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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오래된 기억 / 강순지

부흐고비 2022. 4. 21. 08:21

눈이 내렸다. 새벽부터 시작된 눈은 아침나절까지 계속 내린다. 귤나무 사이가 하얗다. 샛노란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고 풍채 좋게 가지를 늘어뜨린 나무는 눈 속에서도 여유롭다. 고된 세월을 살아낸 생명이 뿜어내는 힘이랄까. 앙칼진 겨울바람에도 ‘이쯤이야!’ 하는 배짱이 느껴진다.

창밖으로 시선을 두며 찻물을 올린다. 잠시 후 주전자가 뜨거워진 몸을 떨며 수증기를 토해낸다. 들썩이는 주전자 뚜껑 사이로 뿌우우 기적 같은 소리가 가파르게 울린다. 그날도 눈이 왔었지. 기억은 숨 가쁜 열차를 타고 눈 오는 이른 아침에 도착해 있다.

여덟 살 되던 해 겨울, 며칠 동안 내린 눈으로 동네는 온통 하얀 눈밭이었다.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빨리 일어나라. 얼른 일어나!” 기상나팔 같은 어머니의 목소리를 두어 번은 듣고서야 깼을 잠이다. 정지문 틈으로 아침밥을 하는 연기가 꼬리를 길게 빼며 허공 속으로 흩어진다. 정지는 밖거리 방에 딸려있어 마당을 가로질러야 한다. 눈이 무릎까지 쌓였다. 걷는 사이에 눈이 발등을 타고 발가락 사이로 사르르 녹아든다.

정지문을 열고 들어서다 멈칫했다. 아궁이 속 검불이 불꽃을 피우며 벌겋게 혀를 빼고 있었다. 아궁이 곁에 앉아 어머니가 남동생에게 뭔가를 먹이고 있다.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난다. 기름 냄새가 배어있는 갈색빛이 도는 건 참새고기일 것이다. 며칠 전 이웃집에 ‘생이를 잡거든 두어 마리 팔아 달라.’고 했다던 어머니 말이 생각났다. 나는 초대받지 못한 손님처럼 오도가도 못하고 문 입구에 멀뚱히 서 있다.

“이건 약이여. 약이렌 생각허멍 먹으라.”

어머니의 손놀림은 자식을 구하기 위해 제물을 바치는 신성한 의식처럼 엄숙하면서도 민첩했다. 조그만 날짐승을 살 점 하나 남기지 않고 뼈까지 온전히 다 먹게 했다. 오물거리는 아들의 입을 보며 내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어머니는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아궁이에서 빠져나온 재와 매캐한 연기가 마당으로 슬금슬금 빠져나간다. 마당은 동화 속 풍경처럼 하얗게 빛난다. 고무신 안에서 꼼지락대는 맨발이 유난히 시렸다. 그 겨울, 어머니는 동생에게 참새 몇 마리를 더 구해 먹였다.

이 기억은 자란 후에도 나를 그날의 정지문 앞에 세워두곤 했다. 이해를 못 할 일도 아니다. 어머니의 심정을 모르지도 않는다. 딸만 내리 넷을 낳고 대가 끊어질 참에 낳은 아들이다. 세상 전부였으리라. 아들을 못 낳는다고 받은 수모와 설움 끝에 낳은 아이였다. 한라산 자락에 있던 영험하다는 기도원을 찾아 몇 달 동안 산신 기도를 올리고 낳은 귀한 자식이었다. 제물 구덕을 지고 차가운 새벽 공기를 가르며 어두운 산길을 숨 가쁘게 오르내렸으리라.

동생은 나와 두 살 터울로 태어났다. 태어나서는 몸이 약해 어머니 애를 태웠다. 돌이 지나고 일곱 달이 더 지나서야 걸었다고 하니 어머니 속이 오죽했을까 싶다. 아들을 지키기 위해 어머니는 발을 동동거렸다. 넋 들이는 할망을 찾아 공 드리기는 부지기수다. 동네 약방은 물론이고 침놓는 의원네 집 문턱이 닿도록 드나들었다. 용하다는 데는 모두 찾아다녔다. 그리고 겨울에는 어린 자식 보양하려고 작은 날짐승을 구해 먹였다.

어느 날, 어머니에게 농담처럼 그날의 기억을 얘기한 적이 있다. 섭섭하고 야속했다고. 어머니는 “아이고 나 애기야. 그걸 약으로 멕엿주. 느 안주젠허여시크냐?”라고 푸듯이 말한다. 차별받은 모든 기억을 상기시키며 항변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힘든 삶에 비하면 나의 상처 따위가 그 무게에 비할 바냐. 먹을 게 귀했던 시절, 아들을 귀히 여기던 시절, 어느 집에서나 있을 흔하고도 케케묵은 이야기가 아니냐.

시멘트로 매끈하게 봉합한 아궁이처럼 야속하고 섭섭했던 기억 위로 이성이라는 시멘트를 바르고 단단하게 봉해버렸다. 하지만 어머니 마음은 늘 아들에게 기울어 있고 내 가슴속에서는 미처 타지 못한 불씨가 살아나 탁탁 불꽃이 튀곤 했다.

시간은 약이고 선생이다. 벌겋게 피던 불꽃도 시간 속에서 희석되고 깎이고 사그라들게 한다. 시간은 또 다른 기억을 불러내고 기억은 또 다른 기억으로 연결된다. 잊고 있었다. 연기를 핑계로 눈물을 흘리고 조용히 닦아내던 어머니 뒷모습을 외면하고 있었다. 그날도 어머니는 눈물을 닦던 손으로 콧물을 팽하고 풀어 마른 솔잎에 닦았다. 마른 솔잎은 아궁이에서 불꽃으로 활활 타올랐다. 어머니의 눈물은 그렇게 가려졌다.

내 상처를 보느라 외면했던 기억, 나는 걱정시키지 않고 자랐을 거라는 착각, 당신은 배고팠던 기억에 치를 떨어도 내겐 배고팠던 기억이 없다는 걸 알아채던 날의 미안함, 그 모든 기억 속에 어머니의 사랑이 있었다. 그걸 깨닫고 나서야 나의 어린 영혼은 연민의 숲에 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나는 왜 깃털보다 가볍고 비루한 기억을 붙잡고 있었을까.

죄책감이었다. 그녀의 불행은 나 때문이라고, 내가 아들로 태어났거나 동생이 먼저 태어났더라면 좋았겠다. 그랬다면 삼대독자였던 아버지가 아들을 얻는다는 핑계를 대며 떠나지 않았을 거야. 부엌 가운데 주저앉아 가슴을 치며 우는 그녀를 보며 나는 종종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죄책감의 무게만큼 사랑받고 싶었다. ‘네 탓이 아니란다.’라고 말해주길 바랐다. 당신의 무릎 사이에 끼어 앉아 주는 걸 받아먹고 손가락에 묻은 기름기마저 핥으며 느끼는, 당신의 눈에서 얼굴에서 퍼지는 미소로 내가 당신에게 만족한 존재라는 걸 온몸으로 확인하며 느끼는, 그런 사소하고 소박한 사랑을 느끼고 싶었다. 어린 영혼은 나도 봐달라고 오래된 기억을 부적처럼 붙잡고 그날 그곳에 오래도록 서 있었다.

차를 마시며 생각한다. 어머니도 그 시절이 그리울까. 아궁이는 봉합하여 싸늘히 식었는데 어머니 가슴에는 당신의 젊었던 기억과 뜨겁던 삶의 발자국들로 여전히 검불이 활활 타고 있으려나. 그날 마당으로 흩어지던 희뿌연 연기를 따라 어머니의 젊은 날에 가 닿고 싶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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