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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박해람 시인

부흐고비 2022. 4. 11. 10:35

박해람 시인
1968년 강원도 강릉에서 출생.

1998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낡은 침대의 배후가 되어가는 사내』와 『백 리를 기다리는 말』, 『여름밤위원회』 등이 있음.

현재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역임.

 



백 리를 기다리는 말 / 박해람
로사리오를 넘기는 손 안의 말들이/ 다섯 마디로 역은 환(環)/ 고리가 없는 말들이 묵주를 따라 돈다./ 화관(花冠)을 쓰고 있는 시간, 귀머거리 암송(暗誦)이/ 늙은 교회력들이 마당을 쓸고 있는 공소(空巢)는 지금 피정에 들어 있다.// 장미 콩이 여물어 가는 당나귀의 잔등/‌비스듬히 누워 있는 미사 시간이, 포도주가 시큼하게 상해 가는 코르크마개의 안쪽/ 신부가 없는 계절을 빌려/‌바람은 타인(他人) 그늘은 정인(情人)이라는 푯말을 걸고 묵언 중인데/ 당신은 백 리 밖에서 말을 하고/‌당신의 백 리 밖에서 나는 오독이 묻어 있는 말을 듣는다.// 저자(著者)가 여럿인 암송을 묵언으로 읊조리고 있다./ 생각이 달려 있는 기도는 오래된 종교이겠지/‌절이 있는 질책을 들었다면 너, 어느 벽돌 기둥의 모서리에 가려지지 않았겠지/ 어둑한 말의 모양을 두 손에 받아 들고/ 백 리를 기다리는 말이나 돌보고 있다고/ 말 잔등을 보내겠다고/측은한 피정 중이라고, 측은한 가명을 한동안 쓰고 싶었다./ 여름의 타인보다 겨울의 정인이 더 그립다.// 오십 리를 기다리다 오십 리를 마중 나간다./ 외면하는 첫마디를 베고 쉬겠다.//‌생일에 정한 성인(聖人)의 거푸집, 양쪽의 눈을 닮은 밀떡이 입안에서 녹아 간다./ 듣는 말로 세례를 받고 기생(妓生)의 이름으로 냉담 중이다.//

여름밤위원회 / 박해람
웅덩이에는 날파리가 왱왱댄다/ 물결 같은 건 없어 그러니까 소녀의 얼굴이 몇 살인지는 나도 몰라/ 꽃씨가 흘러나오는/ 소녀의 얼굴,/ 왜 태양을 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거지/ 찡그린 꽃씨라고 말하지 않는 거지/ 언젠가 뒷면에 침을 발라 붙인 달이 아직도 편지봉투에 떠 있다// 여름밤위원장의 팔에 달무리가 채워져 있고 땋은 머리를 풀자 여러 개의 밤길이 사라진다// 가장 큰 날개는/ 가장 작은 날개를 먹을 수 없지/ 부엉이와 날파리는 외계/ 확성기는 가까운 말// 거수를 하는 꽃들의 한 뼘/ 한밤의 풀밭에 얼굴을 터는/ 소녀들의 파종기/ 주근깨라 불리는 검은 별들// 돌을 던지면 머물던 장소들이 사라진다는 귓솟말,/ 방심한 곳에 쪼르리고 앉아 달무리를 올려다보면 부르르 떨리는 웅덩이들,/ 가상의 뼈를 활짝 여는 하품// 여름밤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렸다/ 여름은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계절이고/ 박수는 가장 오래된 의견이다/ 몇몇 번지는 의견은 제외되었다//
* 헤르타 뮐러

악필(惡筆) / 박해람
초서(草書)는 여름에 푸르러 겨울에는 죽고 만다./ 초목 하나를 휘감아/ 그늘을 다 털어내고서야 그 결박이 보인다./ 소리가 바람을 결박하고/잎은 가장 위엣것부터 불러들이니/ 창호(窓戶)의 외진 구멍들에게는/ 근동의 물소리만 벗으로 바쁘다.//‌위리안치(圍籬安置)는 어느덧 초목을 지나 낙엽에 이르렀다./ 지난밤에는 가장 성긴 치아가 빠져 거친 낮 밤을 우물거리지도 못해/ 간신히 귀로 마신 차 한 잔이/조식으로 들어앉은 배 속/‌어찰(御札)은 어느 진창을 지나왔는지 다정은 다 빠지고/ 독설만 얽혀 있다.// 근래에는 소문조차 찾아오지 못하게/ 탱자나무 울타리는 막아 버렸다/ 답장 없는 간찰 (簡札)처럼 계절은 성급했다/‌무릎을 꿇고 들어야 하는 악필의 문장이 도착했다// 각설하고/ 통증에는 그 어떤 구름도 없어/ 악필처럼 휘어지는 몸이 예의를 버리는 시간/‌몇 모금 악필이 첨가된 초오(草烏)탕은 몸 하나를 결박/ 하는 중인지 풀어 주는 중인지 영영.//

벚꽃 나무 주소 / 박해람
벚꽃 나무의 고향은/ 저쪽 겨울이다./ 겉과 속의 모양이 서로 보이지 않는 것들/ 모두 두 개의 세상을 동시에 살고 있는 것들이다/ 봄에 휘날리는 저 벚꽃 눈발도/ 겨울 내내 얼려 두었던 벚꽃 나무의/ 수취불명의 주소들이다/ 겨울 동안 이승에서 조용히 눈감는 벚꽃 나무/ 모든 주소를 꽁꽁 닫아 두고/ 흰빛으로 쌓였던 그동안의 주소들을 지금/ 저렇게 찢어 날리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 죽은 이들의 앞으로 도착한/ 여러 통의 우편물을 들고/ 내가 이 봄날에 남아 하는 일이란/ 그저 펄펄 날리는 환한 날들에 취해/ 떨어져 내리는 저 봄날의 차편을 놓치는 것이다// 벚꽃 나무와 그 꽃이 다른 객지를 떠돌 듯/ 몸과 마음도 사실 그 주소가 다르다/ 그러나 가끔 이 존재도 없이 설레는 마음이/ 나를 잠깐 환하게 하는 때/ 벚꽃이 피는 이 주소는 지금 봄날이다.//

척독(尺讀) / 박해람
지난봄에 기별한 그 봄기운으로 여기까지 악필로 왔다. 명년에는 단풍이 거꾸로 산을 넘어가고 있고 어느 호수 옆의 공원, 잎 다 진 그 길은 끝을 구부려 훔쳐보기 좋은 모퉁이를 만들었다.// 풍경은 지나가게 두고 누런 접선만 남은 서화(書畵).// 나무처럼 며칠을 바람만 긁다 접촉성피부염의 처방전을 읽고 있는 요즘/ 속지 같은 말들을 맞아 두었던 닥나무줄기는/ 돌의 흉터에서 구부러지고 있다// 혐오라는 말끝에 공원을 지어 방치하려 한다.// 귀 어두운 일족을 찾아다니며 여름에 맡겨 두었던 문장에 대해 물었다. 악담의 철에 잃어버린 텅 빈 살구나무 그늘과 남루한 옷소매에 묻은, 모처럼 목을 축인 새침. 낯을 가리는 화장술에 관해 물었다.// 너는 고이 접었던 접지의 안타까운 선이었다는 것을 아는지/ 누렇게 변하여 목질은 다 사라지고/ 누런 냄새만 남아 있는 끔찍한 접선// 아껴 두었던 선을 펴자 서화는 이미 화재(畵材)가 다 잡아먹은 뒤끝.// 늙은 척독을 펼치면 관계는 다 사라지고 선을 녹여서 만든 호칭만 징그럽게 남아 있을 뿐,/ 선명한 접선만 질기다/ 바깥의 일들이 지인처럼 돌아와 앉은 명년 추일, 우수수 떨어지는 화농의 색들.//

고치는 사람 / 박해람
우리가 살고 있는 곳곳을 살펴보면/ 거기, 고치는 사람이 앉아있다//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는/ 그런 것들 고치러 가면/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이따가 찾으러 오라는 말/ 혹은 아주 먼 곳을 들고 가면/ 아주 가깝게 고쳐놓는 사람// 손닿지 않는 것들을 주위로 바꿔 놓는 사람/ 인근(隣近)을 서성이게 하는 사람// 천개도 넘는 기술을 뒤져 매듭하나를 풀고 등 굽은 천품으로 태양의 뚜껑을 열고 닫는 사람// 몇 푼 삯을 주고 멀리 가서 또 망가지는 일들이거나/ 망가뜨리는 일들의 배후 같은/ 정작 자신이 앉아 있는 곳은/ 온통 망가진 것들 투성인/ 고치는 사람a/ 고장 나는 일들은 뻔한 일들이고/ 고장 나게 하는 일들은 늘/ 복잡한 일들이지만// 어깨너머로 보고 고치는 법을 배웠다는 사람/ 미간과 손끝은 이미 오래전에/ 고장aa 난 사람,/ 서랍을 열고/ 또 버려진 부품들을 찾고 찾아서/ 끊겼던 냇물 흐르는 소리를 고치고/ 지구의 고장 난/ 몇 초를// 기어이 고쳐내는 사람.//

미문 / 박해람
숨을 들이마시면 뼈가 부푼다.// 부푼 뼈로 흉사의 상두꾼을 했고 상민이 되었다. 의례성원들과 내장 없는 돼지들이 장례식장 간이식탁 위를 뛰어다닌다. 내장들이란 윤희의 선택품목이다. 말라버린 곤충의 자세로 서있는 나무 밑에서 돼지들은 지층을 갖고 있는 미문이다.// 술잔마다 차양맛이 났다.// 폐정 근처를 지나가는 신발들, 몇 페이지를 읽다가 버린 책 같은 장례식은 언젠가 접은 페이지만 발견되겠지만 문맹의 손끝에서 불이 피어오르렜지. 비파육은 몇 십 년 전에 죽은 이의 경황 없는 입맛.// 시차마다 새를 먹여놓고/ 이야기 없는 마을이 쉬쉬거리며 귀를 막는다.// 차오른 배엔 성별 없는 등성이를 넘어가는 어제 같기도 하고 오늘 같기도 한 직설의 울음이 태중을 바꾼다.// 뜨겁고 하얀 동그라미들만 구를 뿐인 마을엔 미명이 죽고 추하다.//

아랫입술을 깨물면 / 박해람
아랫입술을 깨물면/ 얼굴은 아파서 우는 것일까?// 아랫입술을 깨물면/ 사월에 불었던 열 자루의 휘파람소리에서 피가 나고 구열(口熱)엔 미풍을 엿듣던 모세혈관이 씁쓸해진다.// 나무들이 긴 팔을 뻗어/ 꽃을 쥐고 있는 사월// 목련의 구륜근(口輪筋)들엔 저희들만 아는 3차신경의 말들이 중얼중얼 부푼다. 수탉이 울고 지붕들마다 색깔들이 건너다니고 서로의 입을 열고 욕설을 꺼내던 목련들이 마당을 쉰다.// 철렁, 하고 내려앉았던 맛들이/ 마당처럼 넓다.// 정문수집가의, 열 번 뛰어들고 한 번 뛰쳐나가 만난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조항들과 대항 법엔 윗입술을 만나면 모든 말들은 죄가 된다고 적혀 있었다.// 아랫입술을 핥는 짐승은/ 아직 보지 못했으니까// 이 사소한 보호관찰기간 내내 입술에 묻어있는 악기들의 맛. 불룩하게 모아 뱉던 목련의 발성에 검지를 대놓고 숨어서 피던 담배마다 하얀 목련이 붙어 있다.// 길에서 주운 아랫입술 한 짝을/ 길 밖으로 던졌다.// 나무위로 올라가 꽃피는 것들은 지상의 먹이사슬에서 진 것들, 아랫입술을 깨물고 나는 늘 진다.//

플라잉낚시 / 박해람
궤적을 갖고 논다// 물살은 흐르다/ 여울로 회기(回期)한다.// 찌통을 열면 지난가을 채비해둔 새의 조마조마한 깃털로 만든/ 곤충들이 붕붕 날아다니고/ 무지개송어는 한마디 말처럼 헤엄친다.// 이정도 물살이면/ 물고 물리는 일이 벌어진다./ 지루한 물살, 이곳은 송어들의 식민지/ 초장은 한여름 맛이고/ 스프링을 달고 삐걱거리는 물살은 질기다// 강들은 죄다 내리막이고/ 물소리들은 오르막이다// 천만에,/ 한마디 궤적 속으로 숨는 새/ 새는 아무리 세게 발음해도 새/ 나무들이 풀쩍 뛰어올라 새들을 물고/ 첫 번째 가지로 돌아가는/ 미끼들이 날아다니는 물가/ 흐르는 물살에 물린 무릎/ 안간힘을 쓰는 물살은 무릎을 물고 놓아주지 않는다./ 휘청거리는 무릎,/ 송어들은 춤추는 것들을 잡아먹는다.// 매듭진 곤충들/ 새의 깃털로 만든 날벌레로 진짜 송어를 잡는다./ 물살은 부서지다 여울에서 산란한다.//


여섯 개의 손가락 별명 / 박해람
마을에 처녀가 왔습니다./ 원래 마을은 단언斷言들의 집성集成이라 가혹합니다./ 애벌레를 얼굴에 풀어놓고/ 기르는 종종 간지러우면 웃습니다./ 꽉 쥔 손안에서 꼬물거리던 주름들이/ 종래에는 얼굴로 번져 죽습니다./ 처녀는 생전 처음 보는 손과 손가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낯익은 얼굴의 처녀였으나/ 유독 손만은 낯설고 어색하고 경이로웠습니다./손의 별명을 가진 사람들은/ 수를 도합 하는 가업이 있었을까요/ 겨울엔 수천 장의 입김을 묶고/ 손가락 시린 대필을 하는 직업이었을까요/ 여분의 손가락엔 구부릴 수 없는 마디가 있어/ 성호를 그을 때 마다 엄지 근처에서/ 흰 솜이 튀어나왔습니다.// 손가락은 모태 문자였지만/ 태어나는 순간 두려움을 움켜쥡니다./ 손가락의 집성촌에서 두 개의 못생긴 손가락이 사라졌고/ 모태신앙의 얼굴들엔 성호를 그은 자국이 평화롭습니다./ 낯선 얼굴은 없는데 마을엔/ 낯선 손 하나가 돌아다니고 있었고/ 남자들은 주먹 흉터에서/ 손꼽는 날의 혼수를 매듭짓고 있었습니다.// 처녀의 지나간 별명에는 여섯 개의 손가락이 있었습니다./ 숲에서 발견된 누구는/ 애벌레만 모아서 장례를 치렀습니다.//

척독삽입춘서(尺牘揷入春書)* / 박해람
꽃가루의 효능은 사월/ 그 시기에 출시 된 허공은 무겁고 나무들의 몸 안으로 가려움이 옮겨 다닌다/ 나무들이 흔들려 허공을 긁고 있다/ 시원해지는 바람.// 담장 안으로 꽃잎 지는 소리가 뛰어 든다/ 걸음이 없는 것들에게/ 봄 한철이 줄지어 방문한다/ 잠자던 바람이 일어나는데 봄은 아주 우연한 계절이다/ 한 철 분주한 허공의 편도/ 멋모르고 뿌리 내린 것들은 멋모르고 기다리는 일 뿐/ 오다가다 허공에서 만난 사이/ 토닥토닥 봄날을 단장 해 본들/ 咯血의 자리에는 늘 咯血이 피는 일// 꽃들은 늙어서 허공을 살짝 밟아가고 떨어지는 것들은 제 스스로의 목이 시들었기 때문이다// 「尺牘- 수두 꽃이 시들어간다고 하나 실은 얼굴이 앞서 시드는 것을 그대도 아는 일. 비벼대는 일이 없으면 꽃의 粉 또한 기침이나 불러 들여 만발할 것을. 手應手答은 마음을 일어나게 하는 일. 意思없이 열리는 마음에 봄날은 그花奢를 뽐낼 뿐이지. 그대를 만나고 수없이 뒤척였으나 깨어나지 않는 잠도 있다는 것을 봄날 꾸벅꾸벅 졸면서 깨닫는다. 그대 봄은 너무 노련해져 향기가 없으니 속히 알아채길.」// 무분별 암호들이 적힌 春書는 다 읽을 시기가 있는 법, 때를 놓치면 번져 흐릿해진 문장들이 뚝뚝 지고 만다./ 담 너머로 날리는 흰 얼굴이 목 빼어 훔쳐본다/ 꽃가루의 효능은 허튼 꿈.//

자살하는 악기 / 박해람
꽃들이 다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 花色이 가득한 창문은 열두 달을 열고 닫을 수 없으니/ 떨어진 꽃잎들이 제 방향을 서로 교환하고 있는 사이 가을이 한 장씩 다 날아가고/ 나뭇가지들이 창문을 다 닫아 걸고 있다// 나무의 自殺은/ 그 木管 속에 미세한 길이 생겼기 때문일 것이고/ 音은 미세한 고통이고/ 날개에 분가루가 있는 것들에게는 소리가 없듯/ 자살한 나무로 만든 악기에는/ 죽은 것들의 후렴을 잡아둘 수 있는 木의 棺이 있다// 열두 달을 거느린 달 밖의 달/ 서른세 줄을 조율하는 달의 날들/ 一年 밖의 일 년이 흔들리는 곳, 휘어진 현이 펴지는 저 쪽/ 음악은 그곳에서 서서 쉰다.// 접은 옷소매에 음이 끼여 있군요. 밤을 지나왔군요. 악몽을 지나왔군요. 철사처럼 굽어 있는 밤, 팔을 몇 번이나 흔들어 허공을 지휘 했나요? 궁금했어요. 아팠군요. 나무들은 손가락을 두드리고 있군요. 손이 맵군요, 귀가 빨개지도록. 주머니에는 긁을 수 없는 간지럼이 가득하군요.// 음들은 주머니에서 오래 만져질수록 더 싱싱해 지고, 머리통은 아직 건기를 생각하며 썩어가고 있다/ 긴 무늬의 현들은 다 휘어져 있다./ 어린 음들은 아직 첫 달에도 못 들고 있으니/ 바람의 인이 한참은 더 박혀야 하리// 마주 등을 댄 창문은 꼭 안쪽만 눈물을 흘린다./ 일월에서 십이월까지 가려면 안 울고는 못가지//

질문의 동네 / 박해람
이 동네에 살면서/ 질문을 먼저 배웠는지/ 대답을 먼저 연습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예를 들자면 대답이란 꽃피는 방식이고/ 질문이란 임박한 즈음 같은 것이라/ 꽃의 앞뒤는 햇볕만 알고 있을 것이다/ 동네에는 쪼그려앉는 사람이 있고/ 그는 아이들의 질문을 모아다/ 곤충채집 판에 실핀으로 꽂아 놓길 즐긴다/ 또 동네에는 불구의 옷장을 수리하는 사람이 있는데/ 추렴으로 모은 뼈로/ 사람 하나를 만들어 놓고/ 대답을 내놓아라, 다그친다/ 한밤엔 소용없는 것들 중 하나가/ 바로 꽃,/ 질문은 두서없고/ 대답은 더듬더듬 칠흑의 사설을 읽는다/ 질문놀이를 하겠다고 해 놓고/ 종용하는 놀이를 겸한다/ 이를테면 확인하는 가구 수들과/ 의문에 묶어 둔 개들의 수가 같거나 한 일들/ 모르는 것을 틀리는 일들이란/ 법칙이 만들어진 이후의 일들일 테니/ 꽃을 질문하고 돌팔매를 맞는 일쯤 허다하다/ 장님이 던진 돌이/ 눈 뜬 우연에 가서 맞는 일 같은//

붉은 감자밭 / 박해람
낯선 것들을 지나 온 바람은 차갑지/ 소주를 마시면서 엄마는 너무 쉽게 가을 맞이했고/ 마을 소리는 한참 아래쪽에서 나던 때/ 나는 묽은 하늘 한 귀퉁이에서 감자를 캤지/ 밭고랑 여기저기에 몇 무더기의 감자를 캐 놓고 그것들/ 을 한군데 모으지 않은 채/ 그 하늘 밭 옆에 있던 집을 나왔지/ 엄마는 홀로 남겨져 이삭이 되고// 이삭만 잔뜩 짊어지고 뚱뚱하게 돌아다녔지/ 스스로 나와 빛을 본 것들 유난히 아린 맛이라고/ 푸른 척하며 돌아다녔지/ 몇 개의 배낭이 떨어져 쓸모가 없어지고,/ 어디서 잠들어도 하늘엔 이삭이 된 것들이 빛났고/ 그때는 나도 깊숙한 이삭이라고 정말 믿었다니까// 깊이를 가지고 있는 것들, 그 보이지 않는 것들 때문에/ 아무리 살살 파헤쳐도/ 감자의 몸에는 상처가 났지/ 철없는 엄마와 나는 그렇게 서로 감자를 캐 주었지만/ 지금은.,/ 사다리 없는 하늘 밭에 이삭이 된 감자들이 철없이 빛/ 나, 눈물의 배후가 되기도하니까/ 그렇지? 세상의 이삭들인 엄마......//

물집 / 박해람
정인(情人)의 손 끝에 환한 달이 부풀어 올랐겠다./ 못생긴 음(音)을 버리는 흰 달/ 팽팽한 밤길을 구부려 윗목을 비워 놨겠다.// 긴 저녁의 줄을 문질러 가면 뭉쳐진 집이 그 끝에 있다/ 방 한쪽에 물의 집으로 앉아/ 휘어진 음으로 결박당한 구석으로 연주를 건너가 보고 싶다/ 서툴러 자주 미끄러지는 자정/ 달은 여러 번 떴다가 터지겠지/ 딱딱하게 굳어 불 꺼진방은 만들지 않을 것이고/ 나는 조바심으로 환한 달을 손안에 넣고 호호 불겠지/ 오동의 속을 썩여 공명을 모셧으니/ 악취(樂臭)나는 탄식이 무릎을 치겠지// 미끄러져야 음이 될 것./ 둔한 부분이 더 둔해져야 할 것/ 소리의 껍질들이 벗겨져 나간 손가락 끝은 오랜 목숨 하/ 나를 누르고 있었다는 표정이/ 이마에 굳은 살처럼 핀 땀/ 손, 수건으로 닦아 내고 있으니// 낭자머리를 한 쪽진 악(樂)의 엉킴. 굳은 살에 가득 들어/ 있는 습관. 달의 껍질이 몇 번 물을 버린 지점에는 주워 먹/ 은 귀가 무거워 날지 못하는 새들이 가득하고 악금(樂琴)은/ 악공(?곡)(樂穀)을 훌훌 뿌리고 있고.//

이름이 붙은 거리(坡州) ㅡ나혜석전(傳) / 박해람
난독의 간판들과/ 최초의 검색어들이 모여드는 곳에 흉상의 소문이 앉아 있다/ 풍경은 쓰다듬다 벗겨진 부분/ 또는 덧칠로 벗겨내는 맨 마지막의 쓰라린 남루다/ 빈 곳을 찾아 바람을 심고/ 네가 네 이름을 풀어 놓은 골목을 정리하는 요량을 본다.// 마지막으로 걸었던 걸음이 날리고 있다/ 걸음이 다 떨어진 앙상한 몸엔 깊은 추위가 흔들린다./ 머리에서 천천히 내려와/ 걸음이 되기 위해 한참을 헤매었을 걸음/ 이쯤에서 저쯤을 끌어다 지명을 불러 세우는 일/ 많이 떠돈 사람만이 거리를 가질 수 있다// 이 몸에 편식의 나이가 들어 어떤 걸음은 빼먹고 걷기도 하였는바 일 보는 일 배로 작정하고 하잠(夏蠶)에 들어 있는/ 네 방문 앞에 다다라 심부름 간 척독(尺牘)을 기다린다. 하일의 정오는 시들어 우기(雨期)만 분주하고 네 오수에는 숨/ 소리가 없다. 기척하였으나 문고리가 없어 발길을 돌린다.// 태어난 날로 돌아갈 수 있다면 멀리까지 마음을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사후연대가 등에 업고 있는 쓸쓸한 유작들/ 거리가 된 한 사람이 돌아눕는 도처/ 마지막 침대의 삐걱이던 기침과 몸에 들엿던 마지막 병 그리고 여기/ 아늑한 이름// 반쯤 눈감은 평(評), 코르크가 빠져 흥건한 거리/ 이 고도(古道)에 거리를 놓고 바쁘구나./ 몸은 지명이고/ 마음은 걸음이었을.//

적란운 ㅡ가와바다 야스나리 풍으로 / 박해람
먼 발신구에서 온 아이의 만사(輓詞)를 중얼거리면서 땅이 풀린다// 흐르는 물소리를 꺾어 병에 꽂아 두지 마라/ 그 적란운 같은 치장에 물기가 올라 미칠 것 같다/ 끊어진 현(絃)은 아침에 쓸지 마라/ 빗자루가 지난간 자리마다 어지럽게 새겨진 적요는 후음이 없으니/ 아침의 세수는 풍(風)으로나 가당할 것/ 허공에 앉아 울지 말거라, 네 발밑의 소심한 외줄 우는 소리가 나를 미치게 한다/ 어느 한숨의 뒤끝에도 공원을 꾸미지 마라/ 적란운 아래 모든 줄기들이 악기 모양을 따라하고 있지 않니.// 부풀어 오르는 내부 장기들은 나를 떠오르지 못하게 할 것이다. 그러니 제발,/ 맹장지 저쪽으로 뒤꿈치를 들고/ 꽃의 후음이 지나가게 두어라./ 검은 색으로 바른 창호가 지나가는 하늘 아래에서는 그 어떤 소리도 내지 마라/ 물방울들이 심장을 뛰어다니며 귀찮게 하고 있으니/ 적란운 심기를 불편하게 하지 마라/ 어린 우기(雨氣)가 온 봄을 흔들고 있잖니// 나란히 누웠던 팔베개에 물이 올라 뒤척이는 봄날이 축축하기만 하고// 벚꽃 나무 하나가 산산이 부서져 날리는 저 꽃잎들/ 너의 모든 도처(到處)를 없애라/ 지기들의 안부가 나를 비치게 한다.//

입춘(立春) / 박해람
입(立)―/ 모자를 뚫고 봄이 튀어나온다// 콕콕 찍는 지팡이 외발의 지명이 너무 멀다/ 그 흔적마다 반쪽의 잎들이 심어진다./ 흔저이라는 지명에는 그 어떤 중심(中心)도 싹을 틔울 수 없다/ 햇살이 자꾸 걸음 밖으로 통통 퉁겨져 나가는데/ 뒤따라오는 저 늙은 반쪽의 가지는/ 자꾸 흔들리지 못해 안달이다.// 피는 구름처럼 흐르다 돌아가고 기껏 강을 돌아 나뭇가지에 가려진다./ 양쪽에 물소리를 끼고 걷는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춘(春)―/ 남아 있는 왼쪽은, 왼쪽으로 고삐를 잡고 힘들다/ 무뚝뚝한 누군가를 옆에 끼고 걸어야 하는 길/ 어느 날 슬쩍 내 한쪽의 팔짱을 낀 타인, 나를 떠나지 않을 것 같았던 내 옆의 춘(春)/ 지루한 그림자가 나를 앞질러 간다/ 아지랑이처럼 구불거리며 내 말을 듣지 않는 봄/ 돌지 않는 물소리, 나를 흘러 돌아가는 얼굴/ 비틀어진 말이 나를 흘겨본다.// 한 채의 봄이 느릿느릿 걸어간다./ 넘어지면 물오른 저 지팡이도 새싹의 기미에 물을 끊을 것.// 대길(大吉)―/ 봄이 빠져나온 곳은 길하다/ 한 번도 서 있는 그림자는 본 적이 없지만/ 등 밑에 그림자를 깔고 누운 사람을 뒤집어 본 적이 있다/ 이제 겨우 냄새나는 것들을 제 쪽으로 옮기던 그림자를 본 적이 있다/ 외출이 버리고 간 온몸을 본 적이 있다/ 몸이 많이 불어 있었고, 먼저 죽은 쪽이 먼저 바글바글 살아나고 있었다.//

마당이라는, 개의 이름 / 박해람
마당은 녹슨 철조망에 갇혀 있고/ 철조망은 냄새도 없이 썩는다.// 마당은 가장 낮은 곳의 넓이이고/ 천적의 식성으로 정원은 아름다웠다.// 허송세월이라면 마당 한 곳이 없겠으나 개의 등에는 이제야 꽃이 피었다. 작약 꽃과 엉겅퀴, 개나리는 형량(形量)이 정해진 꽃. 개는 여러 명의 주인이 있겠지만 끈, 끈은 봄엔 초록으로 철조망을 넘다가 가을엔 누렇게 마른다.// 막론하고 개는 줄기식물 과에 가깝다.// 저녁을 먹고 난 개의 배같이 둥그런 마당, 대문 하나가 오래 열리지 안았을 뿐인데 천적들과 훼방들이 무성하다. 개가 몸을 털어낼 때마다 개나리와 살구꽃이 떨어졌다.// 겨울, 누렇게 털이 말라죽은 개를 본 적 있다. 밥을 먹지 못한 개는 틈으로 번져나간다. 세상의 풀씨들이란 개의 털에서 쏟아졌을 것이다.// 이 집에 살았던 사람들과 마당은 천적 사이였을까 여럿이 죽고 태어나는 동안 이름들은 제각각 나이가 달랐다. 사람의 발자국은 잡초들의 천적, 마당은 사람의 말투를 잊으려 우거졌다. 살이 부러진 소나기가 어쩡쩡하게 버려졌으며 투명을 비워낸 술병들은 파랗게 물들었다.// 오랫동안 짖지 않은 대문은 귀가 퇴화되었다./ 왜 마당들은 이름이 없을까.// 가끔 관리인이 오면 마루 밑 신발 속에선/ 열쇠가 생긴다./ 그때 마당은 우거진 털로 사람 주위를 반갑게 뛰어오른다.//

자살하는 악기 / 박해람
꽃들이 다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 화색이 가득한 창문을 열두 달을 열고 닫을 수 없으니/ 떨어진 꽃잎들이 제 방향을 서로 교환하고 있는 사이 가을이 한 장씩 다 날아가고/ 나뭇가지들이 창문을 닫아걸고 있다// 나무의 자살은/ 그 목관(木管) 속에 미세한 길이 생겼기 때문일 것이고/ 음은 미세한 고통이고/ 날개에 분가루가 있는 것들에게는 소리가 없듯/ 자살한 나무로 만든 악기에는/ 죽은 것들의 후렴을 잡아 둘 수 있는 목(木)의 관(棺)이 있다// 열두 달을 거느린 달 밖의 달/ 서른세 줄을 조율하는 달의 날들/ 일 년 밖의 일 년이 흔들리는 곳, 휘어진 현이 펴지는 저쪽/ 음악은 그곳에서 서서 쉰다.// 접은 옷소매에 음이 끼어 있군요. 밤이 지나왔군요. 악몽을 지나왔군요. 철사처럼 굽어 있는 밤, 팔을 몇 번이나 흔들어 허공을 지휘했나요? 궁금했어요. 아팠군요. 나무들은 손가락을 두드리고 있군요. 손이 맵군요, 귀가 빨개지도록. 주머니에는 긁을 수 없는 간지럼이 가득하군요.// 음들은 주머니에서 오래 만져질수록 더 싱싱해지고, 머리통은 아직 건기를 생각하며 썩어 가고 있다/ 긴 무늬의 현들은 다 휘어져 있다./ 어린 음들은 아직 첫 달에도 못 들고 있으니/ 바람의 인이 한참은 더 박혀야 하리// 마주 등을 댄 창문은 꼭 안쪽만 눈물을 흘린다./ 일월에서 십이월까지 가려면 안 울고는 못 가지//

구름 치어 / 박해람
하늘을 들여다보는데 물속 치어들이 구름처럼 흩어지고 바람은 주름을 접었다 일순 펴지며 분다.// 볓처럼 꽃잎이 둥둥 뜬 작은 냇가// 하늘엔 검었던 먹구름들이/ 어느 돌 틈엔가 다 숨어 버렸다/ 꽃잎 아래 흙탕이 숨어 있다.// 마음속에 마음이 다 숨어 버린 내부, 들여다보면 숨어버리는 생각이 화르르 타오르며 지는 마을/ 들여다보는 눈들이 꽃의 목을 조르고 있고 믿었던 어느그늘도 제 그늘을 뒤집고 있는 시간/ 저 구름들은 분주하기만 할뿐/ 물의 뼈들은 물살은 잡지 않는데/ 건드리면 흙탕이 이는 탁한 얼굴아, 언제쯤 내 얼굴을 씻겨 주겠니.// 하늘 밖의 멍한 얼굴 하나 뭐가 두렵니/ 흔적도 없이 물에 물이 되어 숨은 것들아/ 때 이른 짜증으로 마음 하나 숨기지 못하는 이 멍한 얼굴이 뭐가 두렵니/ 어느 마음만 주름지게 했다는 때늦은 바람만 만발한 냇가// 꽃잎 치어들이 많은 마을을 지나간다./ 숨은 곳도 없이 눈길만 달고 다니는 어린 치어들// 물 위에 써 놓고 온 낙서는 그새 돌 틈으로 다 숨었겠다.//

독설 / 박해람
-지나간 다정함이란 곁의 쓸쓸함만도 못하다/ 나는 내 독설에 기대어 견디는 중이다// 한여름 푸른 독설을 견디기 위해/ 벌레가 뱉어 놓은 검은 허공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독설이 들락거리면서 흔들리는 나뭇잎이 있었고/ 얇은 바람 한 장 같던 흰 얼굴이 맥주 캔처럼 구겨질 뿐이던 여름/ 파랗게 흔들리던 것들은 몸서리치고 있던 중이었을까// 한없이 흔들리는 그늘만 자랐다/ 알고 보면 걸음은 다 땅에 박혀 뿌리를 키우는 것들이고, 뽑힌 걸음의 흔적들만 가득찬 천지/ 너는 왜/ 몸 밖이 없는 것들에게 왜/ 문을 열어 주었던 것이냐// 아무리 흔들려도 저 목가의 밖은/ 멀리 떠나지 않고/ 흔들리는 푸른 것들은 바람의 고삐에 묶여 있다/ 고삐는 가고 싶은 곳으로 팽팽하다/ 바람의 고삐는 가끔 몸이 휘어지지만/ 결국 끌려가지 못하고 버티는 나무의 머리채가 떨구는/ 그악스런 독설들// 끝이 없으니 영영 푸르다/ 그 푸른 바삭거림을 입 안에 넣고 우물거리는 바람의 혀/ 떨어진 땅이 검게 익은어 가는 철/ 여물지 않은 열매들의 자포자기라는 맛/ 뒤척임이 너무 겹쳐서 쓰라릴 때/ 그 사이가 묻은 채 떨어지는 독설/ 혼자 말라 가는 나무의 푸른 혀.// 반짝이는 것들은 눈동자를 익어 가게 한다./ 스스로 낙하한 검은 그늘들은 다 땅의 눈동자일 텐데/ 떨어져 제 눈을 가릴,/ 매달려 떨고 있는 저 으스스한 독설들/ 두 달 치 알약들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돌아서는데/ 온몸에 돋는 이 독의 수런거림들/ 나에게 알약은 으스스 떨리는 저 나무에 묻은 햇빛/ 너무 짧게 빛나는 약효./ 벌레가 다녀간/ 나무 밑 난전(亂廛)이 시고 푸르다//

나뭇잎이 떨어져서 / 박해람
나뭇잎이 떨어지듯 한 여자가 스르르 나무에서 풀려났다/ 냄새나는 그림자가 다 날아가 버리고/ 영혼은 그때서야 풀려난다./ 며칠 무거웠던 나뭇가지는 제 것 아닌 다른 열매의 낙과를 내려다볼 뿐이고/ 숨기 좋아하던 슬픔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나무 밑/ 제 그림자 위에 눕듯 반듯한 나뭇잎./ 먼저 떨어진 푸른색 왼쪽 신발이 바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든 힘 다 빼고 흔들려 보았겠지/ 늘어진 가지에는 아직 힘 붙어 있는데/ 모든 힘 가지에 걸어 놓고 흔들흔들/ 하얗게 익어 갔겠지/ 세상에 걸어 놓았던 힘들은/ 다 온몸으로 옮겨 와 뻣뻣하게 굳어 갔을 거야/ 마지막 잠시 동안 주고 간다는 그 푸른 힘/ 그 힘으로 바삭거리며 말라 잎은 경직이 되어 갔을 거야/ 빼서 지붕 위로 던진 젖니 같은 여름/ 흔들려 빠진 나뭇잎/ 허공엔 영혼들이 나뭇잎처럼 날아다니고// 한 남자가 오래 지붕 위를 올려다보듯 나무 밑에 서 있었는데// 후일 잎은 무성했고 그늘 또한 넓었으나/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는 나무/ 먼지에 쌓여 지워졌다는 길옆의 그 나무.//

병서(病書) / 박해람
약봉지를 접어 내게 보낸 편지에/ 그대의 병력(病歷)이 붙어 있다/ 심신에 색(色)이 들어 그늘에도 못 들고 있다고 씌여진 문장은 기침이 심하다/ 만추에 앉아서 받는 병서(病書)라니/ 우울한 그늘 한 자락은 도무지 잎을 떨굴 줄 모르니/ 그 그늘에도 차가운 얼음이 얼 것이네/ 여기 잠깐 그대의 필체를 들려줄라 치면......// 국진(菊俊)의 그늘에도 서리가 내리는 요즘 무탈하신가. 나는 여름 내내 풀 지게를 지고 휘청거렸다네. 내 거처에는 온통 약봉지뿐이니 이렇듯 오후에 그것도 자네가 좋아하는 석양의 한때를 빌려 보내는 우서(友書)에도 약봉지를 쓰는 것을 이해해 주시게. 나는 내 몸이 전생에 온갖 약을 싸던 봉지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네. 허연 김으로 한때의 독을 다 빼 낸 물렁한 약을 싸던 약봉지. 무릇, 세상에서 덮던 이불이 수의(壽衣)가 되는 것 아닌가. 모든 색이 다 흙 속으로 돌아가듯 나도 내 거처쯤 궁금하여 오늘은 이제 돌아가도 되냐고 빈 묵정밭에게 물어보고 온 참이네.// 흰색은 세상의 독이니/ 내 몸에도 간간이 새치가 빠져 나온다네/ 장자(壯者)의 젊은 손끝을 빌려 보낸 그대의 병서는/ 뒤끝에 단것이 필요한 문장이어서 한 번에 들이켜지 못하고 읽었다네.// 세상의 모든 귀퉁이들을 모아 만든 것이 알약이어서/ 내 몸에도 툭툭 부딪히는 소리가 시끄럽다네./ 한 사발 약기운조차 그대에게 보내지 못하고 얼음은 또 풀리고 말 것이네./ 미진한 약효와 벗하여 소일하는 일이 바쁘시겠네./ 안부를 처방하여 답신을 보낼 뿐이네.//

창문을 눕히려 눈을 감는다 / 박해람
안 보이는 것들만 바쁩니다./ 한낮을 위해 아지랑이는 땅 속에 몸을 휘고 있고/ 고로쇠나무는 피가 빨리 돌아 어질어질한가 봅니다/ 창문을 눕히려 나도 눕습니다./ 추위를 딱 하고 끊은 것들,/ 이 봄 끊어야 되는 것이 어디 손끝의 구름만 있겠습니까./ 나는 가는 길을 지울 테니/ 거기는 오는 길을 지우기 바랍니다.//

봄밤 / 박해람
오늘 밤은 정전이어서/ 봄밤이다// 집배원은 배꽃들이 낭비한 봄밤의 고지서를 배밭 주인에게 배달했다// 불 끄는 배꽃/ 화르르 정전//

누가 내 한기를 위해 다독을 덮어 줄 것인지 / 박해람
세숫물을 받아 놓고/ 머리를 긁으면 어떤 기억은 꼭 저 혼자 떨어진다./ 녹지도 않는 것이 늘 덜거럭거리던 것이/ 꼭 소금쟁이처럼 물 위에 떠서 잡히지도 않는다./ 가라앉지도 못하고 잡히지도 않는/ 가려운 가벼움/ 누군가 훅 하고 불면/ 흩어지는 한 마리 흔적// 마른 것들만 허공을 나는/ 젖어서 평생 어떤 날들의 덮개만 될 것들이 있다/ 극과 극이 살고 있는 사이좋은 부위/ 너무 오래 떨어져 있는 그 한몸/ 다른 남자와 자고 온 애인의 몸에 붙어 있는 안쓰러워 보이던 마른 것들// 사막을 여행하고 돌아온 계절/ 유난히 떨어지는 것들이 많다/ 누구는 한낮의 온도만 믿고 내 곁을 떠나갔지만/ 사막의 이불 같은/ 이 밤의 한기를 견디는 것은 그와 나나 같다/ 바람이 그 손바닥으로 사막을 쓰다듬듯/ 나를 다독였던 손바닥들이 이젠 가루가 되어 떨어지는 시절// 누가 내 건조를 위해/ 허공을 빌려줄 것인지.//

사탕처럼 천천히 녹는 여름 / 박해람
손가락 끝에서 먼저 물드는 것들, 충분한 염료가 여름 내내 펄펄 끓고 있다/ 깊어서 닿자마자 물드는 색/ 여름이 모든 열매들을 입 안에 넣고 우물거린다// 후드득, 진한 색깔들이 익어 가고 있다// 모든 열매들은/ 그 몸의 팔랑거리는 그늘 색을 닮아 간다/ 뽕나무는 제 그늘을 닮아 가려 했을 것이다/ 검고 붉고 푸른 것들이 매달려/ 검게 바람을 익히고 있다// 누구나 제 그늘을 한 번쯤 내려다본다./ 그러다 후드득 떨어져 내리는 지경이 되어서야/ 제 색깔을 알아차린다./ 물들어 가는 시간/ 한차례 다 털어낸 색깔들/ 스스스 흔들려 올려다보는 뽕나무// 진하게 익었다는 색/ 가장 끝과 닮았다는 색/ 올려다보는 이 한 몸과/ 먼저 깊어가는 생각의 끝이 물들어 가고 있다// 물들어가고자 하는 것들 단맛에 취해 호들갑이다/ 사탕처럼 천천히 녹아/ 꿀꺽, 해 보지도 못한 한 생이 넘어 간다/ 엄살은 오디처럼 검은 색이다//

묘(猫)의 방식으로 집필 / 박해람
고양이의 집필은 비스듬하게 모로 누운 방식, 꼬리를 봄볕에 찍어 쓰면 거만한 자음들이 아지랑이처럼 곤두서던 봄. 꽃들의 획수를 편집하거나 고양이 꼬리의 오타를 수정하는 일에 고용됐었지. 철자법 없어도 나뭇잎들이 돋아나고 혼자 놀고 있는 묘(猫)의 꼬리는 몸통을 자주 속였지. 아마도 서로가 외연(外延)이라고 여겼던 것 같아. 비스듬히 누워서 번역체 햇볕을 데리고 놀던 꼬리 파지마다 글자들이 웅크려 있고 엄지와 검지를 벌려 책의 분량을 정했지.// 볼펜을 열면 스프링 대신 고양이 꼬리가 감겨 있었지.가끔 잉크가 나오지 않는 꼬리도 있었거든.// 털 있는 것들은 다 붓 같다. 뒹구는 곳마다 가려운 흔적이 떨어져 있는 파지 눈을 가로로 혹은 세로로 뜨는 족적(足跡)을 새기고 담장 밑 봄은 천천히 굳어 갔지.// 심심한 수염, 혼자 놀고 있는 꼬리의 집필.// 비릿한 줄 간격을 쓰고 까끌까끌한 필체까지 묘(猫)의 방식으로 집필한 수염의 자서전. 햇볕은 난간을 지나가고 검은색에 흰 털이 듬성듬성 박힌 봄, 또래가 없이 꼬리를 끌고 다니는 스프링의 몸통. 거만한 간격의 줄거리가 낱장으로 울어 대던 봄밤.// 채마밭이 달린 마당이 백이십 페이지 분량으로 묶이고 떨어진 꽃들을 주워 마침표로 사용했지./ 묘(猫)의 방식으로 집필한 책은 난간이라는 제목.//

양귀비 / 박해람
몸에 칼집을 내면 흘러나오는 저 독은/ 사실 독이 아니다./ 라오스 깊은 계곡에서 살다 간 어느 처녀의 순진한 저주다./ 상처에서 새살이 흘러나오듯/ 모든 상처에서 흐르는 것들은 제각기 천국(天國)을 갖고 있다./ 세상과 세상을 이어주는 칼날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어/ 누구도 그 경계에 베이지 않으면 갈 수가 없다/ 저주와 몸을 섞어야만 들어갈 수 있는 곳/ 세상에서 세상으로 가는 길은 무수히 많다.// 여기 한 인간(人間)이 있다./ (그는 잠시 몸을 말리러 이곳에 온다고 했다. 많은 순례객들 사이에 섞여 이곳저곳을 여행하다 들르는 이곳은 단지 하나의 재미없는 코스에 불과하다고 했다. 축축한 옷을 말리면서 다시 독이 고이기를 기다린다고 했다. 스스로 독을 만들지 못하면 아무 곳도 갈 수 없다고, 이곳은 그저 평범한 환각일 뿐이라고)/ 서둘러 보호색을 띠며 그가 말했다.// 젊은 날 나의 뒤꼍은 수십 그루의 천국이 은밀히 자라는 음지였다./ 아무도 몰래 피었다 사라지는 그 천국의 속국(屬國)이었다/ 지금은 그 누구의 천국이 되지 못하는 나는/ 아직 이곳의 손님이다./ 나의 지랄 같은 염병할 인생에.*//
* 크라잉넛 노래 <양귀비> 중에서

꽃. 잎. / 박해람
새벽에 비가 내렸나 검은 승용차 한 대가 느리고 조용한 조곡 풍으로 지나간다./ 차의 온 몸에는 꽃잎이 잔뜩 붙어 있다./ 그 동안 몇 개의 나무를 거쳐 여기까지 왔을까./ 떨어진 꽃은 아마도 잎의 전생쯤 될까 떨어진 꽃잎이 아스팔트 속으로 모든 소리를 버리고 조용히 스며든다./ 그 옆 가로수들은 수생의 잎들이 한창이다.// 나는 꽃인가?/ 아니면 잎인가?//

단단한 심장 / 박해람
살이 다 썩고 난 후의 복숭아 씨앗은/ 복숭아의 심장일까 그러고 보면/ 단단한 것들의 껍질은 너무 약하다/ 딱딱한 시멘트 바닥에 굴러도 깨어지지 않는/ 단단한 심장/ 그 심장이 깨어지고 우연히/ 그 속의 또 다른 하얀 살을 보는 일/ 살을 부풀리기 이전에 먼저 채웠을 그 잇속을 한참 들여다본다./ 아무것도 건축되지 않은 공터/ 잠깐의 그늘도 만들지 못한 이 속엣 것들은/ 아껴 두었던 후생일까/ 더러는 까맣게 썩은 것들도 있다/ 다음 세상에도 못 가는 슬픈 것들.// 연약한 이 몸 속에도 한 세상이 단단하게 여물고 있다/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것들은 다른 세상의 일./ 가끔 마음 뻐근할 때마다/ 그것들, 작은 샛길을 내고 있었던 것인가/ 샛길이란 잎이 다 진 후에 드러나는 길./ 껍질은 지금도 붉게 물들어 떨어지고 있는 중인가/ 속으로 몰래 배신을 키워가고 있는 중인가,/ 심장에 손을 가만히 얹어 본다/ 수없이 많은 세상들이 두근두근 뛰고 있다/ 다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명중 / 박해람
사내의 울퉁한 팔뚝에/ 한 시절의 순정이 명중되어 있다/ 그러나 그 무엇에다 명중시키기란 쉽지 않다는 것/ 저 하트 모양에 박혀 있는 화살처럼/ 깊이 박힌 다음에는 명중되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는 것이지/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은/ 지금은 뒤쪽에서 덜 풀린 힘이 부르르 떨고 있는/ 여진의 날들이라는 것이지/ 또한 허공으로 날아간 것들/ 그 떠난 자리는 흔적이 없다는 것이지/ 다만 죽음으로 가는 길 위에는/ 누구나 명중되어 있다는 것이지// 기마족(騎馬族)들에게는 적에게 허점을 보일 때가 화살을 날릴 때란다/ 그 무엇을 과녁으로 삼을 때가/ 가장 방해받기 쉬운 때라는 것이지/ 숨 한 번 고르는 시간이/ 영원히 숨을 끊을 수 있을 때라는 것이지/ 내 몸이 과녁이 되는 때라는 것이지// 아직 제대로 된 들숨 한 번 들이마시지 못한 시절인데/ 명중의 시절이 내게로 와 박히는 시간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마음 부르르 떨리는 때가 있다/ 아직 깨끗한 과녁이 가끔 두렵다/ 그러나 이 부르르 떨리는 것들, 고통은 늘 뒤쪽에 있다는 것이지/ 그러다가 더 이상 떨림도 없을 때가/ 내가 제대로 된 과녁이 되는 때라는 것이지/ 사내의 울퉁한 팔뚝에 박힌 그 화살처럼/ 누군가의 마음에서 푸릇하게 사라져간다는 것이지.//

버들잎 경전 / 박해람
물가에 버드나무 한 그루/ 제 마음에 붓을 드리우고 있는지/ 휘어 늘어진 제 몸으로/ 바람이 불 때마다 휙휙 낙서를 써 갈기고 있다./ 어찌 보면 온통 머리를 풀어헤치고/ 헹굼필법의 머리카락 붓 같다/ 발 담그고 머리 감는 갠지스 강의/ 순례객 같기도 하고// 낙서로도 몇 마리의 물고기를/ 허탕치게 하는 재주도 부럽고/ 낙서하기 위해/ 몇십 년을 허공으로 오른 다음에야 그 줄기를/ 늘어뜨릴 줄 아는 것도 사실 부럽다.// 쓰자마자 지워지는/ 저만 아는 낙서 경전/ 지우고 또 지우는 마음이/ 점점 더 깊어지며 흐를 뿐이지만/ 물 묻은 제 마음이 물 묻은 제 문장을 읽는/ 제가 저를 속이는 독경// 지구의 모든 문장이 저와 같지 않을까/ 생각해 보면 참 대책 없다.//

창백한 푸른 점* / 박해람
얼굴을 뒤지면/ 저렇게 작은 지구 여러 개 있다/ 지금은 64억 km를 지나와서/ 내 얼굴에 있는 점을 본다// 멀리서 나는 본다/ 까마득한 거리/ 내 얼굴의 검은 점 하나를 보기 위해선/ 얼마나 많은 거리를 비행한 다음이어야 하나/ 흘러와서 점 하나쯤 남기고/ 우주 저편으로 떠도는 동안/ 내가 거울 앞에서 고개를 돌려 내 점을 언뜻 보는 순간이/ 64억 km의 거리를 지난 시간이라는 사실// 적어도 내 점 하나에는/ 수천 명의 이름이 들어 있다/ 무거워, 얼굴을 나누며 오간다// 그 먼 밖에서 나를 보고 있었으니/ 겨우 고작, 이라는 말 배워서 가끔 써먹고 있을 뿐이었지// 거울을 보면/ 이미 오래전에 나는/ 나를 지나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둥둥 떠갈수록 나와는/ 영영 만날 수 없다는 사실// 오늘은 눈이 내리고/ 지구는 여전히 헛바퀴를 돌고 있다//

*칼 세이건, 보이저 1호가 64억 km 밖에서 찍은 지구 사진

알맞은 두께 / 박해람
작당한 두께는/ 안과 밖을 따로 두지 않는다// 돌은 두께가 아니라서 그 속엔/ 아주 작은 자갈이나 모래의 동그란 모양들이/ 탄생을 기다리고 있다// 두꺼운 것으로 치자면 사람이 우선일 것이지만/ 사람이 사는 집은 얇기가 그지없다/ 말엔 안과 밖이 없으면서도 숨고 드러내는 일에 서슴없다/ 실내 혐오자들은 원래/ 문 닫은 일에 종사하던 사람들이었고/ 반대로 맹목의 용도들은 실외 옹호론자들의 규칙이다/ 표면의 몰락을 탐사하러/ 우주로 날아간 이들이 발견한 것은/ 깊숙한 실외들이었지만/ 그곳에도 바깥을 위한 두께들은 없었다// 흔히들 투명한 것은 얇은 것이라고 생각들 하겠지만/ 허공이라 칭하는 곳은 가장 두꺼운 투명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쥐고 있던 것이/ 안쪽이었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두께도 없는/ 먼 곳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챈다// 두께가 아무것도 숨겨주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고/ 가끔 공중이 깨져 떨어질 때가 있다/ 어느 한구석, 얇은 곳이 있다는 뜻이다/ 비와 눈은 높이의 단위들이고/ 사나운 먼지와 바람 같은 것들은/ 두께의 단위들이다// 물론, 그것들이/ 지붕과 창문을 발명했다//

질문의 동네 / 박해람
이 동네에 살면서/ 질문을 먼저 배웠는지/ 대답을 먼저 연습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예를 들자면 대답이란 꽃피는 방식이고/ 질문이란 임박한 즈음 같은 것이라/ 꽃의 앞뒤는 햇볕만 알고 있을 것이다/ 동네에는 쪼그려앉는 사람이 있고/ 그는 아이들의 질문을 모아다/ 곤충채집 판에 실핀으로 꽂아 놓길 즐긴다/ 또 동네에는 불구의 옷장을 수리하는 사람이 있는데/ 추렴으로 모은 뼈로/ 사람 하나를 만들어 놓고/ 대답을 내놓아라, 다그친다/ 한밤엔 소용없는 것들 중 하나가/ 바로 꽃,/ 질문은 두서없고/ 대답은 더듬더듬 칠흑의 사설을 읽는다/ 질문놀이를 하겠다고 해 놓고/ 종용하는 놀이를 겸한다/ 이를테면 확인하는 가구 수들과/ 의문에 묶어 둔 개들의 수가 같거나 한 일들/ 모르는 것을 틀리는 일들이란/ 법칙이 만들어진 이후의 일들일 테니/ 꽃을 질문하고 돌팔매를 맞는 일쯤 허다하다/ 장님이 던진 돌이/ 눈 뜬 우연에 가서 맞는 일 같은//

마당이라는, 개의 이름 / 박해람
마당은 녹슨 철조망에 갇혀 있고/ 철조망은 냄새도 없이 썩는다// 마당은 가장 낮은 곳의 넓이이고/ 천적의 식성으로 정원은 아름다웠다// 허송세월이라면 마당만 한 곳이 없겠으나 개의 등에는 이제야 꽃이 피었다. 작약 꽃과 엉겅퀴, 개나리는 형량이 정해진 꽃. 개는 여러 명의 주인이 있겠지만 끈, 끈은 봄엔 초록으로 철조망을 넘다가 가을엔 누렇게 마른다// 막론하고 개는 줄기식물과에 가깝다// 저녁을 먹고 난 개의 배같이 둥그런 마당, 대문 하나가 오래 열리지 않았을 뿐인데 천적들과 훼방들이 무성하다 개가 몸을 털어낼 때마다 개나리와 살구꽃이 떨어졌다// 겨울, 누렇게 털이 말라죽은 개를 본 적 있다 밥을 먹지 못한 개는 틈으로 번져나간다 세상의 풀씨들이란 개의 털에서 쏟아졌을 것이다// 이 집에 살았던 사람들과 마당은 천적 사이였을까 여럿이 죽고 태어나는 동안 이름들은 제각각 나이가 달랐다 사람의 발자국은 잡초들의 천적, 마당은 사람의 말투를 잊으려 우거졌다 살이 부러진 소나기가 어쩡쩡하게 버려졌으며 투명을 비워낸 술병들은 파랗게 물들었다// 오랫동안 짖지 않은 대문은 귀가 퇴화되었다/ 왜 마당들은 이름이 없을까// 가끔 관리인이 오면 마루 밑 신발 속에선/ 열쇠가 생긴다/ 그때 마당은 우거진 털로 사람 주위를 반갑게 뛰어오른다//

근황 / 박해람
머리맡을 정하지 못해/ 잠이 옮겨 다닌다/ 내가 옮겨 다닌 집들은 향向을 사상쯤으로 알고 있었다/ 동쪽 울타리 밑으로 은일자*가 따라다녔고/ 향념에선 파초라든가 비파 같은 갱지들이 피고 졌다/ 그것들을 따다 한낮엔 밝은 종이로 쓰고/ 밤엔 검은 종이쯤으로 치부했다./ 한 채의 집이 얼마나 많은 주변과 소쇄를 몰고 다니는지에 대해/ 외간의 책들로는 배우지 못했다./ 수상受賞의 제목들이 빼곡히 꽂혀 있는 숲을/ 놀란 초식들이 달려갔다./ 그런 날은 뿔이 두근두근 뛰었다/ 십리 밖에 취하는 신발을 벗어두고/ 그 옛날 아버지의 취한 옷소매를 그리워했다/ 한 번 아들로 태어난 사실은 바뀌지 않고/ 어쩌다 아버지가 된 사실도/ 저잣거리를 지나면서 알게 되는 것이다/ 위로를 추렴하는 모임에 참석하고/ 시인으로 철없는 결구를 짓고/ 사람으로 뻔뻔한 치욕을 편들었다/ 이만하면 죽기 딱 좋은 과오라는 생각이 든다/ 흰 꽃이 익으면 함께 부슬부슬 봄날의 궂은 날씨로 반죽한 국수를 먹으로 가자고 했고/ 어쩌다 맨 정신의 친구에게 술 취한 당호를 부탁하고/ 허언처럼 들고나는 문을 세웠다/ 무료의 손끝을 모아/ 정원을 꾸미는 날들이 쏠쏠하다/ 마른고추를 거둬들이는데 소나기가 묻어 있다/ 그럭저럭 머리말을 너무 많이 읽는다//
* 도연명陶淵明

낡은 침대 / 박해람
모든 힘이 빠진 한 사내가 후줄근하게 돌아와/ 꽤 오래되고 낡은 충전기 안으로 들어간다./ 그의 몸에 딱 맞는 배터리/ 푹신하고 깊은 잠이 넘쳐나는 낡은 침대 안으로/ 안경을 벗고 조용히/ 그의 관절들이 혁대를 풀고 잠든다./ 얇은 모기장과, 빛의 속도로 몇억 광년쯤 날아온 듯한/ 낮은 스탠드 불빛./ 그러고 보니 저 낡은 침대와 연결된 코드는/ 대기권 밖인지도 모른다.// 몇 번의 뒤척임으로 사내는 온몸에/ 잠을 고루 바른다./ 신선하고 맑은 힘이 온몸으로 퍼진다./ 지지직거리는 몇 마디의 잠꼬대가 몸 밖으로 버려지고/ 꿈과 꿈들 사이에 부드럽고 말랑한 연골이 채워진다./ 피로와 힘겨움 같은 것들을 밤새 먹어치우는 거대한 짐승/ 결국, 저 사내도 언젠가는 저 침대의 먹이가 될 것이다.// 간혹, 삐걱이며 새어나오는 전류/ 버려진 꿈들의 폐기장/ 산더미처럼 쌓인 저 권태와 피곤함이 배어 있는 덩어리./ 점점 충전 속도가 떨어져/ 다시 이불 속으로 파고드는 저 사내/ 어쩔 수 없이 낡은 침대의 배후가 되어가는 저 사내.//

낡은 옷 / 박해람
낡은 옷은 구멍이 뚫려서/ 그 사이로 별이 보이고 착한 거짓말과/ 머뭇거린 주장은 올이 풀려있다/ 풀린 올은 혹독했던 모함 쪽으로 슬금슬금/ 옷 하나를 옮기고 있다./ 세제가 다 빠진 맑은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빨랫줄이 보인다/ 남루한 페허를 한 벌 옷에 불러들이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닌지라/ 어느 성자는 남방南方의 후덥지근한/ 맨몸의 상체를 빌려 입었고/ 신약新約은 소매와 기장이 없는/ 모래바람을 즐겨 입었다는데/ 저이는 몸 보다 옷이 먼저 경지에 다다랐다./ 군데군데 구멍을 뚫고/ 또 이곳저곳을 찢고 나간 몸이/ 고단했을 것이라는 추측이지만/ 저 구멍들은 빠져나간 흔적들인가/ 아니면, 불러들인 흔적들인가/ 지퍼와 단추들이 죄다 사라졌음으로/ 그냥, 걸치는 행색만 남은/ 낡은 옷에 다행스럽게도/ 풀벌레와 여름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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