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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정한아 시인

부흐고비 2022. 5. 4. 09:19

정한아 시인
1975년 경남 울산에서 태어나 여기저기에서 자랐다.

성균관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6년 《현대시》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어른스런 입맞춤』, 『울프 노트』가 있다. 구상문학상을 수상했다. '작란(作亂)' 동인.

 



어른스런 입맞춤 / 정한아
내가 그리웠다더니/ 지난 사랑 이야기를 잘도 해대는구나// 앵두 같은/ 총알 같은/ 앵두로 만든 총알 같은/ 너의 입술// 십 년 만에 만난 찻집에서 내 뒤통수는/ 체리 젤리 모양으로 날아가버리네// 이마에 작은 총알구멍을 달고/ 날아간 뒤통수를 긁으며/ 우리는 예의 바른 어른이 되었나/ 유행하는 모양으로 찢고 씹고 깨무는/ 어여쁜 입술을 가졌나// 놀라워라/ 아무 진심도 말하지 않았건만/ 당신은 나에게 동의하는군!//

애인 / 정한아
한밤을 펜과 씨름하다/ 책상에 엎어졌습니다/ 거기에는 책상의 이데아도 질료도/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나,/ 책상의 나직한 고동 소리를 들었습니다/ 제 속에 세월을 묻고 가슴에 열쇠를 꽂은/ 숨소리가 나직한 늙은 책상은/ 내가 사춘기에 칼로 그은 상처도/ 간직하고 있습니다./ 나를 구원해준 책상/ 나를 잠재워준 책상/ 내가 후려갈기고 긋고 할퀴고 물어뜯고 종국에/ 머리를 박아대던 책상,/ 책상은 나를/ 제 다리 밑에 숨겨줍니다/ 거기 서 손가락 빨며 눈 빨개지도록 웁니다//

험버트 씨, / 정한아
당신은 내게 잉크가 새는 만년필을 주었죠/ 나는 천천히 피 흘리며 나의 재난을 지켜보았어요 그것이/ 일생동안 겪어야 할 여러 죽음 중의 하나였다는 것을/ 아주 오래 걸려 깨달았죠/ 잉크는 폭발하며 제 혈관을 잠식했습니다/ 당신의 피가 당신을 공격하기로 결심한 것은 언제입니까// 당신은 나의 마지막 질문을 이해할 수 없어서/ 숭배와 모독을 반복했습니다// 날카로운 굴렁쇠를 완성하는 눈먼 충동/ 지옥을 돌리는 세 개의 톱니바퀴/ 케르베로스의 머리들/ 자기 꼬리를 문 뱀// 나는 이미 동강 나 그대가 알던 사람이 아니니, 나를 어엿비 여기시려거든 부디/ 절단면에 손이 닿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내가 당신의 아편이 아닌 것처럼/ 당신은 나의 아버지가 아닙니다//

고양이의 교양 / 정한아
중성화라는 말은 참 중립적이다/ 자기 안의 야생성을 두고 사람들은/ 자연이라고도 하고 비인간이라고도 한다/ 나는 내 시를 중성화해야 할지, 울게 내버려둬야 할지/ 에라, 모르겠다, 우리 집 고양이는 사춘기/ 온 집안사람들을 물고 할퀴고/ 가둬두면 문을 긁어대며 울어대며// 밥과 변기만으로 살 수 있겠냐고, 이 잡식하는 벌거숭이 종자들아,/ 뭔지 모르겠지만 내 안엔 해방되어야 할 난폭함이 있다고// 울음소리를 뒤로 하고 책상 앞에 앉아서/ 정작 난폭한 건/ 짐승과 함께 살기로 한 마음이었는지, 나는 뭐/ 짐승 아닌가? 난 중성화도 안 했는데 아니,/ 교양을 쌓았잖어 날마다 무언가를 (거의 모든 것을)/ 참으며 자기가 자기를 중성화하며 그것이/ 교양 아닌가 우리 집 고양이의 사춘기에/ 날뛰는 야생을 문 뒤에 두고 교양을 쌓고 있는// 나와, 나의 닳아버린 송곳니와, 그러나/ 여전히 꺼칠한 혓바닥과 흰 종이 위에 검은 글씨로/ 승화된 난폭함// 중성화라는 말은 참 중립적이다/ 물어뜯고 싶은 것들이 세상에 이토록 가득한데/ 기특하게 사람들이/ 아무튼 거리를 활보한다//

대장장이 / 정한아
누굴까./ 맨 처음 쇠를 구워보자고 생각한 사람은./ 그는 시커멓고 땀으로 번들거리며 웃통을 벗고 있고/ 정교하고도 힘찬 손놀림으로 불과 냉수 사이를 오가며/ 아름다울 금속 물질을 단련시킨다./ 그것은 값비싼 금이나 은이 아니라 강철이다./ 이 차갑고 단단하고 정교할 사물을 만들기 위해/ 오늘도 그는 뜨겁고 검게 빛나고 있다./ 그의 눈빛은 신념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입은 굳게 다물어져 있을 것이다./ 싸구려 말로 천 냥 빚을 갚으려는 자들과 달리/ 딱딱한 침대에서 잠들 것이다./ 그러나 그는 개의치 않으리라.//

봄, 태업 / 정한아
쓰는 일을, 읽는 일을/ 게을러도 아무도 벌하지 않고/ 생각을 중단해도 누구하나 위협하지 않는/ 더러운 책상 앞/ 불빛은 떨어지고 밤이면 길에서/ 조용히 죽어갈 어린 고양이들의/ 갸날픈 울음소리// 남의 땅이 흔들리는 일에 익숙해져간다/ 누군가의 선택이 어쩔 수 없는/ 운명이 되어 모두에게 돌아온다/ 범람하는 하천처럼 세슘처럼// 역사란 불행이란 대박의 행운이란/ 더러운 것// 돈을 좋아하고 돈으로 이웃을 돕는 선의 아무렴,/ 그것은 팬티처럼 마음이 놓이니까/ 자기의 살던 곳을 한 번쯤 순례하고픈 향수/ 사랑, 무엇보다/ 사악한 흑심 알고 보면/ 이름 없는 나를 생각하며 천천히 연필심을 가는 일/ 이제 모두 한마음이라니// 도무지 장난칠 맛이 안 나는 날/ 밥 먹는 일을 등한히 하여도 누구 하나/ 엄포를 놓지 않는/ 임투도 등투도 없는/ 더러운 책상 앞// 손 없는 새들이 깃털로 창공을 어루만질 때/ 죄 없이 부푸는 잎맥의 감탄과 탄식 사이에서// 일이란 무엇인가/ 사람의 일이란 대체 무엇인가//

미모사와 창백한 죄인 / 정한아
너무 예민한 것들 앞에서는 죄인이 된다/ 숨만 크게 쉬어도 잎을 죄 닫아걸고 가지를 축 늘어뜨리는/ 미모사/ 순식간에 나는 난폭한 사람이 되어/ 사랑해서 미안한 폭력배가 되어/ 젠장, 알았다고, 너 혼자 푸르르라고/ 공주병 걸린 년, 누가 죽이기라도 한다니?/ 내버려두면/ 어느새 정말 죽어 있는/ 미모사/ 순식간에 나는 정말로 나쁜 사람이 되어/ 화분째 쓰레기통에 쳐넣고선/ 너무 예민한 것들을 다시는 상종하지 말아야지/ 다짐했는데/ 10년 전에 죽은 미모사/ 그 어떤 미모사와도 바꿀 수 없는 미모사/ 모든 미모사의 대명사가 된 미모사/ 이제는 이름도 떠올리기 싫은 미모사/ 연약한 주제에 까다로운 년/ 나는 나를 만나지 말기를/ 부디 네가 나를 마주치지 말기를/ 나는 내가 없는 우리 집에 놀러 가고 싶고/ 그래도 남보다는 내 손에 죽었으면 한다/ 사랑하면 미안한/ 미모사/ 방금 내린 눈/ 잘못 날다가 나뭇가지에 가슴을 관통당한 울새/ 방금 본 그 눈/ 녹아버린 것들/ 날아가버린 것들/ 자기를 잠가버린 것들/ 자기를 영원히 잠가버린 것들//

축일(祝日) / 정한아
꿀벌들이 붕붕거린다/ 희고 붉은 꽃들이 재빨리 피어난다/ 까치가 귀가 아프도록 짖어댄다/ 대기는 부드럽고 따뜻하다// 너는 오늘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그렇게/ 아름다운 네가 죽어야 할 날은 이런 날이다//

​수국(水菊) / 정한아
잉크가 마르는 동안 나는 사랑했네/ 부끄럼 없이 꺾은 꽃봉오리 한 채의 수줍음과/ 그 千의 얼굴을/ 한 꽃의 일평생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망설임/ 열 길 물속/ 다 들켜버린 마음/ 나 사랑하는 동안 시들고 비틀린/ 열매 없는 창백한 입술들이여/ 똑 같은 꽃은/ 두 번 다시 피지 않는 것을;// 이 모든 것은 헛되고 헛되었으나/ 세상은 언제나 완전했네//

 

 


털투성이 스파이와 스톡홀름 증후군 / 정한아
오늘도 고양이 때문에 도서관에 갈 수 없었다/

혼자 두고 나가기에는 너무나도 귀여우니까//

 

 


부엌엔 팥죽이 끓고 / 정한아
나쁜 친구니까/ 얼굴을 보여준 적 없으니까/ 타이르고 화내고 저리 가라고/ 얼굴을 가리고 돌아누워도/ 귓가에 이술을 대고 글쎄/ 나를 야라고 부르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야라니 도대체/ 경계라는 걸 모르니까// 이봐, 사적 공간을 좀/ 존중해주시지? 누구신데/ 남의 이불 속에 기어들어와/ 속삭이고 울고 톡톡 쏘고/ 혼잣말하고 또 울고 내 머리칼을 세고/ 밀당하는 거야 뭐야 장판 위에 밤새/ 뚜욱 뚜욱 듣는/ 물소리는 어쩔,// 초대한 적 없으니까/ 친구 신청한 적도 신청 수락한 적도/ 다짜고짜 밑 빠진 슬픔 속에 끌어들이는/ 너는 친구도 아니니까/ 이름도 모르니까// 사람들은 네가/ 작은할아버지의 여동생이라 하고/ 열여덟에 청상과부가 되었다 하고/ 우물에 몸을 던졌다 하고/ 집안 여자들에게 자기 운명을 물려주려 한다지만// 모르는 소리, 너에겐/ 호적제도를 옹호할 연유가 없고/ 기분이 오락가락/ 깔깔 웃다 오래 우는 건 그 나이에 흔한 일/ 그저 오랫동안 자랄 줄을 모르고// 아무래도 널 이해하는 건 나뿐인 듯하지만/ 그러니 우리는 친구인지도 모르겠지만// 참는 건 오늘까지라// 속삭임도 울음도 혼잣말도/ 방바닥에 물 듣는 소리도 내일부터는/ 모르는 척할 거라/ 암염등을 아침까지 내 밝히고/ 잠귀는 아주 꺼버리고/ 청맹과니가 될 거라//

PMS / 정한아
지난밤의 불길한 꿈에 관해서는 쓰지 않겠다/ 온갖 새로운 소식과/ 심금을 울린 독서나 흥미로운 정치/ 발음하기만 해도 우리를 취하게 하는 천사 따위에 관해서도/ 내일의 내가 읽으면 힘이 빠질까 차마 쓰지 않았던/ 하지만 나를 너무 자주 방문해서 기를 쓰고 도망해야 했던/ 모든 가상을 제거한 나의 진심, 어쩌면/ 이것은 너무 오래 돈 지구의 무의식// 젖어서 퉁퉁 분 30년 치 일기의 젖은 부분만 하나하나 찢다가/ 남겨둘 구절이 하나도 없다는 걸 깨닫고 통째로 쓰레기봉투에 처넣으면서/ 생각한다, 저 냄새나는 묵은 양말 더미를 나는 왜 평생 지고 다녔나/ 젊어 세상을 떠난 존경했던 비평가가/ 좋은 예술 작품은 독자를 고문한다고 썼던 것을 기억하다가, 또/ 목사가 된 고문 기술자가 설교 시간에/ 자기 고문 기술이 거의 예술이었다고 떠벌린 것을 기억하면서// 점점 더 난해한 시를 쓰면서 해석될까 봐 떨고 있는 시인처럼/ 고통이 윤리의 증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던/ 어리석은 날들을 수정해보려고/ 수정해보려고// 앞으로도 누군가는 자기가 가지지 못한 집과 차에 불을 지를 것이다/ 시가 멸종되고 시의 자랑이었던 광기가 현실 속에서 벌어질 때 우리는/ 경악할 것이다-시의 실제 용도가 무엇이었는지 한 사람쯤은 깨달으면서/ 설탕으로 만든 성상에 달라붙은 개미 떼처럼/ 그럴듯한 범죄자와 멍청이를 향해 절하는 사람은 항시 있을 것이다/ 그 모든 현실을 드라마처럼 보고 즐기는 사람도 마찬가지/ 달콤하고 거룩해 보이는 것은 우리를 환장하게 하지/ 마구 핥아 먹어서 녹아 사라지고 나면 다른 것에로 달려간다// 성상은 여러 형상을 하고 있지만 결국 자기 얼굴과 흡사하다/ 자기 도덕을 자기에게 증명하려고 끊임없이 혼자 자책하는 사람/ -사과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그만 죽어버려라(울프 씨, 당신 말이야, 하긴, 당신은 실종됐지)/ 자기 미학을 모두에게 증명하려고 끝끝내 아무 가치판단도 하지 않는 달변가/ -오늘 점심에 끓인 쇠고기뭇국에서 풍기는 숙주나물 냄새가 열 배는 더 미학적이다// 아니, 이런 짓은 바람직하지 않지 팔십 년대처럼/ 시에 대고 화를 내는 건 어쩐지 졸렬한 일 하지만/ 오늘은 PMS인걸 마그네슘도 트립토판도 도움이 안 된다, 이를테면// 네 시는 너무 장황하구나, 라고 말했던/ 중학교 때 국어 교사였던 담임의 하얀 망사 스타킹 사이로 숭숭 돋아 있던 검은 다리털- 사실 나는 그녀의 비평을 한 번도 바란 적이 없었고 그녀의 교무실 책상 서랍은 항상 열려 있었다/ 네 시는 발랑 까졌구나, 라고 말했던/ 고등학교 때 문예반 지도 교사의, 귀에 제법 큰 봉합 수술 흉터가 있었던 험한 인생 내력- 그는 조는 아이를 발견하면 교탁으로 불러내어 머리를 교탁에 박게 한 다음 씨익 웃으며 삼십 센티 자로 쇠구슬을 쳐서 머리에 적중시켰는데, 내가 졸업한 뒤 고등학교 때 짝사랑을 만나 가출한 뒤 살림을 차렸다, 나는 왜/ 하얀 망사 스타킹과 검은 다리털과 촌지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찢어진 귀와 가출과 병적 낭만주의가 한 큐의 삼단 쿠션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이것은/ 편견일 텐데(편견일까?)오늘/ 압축적인 시를 쓰지 못하게 하는 퉁퉁 불어 터진 30년치 일기와/ 전혀 정치적이지도 미학적이지도 않은 일상의 대부분과/ 오로지 미학적이며 정치적인 나의 작은 서재와/ 춘분 지나 높아진 태양 아래 아직 서늘한 바람 속을 흔들리며/ 돌보아주지 않으면 꽃봉오리가 맺히지 않았을 수국과 카네이션/ 열매가 없는 수국과 카네이션// 당연한 것은 아무데도 없으면서 동시에 모든 것이 순리인/ 너무 오래 돈 지구의 무의식-쉬고 싶어/ 하던 대로 하고 있지만 쉬고 싶다 지구는 생리 전이다 내일은/ 어디에서 피가 터질지 모른다 정치도 미학도 위안이 안 된다//

하느님은 죽어서 어디로 가나 / 정한아
죽은 자는 편리하다/ 모든 책임은 그에게 떠맡기면 되니까/ 울부짖을 목구멍도, 송사를 제기할 손가락도 없으니까/ 마음속에 품고만 있던 죄와 사랑은 이제 영원히/ 무저갱 속으로 침묵하고/ 침묵의 관은 넓고도 넓어/ 여차하면 삼라만상을 품을 수도 있으니까// 죽은 자는 참으로 편리하다/ 그가 웃어도 울어도/ 깊고 검은 침묵의 울림통이 이 작은 별에 기별하는 것은/ 고작 실바람, 때때로 태풍과 눈보라/ 아무도 그 연원을 궁금해 하지 않으니// 죽은 자의 이름은/ 어떤 백성들에게는 태양이고/ 어떤 떠돌이들에게는 태양의 흑점이고/ 대개 알려진 바로는 허풍선이라지만// 시인들은 누구나 당신의 눈동자라는 걸/ 안다, 불면의 밤, 거울 속에서/ 흔들리는 작고 요란한 빛// 끝내 발광하는/ 오래 뭉친 어둠/ 자연 발화하는/ 푹 삭힌 침묵//

메타세콰이어 / 정한아
그의 몸은 그의 제복이다/ 한 세월 연대한 채 뿌리로 오래 행진한다// 좋겠다 그는/ 자기의 몸이 자기라서// 매일 바꿔 입는 나의 의복은/ 툭하면 달아나는 나의 천성과 닮았지// 샘이 나 한 자리에 발을 묻고 싶지만/ 다프네의 딱딱한 입술은 비극이네// 아무 말이나 할 수 있었을지 몰라/ 혓바닥 을 가진 나는// 그러나 지금은 그의 계절이므로/ 펼쳐진 절도 앞에 숙연하다// 나의 발바닥은 똥개의 발바닥처럼/ 아무 데나 갈 수도 있을 테지만// 황금 바늘 비 쏟아지는 강서구청 앞길에서/ 두 다리를 주저앉히는 겨울 아침// 어떻게 그가 여기에 있는가/ 어떻게 그가 지금 있는가// 공룡들의 멸망을 목도하고서/ 공룡들의 멸망을 목도하고서// 그가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두렵다//

Absolute K(1966.2.16~2008.6.9) / 정한아
마침내 우리는 편지에서 뛰쳐나와/ 맨몸의 영혼으로 만났습니다/ 하마터면 따라 웃을 뻔했어요 하지만/ 미소 뒤에 병풍 뒤에 첫사랑의 주검을 두고/ 고깃국을 먹는 건 어쩐지 으스스한 일/ 뜨거운 것들은 모두/ 김을 피워올리다 별안간 식어버리죠/ 뒤늦게 당신의 삶을 잘게 찢어 먹는다는 생각/ 너무 오래 끓인 고기는/ 젖은 편지지처럼 싱겁기 짝이 없다는 생각/ 한 번도 본 적 없는 당신의 맨발은/ 불 꺼진 빵집 진열장에 놓인 어제 구운 식빵처럼/ 가지런하고 적막할까요/ 귀여운 여자가 당신 어머니 품에서 울고 있어요/ 당신에게도/ 편지 바깥의 삶이 있었나요/ 18년 동안의 편지가 창틈으로 거듭 들이닥치는/ 오늘,/ 우리의 안녕은 흐리고 때때로 소나기/ 글자들은 날아오르고 싶어 견딜 수 없는 표정이네요/ 하얗고 얇고 가벼운 것들은 모두/ 비행에 지친 새처럼 축 늘어졌습니다//

쪽팔리는 일 / 정한아
우리를 웃게 하는 것이 끝내는/ 우리를 울게 한다 그것이/ 중독의 정해진 회로/ 우리는 얼마나 많은 불행을 견디어낼 수 있는가/ 우리는 진화의 극점에 있다// 더는 나올 돌연변이가 없다고 판단했을 때/ 지긋지긋하게 새로운 약물이 도착했다/ 얼리어답터들의 혀끝에서 시험되는/ 또 하나의 모더니티 엄마,// 이게 그거였으면 여기가 거기였으면/ 엄마가 계모였으면, 해/ 쟤가 나였으면 내가 딴사람이었으면 이 모든 게/ 무(無)였으면, 해/ 여기가 천국이었다면 나는/ 태어나지 않았겠지 그것도/ 괜찮다고, 해, 엄마,/ 제발제발제발나를낳아주세요, 라고/ 우리는 빌지 않았지만/ 빌어먹을 삶// 민주주의의 스승들은 언제나/ 네 맘대로 하렴, 자상한 음성으로 말했지// 하지만 모든 걸 취소하는 건 너무나 힘든 일/ 자기를 포함한 모든 것과 싸우고 있는 이/ 독, 정수일까 궁지일까// 우리는 울다가 웃는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불행을 견디어낼 수 있는가/ 견딜 수 없을 때 견디지 않는 건/ 너무나도 쪽팔리는 일이니까/ 우리는 필사적으로 웃고 있지만//

상사(相思) / 정한아
기다리면서 열매는 달아간다/ 숲/ 그늘에서 아가리를 벌린 그대의 목젖은 타들어가지// 햇빛과 함께 밤과 함께 쏟아지는 스콜과 함께/ 붕붕거리는 벌 떼와 다른 열매들과/ 제 과육을 뚫고 나갈 수 없는 씨앗들과// 육식의 심성을 지닌 초식동물, 그대/ 아가리의 경련과 함께// 한 열매가 기다리며 닳아간다//

그렇지만 우리는 언젠가 모두 천사였을 거야 / 정한아
우리는 때로 사람이 아냐/ 시각을 모르고 위도와 경도를 모르고/ 입을 맞추고 눈꺼풀을 핥고 우주선처럼 도킹하고 어깨를 깨물고/ 피를 흘리고 그 피를 얼굴에 바르고 입에서 모래와 독충을 쏟고 서로의 심장을 꺼내어/ 소매 끝에 대롱대롱 달고// 이전의 것은 전혀 사랑이 아냐/ 아니, 모든 사랑은 언제나 처음/ 하루와 천 년을 헛갈리며 천국과 지옥 사이 달랑달랑 매달린/ 재투성이 심장은 여러 번 굴렀지// 우리 심장은 생명나무와 잡종 교배한 슈퍼 선악과/ 질문의 수액은 여지없이 떨어져 자꾸만 바닥을 녹여 가령,/ 우리는 몇 시입니까?/ 우리는 어디입니까?/ 우리는 부끄럽습니까?// 외로워 죽거나 지겨워 죽거나/ 지금 에덴에는 뱀과 하느님뿐/ 그 외 나머지인 우리는// 입을 맞추고 눈꺼풀을 핥고 우주선처럼 도킹하고 어깨를 깨물고/ 피를 흘리고 그 피를 얼굴에 바르고 입에서 모래와 독충을 쏟고 서로의 심장을 꺼내어/ 소매 끝에 대롱대롱 달고// 재투성이 심장으로 탁구라도 치면서 위대한 죄나 지을 수밖에/ 뱀마저 자기도 모르게 하느님과 연애한다는데//

독감유감 2 / 정한아
우리는 가장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 혹은 우리는 사랑 같은 것은 환영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 체념하지 않고 포기하지도 않고 그런데 실상은 얼마쯤 체념한 체로, 상당 부분 포기한 채로, 이게 그거야, 라고 말할 수토 있겠지.// 하지만 너는 알아, 너는 사랑한 적이 있어. 환영은 의외로 생생하고 복잡한 것이어서 때로 일생을 지배하기로 하는 거라. 이상한 일이야 그런 환영에 도의를 치키려고 너는 끊임없이 망설이고 있네. 귀신이 된 남편에 웨 미안해서 수절하는 청상과부처럼, 없지만 사실적인 대상을 향한 이 난폭한 감정은// 신의 모습을 허용하지 않는 어떤 유일신교의 신앙처럼 여겨지기도 해. 절대적인 완전한 진리, 우주적인 10차원의 사랑을 믿어서 너는,// 답답할지도 몰라 멍청할지도 몰라 어쩌면 광신도처럼 눈빛이 살짝 이상할지를 몰라// 우리는 가장할 수도 있을 거야 혹은 우리는 사랑이 정말 있다고 믿을 수도 있을 거야. 체념하고 포기하고 그런데 실상은 완전히 체념하지 않고 정말로 포기하지 않고, 이건 그게 아니지, 라고 말할 수도 있을 거야.// 말을 바꿔봐야 그리 다르지도 않아. 중요한 건 네가 안다는 거야. 너는 사랑한 적이 있어. 있지도 않은 너의 유일한 사랑에 대한 존경과 예절 때문에 너는 언제까지 더러운 고독을 참을 수 있을까?// 아무에게도 미안해하지 않겠어. 결심하면서, 너는 전속력으로 뒤로 달려가는 거야. 달리고 달려서 너의 이십대와 십대를 지나, 너의 탄생가 현생인류를 지나 화석에까지 닿는거야. 너는 드디어 시조새의 이빨과 긱털, 너는 언젠가 돌멩이였던 평온 나무가 된 다프네의 굳어가는 입술에 입 맞추는 햇살.//

어떤 봉인 / 정한아
그때 너는 눈꺼풀을 닫았지/ 그러자 세계 전체가 일순 물러났다// 드러나지 않기 위해 너는/ 하루 섭취 열량의 대부분을 존재하는 데에 쓰고 있구나/ 존재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줄곧 상처 입고 있어서/ 그 모든 빛과 바람을 복기하거나/ 묽고 진한 그림자의 엄습을 잊으려 하지만/ 망각은 언제나 무엇에 대한 망각/ 충분히 안전한 기분에 도달할 때까지/ 꼼짝 않고 선 채 눈을 감고 도망 중/ 도망은 언제나 무엇으로부터의 도망/ 너는 꿈속에서도 계속 도망하고 있지 않을 수 없었지// 미모사. 건드려진 속눈썹처럼 바람만 불어도 곧 울 것 같은/ 미소사. 가장 다정한 햇살의 가벼운 입맞춤에도 혼절하는/ 미모사. 봉인의 속도가 존재를 대체해버린/ 미모사. 모든 감각이 통각인/ 미모사. 말할 수 없는 고통은 말하지 않을//

겨울 달 / 정한아
해가 떨어지면 몰려오는 검은 나비 떼/ 눈을 크게 뜨고 떠오르는 달을 바라봐/ 컹! 컹!/ 얼룩진 얼굴/ 가장 불길한 기억들을 환히 떠올리는 로르샤하 테스트/ 투명하든 모호하든/ 기억에 표정이 없고/ 어떻게 보이는지는 이미 눈이 결정했어/ 가까이 있으면 안 보이지 네 안경의 유리알처럼/ 삼킬 수 없는 모래알처럼 지껄이는 바람/ 겨울/ 서울/ 왜 아무도 잠들지 않는 거지/ 너는 이 나비와 저 나비의 얼굴을 구별할 수 있니/ 언젠가/ 억양을 지우고 우리는 거울을 볼 거야/ 거기 아무도 있을 거야/ 이름을 붙여주면/ 얼핏 미소도 지을 것 같아/ 거울에도 파도가 일까 거기/ 나비들이/ 나비들이/ 검은검은검은검은 나비나비나비나비가/ 날개를 접었다 펴며 꿈을꿈을꿈을꿈을/ 꾸는데/ 너는 얼룩진 얼굴을 두 손에 담을까/ 해석할 수 없는 밤이 새어 나올까//

조문과 조화는 정중히 사양합니다 / 정한아
만일 단 하나의 천국만 존재한다면 그리고 모든 사람이 사후에 그곳으로 가서/ 매주 수요일에 행복한 결혼식과 문학 모임에 참석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우리 중 많은 사람은 죽기를 그만둘 수도 있다./ ㅡ아돌프 비오이 카사레스, 『모렐의 발명』//
랄랄라 나 대신 꿈을 꾸던 나는/ 도르륵 바퀴 달린 보라색 여행 가방/ 여기저기 울퉁불퉁 좁은 포도를/ 뒤뚱거리며 잘도 튀어 다녔지// 네 이름은 흔하디흔한 아메리칸 투어리스터/ 하지만 미국에 가본 적 없다네// 물거미 은신처에서 좀도둑을 만나고/ 마르세유에서 항구를 헤매고/ 장뇌향 가득한 빠똥의 해변/ 세부의 손바닥만한 그늘/ 도르륵 지나다닌 모든 길들을/ 선 채로 누운 채로 명상하던 나의 가방// 언젠간 신경외과 병동에서/ 읽을 수 없는 책을 많이도 담고 있던/ 바퀴 달린 나의 보라색 여행 가방/ 회복기의 따가이따이 카카오나무 여인숙이나/ 끔찍하게 조용했던 도쿄의 평일 오후 지하철/ 러시아워는 무섭고 사나웠지만/ 언제나 쾌적한 온도의 호텔방은/ 진도 4 이하라면 널부러지기 적당했지// 바퀴가 고장 난 나의 보라색 여행 가방/ 흔하디흔한 아메리칸 투어리스터/ 하지만 미국에 가본 적 없네/ 이제 너는 바르샤바의 호텔방에서/ 배가 열린 채 가벼워져 쉬고 있구나// 열린 뱃속은 시원해 뭐라도 넣을 수 있겠네/ 랄랄라 지난날의 노래와 바람과 햇빛과 기대/ 객사한 현자처럼 혼자 뻗어 명상 중인/ 뚱뚱하고 명랑하던 나의 보라색 여행 가방// 아무도 그를 거두어가지 않고/ 아무도 그를 애도하지 않네// 어쩌면 죽은 사상처럼 묵직한 향수로 가득 차/ 죽어서 정말로 문화궁전에 갈 수도 있겠지/ 어쩌면 가방들의 천국이 있어/ 소련에서 죽은 가방은 연방 천국에 살고/ 트로츠키의 가방은 영구혁명 천국에 살고/ 퀘벡시티에서 죽은 가방은 프랑코폰 천국에 살고/ 한국에서 죽은 가방은 날마다 출장 준비/ (은퇴는 죽음보다 더 죽음 같으니까)/ 세계 어느 곳에서건 학교에서 죽은 가방은/ 해가 반쯤 기울기 전 집에 가고 싶겠지// 하지만 뚱뚱하고 명랑하던 나의 여행 가방은/ 그냥 영원히 누워만 있다네/ 커피가 놀랄 만큼 맛없는 도시의/ 어느 호텔방 고장 난 바퀴 가방 천국에// 나를 넣어 데려가면 좋겠지만/ 나를 넣기에는 좀 작은 가방/ 나는 하나고 바퀴는 고장 났으니까/ 고장 나지 않았어도 나를 넣고는/ 가져갈 이 없을 테니까/ 고장 나지 않았어도 나를 넣고는/ 굴리자마자 고장이 났을 테니까/ 그러면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고 어떡해!/ 가방에 사람이/ 놀라지 말아요 우린 다들 큰 가방에 작은 가방을 넣잖아요/ 하지만 나는 폴란드어를 모르고// 은유도 직유도 상징도 아닌/ 바퀴가 고장 난 나의 보라색 여행 가방/ 느닷없이 먹구름이 몰려오고/ 한낮 우박이 창문을 우당탕 두드릴 때/ 흔들리는 커튼 안쪽에 누가/ 누가? 내가 버리고 간/ 보라색 여행 가방 (어머나, 누구세요?)// 네 가계는 흔하디흔한 아메리칸 투어리스터/ 하지만 출생지는 중국이라서/ 무슨 컨테이너에 얼마나 많은 무슨 색 가방들과/ 얼마나 오래 배를 타고 얼마나 자주 내던져졌는지/ 나는 모르네 나에게 오기 전 너의 내력을// 도르륵 구를 수 없는 바퀴가 공중에 들린 채/ 랄랄라 숨길 게 없어져서/ 랄랄라 숨길 수 없어져서/ 사비아사나 시원하게 뻗어 있네/ 열린 뱃속이 텅 비어 있네//

 

표적 / 정한아

그의 창밖에 매일 커다란 까마귀가 날아온다/ 생일에는 그녀가 특별 주문한 진짜 벨기에 초코케익이 배달되었지/ , 이건 너무 검어, 선지처럼 검어서/ 차마 깨물어 먹을 수 없어/ 커다란 까마귀는 오후 345분 회색 하늘 아래/ 비둘기와 다른 까막까치들을 거느리고 동네에서 가장 높은 피뢰침 꼭대기에 앉아/ 가다를 한껏 부풀리며 윤기 흐르는 긴 외투를 가다듬는다/ 아아, 까맣게 모르겠어/ 녀석이 어딜 보고 있는 거지? 눈이 어디에 있는 거지? 있긴 있는 건가?/ 새 모양 펀치로 하늘을 뻥 뚫어놓고/ 여장 남자 같은 목소리로/ 가아!/ 가아!/ 다아 꺼져버리란 말이야!/ 그가 잡고 싶은/ 그가 되고 싶은/ 녀석은 압도적이고 신경질적인/ 파시스트를 닮았다 진짜 남자를 닮았다/ 어떻게 저렇게 무거운 요구가 하늘을 날 수 있나?/ 저 각 잡힌 긴 외투를 한 계절만 빌릴 수 있다면!/ 냉장고에 넣어둔 그녀의 생일 케익은 까맣고 무겁고/ 미안해 고마워 사랑해/ 라고 씌어 있다/ 어떻게 이렇게 까만 걸 먹을 수 있지?/ 녀석은 정말 속살까지 까말까/ 먹어치우고 싶어 매일 꺼내어 보고/ 먹어치울까 봐 언제까지나 커팅을 미루고 있는/ 아무리 기다려도 녹아내리지 않는 까만 생일 케익/ 비문증飛蚊症이 꿈속까지 그를 따라온다/ 충치처럼 까만 생일 케익이/ 겨울이 올 때까지 그를 깨물고 있다//

 

나는 왜 당신을 선택했는가 ㅡ론 울프 씨의 편지 / 정한아

당신은 오늘도 구립 도서관의 같은 자리에 앉아 있더군. 당신은 오늘 생각했다. 공부가 노동이 되고 문학이 상품이 되어버린 현실을, 야근하듯 읽고 쓰다 자기의 공부와 문학으로부터 소외돼도 파업할 수도 없는 현실을. 파업해도 당신 말곤 아무도 타격받지 않을 현실을. 당신은 첫사랑의 두근거림을 잊어버린 권태기의 부부처럼 책임감으로 책을 읽고 의무 방어로 시를 쓰고 있었지. 권태기 이후의 사랑에 관해, 그 피로의 미덕에 관해 당신은 미처 생각지 않은 듯하더군. 첫사랑의 두근거림을 재연하려 당신은 다른 책들을 열심히 들추어 보았지. 어쩐 일인지 두근거리지 않았어. 심장의 불수의근이 만족할 만한 해답을 여기저기 찾아다녔지만, 이제 두근거릴 때라곤 죄지을 때뿐. 그래서 당신은 거짓말을 시작했다. 남들을 두근거리게 할 만한 거짓말을. 뭐 어때, 그래도 재밌잖아,라고 당신은 속으로 중얼거렸지. 재미가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당신은 몰랐다. 당신은 당신을 감시할 수 없었으니까. 당신은 자기 자신을 증명할 손쉬운 방법으로 옆 사람의 불성실과 위선을 고발하더군. 드라마 주인공으로 사는 일은 지루할 틈이 없는 일. 극적으로 위대해질 수 없다는 사실을 당신은 몰랐다. 거듭 자기의 거대함을 증명하기 위해 두근거리는 일을 저지르는 건 방화범들의 특기. 안타깝게도, 이제 곧 당신은 무슨 짓을 저질러도 두근거리지 않을 것이다. 어쩌나. 요절하기에도 전향하기에도 늦은 나이. 당신은 기억할 수도 없는 어느 젊은 날에, 세상으로부터 잊히기 두려워 자기 자신을 영원히 잊어버리기로 서서히 결심해버렸던 것이다. 충분히 고독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독 속에서만 가능한, 영혼을 보살피는 일에 등한했기 때문에. 그 작고 여리고 파닥거리는 나비처럼 엷은 것을.//

 

프랜차이즈의 예외적 효과에 관하여 / 정한아

나를 믿지 마, 벗들, 나의 변심은 대체로/ 요일 메뉴처럼 한정되어 있고/ 주말 결혼식 뷔페처럼 목구멍을 넘기기 힘들지만, 나는// 동네 사람들 말을 믿고 동네 사람들은/ 동네 사람들 말을 믿고 동네 사람들은/ 프랜차이즈를 선호하지 대량 소독된 냅킨처럼/ 잘 개어진 3%의 불신은 우리가 감당할 몫// 친구, 그걸 적립해도 여기선 사용할 수 없어/ 지배인은 가장 비싼 요리를 추천하고 있군, 그렇다면// 아주 조금 할인해주실 오늘의 요리는 무엇입니까?// 아니, 아니야, 나처럼 나를 불신하는 벗들, 지나치게/ 번쩍이는 합리적인 가격의 식기와 샹들리에와 따그락거리는 사기/ 소리가 나는 마음에 들지 않아, 허나동네 사람들 아니면 누굴 믿는단 말인가 어딜 가도맛이 한결같아 수상하지만// 대량 재배된 슈퍼옥수수와 대량 도축된 돼지고기에/ 공정 무역 커피로 입가심을 하고 나면 우리는/ 조금 괜찮은 대량 슈퍼사람 같지/ 않나 기부라도 한 것 같지/ 않나 내가 진짜 식당 얘길 하는 것/ 같나// 살금살금 이를 쑤시며 문을 나설 때 우리 몸엔/ 이 집만으ㅟ 특제 양념 냄새가 배지 달큰쌉싸름매콤 하고 새콤짭조름한, 말하자면/ 모든 것을 뒤섞은 맛을 뛰어넘는 모든 것을/ 뒤섞은 맛을 뒤섞은 한결같은/ 이 집에서 우리는/ 매립지처럼 식욕이 왕성해, 헌데// 왜 찜찜한 표정인가 이마에 빨간 딱지 붙은 기분인가 제대로 저당 잡혔나// 벗들, 우리는/ 허기와 무관한 우리의 식욕을 믿을 수 있나 조련된 금수의 자세로 죄 똑같이 개성적인/ 무개성의 식사를 즐길 준비가 됐나 이미 즐기고 있나// 나를 의심하지 마, 벗들, 나는/ 동네 사람들을 믿지만 가끔 동네 사람들 말은 수상하고 동네 사람들은/ 동네 사람들 말을 믿지만 가끔 동네 사람들도 동네 사람들 말이 수상하고 동네 사람들은/ 당분간 프랜차이즈를 선호하지만// 동네 사람들도 불신을 적립할 줄 알아 아무도/ 현금으로 돌려주지도 소멸되지도 않는 포인트는 가끔/ 다른 용도로 쓰이지 어마어마하게 다른 용도로/ 용도를 초과하는 동네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어떤 서두를 쓰기 시작한다;//

 

() 토요일 밤의 세마포 / 정한아

여기 구겨진 울음이 찍혀 있으니/ 자기 멱살을 잡고 자기를 물 밖으로 끌어내는 사람처럼/ 끝내 그는 자기 밖으로 새어나갈 수 있을까// 아직도 그는 고백이 부끄럽고/ 고백이 부끄럽다는 이 고백이 누가 될까봐/ 빨간 얼굴 속에 눈 코 입을 묻어놓고/ 그는 또 묻는다/ 물음을 벗어나는 일의 가능성과 의미에 관하여/ 그의 질문과 상관없이 그의 무덤 안에 떠도는 저 먼지 하나하나까지도/ 남김없이 등록되는 오늘의 치밀함에 관하여// 지금은 작성되고 싶지 않아/ 실현된 계시의 일부가 되고 싶지 않아/ 답을 바라서가 아니라/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이 빨간 망설임 때문에// 비로소 아무도 따라오지 않는/ 오로지 자기 자신으로 가득 차 소란한/ 귀먹을 듯한 적요 속에서// 끝내 그는 그를 자기 질문에 답으로 내어놓을 수 있을까/ 그의 얼굴이 그의 입에 먹히기 전에/ 고백하자면/ 고백이 그를 그 아닌 것으로 붙박아 놓을까봐/ 통성(通聲)으로 증언으로 누가 될까봐// 먼지는 사람이 되고 사람은 다시 흙이 되지만/ 아무도 그 전 과정을 지켜볼 수 없으니/ 그래서 불러보는/ 과학자, 시인, 하느님/ 존경해마지않는/ 나이가 무지하게 많으신 분들이여// 될 수 있으면 그의/ 수치와 졸렬은 무시하시고/ 그의 빨간 얼굴에서/ 그의 골격과 날마다 쇄신하는 죄악의 대략과/ 그의 영혼의 방사성 동위원소와 탁도(濁度)/ 찌그러진 눈 코 입의 윤곽을 어서 발본해내소서// 자기를 용의선상에서 제외하지 않으려고/ 그는 밤새 자기 지문을 외고 있으나// 아무래도 낯선 소용돌이여!/ 이 정황의 출구는 어디에 있는가/ 자기도 모르게 신비는 어떻게 유출되는가/ 이제 곧 성사(聖事)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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