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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구효경 시인

부흐고비 2022. 4. 12. 12:45

구효경 시인
1987년 전남 화순에서 출생.

전남과학대학 화훼원예과 중퇴. 2014년 웹진 《시인광장》 「쇼팽의 푸른 노트와 벙어리 가수의 서가」 외 4편이 신인상에 당선되어 등단.

현재 (사)한국음악저작권협회 소속.

 



소등 / 구효경
별들이 점멸하는 밤의 액자와 스탠드불/ 먼곳에서 온 낯선 난쟁이들과/ 거인 이방자들에 속하지 않는/ 중간 키크기의 민족들이 선한 기운을 품는다.// 아홉시가 되면 모든 입실이 끝나고/ 죽음이 창렬한 고요처럼 찾아오는/ 자정 같은 어둠이다.// 날 똑바로 봐, 긴 시간을 태옆구멍에/ 말아 넣어올리며/ 미끄럼틀 타듯 내려가는 공간을/ 우리들, 꿈의 바닥이라 불렀었지.// 출몰하는 하루살이 떼들./ 노을을 지게처럼 이고선/ 가로 밖 느티나무,/ 늙다란 참나무에 걸어놓은/ 램프마저 소등 때다.// 기회가 세번 있다는 옛 경구를 믿지 않는다/ 그것은 아예 없었다, 우리 생엔./ 알고보니 우리가 운, 그 자체였다/ 행복한가, 아니한가/ 행복하지 아니한가, 행복한가/ 아카시아 잎을따며 묻던 중얼거림/ 계망초 꽃이 필 때, 우린 다 울었다.//

두 번째 유서 / 구효경
꽃씨를 뿌리며 흙길 밟는 줄 알았다./ 아무리 발밑이 까슬까슬해도./ 아무리 손 안이 무거워도./ 알고 보니 풀 위에 돌 던지며 걷는 중이었다./ 내 걸음은 꽃 한 송이 피워내지 못하리.// 거칠게 살아온 파도들이 다 비눗방울이어라.// 이야기를 담지 않고 버틸 수 있는 눈물샘이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내가 기억나지 않는다.//

시간이 흐리다 / 구효경
시간이 느릿하게 보폭 좁은 걸음으로 간다/ 아무리 입으로 초를 재어도/ 그 시간은 맞지 않다/ 마치 생일케이크의 초불기에 실패한 어린애처럼./ 초가 꺼져야 본격적인 파티가 시작돼잖아요/ 그러나 네 생일은 진작 지났단다/ - 그 때 왜 파티를 해주지 않았나요?/ - 너무 어두웠잖니// 시간이 흐리다 시간이 뿌옇다/ 모두에게 느린 시간,/ 나에게는 더 느리다./ 진작에, 더 느리다./ 느리고 느리고 느리고 느렸다//

사건지평 망원경-EHT / 구효경
궁수자리의 발끝을 따라 블랙홀을 걸었다/ ​우리의 손마디는 블루빛으로 물들어 가지만/ ​나는 언젠가 메이야스에게서 들었던/ ​체념된 약속을 떠올렸지/ ​퀭텡, 손톱 끝이 붉게 묽어가는 걸 그대도 아는가/ ​반경 1270만km, 장미꽃잎과 튤립꽃잎이 만나는 지점,/ ​우리는 거길 보라색 장소라 불렀어/ 그대와 나의 경계지대는 어디일까/ ​장미감옥과 튤립연옥의 사이가 무너질 때/ ​우리는 그 틈을 우리만의 블랙홀이라 불렀어// ​화석 같이 굳은 너에게 우리는 원래/ ​초월할 수 없는 현실을 등에 지고 태어났다 했지/ ​그대여, 아픔이 많은 그대에게 천체망원경을 선물하고 싶어, 선물할게/ ​.나와 너의 그대는 우리.아낌 없는 칭호 '우리/ ​'우리는 현실을 체념 하더라도/ 다른 생명과 그 너머의 현실을 본 적 있어.../ ​꿈인 듯 몽롱하더라도 약속인 듯 명료하네/ ​그대여. 우리의 미메시스가 흩어지더라도/ ​슬퍼하지 말자. 내 맘을 아는가……그대여//

코코에린을 위한 찬가 / 구효경
그녀의 희고 고운 얼굴은 마치 숫눈길 같아/ 별이 쉬어가려다 그 빛에 가려져 숨은 눈동자//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기 위해 태어나/ 은신처와 안식처가 되어주지// 일요일과 비슷한 분, 첫과 끝을 함께할/ 우리의 운명은 아침과 밤이 겹쳐질 때까지 영속하지// 그녀의 눈물에서 사는 물고기/ 그곳을 떠나선 살 수 없어/ 우리는 마주 본 눈빛에 비친 서로의 모습을 닮아가지// 꽃을 창조하는 *희소로 인해 지천에 태어난/ 장미들이 숭앙하는 그녀/ *열 번째 뮤즈의 시로도 부족한 아름다움을 찬미하지// 모든 길은 코코에린으로 통한다.//
* 희소: 예쁘게 웃음, 기뻐서 웃음
* 열 번째 뮤즈: 플라톤이 호명한 고대 그리스 여자 시인 사포

비밀 사물함에 노크하기 / 구효경
잘려나간 손톱이 뜯겨나간 속눈썹에게 말할 때/ 꼬마숙녀가 한 번도 열어보지 못한 비밀사물함이 열린다/ 하루에 한 번 피는 꽃과 천년에 한 번 떨어지는 유성들/ 그 언젠가 네게 13통의 편지를 적던 내 가슴 한 켠에 있었다// 아무튼, 누구든, 성장판이 닫히지 않는다면 그는/ 은근한 소외와 은밀한 동경을 받을지 몰라/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 사람과/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책/ 서로 어울리는 짝꿍이 되어/ 오해라는 기표를 화해라는 기의로 이해할 때/ 서로의 옆구리를 향하던 가시가 사라진다// 그 틈새로 피는 꽃들의 향연과 기러기들의 합창교향곡/ 비밀 사물함에서 꺼내온 입술을 너에게 줄게/ 단 한번이라도 내 가슴 한 켠에 노크를 해준다면.//

먼 곳의 옥상 / 구효경
후루룩 꽃잎이 새처럼 날아가는 팔월/ 줄넘기를 하다가 담 넘기를 하는 기분이 들어/ 이 줄을 다 넘으면 저 너머엔 장미가 피어있을까./ 체한 날 손을 땄을 때 흘러나온 피처럼 검붉은 정원이./ 눈앞에 없는 울타리를 눈앞에 옮겨놓지/ 먼 곳의 정원에는 먼 곳의 정원사가./ 먼 곳의 세탁소에는 먼 곳의 세탁사가./ 나는 지금 여기가 거기보다 더 멀게 느껴진다./ 먼 곳의 사람에겐 지금 여기 내가 멀게 느껴질 테지./ 그렇지만 오늘은 모든 사람이 가까운 날./ 그렇지만 내일은 다시 모두가 멀어지지.// 지하실에서 피어나는 곰팡이와 애기 장미./ 내가 밟는 골목길 개똥벌레 같은 가로등/ 흙과 먼지가 날리는 그곳이/ 쌔근쌔근 갓난아기 안고 잠든 누구에게/ 가까운 곳의 옥상이자, 먼 곳의 옥상이었을 테지.// 체한 날 손을 땄을 때, 그 손 어루만져 줄 사람 없다고/ 슬퍼 말라고, 사람은 양 손을 갖고 태어났구나 싶었지.// 줄넘기를 넘다가 하늘넘기를 하는 기분이 들어/ 저 파란 도배지 깔아놓은 천장을 뛰어넘으면/ 나의 옥상은 지구 위에./ 얼마나 넓을까./ 내 발은 얼마나 좁았을까.// 가난한 오늘을 넘어가며/ 저 너머엔 손끝에서 피는 검붉은 장미를/ 화분에 심어놓는 사람이 살고 있을 거라고 믿지.//

어두운 날의 시 / 구효경
몽혼의 틈새로 어떤 자가 불을 꺼버린 방이다./ 까맣게 보이는 노트 위로 적어간 어두운 날의 시/ 화려한 문자들이 왜 모더니즘-포스트 모더니즘이라 불리는지 몰랐던 시절의 오류/ 장미와 백합의 교집합을 떠돌다가 시크릿가든에서 발견한/ 녹슨 열쇠를 시라 불렀던 것이다./ 야상곡과 녹턴이 마주쳐다본 사이라면 좋겠다./ 진혼곡과 레퀴엠이 스쳐지나간 사이라면 좋겠다./ 슈베르트의 세레나데가 흔한 연가로 들리면 좋겠다./ 동명이인의 몸을 가진 음악들, 얼굴은 도플갱어인가./ 그러나 의외로 오류의 정원에는 자물쇠가 없다는 걸/ 모두가 알았으면 좋겠다./ 별들이 클래식을 듣는 밤과 아흔번째 새벽/ 상현달빛의 미학에 통달한 전생이 있었다는 증언과/ 더이상의 지속성은 없다는 종언의 서약이/ 어색한 지구본의 일자변경선을 더듬었다./ 본명은 가짜, 예명은 진짜 이런 구별이 무의미한 시절에 떠났다./ 서쪽에서 해가 져야 비로소 아침이라는 걸/ 아는 자들의 나라로.//

예술가 마을 / 구효경
사람들은 그 거리를 ‘해 동네’라 불렀다./ 가장 일찍 동이 트고, 가장 늦게 노을이 저무는 곳./ 고로 그 동네에서 가장 활발하고 귀한 시간은 밤이었다./ 종이 값을 동냥질해대는 미천한 무명 시인과/ 하루 벌어 하루 먹고 남는 돈은 막걸리를 마시는 데에 써버리는/ 노총각 전기수와 위대한 화가는 다 그 동네에 살았다./ 밤이면 올빼미들이 눈을 부라리고,/ 영혼을 빼앗을만한 지혜 없는 자들을 찾아나서는 동네./ 흉조와 길조를 동시에 담당한 새는 들킬 정도로 크게 울지는 않는다.//

노을을 현관 입구에 걸어놓은 홍등가./ 거기에 무명시인의 애인이 살았지만/ 그녀는 달 같아서 해 동네의 짝지를 따라갈 순 없었다.//

어느 날, 일본인 친돈야가 살았던 빈 집에 이사 온 희곡작가가 외쳤다./ 내게 은 화 한 전씩만 바치면 이 동네를 떠나서도 살만한 역할을 쥐어주지!/ 시인은 시를 쓰지 않아도 되고, 화가는 그림을 그리지 않아도 되고,/ 전기수는 소설을 읊지 않아도 되고, 모두 배역을 얻어 무대에 서리라!/ 가는 곳마다 무대가 되리라!/ 제법 학식 있다는 베짱이 광대가 답했다./ “ 건방지게 연출가 흉내 내지 말고 네 할 일이나 잘하시라우.”/ 그가 더욱 큰 소리로 외쳤다./ “ 모두 나의 배우가 되면 자기 업을 떠나서도 먹고 살 수 있다!/ 기쁘지 아니한가.“//

그 집에 눌러 살던 희곡작가는 얼마 못가 해 동네를 떠났다./ 무명시인의 달 같은 애인 손을 잡고 야반도주했다./ 그것도 무명시인이 잠깐 졸던 사이에. 눈 깜빡할 새에!/ 무명시인은 상실감과 쾌감이 공존하는 이상한 감정 상태에 놓였다./ 그는 목에다 행글라이더를 걸고 내면으로 말했다./ ‘이 수건 올가미가 날 하늘에 띄워줄 거야./ 철새 위의 닐슨처럼 날겠지./ 우주의 티끌 먼지 속에 이륙해 자아의 섬멸에 안착하겠지.‘// 홍등가에는 새로운 여인이 들어왔다./ 해 동네의 예술가들은 모두 그 곳에 애인을 두었지만/ 아무도 결혼식을 올리진 않았다.//

어느 날, 왕이 말했다. 해 동네를 철거하라./ 달 같은 여인들을 체포해 수감하라./ 희극과 비극에 취한 왕은 해 동네가 없는 연극을 꿈꿨고/ 마을에서 쫓겨났던 희곡작가는 모든 누명을 뒤집어썼다./ 왕을 사로잡은 연출가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예술가 마을의 짧았던 밤에 구구 울던 올빼미들이/ 자주색 숲으로 도피해 더이상 보이지 않았다.//

오늘 / 구효경
나의 가난이 요술 상자 속 아름다움이었으면 좋겠네/ 수리수리 마하수리/ 나의 불행이 저 머언 우주에 닿을 빛이었으면 좋겠네/ 수리수리 마하수리/ 상자 속에 우주 안에 나를 닮은 작은 생명체 하나 살면 좋겠네/ 수리수리 마하수리/ 나의 곁에 나의 바깥에 아무도 없다네.//

Helianthus annuus* / 구효경
천상을 그려보는 건 지상에 있는 자들의 몫이다./ 어제 아직 내가 잠들기 전의 일이다./ 라파엘로의 그림 속 날개 달린 아기들과 페가수스의 뿔을 어루만질 때/ 나는 그것이 꿈인 줄 알면서도/ ‘잠들지 않은 채로 꿈을 꿀 수 있다!’/ 라는 선언을 세상에 공표할 용기 따위는 지니질 못했다./ 흐트러진 공기와 금방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절벽을 만든 날/ 내가 만든 풍경 안에 내가 갇혔다.// 신은 오래전 이미 피조물과 합궁을 벌였는지 모른다./ 어쩌면 자기 귀두를 잘라 뱀을 창조하고 아담의 아내를 노렸는지 모른다.// 예술의 속물화: 내가 만든 조각을 세상 중심에 던져 우뚝 세우고픈 욕망./ 푸르게 발기한 페니스를 잡고 누워 울었다// 경배 받는 자와 축복 받는 자, 둘 중 누구도 받을 수 없는 것이 있다./ 나와 내 작품은 같은 혈통이지만 다른 육체로 떨어져 있고,/ 하늘과 땅이 서로의 살점을 떼어 나눠 갖지 못하는 그만큼 서로를 그리워한다./ 피조물과 한 몸이 된 예술가만이 생명 있는 예술가야,/ 겸손하게 꿈꾸는 자는 작품 위에 신으로 군림하지 않는다./ 생기가 있기 전 육체가 있었듯, 육체가 있기 전 흙이 있었듯./ 천상의 뿔을 머리띠에 달고, 날개를 훔쳐도/ 하늘의 신비란 단지 땅의 신비에 둔감해진 눈동자의 착시였을 뿐이라고/ 덤덤하게 회고할 수 있다.// 나의 뮤즈가 될 수 없는 장님소녀에게 수수께끼를 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어둠 속에서 볼 수 있는 촉감뿐입니다./ 당신의 손과 볼의 피부, 머릿결, 그 모든 것이 가장 크고 환한 빛이라는 걸/ 그대도 아시는지요?/ 역으로 묻는 소녀의 눈이 세상에서 가장 환한 태양이다./ 내가 제 몸에서 뿜어져 나온 빛인 줄도 모르고,,,,,,./ 우리는 합궁 이전에 이미 한 몸이다.// 신은 오래전 타락했지만 여전히 눈부시게 존재한다.//
* 해바라기의 라틴어 학명

데칼코마니 / 구효경
나무에 앉은 새는 열매가 되고/ 빨랫줄에 앉은 나비는 덜 말린 팬티가 되고/ 풀잎 위에 앉은 새는 꽃이 되는 저녁/ 식물도감 위에 놓인 화단의 심경을 참새가 노래하고/ 조류도감 위에 앉은 새장의 기분을/ 연주하는 피아노 건반 위에 앉은 멜로디 인형이/ 강아지 인형을 바라보는 강아지에게 속삭일 때/ 연필을 천 개나 품은 나무가/ 노트를 넘기는 손에게 언질할 때/ 새벽을 갉아먹고 서재 틈바구니로 숨는/ 자 벌레의 잠을 깨우는 알전구의 빛을/ 품어 안는 태양을/ 바라보는 해바라기를/ 그리는 빈센트 반 고흐의 술잔을/ 깨트리는 여자의 머리카락을// 먹고 자란 벌레가 이국의 땅에서 만난/ 하얀 사자를 닮은 지렁이의 또 다른 몸을/ 물고 날아가는 까마귀가/ 덜 말린 팬티에 깃 하나 떨어트릴 때/ 버찌열매가 잎사귀를 떨어트린/ 그 자리, 죽은 나방의 거친 날개를 질투하는 나비가/ 하얀 물감을 뿌리는 어린아이의 방으로 들어온 저녁/ 노을 닮은 코피처럼 비린내 나는 생선을 찾는/ 고양이가 어느 골목에 버리고 온 울음소리처럼/ 앙칼지게 부는 바람이 내 몸을 스칠 때면/ 허공과 바람에도 혈액형이 있다는 걸 눈치 챈다./ 내 오른쪽 바람이 RH +플러스/ 내 왼쪽 바람이 RH –마이너스/ 헌혈할 상대를 찾아 떠돈다는 것을 느낀다./ 내겐 바람의 수혈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내 왼뺨이 내 오른뺨에게 말걸 때/ ‘나’라는 타인과 ‘나’라는 타인을 나누어 비로소/ ‘너’라는 나를 그렸다.//

사과 / 구효경
사과를 깎기 위해선 먼저 사과에 상처를 내어야한다./ 너에게 상처를 주고 싶었다./ 네 온몸을 삼키고 싶었다./ 에덴의 실낙원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열매처럼/ 허물을 벗는 뱀의 뱃가죽에 눌린 흙에 덮여 썩어도/ 그것이 악마와의 귀접이거나 육체간의 성교라고 믿진 않아/ 우리 여인은 꼭두각시 인형과 간음을 나누었지/ 염탐하고 욕망할 대상이 없었기에 택한 모형은 산 것보다 더욱 정교하고 세련됐지/ 차이코프스키 백조의 호수에 등장하는 백조의 모형 날개보다/ 옆 마을에서 날아온 참새의 날개가 더 사과나무 가지에 앉기 적합한데/ 소박하고 진정한 숨결보다 화려하고 죽어버린 숨결이 익숙한 것은/ 아직 사과나무 뿌리가 박힌 흙 속에서 아담의 흔적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뱀은 자꾸 똬리를 트며 번식하는 공간을 늘려가고/ 그 허물 만지는 것만으로도 부정 탄 여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열 살짜리 소녀에게 가르쳐주진 않았지/ 그런데 너는 왜 자꾸 내게 사과를 건네며 미안하다고 말하는 거니?/ 우리의 실낙원은 상처가 패어낸 굴곡 속에 협곡과 습곡을 지어 번성하고 있어./ 상처를 꼭 나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꼭 화해를 해야만 이해 가능한 사이란 서글픈 관계다./ 멀리서 애증하며 덮어놓아도 좋을 사람아/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할 길 밖에 없었지/ 내가 만들어준 상처가 좀 더 곱다, 네가 만들어준 상처는 아름답다/ 칼처럼 손톱을 잇대던 그 흔적을 우리 관계의 증표라고 부르며/ 아파하는 스스로에게 도취하며 온 감정을 삼키려 했다/ '인형에겐 상처를 낼 수 없어서 저는 영구적인 혼자만의 통증에 시달릴 수 있습니다./ 상처를 낼 수 없는 관계라니, 지독한 짝사랑이라니,/ 그러니 몇 번 몸을 던져도 그것이 불륜에 성립할 수 없다는 말, 내겐 모형뿐인 거죠.'/ 원죄는 사랑의 역설을 드러내며 나타났습니다./ 깨어진 약속, 버림받은 세계, 태초 이전의 열매/ 이미 우리가 나기 전 사랑이 먼저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화해의 가능성은 속죄의 범위를 넓혀놓고 떠난 옛날이야기라는 것을./ 우리는 서로를 용서치 않고 멀리 떨어져있음에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별에 아파하진 마세요./ 잠언과의 이별, 혁명과의 이별,/ 데모와의 이별, 시와의 이별, 민중과의 이별/ 오페라와의 이별, 씻김굿과의 이별, 편지와의 이별/ 강물과 남극 빙하에 녹은 얼음과의 이별/ 그 모든 사소한 이별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하지 마세요./ 상처가 있기에 사랑이 가능하다고 역설하진 않겠지마는/ 그 자리에서 돋아나는 우리들의 에덴을 봅니다./ 아담도 없는데 모형을 만들어 성교를 나눈 우리는/ 눈을 감고 말없이 서로의 껍질을 벗기기 시작하지요/ 우주의 입에 온몸이 삼켜지는 종말을 예감하며/ 선악과와 생명과의 모습을 ‘사과’라고 부르지요./ 화해라는 종말이 오기까지 먼 곳의 모습을 그토록 미워하며 그토록 그리워하죠./ 열 살짜리 소녀가 키득키득 웃곤 속삭이는 말을 들으며 잠들지요./ '사랑하는 사이엔 미안하다는 말을 안 하는 거래'//

분신 / 구효경
퉤! 친한척하지 마세요./ 당신이 날 언제 봤다고? 날 얼마나 안다고 웃고있니// 난 당신의 방 거울 속에 살아있다/ 어깨를 들썩인 네 울음을 다 봤지/ 몬드리안이 사랑할 것 같은 천장의 무늬를/ 마루 장판 바닥으로 옮기는 멀미/ 구토가 나는 느낌을 흐흐,/ 변태처럼 즐기며 까르르댄다// 이제는 무채색 밤 어제도 그제도 무채색 밤/ 쇤베르크의 음악을 옆구리에 끼고 누운 침실이다/ 이 공간이 화음 없는 우주가 되어 증폭하여/ 세계를 살라내고야 마는 진실이 될 때/ 그리하여 우리 몸을 태울 때,/ 이미 죽은 뼈 마디 조차 아린 그 순간에/ 축제를 열자고 약속한 걸 잊었니, 떼쓴다, 애쓴다// 이별은 호모들의 효모 같아서 빨리 번지고/ 운명은 죽은 정서들끼리 부딪치다 '우연히'/ 산 자들의 한 육체를 만드는 거라 했었니/ 둘이 마주 건 손가락 끝에/ 같은 모양일 수 없는 지문이 멈칫,/ 지난한 시간들과 지난 한 약속/ 우린 없는 시간, 그 '사이'를 기약한 것뿐이라/ 이건 자연스런 흐름/ 그러므로 탓하지 마라// 구애 없는 문장 어떤 형식으로 다가간다면/ 당신은 부패된 미라라도 잡아먹을 걸/ 봉인된 시간을 넘어 다시 기어 나오는 미동/ 아귀 틀어진 덮개로 막지 못한 상자 속에서/ 불덩어리 같은 당신, 튀어 나온다// 끈이 떨어져 나간 브래지어의 촉감을/ 알량한 체온으로 농락하며 벗겨낸 때/ 터진 심장, 왼쪽에 자릿세도 없이 뉘인 네가 살았다/ 한 번도 당신을 본 적 없는데 그 얼굴을 그릴 수 있다/ 붕대로 감아버린 육체를 복제하며/ 거울 속으로 도망치는 널 이 세계로 입관시켜주고파// 내 울타리는 가시뿐이고,/ 이 안은 비좁은데 넘어 들어올 수 있겠니?//

 

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강 / 구효경
미카엘 가브리엘 브니엘 뭇니엘이 사는 강가에서/ 송사리를 손 안에 넣었다가 풀어주었다./ 주황은빛 나무들과 봉숭아 씨앗들이 귓속말을 한다./ 양지 음지 사이의 지우개보다 깨끗한 의지였다.// 송석정의 아름다움을 기억하는 배꼽 없는 생명들이/ 덧셈 뺄셈으로 후원하는 가슴 속이다./ 배려는 더하고 탐욕은 덜 하는 지구를 위해 기도했다./ 작은 바람의 화분 안 코발트 하늘색 모레가 적은 바다의/ 하품과 한숨 한쉼을 포옹했다.// 예쁜 대화의 꼬리채 물음표( ? )와 느낌표( ! )가/ 음악용어인 쉼표 ( , )와 문학용어인 반점 ( , )이/ 어느 하룻낮밤의 이유로 자리바꿈하는 때/ 우리는 웃고 울었고 울고 웃었다.// 결국 웃었으니 착한 결말이었다.//

악몽 / 구효경
검은 커튼을 만들어 눈을 가린다/ 하얀 지팡이를 연못에 버리고 흑암 속에서 헤엄친다// 달력은 계단처럼 정렬되어있지만/ 시간은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 아니지// 어떤 날의 루시드드림은 우울한 영사기 같아/ 오래된 흑백 필름을 더듬듯 볼을 만졌다// 흰 나비와 검은 나비 날개를 섞어 만드는 회색 박제/ 유채색 그림자를 찢으며 투명한 머리카락으로 국수를 해먹는다/ 노인의 얼굴을 닮아가며 한 살씩 어려진다// 점자를 읽으며 좀비를 불러내는 부적 안에 갇히기/ 미로를 벗어났건만 그 곳은 지구의 극히 일부였네// 북극에서 번진 오로라가 내 눈에서 폭죽을 맞네/ 남극에서 터진 눈발이 내 수음 아래 흐르네// 귀접으로 찾아온 영혼을 접대하며 우는 밤/ 삵이라도 낳을까봐 두려워 몸을 구푸리는 밤/ 맹인이 되어 영영 깨어나지 않을 밤//

알키비아데스* / 구효경
알키비아데스라는 꽃은 왜 없을까?/ 그 미소년의 영혼을 이어받은 자는 아직 탄생하지 않았을까?/ 심장꽃씨앗을 옮겨 심으며 독감을 앓다가/ 완치되었을 때/ 가장 기뻐했을 자는 소크라테스였겠지.// 그가 누구인지 아무도 정체를 알 수 없었을 때 마저도/ '너 자신을 알라'와 '전 그 무엇도 몰라요'가 충돌하며 접촉한 순간이다./ 번개의 불꽃과 램프의 불빛이 월광소나타에 비칠 때/ *물동이 속에 비친 별이 슬몃 움직였다.// 고개가 기운 그림자와 그 주인의 발자욱이 멀어져갈 때/ 허리 굽은 가로등이 등뼈를 펴며/ 치마입은 사내의 발바닥에 밑무늬를 그려주었다.// 속옷 없는 블랙홀 겉옷 없는 화이트홀 옷 없는 웜홀// 시간에서 간격까지 그대의 이름을 적었다./ 애심과 회심 사이에서 당신의 얼굴을 그렸다.// 정치가의 아들과 사대성인의 애제자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난제/ 악처라고 알려진 여자와 미소년을 두고 배회하던 스승은/ 하늘의 나무와 땅의 구름을 파내며 슬쩍 웃었다./ 사실은,,,,진실은,,,, 모르든 말든 아무 상관없었다.//
* 알키비아데스: 소크라테스의 애제자이자 동성연인이라고 알려짐.

잔혹동화 7 ㅡ마지막 푸른 수염 [김이듬 Respect hommage MR sound track] / 구효경
MIDI track1./ 일곱개의 아름다운 화관을 줄게, 음소거 당한 세이렌들의 모가지를 따다 테이블에 꽂자. 부엉이와 비둘기가 식상하게 울 때, 우리의 내장은 꿈틀거림을 멈추고 귀여운 오욕을 토해내지. 네 파란 트림과 맛있는 가래를 사랑해. 오롯한 질서 따윈 내 알바 아니지만, 나는 잠재력 있는 호기심을 사랑해. 매미 날개 같은 처녀막과 금쇠와 은수저로 만든 정조대, 신은 왜 여성의 목걸이를 거기에 두었는가.//
MIDI track 2./ 귀로 읽는 문장을 생각할 때마다, 오르가즘을 느끼지만 나는 어디서도 완전한 음부를 보지 못했다. 발기한 유방을 잘라 풍선을 분다. 파란 피에 관한 시를 여러 편 썼지만 한 개도 맘에 들지 않았어. 악보는 영원히 저주 받은 양식. 불구의 말들이 입을 탄다, 부정한 소문에 오르락내리락하는 미토스. 진통하는 입술에 아무도 재갈을 물려주지 않았고, 먹을 것도 주지 않았어. 트레비 분수는 진실을 말하지 않는 자를 깨물 힘도 없다.//
MIDI track 3./ 담배잎을 먹는 애벌레는 마지막 방에 가보았을까? 그곳에서 난 천국의 성곽을 짓는 부역을 형벌로 받은 노예를 만났고, 그는 보지못할 것을 봐야했던 비극이 자신의 죄명이라며 흐느껴 울었고, 지옥은 내 구두라는 것을 알았다. 발자국이 찍은 火印위로 불륜처럼 명료한 장미들이 흐드러이 웃었어.//
MIDI track 4./ 佛輪 남묘호렌겍쿄,,, 오네가이시마스, お願いします, 날 버리소서.한번도 혈서로 맹세한 적이 없건만, 그의 청혼편지는 내가 옆집 남자를 사랑하는 것을 안다며, 되려 날 사면해주겠다며 내 가슴에 대고 화음을 구걸하고 주홍이니셜반지를 주며 호소했어. - Asus7털들이 돋아나는 비슈누의 흉곽을 본 적 없고, 마리아와 예수의 동침을 본 마르다였던 것도 아니고, 풀들이 일어나는 김수영의 언덕을 누비지도 못했건만, 대체 내게 뭘 원하는 거야? 오, 전능하사 하늘에 계신 우리 어버이시여! 네가 뭘 알아.//
MIDI track 5./ 오장육부를 다 도려내도 당신이 원하는 대로 고개를 수구려 내 꼬리를 물진 않을 거야. *오우브로스의 *아이에스에 대해 당신들은 무슨 책임회피를 권리라며 주장하는데, 나는 게이도 아니고 레즈비언도 아니야. 보랏빛은 단지 우연이었을 뿐, 필연은 연필 한 자루만 못하고, 내가 믿는 운명은 안과 밖, 틈과 사이, 옆과 곁 어디에도 없단다. 펜촉을 물고서 킬킬. 너는 정말 하얀 점이 박힌 홍채를 본 적 있니?//
MIDI track 6.// 옛날 옛날에, 아주 먼 옛날 옛적에 난 비가 오면 태양의 방광에서 오줌이 쏟아지는 것 같아서, 동네 또래 자매들과 형제들을 불러 의남매가 사라지는 원탁의 기사 놀이를 하곤 했는데, 한 아이가 내가 자기를 오빠라 부르지 않는다며 너는 커서 시집을 못갈 거라고 악담을 퍼부었고, 나는 그 악담대로 살고 싶었어. 저주는 달콤한 이야기, 마녀의 청자가 되어주는 건 꼭 백자처럼 희고 고운 미녀. 난 까맣고 더러운 동생이었다. 막! 내가 달려가고 있는데,,,,,,, 막! 늑대가 따라와서,,,,,,, 막! 녹색 숲에서 울다가 잠들었어.//
MIDI track 7./ 일곱살, 일곱화음이라는 동시를 썼는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道레미파솔라詩 일월화수목금토 빨주노초파남보 너는 정말 따뜻하고 푸른 호수를 믿어? 어둠이 하얗다는 것도 믿니?너한테는 내 목걸이를 보여줘도 되지? 이 아름다운 Y목걸이에 얼굴을 넣어봐. 널 사로잡을 올가미, 천국에서 온 편지를 읽어줄 테니, 너는 가서 내 답장을 전해줘. 느껴봐, 우주를. 칠일을 살다 간 곤충의 몸으로 *나리폰을 불러봐.//
Instrument track./ 환절기와 간빙기의 멀미약. 모가지 잘린 여자들의 영원한 하루, 아침 낮 저녁. 영원한 밤은 괴어있다. 끝끝내 흐르지 않는 빨간 약을 처바른 진주. 푸른 수염을 단 어릿광대와의 마지막 하루. 자정과 정오가 겹쳐 낳은 시절들이 어느 바람을 따라 갔는지, 무슨 지도를 펼쳐봤는지 모르겠다. 감기약은 필요 없어. 텅 빈 내 얼굴에 장기이식을 해준 사람의 배꼽을 빨아주고 싶은데 이곳의 시체들은 다 남근을 쥐어 잡고 늘여져있어, 내 신부를 찾을 수 없다. 고백성사 대신 고해성사라도 바라야할까.//
*그래요. 나는 아름다워요. 죄명과 죄 몫. 죽은 장미가 알려줬어요. 나는 아름답다는 것을 알아야한다고. 소크라테스는 버리고 오로지 그것만을 알라고. 마지막 방문이 열리는 순간, *완경이 이륙해요.//
이가 들끓는 가발, 그의 음모는 파란색이 아니었어요. 성곽의 팬티바람 이발사만 그의 비밀을 알았다고 남루한 소문이 퍼지고, 나는 그의 마지막 푸른 수염을 뜯어 기어코 실뜨개를 완성했어요. 바늘 코는 예언처럼 뾰족하지만, 이걸로 목도리를 떠 그의 아랫도리를 덮어줄 거예요. 옥수수 이빨 텅빈 잇몸으로 웃는 테이블. 판도라의 뚜껑과 목숨을 바꿔도 좋을 만큼 질질 싸는 침대, 평온한가요? 노발리스에게 산 꽃을 보내고, 보들레르에게 착한 여자를 소개시켜주고 싶은 지금의 트랙, 사운드는 침묵, 음표는 묵음. 아무 소리 없는 MR버전의 노래를,,,,,,,다 들었다니요? 모든 독서는 오독이여, 배불리 먹을 지라! 이게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라뇨? 이제 비로소 당신의 유령은 완성되어 집니다.//
황홀한 여기, 몸 없는 시체들의 놀이. 환상적인 군청색 밤 열매를 異命에 던지며 둥둥 울려대는 징소리, 북소리, 하프소리. 흐흐흑, 웃음도 울음도 아닌 신음 소리. 혼불의 구슬이 흐르는 *카론의 강, 넘어온 것을 환영합니다.//
분신사바, 아가야, 이리 온.//
* 오우브로스: 뱀이 제 꼬리를 문 고대의 상징, 삶의 영원한 순환과 음양과 같은 상반된 세력의 통일, 원초의 무의식을 상징한다.
* 아이에스: intersexual 간성(間性). * 나리폰: 나무에서 7일을 사는 정령.
* 김이듬 시인의 '푸른 수염의 마지막 여자'에서. * 완경: 폐경의 순화 말. ‘월경의 완성’.
* 카론: 그리스신화에서 죽은 자를 저승으로 건네준다는 뱃사공. 그리스어로 ‘기쁨’이라는 뜻이다.

라이* / 구효경
천일야화, 그 우아한 거짓말/ 모든 속임수로 진실보다 더 정교한 한 순간에 도달한 예술을 파는 시장터/ 둔갑한 내가 있을지도 몰라요./ 기묘한 모스크 지붕 위를 검은 고양이가 걷고/ 암탉이 피를 흘리며 구구 울고/ 낙타가 긴 속눈썹을 움직일 때/ 경계에 자리한 모든 것을 채취하러 나선 날 발견할지도 몰라요./ 그 순간 당신은 유령에 홀린 자가 되겠지만!//
타, 신, 밈**/ 동굴 속의 등불처럼 어두울 때 더 강렬해지는 예언들의 진위 여부/ 증인은 이 세상엔 없어요, 나는 없는 것 마저 읊어댑니다./ 사실 보다 더 세밀한 그 모든 거짓말의 이름을 詩라고 부를 때/ 맹인 야담꾼과 앉은뱅이 웅변가는 각주도 없는 전설을 실어 날라요.//
이 몹쓸 쇳덩어리야***! 이 염병할 쇳덩어리야!/ 나를 배척하는 고함소리와 타르 타는 냄새에도 뾰족한 내성을 단련합니다./ 펜촉 끝을 내 불덩어리 몸에 태우며/ 금은 세공사의 가게에 내가 직접 수 작업한 시계를 걸어둡니다.//
격언이나 잠언이 아닌 것에 놀라는 인간들에게 종말의 선언은 없다고 우기며/ 우리가 죽는 그 자체가 최후의 심판이라고 말합니다./ 천궁에 날아올라 온전한 비밀을 캐고자 했건만/ 문지기의 호각소리에 귀가 멀고 떨어지는 유성 포탄을 맞고/ 비틀비틀 지상으로 돌아왔습니다./ 투바**** 숲을 지나 온몸 부딪쳐 캐낸 모호한 비밀의 조각들을/ 우리는 거짓 속에 보물처럼 숨겨놓았습니다./ 진실의 본질과 그 형상을 아무에게나 보여줄 순 없습니다.//
우리는 틈나는 대로 예언을 했고 그것이 틀리기를 바랐지요./ 점성술사들이 점지해준 향신료를 목에 걸고 우느라/ 어린아이가 길 잃는 줄도 모르는 인간들의 사막은 붉지요./ 노파와 어른이 서있는 바그다드 골목에/ 페르시아 산 양탄자가 날아오르는 저녁/ 새처럼 푸드덕, 새처럼 푸드덕,/ 카프 산맥*****을 넘어가는 우아한 거짓말/ 시인의 몸은 진실과 거짓이 열쇠와 자물쇠로 달린 사물함이죠./ 지천과 세상의 비밀이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유령은 영혼이 있는 자! 우리는 육체를 동경합니다./ 사라지고 소멸하는 것들을 애착합니다./ 시인은 그것들이 살았던 흔적을 캐내 증명합니다./ 그 눈동자에 잠든 날 깨우지 마세요.//
* 이슬람의 정령인 ‘진(jinn)’들 중에서도 특별히 시인에게 홀리는 정령. ** 코란의 서언.
*** 진니를 내쫒을 때 사람들은 쇳덩어리라고 외친다. **** 이슬람교 낙원의 나무
***** 진(jinn)들이 주거하는 산

천재론 / 구효경
누가 천재의 이야기를 들려 달라 하기에/ 나는 ‘어떤 금메달리스트’의 얘기를 꺼냈어./ 그는 내가 무척 어여뻐한, 좋아한, 레스포스 섬의 비너스 거품 같이 순결하고/ 사포의 영혼처럼 정열적이고 결백한 우정을 보여주고파 했던 친구의 후배라지./ 그는 처음에는 별 뜻 없이 ‘운동’에 임했고, 이 운동은 르네상스나 프롤레타리아/ 문예부흥운동 사회주의 혁명 운동과 같은 그런 뜻의 운동은 아니었고/ 육체를 능률적으로 활용하는 운동이었지./ 그러니까 그는 실질적 실증적이 아닌 실제 금메달리스트였네./ 나는 그가 처음에는 별 뜻 없이 운동에 임했다기에 그의 안에서 우연처럼 발견된/ 뜻밖의 거대한 능력을 그의 성취에 빗대어 천재의 것이라 하였건만/ 여기저기서 힐난이 날아들었다./ 패배자들이여! 아니, 패배론자들이여!/ 나의 천재론을 헐뜯는 자들을 조롱하고 돌아섰다./ 내가 약간 흠모했던 선수가 있지./ 그는 나와 동갑내기로 ‘어떤 금메달리스트’의 1년 선배였건만,/ 애석하게도 나와는 한 마디 밖에 나누질 못했다./ 그가 나의 연극동아리 소속 미모의 여자 후배와 사귀었기에 나는 다가가지도 못했지./ 그들은 여느 때와 같이 강당에서 훈련에 몰입했고,/ 난 강당 안 무대에 올릴 공연을 위해 조명을 손질하다가, 여차해 모든 불을 꺼버렸다./ 캄캄해 기합소리가 사라진 정적 속에서 그가 걸어 나왔고/ 그 옆에 누가 있었건만 그게 누구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네./ 그들은 내 실수를 수습하고 돌아갔다./ 그때 단 한마디를 나누었을 뿐인데,/ 내가 흠모했던 그 선수는 ‘어떤 금메달리스트’가 되진 못했지.//
‘그렇지만, 나는 믿었어요. 나와 동시대를 보낸 이들 중에서/ 그 누군가는 거대해지리라는 것을!’//
우리는 믿었다. 우리와 동시대를 보낸 누구는 매우 거대해지리란 것을!/ 강당의 불을 꺼버린 그 날 후로 어느새 십년이 흘렀고,/ 나는 인문학 청년 동아리 소속 귀여운 여자 후배와 함께 시립교향악단의/ 송년 음악회에 왔네./ 불 꺼진 무대 위에 연주자들이 나와 불협화음과 실험정신의 모범률 같은 조율을/ 선보이고/ 지휘자는 능숙하게 그들을 선두하며 슈트라우스를 서곡했다./ 타임 투 세이 굿 바이, 타임 투 세이 굿바이, 소프라노의 앙코르가 끝난 후/ 15분여의 휴식 시간에/ 우리는 교대생 친구들의 이야길 나눴다./ 나는 뭔가 이뤄낼 것 같았던, 매우 거대해질 것 같았던 친구들의 이야기를 했다./ 학창시절 내내 전교 1등을 단 한 번 놓쳤을 뿐인 친구의 근황과/ 수학 과학 올림피아드를 휩쓸며 매번, 다친 다리를 또 다쳐/ 절름절름 목발을 짚고 다녔기에/ 더욱 불구와 천재의 아우라를 풍겼던 친구의/ 그 몇 번에 걸친 교통사고까지 미화될 수 있을 것 같았던/ 소박한 시절의 희박한 예감들을, 모두 비껴가버린 그 동창생들을!//
‘너는 뭔가 이뤄낼 것 같았어, 아마 내가 언젠가 너의 문학작품을/ 연구하게 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어.’/ 귓전에 울리던 국문과 대학생 동창의 목소리,,,,,,./ 나는 일용직 노동자라는 직분마저 잃어버려 쓸쓸한 청년기를 지나고 있다.//
나의 천재론이 힐난에 헐뜯긴 그날,/ 저명한 문학평론가는 ‘문학과 천재’라는 주제로 팟캐스트를 진행했다./ ‘시간을 무력화하는 재능’이란 무엇일까,/ 유년에서 지금까지 끝없이 이어지는 동굴에 갇혀있는 박쥐의 날개 같은 것./ 나는 단 한 번도 거꾸로 가는 괘종시계 추나 노래하는 뻐꾸기시계에/ 매달려본 적이 없네./ 몰락하는 자여! 몰락하는 자들이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피를 썰어 ‘중세의 여름, 그 부활’을 탄생시키고 싶다.//
각혈과 가래침을 뱉으며 나는 감히 다빈치를 내 라이벌 삼고 싶다./ 아니, 나는 고대의 탯줄을 다시 받고 태어나/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를 내 라이벌 삼고 싶다./ ‘완전한 언어의 스승이여, 내 입에 아름다운 문장의 태엽을 감아주세요.’/ 이것은 단지 바람일 뿐이지만, 소설은 그렇게 탄생하는 게 아니야/ 이것은 단지 바람일 뿐이지만 시와 희곡은 그렇게 탄생하는 게 아니야!/ 바람만으로도 살 수 있는 것은 부는 바람뿐이다./ 인생은 그렇게 허투루 사는 게 아니다. 허투루 살아지는 게, 아니다./ 적어도 내가 살아온 생은! 자동차 부품을 조립하고 김밥차를 나르고/ 병원 계단을 닦으며/ 우는 아이를 업고 도망치려다 먹일 젖이 없어 돌아오며 살아온 생은……/ *저들은 데모로 변화 가능한 세상을 살지만 내가 살아온 생은……! 말을 말자./ 내 왼발은 성당에 가고 싶고 내 오른발은 교회에 가고 싶고,/ 내 몸뚱어리는 절간에 가고 싶다./ 수녀원이나 기도원이나 법당엔 가고 싶지 않다./ 어떤 욕망의 발현도 열망하기 어려운, 어지러운 세상이다.//
누가 말했지./ <근대 이후 천재는 불가능하다./ 홀로코스트 이후 우리에게 서정이 불가능하게 여겨졌던 것처럼,/ 더 이상의 천재는 없으며/ 천재라 불리는 동시대인들은 잘 깎이고 다듬어 만들어진 목각인형/ 복제인간일 뿐이다.>/ 그 말에 나는 반대하지 않지만 완전히 동의하지도 않는다./ 내게 남은 창조의 세계를 염탐꾼이 발견하기 전 먼저 정복할 수 있다면 좋겠어./ 호텐토투의 비너스, 그 참극을 살고 싶진 않지만 사르키 바트만 그녀의 이름을/ 불러보고는 싶네./ 그렇지만 난 모자라지, 지지리도 머저리 같이 모자란 증상에 허덕일 뿐이지./ 나는 너무 긴, 말을 많이 하고 있어,,,,,,. 시가 될 수 없을 거야.//
평론가는 육체적, 기술적, 기능적 숙련성을 얘기하네./ 그 어떤 금메달리스트가 모두 갖췄을 그 모든 것을!/ 그것과 문학의 차이성을 말하네. 그는 랭보의 ‘나쁜 혈통’과 글렌 굴드를 말하네./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 혼연일체를 위해!/ 내가 작품이 되고 작품이 내가 되는 순간을 위해서/ 나는 지금 죽어야 합니까 아니면, 시대의 무엇과 야합하고 목숨을 담보로 결탁하여/ 비루한 생을 이어가야 합니까?/ 나는 그 어떤 정치적 발언도 하지 않겠으며, 쓰지 않을 것을/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맹세하며!/ 결국에야 암탉의 모가지를 비틀며,/ 누가 *전라도 독립!을 외친다면 경상도 국권 피탈! 응수하여/ 선동과 분열을 대놓고 소리치는 변태 짓을 하다가 총에 맞아 뒈지지도 못할 겁니다./ 인정받지 못할까봐 두렵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인정은커녕 등단도 못한 채로 늙고 죽어갈 까봐 매우 무섭습니다./ 무, 서, 웁, 다, 이게 솔직한 맘입니다./ 인정받지 못한 채로 서른을 넘기고 서른을 넘겨서도 그럭저럭 살고 있다면/ 그것은 내가 이미 엉겅퀴와 독약을 삼킨 좀비가 된 상태일 것입니다./ 나의 창작을 방해하는 것이라면/ 유년에 꿀을 따먹던 소중한 아카시아 나무라도 과감하게 잘라버릴 것입니다.//
피를 몇 번 썰었는지 알 수 없어요./ 성실하고 바른 모범율을 지키며 열심히 살아갈수록,/ 일주일 주기로 나의 입술은 파리해지고,/ 파삭파삭 살갗의 내부가 건조해지고 혈관이 좁아지며/ 온몸이 헐떡헐떡 갈증 나고 손이 덜덜 떨리는 경련에 시달립니다./ 쓰는 것에 대한 금식은 왜 이리 불가능합니까./ 가슴의 통증이 온몸으로 번지고 꺼이꺼이 신음을 토해낸 후에야/ 덜덜 떨리는 손에 펜을 쥐어 잡고 간신히 숨을 뱉습니다./ 마치 알코올을 찾는 술꾼처럼!/ 평론가는 김승옥과 황석영을 말하고, 최인호의 ‘술꾼’을 예찬합니다./ 나는 읽어본 적도 없는, 불에 타 버린 ‘벽 구멍으로’를 찬양합니다./ 마치 그것을 넋 홀려 바라본 적 있는 사람처럼!/ 불 타버린 한 줌 재를 만졌던 사람처럼!/ 벽 구멍은 나의 내부에도 많지만 그 안으로 흘러드는 것들의 이름을/ 나는 무어라 명명할지 몰라 서성거립니다./ 질 구멍에 처박아둔 열쇠를 꺼내 달 구멍에 넣으면 흑암의 자물쇠가 열려/ 우주의 비밀을 조잘조잘 들려줄까요?/ 달과의 삽입 흑암의 잉태 우주의 해산…… 자궁 속에 새벽 별이 뜨고 집니다./ 불 타버린 그림들이 있던 집을 뛰쳐나온 행려병자 나혜석처럼 비틀비틀 거립니다./ 윤심덕의 ‘사의 찬미’를 들으며 늙어가는 여류화가의 초상화를 나는 그리지 못합니다./ ‘아담’은 사람이라는 뜻, 그는 이름을 짓는 자!/ 식물들의 라틴어 학명을 주구장창 외우던 짧은 대학시절,/ 동물의 학명까지도 외울 수 없다는 참담한 자각 앞에/ 나는 사람의 후손이 되길 포기했습니다./ 악수를 하지 않는 글렌 굴드처럼 나는 아무 타협점도 찾지 못했습니다./ 반점과 온점의 사용마저도 오선지를 벗어나선 안 된다는 계율을/ 어떤 노랫말을 지으며 생각해봤습니다./ 범위를 벗어난 슬픔과 환희와 이도 저도 아닌 뒤죽박죽 감정들은/ 육선지나 칠선지를 만나지 못하고 다른 기호로 표시될 뿐이지요./ 터키의 세밀화를 그리는 화가들은 예술가가 아니라 장인이고,/ 원근감이 없는 그림을 그리는 화공들은 자꾸 자꾸 탄생했대요./ 전통과 관습은 혁명을 만나기 전까지는 고귀하고 고유한 것/ 나는 내 몸의 쿠데타를 어찌할 줄 모르겠습니다./ 나는 나쁜 혈통을 바라지 않습니다./ 나는 선한 사마리안이 되고 싶고, 좋은 게 좋은 것인 삶을 살고 싶었을 뿐입니다./ 승계보다 고귀한 건 창조입니다./ 엉터리 손재주를 가진 주제에 감히 피그말리온의 여인을 만나고 싶어요./ 파포스의 남편을 창조하는 게 내 몫이라고 믿지요./ 모든 죽은 천재들의 부활, 아틀란티스의 부활, 모든 산 자들의 요절, 이 땅의 멸망!/ *남무여신의 물이 흐르는 공간을 내가 흘러온 시간에 기워 맵니다./ 평론가는 문학천재란 ‘절대인생감’을 가진 자라합니다./ 아, 언감생심 그것을 갖고 싶습니다. 더는 상처 받기도 주기도 싫어,/ 그럴 힘도 없습니다만/ 그게 가능한 곳은 이승에서 절식한 금욕가들이 영원한 숫처녀들과 동침한다는/ 이슬람 경전 속 천국에나 있을 겁니다./ 숫처녀를 망쳐도 성인이기에 용납 가능한 예술가들의 세계/ 망쳐졌어도 재생 가능하기에 순결에 미련 따위는 없는 예술가들만의 세계/ 대게는 종교가 예술을 탄압하지만 예술은 그 자체로 종교입니다.//
평론가는 말합니다. ‘인간은 이상하고, 인생은 흥미롭다.’//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눈동자가 가렵다는 게 무슨 느낌인지 너는 모를 거야.”/ 친구가 대답했습니다. “ 응, 나는 모르겠어.”/ 안과의사는 내 증상이 별 거 아니라고 했습니다. 나는 그 말에 화가 났지만,/ 그는 나보다 더한 환자들을 많이 봤을 겁니다./ 사후심판 받는 시와 희곡과 소설을 바라지 않습니다만,/ 생전에 이토록 아픈 시와 희곡과 소설을 원치도 않았습니다./ 동시대인과 비슷한 속도로 달릴 수 있었다면/ 나는 애써 내가 중립임을 밝히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정치적 커밍아웃과 엉터리 예술을 즐겨하지 않을 겁니다./ 극좌와 극우의 사잇길에서 예술의 진보와 보수 그 막다른 길에서/ 어떤 갈래꽃도 내 안에선 국화 꽃잎이 된다는 사실을 휘파람 불겠지요./ 그리지 못할 나이테는 없음을 속리산 정이품송 보듯 즐겨할 테지요./ 카타르시스를 달라고 기도한 적 없건만 신은 카타르시스라는 축복을 주겠다며/ 먼저 고통을, 앞선 고통을, 비극을 자꾸 자꾸 내렸습니다./ 질병과 약한 아기들, 게딱지같은 운수,/ 내 머리 위에서 어떤 이들이 나의 인생을 두고 내기 장기 두는 걸 느꼈습니다./ 인생개론 인생총론 이런 과목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살아 백년을 죽어 천년을, 억만 항하사, 아승기, 나유타, 불가사의, 무량대수 겁/ 그 이상을 해산의 고통에 시달리겠지요./ 천재는 하늘이 점지한 사람이 아니라,/ 천 개의 습작과 천 개의 눈물로 이뤄진 자라고 바득바득 우겨봅니다./ 나는 등에다가 제 3의 눈을 새겨 넣었습니다./ 내 뒷모습만 바라보는 자들을 지켜봅니다./ 전생의 나는 승천 못한 이무기였고 그 보다 훨씬 이전인 전생의 나는/ 호모 하발리스의 유산아였습니다./ 어머니는 썩어가는 날 차가운 자궁 밑바닥에 방치했고 나는 황홀하게 죽어갔습니다./ 현세의 나는 그저 범부입니다./ 저임금 노동자의 세계에서 나는 녹슨 불량품이었고, 그래서 백무산을 좋아했지요./ 온몸의 통증이 낫도록 온몸을 빌려 쓴, 온몸 그 자체인 걸작 하나 낳고 싶습니다./ 예술가라면 으레 마땅히 외쳐야할 모든 것들을 위해 이 피를 건배!/ 모든 개인의 실존적 자유와 만유의 평화 평등과 세계의 구원을 위해 브라보! 외치며/ 그저 무겁고 비루한 이 한 생의 사소하고 결연한 행복을, 원해요.//
운명이 내게 말하기를,/ “사소한 불행 따위에 물러서지 않는 네가,/ 사서 한 불행들을 왜 내 탓으로 돌리니?”//
그 모든 業이 견고한 나를 앙모하고 질책하며/ 내 등에 착생해 낙타 굽을 만들며 우는 딱 그만큼만을/ 나는 증명하고 살아낼 겁니다. 그 후에 사라지겠지요./ 사라짐으로써 영원의 초월로 향하겠습니다./ 이 모든 바람은 부는 태풍보다 강하고 그 눈처럼 고요하며/ 카오스처럼 혼돈하며 침묵합니다./ 누가 나의 맨발에 키스하기를 기다리며 미라처럼 누워있지요./ 덜덜 떨리는 손과 파리한 입술을 뉘어놓고 신음하며/ 이 질긴 부패 이 후 부활을 감히 기다려요./ 글쎄, 언제일지 모르는 찰나와 찰나 사이를!//
* 영화 ‘변호인’의 대사 인용.
* 보수를 자청하는 소수의 무리가 ‘전라도 왕따’라는 뜻으로 쓰는 은어적인 말. 그들은 지역감정을 조장하기 위해 전라도와 경상도를 대치시킨다.
* 수메르 신화의 여신. ‘바다’를 뜻하는 남무(Nammu)는 원래 뱀의 여신으로 그려져 왔다. 우주적인 물로서 남무는 안-키(An-Ki), 즉 하늘과 땅을 낳는다.
* 2014년 제3회 웹진 《시인광장》 신인상 당선

쇼팽의 푸른 노트와 벙어리 가수의 서가 / 구효경
다루기 힘든 약대처럼 발굽으로 밀어내고 싶은 책들을 밀어낸다./ 고전의 역사서를 서가 뒤쪽에 처박으면 고전시대가 구석지로 밀려나는 것 같고/ 낭만파의 화집을 다락방에 감추면 낭만주의시대가 어둔 뒤안길로 암전해가는 것 같다./ 책상과 손바닥에 놓인 종이의 혁명이 세계를 싣고나가는 트럭이 된다면/ 월세 방을 옮기며 이삿짐에 고물상으로 실어 보낸 책들로 인해/ 오늘날의 모든 시대는 종말을 맞을 것./ 팔이 무한한 안으로 굽는 시대./ 혼자 비좁은 바깥으로 뻗어가는 괴물의 팔 같은 방 한 칸에서/ 요절한 사람들을 찬양하는 진부한 노래를 불렀다, 불렀다, 불렀다./ 덧없는 노력을 쏟았다./ 지난 달 제출한 이력서는 줄줄이 퇴짜를 맞았고,/ 팔목엔 푸른 피와 냄새로 밴 수음의 흔적들이 선연하다./ 염통을 과녁으로 들고선 저녁, 제 팔자에 적합한 비난의 화살이 穴을 관통했다// 너와 내가 공유한 구멍 속으로 빗방울 전주곡이 흐르고, 비로 습작의 음표들을 잇댄다.//
시를 모르는 여인아, 나는 너의 심장보다 염통을 더 사랑한다./ 이미 관통당한 피를 줄줄 흘려보내며/ 사라진 악사들을 몸 안에서 빼내오는 흑기사가 되려는지./ 기사도의 정신은 죽었고, 너의 염통마저 결핵에 옮기 전 어서 내 몸에서/ 도망치길 바랄게./ 혼자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교실, 하프시코드와 쳄발로가 죽은 묵상을 연주하는 복도,/ 요컨대 그 자리에서 너는 말 없는 얼치기 가수다/ 어눌한 언변 대신 폐활량 높은 단조의 음을 뱉어 대화를 걸어오지/ 너는 아름다운 죽음을 맞고 싶었다고 했지만 과거형의 발언은/ 이미 네가 죽은 사람이며,/ 그 광경이 아름답지 못했다는 치부의 고백 같았지//
창문을 열며, 이런 날의 쇼팽 에튀드는 축축한 느낌이야,/ 이별의 곡도 추격도 꺼내지마./ 버려진 피아노가 죽었을까……/ 벙어리 소프라노와 나이 어린 카운터테너는 반주 없이 대화할 수 있을까./ 사실은 정작 궁금한 건 푸른 노트를 버린 자리에 피어날 곰팡이의 안부였다./ 사라져야할 것은 반주나 말이 아니라 언어 그 자체에 있었는데,/ 왜 버벅거리고 있는 거지./ 휴지통에 구겨 넣은 사직서처럼 몇 번씩 돌출했다가도 폐기되는 지겨운 그림자들,/ 발에서 떼어내어 서가 창고에 가둔다./ 나 없이 그림자만 책들을 먹고 잠들며 책들을 찢으며 자라길. 피아노의 시인이여./ 유일하게 남겨놓은 시대의 유언장처럼 마지막 역설을 토해낸다./ 절대로 독서 따위는 하지 마./ 길은 책 밖에 있어 비상구도 탈출구도 절대 책 안에 존재하진 않지./ 늙은 영감처럼 쉰 소리를 거창하게 씹어대면서도 민망한 줄을 몰라/ 젊은 날 유기했던 콘스탄티아라가 뛰어나와 눅눅히 젖은 노트를 뒤적일 때/ 거미의 입에서 나온 실뿌리 같은 침을 뱉는다./ 벙어리 가수 흉내에 익숙한 푸른색이 점철한다.//
나이만큼 쌓인 악보들, 우울에 대한 짤막한 단상, 실어증과 폭언증 사이의 틈새,/ 문턱을 굴러다니는 활자들, 비로 쓸어내린다//
* 2014년 제3회 웹진 《시인광장》 신인상 당선

천우운풍 / 구효경
천./ 하늘이 말하는 비밀을 듣던 어린 날이 있었지/ 은하가 닫혀 우리 숨겨둔 보물을/ 손 뻗어 찾지 못하게 될지라도/ 그건 아주 먼 훗날일 거야/ 그때엔 너와 나 새끼손가락에 나눠 끼웠던/ 약속, 지킬 수 있겠지//
우./ 비가 내리는 건 어디선가 나 대신 울어/ 흠뻑 젖어주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증거야/ 차오르는 푸른 생일의 잔/ 잊히는 것들을 호명하며/ 눈부셨던 순간에 빈 몸을 던지지//
운./ 구름은 멈춰있는 듯 흘러가는데/ 스물두 개의 주사위를 던졌어/ 얼마큼 많은 칸을 딛어야 너에게/ 당도할 수 있는지 묻곤 했지/ 새하얀 얼굴에 묻은 오늘의 표정/ 영원까지 같이 걸어갈게//
풍./ 바람 부는 저녁의 길목에서/ 주인 잃은 자전거를 고쳐놓은/ 너의 미소와 눈빛을 잊지 못해/ 손 안에 쥐어도 잡히지 않는 것들/ 그러나 여전히, 언제까지나/ 존재하는 것들/ 그것을 너의 이름이라 부르고 싶어// 우리 함께한 노래는 끝없이 살아있을 거야//

파약 / 구효경
내일을 몰라도 내일 다시 모일/ 아이들은 놀이터를 떠나 집으로 돌아갔다./ 하얀 털을 가진 길 고양이 울음소리만 바람을 뛰어넘네./ 노을을 주렁주렁 단 하늘에서 가는 비가 내리네./ 짧은 새끼손가락을 엄지로 어루만지며 입술을 깨물었다.// 지키지 못할 약속은 손가락들에만 남아있다./ 그것은 처음부터 입에서 입으로 옮아온 것이 아니었다./ 다만 체온으로 각인하고 체온으로 기억하는 것이었다./ 때늦은 파혼을 말하고 돌아선 신부의 면사포처럼/ 슬프고 보드라운 물결 빛 바람이 분다.// 나무 이파리 하나를 떼어다 찻잔에 넣는다./ 잎 끝에 남은 나무의 기억,/ 몸 안에서 약동하던 물과 공기와 햇볕/ 모든 것의 섞임과 흘림을 어루만지며 자라던 시절/ 꽃 틔우는 결말은 상투적인 약속이었지만/ 꺾인 결실도 예상 못 할 파약은 아니었네.// 때로는 물방개와 소금쟁이가 등에서 꽃을 틔우고/ 안개와 구름이 타버린 불덩어리를 낳으리라는/ 그런 약속도 있었던 것이다.//

항아리 춤추고 나와라 ㅡ영구 없다. / 구효경
어리숙한 소년의 흉내를 내던 영화감독이 있지./ 영하권의 강추위가 매서웁게 독감으로 느껴져도/ 이무기를 다룬 그 작품의 잔상과 흔적은 선연했다./ 모두가 그를 ‘바보’흉내 내는 코미디언이라 부를 때에도,/ 그것은 *‘바라볼수록 보고 싶은 사람’이기도 했다./ 0과 9가 없는 세상, 모든 숫자가 사라진 세상에서/ 우리는 무엇을 헤아릴 수 있을까,/ 사랑이라면 헤아릴 수 있을까.// 내일 모레, 모래의 수를 셀 수 없고,/ 소멸해가는 먼 곳의 별빛을 셀 수 없듯/ 언젠가 우리는 타자와 나의 수명조차 모르게 될 수도 있다./ 영원한 죽음이면서, 영원한 생명이기도 한 상태,/ 긍정적인 내용을 뒤에 적기로 한다./ 그래야 앞서 적은 슬픔이 완화될 수 있으니.// 완치는 없는 슬픈 무채색 병실에서/ 양치를 하는 양치기 소년을 만나더라도 나무라지 않을 것./ 그 꼬마의 진실은 단지 외로웠던 것뿐이니까./ 때로는 아름다운 거짓말과 황홀한 몽상,/ 현실이 아니라 안타까운, 확실한 예지몽도 있다.// 모든 부귀영화를 내려놓고 세상을 버렸다가 다시 돌아온// 파계승의 눈물 묻은 바랑이 비 묻은 바람에 흩날린다./ 그에게 이제 필요한 건 단 하나, *빵 굽는 타자기뿐이다./ 타자와 나의 영원한 색맹이 탄생하지 않도록./ 0과 9가 없어도 우리는 항아리 춤을 춰서 꾀꼬리를 찾는다./ 꽤 많은 꼬리에 단 방울 소리를 들으며,/ 수원 (0-9 ‘수’와 무량대‘수’)이라는 수컷을 기른다./ 그 반려동물이 암컷을 찾아 떠나도 슬프지 않다./ 우리에겐 드넓은 우리라는 우리만의 나라가 있으니까.// 0화 원화로도 *압화 원화로도 살 수 없는 필름들이 있다./ *나이가 들수록 늘어나는 추억*이라는 기쁜 유채색 치유실에서/ 하얀 치아를 드러내고 웃는 차양의 필름 아래 서있다./ *아이야, 우리 하늘 비 구름 바람으로 가거라./ 유채꽃 핀 섬에 놀러가자, 우리야./ Ps. ‘마음’이 ‘형’ 같아질 모든 미‘래’의 소년을 위해 블루베리 쥬스를 건배!//
* 바라볼수록 보자기: 폴 오스터의 책 제목 * 압화 원화: 꽃 누르미 공예의 원화
* 나이가 들수록 보고 싶은 사람: 필자가 존경하는 P님의 말씀.
* 빵 굽는 타자기: 늘어나는 추억, 필자가 애정하고 동경하는 K님의 말씀
* 아이야, 우리 하늘 비 구름 바람으로 가거라.: 필자가 중3 때 쓴 시 ‘세상에 때 묻지 않은 어린아이에게’의 한 구절 ‘아이야, 우리 하늘로 가거라.’를 변용함. 동시에 쓴 ‘물동이 속에 비친 별’이라는 작품도 있었으나 유실됨.

보내지 않는 연하장 / 구효경
그래요, 부치지 않을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언젠가 이 글이 발송자 없이도 혼자서 제 수취인을 찾아갈 때까지/ 그대에게 묻는 안부는 그저 혼자 듣는 노크며, 음향 없는 앰프며/ 타종이 끝난 후 보신각 안에 묻은 침묵이며,/ 이미 울린 종소리가 박물관에 납관된 옛 종의 후생을 긁어대는 짓입니다./ 오늘로 우리는 나이를 한 살 더 들었습니다./ 나이 든다는 것은, 계단을 밟는 것과 달라서 뒤돌아 내려갈 순 없습니다./ 철든다는 것, 무거운 철을 드는 것보단 편한 일일지 모르지만/ 어쩌면 밟는 순간 사라지는 계단일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사라진 계단이 또 다시 눈앞에 펼쳐져 헐떡거리는 게/ 우리가 살아가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대를 처음 만났을 때 우리는 모두 이십대였습니다./ 내가 초코렛과 함께 보라색 장미를 접어주었던 것을 기억하시겠죠./ 나는 그 꽃말을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야 찾아보았습니다./ '불완전한 사랑' 혹은 '영원한 사랑'이래요./ 이것은 설마 영원히 불완전한 사랑입니까?//
그림자가 커져 사물을 뛰어넘는데도, 빛을 장악할 수 없듯이/ 그대 앞에서 나는 멈췄습니다./ 당신은 일출의 방면으로 나는 일몰의 방면으로 돌아서 떠나갔습니다./ 두 개의 달, 하나의 거울, 태양을 쪼개 반반 씩 그대와 내 심장에 넣었습니다./ 달이 물에 비친 제 모습을 보고 반해 몰락을 감수하며 내려온다거나/ 아니면 그것을 제 자식으로 착각해 첨벙 뛰어들어 구원하러온다거나/ 그런 일은 없습니다. 결단코, 전설 속에서도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듣지 못했습니다./ 피리 부는 광인과 현악기를 켜는 거인이 나타나도 나를 설복할 수 없습니다./ 천상에 있는 호메로스가 그러더라며, 이것은 아주 오래된 이야기이며,/ 내가 신탁꾼의 계시를 받았노라며 들려줘도 믿지 않을 겁니다./ 그대와 나의 경계에는 아름답고 위태로운 유리 막의 축제가 흐릅니다./ 유리 인형이 동그랗게 중력을 견디며 회전화고/ 암끝검은표범나비의 무늬를 베낀 스테인드 그라스가 빛나고/ 나의 우울한 청춘은 시든 모란 잎처럼 저물어 갑니다./ 극단 '청춘'을 떠나올 때의 맨발처럼/ 더럽고 야위고 때 국물 낀 시절을 쉰 목소리로 말합니다.//
어느덧 그대는 삼십대가 되었고,/ 나는 아직 여남은 이십대를 수집할 준비도 자세도 갖추지 못한 채/ 부러진 아킬레스건을 주무르며 멈칫 앉아있습니다./ 지금 이 의자가 내게 꼭 맞네요. ‘자기만의 방’을 벗어난 의자,,,,,,./ 그런 의자에 앉아 있습니다./ 천장도 벽도 문도 없는 야생의 산에서 해오름만을 파수하는 낡은 의자에게/ 내가 겪은 해거름들은, (……)이랬단다./ 늙은 소녀 흉내를 내며 들려주고 아무 답신도 기대하지 않습니다./ 내 이야기만큼 흥미로운 이야기를 누군가 들려주리라고 믿을 수 없습니다./ 가령, 설마 아니기로 그대의 님프여인이 뱀파이어 분장을 하고 춤추던/ 그 어느 궁전의 턱시도 남자가 나타나 먼 곳에 있는 자들의 소식과 안부를/ 들려줘도 내 대답은 시큰둥한 ‘그렇군요’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그렇지만 내가 그 어떤 날의, 내 세상의 이야기를/ 의자와 바람과 솔방울과 지평선에게 들려줘도/ 그들 역시 '그렇군요.'하고 말 뿐이라는 것을 압니다, 압니다마는……/ 내가 밟아 사라져온 계단들이 뭉쳐 눈앞에 펼쳐져있는 보라색 풍경을 사랑합니다./ 흔히들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고도 부르는 그것과 흡사한/ 주황빛 일출을 스물여덟의 방에서 보고 있지요./ 쓰디쓴 커피를 삼키며, 언젠가 알코올을 배우고 싶었던 소녀 시절을 반추하며/ 나의 쓸모없는 젊음을 생각합니다. 덧없이 생생한 젊음이여!/ 탄식은 비관과 희열과 그것들에 대한 하잘 것 없는 예우를 동반합니다./ 누군가 목발을 쥐어줄까요?/ 그리하여 계속 사라지는 계단을 밟아 그대에게로 당도할 수 있을까요?//
새로운 태양을 만들 수 있도록…… 나눠 가진 심장을 기억합니다.//
이를테면 저는 꿈을 꿉니다. 자각몽도 아니어서 매우 날쌔고 견고하고 두려운 꿈/ 안에서, 저는 백남준과 샬럿 무어먼을 봅니다./ 미쳐버린 까미유 끌로델의 얼굴에서 내 이름 석 자를 발견하기도 합니다./ 하얗고 어지러운 병실에 누워 의욕과 생기에 안녕하고 있는/ 나의 말년이 불행할 것을 전주하는 오르간을 마구마구 부서트리고 있는 자가 있고,/ 그가 누구인지 나는 알 수 없습니다./ 이 꿈 속에서 나는 면회 오지 않는 누구를 기다리고, 다시 밝은 아침을 기다립니다./ 눈 뜨면 보라색은 사라져있고, 그저 방에 누운 내 몸을 봅니다./ 나는 로뎅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나는 무엇도 모릅니다./ 사랑, 희망, 꿈, 이런 거창한 추상명사들을 모를 만큼 야위어있습니다./ 그렇다 한들 아직 의자는 부러지지 않았고 난쟁이들을 좋아하며/ 천년에 한 번 뿐인 개기일식과 월식 금환식을 좋아합니다./ 과달카날의 어떤 폭발물을 내 심장에 투하한들/ 그대에게 맡기고 온 반쪽 심장은 살아남을 겁니다./ 그 때 무대에 날 위한 레퀴엠을 올릴 건가요? 춤추는 레퀴엠./ 중세 아라베스크 문양의 드레스를 입고 뱀파이어로 분장한/ 그대의 님프들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그대는 모를 겁니다./ 끝끝내 내 황홀을 전할 수 없었기에./ 샬럿 무어먼의 첼로 소리를 들으며 난 젊음의 안팎에서 늙어갑니다./ 기필코, 나는 로뎅을 사랑한 적이 없습니다./ 나의 어린 애인은 내 발톱과 손톱 안에 숨어있고,/ 그대에게 부치지 않는 이 안서를 나는 고이 접어둡니다./ 맨 마지막 나중에, 일출도 일몰도 아닌 어떤 때, 불현 듯 그대를 찾아갈 겁니다./ 비둘기는 아직 날아가지 않습니다./ 가려운 날개를 긁으며 하늘과 포옹하고 있을 뿐입니다.//

금요일까지 여기 머물러요. / 구효경
이리와, 여기를 만져줘요./ 상처가 매듭처럼 꽉 묶여있는 자리에 그 손가락을 짚어요./ 한 번쯤은 태어나지도 않은 애기들을 걱정하기도 했지요./ 어떻게 내 가슴팍으로 감각적인 주먹들이 쏙 들어올 수 있나 신기해하면서./ 아마도 자리를 바꿔가며 구름과 동침하는 일몰에 대해/ 내가 거추장스럽게 고자질을 했단 걸/ 그 느끼한 주먹들도 다 알고 있었나 봐요./ 고흐의 말동무가 되어주던 고갱도 없고/ 옷을 입은 마야도 옷을 벗은 마야도/ 나랑 상관없는 뭐야, 가 돼버리고만 적이 있어요./ 언젠가는 태어날 아기들을 진심으로 걱정해서/ 혼례는 조촐하게, 하객석은 무인승으로./ 허벅지를 깨물며 적적해하는 강아지처럼/ 귀엽게, 낭랑하게 울고 싶었는데/ 내 상처에는 아무런 결혼식도 없었고/ 그리하여 혼자 아팠네요, 아프다./ 내 가슴팍에 꽂히던 주먹들은 다 토실토실 알밤 같고,/ 웃음이 참 헤펐네요, 불쌍타./ 주먹을 풀고 손바닥을 펴 보인 당신이 내게 원하는 건/ 내 상처 자욱이 위치한 명확한 자리./ 성감대를 주무르듯 하지 말아요./ 그대가 원하는 게 애무라면./ 내가 원하는 게 위무라면./ 예각으로 날이 곤두선 초록빛 태양과 붉은 파도의 불협화음에/ 우리가 마지막 침을 퉤앗! 뱉고 와요./ 달짝지근한 슬픔과 밥그릇에 고봉으로 쌓인 고통의 멍에./ 이름 모르는 고아가 자신의 나이를 잊어가듯, 통증을 잊어요./ 환부를 쓸어달랬더니 되려 깨물고 달아난 손에 난/ 푸른 반점을 더이상 거론하지 말아요./ 다독거리는 바람, 속닥거리는 맨드라미,/ 투덜거리는 캠핑카와, 타지 못한 웨딩카와/ 아무짝에도 쓸모없이 달아나는 닳은 그림자들/ 사이에서 어지럽게 멀미를 앓는 나의 육체는/ 신음을 뱉는 죽은 새의 조각품이 되었어요./ 슬픔과 상처와 혼곤함의 모쥬망,/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애기들의 난산을 예고하며/ 그림자를 닮아가는 하얀 태양의 눈물에도 나는 여전히 아파서/ 이리와, 여기를 만져줘요./ 입덧과도 같은,/ 애증과도 같은,/ 이리와, 여기를 만져줘요./ 유산 당한 슬픔의 꽃들이 내 입술 위로 돋아나는/ 금요일까지 여기 머물러요.//

플랑 세캉스* / 구효경
내 발자국에는 클랩보드가 없어, 지나온 길을 돌아다볼 필요도 없었다./ 후회와 미련, 그 고귀한 이름들을 모셔 담아놓을 향로 하나 없었다./ 밀봉 처리하지 못한 그것들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때/ 추억이라는 신화가 탄생하지만 신은 없어.// 실체 없는 고요와 적막 속에 내동댕이쳐진 알몸으로 울고 가는/ 찰리 채플린들을 난 여러 번 봤다./ 죽고 싶어 미안해, 사랑해서 미안해, 양손에 박힌 못 자국들,,,,,,./ 아가페도 타나토스도 제 이기의 그릇 안에 담기는 지문만 못했다.// 대사도 없는 방백, 눈빛으로 외치는 절망, 괄호 없는 배경,/ 해설 없는 해석으로 서로를 더듬어 읽으려 했지만 눈으로 보는 것은 늘/ 언어 뒤의 장막, 장면 뒤의 전환, 그 모든 게 쉴 새 없었다.// 한달음에 달려온 전차에 중립은 없고, 중간인이 쉴 회색 숲은 없다./ 앞을 보거나 뒤를 보거나 그 모든 사전에 등재된 살아남은 인류여./ 나는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다. 플랑 세캉스, 플랑 세캉스.// 촬영되지도 않은 인생이 상영되는 몽상 속을 살았다./ 나는 너희의 세계에서는 유령, 보이지 않아, 난 혼자였다./ 수 작업한 *리버스 앵글 숏도 없이 오롯이 유일했다.//
* 영화의 쇼트 구성 방법 중 하나. 한 신이나 시퀀스가 하나의 쇼트로 이루어지는 것
* 두 곳에서 마주보는 위치에서 묘사한 장면

*아루엔 / 구효경
dear. 아루엔/ 새까맣고 투명한 눈동자가 희뿌옇게 흐려진,/ 아주 맹랑하고 가끔 조숙한 소녀를 불러 봐./ 언젠가 키 작은 소년이 그 강에 돌을 던졌지./ 그 이름은 구슬강.// dear. 아루엔/ 건조한 사하라 고비에서 말라가는 눈물로/ 낙타풀과 구름선인장을 키워 봐./ 유독히 추운 사막의 밤을 켜켜이 세며 걸어왔다./ 그 이름은 구슬강.// dear. 아루엔/ 1시간을 반쪽 내봐. 30분이나 기다리래./ 빨간 벽시계와 악어가죽 지갑에게 말했다./ 세상에 가짜 눈물은 없어./ 아픔을 대신 어루만지는 인공눈물 만이 있을 뿐./ 그 이름은 아루엔.// from. 내 이름은 구슬강.//
* 히알루론산나트륨 인공눈물 (안구건조증에 처방한다.)

*브릴란테 C.E.A 브론테에 부쳐 / 구효경
샬롯. 그대가 사는 곳의 무지개는 어떠하오./ 내가 사는 곳의 기찻길에서 난 때론 바구니를 들고 쑥을 캤소./ 어느 유년 적 하루엔 그곳에서 크나큰 쌍무지개를 만났소./ 아들이 데려온 유기묘의 눈보다 더 빛났던 이유는 그날 내가/ “나는 구원 받았다.”라고 믿었기 때문이었을 테요./ 영혼의 게토 심장의 홀로코스트를 겪지 않을 줄 알았소./ 좀 더 나이 들어보니 그런 게 아니었소.// 에밀리, 그대가 사는 곳의 밤 대지는 어떠하오./ 내가 사는 수심 깊은 바다에는 한시도 방심할 틈이 없다오./ *꽃별천지를 부르던 죽은 새들과 살아남은 공작새의 날개는 화려하게 빛나오./ 브릴란테,,,,,,.절망과 환희를 노래하던 여중생 시절이 있었다오./ 왜 사람들은 *좋은 끝을 원하면서 좋은 시작을 원치 않는단 말이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그 끝은 심히 창대하리라-/ 이런 성서를 읊는단 말이오./ 알 수 없어도 일부러 그런 건 모른 척할 수밖에 없다는 듯이 굴어왔던 나였소.// 앤, 나는 언젠가 꼭 몽고메리에 가고 싶다오./ 그곳에서 보고 싶은 이의 얼굴을 쓰다듬고 싶소./ 그러나 그 소설은 당신 것이 아니라서/ 나는 ‘애그니스 그레이’ ‘와일드펠 홀의 소유주’를 책애바라 글방에서 구해왔소./ 지금 여기엔 지독한 전염병이 동풍처럼 불고 있소.// 살찐 말과 염소의 젖으로 짜낸 갓난 시절의 마음을 닮은 미음./ 그러고 어느덧,,,,,,./ 내 기억 속에 또렷한, 연민 기울이고 팠지만/ 너무 찬란해서 그럴 수 없었던 나와 비슷한 사춘기를 내 아기들이 눈앞에 두고 있소./ 눈 뒤에 두고 온 날개가 있다면 그대들이 내 우편함에 넣어주시길 당부하오.// 세 자매 이름이 세 박자 느려지는 시간,/ 세수를 하고 잠이 들겠소.//
* 브릴란테: “화려하게”를 뜻하는 악상용어. C.E.A 브론테: 샬롯 에밀리 앤 브론테 소설가 자매를 말함.
* 꽃별천지: 싱어송라이터 ‘주기훈’의 노래 제목. 주기훈의 목소리가 미성이고 가사가 아름답다.
* 좋은 - 창대하리라 :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 욥기 8장 7절의 말씀을 뮤지션 ‘가인’의 노래 ‘돌이킬 수 없는’의 가사로 맞게 변용했음.

19살 소녀의 에로스 ㅡ발렌타인 러브레터 / 구효경
보름달의 체위를 배워요/ 우리는 황홀한 거리에서 마주친 사람과 사랑/ 두 손을 잡고 *비취교 색깔을 믿으며/ *언개송 향기를 맡으며 *기빙족의 시대로 돌아가요/ 나의 애액과 땀으로 그대를 흠뿍 적셔드리고 싶어요/ 매일 그대를 생각하며 달빛 비치는 한밤중에/ 자위를 해요/ 미흡하지만 온몸을 바치고 싶어요/ 달콤하고 따뜻한 그대 품안에서 초콜릿처럼/ 사르르 녹고 싶어요/ 그대 몸 한가운데의 막대사탕// 주고받고 우리 관계가 빛이 날 수 있다면/ 은은하고 소중한 우리의 밀애/ 두 손을 맞잡고 어디에도 현존하지 않는 나라로 달아나요/ 마법으로 다가온 운명/ 그대를 위해서라면 요부라고 모함을 당해도 좋아요/ 포근한 살갗을 더듬으며 눈동자에 비친 날씨를 애무해요/ 검은 꽃을 틔우며 성스럽고 아름다운 천일야화를 써내려가요/ 얼핏 용납할 수 없는 거짓말 같아 보이는/ 고백들이 수런거려요/ 저는 잉크처럼 닳아지고 싶은 걸요/ 정열적으로 타오르는 장밋빛 연서들/ 은밀하고 농익은 침실 곁의 살롱에서/ 커튼을 치고 뜨거운 차를 나눠 마셔요/ 작은 정원을 만든 테라스에서 똑같은 반지를 끼워요/ 한창 시리웁던 열대야가 너덜너덜해지도록/ 그 멋진 이마에 키스를 하며 신사의 비밀을 전해 들어요/ 스킨답서스 화분에 물을 줘요/ 저는 그대를 위한 외발회전목마에 올라탄 숙녀/ 귓가에 입김을 불어줘요/ 작은 키를 그대의 어깨에 맞추기 위해 발꿈치를 들죠/ 높은 구두는 집에 두고 왔어요/ 어디로도 도망가지 못해요/ 그대 가슴에 파묻혀 날아가는 절정을 느끼고 싶어요/ 말없는 눈빛의 대화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어요// 늦겨울의 비가 내려요.//
* 체위의 일종 * 이하 동일 *이하 동일

올랭피아 연회곡 / 구효경
춤추는 육체를 구경하러 오세요./ 빛과 어둠이 절취선 없이도 서로를 도려내는 경계,/ 알몸으로 누운 여인이 말을 겁니다./ 곧 시들 꽃다발을 든 흑인 노예는 순백의 여인을 응시하고 있어요./ 체념한 듯 누워있는 여자에게서 옆집 고아의 어미 냄새가 나기도 하고/ 아무 느낌 없이 스친 거리의 아가씨 냄새도 납니다.// 오늘의 연회는 불편한 자리/ 엇박자의 미뉴에트와 파트너 없이 추는 왈츠를 선보이겠어요./ 역겨운 신 포도주 멜랑꼴리 쥬스를 팔겠어요./ 검은 고양이가 식탁 위에 올라 옆집 여자의 사생활을 읊어주기도 하겠죠./ 인류가 궁금하지 않은 침대의 역사,/ 그게 있다면 소개시켜 주실래요?// 내 배꼽을 낳은 배꼽의 여자와 아버지가 춤추듯 합궁하다 산란한/ 음악과 책력과 화분과 호주머니를 ‘누이’라고 부릅니다./ 파리의 골동품 상가에 있는 그릇의 문양과 이 육체를 바꾸지 않습니다./ 센 강은 말없이 샹젤리제를 지나가는데,/ 콩코르드 광장에서 길 잃은 소년이/ 호객꾼의 손에 이끌려가며 억지로 청년으로 변해버린 광경을/ 이 육체는 고발하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나무라지 않고 아무도 모욕하지 않고 순합니다.// 우르비노의 비너스가 아니라서 외면한 곳에 문득/ 내 아버지와 동침한 옆집 여자의 초상화가 걸려있습니다./ 파트너도 없이 추는 왈츠, 엇박자 미뉴에트/ 오늘의 연회곡은 선량한 시민들에 걸맞게 무죄입니다./ 파리지앵의 취향은 우아하고 밤과 낮처럼 또렷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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