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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수(丁成秀) 시인
1945년 서울 출생. 경희대학교 국문과 졸업, 동 대학원 국문과 수료. 1965년 《시문학》, 1979년 《월간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1961년 평택중학교 졸업 기념으로 첫 시집 『개척자』(등사판. 나중에 활자본으로 정식 출판)을 내고 서울 삼선고등학교 1학년 때 <투쟁>(등사판)을 비롯 『술집 이카로스』 『우리들의 기억력』 『살아남기 위하여』 『가족여행』 『사랑이여, 오늘도 나는 잠들지 못한다』 『사람의 향내』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시』 『누드 크로키』 『기호 여러분』 『우주새』와 시선집 『별날리기』 등이 있다, 제3회 경기PEN문학대상, 학국시학상, 제1회 PEN문학활동상. 제2회 무궁화문학상 일반부 금상, 김우종문학상 대상. 제9회 이은상문학상, 경희문학상, 한국문학백년상, 앨트웰PEN문학상 수상 등. 국제펜클럽한국본부 자문위원.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봄날은 온다 / 정성수
일평생 내내 하염없이 오고 있는 것/ 한 번도 도착한 적이 없는 것/ 기다리는 사람에게 오고 있는 것//
목련이 봄비에게 / 정성수
아, 알겠어요/ 봄비씨// 부풀어오른 내 꽃봉오리 위/ 신들린 당신 손가락// 잎새 끝에서/ 가야금 현마냥 떨리는/ 젖은 숨소리// 몰라요, 몰라요/ 터질 듯 무르익은 핵/ 숨겨둔 뇌관/ 진저리를 쳐// 이글이글 타는 사랑/ 끝내 멈출 수 없어// 열어젖힐 거야/ 당신의 가슴팍 아래 온통/ 내 뜨거운 비밀// 잠시만 봄비씨, 온몸이 떨려/ 조금만 기다리라니까요/ 아, 아 ……//
배롱나무꽃 / 정성수
오백 살 배롱나무가 선국사* 앞마당에/ 가부좌를 틀고 있다.// 염화시중의 미소를 띠고서/ 여름밤 폭죽처럼 피워 낸/ 저 붉은 꽃들./ 깡마른 탁발승이 설법을 뿜어내는지/ 인연의 끈을 놓는 아픔이었는지/ 이승에서 속절없이 사리舍利들을 토해내고 있다.// 배롱나무꽃/ 붉은 배롱꽃은 열꽃이다.// 온 몸으로 뜨겁게 펄펄 끓다가 떨어진 꽃잎 자국은/ 헛발자국이다.// 피기는 어려워도 지는 것은 금방인 꽃들은/ 저마다 열병을 앓다가 진다.// 저물어가는 여름 끝자락에/ 신열을 앓다가 가는 사람이 있다.// 배롱꽃처럼 황홀하게/ 무욕의 알몸으로 저 화엄 세상을 향해서/ 쉬엄쉬엄//
* 선국사: 전북 남원시 교룡 산성 내에 있는 사찰.
개나리꽃, 눈 뜨고 순금빛으로 죽고 싶어라 / 정성수
노오란 병아리떼/ 나래 펴 들고 고개 들고/ 해를 쪼아/ 부리 끝에 부서져 날리는/ 저 분분한 노른자위 가루들/ 지구 위로 천천히 떨어져 내려/ 참 눈부신 속살로 흔들리며/ 내 알몸을 포옹하노니/ 이 아침 살고 싶은 지상에서/ 눈 뜨고 순금빛으로 죽고 싶어라//
촌노 김노인의 상경기(上京記) / 정성수
봉천동 산꼭대기 달동네./ 둘째 아들네 집에 와서/ 어젯밤 쇠주 한 잔 거하게 마신 김노인은/ 뒤가 급해 공동화장실로 달려갔는데/ 칸칸마다/ 주먹만한 자물통이 걸려 있는 것을 보고/ "미친놈들,/ 누가 거름을 퍼갈 깨미 쇠때를 채워 놔?/ 이 드런 놈들아, 내가 안 싸고 말지./ 그런 드런 짓은 않는다"// 김노인은 침을 택 뱉고 돌아섰다.//
구두 / 정성수
갇혀 있습니다/ 네모난 흑백사진 속/ 한 켤레의 구두// 하늘 한 자락 당기어/ 빈 속을 채우고 있습니다// 바위 곁 한 무더기의 여뀌풀 잎새들이/ 허공을 기웃거리고// 당신은 구두 한 짝 쥐고 앉아서/ 사라져 가는 물줄기를 내려다봅니다// 소나무 숲과 작은 산들이/ 계엄군처럼 당신을 에워싸고// 산자락 위에 걸린/ 흰 구름송이 몇 점// 모였다간 흩어지고 다시 모이면서/ 소리없이 어디론가 흘러갑니다// 잠시 생각에 잠깁니다// 사진 속으로 걸어 들어가/ 부활할 것인가// 홀로 남은 당신의 이름을/ 불러낼 것인가.//
내가 뜨는 물수제비 / 정성수
비 내리는 호수 가에서/ 내가 뜨는 물수제비를 그대가 받았을 때/ 그대는 내 가슴에/ 사랑의 징표로/ 점점점, 말줄임표 하나 찍었습니다// 물결이 물결에게 건너가고 건너오는 동안/ 호수가 제 몸을 열어주어/ 수심의 깊이를 알았습니다// 어느 날, 삶의 의미를 걷어내면서/ 내가 뜨는 물수제비로 하여금/ 잠시 흔들렸을 뿐이라며 그대는/ 그대와 나 사이에/ 점점점, 마침표를 세 개씩이나 찍어놓고/ 물처럼 흘러갔습니다.//
이별의 시 / 정성수
마지막 이별은/ 그렇지/ 어느 날 갑자기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이지// 마치/ 최초의 사랑이 그렇게 날아왔듯이// 우리들의 작은 지구별/ 손에 닿는 것 하나 없는 허공 속으로/ 어느 날 소리도 없이/ 가을날의 첫 낙엽이 지듯// 혹은/ 아무도 슬픔을 이야기하지 않는 새벽/ 우리들의 손가락처럼 빈 나뭇가지 사이로/ 어느새 겨울날의 첫눈이 내리듯이// 마지막 사랑의 끝은/ 미처 슬퍼할 시간도 없이/ 생각할 시간도 없이/ 놀랄 시간도 없이// 그렇게// 아무도 모르는 사이// 우리들의 낮은 어깨를 슬며시 두드리는 것이지// 마치/ 무심한 신의 손길처럼/ 아무 예고도 없이/ 어느 날 그렇게.................!//
지구가 해에게 / 정성수
멈출 수가 없네/ 그대를 포옹하는 순간까지// 내 육신이 허공의 파편으로 번쩍이더라도/ 나는 달린다, 궤도를 이탈할 때까지/ 그대를 향한 46억 년 동안의 짝사랑/ 처음이자 최후인 절정을 위해/ 내 그리움의 골짜기마다/ 싱그러운 꽃향내 준비해 두었다// 저 깊은 하늘에서/ 우리의 입술이 부딪치는 순간/ 그것이 그대와의 마지막 이별의 때임을/ 나는 알지만// 달려간다, 나는/ 그리움의 힘 하나로/ 그대의 이글대는 숨결을 향해/ 눈부신 폭발의 순간까지……!//
추억은 우수에 젖은 얼굴로 / 정성수
이상하지?/ 추억은 언제나/ 우수에 젖은 얼굴로 나타나지// 느린 발걸음으로 굽은 어깨로/ 조금씩 천천히 다가오지// 마른 낙엽 밟는 소리로/ 가느다란 바람의 손가락과 함께/ 기울어가는 노쇠한 햇덩이와 함께/ 서산에 걸린 무심한 구름 한 자락과 함께/ 내 앞을 스쳐가지// 이 세상에 아무 관심이 없다는 듯/ 그냥 그렇게 머물다가/ 문득 내 가슴 한 구석을 툭 치고/ 그 속의 현 한 가닥 슬며시 퉁겨놓고// 현이 울리는 나직한 추억의 운율에 귀를 기울이며/ 사라져 가지, 타인처럼// 추억의 희미한 몇 장면만 살아남아서/ 색 바랜 깃발처럼 흐느적거리지// 나는 말없이 서서 그것을 바라보지// 소리쳐 웃지도 않고/ 소리없이 눈물을 흘리지도 않지// 다만 그 속에/ 하나의 국외자처럼 우두커니 놓여있을 뿐이지// 지나간 날의 기억이 흘리는 피 비린내를/ 한 잔의 소주처럼 들이킬 뿐이지// 이상하지?/ 추억은 언제나/ 우수에 젖은 얼굴로 떠나가지.//
짧은시 기호시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시 / 정성수
1.섬-나/ 2.시지프스의 탈출-ㄷ/ 3.지상에서 가장 낯선 사이-부부/ 4.짧은 세상 길게 살기-.......네!/ 5.신발-지구는 나의 신/ 6.그대와 나-( )/ 7.신의 포효-침묵/ 8.나의 종교-어머니교/ 9.옛사랑의 추억-빈 레일/
10.우리들의 바벨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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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사람과 사람 사이-옷/ 12.나에게 부치는 최초이자 최후의 편지-?/ 13.고독-내/가슴 속/다이아몬드/ 14.가장 큰 죄-아무도 사랑하지 않은 죄/ 15.빛나는 것-빛나는 것은/모두 다 쓸쓸하다/ 16.지구 속 외계인-내 이름은 외계인/아무도 나의 그림자를 모른다/ 17.이 세상 모든 고독한 존재에게-&/ 18.아르카디아-주소 불명의 오아시스/그러므로 나는 찾아 나선다/ 19.첫눈-숫처녀의 오르가슴/ 20.사람으로 가는 길-S/ 21.꽃들은 우산을 쓰지 않지-☂/ 22.사람 위에 사람 있고 사람 아래 사람 있다-응/ 23.우리는 하나-Q/ 24.지구와의 섹스-첫경험/ 25.하느님이 나에게-나는 고독하다//
낯선 지구인에게 / 정성수
축하합니다// 오늘도/ 다시 태어나셨군요// 지구가 함께 부활했군요.//
지구의 눈 / 정성수
사하라사막 속에/ 지구의 눈 살아있다// 지구가 허공에서/ 길을 잃지 않는 것은/ 우주 저 아래로 추락하지 않는 것은/ 무수히 돌아도/ 미치지 않는 것은// 지구의 속눈썹/ 소리없이 열려있기 때문이다.//
장마 2016 / 정성수
우주가 뿌리를 내리는구나/ 지구별 깊숙이// 내일쯤 저 하늘에/ 수많은 꽃송이 피어나지 않겠느냐.//
이 세상 바다 / 정성수
지구 위에서/ 바다는 오늘도 잠들지 않는다// 살아남은 그대/ 지금 깨어있는가?//
시간의 일생 / 정성수
나와 함께 어느 날 문득 초록별 위에 태어났다가/ 나와 함께 달 너머로 고요히 사라져가는구나.//
6.25 1950 / 정성수
누가/ 누구에게 총을 쏘았나// 누가/ 누구 앞에서 피를 흘렸나//
정세균 국회의장 귀하 / 정성수
내일(2016/6/13일)은 제20대 국회/ 개원일입니다.// 내일부터 국회를 열 때마다 의장께서/ 윤동주의 <서시>를 낭독해주시기 바랍니다.// 서시//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사랑하는 국회의사당에게 / 정성수
불 켜/ 숨 막혀!//
바람소리 / 정성수
신이 지구 위에 앉아/ 수많은 악기를 켜는구나.//
△ / 정성수
저 가장 높은 절정은// 얼마나 추운가// 고독한가, 얼마나// 얼마나 지상이 그리운가.//
아흔 아홉 살까지 / 정성수
아흔 아홉 살까지 살 것이다/ 나는// 몇 권의 책을/ 더 읽고// 저녁이면/ 아내와 함께 늙은 포도주 향내를 마시고// 소스라치듯 새벽에 깨어나/ 몇 줄의 그리운 시 쓸 것이다// 사람에 가까운 사람의/ 마지막 그림자가 될 것이다// 소멸하는 것들의 아름다움에/ 자주 몸서리칠 것이다.//
오늘도 비 / 정성수
떠돌이별 위로 비가 내리네/ 지구가 우주 속으로/ 어제보다 더 잘 굴러가네/ 머지않아/ 하느님 눈썹 아래 다다르겠네/ 그대와 나.//
지구보다 큰 사람 / 정성수
길 위를 홀로 걸어가는 아들아/ 두려워마라/ 지구는 언제나/ 네 발 아래 있다.//
동행 / 정성수
자/ 손을 주세요/ 함께 갑시다// 벌판을 지나/ 산봉우리를 넘어/ 파도를 건너// 지구를 돌아/ 달나라로/ 화성의 땅으로// 날이 저물 때까지/ 별이 뜰 때까지/ 다시 해가 솟을 때까지.//
우리들의 기억력 / 정성수
서녘으로 해는 무너져내리고/ 문득 그대 옥피리 같은 한 생애의 숨소리/ 풀잎 속에 숨어 버리고// 다음 날 우리는/ 제이 디 사우더가 노래 부르는 찻집 한구석// 뜨거운 커피로 가슴 적시며/ 그대 젊은 날의 꽃 같은 사랑과/ 처형 같은 죽음을 서러워하고// 우리는 오늘 아침/ 광화문으로 달리는 만원버스 안에서/ 여럿이서 혼자서 흔들리며/ 허공에 나부끼는 그대 그림자/ 그리고 그대의 푸른 이름도 하얗게 잊었다// 내일이면 바람 부는 거리에 서서/ 누가/ 우리들의 스러져가는 이름 하나 불러 세우리// 우리들의 마른 무덤 위에/ 작은 기억의 과일을 내려놓고/ 한 잔의 술을 따르리.//
비가 되어 내리면, 이산가족 눈물이 / 정성수
보이시지요, 어머니?/ 오늘도 잃어버린 가족을 찾아서/ 개성의 허공 수없이 떠도시는 어머니// 남한 하늘 속에 낮게 떠있는 구름자락/ 북한 하늘 속에 낮게 떠있는 구름자락// 아시지요, 그것이 모두/ 남북한 이산가족이 흘린 눈물들이/ 조금씩 떠오른 것이라는 걸// 그 구름들이 슬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비가 되어 내리면/ 남북한에 숨어있는 메마른 풀뿌리들을 적시면// 삼천리 금수강산 온 산천에/ 한 송이 두 송이씩 꽃봉오리가 벙근다는 것을/ 그것이 향기로운 통일의 꽃이라는 걸// 어머니/ 내 사랑하는 이산가족의 딸은 아시지요?//
아내는 하느님 / 정성수
작은 하느님이시다, 눈 맑은 나의 아내는/ 손가락에도 열 개의 눈이 달렸다// 한때는 초록 지구 위에/ 나를 낳더니// 하영이와 병화를/ 소리치게 하더니// 이제는 수없이/ 눈을 뜨게 하는구나// 손가락의 눈으로/ 흙의 속살 들여다보고// 허공에/ 첫사랑 같은 찻잔을 밥그릇을 항아리를/ 낳는구나// 눈이 큰 아내는/ 지구의 하느님// 달 보고 해 보고 별을 보고/ 달보다 해보다 별보다도 큰// 저 우주를 다 담고도 다시 넘치는/ 이 세상에서 가장 큰 항아리를 빚는구나!//
아내의 항아리 / 정성수
아내가 빚은 도자기 항아리 속에는/ 일평생 그녀의 슬픔 하나 가득하여/ 내 작은 슬픔이 깃들 자리 보이지 않습니다.//
젊음의 피 / 정성수
빠알간 피를 던져라// 들끓는 경관들의 낯짝에다가/ 불붙는 피를 뿌려라/ 발길로 피를 차버려/ 산산조각으로/ 피의 안개를 세워라// 그 속에 꿈을 꾸는 듯한/ 무지개를 태워라// 최루탄을 도로집어/ 반대로 갈겨라// 연기를 머금어라/ 연기를 뱉어라/ 피를 움켜잡으며 구호를 외쳐라/ 날뛰던 경관의 얼굴색이 변하게// 몽둥이도 없이/ 총도 없이/ 최루탄도 없이// 맨몸으로// 몽둥이 삼아/ 총 삼아/ 최루탄 삼아// 날아오는 것 받으며/ 끊임없이 달려라// 분노 앞엔 모든 것이 굴복한다/ 얌전히 고개 숙여 항복하는 것들에게// 소리 질러라/ 자유의 소리를// 침을 던져라/ 쫓겨가는 독재자에게// 먹구름이 일다/ 태양이 솟았다// 드높은 하늘을 그대로 지녀라/ 피가 물든 넓은 태양// 정열로 받아/ 가져라!/ 생각하라!//
* 4.19 혁명시, 평택중학교 3학년
사랑하는 사람아 / 정성수
사랑하는 사람아/ 젊은 날의 내 죽음 슬퍼하지 마시라// 지구 위에 산발한 나의 핏방울 위에/ 눈물겨운 무궁화꽃 송이송이 피어나나니// 눈부신 적군 총칼 앞에서/ 누가 빛나는 돌격을 두려워하랴// 사나이/ 사나이/ 초록 사나이들// 어느 누가/ 저 뜨거운 청춘의 죽음을 두려워하랴// 금수강산 대한민국/ 사자보다 씩씩한 북진통일/ 누가 두려워하랴.//
서현이 산책 / 정성수
여섯 살짜리 서현이/ 외할머니 손잡고 오릅니다/ 하늘에 뜬 아파트 승강기/ 지구별 위로 내려갑니다// 꽃향내 피어나는 정원/ 깡충깡충 한 바퀴 돕니다/ 하얀 나비가 함께 펄럭입니다// 허공 속으로 세워놓은 미끄럼틀/ 올라갑니다/ 푸른 하늘자락 만지작거립니다// 세상 속으로 내려갈 때는/ 아주 빨라요// 외할머니 손을 잡고/ 다시 승강기를 탑니다// 엄마 아빠와 다 같이/ 가장 빛나는 꿈을 꾸기 위해/ 침대가 기다리는 집으로/ 작은 새처럼 호르르 날아오릅니다.//
2월의 시 / 정성수
자, 2월이 왔는데/ 생각에 잠긴 이마 위로/ 다시 봄날의 햇살은 내려왔는데// 귓불 에워싸던 겨울 바람소리 떨치고 일어나/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저 지평선 끝자락까지 파도치는 초록색을 위해/ 창고 속에 숨어 있는 수줍은 씨앗 주머니 몇 개/ 찾아낼 것인가// 녹슨 삽과 괭이와 낫을/ 손질할 것인가// 세상 소문에 때묻은 귓바퀴를/ 두어 번 헹궈낼 것인가// 상처뿐인 손을/ 씻을 것인가// 저 광막한 들판으로 나아가/ 가장 외로운 투사가 될 것인가// 바보가 될 것인가/ 소크라테스가 될 것인가.//
기나긴 그림자 / 정성수
저 머나먼 별 아스라한 산자락/ 또 하나의 내가 숨쉬고 있네// 이 지구별 위 나는/ 그의 기나긴 그림자.//
겨울 등산 / 정성수
그대가 겨울날 혼자서 산을 오르는 것은/ 이 세상이 너무 춥기 때문이지/ 해의 육신 곁으로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서지/ 하나의 작은 해가 되고 싶어서지//
낙엽은 왜 하염없이 지고 있느냐 / 정성수
낙엽은 왜 하염없이 지고 있느냐/ 이미 초겨울이 저 스스로 깊어가는 중인데/ 갈 길 잃은 눈발도 이리저리 흩날리는데/ 아직도 가을을 다 버리지 못하여/ 자꾸만 지고 있는 것이냐// 눈 내리는 계절이 무거워서 지는 것이냐/ 가지 끝에 홀로 남는 것이 두려워 지는 것이냐/ 한세상 슬픔이 낭자하여 지는 것이냐// 너는 왜 쉬지않고 지고 있느냐/ 봄날의 사랑도 가을날의 이별도/ 모두 다 사라져간 저 푸른 허공 속으로/ 너마저 왜 이렇게 하염없이 지고 있느냐…?//
날아가누나, 한글새 / 정성수
날아갑니다, 한글새/ 지구 땅 사람들 숨쉬는 마을을 찾아서/ 하얀 부리 속에 한글 자모 하나 가득 물고// 저 외국문화 소용돌이치는 파도를 넘어/ 거대한 산봉우리 넘어/ 광활한 영혼의 세계로// 나라의 속마다 도시 속마다 시골의 속마다/ 가가호호 방마다 눈길마다 입술마다/ 다가가서 한 떨기씩 피웁니다/ 빛나는 한글의 꽃// 눈부시게 아주 눈이 부시게/ 대한민국의 얼 펼쳐보입니다/ 오늘도 내일도 거침없이/ 가장 위대한 영혼의 점령군같이.//
다시 기적 같은 봄날은 / 정성수
다시/ 기적 같은 봄날은/ 이 땅에 왔네// 시퍼런 하늘 한 자락/ 허공 아래 눈부시게 펼쳐지네// 잠에서 깨어난 새의 부리/ 대각선으로 날아오르고/ 자작나무숲 거느린 일당산 봉우리/ 함께 솟아오르고/ 지구가 따라서 우주 속으로 떠오르네// 사랑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모두 다 겨울집을 떠나기 시작하네.//
우리들 생애 / 정성수
누구인들/ 한 생애 꽃처럼 피어나고 싶지 않으랴/ 어둠 속 별처럼 반짝이고 싶지 않으랴/ 가을 하늘처럼 푸르게 열어놓고 싶지 않으랴/ 꽃과 별과 하늘의 씨앗 남겨두고 싶지 않으랴/ 모든 것 다 비우고 살고 싶지 않으랴/ 온 세상 뜨겁게 포옹하고 싶지 않으랴/ 하나의 작은 사랑이 되고 싶지 않으랴.//
병 / 정성수
이제 병들었네, 해방둥이 나는/ 21세기 우주 속에서/ 태양계 속/ 지구별 속에서// 아시아 위에서/ 대한민국 위/ 일당산 곰지기 계곡 위에서// 해방되지 못했네/ 떠돌이별과 떠돌이별 사이에서/ 마을과 마을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어리석은 나는/ 이제 아름다운 사람이 두렵네/ 아름다운 사랑/ 아름다운 시간이 두렵네// 일당산 능선 밑 자작나무 초록숲 손 흔드는 게 이쁘고/ 이쁘고, 하느님 향해 날아오르는 새들의 눈부신 목소리/ 소리없는 야생화들의 소용돌이치는 꽃 향내가 이쁘네// 쓸쓸이 많아 고단한 이마 위로/ 폭포처럼 쏟아져내리는 햇살과 달빛과 별빛// 저 늠름한 산과 산 사이에서/ 몇 잎의 바람이 내려앉는 한 송이 꽃이나/ 바람의 옷자락 끌어당기는 한 그루의 나무/ 바람을 타는 한 마리 초롱초롱한 새// 이제 나는 대자연/ 자연/ 그대로.//
통일의 그날 / 정성수
남북통일은/ 은밀히 다가올 것이네// 그대가 잠든 새벽/ 숲을 휘감는 물안개처럼// 지금 막 피어난 꽃잎 흔드는/ 바람 무늬처럼// 백두산 천지 위에서 단숨에 번득이는/ 아침 햇살처럼// 은밀히/ 아주 은밀히.//
북진통일 / 정성수
밀고 올라가자, 다 함께 북으로/ 비무장지대 북쪽으로/ 그리운 북녘 땅으로// 탱크가 아니라/ 폭격기가 아니라/ 미사일이 아니라// 평화의 손으로/ 3.8선 철조망 넘어/ 가자, 북으로/ 백두산 천지로/ 붉은 깃발 앞으로// 핵폭탄처럼/ 결사대처럼/ 가자/ 어서 가자/ 남북 이산가족과 함께 가자.//
1만년 전의 물 / 정성수
내게로 건너왔다/ 1만년 전의 물// 캐나다 로키산맥 북단 빙하/ 너무나 가벼운 시간의 중량/ 가늘고 둥근 병 속에 갇혀// 5년 전/ 나의 침대 곁으로 와서/ 내 문명의 영혼과 함께 동거를 시작했다// 몇 주일 전/ 서슬이 시퍼런 가을날 오후/ 그 1만년의 햇빛과 달빛과 별빛이 녹아내린/ 한 병의 물// 내 생애 속에/ 가득 따랐다// 그 순간 나는/ 1만년 전의 사나이/ 물처럼 투명한 원시인이 되어/ 21세기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들어갔다.//
자살 공화국 / 정성수
어인 일인가요?/ 날마다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의 육신을 버리네요/ 시퍼런 영혼조차 팽개치네요// 단 한 번 만난 지구 위에서/ 나라를 버리고/ 가족을 버리고/ 자기를 버리네요// 누가 자살을 꿈꾸게 하나요?/ 결행하게 하나요?/ 누가 그것을 무심히 바라보고만 있나요?// 저 하느님인가요?/ 그 사람인가요?/ 바로 그대 그대 그대인가요?//
고독사 / 정성수
그 누구도/ 내 생애 마지막 숨소리 듣지 못하는/ 비인 방에서/ 떠난다, 나 이제 홀로/ 한 떨기 슬픔도 없이// 친구여/ 마침내 이별의 순간이 왔다/ 그대 기억의 책갈피 속에서/ 지워다오, 내 어리석은 이름// 나의 심장 깊숙이 소용돌이치다가/ 때로는 뜨거운 피로 흐르던/ 일평생의 쓸쓸 허망 고독 같은 것// 모두 다 놓아주었다/ 무죄의 죄수로 가두어두었던/ 파랑새처럼// 그러므로 친구여/ 던져다오/ 식을 수 없는 내 영혼과/ 육신의 파편들// 지구별 밖 우주 저 너머로/ 머나먼 내 최초의 허공으로// 던져다오, 내던져다오/ 그대가 숨겨두었던 낯선 비밀의 손길로/ 녹슨 영혼 하나/ 온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것이/ 이 혹성과 나의 그림자에게/ 작은 평화의 종소리로 울릴 때까지// 잊혀진 뼈가 은하계 끝에서 어느 날/ 눈부신 부활의 광채로 솟아오를 때까지.//
아름다운 이유 / 정성수
그가 저렇게 아름다운 것은/ 상처 입은 영혼이기 때문이지요//
내 이름은 몽상가 / 정성수
내 이름은 몽상가/ 하늘보다 드넓은 나의 나라에선/ 눈물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옷을 벗네// 저마다 알몸 속에서 향기가 폭발하는 나라/ 해 뜨면 무화과 왕관을 쓰고/ 두 손 모아 바람의 그늘/ 지우는 나라// 모두가 왕인 나라/ 모두가 신하인 나라// 해 지면 등불 아래서/ 하늘이 쓴 경전을 읽고/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기나긴 편지를/ 쓰는 나라// 시나브로 꽃이 지면/ 시민들이 하나씩 꽃이 되는 나라// 청옥의 가슴 속에/ 물 한 방울 품은 위대한 가족들/ 마주치면 숨가쁜 포옹/ 목숨이 끓는 소리// 저 눈부신 햇빛의 폭포 속에서/ 이대로 죽어도 좋아라/ 사는 일은 더욱 좋아라.//
나는 발정기 / 정성수
나는 우울하다/ ㅡ 연두색 봄날 자지러지게 폭발하고/ 나는 발정기다, 또 다시/ ㅡ 독한 비린내 지글지글 끓어오르고/ 나는 벗어 던진다, 겨울 외투자락/ ㅡ 알몸의 살 내음이 암내같다/ 나는 무한히 번식하고 싶다, 온 우주에/ 나의 속살은 천 년 전의 깃털처럼 가볍다/ 나는 천지사방에 타전한다/ ㅡ 나를 주겠다고, 나는 뜨거운 알몸이라고/ 나의 신호를 접수할 수신기가 안 보인다/ 나는 무작정 꿈꾼다/ 나는 거칠고 사나운 꿈꾼이다/ 나는 계속 나를 타전한다/ ㅡ 나는 맛있다고……//
사기꾼 이야기 / 정성수
한평생 나는 사기를 쳤네/ 언제나 추운 앞마당 내다보며/ 보아라, 눈부신 봄날이 저어기 오고 있지 않느냐고/ 눈이 큰 아내에게 딸에게 아들에게/ 슬픈 표정도 없이 사기를 쳤네// 식구들은 늘 처음인 것처럼/ 깨끗한 손을 들어 답례를 보내고/ 먼지 낀 형광등 아래 잠을 청했지// 다음날 나는 다시 속삭였네/ 내일 아침엔 정말로 봄이 오고야 말 거라고/ 저 아득히 눈보라치는 언덕을 넘어서/ 흩어진 머리 위에 향기로운 화관을 쓰고/ 푸른 채찍 휘날리며 달려올 거라고/ 귓바퀴 속으로 이미/ 봄의 말발굽 소리가 울려오지 않느냐고// 앞마당에선 여전히 바람 불고/ 눈이 내렸다// 허공에 흰 머리카락 반짝이며 아내는 늙어가고/ 까르르 까르르 웃던 아이들은/ 아무 소문도 없이 어른이 되고// 종착역 알리는 저녁 열차의 신호음을 들으며/ 미친 듯이 내일을 이야기한다, 나는 오늘도/ 일그러진 담장 밑에 백일홍 꽃씨를 심고/ 대문 밖 가리키며// 보아라, 저어기 따뜻한 봄날이/ 오고 있지 않느냐고/ 바람난 처녀보다 날렵한 몸짓으로 달려오지 않느냐고/ 갈라진 목소리로 사기를 친다/ 내 생애 마지막 예언처럼.//
사람의 향내 / 정성수
보이네요/ 속살 밖으로 스며나온 당신의 향기/ 하늘색 옷자락 휘감아돌다가/ 소리없이 번져나가네요, 물무늬처럼// 봄 햇살 쏟아지는 네거리에서/ 등 굽은 행인들 서성이는 대낮/ 말없는 당신의 눈 들여다보면/ 꿈꾸듯 온몸 빨려드네요// 꽃잎 벙그는 숨가쁜 순간/ 귓불 시린 지상에서/ 나 또한 한 떨기 꽃송이처럼 열려// 뿜어내네요/ 알수없는 사람의 향내/ 미지의 지구인에게 전염시키네요.//
무궁화 앞에서 / 정성수
우리 겨레의 꽃 무궁화 앞에서/ 옷깃을 여밉시다, 그대와 나/ 우리 모두 하나가 됩시다// 서로가 서로에게/ 손을 내밉시다// 힘차게/ 악수를 나눕시다// 심장과 심장을 마주 비비고/ 따뜻하게 포옹합시다// 손 잡고 갑시다/ 대한민국의 눈부신 아침을 향하여/ 산을 넘고 들을 건너// 갑시다/ 우리 이렇게/ 통일의 그날까지 뜨겁게 함께 갑시다.//
바이올린 / 정성수
바이올린을 켜네/ 날이 저물 때까지// 아무도 없는 지구 위에서/ 나 홀로 연주를 하네// 나의 그림자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고, 나의 생애/ 내가 켜는 현의 소리 보이지 않고// 사라지네/ 나의 일생 말없이 저무네// 지상에서 단 한 번 나와 마주친 사람 없고/ 나의 생애 바라본 사람 없고/ 나의 바이올린 소리 들어본 사람 없네// 사방을 둘러봐도 하느님 웃음소리 보이지 않고/ 파아란 하늘 너머로 해가 지고/ 아득한 우주 저쪽에서 별이 뜨네// 허공 아래로 바스러지는 나의 발소리/ 내 귓바퀴조차 듣지 못하네/ 무심히 내 영혼 속으로 나는 스미네.//
곰지기 속 작은 우주 / 정성수
일당산 곰지기 계곡 속에서/ 작은 우주가 되었습니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저녁에서 다시 새벽까지// 홀로 도자기 술잔 기울이며/ 푸른빛으로 젖어있는 허공 바라보고/ 무심히 저무는 해를 바라보고/ 동녘 하늘로 떠가는 구름자락 바라보고// 날마다 솟아오르는 새들의 비상 바라보고/ 지구별 위로 하강하는 소나기떼 바라보고/ 산 너머 걸쳐있는 반원의 무지개 바라보고// 머나먼 별들이 뿜어내는 작은 광채 바라보고/ 자꾸만 추락하는 유성들 비명소리 바라보고/ 끝없는 신의 침묵 바라보고// 그 모든 것들/ 육신 속으로 스며들어/ 어느 날 나는 마침내/ 하나의 작은 우주가 되었습니다.//
길 / 정성수
묻고 싶었다// 당신이 가는 나라/ 어느 땅인지// 푸른 나래도 없이/ 저 깊은 허공 속으로/ 날아 오르는지// 가다 보면/ 은하수 언덕 너머/ 아무도 살지 않는 곳// 그대만의 해가 뜨는지/ 달이 뜨는지// 당신을 부르는 목소리/ 귓가에 닿아/ 다시 내 이름 불러 세우는지// 한 떨기 기다림의 꽃송이도 없이/ 당신의 그림자 사라지고// 비어 있는 땅 위에/ 나는 남아// 어느 새벽 누구에게/ 당신이 가는 길을 물으리.//
어둠 속의 아랑 드롱 / 정성수
사람이 그리울 때/ 전기 스위치를 내리고 나는/ 속옷을 벗습니다// 단숨에 아랫도리를 휘감는 어둠의 포옹 속에/ 광야에 홀로 선 투명인간// 보이지 않는 손을 뻗어 아내는/ 털북숭이 짐승의 다리를 어루만집니다// 짝사랑보다 두꺼운 어둠의 잠옷/ 언제나 나는 서투른 두 개의 얼굴// 불 꺼진 두 사람의 방안에선/ 아아, 나는 눈부신 아랑 드롱입니다// 만약 내가/ 하느님의 외눈보다도 형형한/ 전등불 켜고/ 마지막 속옷을 벗어내린다면// 켜켜이 쌓인 때와 칼자국으로 얼룩진/ 황인종 알몸의 몸짓/ 아내의 고성능 안테나가 사로잡는다면// 아직도 눈이 이쁜 내 아내는/ (아직 나는 아내의 알몸을 못 본 청맹관입니다만)/ 내일 아침, 향내 나는 화장을 지우고// 우리들의 숨가쁜 이별을 위해/ 나란히 가정법원으로 달려가자 할까요?/ 속살까지 끝끝내 사랑한다 할까요?//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 스위치 내리고 속옷을 벗으라는/ 짧고 긴 편지를 쓸까요?//
죽은 자의 휘파람 / 정성수
그렇다, 먼 어느 날/ 오늘처럼 하늘 서슬 시퍼런 가을날/ 내 죽으면/ 푸르스름한 이내 낀 저녁을/ 바라보며/ 나직히 휘파람을 불고 싶다// 부풀어오른 홍시가 야윈 가지 끝에서/ 내 붉은 심장처럼 땅 위로 떨어지고/ 어지러운 발자국이 떠돌던 마을/ 한 개의 단단한 씨앗을 묻을 때// 질긴 모가지/ 소리없이 방바닥 위로 늘어지면// 눈썹 끝이 다스운 봄날 오후/ 아름다운 사람들이 사는 거리를 거닐며/ 이미 무거워진 바바리코트를 벗듯/ 망가진 육신을 지상에 내려놓고// 투명한 영혼 하나 떠올라/ 잠시 낯선 생각에 잠겨/ 전쟁과 가난과 혁명의 시대를/ 슬픔과 기쁨으로 건너온/ 황인종 사나이의 껍질을 내려다보다가// 죽음이란 이렇게도 가벼운 것이구나/ 내 찢어진 영혼의 집합체/ 그 중량을 저울질해 보다가// 돌아가야 할 저 무명의 길/ 꽃잎 이우는 뒷모습을 조금씩 지우면서// 산다는 것은/ 젊은 날의 유서 같은 것// 가을바람 부는 허공 사이에 홀로 서서/ 나직히 휘파람을 불고 싶다.//
신랑신부 탄생 ㅡ가족여행 1 / 정성수
꽃다운 신부여/ 당년 25세의 그대// 사시사철 눈 내리는 어느 별나라/ 홀로 떠돌다가// 이제사/ 아스라한 어린 시절의 꿈송이 같은/ 흰 드레스자락 끌며// 고요히/ 내 곁으로 다가와/ 이렇게 깃을 내리고 섰습니까?// 모년 모일/ 토요일 하오 3시/ 종로 예식장// 젊은 날의 가슴 속/ 회한의 눈보라/ 우리들이 걸어 온 길을 적시던 빗줄기/ 그치고// 눈이 큰 신부여// 말없이 흔들리는 촛불 앞에서/ 한 시대의 죄인처럼/ 나란히 고개 숙이고 서서/ 당신과 나는/ 두 귓바퀴를 열었습니다.// ㅡ신랑 정성수군은 신부 강현순양을 괴로우나 즐거우나,/ 기쁘나 슬프나, 하늘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 사랑/ 하는 아내로 맞이하겠는가?// ㅡ네!// ㅡ신부 강현순양은 신랑 정성수군을 ……사랑하는 남편/ 으로 맞이하겠는가?// ㅡ네!// 우리는 마주 서서/ 이 세상 최초의 절을 나누고// 피아노 소리/ 꽃잎처럼 날리는/ 저 머나먼 길을 향하여// 두 사람의 단독자/ 서로를 확인하듯 팔짱을 끼고// 조금씩 생각에 잠긴 사람의 모습으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신랑신부 행진!// 아아, 이렇게 사람들은 어느 날/ 어른이 되는구나/ 정처없이 어디론가 떠나 가는구나.//
다시 새해 / 정성수
보신각 종소리/ 서른세 번 울리고// 축복의 나라에 내려선 해방동이/ 어느새 부끄러운 애비가 되고// 캄캄한 떠돌이별 저쪽으로/ 이제는 돌아올 수 없는 한 해/ 꽃잎처럼 산산히 흩어져 버리고// 다시 낯선 새해/ 깊은 밤 길을 달려 떠오릅니다// 우리가 태어나 언제나 그랬듯이/ 보내지 않아도 세월은 스스로/ 어디론가 저 홀로 깊어 가지만// 사라져간 뒷모습은/ 보이지 않아서 그리운 것// 가령 그것이/ 떨리는 우리의 넋을 잠시 해체시킨/ 선지피 묻은 손짓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처음이자 마지막 힘은/ 희망이라는 이름이/ 해진 주머니 속에 늘 감춰져 있다는 것// 저 알 수 없는 어둠 속으로 달려오는/ 새해의 가쁜 숨소리에 귓바퀴 열면// 아득히 잊어버린 심장이/ 다시 살아 뛰는 소리// 가느다란 실핏줄 속마다/ 붉은 피톨 부딪치는 소리// 아내는 누워서// 천장의 희미한 꽃무늬를 헤아리다가/ 잠시 생각에 잠기고// 어린 하영이는// 제 어미의 팔뚝 위에/ 무심한 하루를 내려놓고// 난쟁이 나라 숲속의/ 잠자는 공주가 됩니다// 한울님/ 어리석은 사나이는 어리석은 죄로/ 어리석게 사오나// 이 아기의 애비다운 애비이게 하소서// 이 젊은 여인의 지아비다운/ 지아비이게 하소서// 지난 해처럼 슬픔은 자주 잊게 하시고/ 기쁨은 오래오래 기억하게 하소서.//
눈맞춤 / 정성수
이글거리는 구공탄불 위에/ 간된장 뚝배기 하나 올려놓고// 부엌 문설주에 기대어 서서/ 봄 하늘의 저녁별/ 바라보시는 어머니// 저 깜박이는 몇 개의 별 속에/ 아물아물/ 무엇이 보이시나요?// 자꾸만 무엇을/ 찾고 계시나요?// 눈 들어 밤 하늘/ 끌어당겨 보아도/ 오직 작아졌다 커졌다 하는 별들의/ 운동뿐인데// 어머니, 어머니/ 바다보다 생각이 깊은/ 어느 한 별에서/ 아버지의 푸른 눈길// 아롱아롱 그리움 부풀리며/ 이승의 뜨락으로 내려오고 있나요?// 추녀 끝 근처/ 어느 허공쯤에서/ 어머니의 젖은 눈빛과 마주치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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