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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열여섯에 시집을 와 열일곱에 나를 낳았다. 오빠와 남동생이 하나, 네 명의 딸 중 셋째 딸이었다. 언니 결혼 함지기로 왔던 신랑 친구인 아버지는 첫눈에 어머니를 마음에 두었다. 부모님을 졸라 매파를 넣어 부랴부랴 혼인을 했다. 키가 크고 숙성하여 꽉 찬 나이로 보였던 모양이다.

경상도 합천 산골에서 일찍 결혼한 할아버지는 학식으로나 그의 야망을 시골 땅에 못 박지 못하고 부모님, 처자식을 등지고 대처로 향하였다. 아들 둘을 낳은 할머니는 돌아가시고 형님은 일본으로 가고 아버지가 할아버지를 만났을 때는 새 할머니와 함께였다. 내가 본 할머니는 외출할 때는 화려한 양산을 쓰고 뾰족한 구두를 신는 신여성이었다. 일제 강점기였으니 상당히 세련된 모습이었다. 여느 할머니의 모습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매서운 시집살이를 했다고 한다. 나는 어려서 몰랐지만 아내에게 혹독했던 시집살이 이야기를 하도 하소연을 많이 하여 아내는 내 어머니의 시집살이를 활동사진을 본 것 같이 기억하며 속상해했다.

그런 할머니지만 나에게는 각별하였다. 온 정성을 쏟았다. 아이를 낳지 못한 할머니는 나를 당신의 아이처럼 애정을 쏟았다. 아우도 일찍 보고 어머니가 신경이 약하여 젖도 부족하여 병약하였다. 설사를 자주하여 헐은 곳을 혀로 핥아 씻어주기 까지 했다고 들었다. 애기 안고 자면 애미 잠결에 젖에 애기 코 누른다고 할머니가 데리고 잤다. 깨어 젖 먹을 시간 되면 안방에 건너가 젖 물리느라 치마 벗고 잠 한 번 편히 못 자 애기인 내가 밉기까지 했단다.

아버지의 직장 관계로 조부모님이 따로 살 때 나는 조부모님과 살았다. 학교에 들어갈 때 부모님 집으로 왔는데 할아버지한테 갈려고 떼를 쓰다 아버지께 종아리를 맞았다. 그 게 내가 아버지께 혼난 처음이고 마지막 일이었다.

신식 할머니가 일찍 병으로 돌아가시고 할아버지가 부모님 집으로 와 살 때 나와 할아버지는 겸상을 하여 특별대우를 받았지만 둘레상에 둘러앉아 함께 먹는 동생들 밥상이 더 맛있어 보였다. 할아버지는 낚시를 다닐 때도 꼭 나를 데리고 다녔다. 돌아 올 때면 양과자를 사 혼자 먹으라고 일렀지만 집에 와 동생 발을 꾹 눌러 눈짓하여 부엌에 와 나누어 먹었다. 편애도 있었겠지만 입맛이 까다롭고 잘 안 먹는 손주에 대한 배려였던 것 같다.

“나같이 박복한 년이 친정이 다 무슨 소용이여. 내가 다시는 친정에 오면 풍산홍씨 성을 갈 거여. 아버지 어머니 죽으면 머리 풀구나 올 테니 그리 알아요.”

“나더러 개장국을 떠다 먹으라면 가마솥을 통째로 떼어다 먹을까봐서 늙은 어머니가 꾸부정거리고 손수 떠다 바쳐요. 그렇거든 맘먹구나 떠다 주든지, 건더기도 없이 멀건 국을 떠다 주면서ㅡ. 이게 딸년 대접하는 거여, 거렁뱅이도 이리 대접할 수는 없어.”

할머니는 소리소리 지르셨다.

‘목성균’의 수필전집 중 ‘할머니의 세월’ 한 토막이다. 병약한 손주에게 줄 음식이기에 이렇게 소리소리 지르며 절규할 수 있다. 본인 입도, 아들 입도 아닌 손주 입에 넣어 줄 음식이기에 그렇다. 또한 작가도 손주이기에 이런 글을 쓸 수 있다.

대를 이어 갈 손주의 병약함에 안타까워하는 할머니의 푸념에 나를 끔찍이 여겼던 내 신식 할머니를 소환한다. 조부모 밑에 자란 사람들의 품성이 좋은 쪽이 더러 있다. 아마도 부모님이 조부모를 의식하여 함부로 자녀를 다루지 않고 노인들의 지혜와 무조건적인 사랑이 보탬이 되는 것 같다.

나의 신식 할머니가 돌아가신 음력 2월, 부고를 들고 지인들 집으로 알리러 다니던 날 몹시도 추었다. 매서운 바람에 뺨에 흐른 눈물이 얼어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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