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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천서봉 시인

부흐고비 2022. 5. 2. 10:05

천서봉 시인
1971년 서울 삼청동 출생.

2005년 《작가세계》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서봉氏의 가방』와 포토에세이 『있는 힘껏, 당신』이 있음.

이마건축사사무소 대표. 건축사

 



그리운 습격 / 천서봉
破片처럼 흩어지네, 사람들/ 한여름 처마 밑에 고드름으로 박히네. 뚝뚝,/ 머리카락 끝에서 별이 떨어지네./ 흰 비둘기 신호탄처럼 날아오르면/ 지상엔 금새 팬 웅덩이 몇 개 징검다리를 만드네./ 철모도 없이, 사내 하나 용감하게 뛰어가네./ 대책 없는 市街戰 속엔 총알도 원두막도 그리운 敵도 없네./ 마음 골라 디딜 부드러운 폐허뿐이네.// 빵 냄새를 길어 올리던 저녁이/ 불빛 아래 무장해제 되네. 사람들,/ 거기 일렬의 문장처럼 서서 처형되네./ 교과서 깊이 접어 둔 계집애 하나 반듯하게 피었다/ 지면 사랑아, 모든 첫사랑은/ 아름다운 패배였을까./ 나는 홀로 건너가는 殘兵처럼 남아,/ 빵집 앞 사거리 침묵이 침묵을 호명하는 낮은 소리 듣네./ 어둠이 빵을 굽고 그리움 외등처럼 부푸네.// 소나기의 습격을, 누구도 피할 수 없네.//
* 2005년 《작가세계》 신인상 등단시

폭설 / 천서봉
1.// 길이 낮게 들썩인다. 폭설이 시작되자 밤의 나무들은 모두 街燈 아래로 모여든다. 먼 곳의 숲이 어진 나무들을 모아 이름 없는 산이 되고 스스로의 경계를 지우는 동안 나는 점찍을 수 없는 어떤 나라의 낡은 지도를 펼치곤 하였다. 어머니, 제발 엔카 좀 그만 부르세요. 그립지 않는 것도 가끔은 그리운 밤, 화해나 용서 같은 말에 밑불을 놓고 창 밖으로 혀 내밀면, 닿을 수 없는 공중에서부터 눈발은 거친 둔덕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와르르 무너졌다가 다시 튕겨 오르는 白髮, 틈새마다 바람이 푸르르 끓다간 소리 없이 사라졌다. 그만 자려무나.// 쉬 붉어진 알등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밤새 더러워진 문자들을 닦거나 숨 죽여 지도를 그리는 일, 길은 마른 오징어 같았다. 쪼그라든 빨판 같은 어머니 기침 소리에도 기억은 총총 토막 나곤 하였다. 가령, 지면 위로 손바닥 흔드는 낙엽의 고별이나 어머니의 잠 속을 퇴각하는 늙은 군인들의 발자국 따위, 그 위를 덮으며 눈은 가등 아래서 한 번 더 내린다.// 고단한 主語들이 부드럽고 아픈 묘혈 짓는다. 희고 둥근 창 밖으로 밤새 미완의 빛들이 절뚝이며 흘러 다녔다. 무례한 손전등처럼 더듬어보는 아랫목 어머니 모로 누우신 능선 본다 길이, 아득하다.//
* 2005년 《작가세계》 신인상 등단시

청동기마상 / 천서봉
자주 머리가 무겁다. 11월의 거리는 내게 금지된 약물을 권하거나 혹은 침묵한다. 플래카드가 아니다. 저 나무와 나무의 귀에 걸려 있는 흰 마스크, 아무래도 좋다. 거리에 관하여 나는 그 일부만을 긍정하므로. 끄덕끄덕 햇살을 털어 제 뿌리를 덮는 나무들, 그러나 한때의 빛나던 은빛은 금방 사라진다. 나의 계통수는 검고 자잘한 그늘의 맛에 익숙하다. 나무는 가끔씩 마른 시위를 당겨 하늘 높이 새들을 쏘아 올리지만 화살 따위는 차라리 관념에 가깝다.// 한 연대의 슬픈 계보처럼 풍경은 바람을 거느리고 바람은 속도를 거느리고 죽음을 거느리고 다시 죽음은 죽음의 종복을……, 느릿느릿 구름 거푸집들이 녹슨 풍경을 낳는다. 거리마다 딱딱한 고치들, 바람을 덮고 잠이 든다. 둔부를 들썩거리면서, 움켜 쥔 손아귀의 밤을 당기면서, 세월은 꼭 그만큼의 보폭을 늘려왔을까.// 그러나 11월, 거리는 아무런 말이 없다. 뾰족한 손가락 끝에 오소소 바람 긁힌다. 말 타는 소리도 없이 나무들은 그리움 자꾸 쏘아 올린다. 무거운 투구를 쓰고 밤은, 텅 빈 家族史의 안쪽을 걸어다닌다.// 한꺼번에 발산하는 푸른 새들, 흩어진 家系처럼 어지럽다.//
* 2005년 《작가세계》 신인상 등단시

바람의 목회 / 천서봉
붉은 창문들 저무네. 거리엔 부옇게 물길이 번지고 벗겨진 대지의 표면이 비늘처럼 흘러가네. 햇살의 따가운 못질 뒤에도 나무들은 자꾸만 제 잎 쥐고 휘청거리네.// 버려진 오르간처럼 켜켜이 쌓인 공사장 파이프들이 저녁을 연주하네. 노을 따위를 발음하면 삶은 늘 뿌리부터 뒤척인다고, 저기 어깨 둥글게 웅크려 철야기도를 준비하는 가로수.// 공중을 만지는 평화로운 연기를 보네. 바람은 오후 6시를 읽는 기술, 혹은 복음. 흔들려야지. 흔들려야지. 깃대처럼 골목에 나를 꽂아두네. 떨어져 빈 나뭇잎 자리까지, 다만 모든 것이 바람의 영역이네.// 늦은 상점의 문이 스르륵 밀렸다가 절로 닫히네. 누구일까. 누구일까. 어둠의 긴 목이 자꾸 기울고 사람들은 정물처럼 늙어가네. 모두가 바람의 존재를 믿었지만 아무도 그의 뼈마디를 보지 못하네. 푸르르,// 저마다의 십자로를 건너는 시간, 허파꽈리처럼 웅크려 핀 생의 바람꽃들, 지천이네. 자라, 자라, 잠들지 않는 한밤의 환한 集會를보네.//
* 2005년 《작가세계》 신인상 등단시

나무에게 묻다 / 천서봉
나는 나의 아무것도 나무와 바꿀 생각이 없으나/ 그가 꿈꾸는 것들을 물어 본 적도 없다.// 스님들은 일찍부터 禪房에 들었단다./ 지나가던 보살에게 위치를 묻자/ 낮지 않은 돌담, 속세를 막아서는데/ 천천히 고개 돌려보니/ 담장 위로 낯을 내민 대숲이 오히려 나를 보고 있다./ 앉았던 돌무지 위를 추스리며 내가 다가가자/ 대숲은 바람 지는 곳을 가리키며 이내 서걱거리고/ 사백 년이 넘었다는 느티나무는 그저/ 소소한 웃음만으로 제 주름 누르고 섰을 뿐이다./ 나무들은 언제 이곳에 처음 뿌리 내렸을까./ 나뭇잎만큼의 자잘한 햇살 밑으로/ 세월의 갈피를 펼치고/ 섬세한 잎맥들의 반흔을 짚어 가면/ 뒤바뀐 생의 主語들이 왈칵 쏟아져 내린다./ 언젠가 내가 게워내던 순한 연둣빛/ 마른 가지를 닮은 사람 하나/ 정갈한 싸리비 자국을 밟고/ 한 번쯤 뒤돌아보며 스쳐가던 기억,/ 하늘에 닿지 않아도 가늠할 수 있던 내 오래된 궤도의 연원/ 위를 까치 한 마리 선 긋고 달아난다.// 적요한 오후, 적멸궁에 매달린 물고기가/ 제법 소금기 가신 투명한 파동을 일으킨다. 이제,/ 나는 묻고 싶다. 우리의 모든 길은/ 어떻게 圓을 그리다 다시 그 자리에 숨쉬게 되는지./ 슬쩍 돌아앉는 나무가/ 둥근 햇무리, 後光 아래로 들고 있었다.//
* 2005년 《작가세계》 신인상 등단시

너무 오래 사랑하다 / 천서봉
夏// 햇볕 속에서 달콤한 복숭아들이 얼굴을 붉혔다. 두꺼운 종이로 겉포장을 해도, 시집(詩集)은 금방 티가 났다. 시는 뭣 땀시 쓴댜- 단골 백반 집 아주머니 말 근처에서 몇 번의 사랑이 지나갔다. 거짓말하던 서정들, 건너 과일가게엔 복숭아들이 허불허불 웃고 있었다. 일식이었다.// 秋// 위통처럼 걸린 장마전선에 며칠을 집에서 뒹굴었다. 수음만으로도 천장은 배가 불러왔지만 방생한 물고기들은 바다로 가지 못했다. 숨이 막혔다. 기도와 식도 사이에서, 홈통과 지붕 사이에서, 은밀한 내통이 울컥거렸다. 매직아이처럼 벽지는 지도를 밀어 올리고 가을의 나무들이 또륵또륵 목구멍 가득 혈토(血吐)를 내달았다.// 冬// 애인은 브래지어 없이 나를 만나러 나왔다. 그녀와 헤어져야겠다는 생각을 처음 했다. 광장에 모인 비둘기들은 지나치게 살이 올라 있었다. 통통한 연민들이 땅 위를 서성거렸고 다만 모든 상징이 눈처럼 지루했다. 조형벽은 더러워져 가는 내 영혼을 닮아 있었다. 돌아오는 길 근처 공사장에서 비계를 타고 오르내리는 사내를 보았다. 같이 무너져버리고 싶다고 내게, 사랑니가 말했다.// 秋.// 향(香) 자만 갉아먹은 책벌레를 잡아 냄새 맡아보았다. 먼 곳에서 돌아와 바람은 내 황홀한 슬픔에 대해 물었지만 어떤 추억도 향초의 무덤 쪽으로 접근하지 못했다. 벌레의 부드러운 다리들이 허공을 엮는 것 보다가 향기가 지워진 책들을 불살라 주었다. 빈 마당의 상처를 낙엽이 다 덮지 못했다. 돌아다닐 행간이 사라진 다음에야 벌레를 축복했다.// 夏// 꽃 속에서 죽은 적이 있다. 단물에 젖은 날개가 훈장 같았다.//

1659년, 고라니 혹은 사슴 / 천서봉
상평통보 무배자전을 위조한 기억이 있다./ 조선시대에도 나는 시인이었는데, 시인이라고 해봐야/ 장에 들러 선인의 시나 읊고 가사나 불러/ 소인묵객의 흉내나 내는 일이었다./ 떠돌이가 어찌 엽전을 위조하였는가 하면/ 삭방도, 그러니까 지금의 함경도에 살던 먼 친척,/ 야장이었던 그의 대장간을 쉬 빌려 쓸 수 있던 까닭이다.// 조립과 제작을 즐기는 것이 천성이어서/ 현생 역시 그런 천한 직업을 가지게 되었는데/ 한 가지 아무리 추억하려해도 떠오르지 않는 것은/ 참형을 당한 기억이다. 참형을 당한 기억이 없으니/ 나는 죽는 날까지 이곳저곳을 들짐승처럼 떠돌다/ 낙막하고도 다복한 삶을 마쳤는지 모른다.// 대신 탁주를 품에 안고 꺽꺽 울던 기억이 있다./ 겨울이 깊도록 꽃이 지지 않았으니/ 누룩꽃 피는 내 몸에 술 한 잔 바치지 못했다./ 술이 쓴 것은 아직도 그 버릇이 남아서다 굳이 말하자면/ 여러 번 헤어졌으나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당신,/ 당신은 연생(緣生)이 모조해내던 추억이었으며/ 1659년은 그런 당신의 부재가 남긴 미록했던 날들이었다.//

서봉氏의 가방 / 천서봉
집어넣을 수 없는 것을 넣어야 한다,/ 는 강박관념에 시달렸다. 거리는/ 더 커다란 가방을 사주거나/ 사물을 차곡차곡 접어 넣는 인내를 가르쳤으나/ 바람이 불 때마다 기억은 집을 놓치고/ 어느 날, 가방을 뒤집어보면/ 낡은 공허가 쏟아져, 서봉氏의 잔돌처럼 쓸쓸해졌다.// 모두 어디로 갔을까./ 가령 흐르는 물이나 한 떼의 구름 따위,/ 망상에 가득 찬 머리통을 담을 수 있는, 그러니까/ 서봉氏와 서봉氏의 바깥으로 규정된 실체를/ 통째로 밑에 진열된 햇살은 너무 구체적이고/ 한정된 연민을 담아 팔고 있었다.// 넣을 수 없는 것을 휴대하려는 관념과/ 이미 오래전 분실된 시간/ 거기, 서봉氏의 쓸쓸한 가죽 가방이 있다./ 오래 노출된 서봉氏는 풍화되거나 낡아가기 쉬워서/ 바람이나 빗속에선 늘 비린 살내가 풍겼다./ 무겁고 질긴 관념을 담고 다니느라/ 서봉氏의 몸은 자주 아프고/ 반쯤 벌어진 입은 늘 소문을 향해 슬프게 열려 있다.//

과잉들 / 천서봉
그해 겨울엔 속죄하듯 폭설 내렸고 별처럼 나는 여러 번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밤거리, 고깔모자의 가로등을 쓰고 걷다가 어느새 내가 어두워졌다는 것도 몰랐습니다/ 평생 미안하다는 말을 너무 많이 했습니다 그때마다 한 겹의 옷을 더 껴입었던 셈입니다/ 하루는 따뜻한 걱정들을 불러다 거한 저녁을 먹이느라 나는 한 숟가락도 뜨지 못했습니다/ 길을 잃은 문자들을 수소문하다가 내 마음에도 골목의 무늬 같은 더딘 손금이 여럿 생겼습니다/ 웃을 때도 울 때도 항상 곁에 살던 수많은 엄마들, 엄마라는 단어는 한 번도 랑그인 적 없었습니다/ 망상과 식용 사이 봄비가 붐빕니다 참 많은 당신인 것을 알겠습니다 아픔이 몰라볼 만큼 나는 살찌겠습니다/ 몸이 되기를 거부하는 거대한 결핍으로, 당신이 의식하지 않는 소소한 배경으로 천천히, 나를 소멸해 가겠습니다//

처서(處暑)라는 말의 내부 / 천서봉
골 진 알밤, 무딘 칼날 세워 보늬 긁는다. 겨의 주름 깊이 길이 나 있다./ 더위가 물러가는 길, 길을 따라 또 길이 돌아오는 길.// 죽은 할미도 달의 오래된 우물도 모두 내 안구 속으로 돌아와 박힌다./ 깊어가는 수심의 습지에서 남보다 더 오래 우는 개구리의 턱이 깊다.// 지나간 애인들의 뒤통수가 전봇대마다 건들건들 매달려 있다./ 울음소리를 참아온 나무들이 투명한 손바닥을 여름의 뒷등에 비빈다.// 앵앵거리는 추억은 다만 비틀어져갈 뿐, 하나도 안 아프다./ 그런 모기의 주둥이처럼 저녁이 오고, 한두 겹의 내력을 더 견디며 나는,/ 고요의 중심으로 천천히 내려가리라.// 더위가 물러가는 길, 파르라니 깎은 몇 개의 알밤을 바가지에 담그면/ 달의 손바닥들이 내 오래된 뇌(腦)를 쓰다듬는다. 서늘한 나의 카르마.//

메모들 / 천서봉
詩의 이곽(耳郭)과 가장 유사한 것은 모래 아닐까,/ 말로 도강할 수 없는 정념, 災의 문장, 그건 유령인가?/ 냉장고에 불고기 재워놓았다 사랑한다/ 후문 쪽으로 돌아나가는 눈 덮인 운동장의 배후는?/ 상처가 또 다른 상처를 만드는 사람의 행태/ 사람에 대한 관찰은 미음처럼 적어도 디귿처럼/ 날씨 흐림, 서정이던 것들은 이제 다시는 서정 아닌 건가?/ 아이스크림은 모래가 되고 싶고 질문은 위로가 되고 싶지/ 우리는 조금씩 느꼈다 아무 것도 변화하지 않는 것을/ 안개를 이해하는 새벽의 나무들, 불면 아니면 불멸/ 정도 많고 병도 많은 지구에서 조급하지 말기/ 덜컹거리는 뒷문의 긍정을 듣네, 오늘 저녁은 불고기/ 유령아 나는 네가 올까 가끔 창문을 열어두고 잔다/ 물한년한 이 식탁, 최초의 말후구(末後句), 불가촉적 函//

매독을 앓는 애인 / 천서봉
秋.// 예감들이 가렵다 지난여름 물이 차올랐던 흔적이 누워있던 당신 배꼽부근에 선을 그었다 세월이 나를 여기 이앙(移秧)한 날들로부터 수없이 흘러간 바람의 지문들, 숨어있기 좋지요 숨어있기 좋다는 건 나에게서 가장 멀리 있는 어둠과 제일 가깝다는 말이니까요 근친은 가진 구름이 많아 비와 바람이 잦습니다 저는 사업자가 아니니 양도세만 물겠어요 구청을 돌아 나오며 우리가 물려받은 가장 아름다운 유산은 병이 아닐까 생각했다// 冬.// 태양은 책 속에서만 빛났다 금방 사라진다 공포가 기능하지 않는 악마는 내가 끼적이던 문장을 닮았다 서럽게도 그러고 보니 대체로 화분에 꽂힌 식물은 말이 적다 생각지도 않았던 생각들이 피어나는 감염의 계절, 병을 가지거나 혹은 잃은 다음에야 병은 온전한 우리의 것이 될 것이므로, 네게 달라붙어 있는 수많은 구름들을 나는 경배한다 너의 다리에 붉은 꽃 피어오를 때 눈 내리는 창문은 사랑하는 매미의 복안(複眼)처럼 흔들렸다//

근하신년 / 천서봉
만지지도않았는데벽은자꾸갈라져요/ 봄은멀었는데갈라진틈마다새순이자랄것만같아/ 1월의창문에가만히뺨붙여보는당신새해복많이받으세요/ 아직돌아오지않은사람들이기다리는사람들의머릿속에서/ 깊이깊이우물파는저녁얼어버린대지지하를흘러/ 흘러서가는한무리의철도를믿는당신새해복많이받으세요/ 맑은그림을그리고싶어늘같은색이모자라던소년의/ 도화지같은하늘이에요서정이눈처럼휘날릴 때/ 모든여백의중심이던당신새해복많이받으세요/ 용산지나삼각지너머굴다리밑공업용우지라면을/ 후후불며함께먹던당신과주문같았던방백들/ 오래완성되지않던문장들새해복많이받으세요.// 당신이제게주신맑시즘엔곰팡이슬었네요/ 잉곳[鑄塊]같은정신은맑지않네요때로사랑도/ 병든이념만같아서당신새해복많이받으세요/ 하얀가운을걸치고총총걸어가던사람들과/ 화약냄새가득했던형들의귀가와혜화동의이마위를/ 미끄러지던햇살들새해복많이받으세요/ 밤새사소한몇건의테러와해일그리고신혼여행/ 돌아오지않아요총구와그총구를겨누는총구와새벽만두집/ 착한김처럼위로위로만올라가던영혼새해복많이받으세요/ 봄과자고싶었는데겨우내조각난햇빛몇편으로/ 견뎌보는낡은레일의낄낄거림들그낄낄거림의치욕을밟고/ 기차가돌아와요고르지못한치열건물들사이로/ 또한해가緘口해요부디새해복많이받으세요.//

윤달 / 천서봉
1. 유년// 묘지에는 꽃눈들, 은밀한 말들을 밀어 올린다. 바람은 무슨 전령인 듯 쉴 새 없이 오갔으며 그때마다 가지들은 흔들리거나 스스로 제 이파리를 날려 보내는 일로 有心하였다. 세월은 믿음직스럽지 못했다. 계절이 계절과 살 섞으며 슬그니 빠져나간 시간들, 뿌리들은 가끔씩 못 다한 말들을 혹처럼 매달기도 했다.//
2. 당신에게로// 나는 더듬거리며 자주 어두운 공원의 행간으로 들어갔으나 둥글게 웅크렸으나 봉분 마다 벼린 변명들이 웃자라 있었다. 칼날 같은 그대 뼛조각에 보란 듯 베인 적 많았다. 내 대부분의 날들은 行不의 편지 속에서 늙어갔으므로. 슬근슬근 활자를 지워내던 사립문 밑, 쓸쓸한 先王, 당신의 한때를 나는 안다.//
3. 한아름// 빗줄기의 은유는 질기다. 휘파람을 불자 유빙처럼 떠돌던 고양이 한 마리가 구조신호를 보내온다. 성긴 집채들의 이빨사이로 누추가 젖은 길을 만든다. 잃어버린 애인이나 구름은 꼭 그만큼의 질량으로 비를 만든다. 얼지 못해 겨울로 내리는 비, 고막마다, 상처를 품은 골목마다 지그시 흘러드는 기억들.//
4. 나에게로// 투항하듯 돌아온 시간이 악취 풍긴다. 검게 들끓는 시궁쥐들은 이 저녁의 오랜 내력이므로. 썩은 달이 웅덩이마다 가득 고이면, 먼데 가슬가슬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리기도 했지만 棺이 완성될수록 사람들은 허기가 더했다. 제 그림자들을 짊어진 채 移葬을 서두르고 있었다.//

각성 / 천서봉
어느 순간 그릇이 손을 이탈하여 깨어지는 일, 그렇게 당신을 보내고 나는 비로소,/ 오늘까지 보던 것을 이제 오늘로 끝내는 일, 부레 없는 물고기가 되어,/ 돌아보면 외로움을 견디는 것이 나의 시작이자 끝이었다고, 그리하여 흙으로 돌아가고 싶던 그릇의 마음을 헤아려보는, 그런 온순한 일 따위는 아니고/ 가령 그것은 어둔 하늘을 반으로 가르는 번개의 일, 손목이라도 그어,/ 불이 되고 싶은 아이들이 공터에 모여 비를 맞고 있다 어른들이 모두 사라지기를, 나는 여러 번 기도했었고 그런 내가 아직도 살아있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은/ 오늘, 나는 그렇게 당신을 보내고 어쨌든 비는 구름의 각성//

슬픈 수비학 / 천서봉
‘이퀄’이라는 기호에 대하여 생각하는 저녁이다/ 기호를 사이에 두고 왼쪽과 오른쪽이 같아지는 일,/ 저울이 정지하듯 나와 당신이 하나가 되는 일,/ 그런 일도 일종의 평등인 것일까// 문제를 풀며 함께 수학하던 친구는/ 문제를 풀고 또 문제를 풀다가 어느 순간/ 문제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친구는 사라지고/ 문제들만 가득한 세상에서 이렇게 살아남아…/ 아뿔싸, 이제 우리는 우리가 만났던 사실조차 잊어버렸구나/ 이런 오늘을 우리는 평화롭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카페 ‘마스’에서 나는 ‘비너스’같은 당신에 대해 생각하는 중이다/ 나는 죽기 전 당신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기도하는 나를 숫자로 쓴다면 그건 6에 가깝지 않나/ 생각할 때, 등수에 익숙한 사람들은 차례차례 줄을 서서/ 일용할 양식을 받아들고 저마다의 저녁 속으로 돌아가고 있다/ 이런 작은 슬픔을 나는 행복이라고 적어둬야겠다// 내가 기호가 되고 기호에 감추어진 비의를 당신이 찾아낼 때까지/ 數祕적으로, 아니 조금만 더 守備적인 삶을 살기로 한다//

적막 / 천서봉
슬픔에는 네 손바닥만 한 슬픔을 뺀 슬픔과 내 그림자만큼을 더한 슬픔이 있고 그 슬픔들을 구분하기 위하여 오늘도 터미널에는 편지지 같은 버스들이 오간다 함께 태워 보내지 못한 울렁임은 여기 남아 고요에 더해지는 걸까 고요를 빼는 걸까 슬픔을 슬픔으로 견뎌내는 너의 가슴은 단단해지는 걸까 아니면 녹는 걸까 생각한다 흘러내리는 놀 아래로 제법 길어지는 저녁의 가지들, 너머로 사탕을 손에 쥔 아이가 넘어질 듯 넘어질 듯 비탈길 달려갈 때 사탕은 어떤 하나의 대의를 감당하는 것일까 고요와 구분되지 않는 이 소란을 적막이라 부르면 일용하던 단어들 대신 검은 구름이 우리의 혀 위에서 한 번 더 녹아내린다//

목요일 혹은 고등어 / 천서봉
-가령, 사람만한 고등어 두 마리가 카페에 마주 앉아있는 그런 풍경,/ 사람들은 그 신기한 풍경에 놀라 사진을 찍어대고/ 둘은 아랑곳없이 서로의 대화를 이어가는, 그런 목요일// 몸에서 물이 흘러 바닥을 적시듯 그렇게 만납시다/ 사탕이 잔뜩 묻은 권련을 쥐고// 수요일은 이르고 금요일은 조금 늦고, 그러니 목요일쯤 만납시다/ 새벽이 고인 사발을 들고// 수요일은 어리고 금요일은 우리가 너무 늙어있을 터이니,/ 그러니 목요일쯤 만납시다// 어제까지의 등푸른 이별 이야기를 나누고/ 희롱 받은 혀와 살 몇 점을 술잔 두어 개에 나누어 담게// 반쯤 마시고 또 반쯤은 거기 남겨둘 수 있게,/ 추분이나 동지 같은 근심의 귀를 이제 열어두게// 수요일까지 우리가 살아남은 기적에 대해,/ 그건 거의 마법에 가까운 일이었다고 의뭉 떨게// 그렇게 우리 목요일쯤 만납시다/ 사랑이 아니었거나 혹은 사람이 아니었거나 그러나// 사랑이거나 사람이어도 괜찮을 목요일에,/ 마치 월요일인 것처럼, 아니 일요일의 얼굴로// 흘러내린 표정이 바닥에서 말라가듯,/ 유통기한이 딱 목요일인 쓸쓸한 통조림처럼 우리,//

본적(本籍) / 천서봉
*/ 딸아이는 원숭이처럼 앉아있다 저녁에는 누구나 너무 긴 연민의 팔을 갖게 된다 안아줄 수 없는 슬픔에 대해 생각하다가 잎이 많아졌을 나무들, 다가와 그늘이 옆에 앉는다//
*/ 사랑은 대체 어디까지의 멸망을 견디는 것일까 아름다운 분노를 목격한 날은 어쩔 수 없이 쓸쓸해진다 저녁이 말을 걸어오면 우리는 담벼락처럼 어디서든 무너질 수 있다//
*/ 결국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그런 손, 그런 햇살, 이렇게나 팽창하는 공기나 리듬은 어디서 온 것일까 비를 뿌리거나 씨를 뿌리는 일에 대해 강의하는 서녘의 오랜 강박들,//
*/ 그 앞에 딸아이와 나와 그늘과 원숭이가 나란히 앉아 걸어오는 놀을 바라보고 있다 책임져야 하는 얼굴을 생각하느라 무슨 불이라도 켜놓은 것처럼 뜨거워지는 구름들//
*/ 한번도 가본 적 없는 본적을 생각하는 저녁에는 한번도 본 적 없는 꽃에 대해 생각하는 계통수가 있다 너무 많아진 잎으로 수런거리는 슬픔을 쓰다듬는 가계가 있다//

나무 호텔 / 천서봉
그러므로 나는 오늘 지루한 사막을 가득 메운 모래가 아니다/ 백자의 비명, 귀가 자라 작년의 소리를 듣는 나는 그러나 로비가 아니다/ 잘 지내느냐고, 차마 물어볼 수 없는 낙엽의 손끝은 나이테가 아니다/ 객실은 일말의 가능성을 열어둔 무기력이 아니며, 혹은 끝없이 자라나는 허공도 아니다/ 일단 새들은 내가 아니다 바람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심정으로 나는/ 나무 꼭대기에 걸린 단 하나의 죄에 대해 읍소했지만, 사실 그것도 詩는 아니었다/ 그러나 저기서 하룻밤 묵어가는 별이 미쳐있는 것은 아니다 아니므로/ 너무 작아서 너에게 가 닿지 못한 내 목소리가 내일의 모래는 아니다/ 나무 호텔은 나무도 아니고 호텔도 아니다 아닌 것들의 밤이 넓고 유순하다//

파한(破閑) / 천서봉
마음을 씻고 새벽 옆에 누우면 아 가려워, 귀에서 꽃들이 피어나곤 했다/ 그림자가 사라질까 그늘을 피해 걸을 때 우리는 어느새 여럿이 걷고 있었다/ 경력에 대해 물어봤다면 나는 호주머니 속에서 무리의 안개를 꺼내 보였을 텐데/ 한번도 보지 못한 계절을 웃음이라고 말하며 너는 떠나가고 있다/ 자고 나면 손가락에 손가락이 붙어 자랄 거야 선인장은 톡톡 쏘며 말하고/ 귀에서 떨어진 꽃잎의 글귀들을 읽어내느라 내 몸은 아직 前生에 머물고 있다/ 이 한가로운 산책이 아름다운 것은 거듭 이별을 고할 줄 아는 입술 때문이다//

발목이 없는 사람 / 천서봉
영혼에 관해 말할 때, 우린 자주 발목을 잃어버리곤 했습니다/ 발목이 사라져간 자명한 어제를 이제 상징이라 부르겠습니다/ 어디선가 물이 끓는데, 돌고 도는 목성의 얼음띠 같은 영혼들/ 낯선 곳에서 잠을 깨는 일은 소멸에 가까워서 아름다웠습니다/ 문턱을 넘지 못하는 생각은 무너지고 나서도 다시 무너지겠죠/ 깊어지는 모든 것은 철학이 될 테고 자정은 비밀과 닮아갑니다/ 골목이 소매와 닮았습니다 점점 더 소문에 가까워지는 우리들/ 알아보겠습니까, 이제 물은 끓어오르다 못해 넘치고 있습니다/ 당신을 설득할 생각이 없는 나는 당신 병이나 함께 앓았으면 했습니다//

나비 운용법 / 천서봉
#a// 홀로 나는 부끄러워 몇 번이고 얼굴을 감싸 쥐다 무릎 사이에 귀를 묻다 생각한다 죽고 싶다……, 이것은 다시 사춘思春인가// 어떤 사랑도 아름답지 않고 어떤 중독도 마침내 시들해질 때, 나는 편견이 없는 연대의 한 마리 나비가 된다 : 그것은 두 치 정도의 생물로 마치 넓은 소매를 펄럭이듯 하늘에서 움직이는……, 이라고 목인에 의해 처음 기록된다 공중에서 누구도 살지 않을 때 나는 기괴한 음악이거나 오염되지 않은 공포다 영어囹圄에 든 채 당신에게 가거나 혹은 가지 못한다 가는 일이 부끄러워 못 가고 가지 못하는 것이 부끄러워 못 가지도 못하고 가지도 못하는 부끄러움으로 마침내 죽고 싶다고…… 나는 여러 번 처음으로 자살한 어떤 연대의 나비가 된다 : 그것의 불가해한 무늬는 문자를 닮았으나 문자 아니고 마치 소리를 붓으로 그려놓은 듯한……, 이라고 당신에게 음각된다// 페이지가 한 번 펄럭일 때마다 백년이 흘러갔다 두 귀는 날개의 퇴행이므로 바람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부끄러울 때마다 전생의 무늬가 붉게 떠올라 나는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물론 나비는 아무런 죄가 없다//
#b// 나비는 죄가 없으나/ 침묵과 놀며 창문을 존경하고 요절을 동경하다가/ 버스 한 번 타면 갈 수 있던 당신에게 못간 시간을/ 이제 나비라고 불러야겠다// 호명하기 어려워 꼭 쥐고 있던 성대와/ 붙잡을 수 없어 귀가하던 손금의 불안한 무늬조차/ 이제는 나비라고 하자 나비라 부르면/ 왼편에서 당신의 월요일이 시작되고/ 동시에 오른편에서 나의 일요일이 저물 것이므로/ 갑상甲狀의 아이들이 돌멩이처럼 졸고 있는 사원과/ 슬픔으로 부풀어가는 사거리 가로등 사이에서/ 나는 저울 같은 잠으로 오래 경련할 것이니// 내가 당신에게 못 가던 발작의 시간들을/ 간단하게 나비라 쓰자/ 봄의 이곽耳郭을 떠도는 추억의 고요를 나비라 읽자/ 용서는 바라지도 않을 이번 생엔/ 영원히 마음의 정처를 얻지 못할 것이므로// 그러니 나비라 부르자 당신과 나 사이/ 창궐하던 층계를, 찬란히 피던 실패의 전부를//

立面圖(입면도)를 위한 에스키스 / 천서봉
희망누수탐지원 양지천막간판 시네마천국 조은세상인테리어 미소치과의원 오뚜기문구 행복사진관 굿모닝빵집 더 이상은 붙일 곳 없는 덕담들이 새로 세운 사거리를 메우고 있네. 해도 팔팔 개소주, 간판이 매달린 크레인의 입질을 개 한 마리 혀 내두르며 바라보고 있네. 눈 바로 뜨지 못했네. 눈감아야 보이는 것들 있다고 창문을 내다는 일도 눈뜨는 일이라고, 빈혈 앓듯 강의시간은 어지러웠네. 말레비치를 역설하던 한 건축가는 간판이 건축물의 얼굴을 망친다고, 하얗게 머리가 세는 순간까지 변설(辯舌)했네. 거짓말처럼 창 밖에는 눈 내리고 주름 가득한 바람이 입간판을 팽이처럼 돌리며 놀았네. 묽은 죽이나 가면 따위를 팔아 사람들은 어미에게로, 늙은 어미에게로 모두 흩어졌네. 마지막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뚜벅뚜벅 걸어 들어오는 봄꽃들에게 지루한 내 면면은 아름다울 수 있을까. 문을 열면, 내다 걸 무엇도 없는 시절이 밖을 서성거렸네. 얼굴마다. 진저리치며 웃고 있었네. 졸업이었네.//

봄밤을 위한 에스키스 ㅡ역사에서 / 천서봉
가로등이 제 아랫도리를 비추었다. 땅 위에 번져가던 어둠이 흠칫 놀라며 멈추어 섰으나 이내 성큼성큼 그 무거운 빛깔을 옮겨갈 때 나는 불씨 하나 손에 쥔 사내가 쓰레기통에 불을 놓고 가는 것을 보았다. 가끔씩 터져서 튀어 오르는 무엇이 몇 개의 별을 공중에 박아놓기도 했지만 누구도 이 어둠을 흔들어놓지 못했으므로, 사소한 나무의 열림을 다스하게 덧칠하는 연기자락, 生은 흐렸다. 사람들의 입 막으며, 저녁이 선로의 빛나는 침묵 위를 종단한다. 덜컹거리며 다가올 열차는 무엇으로 스스로의 이정표를 찾아가는지, 주머니 속 차표를 만지작거렸다. 희망은 닳거나 구겨져 있었다.//

봄밤을 위한 에스키스 2 / 천서봉
많은 날 다 보내고, 그 많은 사람 다 보내고 그래도 모자라 써봅니다. 벚꽃 편지, 나무를 안고 일어서본 사람은 알지요. 쿵쿵 나무의 심장이 들려주는 둥근 도장의 파문, 창문을 열며 꽃들은 통증처럼 터지고, 긴 봄밤 나는 허리 앓습니다. 허리라는 중심과 중심의 아득함, 점점 번지는 그 어지러운 덧없음이 집 근처를 서성거릴 때 나는 당신이 없는 집을 고치고...... 집을 다 고치고 나면 제 허리를 고칠 겁니다. 연골에 칼큼 긋듯 흐르던 겨울 별자리들, 소식 끊어진 날들은 어땠나요, 견딤과 견딤의 구부러짐, 한 장 한 장 벚꽃은 제 몫의 이별을 편지 쓰고, 이 긴 봄밤, 징검다리 같은 척추 디디며 나는 당신에게 못 갑니다. 휘어진 길들은 좀체 펴지질 않아요...... 벚꽃 편지, 많은 날 다보내고, 그 많은 사람 다 보내고 그래도 모자라 또 써봅니다.//

행성관측 / 천서봉
불행이 따라오지 못할 거라 했다./ 지나친 속도로 바람이 지나갔고 야윈 시간들이/ 머릿속에서 겨울, 겨울, 우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지나치게 일찍 생을 마친 너를 생각했다./ 대개 너는 아름다웠고 밤은 자리끼처럼 쓸쓸했다./ 실비식당에서 저녁을 비우다 말고 나는/ 기다릴 것 없는 따스한 불행들을 다시 한번 기다렸다./ 하모니카 소리 삼키며 저기 하심(河心)을 건너가는 열차./ 왜 입맛을 잃고 네 행불의 궤도를 떠도는지./ 콩나물처럼 긴 꼬리의 형용사는 버려야겠어./ 말하던 네 입술은 영영 검은 여백 속으로 졌다./ 그래도 살자, 그래도 살자./ 국밥 그릇 속엔 늘 같은 종류의 내재율이 흐르고/ 사람을 끌어당기는 건 여전히 사람이지만/ 나는 더 이상 사람을 믿지 않는다.//

행성관측 2 ㅡ원룸 / 천서봉
B102호, B103호……. 혹성의 이름 같은, 홀씨들이 벽마다 실금 긋는 방이다. 생의 캄캄한 산문散文을 위하여 아침은 햇살을 끌어다 담장너머로 던져주는 집배원의 말간 손가락 같다. 밤새 누군가 유리창에 쓰고 간 선명한 무늬들, 남루겠지. 서로 기대지 못한 것들은 모두가 궤도였네.// 깊고 천박하여 내 잠은 알지 못했네. 밤이 어디로부터 와서 열병 앓는지. 서늘한 아궁이 속, 하얀 운석의 사리들을 긁어 대문 밖에 내다놓는다. 푸른 쓰레기차를 보낸다. 저 빛을 따라가고 싶어, 벽마다 뿌리가 자라는 방이라면 금 너머 어딘가 숲이 있었다는 뜻일까. 메아리 깊은 방, 하나를 말하면 하나가 벌거벗고 돌아오는 방.// 카타콤 같은, 기억은 쉽게 땅 위로 떠오르지 못한다. 그러나 길을 잃지는 않을 것이다. 문門은 하나이니까…….중얼거리는 방. 두 개인 것 없는 방. 미라처럼 햇살이 쓸쓸함을 깊이 감아 도는 방. 아무도 깨워주지 않는 방. <잠만 잘 분> 그렇게 구한 방. 자고 일어나 또다시 잠만 자는, 홀로 자전하는 방.//

고구마라는 별이 / 천서봉
어느 날 고구마라는 별이 우리 집 가장 가까운 곳을 스치고/ 네모난 집만 그리던 나는 어느 날 네모난 집이 그만 싫어지고/ 구근처럼 골목골목 헤집으며 저녁이 집으로 돌아올 때/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은 어느 정류장에서 찬란을 기다리나/ 솥에는 김이 오르고 생각만으로도 싸늘하게 식어버리는 나의 사랑/ 한 입 더 먹을수록 비어가는 각자의 별이, 심장 가장 가까운 곳을 스치고/ 나는 네모난 창에 붙어 우물우물 적갈색 럭비공의 뾰족한 끝을/ 교회 붉은 십자가의 중앙에 정조준도 하고, 아직 나의 기도는 너무 멀고/ 마침내 집은 사라지고 네모난 창과 네모의 노란 허기만 남을 때/ 캄캄한 서녘, 불빛을 내며 추락하는 기별이, 나에게서 가장 먼 당신/ 을 스치고 다시 어느 날 자궁처럼 나를 가두는 고구마라는 별이//

구름 편력 / 천서봉
셀 수 없는 구름들을 나는 지나왔으니,/ 서해 어디쯤이거나 차가운 사막의 귀퉁이쯤이 태생이었을/ 구름의 먼 행보는 모르는 것으로 한다./ 석 달 열흘 동안 먹장구름이 눈물로 떠나지 않았다거나/ 나와 어느 달콤한 오월의 구름 사이에/ 보름달 같은 아이가 자란다는,/ 뜬소문들이 연기처럼 자라나 헐한 저녁을 짓곤 했다./ 그러나 이제 시월,/ 하늘은 생각의 高度를 조금 높인다. 실상은 늘/ 비가 되어버린 구름의 후일담 같은 것./ 나는 구름을 위해 몇 편의 시를 짓거나/ 시절의 아름다운 증거를 사진 속에 가두었으나/ 대부분 먼 배경이었으며 알고 보면/ 구름 모자들이 한번쯤 쓰윽 나를 써보고 간 것뿐이었다./ 뒤를 삶이 들러리처럼 걸었으니,/ 변덕스럽고 지독했던 체위가 내 이력의 전부였구나./ 내가 가졌던, 그러나 위독했던 한 떼의 구름들,/ 그녀들이 알선해 준 내 몽상의 일터엔/ 한 줄로 선 토끼나 양떼들이 슬픈 톱니바퀴를 돌리고 있다./ 구름이 나를 망쳤다./ 너무 많은 하늘이 나를 스쳐지나갔다.//

문고판 하이틴 로맨스 / 천서봉
책마다 영혼이 들어 있었다. 몸은 작고 내부는 두터워서 늘 숨어있기에 좋았으므로, 애인이 책갈피에서 떨어져 꽃을 피우기도 했다./ 영혼이라는 말에서 언제나 구름 냄새가 났다. 사랑도 마찬가지였다. 지상에 디뎌야 할 발들이 보이지 않았다. 깨어나면 키가 한 뼘씩 자라있었다./ 슬픔 아니면 기쁨이었다. 우리의 아름다운 주인공은 죄가 너무 많아, 다만 모든 게 억울했고 바람이 엮어준 플라타너스 그늘은 꼭 셋이나 일곱 명을 무리지어 주었다. 백마 아니면 흑마였고 시험에 나오거나 혹은 나오지 않는 계절이었다./ 커서 뭐가 되겠냐는 질문이 많았고 강물은 자주 도로를 덮쳤다. 그때마다 문고판을 하나씩 사 모았다. 견고한 바람벽 속에서 무언가 되겠다는 생각이 생각들을 버리고 있었다. 때로 텅 빈 동공을 가진 나무들의 수화가 아름다웠다./ 교과서 위에 포개어 읽으면 허벅지가 허벅지 위에 겹쳐 늘 아찔한 시너 내음이 났다. 꿈의 대부분은 휘발하기에 좋았다. 모든 게 단편이었고 한 권이 끝나면 우리는 쉽게 잊혀졌다. 세월은 겨우 몇 개의 목차로 요약된다는 걸 몰랐다.//

감정의 경제 / 천서봉
표정을 지우고 하루를 결제합니다 슬픈 날은 기쁜 날을 위하여 남은 고요를 저축합니다/ 아껴두었던 웃음이 때로 殘錢(잔전)처럼 흩어지기도 합니다 그 소리들은 너무나 자잘해서 잘 더해지지 않습니다/ 원금에 이자를 더해 어느 날 토마토는 기록적으로 폭발하고 그런 날은 붉은 눈물로 빚을 갚습니다/ 울음 때문에 좁은 골목이 붓고/ 기침같은, 탄식의 문장을 말리듯 나는 종일 햇살 아래 서서 깨문 입술의 복리(福利)를 계산하기도 합니다/ 어딘가로 이체된 층층의, 불연속적 불편, 그 심급의 계단을 오르다가 오래 전 접어둔 한 장의 창문을 생각해 냅니다/ 저 하늘, 살 수 있나요? 구름은 어제보다 상승해있고 오늘도 우리의 감정은 고독의 하한 근처를 서성거렸는데요/ 바닥났던 잔고의 겨울나무들이 꽤 살만해진 여름입니다/ 가을까지 좀 기다려주겠습니까? 당신에 대한 나의 氣色(기색)은 근처 단풍나무에 넣어두겠습니다//

고갈비 굽는 저녁 / 천서봉
죽음이, 이렇게 달다니,/ 그러나 이 저녁은 생선의 것도 내 것도 아니다.//

김장하는 법 / 천서봉
배추만 있고, 방법은 모르네. 당신도 없는데 나는 식욕이 돋아, 저기/ 후추나무가 버린 언어를 주워다 바람을 불러다 햇빛과 슬픔을 버무려, 아, 한 입, 매운 기억들을 오물거리다./ 아리는 이빨처럼 붉게 붉게, 왜 나는 아픈가. 당신도 없는데, 호로 푸냥히 저려지는 변죽들, 얼굴인지 조각난 햇살의 이마인지 모를, 몇 포기 환한 머리들을 꾹꾹 누르다, 항아리에 눌러 담다,/ 법 없이도 되는, 발 되는 당신, 정답은 없고, 당신도 없는데, 겨우내 옹관처럼 거기 묻혀, 조금씩, 조금씩 나를 꺼내 먹는 당신.//

만일의 방 / 천서봉
오늘 방을 생각하는 방의 입장에 대해 생각한다 하루치의 방과 그 방의 체적이 감당해내는 우울/ 우각과 우각 천장과 바닥이 대치하는 저녁들 바람의 이탈을 돕고 허공에 안주하는 일들, 아는가?/ 하루에도 몇 번씩 무너진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는 방의 고독을, 만일 방을 뒤집는다면 그것은 다시 방인가?/ 어제의 햇살과 오늘의 햇살이 다르게 말하는 것을 방은 진실로 견딜 만한지, 방이 방에게 살해되거나/ 문득 자결하는 결심하는 그런 방들, 가능하다면 그런 방에서 더 멀리 있는 만일의 방을 생각하자/ 이제 그만 문을 닫고 방을 열어보자 나를 담고 어두워져 가던 그런 방 말고 방이 방을 생각하는 입장에서,/ 방의 계절과 방이 모여 만든 도시에서 누구도 불법점거하지 않는 그런 방, 방이 태어나기 전의 아마도 윤리적인 방//

강박들 / 천서봉
그날이/ 그날의 당신이 버스가 꽃이 프랑소와즈 아르디가 스타킹이/ 프렉탈이 원숭이띠가 어떤 범론이 개론이 개목걸이가/ 요코 다와다가 바다가 이민이 파도가 너울이 두통이 호흡이/ 그렇게 울음을 제유하는 묵언들이 왈칵,//
쏟아져 내리는 나의 본가(本家)엔/ 당신이 버리고 간 구두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조심스레 돌아가는 지구가 있고/ 여전히 한 척의 배를 띄우지 못해 얕은 강가에서 놀고 있는 아버지가 있다/ 머리 흔들고 손 저어도 붙어 떨어질 줄 모르는 몇 편 검은 햇살 같은 절망이 있고/ 그런 당신의 오후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자진하여 부근이나 근처가 되어가는 발 저린 풍경이 있다/ 대문 밑 혓바닥처럼 밀려들어오는 고지서들, 참 더딘 고독들, 온다 안온다 온다 안온다……/ 아직도 나의 현관엔 모든 결심을 물시(勿施)하려는 외풍이 다정하고/ 홀수를 점치는 저녁이 이토록 서늘한 것은 열어둔 채 떠나온 당신의 마음 때문이겠다//

시네도키, 詩* / 천서봉
우리는/ 지나간 사람이 더 아름답다고 느끼는 병을 앓았다/ 종종 낙엽이 무엇의 일부인지 생각했고/ 모르는 사람과의 대화도 서슴지 않았다/ 아름답지 않나요? 어긋나는 사람들/ 그것의 의미는 중요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어떤 우리에 조용히 가두어졌고// 어떤 대의가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할까?/ 그런 생각만으로 삶을 탕진하는 건/ 사람밖에 없다는 것을/ 아마 빵이라면 조금 알겠지/ 이제 구름이라면 나도 조금 느끼니까/ 이룰 것 없어 잠 못 이루는 날이면/ 종종 안개가 무엇의 일부인지 생각했고/ 단지 우린 모두 미치지 않으려 애쓰고 있을 뿐이지/ 라고 말하는 가슴 속 타인과 대화한다// 아니라고 부인하면서, 자연스럽게/ 우리는 지나간 사람이 더 아름답다고 느끼는 병을 앓았다/ 아름답지 않아요, 어긋나는 사람들/ 人類는 의연한데 나는 조금 슬퍼졌다/ 나는 무엇의 일부일까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
* Synedoche: New York, 2008 찰리 카우프먼 감독 영화의 원제에서 뉴욕을 시로 바꾸어 놓는다.

밀물 라면 / 천서봉
한 젓가락 불어버린 저녁을 건져 올리다. 퍼올려도 퍼올려도/ 물이 줄지 않던 동구 우물처럼 냄비 속 내력은 더디고 딮었다/ 앉은뱅이 밥상 떨어져 나간 모서리마다 생복 같은 식구들은/ 조각의 어긋난 이빨이다가 붉은 기름 동동 쓴 미끄러운 심해였다/ 가려움 많아서 밤이면 부스럼 같은 별들. 머리맡까지 밀려들고/ 혼자 본 저녁상/ 찬밥 한 덩이 넣어 달빛 꾹꾹 누르면 구불부불한 생각의 파장이/ 억울하게 구겨진 냄비의 상처가 숟가락 가득 되다 어른거려/ 잔반들, 수챗구멍으로 돌려보내며 들었다/ 오목한 밀물 되어 건너오는 세상 가장 가느다란 안부를//

종합사회복지관 / 천서봉
선물세트 같마. 고만고만한 수영장과 고만고만한 헬스 기구들. 봄 나무들을 잔뜩 심어놓고 시 창작반 선생은 아줌마들을 기다린다. 나무의 나이테처럼 겹치지 않는 사람들을 생각했다. 물관처럼 쉼 없이 무머가를 길어올리는 창문이 낮달을 꺼내 보였다. 평생 배울 수 있다면 그것은 슬픔의 종류를 구분하는 상자를 하나 얻는 것. 달이나 태양이 한 상자 속에 들어가도 될까. 물었지만 누구도 숨겨둔 꽃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어린아이들과 노인이 칸칸 채워진 선물세트, 시를 다 배우고 나면 어서어서 허리가 굽어 물리치료실로 가셔야죠, 배를 땅에 붙인 비둘기가 계절을 재촉한다. 장난감과 양갱이, 치약과 과자가 당신의 기억 속에서 한가롭게 뒤섞이고 있었다.//

납골당 신축 감리일지 / 천서봉
흉흉히 날 저문다. 魂의 입주일이 가까워오면서 이마에 손수건 붙인 사람들 출입 잣다. 언덕배기로부터 내닫는 바람은 당신의 할머니, 나의 삼촌이 통성명하는 것이므로, 풍하중에 대한 보강을 요구하다./ 한바[飯場], 아주머니의 고단한 손금이 허기를 불러 모으고, 작업 중 음주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다. 보아라, 베어진 둔덕을 쥐고 휘청거리는 억새의 관절을, 관절을 꺾으며 죽은 자의 아파트가 자라고, 골골골 흘러내리는 위태로운 저녁의 벼랑들// 인부들이 모두 돌아간 뒤 드럼통에 남겨진 잔불을 끄다. 시공의 이음새가 매끄럽지 못하다. 비를 가진 구름이 북촌에서 몰려오는데 거친 내 영혼은 재설계가 가능할까. 흉측하게 드러난 계단탑 단부가 산자의 오만처럼 단단하다고 공문 띄우다./ 어둠이 시끄럽다. 나무들이 자주 공사장까지 내려온다. 미리 집을 보러 오는 혼의 처연함. 입주를 위해 꼬박꼬박 부어온 햇살의 계좌는 숲처럼 두텁게라는 시방을 지우고 내 귀가 종이짝처럼 얇아졌다고 쓰다. 계통수를 묻어둔 자리에 말뚝을 박다.// 지하 깊숙이 흐르는 물길에 대하여, 별들과 협의하다.//

플라시보 당신 / 천서봉
가건물촌의 동거는 낡았다. 보도블럭의 금 밟지 않기 놀이처럼 지루했다. 오후의 햇살이 남은 빨래 자진자진 말리고, 하수구 틈새로 다 흘러가 버려도 어머니, 꽃 이불 아랫목에 안전히 누워 계셨다. 활짝 핀 목단이 너무 무거워요. 늘어진 위장 같은 가죽 주머니 속, 쏟아지는 당신, 얘야. 이건 아스피린이고 아달린이고 저건 노발긴이란다. 고서의 呪文을 닮은 이름들. 그런데 어머니 그것들은 왜 자꾸 모으세요?// 토란잎만한 어둠이 툭툭 흔들리며 창밖을 서성거렸다. 뿌리혹은 스티로폼 네모난 화분 속에서도 둥글게 부풀었다. 복부 어느 언저리 누르면 까르르 터져 버릴 듯 어머니, 누워만 계셨다. 사시나무 위로 부르르 전철이 지나가요. 벽지 위로 실날같은 금들이 보란 듯 자라고 있어요. 콩나물시루의 저 또랑또랑한 눈빛......, 어머니, 어젯밤엔 마주 탱탱한 풍선을 타고 하늘에 닿는 꿈을 꿨어요. 어디쯤에선 이 포락도 파스텔 빛으로 단단히 타오를까요? 담쟁이의 끈끈함으로 어둠은 마랫목, 목, 목 세상 모든 목을 조르고 있네요.// 그런데 어머니, 오늘도 알약 같은 보름달이 뜨려나봐요//

나비를 추모하다 / 천서봉
한겨울 그때, 나는 어느 生의 모퉁이를 돌고 있었고, 당신은 거기 그 좋은 모래 놀이터에 바람 빠진 공처럼 웅크려 있었네. 마디 검은 나뭇가지 마니고, 깨어진 돌의 날카로운 모서리도 아닌 여리고 뭉툭한 손끝으로 당신은, 당신은 두 다리 사이에 머리를 묻고 흙바닭에 무언가 새기고 있었네. 나는 백발의 노인이었는데, 긴 수염이 파도를 따라 흘러가고 있었는데, 당신은 거기 조각 그림자로 우묵하게 그늘져 있었네. 묘사 덜 된 꿈의 갈피처럼, 당신은 오지 않은 봄마저 그려 넣고 날개를 꺼내고 나비가 되고 당신은 마직 어린 소녀의 몸이고,// 당신은 무엇을 새기고 있었을까. 태양이나 달, 혹은 막대같은 기린 그림, 천년을 돌아서 피어나는 유목의 흔적들, 한없는 여름 쪽을 걸어가도 사랑은 강심에 씻겨서 흐르는 것 아니고 나는 등진 손가락이 굳어진 가시고 쓸쓸한 데칼코마니고 고행의 늙은 낙타고 당신 날개의 무늬고,//

알코올 / 천서봉
김창비와 이문지는 친구다./ 삶이 그렇게 어려워만 지냐고 창비는/ 문지를 나무라지 않는다./ 명혼이란 게 어디 팍팍한 화두만 같냐고,/ 문지는 창비에게 묻지 않는다. 슬프게도/ 백 년 동안 단 몇 줄의 상처만이 대물림되지./ 계절이 쓰고 불현듯 날아가는 늙은 새가 쓰고/ 각인된 너의 얼굴이 나를 쓴다. 그러니/ 너와 나는 친구였을까. 근원이었을까. 그런데/ 왜 우리는 모두 무언가 되어야만 하지?/ 김창비와 이문지와 천서봉이 나란히 앉아/ 신경증적인 겨울 해의 투신을 지켜본다./ 거울이 거울을 어루만질 수 있을까?// 미끈거리는 바람의 질감 속으로 망명하고 싶다./ 속도로부터 이탈하는 잔상들이/ 갓길에 심어놓은 슬픈 나무들 묘묘(杳杳)하다./ 차라리 저렇게라도 서 있는,/ 서서 끄먹끄먹한 하늘에 수 없는 잔금이라도 그어보는/ 불온한 심지 속으로, 미끄러지고 싶다./ 언제나 저녁이면 와장창/ 하늘이 깨어져 내릴 것만 같다.// 여태껏 나는 살아/ 어둑한 카페 구석에서 생일파티의 주인공을 기다린다./ 폭죽 같은 고해를 준비하지 못했다./ 아름다운 두 권의 시집이 증발하기 전에 나는/ 조심스레 흐르는 내 안의 나지막한 생식(生殖)을 여기 기록해둔다./ 삼발이처럼 견고한 시간,/ 이 기다리는 건 친구 마니다. 침묵이다./ 침묵의 커다란 입이다. 입 속에 숨겨진 가공할 잎이다./ 다닥다닥/ 빙점의 서늘한 별들이/ 유리창에 달라붙는다./ 불씨는 여전히 도착하지 않았고/ 오늘은 죽은 자들의 생일.//

청량리, 만(灣) / 천서봉
구불구불 뇌 속, 웅크린 상점의 여자는 뜨개질 중이네. 너울너울 나비처럼 순한 춤처럼 그녀의 입속에서 길들이 흘러나오네./ 모든 길은 꽃 피우고 거기 나무 세웠네. 거미의 꽁무니로 빠져나가는 저녁, 탄식의 갓길 위로 나를 걷게도 했네. 돌아가기 너무 먼 곳은 쉽게 잊혀졌네./ 바람은 순결하지 못하네. 누대의 주름이 병든 대지를 양탄자처럼 띄우며 노는 동만 청량, 청량, 내 낮은 단잠의 수위를 웃돌던 파도소리./ 올올 흩어져 흘러가는 홍진은 모두가 놓친 길이었으므로, 늘 유심한 문장이었네. 함몰과 범람의 엉킨 타래를 잦는 낡은 물소리를 나는 읽네, 머릿속,/ 좀체 완성되지 않는 파랑(波浪)을 그녀는 뜨개질 중이네. 흘러서 끝이었을까. 한 땀 한 땀 견디며 건너는 만(灣)이 거기 다 있네.//

Snake Paths / 천서봉
뒷마당 대숲이 피리 불었다. 매미의 날개 밑에서 여름이 공명했다. 날개가 없는 것들은 길 위를 헤매었으나 없는 길에 웅크려 사람들, 毒을 짓기도 했다. 치명적인 건 뱀만이 아니었다. 춤꾼이 된 삼촌은 피리의 음계를 넘어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햇말 밑, 새까맣게 타들어 가던 작은 엄마. 대신 해바라기가 왈칵, 이빨들을 모두 쏟아내던 그해 가을, 댓잎은 하나 둘 무리를 풍경의 길 밖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굽은 허리를 마지막으로 펴며 할미가 죽고,// 겨우 십 년이 흘렀다고 뒷마당 대숲이 허리 꺾으며 또 울었다. 기실 소리의 내력이 길을 불러들였던 것. 모여든 혓바닥들이 텅 빈 고향집 가득 똬리 틀었다. 잠시 뒤엉켰다 다시 흩어질 것이다. 세월은 모두 혀 내두르며 어디론가 흘러가는 것이므로, 풀들은 잠깐 누웠다. 바람소리에 깨어 우리가 지나온 흔적을 지웠다.//

액자 소설 / 천서봉
액자 속에서 노을 진다. 잠 못 드는 밤마다 우리는 물처럼 흘렀지만, 우리는 사랑의 정물, 액(液)은 은밀히 밥을 짓고 분주한 슬픔을 나누어 먹다 아이가 태어난다. 아이의 깜박거리는 눈은 새로운 구름 몇 장을 인화하고 나는 아직 하늘이 채 지워지지 않은 유리창을 꺼내며 말한다. 조심하렴.// 아이는 언젠가 완성된 액자 속에 우리를 가둘 것이다. 우리는 한때를 누린 아름다운 정물, 사과처럼 화병처럼 붉은 테이블보 위에 조용히 액(厄)이 쌓이다. 저녁은 자주 화분 속 구근처럼 무거워진다. 들어가세요 아버지, 아버지가 평생 사셔야 할 방이에요. 의식의 흐름에 따른 순서대로,// 액자 속 노을 진다. 유리창, 금 간 거미줄에 노을 걸린다. 돌 속의 붉은 돌, 액자 속의 액자, 아이 속의 아이, 추억이 중얼거린다. 네모 안의 네모의 네모안의네모의네모안의네모의네모는 구름이 묻어 있는 유리창을 또 갈아 끼우고 이야기는 끝없이 이야기를 낳는다.// 나는 수인의 몸이었다.//

황천반점 가는 길 / 천서봉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 주말,/ 나는 화분처럼 방에 담겨 자장면집 전화번호나 돌린다./ 자장면 질긴 가닥들을 끊어 내며/ 숨겨진 돼지고기들을 골라내듯/ 시집을 읽는다./ 도대체 윤제림은 황천반점에 들러/ 몇 그릇의 자장면을 비웠을까/ 야무지게 비워지지 않는 그릇./ 신문지로 대충 매장한 일요일을/ 대문 밖에 내어놓는다/ 돌아서서 들어오는 길,/ 단무지 빛 깊은 오후가 고분처럼 결가부좌 튼다/ 저 너머 어딘가 자장법사의/ 황천반점이 있을 것이다// 가도 가도 대문 밖이다.//

뿌리내리는 아버지 / 천서봉
곧게 자란 미루나무 아니더라도 씀바귀나 쑥부쟁이들, 바람과 눈맞추며 하늘하늘 놀아날 적에 한번 생각해봐. 부풀어오른 대지의 끝을 제 손톱 휘어지도록 버티고 있을 뿌리들, 그 주춤거리는 마찰계수나 절망에 관한 불후(不朽)의 공식 같은 거. 아버지, 이제 그만 일어나세요. 들리나요? 빛의 어깨들이 절겅거리는 소리.// 소풍 같은 봄날, 아들은 고작 아비가 되고 유년의 윗목을 얼리던 자리끼 한 사발 같은 아비가 그 아비의 쓸쓸함을 배우는 동안 끝끝내 침묵하던 벼랑의 경사나 들녘의 일몰 같은 거, 얘야 모로 눕지 말거라. 관(棺)은 너무 넓구다. 볕 좋은 울타리 넘어 제 불알 흔들며 자라나는 잎맥이라면, 가등 아래 모여 솜털처럼 수런거리는 네가 잎잎이라면, 한번 생각해봐. 조록조록 언 땅 녹이며 빗줄기 갈마들 때 무한정 어두운 술청으로 스며드는 아비와 그 아비들의 무수한 손톱에 낀 첩첩 한 저녁 같은 거.// 어둠을 물어뜯는 푸른 이빨 같은 거.//

서정적, 무로보로스 / 천서봉
기차를 타고 가요. 지나친 습도가 비를 불렀겠지만요. 지나치다 지나치다 되뇌어도 길은 자꾸 흘러들었구요. 빗물은 터진 단추처럼 흩어졌지요. 낳게 우물지는 뇌수는 낯설지 않아요. 버릇처럼 나는 오래된 편지를 뒤적거렸고요.// 썩은 눈물이 서명한 나이테를 그리고 있었는데요. 바퀴 안에서의 추억은 한번도 부드럽게 타오르지 못했어요. 기차를 타고가요. 그물을 뚫고 가요. 욱신거리던 무릎이 신호하던 생애의 파장을, 창 밖 웅덩이가 한 번 더 보여주네요. 원형들이 환하게 재현하는 북소리.// 그리고는 둥둥둥, 수신할 수 없는 날들이 떠서 흘러 다녔지요. 아이들은 미끄러운 동심원을 따서 목에 걸기도 했고요. 암호의 반지를 나누어 갖는 연인도 보이네요. 습기 가득한 바람 속에서 터널은 생각나지 않는 당신 품, 기억하려는 듯 몸 펼친 처형의 시간을 살고요.// 지나친 습도가 비를 불렀겠지만요. 다 지나간 뒤에도 길은 남지요. 어서 오세요. 제 목을 당신의 교리에 묶어두세요. 굳어가는 손가락으로 나는 O형(形)의 편지를 뒤적거릴 거예요. 다만 그때 서정은 연기처럼 흩날리는 것.// 그런데, 아까부터 우리가 물고 있는 이 붉고 향기로운 밤은 누구의 항문인가요?//

채마밭 약사(略史) / 천서봉
1971./ 의문의, 쓸쓸한 다년생.// 1980./ 누가 내 입에 철심을 박아놓았지? 입을 오물거릴 때마다 철걱철걱 쇠 소리가 들렸다. 곧 꽃이 필 거다. 아버지 내게 속삭였다. 반들반들한 겨울 햇살이 혜화동의 이마 위로 미끄러지고 있었다. 버스정류장의 사람들은 늦은 파꽃처럼 머리가 커져있었다. 전위의 것들은 모두 바람을 쫓거나 쫓겨다니고 있었지만, 거긴 함정이에요. 아무도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돌아오는 형들의 늦은 연애가 잎잎 화약냄새를 앞세우고 있었다. 네가 기다리는 것들은 오지 않을 거다. 벌레 먹은 달빛을 거두며 아버지 중얼거렸다. 철심은 점점 더 깊이 박히고 있었다.// 1991./ 제발 우리도 햇빛 드는 곳에 좀 살아요. 상추가 못된 꽃대를 밀어내는 구나. 그보다, 지층에 뿌리내리는 건 자동사적이란다.// 2006./ 아무도 내 머리 위에 물을 뿌리지 않는 시간./ 이제 싹 같은 건 기다리지 마세요. 미안하게도/, 제겐 더 이상 피울 꽃이 없어요. 아버지.//

겨울삽화 2 ㅡ병상일기 / 천서봉
병실의 창문은 벙어리였다/ 검은색 코킹제로 봉합된 혀/ 언제부터 저 입 굳게 다물었는지/ 여문 시간의 가장자리로/ 곰팡이 꽃 더듬거리며 피었다/ 지면 여기 얼마나 많은 가슴들이/ 스스로의 말문에 족쇄를 달며 돌아갔겠는가/ 외로운 것, 소리없는 것/ 몸밖으로 밀고 나간 영혼들이/ 올올의 심지처럼 서서/ 눈 먹먹하도록 진눈깨비 뿌렸다/ 무슨 검사를 하러간다던/ 옆 침대의 환자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데/ 쓸쓸한 쟁반 위의 한끼가 그를 기다리고/ 나는 기다릴 것도 없는/ 저녁의 과일들을 다시 한 번 씻어놓는다/ 막막한 내 숨통의 길을 찾아/ 천정에 매달린 환풍구가/ 웅웅웅 겨울을 앓고 있는 동안/ 내 오랜 병상을 붙들어 오던 불구의 사랑도,/ 필경엔 거울이나 되어 서성이는/ 저녁의 창문같은 것임을 알겠다.//

플라스틱 나방 / 천서봉
오후와 저녁이 몸 바꾸면 허물 같은 빈 자리로 사람들,/ 이마 위에 기름진 불을 켜고 모여든다. 솥뚜껑 위에선/ 지글지글 삼겹살이 익어가고/ 얼굴들을 불판 가까이로 끌어당기며 나는,/ 오래된 전신주를 이야기한다. 야윈 나무젓가락 같던,/ 그 위로 어둠이 짙게 부러난 국물 속에 둥둥/ 떠있던 알등이 어김없이 밤이면 수없는 잔명을 불러 모으던/ 그 힘에 관하며, 이렇게 선술집 둥근 탁자에 둘러앉아서/ 무엇이 무리를 파전처럼 한데 부쳐놓았다? 노을 빛/ 아름다운 분노를 핏물 핀 고기 뒤집듯 뒤집을 수 있나?/ 당신과 내가 넉넉한 현생의 상추 잎 한 장에 덮여 사라져도 되나?/ 몸 부딪는 주광성의 술잔들, 사이 불씨처럼 오르는 물음은/ 닿을 수 없는 공중에서 희부윰한 눈꽃이 되고 있었다/. 식어가는 둥근 불판에 이마 부딪히며/ 새벽까지 파닥거리는 슬픈 날개들의 힘을 지켜본 적 있다./ 그러니까 가장자리로 몰려가는 눈발은 뜨겁고, 나는/ 오래 전 녹아내린 어떤 전신주에 관해 이야기 한 것뿐이다.//

무서운 아이스크림 / 천서봉
녹아있다. 라는 말 아시죠? 사상이 주체에 역사가 책 속에 우울이 삶 속에 내 안에 당신이/ 추억은 방울방울, 한 주검 속의 세계사와 한그루 나무에 배어 있는 수천 년의 손금 같은/ 가령 작은 세포 속 아버지와 그 아버지의 아버지가 나를 배후조종하는 우주(宇宙) 말입니다/ 차갑게 공생하는 불안의 빙하는 언제든 녹아 이 작은 지구와 지구의 감정을 덮칠 것만 같아요/ 부온탈렌티라는 사람을 아시나요?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불온해지고 몸은 자꾸 더워져요/ 스트로베리 블루베리 블랙베리 수많은 베리베리들, 숨겨진 배리 (背理)의 온도가 두렵습니다/ 얼굴이 녹아내리고 가면 위의 웃음만, 부지불식 아무도 구분 못 할 부드러움만 여기 남을까봐/ 아시겠지만 아이스크림은 폭발하지 않아요 조금씩 녹을 뿐, 그래서 유령보다 더 무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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