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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1호 남자는 30년 넘게 군 장교로 복무를 하고 전역을 했다. 퇴직이 아닌 전역이란 언제든 전쟁이 일어나면 다시 군인이 된다는 거라고 한다. ‘나라와 국민을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책임을 다한다’라는 군인 정신이다. 피 끓는 사관생도 때 각인되었을 것이다. 환갑을 넘었지만, 근검절약이 입력된 정신도 변함이 없다. 그때 익힌 살림이 능숙 능란하다. 다리미질, 바느질, 빨래 널기, 개기, 청소하기, 쓰레기 비우기 등등 각도 있게 흐트러짐 하나 없다. 함께 사는 여자가 하는 살림 솜씨는 마음에 안 들어 이런 일은 남자가 도맡아 한다. 그렇다고 여자가 덜렁거리며 살림을 못 하는 것이 아니다. 나름 깔끔하고 꼼꼼한 스타일이다. 여자가 남들 보기엔 편한 것 같지만 마음이 편치 않다. 은근히 신경이 거슬려 짜증 난다. 때로는 탈출구를 찾다가 뒤통수에 대고 가시를 쿡쿡 찔러보지만 먹혀들어 가지도 않고 가시 저 혼자 부러지고 만다. 그러던 차에 그 가시가 꽃대가 되어 꽃이 피었다.

육십 대 중반에 들어선 남자는 여전히 게으름을 피우거나 나태한 생활을 스스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전역한 후 영어 공부하러 필리핀으로 어학연수도 다녀오고, 다시 중국에서 대학에 들어가 중국어 공부도 하고 돌아왔다. 그 이후에 삼성생명에 입사하고, 중국어학원도 운영하고, 전자입찰도 해보고 부산하더니만, 군인 정신에 어긋나는지 도통 흥미가 없어 보인다. 여자는 쉼 없이 부산을 떠는 남자가 미우면서도 안쓰럽다. 측은지심에 아들 보살피듯 보살핀다. 그러다가 이게 뭐지 싶다. ‘물방개처럼 뱅뱅 돌면서 누가 그렇게 살라고 했나.’ 군인연금으로 생활하면서 유유자적 살라고 하건만 소귀에 경 읽기다. 차라리 눈에 안 보이면 마음이라도 편할 건데 함께 살고 있으니 어쩌랴. 속에서 열선이 터지지만, 제풀에 지친 여자는 남자한테 온갖 신경을 쓴다. 혹여 덥거나 추울까 봐, 초라해 보일까 봐, 사시사철 제법 폼나는 옷도 사다 준다. 그러고는 된통 당한다. ‘옷집에 애인 있나? 한 번만 사 오면 가위로 잘라 버린다. 그 돈으로 당신 옷이나 사 입고 내 옷은 사지 말라고 했잖아’ 경상도 사나이 불뚝 성질로 함께 산 여자 가슴에 화딱지 불을 지핀다. 남자는 그러면서도 사다 준 새 옷만 줄곧 입고 다닌다. 옷장에 옷이 없는 것도 아닌데 단벌 신사다. 그런 행동에 여자는 또 속이 탄다. 이 속도 모른 여자 언니는 ‘너만 옷 사 입지 말고 제부도 옷 좀 사줘라’라며 불난 집에 휘발유를 뿌린다.

이제 이 남자와 여자는 떨어져 있게 되었다. 여자는 뒤늦게 팔자가 피었다며 가뿐한 마음으로 연방 지인들에게 차를 사거나 밥을 산다. 근무처가 타지에 있는 작은 기업체 월급 사장으로 제안이 들어와 떨어져 살게 되었다. 연봉도 60대 나이에 현역 수준에 가깝게 준다니 그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 그렇지만 사장이라고 사택이 나오거나 차가 따로 나온 것은 아니다. 사적인 것은 자비로 남자가 알아서 다 갖춰야 한다. 그래도 이게 어디인가. 채용해준 방위산업체 회장이 여자도 잘 아는 남자의 친구이지만, 절을 열 번이라도 하고 싶다.

가슴 한쪽에 솟구쳐 있던 가시가 녹아내린다. 퇴근하여 운동장 열 바퀴를 달리기 하던가 말던가, 추레하게 옷을 입고 나가 회식을 하든가 말든가 눈에 보이지 않아 우선 편하다. 그렇지만 걱정이 앞선다. 밥은 잘 챙겨 먹은 지, 옷은 잘 입고 다니는지, 사무실에서는 별일 없는지, 여자는 기우가 된다. 남자도 여자보다 덜 하는 것 같지만 마찬가지다. 퇴근하여 매일 안부 전화로 집안일에 마침표를 찍는다.

지난 주말이었다.

남자가 사는 원룸으로 모자지간인 아들과 여자를 초대했다. 왕복 차표를 끊어주고 부산에서 경북 문경 거리의 중간인 ‘김천구미역’까지 마중 나온 남자는 몇십 년에 만에 가족 상봉한 것처럼 싱글벙글한다. 여자는 왕비가 되고 아들은 왕자가 된다. 평소 절약이 몸에 배어 있는 남자는 가족 앞에서 아낌이 없다. 그 어떤 부러움도 없다 한다. 이름난 식당을 찾아가 최고의 점심과 최고의 저녁을 사준다. 바깥에 어둠이 짙어지자 남자는 여자와 아들에게 오만 원씩 밑천으로 나눠주고 세 명이 고스톱을 치자고 한다. 여자는 흥미가 없지만, 부자지간에 눈이 반짝반짝 빛이 나서 어쩔 수 없이 응한다. 여자는 40분쯤 하다가 피곤하다며 슬그머니 빠진다. 부자지간에 서로 눈을 밝히고 셈을 하면서 한 시간 가량 더 한 후 세 명이 함께 원룸에 누웠다. 이 그림이 양서良書가 된다. 여자는 36년의 결혼생활과 애태우다 태어난 30대 초반인 외아들의 얼굴에서 희로애락을 읽는다. 고맙고 미안하고 감사함으로 만감이 교차한다. 왕비가 아닌 아내이며 엄마의 자리가 새삼 행복하다.

문경새재의 시린 늦가을 바람이 아침을 연다. 남자는 아침밥상을 차려 놓는다. 여자는 가족과 떨어져 타지에서 혼자 사는 남자를 위해 따뜻한 밥상을 차려주고 싶거늘, 부엌에 얼씬도 못 하게 한다. 밥상이라고 해봐야 여자가 집에서 만들어 보내준 김치, 장조림, 땅콩 조림, 양파 초절임, 연근조림, 멸치볶음, 시금치나물, 마른김이 전부인 소박한 잡곡 밥상이다. 솔선수범하는 아빠의 일상이 아들의 눈에는 최고다. 여자가 약이 오를 정도로 무조건 남자 편이다. 아들 바라기와 아빠 바라기인 부자지간은 서로 부둥켜안고 등을 다독인다. 아기 때부터 지금까지 30년 넘게 꾸준히 해온 부자지간의 스킨십은 자연스럽다. 여자는 그 모습을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겸연쩍게 쳐다볼 뿐이다. 더 밉상인 것은 ‘엄마는 알아서 잘 사니까 걱정이 안 되는 데 아빠가 늘 걱정이다.’라며 언제 어디서 무엇이든 남자 뜻만 살피고 혹여 어디 편찮을까 봐 염려한다. 희희낙락 서로 짝짜꿍이다. 여자도 아들한테 소홀함 없이 잘 챙겨주고 특별히 잘못한 일도 없는데 기분이 언짢다. ‘부자지간에 둘이 나가서 살고 나는 혼자 살고 싶다.’라며 쏘아붙인다.

집에서 기른 애견 포미(포메리안)도 남자한테만 충성이다. 세 명이 외출했다 함께 집에 들어오면 포미 눈에 보이는 것은 남자뿐이다. 여자와 아들은 무시라도 하는 듯 안중에도 없다. 남자한테 눈을 고정해 놓고 졸졸 따라다니면서 꼬리가 부러질 정도로 살랑댄다. 몸을 움츠리고 흔들어대면서 헤헤 발발거리며 오줌까지 저리고 난리다. 참 가관이다. 이 또한 남자보다 여자가 포미에게 더 친절하고 다정하게 불러주며 사랑하는 마음으로 쓰다듬어주거늘, 모를 일이다. 그럴 때마다 남자가 마술쟁이 같고 욕심쟁이 같아 기분 나쁘다. 괜히 당하고 있는 허수아비 같다. 가만히 보니 그 뿔뚝 성질을 아들한테나 포미한테는 한 번도 부린 적이 없다. 마냥 싱글벙글하다. 여자한테만 부린 뿔뚝 성질이 허수아비를 만든 무기였다. 이제 그 무기를 한 공간에서 매일 볼 수 없게 되자, 다크서클이 져 있던 여자는 눈빛이 반짝이고 입가에는 웃음이 붉은 버찌처럼 피었다. 포미가 여자 곁에 와서 헤헤거리며 살랑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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