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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창세 신화집 『산해경(山海經)』에 등장하는 제강(帝江)은 자루처럼 생긴 몸매에 다리가 여섯, 날개는 넷이지만 얼굴이 없다.


남해를 다스리던 숙(倏)과 북해를 다스리던 홀(忽)은 만날 때마다 제강으로부터 후한 대접을 받았다. 눈 코 입 귀가 없는 제강이 세상을 제대로 받아들이기가 얼마나 불편하겠는지 딱하게 여긴 둘은 이목구비를 뚫어주기로 하였다. 하루에 한 구멍씩, 마지막 일곱째 구멍이 뚫리는 순간 제강은 죽고 말았다.


듣도 보도 못하고, 냄새조차 맡을 수가 없어도 제강은 노래에 맞추어 덩실덩실 춤을 추었었다. 부드러운 음률에서는 춤사위가 느리고 가벼웠다. 날개에서 나오는 바람에 맞추어 꽃들이 피어나면서 향기를 흩뿌렸다. 격정적인 춤사위로는 비바람을 거세게 몰아왔다. 카오스의 몸통 이라 여겼던 제강이 세상과 소통하는 코스모스의 이치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들은 깨닫지 못했다.


세상을 제대로 읽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게 앎이다. 소금물은 마실수록 갈증을 더한다. 지식 또한 만족을 모른다. 앉은 자리가 높아질수록 보아야 할 곳은 늘어나고, 이것을 읽어내기 위해서는 앉아서도 천리를 내다볼 지식과 지혜가 절실히 요구된다. 삶은 앎을 쌓아가는 피나는 노력의 과정인지도 모른다.


잘 갖추어진 서재를 선망하는 시절이 있었다. 돈에 구애받지 않던 어느 졸부는 서점에 들러 점원에게 서가를 가리키며 “저기서부터 여기까지 주세요.”라고 주문했다는 우스개가 회자되기도 했다. 서재를 잘 꾸민다고, 장서에 담긴 그 지식이 온전히 자기 것이 될 수 없음에도 지식에 목말라 하는 사람에게는 책이나 서재가 지식의 상징이었다.


오늘날은 만 원짜리 USB 한 개면 평생 익힌 지식을 저장하고도 공간이 남는다. 개미처럼 지식을 축적하기보다는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을 검색하면 훨씬 다양한 지식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 머릿속에 축적된 지식보다는 검색 실력이 돋보이는 거미의 시대이다. 인터넷이나 스마트폰도 인공지능의 한 범주인 만큼 일단 검색을 하면 AI는 내가 관심 두는 분야로 받아들여 주문하지도 않은 새로운 정보를 지속적으로 보내준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은 모두 똑똑하다. 나 역시도 이런 이기들 덕분에 실재보다 더 똑똑해졌다. 실은 가똑똑이다. 이런 내가 겁이 난다.


우리가 밝혀야 할 궁극적인 카오스는 우리에게 실체를 드러내지 않은, 우리의 해석을 기다리는 삶이다. 정답만 있는 게 아니라 해법도 있다. 정답보다 더 실제적인 명답도 있다.


인생은 여행길과 같다. 수많은 갈림길을 만나고 그때마다 선택을 한다. 때로는 선택하지 않음마저 선택해야 한다. 똑똑해진 내가 쉽게 선택한 일이 시행착오의 연장선상에 놓였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세상과의 조우는 늘 불안불안하였다. 선택은 언제 나 나의 몫이지만 큰 난관이다. 로마어로는 discrimen, 칼날 위에 선다는 뜻에 수긍이 간다. 지식이 넘쳐나는 시대이건만 여전히 난 선택 앞에서는 미숙한 존재이다.


피 끓던 젊은 시절, 바스러질 듯 뼈만 앙상한 두 노인이 다투는 모습을 지켜본 적이 있다. 당장이라도 주먹이 나갈 기세였으나 싸움닭처럼 가슴팍만을 내밀었다. 용하게도 황금분할의 거리를 유지했다. 나 속에서 발견되지 못한 투지가 신기하여 한참이나 자리를 뜨지 못했다. 돌아보니 너인 줄로만 알았던 그 투사가 나 속에도 있음을 알게 된다.
큰 나무 밑에서 득 보는 나무는 거의 없지만, 큰사람 아래서는 득 보는 사람이 많다. 친구 K는 유력한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주저하는 나 같은 아웃사이더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유력자 앞에 줄을 서느니, 홀로이기를 자처한다. 어깨가 처진, 너가 훨씬 나답다.


'있는 듯, 없는 듯'이 나 본연의 모습이라 여기며 여기에 머물려 했다. 세상에 나서기를 많이도 망설였다. 포기했음이 더 적절한 표현이다. 하지만 멋있는 사람들, 그들은 희생(犧牲)을 통해 희생(喜生)을 꿈꾸는 당당한 사람들이다. 환호 속에서 하늘 향해 두 팔 크게 뻗어 올리는 이를 보면 그를 닮고 싶었다. 닿기는 어렵지만 너인 듯한 나가 되리라 속셈을 몇 번이나 해보았다.

 


너는 또다른 나!
너와 나,
그 경계가 모호해졌다.
조명 받는 너를 보면 나인 듯하고,
어깨 처진 너를 봐도 나인 듯하다.
너와 나는 이미 우리가 되어 한 우리 속에 있다.
                                                             ㅡ산문집 『너인 듯한 나』(2014) 머리말 중에서

 


시시각각 만나게 되는 파토스(pathos)의 세계를 지식이나 경험에서 오는 익숙함 때문에 신호적으로 반응하거나 해석하려는 것을 경계한다. 그럼에도 어느 사이 나는 또 익숙한 길로 들어선다. 새로운 관점으로 파토스를 읽고, 로고스(logos)로 의미망을 구축하여 에토스(ethos)로 나를 돌아보아야 한다.


세상이 물어다 주는 어설픈 지식에 편승하여 아는 체하곤 상처를 받기도 한다. 여전히 세상은 호락호락하지가 않다. 하긴 세상은 나란 존재는 아랑곳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귀뜸도 하지 않는다.


글쓰기란 내 삶에서 세상을 읽는 창이자, 세상과의 소통 방향을 잡아 주는 나침반이다. 나 속에서 너를, 너 안에서 나를 발견하면서 위안과 격려를 얻는다.


자동차 열쇠를 강의실에 남겨둔 채 현관문을 나선 적이 있다. 야간이라 자동으로 잠기고 밖에서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당직 직원이 아날로그 시대의 만능키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열쇠가 수많은 요철을 보여주지만 열리는 지점은 한 곳이란다.


너와 나, 굳게 닫힌 문이 가로 놓여있어도 만능키처럼 열리는 한 지점이 있을 것이다. 바로 경청과 겸손이다. 고개를 치켜드는 나에게 나 속 의 나가 들려주는 말이다.


무슨 일에나 한 템포씩 느린 나, 온전히 너가 되어 착한 바보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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