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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이덕규 시인

부흐고비 2022. 4. 8. 15:44

이덕규 시인
1961년 경기도 화성에서 출생. 대학에서 토목을 전공.

1998년 《현대시학》에 〈揚水機〉외 네 편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 『밥그릇 경전』, 『놈이었습니다』 등이 있음. '현대시학작품상', '시작문학상', 2016. 제9회 오장환문학상. 노작홍사용문학관 관장. 경기민예총 문학위원장을 역임. 경기민예총 이사장.

 



양수기(揚水機) / 이덕규
지난여름 내내 저 혼자 논두렁에 나와 앉아/ 무슨 생각에 그렇게 골똘히 잠겼는지/ 녹이 벌겋게 슬은 양수기에 스위치를 넣자마자/ 헐은 위장 속에 고여 있던 침묵이/ 역한 냄새를 풍기며 느닷없이 마려운 뒤를/ 앞으로만 울컥울컥 뿜어내려는/ 헛구역질을 해대고 있다 묵은 체증을 게워내다 말고/ 다시 시컹거리는 이 지독한 토사곽란,/ 지하 암반수위에 미치지 못한/ 흡입구 끝이 목매인 개처럼 혀를 길게 내밀고/ 고인 물 끝 가이없는 허공에다/ 타는 갈증만을 처박고 있는 것이리// 그 헛김 속에서 말들이 새어 나온다/ 함부로 내뱉은 말들 숨겨져 찌들은/ 어느 골 깊은 곳에 묵은 때로 늘어붙어 있던 활자들이/ 뒤미처 달려나오다가 고속의 프로펠러에 휘감기어/ 입 터지고 귀 떨어진 몰골들로/ 붉은 피를 뚝뚝 흘리고 있고 더러는/ 미처 빠져 나오지 못한 말들이/ 碎石機 어금잇빨 같은 양수기 안쪽에 물려/ 으적으적 씹히며 내뱉는 소음들 마침내/ 썅썅거리며 공회전하는 주둥이로 꾸역꾸역 토해내는/ 어둠들, 드러난 말의 바닥이여// (허허 이게 무슨 말인가)// 그 어둡고 어두운 통로를 따라 들어가 보라/ 後頭 끝에서도 다시 수천길/ 아득한 적막을 뚫고 내려가면 거기 깊고 깊은/ 맨 밑바닥에서 쉬임없이 솟아오르는 샘물이/ 아직 말에 이르지 않은 싯푸른 물결로 낮게 낮게 흘러가/ 거대한 말씀의 저수지에 이르고 있는 것을/ 결코 제 목소리를 드러내지 않는 그 태아인/ 언어들 속으로 더 길고 긴 호스 몇 다발 디밀고/ 스위치를 넣으면 이윽고 하늘빛을 닮은/ 무한대의 활자들이 이 가을 허공 한 복판으로/ 힘차게 굽이치며 흘러가고 있는 것을//
* 1998년 월간 《현대시학》 등단 시

논두렁 / 이덕규
찰방찰방 물을 넣고/ 간들간들 어린모를 넣고 바글바글 올챙이 우렁이 소금쟁이 물거미 미꾸라지 풀뱀을 넣고/ 온갖 잡초를 넣고 푸드덕, 물닭이며 논병아리며 뜸부기 알을 넣고/ 햇빛과 바람도 열댓 마씩 너울너울 끊어 넣고/ 무뚝뚝이 아버지를 넣고 올망졸망 온 동네 어른 아이 모다 복닥복닥 밀어 넣고// 첨벙첨벙 휘휘 저어서 마시면,// 맨땅에 절하듯/ 누대에 걸쳐 넙죽넙죽 무릎 꿇고 낮게 엎드린 생각들 길게 이어붙인/ 저 순하게 굽은 등짝에 걸터앉아/ 미끈유월, 그 물텀벙이 한 대접씩 후르륵 뚝딱 들이켜면// 허옇게 부르튼 맨발들 갈퀴손가락들 건더기 째 꿀떡 꿀떡 넘어가겠다//

자서自序 ㅡ『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 / 이덕규
순간 섬뜩했으나, 나는 잠자코 있었다./ 그때 내가 가진 거라곤 날선 칼 한 자루와 맑은/ 눈물과 제목 없는 책 따위의 무량한/ 허기뿐이었으므로,// 그리고, 이른 아침 호주머니 속에선 뜻밖에 오천원권 지폐 한 장이 나왔는데,// 그게 여비가 되어 그만 놓칠 뻔한 청춘의 막차표를 끊었고,/ 그게 밑천이 되어 지금껏 잘 먹고 잘 산다.// 그때 다녀가셨던 그 어른의 주소를 알 길이 없어……/ 그간의 행적을 묶어 소지하듯 태워 올린다.//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 / 이덕규
*/ 공장 굴뚝 위로 솜사탕처럼 달콤한 이야기들이 피어오른다// */ 한 때 나는 그 달콤한 구름을 타고 다닌 적이 있었는데 어떤 고도의 바람을 추진력으로 날아가는 그 허풍쟁이 근육질의 조종사는 핸들이나 브레이크가 없다는 이유로 방향과 속도를 무시하고 엉뚱한 곳으로 나를 데려가곤 했다// */ 결국 지상으로 돌아온 나는 生의 半을 외곽도로 공사현장에서 보냈는데 날마다 삽을 쥐고 그 적자뿐인 손익 계산서를 쓸 때 가끔 시커멓게 몰려가는 먹구름 사이 손바닥만하게 열린 하늘 안쪽에서 누군가 벌겋게 달궈진 부젖거락을 휘두르며 큰 소리로 심하게 다투는 소리를 들었다// */ 그때 지상에서도 구름을 사칭한 대머리독수리가 갑자기 기수를 돌려 그 거대한 자본의 심장을 뚫고 들어간 이후, 현대의 神은 토마호크미사일처럼 저돌적으로 날아오는 생체의 제물을 줄겨먹는 다는 것을 알았다// */ 그러니까 한 세계에서 한 세계로 마음만 이사하 가기 위해 제공된 천민자본의 출처는 역사기록 어디에도 없다. 다만 하늘 한켠으로 연막처럼 소곤소곤 피어오르던 뭉칫돈들이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고 감쪽같이 증발될 뿐// */ 천국이 가까워질수록 악취가 난다// */ 먹구름이 몰려오고 갑자기 내리는 소낙비가 수상하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비자금을 추적하지 말라. 돈을 세탁하는 것은 좀더 성스러운 곳에 쓰기 위해서이다// */ 그리하여 하늘은 언제쯤 전면 개방할 것인가, 밤마다 아득한 벼랑 끝에 서서 총총 언 손을 비비며 꺼질 듯 온 힘을 다해 어둠에 종사하는 저 하늘의 어린 천사들//

구름궁전의 뜨락을 산책하는 김씨 / 이덕규
허공에 발판을 놓고 길을 내는 그는/ 비계공이었다 고층으로 올라갈수록/ 거대한 자본의 산맥을 넘어오는 높새바람 속에서/ 중심을 잡기 위해 지상과 연결된 안전고리를/ 수시로 확인해야만 하는// 지상에선 날마다 더 높은 곳을 주문했다/ 현장사무실 앞 풍향계는/ 늘 한 곳으로 고정된 채 첨단의 극점을 가리키고 있었고/ 촉박한 예정공정의 천후표에는/ 기후와 상관없이 늘 해가 떴다/ 이윽고 그는 지상의 통제권이/ 도달할 수 없는 높이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안전수칙을 무시하고/ 아슬한 난간 위에 서서 아주 잠깐/ 고개 들어 훔쳐본,/ ……/ 아, 현기증이란/ 구름궁전의 뜨락을 거닐 듯/ 얼마나 황홀한 산책인가// 마침내 그곳에서/ 중심을 잡기 위해서는 지상과 연결된 모든 안전고리를/ 남김없이 풀어버려야 한다는 걸/ 깨닫는 순간/ 오랫동안 지상에 묶여 있던 부표 하나가/ 둥싯 떠올라.// 뇌 단층촬영실/ 모니터 화면에 번져가는 구름 한 점//

밥그릇 경전 / 이덕규
어쩌면 이렇게도/ 불경스런 생각들을 싹싹 핥아서/ 깨끗이 비워놨을까요/ 볕 좋은 절집 뜨락에/ 가부좌 튼 개밥그릇 하나/ 고요히 반짝입니다// 단단하게 박힌/ 금강(金剛) 말뚝에 묶여 무심히/ 먼 산을 바라보다가 어슬렁 일어나/ 앞발로 굴리고 밟고/ 으르렁 그르렁 물어 뜯다가/ 끌어안고 뒹굴다 찌그러진,// 어느 경지에 이르면/ 저렇게 제 밥그릇을 마음대로/ 가지고 놀 수 있을까요// 테두리에/ 잘근잘근 씹어 외운/ 이빨 경전이 시리게 촘촘히/ 박혀있는, 그 경전/ 꼼곰히 읽어내려 가다보면/ 어느 대목에선가/ 할 일 없으면/ 가서 <밥 그릇이나 씻어라>* 그러는//
* 조주선사와 어느 학인과의 선문답

우족탕 한 그릇 / 이덕규
우족탕 진국 위에/ 별보다 많은 발자국이 둥둥 떠 있네/ 빈 수레를 끌고/ 진흙 같은 밤하늘을 떠도는/ 발자국들/ 어디쯤 갔나/ 파장 무렵/ 황소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어스러기 수소 한 마리/ 깡마른 뒷발목이/ 꿈결인 듯/ 자꾸 헛발질을 해대네/ 그 먼길 한 그릇/ 단숨에 후루룩 떠먹으니/ 뜨거운 목젖 아래/ 함부로 밟힌 들꽃 향기 진동하네//

단검처럼 스며드는 저녁 햇살 / 이덕규
뒷골목 아무렇게나 버려진 빈깡통과 소주병들이 가끔 누군가의 발길에 한 번 더 찌그러지거나/ 좀더 투명한 제 속살을 보여주기 위해 산산조각이 나는 연습을 했다 어른들은/ 한 여름에도 허기진 호주머니 속에 손을 넣고 다녔고/ 담벼락엔 철 지난 흑백 포스터들이 반쯤 찢어져 무슨 쇠락한 이념처럼 펄럭였다 우리들은/ 그 뜻을 알려하지 않은 채 자본의 전부인 구멍가게에서의 불문의 서열을 세웠고 한낮/ 골방에 누워 속옷처럼 축축하게 말라가는 여자들에게서 언제든지 모든 것을 허락할 수 있는 사랑을 배웠다 그리고 조금씩/ 더 멀리 불야성의 거센 바다로 나아가 빛나는 야광채의 살찐 고기들을 향해 그물을 던졌다/ 그러나 그 불빛들은 좀체 걸려들지 않았고 좀더 세밀한 그물을 깁기 위해/ 늘 막배를 타고 멀미하듯 돌아왔다 더러는/ 너무 멀리 나아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어느 날 쫓기듯 돌아와/ 좁은 골목 출구 없는 미로 속으로 숨어들었다/ 흑백 포스터 위로 총천연색 구인광고물들이 수없이 덧붙여졌으나 여전히 그 뜻을 알지 못했고/ 어느새 빈 호주머니 속 익명의 슬픔에게 상처투성이인 손들이 습관처럼 불려 들어갔다 그리고/ 누군가 내다버린 아직 식지 않은 연탄재 위로 뛰어 내린 눈송이들이 거친 숨을 몰아쉬는 그 어디쯤,/ 막다른 골목 쪽창 안으로 단검처럼 스며드는 저녁 햇살이 언제든지 모든 것을/ 철거당할 수 있는 희망처럼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낙과(落果) / 이덕규
설익은 푸른 토마토를 주워다가/ 책상 끝에 올려놓았는데/ 며칠 사이에/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몇 번의/ 눈길을 준 것 뿐인데/ 아직 익지 않은 풋것의/ 시고 아린 맛에 대해/ 생각했을 뿐인데// 더군다나 풋내기인 그에게/ 깊고 은밀한 인생이나/ 연애에 대해 말한 적은/ 더더욱 없는데// 그는 언제 온몸의/ 핏줄에 비상등을 켜고 뒤늦게/ 그 푸르른 들판을 달려/ 저 붉디붉은/ 심경의 벼랑 끝에 섰을까// 더 이상/ 도달할 색깔이 없는 여기서// 한발만 내딛으면 사랑은 완성된다//

한판 밥을 놀다 / 이덕규
상갓집 마당 끝 절구통 위에 올려놓은 사잣밥을/ 순식간에 배 속에 털어 넣은 상거지가 오랜만에 뜨듯해진 밥통을 흔들며/ 눈 덮인 논둑길로 엎어지고 자빠지며 달아나다가/ 한순간 휙, 돌아서서 이쪽에 대고 커다란 주먹 감자를 날렸다네// 그때, 킬킬대던 어른들 사이/ 창검 비껴 차고 팔뚝 같은 쇠사슬을 어깨에 둘러멘 저승 식객 하나가/ 그 꼴을 망연히 바라보다 돌아서서/ 이제 막 밥숟가락 내려놓은 사람 앞세우고/ 시장타, 서둘러 떠나며 중얼거렸다네// 오죽하면 사잣밥을 목에 매달고 다니면서 밥 버는 사람들이 있겠느냐/ 저승법보다 무서운 밥!//

나는 뻥튀기 장수올시다 / 이덕규
내가 그를 뜨거운 세상 속으로 밀어 넣기 전에는 그는 다만 작은 한 알의 씨알에/ 불과 했다// 내가 그를 그 뜨거운 세상 속에서 큰소리로 불러냈을 때 그는 한순간 내게로 와서/ 뻥튀기가 되었다// 내가 화탕지옥 속에 있는 그의 이름을/ 뻥이요, 큰 소리로 불러준 것처럼/ 누가, 보잘 것 없는 내 이름을 크게 한번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뻥튀기가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별것도 없는 속을 뒤집어 부풀려 구수하게 뻥을 치는/ 먹어도 먹어도 자꾸만 손이 가는 심심풀이 뻥튀기가 되고 싶다//
* 김춘수의 <꽃>을 패러디 함

호박 / 이덕규
높은 담장에 안간힘으로 매달려 언제쯤 손을 놓을까 망설이는 사이/ 쥔 손이 먼저 슬그머니 놓아버린// 벼랑의 딸,// 밑도 끝도 없이/ 막막한 허공에서 쿵, 떨어졌달 수밖에 없는 당신// 여전히 애 낳는 얼굴로 힘준 채 썩어간다/ 시커먼 검버섯을 찌르면 손가락이 굳은 표정 속으로 푹푹 들어간다/ 자리를 뜨자 그동안 꿍쳐놓은 십 원짜리 동전이 좌르르 쏟아진다// 두엄 더미에 내다버린 엄마,/ 들어낸 자궁 속에서 꼬물꼬물 대가족이 기어나온다//

곰으로 돌아가는 사람 / 이덕규
서울 한복판 마로니에 공원에 곰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고 있다/ 그 옛날 곰에서 사람으로 슬쩍 자리 바꿔 앉은 죄/ 곰에게도 절반의 책임이 있을 터/ 필시 저 곰 속에 후회막급인 사람이 한 마리 숨어있을 것이다// 사는 일에 쫓겨/ 얼떨결에 곰 속으로 들어간 사람/ 사람이 되기 위해 마늘과 쑥을 먹고/ 백일을 참았다는 곰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초여름 땀을 뻘뻘 흘리며/ 다시 곰으로 돌아간 사람/ 육중한 몸을 이끌고 어슬렁/ 사람 동네 깊숙이 숨겨놓은 달콤한 꿀을 찾아 절벽을 타고 아슬하게/ 썩은 고목을 오르는 사람// 오늘 중으로 상가분양 전단지를 다 돌리면/ 한밤중 다시 곰을 벗고 사람의 형식으로 돌아가야 하는 사람/ 곰 일당으로 간신히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 어제는 도심의 넘치는 음식물 쓰레기통을 기웃거리다 끝내 처참하게 사살된/ 멧돼지 일가족 장례식에서/ 곰의 탈을 쓰고 유일하게 인간의 눈물을 흘린 사람// 이제 사람으로 돌아와도 할 줄 아는 게 없어 한 계절 쪽방에서 잠만 자는 사람/ 조금씩 사람 이전의 곰으로 다시 돌아가고 있는 사람//

우는 인형을 찾습니다 / 이덕규
행사 끝난 저녁 공원 입구에서/ 아이 하나가 인형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한쪽 손엔 인형의 손을 잡고 있었고/ 한쪽 손엔 솜사탕을 들고 있었다고 한다/ 누가 먼저 손을 놓았는지/ 생각나지 않는다고 한다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의자 밑을 살피고/ 화장실을 기웃거리던 아이가/ 자꾸 제 품속을 들여다보며 울었다고 한다/ 몸속에 눈물이 그득해서 가슴을 누르면 눈물이 주르르 쏟아지는 인형이었다고 한다/ 언제나 울고 싶을 때 우는/ 인형의 눈물 따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늦은 밤까지 솜사탕은/ 우는 아이 손에서 서럽게 다 녹아내렸고/ 고개 숙인 가로등이 제 발등을 내려다보며 숨죽여 울었다고 한다/ 어둔 하늘을 향해 찌를 듯 뻗어간 나뭇가지에서/ 마른 열매들이 목을 매단 채 밤새 흔들리는 가을밤이었다고 한다/ 새벽녘 울다 잠든 아이의 한쪽 손에는/ 아직 인형의 체온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눈물이 다 빠져나가서 몸이 헝겊뭉치처럼 가벼운 아이였다고 한다//

독(毒) / 이덕규
오랫동안 독을 삼켜왔다/ 조금씩 조금씩 먹어온 독에 의해/ 나는 길들여졌다 이제 치사량의/ 독성이 나를 살게 한다/ 아니 그 독성을 치유키 위해/ 날마다 더 깨끗하게 정제된 독이/ 필요하다 이제 내 몸 속엔/ 독 이외의 다른 성분은 없다// 나는 독이다./ 밤새도록 허공에 떠돌던/ 절망의 투명한 미세 입자들이 모이고 모여/ 더 이상 그 무게를 견딜 수 없을 때/ 비로소 기척 없는/ 이른 새벽이 되어 지상에 내려앉는 독// 그러나 쉽게 스며들지 못하는 독/ 무허가 판자촌 같은/ 누군가의 눈동자 속에 세 들어/ 잔뜩 웅크리고 앉아/ 가끔 맥없이 덜컹거리는 눈꺼풀 사이로/ 망연히 밖을 내다보는 독 이내/ 그렁거리며 몸을 푸는 독 그러다가/ 한순간 건널 수 없는 슬픔의 강을/ 훌쩍 뛰어넘기도 하는// 나는/ 풀잎 끝에 맺힌/ 눈 흡, 뜨고 사라져가는 아침이슬이다//

그림자 / 이덕규
저녁 햇살이/ 음습한 지하실 환기창/ 틈새로 장검처럼 깊숙이/ 스며들듯, 방금/ 그 긴 칼을 맞은/ 내 옆구리에서 콸콸/ 흘러나온 검붉은 그늘이/ 서러운 식민지처럼/ 어둑하게 번져가네//

풍향계 / 이덕규
꼬리지느러미가 푸르르 떨린다/ 그가 열심히 헤엄쳐가는 쪽으로 지상의 모든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그러나 그 꼬리 뒤로 빛의 속도보다 빠르게, 더 멀리 사라져 가는,/ 초고속 後爆風(후폭풍)의 뒤통수가 보인다/ 그 배후가 궁금하다//

칼 / 이덕규
그가 떠났다// 막다른 골목 끝에서/ 한순간 휙 돌아서/ 아주 잠깐/ 반짝였던 그 눈빛이/ 법률상/ 검증받지 못하는/ 사생아의 내력이었다는 걸/ 깨달은 후,/ 그의 행방이 묘연했다// 변화무쌍한/ 세월이 흐르고 있었다//

칼과 어머니 / 이덕규
어머니는 우리 집에서 칼을 제일 많이 쓰는 사람, 칼을 가장 능숙하게 잘 쓰는 사람, 자르고 썰고 족닥이고 생선대가리를 아무 생각없이 뎅겅뎅겅 날려 칼집을 내고 저녁상을 차리는 어머니// 한밤중에 물 먹으러 부엌에 나갔다가 움푹 파인 도마 위에 파랗게 실눈을 뜨고 누워 있는 식칼을 보고 들어와, 반월도半月刀처럼 웅크리고 칼잠 자는 어머니를 반듯하게 고쳐주면 날을 세우듯 다시 모로 눕는 어머니// 자는 척 늘 깨어 있는......, 이제는 당신 마음을 다스리던 인내忍耐의 사원 그 시퍼렇게 빛나는 천근 칼날 지붕아래에서도 평온한 어머니, 칼을 들었을 때 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 칼끝이 오직 자식을 향해 열려 있는// 도마 위의 그 날렵한 칼솜씨를 보면 무인가문의 후손이 확실한 어머니, 그러나 칼의 볼모로 잡힌 이래 집 밖으로 칼을 내돌리지 못하는 몰락한 칼잡이의 딸, 쓰ㅡ윽, 나도 모르게 감쪽같이 내 가슴을 가르고 들어온 날선 비수匕首 한 자루//

칼의 성혼 선언 / 이덕규
칼과 칼을 붙여놨더니/ 밤새 저희끼리 몸을 포갰다고 한다/ 떨어지지 않겠다고 한다 이제/ 외롭고 험한 칼의 길을 버리고/ 가정을 이루겠다고 한다/ 서로의 가슴에 꽃을 오려 붙이고/ 날마다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칼의 성혼시대를 열어가겠다고 한다/ 사랑의 꼭지쇠로 서로를 묶고/ 생활의 유연한 곡선을 따라/ 서로 눈길 스치며 지나가도 싹둑,/ 살뜰하게 화목과 단련을 재단하겠다고 한다//

고슴도치 ㅡ진화 예측론 / 이덕규
고슴도치를 보았습니다/ 숲 곳곳에 난무하던 칼들이/ 그의 등에 다 꽂혀 있었습니다/ 어디, 내게/ 더 꽂을 칼이 없냐는 듯/ 착한 눈을 꿈벅이고 있었습니다/ 몸 전체가 칼집이 되어/ 잔뜩 웅크린 채 풀벌레소리를 듣고 있었습니다// 어서어서/ 내가 죽어야 모두 편안들 하다고/ 간절히 눈빛으로 말하곤/ 어디론가 조용히 돌아서 가는/ 그의 뒷모습에 대고/ 나는 나직이 엄마, 라고 불러봅니다//

청정해역 / 이덕규
여자하고 남자하고/ 바닷가에 나란히 앉아 있다네/ 하루 종일 아무 짓도 안 하고/ 물미역 같은/ 서로의 마음 안쪽을/ 하염없이 쓰다듬고 있다네/ 너무 맑아서/ 바닷속 깊이를 모르는/ 이곳 연인들은 저렇게/ 가까이 있는 손을 잡는 데만/ 평생이 걸린다네/ 아니네, 함께 앉아/ 저렇게 수평선만 바라보아도/ 그 먼 바다에서는/ 멸치떼 같은 아이들이 태어나/ 떼지어 떼지어 몰려다닌다네//

어처구니 / 이덕규
이른 봄날이었습니다/ 마늘밭에 덮어놓았던 비닐을/ 겨울 속치마 벗기듯 확 걷어버렸는데요/ 거기, 아주 예민한/ 숫처녀 성감대 같은 노란 마늘 싹들이/ 이제 막 눈을 뜨기 시작했는데요/ 나도 모르게 그걸 살짝 건드려보고는/ 갑자기 손끝이 후끈거려서/ 그 옆, 어떤 싹눈에 오롯이 맺혀 있는/ 물방울을 두근두근 만져보려는데요/ 세상에나! 맑고 깨끗해서/ 속이 환히 다 비치는 그 물방울이요/ 아 글쎄 탱탱한 알몸의 그 잡년이요/ 내 손가락 끝이 닿기도 전에 그냥 와락,/ 단번에 앵겨붙는 거였습니다// 어쩝니까 벌건 대낮에/ 한바탕 잘 젖었다 싶었는데요/ 근데요, 이를 또 어쩌지요/ 손가락이, 손가락이 굽어지질 않습니다요//

숙박계 / 이덕규
늦은 밤 후미진 골목 여인숙 숙박계 막장에 나를 또박또박 적어넣어 본 적이 있으신가?// 밤새 오갈 데 없는 어린 눈송이들이 낮은 처마 끝을 맴돌다 뿌우연 창문에 달라붙어 가뭇가뭇 자지러지는// 그 어느 외진 구석방에서 캐시밀론 이불을 덮어쓰고 또박또박 유서 쓰듯 일기를 써본 적이 있으신가?// 이른 아침 조으는 주인 몰래 숙박계 비고란을 찾아 '참 따뜻했네' 또박또박 적어넣고// 덜컹, 문을 열고 나서면 밤새도록 떠돌던 본적지 없는 눈송이 들을 막다른 골목 끝으로 몰아가는 쇠바람 속// 그 쓸리는 숫눈 위에 가볍게 목숨을 내려놓듯, 첫 발자국을 또박또박 찍으며 걸어가본 적이// 있으신가? 언젠가는 흔적도 없이 지워질 그 가뭇없는 기록들을...... 당신은 또박또박//

사소한 균열의 끝 / 이덕규
얼음이 녹기 시작한/ 저수지 위를 걷는다 쩌렁 ㅡ 쩡/ 금이 간다, 이건/ 늘 있는 사소한 균열이다// 초경량급/ 슬픔조차 견디지 못한/ 실금 몇 가닥이/ 네 가슴/ 한복판에 먼저 가 닿는다// 그 긴 울음소리 끝난/ 네 마음 가장 깊은 근처까지/ 나도 따라 걸어들어간다/ 그리고 거기 아주 큰 슬픔의/ 경계가 녹고 있는// 갈수록 넓어지는/ 너의 싯푸른 중심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 문득, 내가 딛고선/ 발 밑이 맑고 투명해진다/ 여기쯤이다 .....꺼져라, 슬픔!//

믿었던 사람 / 이덕규
믿었던 사람 속에서 갑자기 사나운 개 한 마리가 튀어나와 나에게 달려들었다// 개는 쓰러진 나를 향해 한참을 으르렁거리다가 어두운 골목 안쪽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믿었던 사람이 달려와/ 나를 일으켜 세우며 괜찮으냐고 물었다// 조금 전 당신 속에서 뛰쳐나왔던 그 개는 어디로 갔느냐고 되묻자/ 믿었던 사람은/ 가슴을 열고 더 무서운 개 한 마리를 보여주며 말했다// 이 개 말이오?// 나는 결국 사람에게 지는 사람이다 나는 늘/ 사람에게 지면서도 그 흔한 위로의 반려견 한 마리 키우지 못하는 것은/ 오래전 내 안에 키우던 자성의/ 개 비린내 나는 송곳니에게 호되게 물렸기 때문이다// 견성한 개는 주인을 물어 죽이기도 한다// 내가 키웠던 개들은 매번/ 주인을 물어뜯는 개로 자라서 나는 나에게도 지는 그런 슬픈 사람이다//

여름 / 이덕규
무성한 풀을 베었다/ 푸른 깃발을 들고 인해 전술처럼 밀려오는 녹색당 젊은 기수들을 무참히 제거했다/ 초록 피비린내가 낭자했으나,/ 초록은 끝내 초록의 배후를 발설하지 않았다/ 온종일 초록을 헤쳐 베어도 속속들이 초록 일색일 뿐,/ 그 어디에도 초록을 틈타 초록을 건너려는 초록의 수뇌부는 보이지 않는다/ 누굴까,/ 이 염천 땡볕 속 캄캄한 밀실에 숨어 이토록 완벽하게 초록 혁명을 완수하는 자!//

물 위의 독서 / 이덕규
나무들은 해질녘 저수지가에 일렬로 서 있었다/ 그 가운데 유난히 물가 쪽으로 기울어 위태로워 보이는 나무 앞에서 나는 걸음을 멈추고/ 깊을 대로 깊어진 늦가을의 위중한 환우에 대해 물었다/ 그는 갈바람 잔물결 위로 근시의 눈을 가늘게 뜨고/ 어두워지는 물빛을 읽으려 한층 더 몸을 기울였다/ 그 바람에 맑은 물의 서늘한 목덜미를 스친 나뭇가지 끝에서/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오래된 문장이 생각난 듯 방울방울 떨어졌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전등도 켜지 않은 채/ 어둠 속에서 그 다음 문장을 짓다가 그대로 잠이 들었다/ 내가 미처 읽지 못한 수많은 나뭇잎들이/ 내 투명한 잠의 잔잔한 수면 위로 밤새 떨어져 내렸다//

꽃 꿈 / 이덕규
꿈속에서 활짝 핀 꽃을 보면/ 다음날 몸에 상처 입었네/ 사는 게 사나워질수록 꿈에/ 만개한 꽃밭 자주 보였는데// 몸 곳곳에 핀,그/ 크고 작은 선홍빛 꽃잎들/ 꿈땜처럼 마를 때,나는 정말/ 자주 자주 들판으로/ 이름 모를 들꽃들 보러 나갔네// 오,누가 어디 먼데서/ 쓰라린 마음의 찰과상을 입고/ 헤매이다 지쳐 쓰러진/ 험한 꿈이/ 여기 이렇게 문득/ 생시로 피어났을까/ 어느 메마른 이가 이토록/ 향기로운 꽃꿈을 선뜻 척박한/ 내 몸에 대고 꿔 주었을까// 지난밤 꽃피던 통증이/ 그저 봄바람처럼 맑아져서/ 들판에 앉아 하염없이/ 흰 붕대를 풀어내는,나는/ 지금껏 누굴 위해/ 좋은 꿈 한번 꿔 주지 못하고/ 어디 먼데/ 꿈속의 꽃밭이나/ 사납게 찾아 헤매는 사람//

오래된 열쇠 / 이덕규
어딘가에 달콤한 그 무엇을/ 깊숙히 숨겨놓은 채/ 잠궈버리고 기억상실증에 걸린 자,/ 일벌 한 마리가 분주히/ 이꽃 저꽃, 봉오리 속을 들락거린다// 그러나, 꽃은 단 한 번도/ 마음의 곳간/ 활짝 열어주지 않고/ 너무 쉽게 녹슬어 떨어진다/ 다시는 잊지 않으리,// 온몸에 붉은 쇳가루를 뒤집어쓴 그가/ 날아왔던 허공길을/ 다시 훤하게 읽으며 돌아간다// 아무것도 잠그지 않은 채/ 잠겨 있는, 처마 끝에 매달린/ 저 수많은 벌집 구멍들, 활짝 피었다//

오래된 질문 / 이덕규
땅 파고 씨앗 심는 일이 흙에게/ 던지는 질문이라면 그 질문 곱씹어 뱉어/ 제 새끼 입에 넣어주듯/ 푸릇푸릇 올라오는 싹은 답이다// 전혀 딴소리를 하는 것인지/ 질문과 답이 딱딱 맞아떨어지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그저 모른 척하지 않고/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일이 농사라면// 평생 똑같은 질문 던지고/ 똑같은 답안지 받아들었던/ 씨알 좋은 농부를 누대에 걸쳐 파종하듯/ 수없이 흙 속에 묻었지만,/ 지금껏 싹 틔우고 주렁주렁/ 신품종 햇곡 같은 사람 맺어본 적 없으니/ 사람은 아직 답이 없다// 다만, 늘 질문만 던지던 농부가/ 흙 속에 묻혀 온몸으로/ 풀리지 않는 그 고등수학 같은 씨앗의/ 발아 함수를 풀다가, 풀다가/ 결국 몸 풀어 그 단순한 흙의 품속으로/ 스며들 뿐이니, 콩 심은 데 콩 주고/ 팥 심은 데 팥 주는데// 사람 심은 자리에/ 사람주지 않는 것은, 농부의 마음이다/ 흙의 넓은 가슴에 얼룩진 사람 그늘이다/ 끝내, 흙의 깊은 멍 자국이다//

걸음마 걸음마 / 이덕규
이른 봄 과수원에/ 거름냄새가 진동하고 있다/ 버려진 사과 알들도 속속들이/ 머금었던 단물을/ 주르르 내뱉으며 썩고 있다// 악취를 풍기며/ 한뼘 한치 흙 속으로 스며들어가/ 이제 먼 길 떠나는/ 섬약한 사과나무의/ 마른 발등을 적셔주고 있다// 지금 저 나무들은/ 썩고 썩은 세상의 구린 뒷맛을/ 온몸으로 짚고 일어서는 중이다// 봄바람에 지물거리는 눈을/ 반짝뜨고/ 허공을 저으며 조심조심 맨발을 떼는/ 잔가지 연둣빛 어린싹들의/ 흔들림 앞에// 닿을 듯 닿을 듯 뒷걸음질로/ 거름을 내며 멀어져가는 한 사내의/ 거칠고 투박한 손을 따라/ 아장아장 사과나무들이 걸어간다//

막차 / 이덕규
이쯤에서 남은 것이 없으면/ 반쯤은 성공한 거다/ 밤을 새워 어둠 속을 달려온 열차가/ 막다른 벼랑 끝에 내몰린 짐승처럼/ 길게 한 번 울부짖고/ 더운 숨을 몰아쉬는 종착역// 긴 나무의자에 몸을 깊숙이 구겨넣고/ 시린 가슴팍에/ 잔숨결이나 불어넣고 있는/ 한 사내의 나머지 실패한 쪽으로/ 등 돌려 누운 선잠 속에서/ 꼬깃꼬깃 접은 지폐 한 장 툭 떨어지고/ 그 위로 오늘 날짜/ 별 내용 없는 조간신문이/ 조용히 덮이는// 다음 역을 묻지 않는/ 여기서는 그걸 첫차라 부른다//

마침표를 뽑다 / 이덕규
살아 있는 문장 끝에 박힌 마침표처럼/ 흔들거리는 개말뚝을 다시 고쳐 박자고 무심코 쑥 뽑았는데, 아뿔사/ 잡을 새도 없이/ 어떤 넘치는 힘이 무거운 쇠사슬을 끌며/ 멀리 동구 밖으로 뛰쳐나가는 경쾌한 소리를 듣는다// 일생을 한 줄로 요약한 단문 끝에 말뚝처럼 박힌 뒷산 무덤가 비석들/ 모조리 뽑아주면/ 죽음 너머 밝은 귀 서넛쯤 하던 일 멈추고 솔깃하겠다// 저 소리, 돌아오지 않는 단순한 문장의 길고 먼 여운//

복상사(腹上死) / 이덕규
쟁기질 하던 낡은 경운기 한 대가 보습을 흙 속에 박은 채, 밭 가운데 그대로 멈춰서 있다/ 평생 흙 위에서 헐떡거리다가/ 한순간 숨이 멈춰버린 늙은 오입꾼처럼// 평소 그에게 시달렸던 잡초들 우북이 달라붙어 그를 헐뜯는 동안/ 마지막 남은 양기를 한 끝에 모아/ 땅 속 깊숙이 쥐어 짜 넣듯 일의 뒤를 즐기고 있다// 어디든 오래 묵어 자빠진 비알 밭의 속살에 탱탱하게 선 날을 밀어 넣으면/ 고압 전류에 감전된 짐승처럼 심장이 터져라 부르르 떨며 달려가던,/ 그가 지나온 이랑마다 푸른 정전기 일 듯/ 새싹이 돋아나고 꽃이 피고 얼마나 많은 열매를 맺었던가,// 어느 집도의가 급하게 열었다 대충 봉합해버린 가슴 언저리 볼트 몇 개가 느슨하게 풀려서/ 무시로 드나드는 바람을 따라 그의 몽롱한 의식 속으로 들어서면/ 조용하다, 먼지 한 톨 없는 엔진실/ 이모노합금 바닥에 아직 남아 굳어가는 검은 기름의 침묵이/ 꺼진 흑백 화면 유리알처럼 반짝인다// 거기, 한 사내가 이제 막 일을 마친 듯 거친 수염을 쓰다듬으며 우묵한 눈망울을 굴리다 간다//

뚝딱, 한 그릇의 밥을 죽이다 / 이덕규
먼 들판에서 일에 몰두하다 보면 문득 허기가 밀려와 팔 다리를 마구 흔들어댈 때가 있다 사람을/ 삼시세끼 밥상 앞에 무릎 꿇려야 직성이 풀리는 밥의 오래된 폭력이다/ 때를 거르면 나를 잡아먹겠다는 듯이/ 사지를 흔들어대는 허기진 밥의 주식(主食)은 그러니까 오래 전부터 사람이다/ 결국 사람은 모두 밥에게 먹힌다/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빈 밥통의 떨림// 그러나, 우물처럼 깊고 어두운 밥통의 고요한 중심에 내려가 맑은 공명을 즐기듯/ 먹먹하게 담배를 피워 물고 논두렁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어느 순간/ 감쪽같이 배고픔이 사라지고 어떤 기운이 나를 다시 천천히 일으켜 세우는 것인데, 그 힘은/ 내 마음 어딘가에 마지막으로 밥을 제압하기 위해 비축해둔 또 다른 밥의 농밀한 엑기스인 치사량의 독과 같은 것이다// 그 옛날 사나흘 굶고도 그 알 수 없는 기운으로 벌떡 일어나 품을 팔았던 어머니들처럼/ 수시로 닥치는 밥의 위기 때마다 마지막인 듯 두 눈 부릅뜬 채 막다른 곳으로 밥을 밀어붙이면 비로소/ 밥은 모락모락 두 손 들고 밥상 위로 올라온다/ 그래 먼 들판에서 하던 일마저 끝내고/ 허적허적 돌아와 그 원수 같은 한 그릇의 밥을 죽이듯 뚝딱, 해치우고 나면/ 내 마음의 근골 깊은 절미항아리 속으로/ 낮에 축낸 한 숟가락의 독이 다시 꼬르륵, 들어차는 소리 듣는 것이다//

객지밥 / 이덕규
빈 그릇에 소복이 고봉으로 담아놓으니/ 꼭 무슨 등불 같네// 한밤을 건너기 위해/ 혼자서 그 흰 별무리들을/ 어두운 몸 속으로 꾸역꾸역 밀어넣는 밤,// 누가 또 엎어버렸나// 흰 쌀밥의 그늘에 가려 무엇 하나 밝혀내지 못한/ 억울한 시간의 밥상 같은/ 창밖, 저 깜깜하게 흉년든 하늘/ 개다리소반 위에// 듬성듬성 흩어져 반짝이는 밥풀들을/ 허기진 눈빛으로 정신없이 주워 먹다/ 목 메이는 어둠 속// 덩그러니, 불 꺼진 밥그릇 하나//

한밤을 건너가는 밥 / 이덕규
빈 그릇에 소복이 고봉으로 담아놓으니/ 꼭 무슨 등불 같네/ 한밤를 건너기 위해/ 혼자서 그 흰 별무리들을/ 어두운 몸 속으로 꾸역꾸역/ 밀어넣는 밤/ 누가 또 엎어버렸나/ 흰 쌀밥의 그늘에 가려 무엇 하나/ 밝혀내지 못한/ 억울한 시간의 밥상 같은/ 창 밖, 저 깜깜하게 흉년 든 하늘/ 개다리소반 위에/ 듬성듬성/ 흩어져 반짝이는 밥풀들을/ 허기진 눈빛으로 정신없이 주워먹다/ 목메는 어둠 속/ 덩그러니 불 꺼진 밥그릇 하나//

장아찌 / 이덕규
입속이 궁금해지면/ 고추장 항아리 속에 묻어 두었던/ 어머니 팔뚝을 꺼내 먹습니다/ 종아리를 꺼내 먹습니다// 어느 소슬한 가을 저녁의/ 살 오른 근심을 말갛게 닦아/ 통 채 절여두었던 당신// 찬물에 밥 말아/ 미라처럼 쪼글쪼글해진 당신의/ 그 짜디 짠 생살을 씹어 먹으니/ 오, 면면히 유구하겠습니다//

자결(自決) / 이덕규
이른 아침이었습니다/ 뒷산을 오르다가/ 밤새 가만히 서 있었을/ 가시나무 가시에/ 이슬 한 방울이/ 맺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밤새/ 아무 생각 없이 잠만 쿨쿨 잤을,/ 아직도 잠이 덜 깬/ 그 가시나무 가시에/ 맑고 투명한/ 이슬 한 방울이 매달린 채/ 바르르 떨고 있었습니다//

끙게질 / 이덕규
큰 황소가 한겨울 먹고 놀면/ 사람이 생쥐만하게 보인다는데요// 무엇이든 그냥 닥치는 대로/ 꾹, 밟고 싶어진다는데요// 아흐, 몸이 근지러워/ 말뚝에 치대고 들이받고 비비는 놈을/ 바로 논밭으로 밀어 넣으면/ 씨근덕 불끈덕 삐뚤빼뚤/ 갈지자로 갈아대기 일쑤인데요// 이른봄 아버지는 통나무 썰매 위에/ 일 마력짜리 발동기만한 돌멩이를 올리고/ 먼지 뽀얗게 날리며 들판 몇 바퀴 뺑뺑이를 돌리는데요/ 이른바 끙게질이라고 하는데요// 맷돌 같은 어금니를 뿌드득 뿌득 갈아대며/ 메기수염 같은 끈끈한 침을 흘리며/ 등짝에 시루떡을 쪄 얹은 듯 김이 무럭무럭 피어오르는데요// 반나절쯤 돌리고 마당에 들어서면/ 어라, 발굽 아래 설설 기던 사람들이/ 저보다 더 크게 보여서/ 눈망울이 화등잔만해진다는데요// 거짓말처럼 유순해져서/ 휘어진 논은 휘어지게/ 곧은 논은 곧게 다그치지 않아도/ 제가 알아서 가고 서고 하는데요// 쟁기질 써레질로 몸이 천근만근이 되어/ 머리를 땅에 끌고 돌아오는 날이면/ 또 캄캄해져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데요// 서리태 듬뿍 넣은// 여물 한 구유 정신없이 먹고 고개를 들면/ 그 크다란 눈동자 속에 모종하고 비 맞은 수숫대처럼/ 웃자란 어린 주인이 우뚝 서 있었는데요// 머지않아 세상 갈지자로 마구 갈아엎고 다닐/ 그 껑충한 황송아지 이마에도 검지만한 뿔이 돋느라고/ 개굴개굴 되게 가려운 저녁이었는데요//

낫께서 나를 사랑하사 / 이덕규
풀을 베다가 낫 끝에 손 등을 찍혔다/ 순간, 허옇게 눈뜨는 상처를/ 와락 감싸 쥐고/ 팽개친 낫 앞에 두 무릎 꿇은 채/ 엎드려 여러 번 머리 조아렸다// 참으려 해도 손가락사이를 비집고/ 붉은 눈물이 흘러내린다// 상처가 아문다는 것은 실명(失明)이거나/ 곧 죽음이니, 맘 놓고 오래 울어라/ 눈 감을 때까지 아픈, 핏빛 풍경이여!//

수갑(手匣) / 이덕규
이곳 사람들은 손목에 채워진 그 작은 동그라미를 온몸으로 통과해야 하는 형벌을 받았다/ 그것은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 더러 손목을 철길 위에 올려 끊거나/ 엄지관절을 탈골시켜 빠져나오는 자들이 있지만/ 그들은 다시 더 작은 동그라미 안에 갇히고 만다// 결국 손을 빼내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몸 전체를 밀어 넣어 그 좁은 쇠고랑을 빠져나가야 하는데/ 이건 수수께끼나 넌센스가 아니다// 벌써 부자들은 그 헐렁한 은팔찌를 통과해 천국에 도착했고 지금 어디선가는/ 낙타의 머리와 앞발이 이제 막 바늘귀를 지나고 있다고 한다// 못 믿겠다면 지금 당신 손목을 보라/ 밥통에 머리를 처박았다가 빠지지 않아 좌충우돌하는 개처럼 이미/ 그 욕망의 캄캄한 구멍 속에 손을 넣은 채/ 빼도 박도 못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고 성급하게 그 차갑고 험악한 죄의 관문으로 몸을 억지로 들이밀지 말라, 그것은/ 몸부림칠수록 자꾸 옥죄어 오는 구조로 되어있다/ 천천히 조금씩 조금씩 몸을 밀고 가다보면 언젠가는// 달이 꽉 찬 태아가 좁은 자궁을 빠져나오듯/ 늙고 병든 몸이 그 작은 동그라미를 단번에 쑥 빠져나가는 만기 출소의 날이 온다//

어떤 후일담 / 이덕규
눈 올 때마다 마당 끝으로 밀어붙여 쌓아놓은/ 눈 더미, 한 겨울 지나 모두들 떠났는데 아직도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신음하는/ 눈 더미, 잘못 든 길 끝에서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쓰고 죽어가는 떠돌이 여행자의 몽롱한 중얼거림 같은/ 눈 더미, 무심코 걷어찬 발길질에 지상에 내려와 가장 오래 머문 흰빛이 옆구리에서 환하게 뿜어져 나오는/ 눈 더미, 혼절했던 어둔 짐승이 문득 깨어나 제 상처를 들여다보며 지르는 외마디 비명 같은/ 눈 더미, 깊은 어둠속에 숨어 금서에 발라먹던 형설(螢雪)! 그 담백한 이념의 뭉게구름소스 같은/ 눈 더미, 한때 공중에 세웠다가 무너져 내린 망명정부 기밀문서 같은/ 눈 더미, 명명백백한 세계의 밑그림을 그리다가 감쪽같이 증발한 어느 혁명가의 구겨버린 비밀수첩 같은/ 눈 더미, 시뻘건 담배꽁초를 눈에 틀어박자 그 멀고 먼 설국의 비밀을 고통스럽게 발설하는/ 눈 더미, 허공에 빛나는 그 만년제국의 내력을 읽어내려는 순간 백지의 반란 같은 눈사태가 내 머릿속을 덮쳐 온통 캄캄해지는/ 눈 더미, 누구나 한번쯤 읽었지만 지금껏 단 한 사람도 읽어내지 못한 불후의 베스트셀러 같은/ 눈 더미, 먼 길을 돌아 나온 늙은 자작나무 토막처럼 모락모락 옛이야기를 피워 올리며/ 서서히 타들어가는 유언장 같은 이, 눈 더미//

강 건너 불빛 / 이덕규
가까스로 도망쳐 온 듯하다/ 쫓기고 쫓기다 간신히 강을 건너/ 주저앉은 짐승처럼 잔뜩 웅크려 엎드린/ 앞 산, 중턱 옆구리께/ 외딴 불빛 새어 나온다/ 사납게 물어뜯긴 자리,/ 벌겋게 농익어 번져가는 신열처럼/ 욱신거린다 저 덧난 상처의/ 중심에 깊게 박힌 심, 넓게 짚어/ 꾹 짜 올리면 앞산이 움찔/ 강물이 잠깐 멈췄다가 출렁 흘러가고/ 뜨거운 백 촉짜리 알전구 같은/ 피고름 덩어리 하나 불쑥/ 솟아 올라올 것 같다 가끔/ 고개 돌려 화농처럼 희미하게/ 흘러내리는 불빛 핥을 것도 같은데/ 검은 산은 끝내 꼼짝하지 않는다/ 참 뻐근하게도 곪아서/ 씀먹 씀먹, 밤마다/ 잠 못 이루는 통증처럼 거기, 그가 산다//

말 못하는 짐승은 때리는 게 아니라고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 이덕규
사람의 새끼가 한두 번도 아니고 그만큼 말을 했으면 알아들어야 할 것 아니냐고/ 오래 전, 나는 아버지에게/ 말귀 못 알아듣는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고 얻어맞았다.// 사람들은 말의 반대쪽으로 돌아서는 개나 소의 앞을 가로막고 채찍을 휘둘렀다 맞으면서/ 도망가는 짐승들이 무서워하는 건/ 매질보다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의 말이었다// 사람 말을 알아듣지 못하면서 사람과 함께 사는 짐승들은 눈치껏 알아듣는 척했다/ 말의 냄새를 골똘히 살피고/ 주인 목소리의 진동과 파장을 읽으며/ 눈치껏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사람 말만 빼고 다 알아듣는 집짐승들은/ 사람 말의 난해하고 변화무쌍한 온갖 표정 속으로 일단 꼬리를 흔들며/ 파고들어가 다정하게 안긴다 사람인척,// 무표정하게 뉴스를 듣고 밥 때 맞춰 연신 시계를 올려다보며/ 학교 간 아이는 왜 안 올까, 현관문을 흘끔거리면서/ 최대한 사람 말에 가깝게 엄마 아빠를 다정하게 부르다가 가끔은/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사투리처럼 으르렁, 개의 공화국 언어로 사람에게 말대꾸도 하면서//

소낙비 안부 / 이덕규
전화를 걸어놓고 말이 없네/ 누구신가, 문득 어둑해지는 저쪽/ 눅눅하게 불어오는 옅은 숨소리 너머, 어디/ 외딴 산막 허물어져가는 흙벽에/ 후두둑, 듣는 빗방울 소리// 툇마루 끝에 나와 앉은/ 하얀 맨무릎이 소나기에 대책 없이 젖듯/ 누가 우네// 쨍쨍한 한낮/ 속수무책 귓속으로 들이치는 소낙비/ 소낙비, 뒤꼍에 널어놓고 깜박 잊어버린/ 고추멍석만 한 옛 기억이 젖는데// 나도 모르게 덜컥 들켜버린 죄만 같아서/ 누구냐고 묻다가/ 무슨 일이냐고 달래다가 끝내/ 누군지도 모르는 저쪽에 대고/ 미안하다, 말해버렸네// 누가 또 마음 단속을 잘못하였겠지// 말 못 할 그 무슨 설움 같은/ 먹장구름이 울컥,/ 흐린 마음을 빠져나와 실없이 안부나 묻자고/ 저기, 저렇게 들판 가득 자욱히 몰려오네//

천사의 가슴 / 이덕규
곱사등이 한 여자가/ 세찬 눈보라를 봉긋한 등으로 밀며/ 뒷걸음질로 걸어간다// 마치, 아이를 잃어/ 퉁퉁 불은 젖으로 칼바람에게/ 베어물리듯이// 자신의 손이 닿지 않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육체의 유일한 聖地,/ 인간의 등이/ 다름 아닌 천사의 가슴이었다고/ 따뜻한 젖이 돈다고// 길을 잃은/ 차디찬 조막손이 눈송이들이/ 그녀의 솟은 등섶을 파고든다//

머나먼 돌멩이 / 이덕규
흘러가는 뭉게구름이라도 한번 베어보겠다는 듯이 깎아지른 절벽 꼭대기에서/ 수수억 년 벼르고 벼르던 예각의/ 날 선 돌멩이 하나가 한순간, 새카만 계곡 아래 흐르는 물 속으로 투신하는 걸 보았네/ 여기서부터 다시 멀고 험하다네// 거센 물살에 떠밀려 치고 받히며 만신창이로 구르고 구르다가/ 읍내 개울 옆 순댓국밥집 마당에서/ 다리 부러진 평상 한 귀퉁이를 다소곳이 떠받들고 앉아 있는 닳고닳은 몽돌까지//

겨울강, 얼음 위에 돌멩이 돌멩이 / 이덕규
돌멩이 하나가/ 얼음을 녹이고 있다/ 뜨거운 입술로/ 혓바닥으로/ 벌거벗은 돌멩이/ 온 몸으로/ 너에게 푹 빠져/ 촉촉히 젖은 돌멩이/ 조금 드러난 등짝으로/ 지는 햇빛도 받아/ 숨도 안 쉬고/ 그 두꺼운/ 凍土의 처녀막을/ 맹렬히 뚫고 있다//

사소한 균열의 끝 / 이덕규
얼음이 녹기 시작한/ 저수지 위를 걷는다 쩌렁 ㅡ 쩡/ 금이 간다, 이건/ 늘 있는 사소한 균열이다// 초경량급/ 슬픔조차 견디지 못한/ 실금 몇 가닥이/ 네 가슴/ 한복판에 먼저 가 닿는다// 그 긴 울음소리 끝난/ 네 마음 가장 깊은 근처까지/ 나도 따라 걸어들어간다/ 그리고 거기 아주 큰 슬픔의/ 경계가 녹고 있는// 갈수록 넓어지는/ 너의 싯푸른 중심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 문득, 내가 딛고선/ 발 밑이 맑고 투명해진다/ 여기쯤이다 .....꺼져라, 슬픔!//

제목, 혹은 죄목도 모르고 / 이덕규
이른 가을날 늙은 느티나무 아래 앉아 오래 전에 겉표지가 떨어져나간 책을 읽네 어디선가 된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네 잠시 검문하듯 바람이 방심한 책장들을 단숨에 차르륵 읽고 가네 제목도 모르고 펄럭이던 나뭇잎들이 떨어지네 불온한 전단지처럼 덧없던 함성들이 날아가네// 아니네, 아니네 이건 아직 완성되지 않은 희극의 초고라는 그 차가운 계절성 순시관들에게 맞서 단호하게 부정하는 나뭇가지들, 그러나 손목에 수갑을 채우고 머리채를 단단하게 휘어잡은 바람은 이미 산등성이 넘어 새날 새 페이지를 열어 보이고 문득 책 속의 글자들이 우수수 쏟아지며 휩쓸려가네// 아직 불온함이 유효한 곳으로, 어두 컴컴한 권력의 지하실에서 재생된 빈 공책 한 권과 맞바꿔지기 위해, 또다시 그 누렇게 바랜 미래 어딘가에 송치되어 가출경위서와 반성문을 쓰기위해…… 죄목도 모르고//

자동히터 / 이덕규
모두들 너처럼 자동온도 조절장치를/ 몸 속 깊숙이 숨기고 살지/ 덥다 싶으면 떨어지고 추우면 붙었다 하는/ 알고 보면 꽤 냉철한.....,막무가내/ 끓어오르는 열병 한번 제대로/ 앓아보지도 못한 놈들이/ 도대체 누굴 녹여 주겠다고 거기/ 그렇게 뻔뻔하게 버티고 앉아 있는 것인지/ 너무 춥지 않니?/ 이제 그런 스위치 따위는/ 부숴버려야 해, 벌겋게 달아오르는 거야/ 저 냉혈한들이 네 몸에 손도 못 대고/ 어쩔 줄 몰라하면서 그 가식의 옷들을/ 훌훌 벗어버리고 치부가 흐물흐물/ 녹아내릴 때까지 말이야/ 그러고도 멈추면 안돼 지난날/ 그 무더운 창고 속에 처박혀 싸늘하게 지낸/ 세월을 한번 생각해봐/ 그냥 내친 김에 올라가는 거야 가는 데 까지/ 가보는 거지 그러다가/ 네 몸 깊숙이 내장된 그 자동온도 조절기가/ 철커덕 과부하로 눌어붙어/ 한 번도 올라보지 못한 고열의 절정에서/ 한순간 '쾅' 하고 폭발해버린 다면,//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어느 고물상 고철더미 위에/ 갈기갈기 찢긴 토막 변사체로 버려진다 해도/ 더이상 바랄게 없겠어 차라리/ 그게 자랑스럽겠어.........자동히터들아!//

경운기 속으로 들어간 아버지 / 이덕규
고집이 센 경운기를 샀다/ 입을 꽉 다물고 잔뜩 웅크린 채/ 꼼짝도 하지 않는/ 엉덩이를 걷어차고 코를 움켜쥐고/ 몇 날 며칠째 씨름을 하다가 드디어/ 경운기 속으로 들어간 아버지/ 나는 아버지를 민다/ 간다, 까만 연기를 퐁퐁 날리며/ 아버지가 달려간다/ 앞만 보고 달려간다/ 뒤뚱거리며 개골창을 건너/ 언덕을 뭉개듯 헛바퀴를 돌려/ 산비알을 오르고/ 동네를 돌아 들판을 향해/ 노을 속으로/ 어둠 속으로 달려가는 아버지/ 브레이크가 없는 아버지/ 달리면서 기름을 먹고/ 담배를 피우고 콧노래를 부르는/ 저기 아직도/ 흙탕물을 뒤집어 쓴 채/ 부르르 떨며 달려가는/ 오, 석유 냄새 나는 나의 아버지//

긴 水路의 끝, 늦가을물 한 자리 / 이덕규
남은 시간의 거스름돈을/ 앞다투어 챙기다가 떨어뜨린 동전이라도 줍는지/ 돌아보면 실성한 노인네 같은 마른 갈대들이 두리번거리며 온통 길을 메우고 서성이는// 이쯤에서 너무 맑으면 어떻게 되는지, 너 알지/ 너무 깨끗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송사리 몇 마리 저희끼리 우르르우르르 몰려다니다가 얼떨결에/ 반 평 남짓 네 품속에 갇혀 사는 죄/ 그것을 지켜주기 위해 더러는 마음을 울떡 뒤집어 험악해질 수밖에 없었던// 너 모르지, 이 지독한 가뭄의 마지막 풍경을/ 한 폭 수채화로 담고 가야 한다는 게 또 얼마나 큼 형벌인지 자세히 봐/ 누군가 때를 놓치지 않고 분탕질해간 네 얕은 가슴속 비루하게 남아 있는 것들의/ 쓸쓸한 자화상 같은 거, 가령// 허공을 향해 고단한 파라볼안테나를 세운 망초꽃 그늘이라든가, 혹은 그 그늘 속에서/ 온 힘을 다해 미동도 없이 정지해 있는 눈망울 큰 송사리 한 마리라든가, 마치/ 모든 걸 포기하고 지상을 뜨는 마지막 우주선 같기도 하고 이제 막/ 무성생식으로 갓 태어난 지상의 첫 생명 같기도 한,// 그러니 이 결론을 또 어떻게 읽어야 할까/ 좀처럼 바닥이 드러나지 않는 흐릿한 마음을 졸이며 서서히 야위어가는/ 네 얕은 토의 수면 위로 무슨 암호문 같은 활자를 연타로 찍으며 건너가는 저 물거미/ 여덟 발가락 흔적 없는 독백// 문제는 늘 뻔한 오독이야/ 저렇듯 가볍게 떠돌던 여행자들이/ 어쩌다 잘못 든 길 끝에서 중얼거리듯 쓴 기행문의 마지막 구절을 보면/ 언젠가 만수위로 넘쳐흐르던 저수지/ 그 벅찬 눈물의 말씀 첫 페이지를 읽는 것 같아/ 왜 너도 알지// 세상의 단면을 각각 한 줄씩 읽으며 흘러간 흰 구름들이 지금쯤/ 어디선가 슬픈 표정의 먹장구름으로 포개져/ 또 한 권의 두꺼운 경전을 묶고 있다는 거,/ -그리하여 네 끝은 미약하였으나 시각은 다시 창대하리라고//

빛의 원액, 그 치명적인 독(毒) / 이덕규
순천 교도소 쪽문이 열리고 그가 밝은 빛을 향해 걸어나왔을 때, 순간/ 완강한 햇살오라기들이 다시 그의 발목을 묶었다/ 한때 빛을 탕진해버린 희망의 범법자로서/ 굶주린 시궁쥐처럼 어슬렁거리다가 마지막으로 걸려든 것 또한 느닷없는 헤드라이트 불빛이었던가/ 얼떨결에 기어들어간 캄캄한 굴 속에서/ 그는 또 얼마나 많은 빛의 씨앗들을 까먹었는지 별조차 뜨지 않는 그 희망사육장에서/ 그새 이빨이 두 개나 빠져 있었다/ 비로소 딱닥한 모서리에 대한 유혹은 사라졌고 인내의 불렁한 식사는 훌륭하게 완성되었다/ 이제, 도저히 뚫을 수 없었던 저 견고한 담장의 미세한 균열 속에서 흘러나모는 빛의 원액이// 치명적인 독처럼 환하게 퍼져가는 한낮의 했살 속에서/ 미신처럼 말랑말랑한 두부를 먹으며 웃는 그에게/ 굳이 말하자면, 앞니 없이도 살 수는 있다는 것이다.//

장물(贓物) / 이덕규
한때 당신이 가장 애지중지하던 그것/ 어느 날 정체불명의 은밀한 손길에 의해 감쪽같이 빼돌려진 그것/ 그러고도 차마 말하지 못했던 그것/ 낯선 의붓아비에게마저 버림받고 이내 당신 기억 속에서 까맣게 지워져버린 그것/ 가까운 알뜰매장이나 청계천 고물상 혹은/ 청량리 양동 미아리 용산 ... 이런 곳에서/ 신원미상의 흔한 이름표를 바꿔달고 남은 생의 은신처를 찾고 있는 ...... 끝끝내/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값을 묻는 당신/ 오늘 내가 헐값인 이유에 대해 굳이 캐묻지 말라//

성탄 전야 / 이덕규
잠실쯤에서 합승한 중년의 한 사내가 다짜고짜/ 이제 집에서는 그게 안 된다고/ 거기 좀 데려다달라고 한다/ 바람잡는 동정녀들이 많다는 거기, 아무나/ 쉽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언젠가 오늘처럼 권태로운 바람이 불어볼 때에도/ 누군가 하늘에서 불어오는/ 그 수상한 기운에 수태되어/ 가벼운 죄, 구류 살듯 잠시 이 땅에 내려 왔다가/ 너희들이 지은 죄마저 다 뒤집어쓰고/ 구름처럼 사라졌다는,/ 이윽고 어디선가/ 후끈하게 발기한 바람 한 줄기가/ 택시에서 내린 그를 잽싸게 회오리로 낚아채간다/ 이제 곧, 그가 부활하리라//

오차의 진실 / 이덕규
오래된 저울의 바늘이 오른쪽으로 일 킬로그램 기울어져 있다/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 저울대 위에 앉아 있나?/ 모두를 자신이 올려놓은 불건 중량에서 일 킬로그램씩을 뺀다/ 그러나 그동안 수없이 오르내렸던 수억 톤의 무게 중에 그가 기억할 수 있는 것은 단 일 킬로그램뿐,/ 기울어진 일 킬로그램의 오차 위에 그 육중한 헛것들이 또다시 가볍게 올려지고 있다.//

그때 밖은 칠흑같이 어두웠지요 / 이덕규
밖에는 눈이 오고 있었다/ 마루 끝까지 왔다 처마 끝까지/ 오는 듯했다. 그러고도 눈은/ 계속 내리는 듯했다/ 나는 조용히 밖으로 나가 눈 속으로/ 눈 속으로 굴을 파기 시작했다/ 한 마리 애벌레처럼/ 배밀이로 하얗게 불 밝힌 터널을 뚫고/ 마당을 건너 우물가 담장을 넘어/ 왼쪽 텃밭을 지나, 한 번 돌아봤다/ 멀리 구불텅한 터널의 입구에/ 파충류 눈깔 같은 아버지의/ 빨간 담뱃불 빛이 쫓아오고 있었다/ 나는 내가 파낸 눈으로/ 그 구멍을 틀어막고 계속해서 산 속으로/ 눈 속으로 굴을 만들며 올라갔다/ 몇 굽이 깊은 골짜기를 건너/ 수많은 무덤들을 지나 이윽고/ 산꼭대기에 올라/ 굳어가는 가루약 같은/ 만년설 속에 웅크리고 앉아 언젠가/ 언젠가 이 눈이 다 녹아내리는 날,/ ............/ 어머니 울음소리에 참이 깼다/ 그때 밖은 칠흑같이 어두웠지요//

골다공증/ 이덕규
불은 좀처럼 붙지 않았다/ 불연소된 막막함들이 출구를 찾지 못하고 쩔쩔매다가/ 부엌이나 툇마루 밑으로 배를 깔고 기어들어가 입을 딱딱 벌린 채 자욱하게 숨을 거두고/ 있다/ 어느 구들장 하나가 단단히 무너져내린 모양이었다/ 방고래 사이사이/ 사통팔달 뚫린 굴 속을 누비고 다니며 또다른 길을 내기 위해 그나마/ 성치 않은 무릎 관절을 갉고 있는 쥐새끼들/ 지독한 놈들이었다 그 속에서도/ 보금자리를 틀고 새끼를 쳤다 긴 장대 끝에/ 짚뭉치를 묶어 그 캄캄한 통증 저 안쪽까지 꽉꽉 쑤셔대지만/ 놈들은 더 깊은 곳으로 몸을 숨기고 삭은 구들장만이 조금씩 부스러지며/ 검붉은 비명들이 끌려나올 뿐이었다/ 굴뚝으로 돌아가보면/ 입을 꾹 다문 싸늘한 오지굴뚝 깨진 틈으로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신음 한 오리/ (얘야 그만두거라 그래도 그 동안 오래 버텼지 .........)/ 쓴 가루약 같은 연기를 하얗게 뒤집어쓰고/ 아궁이 앞에 앉아 연신 무르팍을 쥐어박는 어머니가/ 언 생솔가지를 그 무릎에 대고 뚝뚝 부러뜨릴 때마다/ 빈 뼈속에서 싸마하게 울려나오는 공명/ 그 깊고 어두운 굴 속/ 시린 신경올처럼 얽혀 있는/ 앙상한 잔가지들의 갈라터진 살갗을 밀어내고/ 꺼져가는 불씨 위로 다시/ 한 줌의 마른 쏘시개를 던져넣는 그녀의 텅 빈 몸 속이 한순간 환하게 드러나고 있다//

부화(孵化) / 이덕규
여린 맨발을/ 품속에 감춘 새 한 마리가/ 서툴게 날아오른 길가 풀섶에/ 밑창 뒷굽이 닳고 닳아서 구멍이 뚫린/ 낡은 운동화 한 짝이/ 엎어져 있다/ 만지면 바스러질 듯/ 하얗게 빛이 바랜 그 캄캄한 운동화 속에서/ 누군가, 아직도/ 실핏줄처럼 뒤엉킨 길 끝을 찾아/ 두근거리는/ 오전 내내 비 내리다,/ 갓 부화된 하늘의 발뒤꿈치가 말갛게 개인/ 어느 여름날 오후//

철새들 사랑 / 이덕규
대책 없이 뛰쳐나온 불륜이/ 먼길을 돌아 이제 막/ 숨차게 들어선 곳,/ 허름한 여인숙 같은 둥지 속에/ 살림이랄 게 뭐 있나요/ 솔직히 우리/ 부끄런 몸 사랑 가려줄/ 펄렁이는 나뭇잎/ 몇 장이면 족하지요/ 어차피 다 한철인데요 뭐/ 그래요/ 이 무성한 여름 지나/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면/ 문득 몸살처럼/ 머나먼 남지나해 건너/ 또다른 사랑이 그립겠지요/ 벌써부터/ 오며 가며/ 눈 맞은 옆집 여자에게/ 도망가자! 버릇처럼 속삭입니다//

 

삽 / 이덕규
그대 마른 가슴을/ 힘껏 찍어/ 엷은 실핏줄들이 뒤엉킨/ 따뜻한 속살 속에/ 한 톨의 씨앗을 묻고/ 다독거려주는 일/ 더러는/ 그 속에 박힌,/ 울혈덩어리 하나 캐내기 위해/ 그대와 함께/ 온몸이 저리도록 울어도 보는 일//

그땐 좋았었지, 불타면서 / 이덕규
아주 추운 밤이었지/ 황량한 벌판 한가운데서 꺼져가는/ 불씨 위로 나는 팔뚝을 하나 던져 넣고/ 당신은 다리 한 짝을 던져 넣었지// 돌아갈 곳도 없고 땔감도 떨어져 없던/ 그때 이내 나머지 다리 한 짝과/ 팔 한 짝도 던져 넣었지/ 당신에게 건너갈 다리도 없이/ 당신을 만져볼 손도 없이//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사이에 두고/ 우리는 그저 바라만 보다가/ 그래도 춥다, 마지막으로 남은 몸마저/ 동시에 불길 속에 던져 넣었지// 마음이 추워 몸을 태우던 그때/ 우리는 좋았지, 좋았었지 하나의/ 불꽃이 되어 불타면서/ 불타면서 그 캄캄한 벌판을 밝혀 건넜지//

귀곡성(鬼哭聲) / 이덕규
한겨울 누더기 삼베옷을 걸치고 들판에 서서 우는/ 봉두난발 마른 풀과 꽃대들 베어다가 저녁 군불을 지피고 누운 밤, 누군가/ 우리 집 지붕 위로/ 천발 만발 펄럭이는 광복천 같은 세찬 눈보라 허공을 찢으며 지나가는 소리를 들었던 거라// 매서운 바람 끝에 매달려/ 다급하게 날아든 갈잎 몇 장도/ 오래 전에 죽은 사람의 빛바랜 부음처럼 문틈에 끼어 밤새 울었던 거라// 한 데서 얼어 죽은/ 천지간 사람 아닌 것들의 억울한 죄목들까지 벌판 끝으로 몰아가는 쇠바람 속/ 제 울음도 못 듣는 귀머거리 눈송이들의/ 먹먹한 이명 속에서도 누군가 소리 죽여 우는 소릴 들었던 거라// 이른 아침. 나는/ 밤새워 곡哭을 비운 맑은 허공에/ 흰 빨래처럼 차갑게 빛나는 아침 허공에 더운 숨을 길게 내쉬고서/ 향기로 울다간 마른 풀꽃 내음 같은/ 먼 조상들의 초라한 겨울 옷자락에 내 상기 붉은 뺨을 한번 스쳐도 보았던 거라//

허공 / 이덕규
자라면서 기댈 곳이/ 허공밖에 없는 나무들은/ 믿는 구석이 오직 허공뿐인 나무들은/ 어느 한쪽으로 가만히 기운 나무들은/ 끝내 기운 쪽으로/ 쿵, 쓰러지고야 마는 나무들은/ 기억한다. 일생/ 기대 살던 당신의 그 든든한 어깨를/ 당신이 떠날까봐/ 조바심으로 오그라들던 그 뭉툭한 발가락을//

부정(不淨) / 이덕규
염천에 논두렁을 걷다가 슬쩍/ 오리알 둥지를 스쳤을 뿐인데 알을 품던 어미오리가 돌아오지 않는다// 내가 만지기만 하면 멀쩡했던 토종 오이 꼭지들이 짓물러 딸어지고/ 참외 배꼽이 새카맣게 썩어 들어갔다// 독사를 잡아먹은 암소가 유산을 하고/ 노랗게 곪은 것을 뚝뚝 흘리며 돌아다녔고 뒤꼍 장독대 새로 담근 장이 푹푹 썩어 갔다// 멀리서 오다 말고/ 주춤거리는 신생을 가로막고 서로 붙어먹는/ 싸늘한 상극(相剋)들, 부엌칼이 날아가 꽂힌 마당에 검은 피가 흘렀고 잡초가 우북이 돋아났다// 한쪽 날개가 없어 날지 못하는 새가 쥐구멍 속으로 기어 들어가고 눈먼 고양이가/ 무덤 위에서 날카롭게 울자/ 집 나간 개가 붉은 명정(銘旌)을 물고 돌아왔다// 반쯤 부화된 오리알 속에서 구더기들이 쏟아졌고 나는 고통 없이 내 살이 검게 썩어 들어가는 걸 본다//

밤길 / 이덕규
조금만 참아라/ 다 와간다 좋아진다/ 이제 따뜻한 국물 같은 거/ 먹을 수 있다/ 멀리서 가까이로/ 개 짖는 소리 들리고/ 언뜻 사람들 두런거리는 소리도/ 지척에까지 가까워졌다가는/ 이내 다시/ 아득히 멀어졌다/ 어머니/ 누비 포대기 속에서/ 자다 깨다 자다 깨다/ 마흔아홉번째 겨울이 간다//

어떤 임종 / 이덕규
이제 막 숨 그쳐 가는 사내 바지 속으로 느닷없이 손을 쑥, 집어넣고/ 맥없이 오그라드는 생의 마지막 뿌리를 거듭 고쳐 움켜쥐며 오열했다는/ 어느 젊은 미망인 이야기를/ 웃기거나 슬퍼하거나 사이에서 엉거주춤 듣던 한 남자가// 어디, 볕 잘 비쳐드는 초겨울 한낮의/ 허름한 여인숙 같은 데 들어가 폐경 지나 물 없는 비쩍 마른 여자와 마구 하고 싶다고......./ 창밖을 내다보며 찡그리듯 혼잣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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