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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김사인 시인

by 부흐고비 2022. 5. 3.

김사인 시인
1956년충북 보은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1982년 《시와 경제》에 동인으로 참가하면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시집으로 『밤에 쓰는 편지』, 『가만히 좋아하는』, 『어린 당나귀 곁에서』와 편저서로 『박상륭 깊이 읽기』 『시를 어루만지다』 등이 있으며, 팟캐스트 ‘김사인의 시시(詩詩)한 다방’을 진행했다. 신동엽문학상, 현대문학상, 대산문학상, 임화문학예술상, 지훈상 등을 수상했다. 동덕여대 문예창작과에서 학생들을 오래 가르쳤다.

 

김사인 시인, 창비가 주는 '만해문학상' 거부 - 스트레이트뉴스

김사인(59) 시인이 창비가 주관하는 제30회 만해문학상(상금 2000만원) 수상을 사양했다. 1973년 만해문학상이 제정된 이래 수상자로 선정된 문인이 상을 거절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3일 창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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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시(戀詩)를 위한 이미지 연습 / 김사인
1. 고백// 골목을 돌아나왔다/ 바람을 죽이고/ 바람의 흰 알몸을 죽이고 대신 바람이 되어 돌아나왔다/ 죽은 머리칼 하나가 암호처럼 이마에 붙어서서 나를 흔든다/ 바람은 죽어도 바람,/ 머리칼은 꿈틀거리며 슬퍼하라 슬퍼하라 말한다// 슬픔은 꿈속에서나 오는 것이라기에/ 나는 흔들릴 때마다 넘어지려 애썼다/ 넘어져 잠들려고 애썼다/ 넘어져서도 이젠 어릴 때처럼 울지 않고/ 다시 일어서서야 몰래 울었다/ 머리칼도 소리 죽여 따라 울었다// 서투르게 잠든다/ 바람을 만나 이 알몸을 돌려주리라, 이 머리칼을 돌려주리라/ 하나 아무도 내게 빈손을 보여주지 않는다/ 꿈속에도 나는 비틀거리며 골목을 돌아 나오고/ 그러다 비가 되어/ 아무 집 담장에나 무심히 얼룩진다/ 비로소 바람은/ 담장에도 분다//
2. 우산 속의 꿈// 이리 와/ 남루한 우산 속에/ 우리의 두 손이 부딪치도록/ 저것 봐, 우리의 눈빛이 빗물에 씻겨가는 걸/ 씻겨가 몸살 앓으며 사방에서 꺼져가고 있는 걸,/ 한데, 우리의 발자욱 속엔 무엇이 고여 잠시나마 빛나며 남아 있는 걸일까// 잃어버린 온갖 것들은 풀잎 위에 찬란히 반짝이는데/ 뒤에 숨어 우리가 만나는 것은 부끄러운 졸음뿐/ 숨어야지 우리는/ 우산 속으로/ 숨어, 저 비 속에서 우리의 맑은 모음을 거두어들이고/ 매끄러운 허리를 그대에게 보여줘야지/ 그대의 흰 이빨을 옆구리 연한 살점 위에 얼마나 아프게 느껴보고 싶은 내 몸인데// 어디로 데려갈 것인가/ 저 작은 빛다발이 기어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 마지막 잠자리를 밝혀주다가/ 결 고운 머리칼로 우리의 꿈속을 저도 꿈꾸며 헤집고 다니려나/ 우리 두 손이 닿았던 자리에 남은 저릿한 아픔, 스러져 잠들지 못하는 저 아픔은/ 이제 누구의 것이 되어 빛보다 밝은 어둠으로 비 속에 서 있는 것일까// 내 추운 이마가 그대의 가슴에 닿을 때/ 보인다 우리의 뒷모습이/ 버릇처럼 팔을 젓다가/ 저녁이면 빈 바다만 하나씩 안고 돌아눕는/ 우산의 뒷모습이//
3.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조가 다가오는 인천 뻘밭에/ 옆으로 기는 새끼 게 되어 만나랴/ 갑각의 등은 잠시 벗어두고 속살끼리 만나랴/ 그렇게 어우러져 꽃불 티우고 살과 피 한데 엉겨 한 이불 덮으면/ 벗은 우리의 등이 시렵지 않으랴/ 살 속으로 살 속으로 서로 불러도/ 우리의 등에는 인천 뻘밭 찬비 내리고/ 두고 온 껍질의 울음소리에/ 부끄러우리, 잠이 깨도 깨지 않을 이 목마름// 신탄(新灘) 강가에 두 마리 모래무지 되어 만나지/ 한 모래 먹고 한 물 마시고/ 종일 꿈꾸는 얼굴로 만나지/ 그렇게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둘 다 죽어버리면/ 빈 강은 남아 외로워할 거다/ 아하, 바람처럼 소리를 낼 거다/ 뚜벅뚜벅 말을 할 거다// 흘러가자 우리/ 물이 되어 흐르노라면/ 우리 두 목숨 사이로/ 지난날 흘리고 온/ 우리의 목소리와 몸짓들이/ 함께 젖어 흐르겠지/ 그 긴 흐름 속에서 우리는 만나/ 부끄러움 없이 우리의 아이를 낳아 키우고/ 키워 저 어둠 속으로 또 흐르게 하자//

장마 / 김사인
공작산 수타사로/ 물미나리나 보러 갈까/ 패랭이꽃 보러 갈까/ 구죽죽 비는 오시는 날/ 수타사 요사채 아랫목으로/ 젖은 발 말리러 갈까/ 들창 너머 먼 산이나 종일 보러 갈까/ 오늘도 어제도 그제도 비 오시는 날/ 늘어진 물푸레 곁에서 함박꽃이나 한참 보다가/ 늙은 부처님께 절도 두어 자리 해바치고/ 심심하면/ 그래도 심심하면//

노숙(露宿) / 김사인
헌 신문지 같은 옷가지들 벗기고/ 눅눅한 요위에 너를 날것으로 뉘고 내려다본다/ 생기 잃고 옹이 진 손과 발이며/ 가는 팔다리 갈비뼈 자리들이 지쳐보이는구나/ 미안하다/ 너를 부려 먹이를 얻고/ 여자를 안아 집을 이루었으나/ 남은 것은 진땀과 악몽의 길뿐이다/ 또다시 낯선 땅 후미진 구석에/ 순한 너를 뉘었으니/ 어찌하랴/ 좋던 날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만/ 네 노고의 헐한 삯마저 치를 길 아득하다/ 차라리 이대로 너를 재워둔 채/ 가만히 떠날까도 싶어 네게 묻는다/ 어떤가 몸이여//

목포 / 김사인
배는 뜰 수 없다 하고/ 여관 따뜻한 아랫목에 엎드려/ 꿈결인 듯 통통배 소리나 듣는다/ 그 곁으로 끼룩거리며 몰려다닐 갈매기들을 떠올린다/ 희고 둥근 배와 붉은 두 발들/ 그 희고 둥글고 붉은 것들을 뒤에 남기고/ 햇빛 잘게 부서지는 난바다 쪽/ 내 졸음의 통통배는 보이지 않는 길을 따라 멀어져가리라// 옛 애인은 그런데 이 겨울을 잘 건너고 있을까/ 묵은 서랍이나 뒤적거리고 있을지도 모르지 헐렁한 도꾸리는 입고/ 희고 둥근 배로 엎드려 테레비를 보다가/ 붉은 입술 속을 드러내고 흰 목을 젖히며 깔깔 웃고 있을지도,/ 갈매기의 활강처럼 달고 매끄러운 생각들/ 아내가 알면 혼쭐이 나겠지/ 참으려 애쓰다가 끝내 수저를 내려놓고/ 방문을 탁 닫고 들어갈 게 뻔하지만/ 옛날 애인은 잘 있는가/ 늙어가며 문득 생각키는 것이, 아내여 꼭 나쁘달 일인가/ 밖에는 바람 많아 배가 못 뜬다는데/ 유달산 밑 상보만한 창문은 햇빛으로 고요하고/ 나는 이렇게 환한 자부럼 사이로 물길을 낸다// 시린 하늘과 겨울 바다 저쪽/ 우이도 후박나무숲까지는 가야하리라/ 이제는 허리가 굵어져 한결 든든할 잠의 복판을/ 저 통통배를 타고 꼭 한번은 가닿아야 하리라/ 코와 귀가 발갛게 얼어서라도//

통영 / 김사인
설거지를 마치고/ 어린 섬들을 안고 어둑하게 돌아앉습니다/ 어둠이 하나씩 젖을 물립니다// 저녁비 호젓한 서호시장/ 김밥좌판을 거두어 인 너우니댁이/ 도구통같이 튼실한 허리로 공차, 일어서자// 미륵산 비알 올망졸망 누워계시던 먼촌 처가 할매 할배들께서도/ 억세고 정겨운 통영 말로 긴 봄장마를 고시랑고시랑/ 나무라시며/ 흰 뼈들 다시 접어 공, 돌아눕는 저녁입니다// 저로 말씀 드리면, 이래봬도/ 충청도 보은극장 앞에서 한때는 놀던 몸/ 허리에 걸리는 저기압대에 홀려서// 앳된 보슬비 업고 걸려 민주지산 덕유산 지나 지리산 끼고 돌아/ 진양 산청 진주 남강 훌쩍 건너 단숨에 통영 충렬사까지 들이닥친/ 속없는 건달입네다만,// 어진 막내 처제가 있어/ 형부! 하고 쫓아나올 것 같은 명정골 따뜻한 골목입니다/ 동백도 벚꽃도 이젠 지엽고/ 몸 안 쪽 어디선가 씨롱씨롱/ 여치 하나 자꾸만 우는 저녁 바다입니다//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 / 김사인
하느님/ 가령 이런 시는/ 다시 한번 공들여 옮겨 적는 것만으로/ 제가 새로 시 한 벌 지은 셈 쳐주실 수 없을까요//
가다가 서서 잠시 먼 산을 보고 가다가 쉬며 또 그러네// 얼마후 또 한 사람이 다리를 건너네/ 빠른 걸음으로 지나서 어느새 자취도 없고/ 그가 지나고 만 다리만 혼자 허전하게 남아있네// 다리를 빨리 지나가는 사람은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이네//
라는 시인데/ (좋은 시는 얼마든지 있다고요?)/ 안되겠다면 도리 없지요/ 그렇지만 하느님/ 너무 빨리 읽고 지나쳐/ 시를 외롭게는 말아 주세요, 모쪼록//
"내 너무 별을 쳐다보아/ 별들은 더럽혀 지지 않았을까// 내 너무 하늘을 쳐다보아/ 하늘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덜덜 떨며 이 세상 버린 영혼입니다//
* 이성선(李聖善) 시인(1941~2001. 5)의 「다리」 전문과 「별을 보며」 첫 부분을 빌리다.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 / 김사인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그 처자/ 발그라니 언 손에 얹혀/ 나 인생 탕진해버리고 말겠네/ 오갈 데 없는 그 처자/ 혼자 잉잉 울 뿐 도망도 못 가지/ 그 처자 볕에 그을어 행색 초라하지만/ 가슴과 허벅지는 소젖보다 희리/ 그 몸에 엎으러져 개개 풀린 늦잠을 자고/ 더부룩한 수염발로 눈꼽을 떼며/ 날만 새면 나 주막 골방 노름판으로 쫓아가겠네/ 남는 잔이나 기웃거리다/ 중늙은 주모에게 실없는 농도 붙여보다가/ 취하면 뒷전에 고꾸라져 또 하루를 보내고/ '나 갈라네' 아무도 안 듣는 인사 허공에 던지고/ 허청허청 별빛 지고 돌아오겠네/ 그렇게 한두 십년 놓아 보내고/ 맥없이 그 처자 몸에 아이나 서넛 슬어놓겠네/ 슬어놓고 나 무능하겠네/ 젊은 그 여자/ 혼자 잉잉거릴 뿐 갈 곳도 없지/ 아이들은 오소리 새끼처럼 천하게 자라고/ 굴 속같이 어두운 토방에 팔 괴고 누워/ 나 부연 들창 틈서리 푸설거리는 마른 눈이나 내다보겠네/ 쓴 담배나 뻑뻑 빨면서 또 한 세월 보내겠네/ 그 여자 허리 굵어지고 울음조차 잦아들고/ 두 눈에 파랗게 불이 올 때쯤/ 나 덜컥 몹쓸 병 들어 시렁 밑에 자리 보겠네/ 말리는 술도 숨겨놓고 질기게 마시겠네/ 몇 해고 애를 먹어 여자 머리 반쯤 셀 때/ 마침내 나 먼저 숨을 놓으면/ 그 여자 이제는 울도 웃도 못하리/ 나 피우던 쓴 담배 따라 피우며/ 못 마시던 술이나 배우리 욕도 배우리// 이만하면 제법 속절없는 사랑 하나 안 되겠는가/ 말이 될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도 모른다 / 김사인
나의 옛 흙들은 어디로 갔을까/ 땡볕 아래서도 촉촉하던 그 마당과 길들은 어디로 갔을까/ 나의 옛 개울은 따갑게 익던 자갈들은 어디로 갔을까/ 나의 옛 앞산은, 밤이면 굴러다니던 도깨비불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런닝구와 파자마 바람으로도 의젓하던 옛 동네어른들은 어디로 갔을까 누님들, 수국 같던 웃음 많던 나의 옛 누님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나의 옛 배고픔들은 어디로 갔을까 설익은 가지의 그 비린내는 어디로 갔을까 시름 많던 나의 옛 젊은 어머니는/ 나의 옛 형님들은, 그 딴딴한 장딴지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나의 옛 비석치기와 구슬치기는, 등줄기를 후려치던 빗자루는, 나의 옛 아버지의 힘센 팔뚝은, 고소해하던 옆집 가시내는 어디로 갔을까/ 나의 옛 무덤들은, 흰머리 할미꽃과 사금파리 살림들은 어디로 갔을까/ 나의 옛 봄날 저녁은 어디로 갔을까 키 큰 미루나무 아래 강아지풀들은, 낮은 굴뚝과 노곤하던 저녁 연기는/ 나의 옛 캄캄한 골방은 어디로 갔을까 캄캄한 할아버지는, 캄캄한 기침소리와 캄캄한 고리짝은, 다 어디로 흩어졌을까/ 나의 옛 나는 어디로 갔을까, 고무신 밖으로 발등이 새카맣던 어린 나는 어느 거리를 떠돌다 흩어졌을까//

고향의 누님 / 김사인
한 주먹 재처럼 사그라져/ 먼데 보고 있으면/ 누님, 무엇이 보이는가요./ 아무도 없는데요./ 달려나가 사방으로 소리쳐 봐도/ 사금파리 끝에 하얗게 까무라치는/ 늦가을 햇살 뿐/ 주인 잃은 지게만/ 마당 끝에 모로 자빠졌는데요./ 아아, 시렁에 얹힌 메주 덩어리처럼/ 올망졸망 아이들은 천하게 자라/ 삐져나온 종아리 맨살이/ 차라리 눈부신데요./ 현기증처럼 세상 노랗게 흔들리고/ 흔들리는 세상을/ 손톱이 자빠지게 할퀴어 잡고 버텨와/ 한 소리 비명으로/ 마루 끝에 주저앉은 누님,/ 늦가을 스산한 해거름이네요./ 죽은 사람도 산 사람도/ 떠나 소식 없고/ 부뚜막엔 엎어진 빈 밥주발/ 헐어진 토담 위로는 오갈든 가난의/ 호박 넝쿨만 말라붙어 있는데요./ 삽짝 너머 저 빈들 끝으로/ 누님,/ 무엇이 참말 오고 있나요.//

깊이 묻다 / 김사인
사람들 가슴에/ 텅텅 빈 바다 하나씩 있다// 사람들 가슴에/ 깊게 사무치는 노래 하나씩 있다/ 늙은 돌배나무 뒤틀어진 그림자 있다// 사람들 가슴에/ 겁에 질린 얼굴 있다/ 충혈된 눈들 있다// 사람들 가슴에/ 막다른 골목 조선낫 하나씩 숨어 있다/ 파란 불꽃 하나씩 있다// 사람들 가슴에/ 후두둑 가을비 뿌리는 대숲 하나씩 있다//

예래 바다에 묻다 / 김사인
눈 감고 내 눈 속 희디흰 바다를 보네/ 설핏 붉어진 낯이 자랑이었나 그대 알몸은/ 그리워 이가 갈리더라 하면 믿어는 줄거나/ 부질없이 부질없이 손톱만 물어뜯었다 하면 믿어는 줄거나/ 내 늙음 수줍어/ 아닌 듯 지나가며 곁눈으로만 그댈 보느니/ 어쩔거나/ 그대 철없어 내 입안엔 신 살구내음만 가득하고/ 몸은 파계한 젊은 중 같아 신열이 오르니/ 그립다고 그립다고 몸써리치랴/ 오 빌어먹을, 나는 먼 곳에 마음을 벗어두고 온 사내/ 그대 눈부신 무구함 앞에/ 상한 짐승처럼 속울음 삼켜 나 병만 깊어지느니//
* 예래는 제주의 중문 서쪽 바닷가 마을.

지상의 방 한칸 / 김사인
세상은 또 한 고비 넘고/ 잠이 오지 않는다/ 꿈결에도 식은 땀이 등을 적신다/ 몸부림치다 와 닿는/ 둘째놈 애린 손끝이 천 근으로 아프다/ 세상 그만 내리고만 싶은 나를 애비라 믿어/ 이렇게 잠이 평화로운가/ 바로 뉘고 이불을 다독여 준다/ 이 나이토록 배운 것이라곤 원고지 메꿔 밥비는 재주 뿐/ 쫓기듯 붙잡는 원고지 칸이/ 마침내 못 건널 운명의 강처럼 넓기만 한데/ 달아오른 불덩어리/ 초라한 몸 가릴 방 한칸이/ 망망천지에 없단 말이냐/ 웅크리고 잠든 아내의 등에 얼굴을 대본다/ 밖에는 바람소리 사정 없고/ 며칠 후면 남이 누울 방바닥/ 잠이 오지 않는다//

빈 방 / 김사인
나 이제 눕네/ 봄풀들은 꽃도 없이 스러지고/ 우리는 너무 멀리 떠나왔나 봐/ 저물어가는데// 채독 걸린 무서운 아이들만/ 장다리밭에 뒹굴고/ 아아 꽃밭은 결딴났으니// 봄날의 좋은 별과/ 환호하던 잎들과/ 묵묵히 둘러앉던 저녁 밥상 순한 이마들은/ 어느 처마 밑에서 울고 있는가// 나는 눕네 아슬한 가지 끝에/ 늙은 까마귀같이/ 무서운 날들이/ 오고 있네// 자, 한 잔/ 눈물겨운 것이 어디 술뿐일까만/ 그래도 한 잔//

공부 / 김사인
'다 공부지요'/ 라고 말하고 나면/ 참 좋습니다// 어머님 떠나시는 일/ 남아 배웅하는 일/ '우리 어매 마지막 큰 공부 하고 계십니다'/ 말하고 나면 나는/ 앉은뱅이 책상 앞에 무릎 꿇는 착한 소년입니다// 어디선가 크고 두터운 손이 와서/ 애쓴다고 머리 쓰다듬어 주실 것 같습니다/ 눈만 내리깐 채/ 숫기없는 나는/ 아무 말 못하겠지요만/ 속으로는 고맙고도 서러워/ 눈물 핑 돌겠지요만// 날이 저무는 일/ 비 오시는 일/ 바람 부는 일/ 갈잎 지고 새움 돋듯/ 누군가 가고 또 누군가 오는 일/ 때때로 그 곁에 골똘히 지켜섰기도 하는 일// '다 공부지요' 말하고 나면/ 좀 견딜만 해집니다//

교보생명 광화문 글판


졸업 / 김사인
선생님 저는 작은 지팡이 하나 구해서/ 호그와트로 갈까 해요/ 아 좋은 생각,/ 그것도 좋겠구나./ 서울역 플랫폼 3과 1/4번 홈에서 옛 기차를 타렴./ 가방에는 장난감과 잠옷과 시집을 담고/ 부지런한 부엉이와 안짱다리 고양이를 데리고/ 호그와트로 가거라 울지 말고/ 가서 마법을 배워라./ 나이가 좀 많겠다만 입학이야 안되겠니/ 이곳은 모두 머그들/ 숨 막히는 이모와 이모부들/ 고시원 볕 안 드는 쪽방 뒤로/ 한 블록만 삐끗하면 달려드는 '죽음을 먹는 자들'/ 그래 가거라/ 인자한 덤블도어 교장 선생님과 주근깨 친구들/ 목이 덜렁거리지만 늘 유쾌한 유령들이 사는 곳./ 빗자루 타는 법과 초급 변신술을 떼고 나면, 배고프지 않는 약초 욕먹어도 슬퍼하지 않는 약초 분노에 눈 뒤집히지 않는 약초를 배우거라. 학자금 융자 없애는 마법 알바 시급 올리는 마법 오르는 보증금 막는 마법을 익히거라. 투명 망토도 언젠가 쓸모가 있겠지./ 그곳이라고 먹고 살 걱정 없을까마는/ 서서히 영혼을 잠식하는 저 흑마술을 잘 막아야 한다./ 그때마다 선량한 사냥터지기 해그리드 아저씨를 생각하렴. 나도 따라가 약초밭 돌보는 심술 첨지라도 되고 싶구나./ 머리 셋 달린 괴물의 방을 지나/ 현자의 돌에 닿을 때까지/ 부디 건투를 빈다/ 불사조기사단 만세!//

적막에 바침 / 김사인
그대는 강 건너서 잠이 드시고/ 곤하여 가랑가랑 코도 고시고/ 나는 나는 창 저편/ 강물로 스미는 눈송이에나 기대네/ 무심한 서양 노래나 따라서 흘러가보네/ 그대 깊은 잠 흔들릴세라/ 마지막 한잔을 조심히 비우고/ 목젖 떠는 소리도 조마로워라/ 강 건너 단잠 속에 그대를 묻고/ 이만치서 누리는 적적한 평화/ 이 생각도 저 생각도 나지 않고/ 먹먹하게 피어오르는/ 새벽 물안개//

공휴일 / 김사인
중량교 난간에 비슬막히 세워 놓고/ 사내 하나 가족사진을 찍는데/ 햇볕에 절어 얼굴 검고/ 히쭉비쭉 신바람 나 가족사진 찍는데/ 아이 하나 들춰 업은 촌스러운 마누라는/ 생전에 처음 일 쑥쓰럽고 좋아서/ 발그란 얼굴이 어쩔 줄 모르는데/ 큰애는 엄마 곁에 착 붙어서/ 학교서 배운 대로 차렷 하고/ 눈만 떼굴떼굴 숨죽이고 섰는데/ 저런, 큰애 곁 다릿발 틈으로/ 웬 코스모스 하나 비죽이 내다보네/ 짐을 맡아 들고 장모인지 시어머니인지는/ 오가는 사람들 저리 좀 비키라고/ 부산도 한데//

그림자가 없다 / 김사인
내 곁의 여자는 손거울을 꺼내 루즈를 바른다. 맞은편 짧은 치마의 아가씨가 그물스타킹 발을 벗어 구두 위에 얹고 조는 동안, 그 곁 검정 배바지의 50대는 다리를 턱 벌리고 오가는 사람을 아래 위로 훑는다. 손잡이에 매달려 통화에 빨려든 젊은 여성은 배꼽과 허리만 남긴 채 이미 이곳에 없고, 그 앞에서 발을 떨며 문자메세지를 찍어대는 노랑 머리 대학생의 구멍난 청바지 틈엔 허연 살이 아프다.// 다들 고향에는 윗대 산소며 큰집 작은집이며 논둑길이며 앞산 밑 개울도 있던, 봄이면 우물가로 앵두꽃도 한철이던, 할아버지는 사랑에서 에에-퉤 하고 위엄있게 가래침도 뱉던 집 자손들이다.// 어디서 또 만나겠는가/ 만나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그림자가 없으니.//

바짝 붙어서다 / 김사인
굽은 허리가/ 신문지를 모으고 상자를 접어 묶는다/ 몸빼는 졸아든 팔순을 담기에 많이 헐겁다/ 승용차가 골목 안으로 들어오자/ 벽에 바짝 붙어 선다/ 유일한 혈육인양 작은 밀차를 꼭 잡고// 저 고독한 바짝 붙어서기/ 더러운 시멘트벽에 거미처럼/ 수조 바닥의 늙은 가오리처럼 회색벽에/ 낮고 낮은 저 바짝 붙어서기// 차가 지나고 나면/ 구겨졌던 종이같이 할머니는/ 천천히 다시 펴진다/ 밀차의 바퀴 두 개가/ 어린 염소처럼 발꿈치를 졸졸 따라간다// 늦밤에 그 방에 켜질 헌 삼성테레비를 생각하면/ 기운 싱크대와 냄비들/ 그 앞에 서있을 굽은 허리를 생각하면/ 목이 메인다/ 방 한 구석 힘주어 꼭 짜놓은 걸레를 생각하면//

또 어느 별의 주막으로 그는 2차를 떠날 것인가 / 김사인
해맑은 영혼과 총명으로 빛나던 눈동자 하나가/ 이제 먼 별로 돌아가 버렸다. 하기는, 구차하고 치욕스런 세상/ 공부가 별 소용이 없겠다고 여겨 조물주께서는 이 영혼을 앞당겨/ 데려갔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이제 더는 그의 조그맣고 따뜻한 손을 잡아볼 수/ 없다는 말이 아닌가. 반음계쯤 상기된 목소리로 누구 앞에서도/ 굴함이 없던 그 당돌한 변설을 더는 돌아볼 길 없어졌다는/ 것이 아닌가./ 저 아득하고 전율스러운 별그림들로 미루어 그는 일찌거니/ 이생의 공부를 남몰래 마쳐두었던 듯도 하다. 그러기에 가난을/ 훈장처럼 달고도 오고 감에 추호의 거침도 없었던 것이리라./ 허나, 풀쩍 남겨두고 간 <귀천>의 빈자리, 부산식당.의/ 헐한 두부 안주 앞을 무엇으로 채울 것이냐, 기가 막혀서/ 두 손만 비비고 있는 이 한심한 벗들은,/ 강용대여, 강용대여, 강용대여. 작은 체구 속에 크고/ 컸던 사람이여!//

허공장경(虛空藏經) / 김사인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학교를 중퇴한 뒤/ 권투선수가 되고 싶었으나/ 공사판 막일꾼이 되었다/ 결혼을 하자 더욱 어려워/ 고향으로 내려가 농사를 지었다/ 떨어먹고 도로 서울로 와/ 다시 공사판/ 급성신부전이라 했다/ 삼남매 장학적금을 해약하고/ 두 달 밀린 외상 쌀값 뒤로/ 무허가 철거장이 날아왔다/ 산으로 가 목장을 맸다/ 내려앉을 땅은 없어/ 재 한 줌으로 다시 허공에 뿌려졌다/ 나이 마흔둘.//

중과부적(衆寡不敵) / 김사인
조카학비 몇 푼 거드니 아이들 등록금이 빠듯하다/ 마을금고 이자는 이쪽 카드로 빌려 내고/ 이쪽은 저쪽 카드로 돌려 막는다. 막자/ 시골 노인들 팔순 오고 며칠 지나/ 관절염으로 장모 입원 하신다. 다시/ 자동차세와 통신요금내고/ 은행카드 대출 할부금 막고 있는데/ 오래 고생하던 고모 부고 온다. 문상/ 마치고 막 들어서자/ 처남 부도나서 집 넘어 갔다고/ 아내 운다.// '젓가락은 두 자루, 펜은 한 자루...중과부적!'// 이라 적고 마치려는데,/ 다시 주차공간미확보 과태료 날아오고/ 치과 다녀온 딸아이가 이를 세 개나 빼야 한다며 울상이다/ 철렁하여 또 얼마냐 물으니/ 제가 어떻게 아느냐고 성을 낸다.//

새 / 김사인
거센 바람 속에/ 새가 난다/ 날아/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파득이는/ 저 혼신의 날개짓이/ 넒은 강/ 건널까/ 저 거센 힘과 파닥임 사이/ 아슬한 균형 박차고/ 기어이 날아갈까/ 날아/ 못가고 몸 솟구쳐 이름없는 새/ 오른다/ 바람의 숨막히는 쇠그물의 끝을 향해 작은 새/ 피묻어 오른다/ 유연한 포물선 아니라/ 예리한 비수로 파랗게 날 서/ 수직으로, 온몸을 던져 수직으로/ 솟구쳐/ 바람의 멱통을 쪼아, 쪼아/ 피투성이 육신을/ 쪼아/ 살아/ 건널까 작은 새/ 죽음의 바람을 뚫고 넓은 강/ 몸은 벗어 장사지내도 그 예민한 부리/ 살아 건널까/ 저 새/ 기어이//

봄밤 / 김사인
나 죽으면 부조돈 오마넌은 내야 돼 형, 요새는/ 삼마넌짜리도 많던데 그래두 나한테는 오마넌은 내야 돼/ 알었지 하고 노가다 이아무개(47세)가 수화기 너머에서/ 홍시 냄새로 출렁이는 봄밤이다.// 어이, 이거 풀빵이여 풀빵 따끈할 때 먹어야 되는디,/ 시인 박아무개(47세)가 화통 삶는 소리를 지르며/ 점잖은 식장 복판까지 쳐들어와 비닐 봉다리를 쥐어주고는/ 우리 뽀뽀나 하자고, 뽀뽀를 한번 하자고/ 꺼멓게 술에 탄 얼굴을 들이미는 봄밤이다.// 좌간 우리는 시작과 끝을 분명히 해야여 자슥들아 하며/ 용봉탕집 장 사장(51세)이 일단 애국가부터 불러제끼자,/ 하이고 우리집서 이렇게 훌륭한 노래 들어보기는/ 츰이네유 해싸며 푼수 주모(50세)가/ 빈자리 남은 술까지 들고 와 연신 부어대는 봄밤이다.// 십이마넌인데 십마넌만 내세유, 해서 그래두 되까유 하며/ 지갑을 뒤지다 결국 오마넌은 외상을 달아놓고, 그래도/ 딱 한 잔만 더, 하고 검지를 세워 흔들며 포장마차로/ 소매를 서로 끄는 봄밤이다.// 죽음마저 발갛게 열꽃이 피어/ 강아무개 김아무개 오아무개는 먼저 떠났고/ 차라리 저 남쪽 갯가 어디로 흘러가/ 칠칠치못한 목련같이 나도/ 시부적 시부적 떨어나졌으면 싶은// 이래저래 한 오마넌은/ 더 있어야 쓰겠는 밤이다.//

여름날 / 김사인
풀들이 시드렁거드렁 자랍니다/ 제 오래비 시누 올케에다/ 시어미 당숙 조카 생질 두루 어우러져/ 여름 한낮 한가합니다/ 봉숭아 채송화 분꽃에 양아욱/ 산나리 고추가 핍니다/ 언니 아우 함께 핍니다/ 암탉은 고질고질한/ 병아리 두엇 데리고/ 동네 한 바퀴 의젓합니다/ 나도 삐약거리는 내 새끼 하나하고/ 그 속에 앉아/ 어쩌다 비 개인 여름 한나절/ 시드렁거드렁 그것들 봅니다/ 긴 듯도 해서 긴 듯도 해서 눈이 십니다//

늦가을 / 김사인
그여자 고달픈 사랑이 아파 나는 우네/ 불혹을 넘어/ 손마디는 굵어지고/ 근심에 지쳐 얼굴도 무너졌네// 사랑은/ 늦가을 스산한 어스름으로/ 밤나무 밑에 숨어 기다리는 것/ 술 취한 무리에 섞여 언제나/ 사내는 비틀비틀 지나가는 것/ 젖어드는 오한 다잡아 안고/ 그 걸음 저만치 좇아 주춤주춤/ 흰고무신 옮겨 보는 것// 적막천지/ 한밤 중에 깨어 앉아/ 그 여자 머리를 감네/ 올 사람도 갈 사람도 없는 흐린 불 아래/ 제 손만 가만가만 만져보네//

오누이 / 김사인
57번 버스 타고 집에 오는 길/ 여섯살쯤 됐을까 계집아이 앞세우고/ 두어살 더 먹었을 머스마 하나이 차에 타는데/ 꼬무락꼬무락 주머니 뒤져 버스표 두 장 내고/ 동생 손 끌어다 의자 등 쥐어주고/ 저는 건드렁 손잡이에 겨우겨우 매달린다/ 빈 자리 하나 나니 동생 데려다 앉히고/ 작은 것은 안으로 바짝 당겨 앉으며/ '오빠 여기 앉아' 비운 자리 주먹으로 탕탕 때린다/ '됐어' 오래비자리는 짐짓 퉁생이를 놓고/ 차가 급히 설 때마다 걱정스레 동생을 바라보는데/ 계집애는 앞 등받이 두 손으로 꼭 잡고/ '나 잘하지' 하는 얼굴로 오래비 올려다본다// 안 보는 척 보고 있자니/ 하, 그 모양 이뻐/ 어린 자식 버리고 간 채아무개 추도식에 가/ 술한테만 화풀이하고 돌아오는 길/ 내내 멀쩡하던 눈에/ 그것들 보니/ 눈물 핑 돈다//

꽃 / 김사인
모진 비바람에/ 마침내 꽃이 누웠다// 밤내 신열에 떠 있다가/ 나도 푸석한 얼굴로 일어나/ 들창을 미느니// 살아야지// 일어나거라, 꽃아/ 새끼들 밥 해멕여/ 학교 보내야지//

강으로 가서 꽃이여 / 김사인
이마에 손을 얹고 꽃이여/ 이마에 여윈 손 얹고 꽃이여// 어둡게 흘러가는 강가로 가자/ 어린 자갈들은 추위에 입술 파랗고/ 늙은 여뀌떼 거친 종아리// 강으로 가서 우리는/ 강으로 가서/ 다만 강물을 보자// 하늘엔 찬 별도 총총하리/ 시든 풀의 굽은 등엔 서리가 희리// 취한 듯 슬픔인 듯 강으로 가서/ 다만 묵묵히 강물을 보자/ 이마에 손 얹고 꽃이여//

코스모스 / 김사인
누구도 핍박해본 적 없는 자의/ 빈 호주머니여// 언제나 우리는 고향에 돌아가/ 그간의 일들을/ 울며 아버님께 여쭐 것인가//

화양연화(花樣年華) / 김사인
모든 좋은 날들은 흘러가는 것 잃어버린 주홍 머리핀처럼 물러서는 저녁 바다처럼. 좋은 날들은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처럼 새나가지 덧없다는 말처럼 덧없이, 속절없다는 말처럼이나 속절없이. 수염은 희끗해지고 짓궂은 시간은 눈가에 내려앉아 잡아당기지. 어느덧 모든 유리창엔 먼지가 앉지 흐릿해지지. 어디서 끈을 놓친 것일까. 아무도 우리를 맞당겨주지 않지 어느날부터. 누구도 빛나는 눈으로 바라봐주지 않지.// 눈멀고 귀먹은 시간이 곧 오리니 겨울 숲처럼 더는 아무 것도 애닯지 않은 시간이 다가오리니// 잘 가렴 눈물겨운 날들아./ 작은 우산 속 어깨를 겯고 꽃장화 탕탕 물장난 치며/ 슬픔 없는 나라로 너희는 가서/ 철모르는 오누인 듯 살아가거라./ 아무도 모르게 살아가거라.//

귀가 / 김사인
자동차 굉음 속/ 도시고속도로 갓길을/ 누런 개 한 마리가 끝없이 따라가고 있다// 살아 돌아갈 수 있을까// 말린 꼬리 밑으로 비치는/ 그의 붉은 항문//

딸년을 안고 / 김사인
한 살배기 딸년을 꼭 안아보면/ 술이 번쩍 깬다 그 가벼운 몸이 우주의 무게인 듯/ 엄숙하고 슬퍼진다./ 이 목숨 하나 건지자고/ 하늘이 날 세상에 냈나 싶다./ 사지 육신 주시고 밥도 벌게 하는가 싶다./ 사람의 애비 된 자 어느 누구 안 그러리./ 그런데 소문에는/ 단추 하나로 이 목숨들 단숨에 녹게 돼 있다고 하고/ 미친 세월 끝없을 거라고도 하고/ 하여, 한 가지 부탁한다 칼 쥔 자들아./ 오늘 하루 일찍 돌아가/ 입을 반쯤 벌리고 잠든 너희 새끼들/ 그 바알간 귓밥 한번 들여다보아라./ 귀 뒤로 어리는 황홀한 실핏줄들/ 한 번만 들여다보아라./ 부탁한다.//

새벽별을 보며 ㅡ청주의 도종환형께 / 김사인
서울에서 보는 별은 흐리기만 합니다/ 술에 취해 들어와/ 그래도 흩어지는 정신 수습해/ 변변찮은 일감이나마 잡고 밤을 샙니다/ 눈은 때꾼하지만 머리는 맑아져 창 밖으로 나서면/ 새벽별 하나/ 저도 한 잠 못 붙인 피로한 눈으로/ 나를 건너다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래 서로 기다려온 사람처럼/ 말없이 마주 봅니다/ 살기에 지쳐 저는 많은 걸 잃었습니다/ 잃은 만큼 또 다른 것을 얻기도 했습니다/ 그대도 시골 그곳에서 저 별을 보며/ 고단한 얼굴 문지르고 계신지요// 부질없을지라도/ 먼 데서 반짝이는 별은 눈물겹고/ 이 새벽에/ 별 하나가 그대와 나를 향해 깨어 있으니/ 우리 서 있는 곳 어디쯤이며/ 또 어느 길로 가야 하는지/ 저 별을 보면 알 듯 합니다/ 딴엔 알 듯도 합니다//

네거리에서 / 김사인
그럴까/ 그래 그럴지도 몰라/ 손 뻗쳐도 뻗쳐도/ 와닿는 것은 허전한 바람, 한 줌 바람/ 그래도 팔 벌리고 애끓어 서 있을 수 밖에 없는/ 살 닿는 안타까움인지도 몰라// 몰라 아무것도 아닌지도/ 돌아가 어둠 속/ 혼자 더듬어 마시는 찬물 한 모금인지도 몰라/ 깨지 못하는, 그러나 깰 수 밖에 없는 한 자리/ 허망한 꿈인지도 몰라/ 무심히 떨어지는 갈잎 하나인지도 몰라// 그러나 또 무엇일까/ 고개돌려도 솟구쳐 오르는 울음같은 이것/ 끝내 몸부림으로 나를 달려가게 하는 이것// 약속도 무엇도 아닌 허망한 기약에 기대어/ 칼바람속에 나를 서게 하는 이것/ 무엇일까//

달팽이 / 김사인
귓속이 늘 궁금했다// 그 속에는 달팽이가 하나씩 산다고 들었다/ 바깥 기척에 허기진 그가 저 쓸쓸한 길을 냈을 것이다/ 길 끝에 입을 대고/ 근근이 당도하는 소리 몇 낱으로 목을 축였을 것이다/ 달팽이가 아니라/ 도적굴로 붙들려 간 옛적 누이거나/ 평생 앞 못보던 외조부의 골방이라고도 하지만/ 부끄러운 저 구멍 너머에서는/ 누구건 달팽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 안에서 달팽이는/ 천 년 쯤을 기약하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고 한다/ 귀가 죽고/ 귓속을 궁금해 할 그 누구조차 사라지고/ 길은 무너지고 모든 소리와 갈증이 그친 뒤에도/ 한없이 느린 배밀이로/ 달팽이는 오래오래 간다는 것이다/ 망해버린 왕국의 표장처럼/ 네 개의 뿔을 고독하게 치켜들고/ 더듬더듬/ 먼 길을//

풍경의 깊이 / 김사인
바람 불고 키 낮은 풀들 파르르 떠는데/ 눈여겨 보는 이 아무도 없다/ 그 가녀린 것들의 생의 한 순간,/ 이 외로운 떨림들로 해서/ 우주의 저녁 한 때가 비로서 저물어간다/ 그 떨림의 이쪽에서 저쪽 사이,/ 그 순간의 처음과 끝 사이에는/ 무한히 늙은 옛날의 고요가,/ 아니면 아직 오지 않은 어느 시간에/ 속할 어린 고요가/ 보일 듯 말듯 옅게 묻어 있는 것이며,/ 그 나른한 봄볕 속에서 나는/ 백년이나 이백 년 쯤/ 아니라면 석 달 열흘 쯤이라도/ 곤히 잠들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석달이며 열흘이며 하는/ 이름만큼의 내 무한 곁으로/ 나비나 벌이나 별로 고울 것 없는/ 버러지들이 무심히 스쳐가기도 할 것인데,/ 그 적에 나는 꿈결엔 듯/ 그 작은 목숨들의 더듬이나 날개나/ 앳된 다리에 실려온 낯익은 냄새가/ 그 어느 생애선가 한결 깊어진/ 그대의 눈빛인 걸 알아보게 되리라 생각한다//

치욕의 기억 / 김사인
영화배우 전지현을 닮은 처녀가 환하게 온다 발랄무쌍/ 목발을 짚고 (다만 목발을 짚고) 스커트에 하이힐 스카프/ 는 옥빛 하늘도 쾌청 그런데 (뭔지 생소하다 그런데)// 오른쪽 하이힐이 없다/ 오른쪽 스타킹이 없다/ 오른쪽 종아리가 무릎이 허벅지가 없다// 나는 스쳐 지나간다/ 돌아보지 못한다// 묻건데/ 이러고도 生은 싸가지가 있는 것이냐!//

조용한 일 / 김사인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때늦은 사랑 / 김사인
내 하늘 한켠에 오래 머물다/ 새 하나/ 떠난다/ 힘없이 구부려 모았을/ 붉은 발가락들/ 흰 이마/ 세상 떠난 이가 남기고 간/ 단정한 글씨 같다/ 하늘이 휑뎅그렁 비었구나/ 뒤축 무너진 헌 구두나 끌고/ 나는 또 쓸데없이/ 이 집 저 집 기웃거리며 늙어가겠지//

옛일 / 김사인
그 여름 밤길/ 수풀 헤치며 듣던/ 어질머리 풀냄새 벌레소리/ 발목에 와 서걱이던 이슬방울 그리워요/ 우리는 두 마리 철없는 노루새끼처럼/ 몸 달아, 하아 몸은 달아/ 비에 씻긴 산길만 헤저어 다니고요/ 단숨만 들여마시고요/ 안 그런 척 팔만 한번씩 닿아보고요/ 안 그런 척 몸 가까이 냄새만 설핏 맡아보고요/ 캄캄 어둠 속에 올려 묶은 머리채 아래로/ 그대 목덜미 맨살은 투명하게 빛났어요/ 생채기투성이 내 손도 아름다웠지요// 고개 넘고 넘어/ 그대네 동네 뒷산길/ 애가 타 기다리던 그대 오빠는 눈 부라렸지만/ 우리는 숫기 없이 꿈 덜 깬 두 산짐승/ 손도 한번 못 잡아본걸요/ 되짚어오는 길엔/ 고래고래 소리질러 노래만 불렀던걸요//

옛 우물 / 김사인
늙은 거미처럼이라고 적는다/ 버려진 집에 뒹구는 이 빠진 종지처럼이라고/ 서리 덮인 새벽 뚝방 길처럼/ 섣달 저녁의 까마귀처럼이라고 적는다// 폐분교의 엉터리 충무공 동상처럼/ 변두리 차부의 헌 재떨이처럼 이라고/ 찾는 이 없는 옛 우물과/ 오래전 그 곁의 수세미처럼/ 문을 닫고 힘없이 돌아서는 처용이처럼 적는다// 선득 종아리에 감기다 가는 개울름처럼/ 혼자 깨어 누는 한밤중의 오줌처럼이라고 적는다/ 외롭다고 쓰지 않는다 한사코//

중국집 全씨 / 김사인
가령 그토록 빠르게 면발을 뽑아내는 일/ 훔쳐보는 코흘리개들 쪽으로 큰 눈 찡긋 우수어린 웃음 지어주는 일/ 앞으로 목을 빼고 큰 키 휘청휘청 걸어가는 일/ 더러운 앞치마는 풀어 시답잖다는 듯 구석으로 뭉쳐 던지는 일/ 기묘한 악센트로 말하는 일 중국집 全씨처럼.// 장래 희망으로야 대통령도 장군도 싫지는 않았지만/ 돈 많은 사장이나 비행기 조종사도 꼭 싫지는 않았지만// 눈부셨지 껌 잘 씹는 중국집 全씨/ 입을 움직일 때마다 따닥따닥 소리가 나던/ 휘파람을 불면/ 지나는 처녀들 어김없이 킬킬거리던/ 뱀 모가지를 맨손으로 눌러서 잡던.// 어느 가을 웃말 누구한테 얻어맞고/ 코피를 흘리며 울던 홀아비 全씨/ 다 찢어진 그 난닝구 서러운 갈비뼈처럼은 아니고 싶었으나/ 기둥 뒤에서 섧게 따라 울던 그의 아들처럼은 아니고 싶었으나/ (나도 슬퍼 조금 따라는 울었지만)// 벚꽃 질 무렵/ 어린 아들 데리고 사라진 중국인 全씨/ 아모레 아줌마하고라던가/ 가게 안집 큰누나하고라던가// 그길로 제 별로 돌아간 걸까/ 그곳에서 다시 중국집을 내고 난닝구 바람에 껌을 씹으며/ 멋지게도 면발을 뽑고 있을까/ 어린 날의 내 우상 중국집 全씨.//

밤에 쓰는 편지 1 / 김사인
그대로 하여/ 저에게 이런 밤이 있습니다/ 오늘따라 비까지 내려/ 오가는 사람들은 더 바삐 서두르고/ 우산이 없는 여학생 아이들은/ 무거운 가방을 들고 울상입니다/ 팔다리가 있는 짐승들은 모두/ 어디로 총총히 돌아갑니다/ 그러나 저기/ 몇 안 남은 잎을 바람에 마저 맡기고/ 묵묵히 밤을 견디는 나무들 있습니다/ 빛바랜 머리칼로 찬비 견디는 풀잎들이 있습니다/ 그대로 하여/ 저에게 쓰거운 희망의 밤이 있습니다//

밤에 쓰는 편지 3 / 김사인
한강아/ 강가에 나아가 가만히 불러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작은 목소리에는/ 대답하지 않습니다 돌아보지도 않습니다.// 떨리는 목소리나 값싼 눈물 몇 낱으로/ 저 큰 슬픔을 부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진즉 알고는 있었습니다.// 한강아/ 부르면서 나는 무엇을 또 기대했던 것인지요./ 큰 손바닥과 다정한 목소리를 기다렸던 것인지요.// 나도 한줄기 강이어야 합니다./ 나도 큰 슬픔으로 누워/ 머리 풀고 나란히 흘러야 합니다.//

기다림 ㅡ여자의 말 / 김사인
내 뜰에 내리던 비가/ 대문을 넘어 사람들 오가는 행길 가에서/ 그대를 기다리며 내려요/ 그대가 돌아오면 갈아입힐 옷가지 몇 품에 안고/ 손 부비며 손 부비며 기다려요/ 저번 날은 강 복판 흐름 위에 앉아 흘러가시더니/ 날 못 보고 혼자 강물 되어 흐러시더니/ 이제쯤 바다에 닿으셨나요/ 지쳐 돌아올 그대를 위해/ 나는 하루에 열 번도 더 머리를 빗어요/ 열 번도 더 마당을 쓸어요/ 내 나무들은 밤마다 강가로 걸어나가/ 푸르르 푸르르 울다 돌아와요//

밤 기차 / 김사인
모두 고개를 옆으로 떨구고/ 잠들어 있다.// 왁자하던 입구 쪽 사내들도/ 턱밑에 하나씩 그늘을 달고/ 묵묵히 건들거린다.// 헤친 앞섶 사이로 런닝 목이/ 풀죽은 배춧잎 같다.// 조심히 통로를 지나 승무원 사내는/ 보는 이 없는 객실에 대고/ 꾸벅 절하고 간다.// 가끔은 이런 식의 영원도/ 있나 몰라/ 다만 흘러가는 길고 긴 여행/ 기차 혼자 깨어서 간다.// 얼비치는 불빛들 옆구리에/ 매달고 낙타처럼/ 무화과 피는 먼 곳 어디/ 누군가 하나는 깨어 있을까// 기다리고 있을까 이 늙은 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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