불붙은 봄날이 꽃잎 찢겨진 음표를 옮겨 적는데/ 되돌아가거나 되돌릴 수 없는 봄날/ 습관처럼 야위어가던 나도 그만/ 페달을 세게 밟고 말았어요// 어쩌면 좋죠, 어쩌면 좋아요?/ 명자 씨를 만나면 그녀와 나 사이에 뽕짝이 만발하고/ 붉은 꽃이 철 없이 팡팡 터져 기분이 좋지만/ 어쩌면 좋죠/ 어쩌면 그렇게 헤프기도 한 뽕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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