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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유현숙 시인

by 부흐고비 2022. 5. 5.

현숙 시인
1958년 경남 거창 출생. 2001년 《동양일보》와 2003년 《문학선》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서해와 동침하다』, 『외치의 혀』, 『몹시』가 있다. 에세이 『세상의 존귀하신 분들게』(유현숙 외 28人 공저)가 있다. 2009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기금을 받았다.

제10회 <미네르바작품상>을 수상했다. 

온시 동인. 시산맥 회원

 



유월의 관능 / 유현숙
그랬다 선착장은 멀고/ 먼바다 저편에는 먼 섬이 있다/ 신도는 저기/ 시도 거쳐 모도까지 섬에서 섬은 저만큼 떨어져 있고/ 떨어져 앉은 저만큼 먼 물길 건너서 닿은 섬/ 섬은 그랬다/ 바람이 붉고 해당화가 적적한 햇볕이 더운 땅에/ 좁고 가파른 오르막과/ 햇살이 미끄러지는 경사와/ 불쑥 내민 모퉁이와/ 수상하게 조용한 한나절과/ 한가한 거기에/ 늘 그렇듯 노르메기*가 있다/ 그랬다/ 가리지도 않고 쪼그리고 앉은 여자의 깊은 곳에/ 물빛 푸른 바다가 고이기도/ 여자남자는 겹쳐져 있기도/ 슬픈 남자가 슬픈 여자를 뒤에서 끌어안고 있기도 했다/ 여자 위에 얹힌 남자의 등허리 위에/ 한낮의 태양이 누워 있다// 탕 뫼르소**의 총소리가 들리고// 바다는 그랬다/ 남자와 여자는 그랬다/ 외설과 관능과 미학의 상관관계와 대낮의 햇볕과/ 더운 대기 사이/ 속속들이 들여다보이는 여자와/ 완벽하게 벗은 남자의 사이에서/ 바다는 입 다물고/ 짙푸르다/ 하늘과 바람과 시간과 물빛이 제각각의 체위로 흔들리는/ 거기 어디에/ 당신 있었던가// 길은 바다로 떨어져 내리고 나는 벼랑 끝에서 돌아선다/ 유월의 그림자가 길게 일어서는/ 섬의 끝/ 탕, 뫼르소의 마지막 총소리가 들린다//
* 배미꾸미조각공원이 있는 모도의 끝자락
**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머큐로크롬 / 유현숙
마른 손가락 같은 너를 만지다가 그만 놓친다/ 바람 부는 동쪽 끝에서 내렸다/ 너를 놓는다/ 치타의 눈 밑 티어마크는 제 몸을 돌아 나온 바코드이다/ 꿈도 피도 싸늘하던/ 젊은 날의 바코드가 내게도 있다/ 치명적 독을 문 전갈처럼 가멸차게 꼬리를 세우며/ 어둠 속에서 펼쳐지는 낡은 후일담 하나// 모든 흔적은 광학적으로 판독되는 막대 기호인가/ 길의 흔적, 젊음의 흔적, 회한의 흔적, 절규의 흔적.../ 머큐로크롬보다 붉고 따가운 소문의 여운/ 감출수록 드러나는 이진법적 기표인가 주홍빛 촉각인가//

클림트의 달빛 / 유현숙
캔버스의 은유들이 황금빛으로 빛난다 거울 앞에서 머리칼을 빗는 손가락이 또 빛난다 베토벤프리즘의 달빛에서 물 흐르는 소리 들리고 내 몸에는 비가 내린다/ 손톱을 물어뜯는 버릇도 그때부터 생겼다 손톱을 뜯으며 혼자 우는 것은 사랑이 많아서라 한다 핥고 쓰다듬고 적시었던 날이 아팠던 기억이 때로는 모진 날을 세우며 들쑤시는 건 그 안에 무엇이 자라고 있는 것일까/ 들쑤신 자국마다 덧나고 부풀어 한 줄의 글도 읽고 쓸 수 없던, 한 생이 다 가도록 한 표적이든 어드 각진 혓바닥을 기억하는가 죽은 말들이 동이째 굴러다니는 가을과 봄/ 흩어진 산(散木)에서/ 바람이 일으킨 물결처럼 자주 수수롭다/ 큰 것은 크게 보이고 작은 것은 작게 보이는 날 있을까 더 오래 사랑하는 것이 더 아름다운 사랑일 수 있겠는가 짧게 이별을 말하는 것이 더 비루한 별리일 수 있겠는가/ 문을 닫고 돌아앉아야 비로소 밖이 보인다 하여 들판을 달려오는 야마野馬처럼 황량하여 쓸쓸한 아지랑이 숲처럼 그 시간을 다 걷고 돌아앉으면/ 저녁의 뜨겁고 장엄한 송가를 만날 수 있겠는가/ 그것도 잠시, 아주 잠시만 그리웠던 너와 나와 구스타프 클림트가 한 번 더 빛나던 무어라 이름 짓고 싶던//

대설 / 유현숙
흰 눈 뒤집어쓴 사람이 골목 끝에 서서/ 점묘화 같은 하늘에다 호루라기를 불어 호명하는 것만 같아// 세제 거품 칠갑하며 설거지하던 손을 앞치마에 닦고/ 덧신발로 미끄러지며 문을 덜컥 여는데// 여남은 알이 달린 감나무가 가로등 불빛 아래 그림자만 길게 끈다// 낯설고 분란한 궁리가 폭설 쳐/ 내 안에 속수무책의 크레바스 하나 생기는 저녁// 캄캄한 섣달 난장亂杖의 대설부待雪賦다//

상고대 / 유현숙
우수가 지났어요. 응달진 개울가 휘어진 국수나무 가지에는 아직 겨울의 통점이 매달려 있어요. 나는 아파요. 샤콘느를 들어요. 국수나무 가지는 골속이 하얗게 삭고 선모들은 어스름 속에서 흔들려요. 내 머리칼에, 어깨 죽지에, 손등에, 발등에, 안개냄새 훅한 잔얼음살들 맺혔네요. 나는 밀원을 꿈꾸어요. 붕붕붕거리는 울음소리와 현의 울림이, 내가 꿈꾸는 것과 샤콘느가, 묘하게 교접해요. 바닥으로 곤죽 친 사지가 메탈의 교성을 내질러요. 오늘도 내내 샤콘느만 들어요. 투명하게 들여다보이는 우울의 빛깔은 터키석 같아요. 나는 밀원을 꿈꾸고 내일도 밀원을 꿈꾸고, 창 밖에 비친 해는 오래오래 지지 않아요.//

보이차를 마시며 / 유현숙
좋은 다기로 빚어진다는 건 수많은 세월 흙의 성질을 변환하는 일이다. 제 속에 품고 있던 완강한 고집들이 도공의 손끝에서 다듬어지며 환골탈태換骨奪胎되는 일이다. 사람도 그렇듯 한평생 매운 바람에 깎이고서야 다탁 위 다소곳한 한 벌 찻잔으로 거듭나는 것일까. 건창에서 자연 발효시켰다는 수수십 년 된 보이차, 장뇌나무 아래서 살며 제 사나운 본성 다 버렸다. 맑고 깊은 장뇌향 우리며 오래묵은 다관에서 풍화된 시간을 편직編織해 내고 있다. 뜨물빛 백자 찻잔이 입술에 따숩다. 도리깨질된 묵은 생각들이 벗겨지며, 여과되며, 바늘 돋은 혀 밑 淸淸한 산바람으로 와 감긴다. 쑥대밭 같은 일상이 잠시 정지되고, 나는 이른 아침 생강꽃 노란 망울 펑펑 터지는 산길 중턱에 앉아, 봄 깨는 소리 듣는다. 찻물 속으로 불거지는 이 무량의 곶, 도원도 여기 어디쯤일까.// 몇 잔의 찻물을 따르며 벌겋게 헌 하루를 위안 받는 다늦은 저녁 시간.//

물의 감옥 / 유현숙
진흙은/ 끊임없이 뻗어나가고 싶은 관성에/ 굵은 매듭을 친다/ 목 밑까지 차 오르는 감탕물에 몸을 묻고도/ 제 속의 뼈저린 수절인 듯/ 초록의 연잎, 물에 젖지 않는다/ 사바의 수채 속에 떨어진 한 알의 연씨/ 제 뿌리를 내리는 일에 치성을 다한다/ 수면 위를 내달리는 전생의 바람을 만나/ 내 안에 잠든 향기를 깨워/ 멀리 풀어보내고 싶다/ 얼마나 깊은 기도를 올리면/ 끅끅 헛구역질을 게우며 몸이 열릴까/ 긴 입덧 후 열락 같은 진통이 끝나면/ 아, 그 땐 그만/ 그대 중심 깊숙이 스며들어 몸 풀리라/ 쩍쩍 갈라지는 연밥을 열고 나와/ 이 진창의 감옥에 시간의 씨알로 묻히리라// 수 백년이 지나도 싱싱한 가임의 시간으로/ 홀로/ 남아//

굴비 ㅡ불꽃 3 / 유현숙
물기 뚝뚝 흐르는 생조기에다 굵은 막소금 한 웅큼 뿌린 것인데/ 내 전신이 쓰라리다/ 나는 소금에 절여진 굴비 한 마리가 된다/ 깊어진 겨울/ 간조기 두름을 처마 끝에 내건다/ 바람 차고/ 내 몸 속속들이 얼어붙는다/ 전신에 박힌 소금 알갱이들 살 속을 파고들어/ 오장육부가 쓰다/ 뜬눈에 보이는 하늘빛도 쓰다/ 얼마나 더 얼고 써야 이 두름 풀고/ 저 하늘 건너 지천의 소금밭에 염장될까/ 거기 불꽃으로 누워 내 눈과 귀 텅 비어/ 컹컹 개 짖는 소리 들을까// 절여 단단해진 눈자위에 오소소 소름 돋는다//

명주수건 / 유현숙
-명주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누에의 일생을 생각해 보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빙빙 모가지를 돌리며 누에는 스스로 토해 낸/ 젖빛 실로/ 제 몸을 가둘 고치를 튼다/ 뱃속 마지막 남은 한 오라기의 실 마저 죄 뽑아내어/ 허공에다 촘촘히 무덤을 짓는다/ 영면은 또 하나의 탄생인 그 무덤의 속은/ 얼마나 따뜻하고 섬세한 탈바꿈일까/ 내 뱃속 허기도 거푸거푸 풀어내어 결 고운/ 죽음 한 채 짓고 싶다/ 서걱서걱 갉던 뽕잎 슬그머니 밀쳐두고 나도/ 몇 령의 잠에 따라 든다/ 진득한 탈피와 애절한 변신을 꿈꾼다// 큰 집 과수원 언덕배기에 걸터앉은/ 잠사앞 마당의 화톳불/ 눈멀고 귀 잠든 생의 불씨를 투덕투덕 토하고 있다/ 제 살 태운 생의 피륙을 뜨겁게 짜고 있다//

국화빵 / 유현숙
지하철 출입구 한구석에/ 겨울 장승처럼/ 간이노점의 국화빵틀이 서 있다/ 과거의 모서리 몇 군데가 깨진/ 빵틀만큼 오래된 중년의 남자가/ 낡은 기억들을/ 몇 번씩 뒤집으며 노릇노릇 구워낸다/ 베어 물 것도 없이 한 입 크기의/ 백동전 만한 추억들이/ 두어 줄 좌판 위에 널려있고/ 뼈가 삭는 고민도 없이 뒤집었던/ 젊은 날의 가책들 위에/ 생전 잊혀지지 않을 상처같은 팥알갱이들이/ 밀가루 반죽 위에 듬뿍 얹혀진다/ 바람난 계집처럼 몸 뜨겁게 달은 화덕은/ 이제야 속죄의 문신을 새기듯/ 흩어진 부끄럼들을 버무려 또렷이 박아낸다/ 누군가의 장식이면서 상처이기도 한/ 국화꽃 문신을 꾹꾹 찍어낸다/ 골목 끝에서 빵틀처럼 낡은 세월 하나가/ 불어오고 있다//

비 / 유현숙
배롱나무 꽃이 비에 젖고 허벅지 살그늘에는 풀물이 들었습니다/ 멀리 있는 물소리는 멀게 들리고 가까이 있는 물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당구알은 희고 빨갛고/ 단풍나무로 만든 큐대를 쥔 손바닥에 단풍잎 무늬가 찍혔습니다/ 장막처럼 서서, 내가 검어질 때까지 오래 기다렸습니다//

빗소리 / 유현숙
목이 마르다./ 타르타로스의 호수 한복판에서도 갈증하는 탄탈로스처럼 나는 언제나// 처마 끝 단풍나무가 비에 젖는/ 오대산 중대사자암에 들어 108배를 올렸다./ 부서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되새길수록 무릎 아래에 눈물이 고이는 건/ 어디에도 닻을 내리지 못하는 까닭일까./ 빗소리가 남긴 그림자의 빛깔에 대하여 골몰해 본다.// 이승길 다니러 오시는 기일상(忌日床)에 눈록(嫩綠)의 차 한 잔 올리는 저녁/ 어머니 계신 길, 서쪽으로 삼천리를 가야 닿는 공간이라 했는데……/ 장미목 다탁위로 다정하고 맑은 바람이 머문다. 찻잔을 쥔 손끝에 찻물빛 스몄다.// 젊은 날 목을 매단 친구의 죽음을 목도한 후로/ 어떤 염세는 평생 허리 굽히고 고개 숙이게 했을까./ 젖은 나뭇잎들 아직도 속뜰에서 수수거리고/ 나는 빗소리가 남긴 그림자의 빛깔과 수수 천리 저 너머의 공간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주춧돌 젖으면 비가 오듯이 눈 감고 내가 깊어지면 사방팔방 뼛속까지 감지되는/ 기미(機微), 그곳에 당신 있어/ 나는 구름을 거머쥐고 마른 목청으로 그대를 채색한다./ 새벽에는 바람을 닫고 돌아앉아 진공관에 불을 붙였다.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간/ 한 음악가의 생을 더듬는 일, 그를 듣는 일*은/ 파인 허공의 그림자 한 장을 걷어내는 일, 바람을 품어 부드러워진 댓잎이 되는 일/ 입 닫고 장마저 비우고야 긴 잠드는 개구리를 생각하는 일/ 사람이 짓고 사람이 허문 경계에 대하여 질문하는 일/ 비로소 한 수유(湏臾)**의 적막에 물드는 일이리.//
* 슈만의 『첼로협주곡』은 라인강에 투신자살을 시도하기 전, 1850년에 작곡하였다.
** 짧은 시간, 잠시

비 젖은 벽암록 / 유현숙
비 보다 먼저 바람이 불었다/ 영화관에 들러 한 편의 영화를 보고 또 한 편의 영화를 더 봤다/ 영화를 보고나오니 대낮 도심이 비에 젖고 있었다/ 내 생일은 올해도 이렇다/ 여든 다섯 노모로부터 걱정하는 전화가 있었다// 일면식도 없는 시인이 첫 시집을 부쳐왔다/ 벽암(碧巖)을 찾아 나선다 했다/ 먼 북쪽 전설의 큰 바다 북명(北溟)에라도 닿으면/ 이끼 덮인 바위 틈새에 손 넣어 푸른 말 새겨진 바윗장 하나 집어 낼 수 있을까/ 북명 같은 벽암 같은 곤(鯤)의 날갯짓 같은 어록을 받아들 수 있을까// 일면식도 없는 시인이 일면식도 없는 시인에게 엽서를 쓴다/ 첫 시집을 잘 받았다는 첫 엽서를 쓴다// 불이(不二)의 정토는 넓고 아득하여 나고 감이 고요할까/ 나는 이 칠월을 버리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최북의 눈에 내리는 비 / 유현숙
조선 화가 최북은 제 눈을 찔렀다 고흐는 제 귀를 잘랐다 종신형을 살던 도니 존슨은 초콜릿을 개어 감옥에서 그림을 그렸다/ 폭풍설에 묻히는 산골의 긴 밤을 아이와 함께 걷는 풍설야귀인을/ 잘린 귀의 자화상을/ 초콜릿이 풀어낸 제 바닥의 색채를 그렸다/ 폭염을 걷던 어느 화가는 낯선 커피점에서 커피액을 찍어 지금 그림을 그리고 있다// 암흑이건 소리 밖이건 갇힌 감옥이건 커피점이건 누군가 고독한 손길로 붓질을 하는 곳에는 빗소리가 들린다/ 해수관음이 바라보는 그 바다에서 범종이 운다/ 빗소리가 사라진 다음의 적막과 적막이 우는 공명이 있다// 빗소리를 들으며 나는 단풍나무 숲길에 앉아 석류를 쪼갠다 붉게 물든 손가락을 본다/ 손가락이 붉어지는 동안// 최북이 찌른 한 눈을 생각하고 한 귀가 잘린 고흐를 생각하고 도니 존슨의 감옥과 초콜릿을 생각한다 그리고// 어느 화가가 있는 작은 도시의 비 내리는 가을을 생각한다//

씨동백 / 유현숙
선운사에 왔다/ 동백은 붉디붉은 꽃숭어리를 왈패처럼 피워 올린다/ 사색死色이 깊다// 작년에 진 동백씨를 산새들은 아직도 쪼고/ 노파의 흐트러진 머리칼 같은 안개는 산머리에서 흘러내리고/ 나는 대웅보전, 막돌 초석 위에 얹힌 두리기둥의 배를 만지고// 얼마나 간절하면 죽어 꽃으로, 새로, 바람으로/ 다시 나는 걸까// 뼈 삭는 기도가 하늘에 닿는 일 있어/ 내 안에도 내원궁 이르는 길 있어// 이 허방에서 붉은 노을을 지고 올 늙은 산객山客을 기다리는 것인가/ 옆구리를 푹푹 파내며 도리가 되어 누워 있는 것인가//

저녁숲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들 / 유현숙
어두워지는 저녁숲에 남은 햇빛이 비치는 것에 대하여,/ 그 빛 아래서 은사시 나뭇잎들 반짝이며 제 몸을 뒤집는 것에 대하여/ 혼자 듣는 시냇물 소리에 대하여,/ 그 물소리 어떻게 저무는가에 대하여/ 시냇물 소리, 내 몸 구석구석이 다 저문 뒤까지 흘러/ 서늘한 저녁물빛이 되는 모양이라든가 그런 슬픔이라든가/ 슬픔보다 더 길게 개망초꽃들이 자라고 있는 것,/ 그 개망초꽃들 하얗게 흔들리는/ 난동에 대하여/ 간간이 들리는 지빠귀 울음소리의 아득한 고적감이나/ 여뀌 풀 더미에 얹히는 여뀌 꽃 색깔이며,/ 그 여뀌꽃의 그늘 빛이 어떠한지에 대하여/ 어두워지는 저녁숲에서 내가 혼자 저물고,/ 한 사람을 찾아가는 길이 어떻게 긴 기도인가에 대하여//

쇠똥을 굴리다 / 유현숙
쇠똥을 파먹고 커서 그 속에다 알을 스는 쇠똥구리의 몸뚱이에서는/ 짓이겨진 풀 냄새가 납니다// 나는 한때 별빛을 몸에 두르고 걸었습니다/ 별똥 흩어진 풀밭을 걷다가 별똥에 채여 넘어지곤 하던/ 그때 나는 별똥구리였던가요/ 갈기 세운 구름이 발굽소리 울리며 흐르고 내 안으로 바람 들이쳤던 적 있습니다/ 뒹굴고 부서지며 지평의 끝까지 날려갔던/ 그때 나는 바람구리였던가요/ 서쪽 하늘 아래에서 잘 익은 사과밭이 반짝이는 한나절/ 둥글게 햇빛을 굴리며 사과향기 가득한 언덕을 오르던/ 그때 나는 햇빛구리였던가요// 당신의 말씀들을 모아 경단을 만드는 저녁나절/ 짓이겨진 풀 냄새와 별빛이며 바람이며 햇빛인 영혼을 파먹고 자랄/ 유충의 부화를 예감하는/ 쇠똥구리의 여름 저녁//

겨울 포구 / 유현숙
겨울 소래포구는/ 내 혼자 먹는 저녁처럼 쓸쓸했다/ 물때 따라 떠 내려 온 채 녹지 못한 얼음 덩어리들이/ 노숙하던 몇 구의 주검 같다/ 멀리서 부터 온 지친 그들은/ 리다 만 협궤 열차의 기억을 대신해서/ 천천히 흐르고/ 먼 바다 위로 날기를 포기한 갈매기도/ 포구변을 떠 다니며 제 몸만 살찌운다??/ 비린내 배인 눈 덮인 갯가에는/ 폐선 하나가 널브러져 있고/ 나는 치유되지 않는 깊은 우울과/ 바닥까지 추락한 절망의 부스러기와/ 그리고 아직도 다문다문 떠오르는/ 군색한 욕망의 찌꺼기를/ 소래 장터의 곰삭은 젓갈통에 깡그리/ 쏟아 붓는다/ 누군가 갯바람 속에서/ 채 삭지 못한 세월 하나를 미끼로/ 물에 빠진 멀건 겨울 해를 건져 올리려고/ 자꾸 헛손질하고 있다//

섬 / 유현숙
지하노래방, 그 한 평짜리 조명속에다 젊은 날의 노역을 메들리로 부려 놓고/ 휘적휘저 계단을 오른다/ 그리움에 지쳐서…울다 지쳐서…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다/ 꽃숭어리 같던 내 청춘도 수탈당했다/ 송별회도 끝나고, 꽃잎들 흩날리고./이 계단을 다 올라서면/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젖어…/ 지상의 골목길을 휘돌아야 하리/ 외진 모퉁이 돌아, 전라선 밤 열차를 타고 가서/ 오동도 갯바람에 눈물 닦아야 하리// 세상 어디에도 피접의 방 한칸 마련하지 못한// 이런, 얼어죽지도 못할// 아직도 동백꽃 피고 지는 내가 섬이다//

저녁별 / 유현숙
낯선 마을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四月인데도 바람은/ 차고 저녁에는 하늘이 가까워졌으며/ 산들이 푸르게 자라는 만큼 사람이 그리워지는 날이/ 하루씩 늘어갔습니다./ 그곳 마을 풍경은 어떠하신지. 나뭇가지 사이로 별이/ 떠오르면 가슴에는 바람소리 드세어진다 했던가요./ 바닷가 언덕, 꽃 핀 사과나무 아래서 아직도 한나절씩/ 서성이고 있는지요./ 별조각에 이마를 찔리고 어둠 묻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 천 년의 근심을 지고 걷느라/ 내 손끝은 언제나 심장에서 멀리 있습니다// 별이 지기 전에 그대에게 가 닿을 혁명 같은 언어로/ 오늘은 밀린 답장을 쓰겠습니다//

인연 / 유현숙
찬 바람 더불어 먼지 휘돌던/ 장 터 외진 골목어귀에서/ 막걸리 한사발에 삶의 고뇌를 휘휘저어/ 벌컥 삼키던 그 시간녘/ 수줍게 훔쳐 본 촌아낙 정을네 뒷모습이/ 닷새 내내 여울져 남아있다.// 몇 겁을 돌아/ 한 많은 세월의 중턱에서/ 긴 여행끝의 만남인 우리들은/ 바로/ 그와 그네의 아들 딸들인지도 모른다// 회오리, 순간의 아픔도/ 소낙비, 한나절 놀람도/ 돌아와보니/ 삶은/ 흐드러진 한마당의 마당놀이// 사위 불 재만 남고/ 관객도 밀려가고/ 장 터 골목엔 바람만 차다//

신궁에 들다 / 유현숙
칠월은 구름이 무겁다 산과 들판을 뒤덮고 꼼짝 않는다/ 백 년만의 긴 장마라 했다 밤새워서 비가 내린 다음 날이다/ 풀끝에 맺힌 빗방울이 아직 무겁다/ 누가, 빗방울을 흔드는 저 바람만이 신들을 위하여 향초를 기르고 수금을 탄주하는 신궁까지 닿는다 했던가/ 첫 차가 양원역을 지난다/ 나의 지난 생이 그랬다, 첫 새벽 열차를 타도 닿는 곳이 없었다/ 신궁은 어딜까/ 비 젖은 들판을 지나면 그 들판 끝에 내리는 햇살처럼 단순하고 느슨하고 슬몃해지면/ 거기, 신들의 침전에 들 수 있을까// 의사는 내가 병명이 없는 병을 앓고 있다고 한다/ 그것은 불안이나 권태나 절망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한다/ 학명 없는 푸른 균이 신경계를 파먹어 모든 길이 구불텅하기도, 끊어지기도 한다고……,/ 나는 차돌처럼 단단해지기고 차가워지기도 하지만/ 어떻게 죽음 앞에서 무연해 질 수 있단 말인가/ 오늘도 닿는 곳 없는 열차를 탄다/ 내가 두고 온 먹구름 덮인 여름의 저 끝에서 난장의 울음소리 들린다/ 나에게 신궁은 없는 걸까//

겨울 여행 / 유현숙
산바람이 차다는 한계령에서 온 메시지입니다/ 덕장에 널린 명태들의 떼울음을 듣습니다, 강원江原의 겨울을 엿듣습니다/ 그가 안고 떠난 울음입니다// 동쪽에서 들려온 이 울음을 길게 펼쳐 드는 동안/ 나뭇가지는 야위어갔고 내 목청은 다 닳았습니다// 날 저물어 山집에 든 그는 이 울음을 갈아 글씨를 씁니다/ 깊은 그믐의 밤입니다/ 떨어져 앉은 사람들이 떨어져 앉은 채로 잠들지 못합니다/ 나무 향이 쌓이는 처처悽悽한 산골에다 그를 풀어놓는 그가 있고/ 불빛 작은 이 누옥에다 나를 풀어놓는 내가 있습니다/ 마을에는 그저 흰 눈이 내렸으며 아침은 더디게 오고 있습니다/ 각수刻手는 아직도 산벚나무 목판에다 칼질을 하고 있겠지요// 찻물만 따르는 한겨울, 거기도 여기도/ 깊디깊은 강원講院의 밤입니다//

외치의 혀 / 유현숙
1// 청동도끼와 돌촉을 멘 남자가 집을 나섰다// 협곡으로 들어간 남자는 돌아오지 않았고 침엽수림 아래에서 목 긴 짐승이 오래 우는 밤/ 나는 숨죽이고 불면했다/ 터진 손으로 부싯돌을 치는 동안 지축이 기울었고 나무는 뿌리째 뽑혔고/ 눈 속에 파묻혔던 남자가 게놈분석으로 돌아왔다/ 눈두덩이가 패이고 붉고 서늘하다/ 갈비뼈 사이에서 물 흐르는 소리 듣는다 남자를 재웠던 내가 흘린 물소리다// 잠 든 동안 남자는 무슨 꿈을 복제했는지 별 조각 같은 아이들과 꽃잎처럼 흩어지는 手話와 짐승처럼 허기진 내 언어를 만났는지// 윗 이빨에 눌린 혀끝에 눈물 한 점이 얼어 붙어있다// 눈이 녹는 동안 새가 우는 동안 그런 만 년 동안/ 그리웠던 것은 마른 살갗과 살갗이 주고받은 이야기다//
2// 젊은 머리칼을 날리며 집을 나선 당신은 아직 돌아오지 못하는지 외진 곡벽(谷壁)에 기대어 서서/ 여전히 궁벽(窮僻)을 꿈꾸는지/ 나는 지금 어느 골짝의 만년빙에 누워 등이 얼었는지//
3// 외치는 오래됐고 외치는 낡았고 외치는 헐었고 그리고/ 말랐다, 혀는 여전히 젖어 있다//
* Oetzi: 1991년 북부 알프스에서 발견된 5,300년 된 미라.

묵형(墨刑) / 유현숙
나뭇잎을 덮고 잠들었습니다 잠 속으로도 비는 들이칩니다// 볕 좋은 오후에는 집을 나서지만/ 골목 끝이 짧고,/ 그만 되돌아 옵니다/ 사람들 속에서도 나는 춥습니다// 단단한 목질인 자단(紫檀)은 짜개면 도끼날에 자색 물이 묻어 납니다/ 땅이 뜨거워지는 여름과 지리한 장맛비의 이야기를 품고 있기 때문이지요/ 지열과 습풍이 나무뿌리에 그렇게 스민 까닭이지요// 내 안에다 자자(刺字)한 이야기들 말고는 무엇으로도 형상하지 못한/ 젊은 날의 문자들이 있습니다/ 자단 같은 날들이라 부를까요/ 천둥이 몇 차례 울고 바람이 붑니다 높은 산의 그늘에서는 철쭉꽃들이 부서지고 있습니다/ 그늘에 누운 꽃은 통째로 말라가고/ 당신을 보낸 뒤 나는 아직도 내실內室의 커튼을 걷지 못합니다/ 마루에서도 방에서도 커튼은 무겁습니다/ 오래전에 당신은 내 살을 타서 열고 별 한자리를 묻었지요/ 살을 꿰어 시침질한 자국은 당신이 남긴 마지막 말씀이라 여겨도 되는지요/ 나는 쓸쓸해져서 오래도록 들여다 봅니다/ 사기 찻잔에 스민 차 맛처럼 쓸쓸함이란 나를 아프게 합니다/ 미궁에서 보내는 수금(囚禁)의 시간입니다// 지난날이 깊어지면 늘 이렇습니다 당신이 떠난 뒤 잠 속으로도/ 비가 들이칩니다//

은하의 전설 / 유현숙
떨어진 나뭇잎이 얇게 쌓인 눈에 덮여 있다/ 몇 계절을 잠든 동안/ 어둠 너머, 기다림 너머, 별빛 너머 설렘은/ 내가 손 내밀어 받아 든 첫 빛이다/ 기차가 지나는 낮은 언덕에 기대어, 기대고 울던 나를 생각한다/ 기차는 오늘도 나를 지나쳐 갔고 나는/ 오늘도 여기 서 있다/ 그리움이다 검은 혁명이다 슬픈 가계와 거역의 기록이다/ 지새운 밤들과 치열했던 질문과/ 모의와 추방과 대답 없는 되물음에 대하여/ 그 모든 직립(直立)이 얼마나 치열한 전쟁이었으며/ 또 얼마나 잘못 쓰고 있는 전 생애인지/ 참회하는 자의 늦은 기도처럼 타는 노을 아래를/ 지나가는 행인처럼/ 빈 형장을 적시는 빗물처럼 계절은 지나갔다/ 가장 아픈 날 쳐다본 은하는 어느 전설에 닿아 있을까/ 어둔 길 어디쯤에 내려서서 숨을 고르면/ 나는 왜 아직도 목이 메는가/ 계절의 먼 뒤쪽에는 폭풍설이 치고/ 시간의 마디마디를 들고 참회록을 쓰는/ 뼈가 아픈 푸른 밤/ 몸피보다 작게 판 눈 굴에다 잠자리를 마련한 북극곰은/ 동면 중에도 새끼를 낳는다/ 아무것도 바라지 못한 채 내 안에 박제된/ 그대라는 전설/ 그 불꽃 속으로 내일도 걸어 들어가는 사람 있다//

불의 죄-Beethoven, Piano sonata NO.14 / 유현숙
오디오에 불을 지핍니다/ 진공관에 불빛이 차오르고 차오른 불빛이 마루에 쌓인 수북하던/ 어둠을 걷어냅니다/ 안마당도 삼나무 가지도 지난봄에는 무르고 연했지요// 마룻바닥에 엎드린 내 등짝에, 뺨을 묻은 손등에/ 달빛은 참 푸른 음악입니다/ 알프레드 브렌델이 연주한 C#단조의 셋잇단음표들입니다/ 가고 없는 사람의 기록은 공간이기도 그 공간을 질러가는 불이기도 했습니까// 지금도 곁자리를 비워 둡니다/ 그 불을 코카서스 산정에서 훔쳐 올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당신과 나란히 목침을 괴고/ 머리에서 발끝까지 달빛 소나타로 물들고 싶습니다// 이생의 매일을 독수리 대신 당신에게 내장이 뜯긴다 해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회향나무 잔가지가 붉게 타오릅니다/ 이곳은 프로메테우스가 사랑한 인간의 마을입니다//

700년의 약속 / 유현숙
당신에게 가져갈 서책 한 권과 모필 한 자루와 연적 한 점과/ 미완의 악보를 베고/ 물밑에 가라앉은 폐선에서 잤습니다// 몸에 물결무늬가 돋습니다/ 칠백 년을 칠백 겹으로 접은 물주름입니다/ 늑골 사이에 바람이 찬 심해어들// 숨소리가 깊습니다// 아직도 기다리고 있는지요/ 낡은 모국어로 지금도 바다의 휘파람을 받아 적는지요/ 칠천오백 리 뱃길이 닳고/ 앞섶에 놓은 자수가 헤졌습니다// 잃은 것이 기억 속에 가라앉은 항구인지 모국어인지/ 휘파람이 지나간 긴 행인지// 주름진 물속에 누워 당신을 꿈꾸지 않은 날/ 칠백 년의 잠에서 나를 깨웁니다/ 물주름 파인 몸 껍데기를 천천히 당신 앞으로 돌려 세웁니다//

​타투 Tatoo / 유현숙
늦게 받은 편지입니다 몇 번을 읽고 지포라이터를 켰습니다 편지지에 불이 옮겨 붙습니다// 나의 살갗을 꿰며 수를 놓습니다/ 뇌성벽력 같습니다 눈확에 괸 핏물입니다/ 뼈바늘의 귀에 매단 무명실을 갈무리해 둔 잿물에다 적셨습니다/ 한 이름을 부릅니다 예전에는 이럴 때 헛구역질을 했습니다// 타이포그래피한 늙은 고양이의 눈빛이 날카롭습니다/ 어깨와 젖무덤에 누군가의 지문이 묻어 있습니다// 뼈바늘을 쥐고 레위기를 읽으며/ 이음수. 징금수. 관수. 언어의 조각들로 한 땀 한 땀 뜨는 늦은 날입니다// 마오리족 여자들은 이마에다 문신을 합니다/ 나는 어느 종족의 여자입니까//

아산만 소경(小景) / 유현숙
그곳에는/ 난데없이 일제히 무리지어 나는 새떼가 있다// 공중에서/ 누가 생철판을 가위질하는가/ 흩날리는 저 은백의 연모戀慕들// 햇볕 아래서는 맹목마저 눈부시다/ 청옥색 하늘 복판에 갯고랑이 박히고// 나는 격렬했다// 나의 내상內傷에서 핏물이 번지는/ 돌아서면 무릎 아래가 젖어드는/ 혀 물고 부서지는 말이 있는 오후의/ 둥근 만// 허공 한 조각으로 나를 가렸다//

새벽 / 유현숙
새벽과 산새의 첫울음과 쇠북소리와// 스님들의 잦게 디디는 발걸음소리와/ 노스님의 굽은 허리와/ 향로를 들고 뒤따르는 사미의 푸른 뒤통수와// 밝아오는 동쪽 하늘의 푸르스름한 여명과 목탁소리와/ 뒤따르던 걸음을 멈추고 올려다보는 가뭇없는 하늘……/ 그가 바라 본 하늘을 나도 멈춰 서서 올려다본다/ 푸르고 깊다/ 사미의 어깨 너머가 아직은 어둔,// 한 마디의 이야기가 채 지워지지 않은/ 저 미명(未明)……// 아무것도 알려 하지 말고,// 어디에도 갇히지 말고,// 그저 그대로만 살라고 하던/ 낮고 조용한 목소리가 금색전을 채운다/ 어둠 속에서 들리는 길게 이어지는 독경소리와// 까막딱따구리의 울음소리가/ 내 귀를 쪼고/ 고개를 떨구고 내려다보는 나의 귓가에/ “시를 쓰십니까? 언어에서 자유로워야 시가 詩이지요.”// 낮게 맴도는 목소리에 나는 슬퍼지고 나는 아프고// 별 하나는 아직도 빛나고 있는 사월 초여드레/ 봉암사*의 새벽//
* 경북 문경 소재인 봉암사는 1년에 한 번, 부처님 오신 날에 대중들에게 산문을 연다.

쌍화점 ㅡ늙은 상궁의 말 / 유현숙
능화문 문살 틈으로 황초불이 흔들립니다// 여인의 깊은 바닥에서 흐르는 물소리가 금침을 밟고 문턱을 넘어 대청바닥을 적십니다/ 급기야 조바심이 옥체의 등골을 타 내리고 용안이 남루해지며 미간에 그늘이 들고 수심 깊습니다// 방금 문틈으로 엿 본 몸짓들은 전하의 분부도, 그 분부를 따르는 홍림*이나 중전도 아닌/ 궐 밖 창가(娼家)에서나 봄직한 것들이었습니다/ 애써 마음을 굶기며 화선지 가득 난을 치던 어수御手가 가늘게 떱니다/ 난 잎 끝에서 불길이 번집니다/ 하늘 아래 남녀상열지사 아닌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세익스피어가 그러했고 스탕달이 그러했으며 장안에 떠도는 이 나라 시편(詩篇)들이 또한 그러 하옵니다// 뼈와 뼈가 부딪혀 타는 이토록 지극한 몸 안의 불꽃을 이제 그만 통촉 하십시오/ 대전(大殿)으로 드시지요 전하, 등촉을 들고 따르겠습니다 // 이 또한 만다라가 아니겠습니까//
* 영화 ‘쌍화점’에서 왕이 동성애 하는 인물, 후사를 위하여 중전과 합궁 시킴.

순장(殉葬) / 유현숙
백년이 넘어야 나무는 木神이 깃든다는데 물속에서 곰삭힌 몇몇 백년 된/ 침향나무를 사포질한 다탁에서 차를 따릅니다/ 송사리 두 마리가 헤엄을 치는 백토 찻잔이 봄 개울만 합니다// 곡우 즈음, 초경 전의 여아들이 이슬 맺힌 새 순을 입술로 땄다는 여아차女兒茶 세 순배/ 대나무통에서 40년 숙성한 보이차 세 순배/ 향으로 마신다는 철관음차 세 순배/ 삼백년 된 차나무에서 따 특별한 기도로 이온 처리된 경인맹춘 보이차 세 순배를/ 마저 마시고 나니/ 내뱉는 트림도 향긋합니다, 내가 차향목이 되었습니다// 한 생을 기도와 차로 지낸 조실스님 발을 씻겨드리면 발끝에서도 향기가/ 난다더니// (그래서 파트리크 쥔스킨트는 향수를 썼습니다)// 씻겨준 백 년 전 묵은 고독이, 三百 樹 茶神으로 몸 바꾸어 입안에서 몇 순배 둥글게 설렙니다// 몇 번씩 따라 죽었던 잎이, 나무가, 흙이, 바람이, 무위자연의 폭력을 휘두르는지요/ 몇 번씩 몸 안에서 깨어나는지요// 밤이 깊도록 차향을 따르던 팽주는 이 사치한 밤 끝, 저 근육질의 죽음을/ 혼자서 어쩔까 모르겠습니다//

각설탕 / 유현숙
1.// 봄꽃도 봄빛도 아라리가 났는데 느닷없는 눈이 내리네 각설탕 같은 눈이 내리네/ 수화기에서 들리는 말은 옛말이고, 옛말처럼 멀고, 각설탕처럼 달고,/ 시작이 늦지 않겠느냐고 묻는 안토니우스에게 시작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고/ 나는 대꾸하네/ 한때는 물뱀처럼 시이저를 사랑했네/ 검고 푸른 독을 먹여 뱀을 길렀네, 뱀에게 물릴 손가락들을 닦아내고 향유로 씻었네// 나는 몇 번이나 초록노트에다 이 말들을 베껴 보네// 말을 베끼는 그 한 계절을 사랑했네, 그 한 계절을 다 기록하지 못했네//
2.// 명지바람 부네 어제부터 앓네 타샤의 정원을 생각하네/ 냉이풀이 누워있는 내 몸 골짝에 커티지 가든을 개간하고 싶네/ 이 봄이 처음 오는 계절인가 묻네/ 전화를 한 사내는 지금도 개찰구에 서 있다 하네, 내가 그의 첫사랑이라고 하네/ 40년이 지났으니 40년만이라고 하네/ 거짓 첫 사랑, 거짓 첫 만남, 거짓 첫 키스, 거짓 첫 눈……거짓 첫,첫,첫,/ 낱짜마다 잇자국이 박히네 이빨 사이가 시리네//

옛이야기 / 유현숙
1.// 화양구곡에 가서 책을 읽네 내가 사랑한 남자의 사랑 이야기를 읽네// 몸으로도 빛으로도 바람으로도 만나지 못하는 옛 사랑이었네 햇볕이 우거지는 여름, 뙤약볕 아래서 한 나절씩 화양구곡행 버스를 기다렸네 몸이, 빛이, 바람이, 지나간 시간의 본질이라는 것을 알겠네 내가 깔고 앉은 이 자리에도 그 사람이 앉았던 자국은 남아 있는지 반석 한 페이지를 들춰 넘기며 묻네//
2.// 오랜만에 찾은 엄마의 마당에는 별이 그득했네 나는 마당에 내려서서 새벽까지 별을 닦았네/ 그 사람이 찾아와 선반에 얹어 둔 저 구월의 별들을 내려서 오늘처럼 닦을까 배를 깔고 반석/ 위를 기어가던 그물무늬비단뱀의 초롱한 눈빛을 생각했네 뱀 울음소리를 맹목의 염불처럼/ 듣는 그 새벽 안마당에 섰네// 기어간 자국마다 별은 박히어 현학적이고 뱃바닥에 찍힌 그물무늬는 수사적인데// 현학보다 수사보다 별빛이 더 빛나던 한 남자의 사랑이야기를 읽네//

스테인드글라스 / 유현숙
당신을 만나는 일은 혼자 걷는 일이지요, 비우고 오래 기다리는 일이지요// 또 ‘밤 한때 눈발’이래요, 콧등이 추운 창가에서 자주 창을 열어보는 일이겠지요// 비우는 동안,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무 낡습니다// 앙리 미쇼는 메스칼린을 먹었고, 박정만은 두 달 동안 오백 병의 소주를 마셨고, 기형도는 이십여 일 동안 백 병의 소주를 마셨지요. 김관식, 조지훈, 천상병, 조태일……, 생전의 그 이름들도 제 정신을 내려놓고서야 허무의 면목과 독대 했는가요// 의식도 무의식도 끄트머리는 모두 한 점에 닿는 것이겠지요// 레이온 치마폭에 묻은 감즙의 얼룩이 다 바래어지고/ 내가 닳아 조용해지고 나면, 닳아서 조용한 당신과 만날 수 있을는지요// 언어가 유리조각 같이 날을 세우는 새벽이 오면// 그때는,//

손금 / 유현숙
자재암 들어 백팔배를 드리는 어머니/ 백 여덟 번째 이마를 바닥에 대고/ 머리 위로 내던졌다가 뒤집은 손바닥에는 희고 검은 잔금들이 패였다/ 한 생 내내 얻었던 것 다 잃고/ 수심 깊은 주름살만 거머쥐고 상경한 노모다/ 삐걱거리는 무릎관절과 휜 팔꿈치와 바람에 파인 이마까지/ 먼지 나는 일대기를 온 몸으로 받들어 올린다/ 꿇고 엎드린 어머니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저러다가, 저렇게 깊은 잠 드는가 싶다/ 어머니 손바닥, 깊게 파인 도랑 사이로/ 고요한 것이 흐른다/ 흥건하다/ 손끝을 타고 흐르는 저 무진한 물길/ 주악비천도의 젖은 치마자락이 문지방을 넘는다/ 풍경을 치고 온 바람이 연등 아래를 맴돌고,/ 어머니는 아직 일어나지 않는다//

꽃지다 / 유현숙
새들은 새들의 언어로 서로를 부른다/ 새가 새를 부르고 새가 새에게 대답하는 소리에/ 귀 먹었던 적 있다/ 왼손으로 제 멱살을 거머쥐고 오른손에는 권총을 움켜쥐고/ 내 사랑을 위하여! 딱, 큰 은행 한 번 털고 싶다/ 던,/ 사랑한다사랑한다 멀리서 우는 우레로/ 가까이서 맞부딪는 낙뢰로/ 우르르, 쾅쾅, 번쩍, 눈멀고 귀먹고 암흑이던,/ 그 때마다 꽃 졌다 아직 지는 꽃 있다/ 새가 새를 부르고 새가 새에게 대답하는 새 울음소리 같은/ 새들의 江이/ 몸 아래로 흐른다 갈비뼈가 젖는다/ 몸이 몸을 부르고 몸이 몸에게 대답하는 소리에/ 깜박 눈멀었던/ 목이 긴 짐승의 목 메인 울음소리……/ 여자가 엎드려 있다, 달빛이 여자 위로 쏟아지고 달빛보다 희게,/ 여자가 지금 진다/ 꽃 진다//

꽃 그늘 / 유현숙
숲에서 생채 냄새가 난다/ 오동나무는 뿌리를 뻗어 땅속 물을 길어 올리고/ 허공에다 보랏빛 꽃들을 내다 건다, 그렇게/ 自序(자서)를 쓴다// 오동나무 아래에 보랏빛 그늘이 깔리듯/ 그 그늘 아래로 물소리 흘러가듯/ 다리 긴 소금쟁이가 물바닥에다 발자국을 찍듯/ 그 때 내가 발자국 찍히는 수면이 되듯// 내 어깨와 손등과 발등에 묻은 이슬을 털어서 길게길게 꽃피는 내력을 쓴다// 오늘은 관음사 안마당에 햇살이 일찍 닿고/ 나는 조용해져서 두 손을 포개고 앉아/ 갓 깨면서 오동꽃빛으로 물드는 풍경을 바라본다// 어떤 사람이/ 이 풍경 한 冊(책)을 얻기 위하여 아침부터 말갛게 눈을 씻는지.//

연줄을 끊다 / 유현숙
오랫동안 강둑에 서 있었다/ 바람이 부는 방향을 따라 내 얼레는 부지런히 허공을 감거나/ 풀어준다/ 손끝에 잠아 쥔 한 올의 연줄로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를 하며/ 매운 강바람 속, 밀고 당긴다/ 나를 감고 돌고 있는 피의 소망과 무명 밥상보 같은 한 장의/ 약속을 이제야 툭 끊으며/ 습지에 못 박힌 골풀 같은 시간을 풀어 놓는다/ 망연히 바라보는 하늘 속으로 반역처럼 켜 온 허망 하나 꼬/ 리 연이 되어 멀어져 간다/ 땅속으로 가부좌 튼 내 뿌리의 팽팽했던 안식을 거부한 채/ 칼날 같은 몸체로 더워지지 않는 공기를 수직으로 가르며 솟구/ 치는/ 저,// 청명한 자유 ……//

점멸기 / 유현숙
생의 가는 허리를 휘어잡는다 푸드득, 새들 나는 소리 들린다/ 대추알들 붉게 익고/ 주둥이 흰 새들 날아와 대추알을 쪼던/ 새들의 눈빛이 대추빛으로 익던 때가 있었다/ 기대어 서면 내가 대추나무이던 때가/ 대추나무 밑동을 걷어차며 또 내가 걷어차이던 때가/ 지났다// 날 저물고 내 안의 빈 마당에 바람 불고/ 지금은 밑동만 남은 마당 귀퉁이에 돌아와서 후두둑 떨어지는/ 대추알을 줍는다// 왜 나는, 몸이 대춧빛으로 익을 때마다 날 선 톱날이 되어/ 대추나무 허리를 잘라야 했던지/ 새들은 떼 지어 날아오르고 마침내 까마득한 하늘로/ 점멸했던 것인지// 내 안에 드리워진 대추나무 그림자가 대추잎새 보다 푸르다// 새들은 이제 날아오르지 않는다//

서해와 동침하다 / 유현숙
공중을 덮으며 한 떼의 철새들이 밀입국해 온다/ 기러기떼, 가창오리떼들, 억새밭 너머에 콩알처럼 깔려 있다/ 유효기간이 뚜렷이 각인된 바코드를 등에 찍고/ 저렇듯 세상을 경유한다// 저무는 서해는 여전히 해감을 토하며 뒤척이고 뼛속까지 붉은 서약의 저녁이/ 뜨겁다// 사르륵 새들의 옆구리에서 깃털 떨어지는 소리 들리고/ 이제 막/ 서쪽에 닿는 이 옷을 벗는다//

등 뒤가 어둡다 / 유현숙
불빛이 연꽃무늬 창살에 번진다/ 검은 새 한 마리, 차고 목 쉰 소리로 공중을 건너가고/ 누운 탑 그림자가 길다// 남쪽마을에서 사람이 죽었다,/ 고/ 남쪽으로 내려가는 사람을 배웅하던 날 밤/ 그의 등 뒤에는 어렴풋이 조등 빛이 흔들렸다/ 누운 사람의 그림자가 길다// 그는 이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명치아래 독즙이 괴고,// 돌아다 본 등 뒤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겹쳐 있다/ 흔들리는 것은 불빛만이 아니다//

서쪽마을에 닿은 엽서 / 유현숙
1,// 산기슭 양지바른 곳에 앉아 백 년 전에 쓴 소설을 읽는다 까마귀만 울며 날아가는 빈 산에 한 통의 문자가 왔다 삼월에 눈이 왔다는 전갈이다 나는 삼월의 눈은 축복이라고 답신을 했다 그가 있는 마을에 눈이 온 지금 내가 머무는 이곳 하늘은 푸르고 맑다 눈 오는 서편을 오래 바라본다//
2.// 해가 지는 쪽으로 몇 걸음을 다가앉으면 당신 면목 만날 수 있을까 뿌연 새벽을 밀고나와 강을 건넌다 낯선 도시의 늦은 계절은 늘 쓸쓸하다 정작은 떠나 온 곳이 어디인지 두고 온 것이 무엇인지 나만 모를 뿐/ 물은 서쪽으로 흘러가고 나도 서쪽을 따라 걷는다 내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3.//열차가 밤새 달리고 여자는 새벽이 오도록 눈을 붙이지 못하고 등사판 같은 창에 이마를 대고 산과 구릉의 공제선을 쫒고 지난날의 경계에서 생각의 덩어리들이 덜컹거리는 바퀴에 깔려 부서지고 날리고 가벼워지기 위해서 상실이 얼마나 아름다운 휘발인지 그는 이미 짐작을 했고 미명의 산하가 어둠을 걷어내며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고 한때의 꽃다운 환희도 망상이라는 덫이었다는 걸 늦게야 알았고/ 새벽이 처음 닿는 그곳 제5병동에는 한 생애가 한 포부가 결이 고왔던 한 남자가 같은 이름의 병명으로 과대하게 누워 있는,//
4.// 밀러는 오직 음악만이 오성을 물리칠 수 있는 지평을 열어준다고 했다 음악을 듣고 지휘를 하면 모든 질문들이 분명해진다고도 했다 나는 지금 몇 시간 째 진공관 불빛의 따뜻한 온도에 내안의 물길을 데우고 있는데……//
5.// 바랜 도화지 같은 지워진 듯한 써보지도 않은 듯한 아예 마주 선 적도 없는 듯한/ 빗줄기가 그림처럼 그려지는 늦은 봄날 골목 끝 한일다방 구석진 자리에 남자와 여자가 앉았다 접혀진 우산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물을 멀건히 내려다보며 식어빠진 유자차를 단숨에 마셨다 수수 천 날의 선들이 목탄화처럼 뭉개지고 지워져 간다 여자는 그때 등골이 시렸다//

창 / 유현숙
장맛비가 길다/ 내다보이는 마당 귀퉁이가 멀다/ 젖은 손마디에서 여자 나이가 짚인다/ 마흔 아홉 여자 나이는 머릿속에다 서캐가 집을 지은 듯/ 사는 것이 가렵다/ 양푼 한 가득 비빔밥을 비벼 먹고도 벌컥벌컥/ 물 사발을 들이키는 나이다/ 에이 잡것! 하며 돌아누우면 남자 하나쯤 까맣게 잊는 나이다/ 떼인 곗돈이 그 에이 잡것, 보다 커 보이는 나이다/ 막소주 두 잔이면 창자 속이 펄펄 끓어 물박달나무 같이/ 오기를 세우는 나이다/ 그러다가 헐렁해져서 풀썩 무너지기도 하는 나이다/ 사는 게 별거냐며 크게 한 번 트림하고/ 두 발 쭈욱 뻗고 누워서 가랑이 사이가 깊어지는 나이다/ 여자, 마흔 아홉은/ 멍든 辭說과 자잘한 각주를 줄기마다 매단/ 한 그루 둥치 굵고 그늘 넓은 후박나무가 되는 나이다/ 그 후박나무 둥치에 노새처럼 고삐 묶여/ 옛 후원이나 빙빙 도는/ 빙빙 돌면서도 왜 도는지 심드렁한 나이다/ 축축하고 지루해져 하품이나 해대는 그 여자 나이가/ 마흔 아홉이다//

두족류 / 유현숙
맞은 편 의자에 앉은 여자의 흰 손이 남자의 허벅지에 붙어 있다/ 낙지발 같다/ 전동차 안이 푸르러지고, 풀어헤친 머리칼이/ 물풀마냥 물결치고/ 진흙구멍을 막 빠져나온 긴 낙지발이, 여자의 가는 손가락이,/ 개흙바닥 위를 긴다/ 폐선처럼/ 개펄에 빠진 어구처럼/ 낡아서 삐걱대는 저 남자, 반쯤 잠 들었다/ 덜컹, 전동차가 흔들리고/ 남자의 아랫도리에서 덜컹, 낡은 부속품들이 흔들리고/ 창밖에는 저녁놀이 흐르는데/ 가압류 딱지가 붙은 섣달 그믐이 붉디붉은 인줏빛이다/ 고철처럼 남자의 가랑이 사이가 산화하고/ 여자의 손가락이 흠뻑 녹물에 젖는다/ 간 여름의, 등이 뜨거워진 왕새우떼들 손등에서 튀어 오르고/ 남자의 전신에다 흡반을 댄 저 여자/ 너풀대는 물풀 속에 웅크린 한 마리 두족류다//

고수부지 / 유현숙
내 몸은 저장물을 다 비워낸 고수부지이다/ 큰 물이 날 때에나 강은 내 어깨를 잠시 빌리며/ 저 혼자 하루도 도도히 흘러간다/ 물이 빠져나간 그 자리엔 밀려 온 세월 하나가/ 상흔처럼 뒹굴고 있다/ 급하게 달려 온 저 물길은 이제/ 강의 하류 어디쯤에서 노곤한 몸 풀고 싶은 것일까/ 제 몸에서 흘려 놓은 것들 미처 쓸어담지 못하고/ 서둘러 떠난다/ 내 전신을 훑고 지나간 물길은 저기 어디/ 산하를 지나다가 그리운 안부 하나쯤 부쳐 줄는지/ 때로 급류에 떠밀린 적이 있었다해도/ 한때 신세졌던 내 어깨 한 쪽을 잊지 말기를/ 욕심내 보는이 청맹과니 같은/ 그대가 빌려 쓴건 어깨 뿐이라는데/ 나는 왜 가뭄에 배 터진 논배미처럼/ 쩍쩍 갈라진 채 전신을 앓고 있는가//

불면 / 유현숙
베갯잇에 울음이 흥건하다. 모로 누운 뺨 언저리에는 달빛에 눌린 울음 그림자가 찍혔다./ 번득이는 빛비늘 같은 울음 그림자를 훔치다가 새벽이 오고 말았다. 새벽이 오도록 과리, 머루, 돌배. 산 사과......, 기껏 이런, 나의 이름만 외고 있었다./ 참 못난 풋것들이 등짝에 눌렸다. 뭉개지고 터진 울음이 온 새벽 당초문이다.//

북향집 / 유현숙
전깃줄이 골목하늘을 다 덮었다. 겹겹이 친 내 안의 그늘 같은 여기도 누가 찾아오기는 하는가. 창을 열면 웅- 웅- 응달진 마루짝에는 일렉트릭 베이스 같은 송판들의 울음이 수북하다. 함석지붕의 로터리 다방 앞에는 빨간 스쿠터 한 대 증류(蒸溜) 중이고, 미니스커트를 입은 짙은 립스틱의 다방 여자가 소맷자락으로 스쿠터의 반사경을 닦는다.// 엊그제 세 든 집에서 게리 무어를 듣는다. 그가 죽은 새벽이다. 기타를 슬프게 연주했다던 그는 제 핏돌기를 뜯었는가. 빗물 같은 음표들이 여명의 바닥을 구른다./ 나는 이삿짐 더미 앞에 앉아 낯설고 서러운 밤을 천천히 읽는다./ (누군가 구붓구붓 흰, 내 등을 민다..., 벼랑까지..., 밀린다.....)// 피크와 손금만 거머쥔 손이 겨울 새벽 같다. 건넌 집 초록기와는 내 창에다 비스름히 어깨를 기대오고/ 북창은 환류 중이다. 나는 어둠을 여기까지 와서 다시 어둠을 자책한다./ 떨어진 마룻바닥을 밟고 건너가는 고양이 발자국 소리에 오늘도 잠을 설칠 것인가.//

모텔 미라지 / 유현숙
사막을 건너서 낙타를 몰고 돌아온 자, 전신에 뒤집어 쓴/ 모래먼지를 털어낸다/ 검은 눈이 슬픈/ 거품 문 낙타가 푸푸 구릉에 얼굴을 처박던 일몰이 지나가고/ 하늘에 걸쳐진 쿰란의 사다리를 목련 꽃잎이 내려오고 있다/ 모텔 미라지는 새벽까지 모래 더미다/ 관형구가 붙은 다채로운 안부 같은 건 이 사막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등허리 를 파고드는 직유, 쿵쿵/ 꽃잎 지는 소리!/ 그 토막말만 새벽처럼 날이 섰고 여명은/ 절벽 같은 경계를 긋는다// 어느새 사다리를 타고 올라 간 어떤 이는 일곱 하늘을 다 돌았는지// 새벽길로 난 우물 바닥은 푸르고 다시 낙타를 몰고 떠나는 者,/ 뒤로,// 모텔 미라지에 투신한 목련 꽃잎 낭자하다//

사회면에 깔리다 / 유현숙
종각의 지하 통로에서 남자가 깡소주를 털어 붓는다/ 남자의 슬관절 앞으로 종로의 한데 바람이 굴러와 뒹군다/ 깔고 앉은 골판지가/ 알코올에 찌든 골 깊은 한 생애와 맞물리는 저녁/ 한때는 윤기 도는 삶의 부품들을 채워 넣던, 품 넉넉하고/ 든든한 박스였을 저 남자다!/ 몸체에 덧댄 굵은 철심을 물어뜯자 얼룩진 단면들이/ 와르르 무너진다/ 골판지와 신문지 사이에서 남자는 불어터진 컵라면처럼// 납작하게 깔렸다/ 골판지 전신에 새겨놓은 알록달록 당의정 같은 과거들/ 흥건하게 취한 남자의 곁에 와서 눞는다/ 울퉁불퉁한 사방과 하늘을 가리지 않은 종로의 바람이/ 압정처럼 남자 위에 꽂힌다//

무덤에도 색깔이 있다 / 유현숙
직산역에 내려 논둑길을 걷는다/ 길 끝에 닿으면 둥글게 둘러앉은 자작나무들 틀림없는 봉분이다/ 봉분 속에는 살을 벗은 뼈마디들 달그닥거리며 뼈들끼리 위로한다/ 길의 끝에 서면 무덤 속도 따뜻하다/ 절망도 힘이 된다/ 건너다보이는 고물상의 폐상자 더미/ 또한 빛나는 무덤이다// 납작하게 접힌 델몬트 상자, 이파리 한 잎도 없는 초록매실 상자, 잔뜩 등 구부러져 있는 새우깡 상자, 고춧가루 범벅진 신라면 상자,// 포개고 덧포개진 부덤에서 나를 내다보는 눈빛 있다/ 너는 얼마나 단단하게 닫혔는가/ 너는 왜 여태 이파리 하나 피우지 못하는가/ 어쩌다가 구부러지고 제 몸 질끈 부러뜨려 범벅인가/ 묻고 대답하는 소리가 다 무덤이다/ 휜 등이 서러운 내가 무덤을 끌며 폐상자 더미 아래를 걷는다/ 직산역이 여기서 멀고// 길 위에다 나는 또 나를 묻는다//

아궁이 / 유현숙
겨울비 냄새 마른 풀 젖는 냄새 빈 절집 어두워지는 냄새/ 식은 아궁이의 그을음 냄새/ 그것들에 코끝이 매캐해져서 어둑한 약수터 길을 내려 모는데/ 웬 할머니가 밤길 혼자 다니지 말아요,/ 한다// 난 왜 그 셍각을 못했을까 몰라/ 비 냄새 풀 냄새 절집 그을음 냄새 저녁 숲 냄새...../ 그 아득한 것들이 도대체 나를 어디까지 업고 간 거야/ 참자리에 누워 몸 구석 죄다 뒤져 봤어/ 구들장은 오래전에 식었는데 영 불이 지펴지지 않는 거야/ 더러 저 혼자 뜨거워지기도 뜨거워진 저 혼자 서럽기도 하던/ 아랫목 방고래가/ 싸늘하게 돌아누운 거야 돌아누운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거야/ 서늘한 냉기가 방고래마다 골골이 내리 뻗히는데 꿈, 그을음/ 비늘들이 덕지덕지 일어나잖아/ 식은 아궁이 속으로 디밀은 내 손등이 온통 새까매지잖아// 나, 많이 아파// 당신은 괜찮아?//

찬란 / 유현숙
승부도 알 수 없는 용도폐기였나/ 찬란하기 위하여/ 링에서 내려온 사람의 가장자리는 사각이다/ 퇴사하고 뒹굴던 봄날 모처럼의 외출에서/ 내 발부리가 내 발 뿌리를 걷어차며 넘어졌다/ 바람 부는 오후 네거리 신호등 앞에서다/ MRI 결과 반월상연골판파열, 의사는 수술을 권했지만/ 거부했다// 목발을 짚은 생각이 꽃바람 속에서 절뚝거렸다/ 직립 이족보행이 얼마나 인간다운가// 찬란하기 위하여 봄날은 간다/ 애끓는 노모의 전화를 받는 날은 종일이 찬란하다/ 항구도시에서 보내온 밑반찬을 꺼내 먹으며 봄날은 간다/ 차를 마시고 음악을 들으며 봄날은 간다/ 이제 막 배운 맞고를 치며/ 피박 되어 봄날은 간다/ 소소한 일상이 서툴러도 봄날은 간다/ 비풍초똥팔삼 낙장불입 같은/ 강호의 잡술을 기웃거리는 동안// 세상살이란 손에 쥔 어떤 것도 쉽게 버려선 안 된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찬란하게/ 찬란하지 않은 봄날이 간다//

보름사리 / 유현숙
1.// 통영 나들목 지나면 한산 앞바다 거기서 헬리혜성 꼬리가 잡히겠다/ 썰물 이랑이랑 밀고 가는 소매물도까지/ 바다는 팔다리가 타고 소금기 밴 맨 등짝이 텄다/ 땡볕에 달은 갯바닥에 발목이 빠지며 부동산 소개소를 기웃거리며/ 낡고 쓸쓸한 작은 거처 한 곳 찾아나서는 짓이/ 먼 섬이며 무덤이며 그 무덤 앞에 퍼 올린 헛제삿밥 한 그릇과// 그래 무엇이 다를까// 밤에는 겹 창문을 열고 달이 기울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겠다//
2.// 잠자리까지 기어들던 달빛에도 얼굴 묻고 뒤척였던 밤들/ 몇 편의 시가 여자 곁에 누워 주었든가/ 구월 보름달이 푸르게 돋는 것과 여자가 뒤채다 달빛을 물고 지금/ 우이천을 걷는 것이// 보름사리 때 맞춰 밤길 떠나는 애인의 유성우流星雨 정거장까지의 밤 티켓 한 장이랑// 그래 무엇이 다를까//

한하운을 읽는 밤 / 유현숙
1.// 1987년 발간된 단행본이다. 오래되고 얇은 보리피리다./ 초록은 짙고 해당화꽃잎이 바람에 부서지는 남도(南島),/ 그러나 한 번도 웃어 본 일이 없다는/ 한 번도 울어 본 일이 없다는 가고 없는 시인의 고백에는/ 그가 방랑한 몇 바퀴의 산하(山河)가 있다./ 누덕진 옷에 깡통을 든 삽화가 고백보다 더 처절한 자화상인,/ 그러나 황톳길 넘어가는 저녁놀은 장이 뒤집힐 만큼 붉고 곱기만 한데/ 머리를 긁다보니 간밤 얼었던 손가락 한 마디가 툭 떨어져 나가더라는 남자/ 살아내는 일이 이토록 높고 슬픈가./ 나는 떨어져나가지도 않은 내 손 마디를 움켜잡고 지혈하며/ 바닥에 고인 한 슬픔의 빛깔을 들추어 읽는다.//
2.// 남자는 얼어 떨어진 손가락 마디를 주워들고 아직도 어느 산하를 떠도는지.//
3.// 황톳길 너머 노을이 붉어지는 동안, 발가락 두 마디가 자갈길에 파묻히는 동안,/ 까마귀가 노을 속으로 사라지는 동안,/ 이 붉은 길이 다 닳는 동안, 별 뜨는 서쪽으로 다가앉는 동안/ 풍화되고 뭉개진 마애불이 된 남자는/ 아직도 비우지 못한 한 단락 슬픈 기도를/ 제 몸 빈자리에 장엄하게 자문(刺文)하고 있는지.//
4.// 누가 누구를, 무엇이 무엇을 한 줄로 단정할 수 있겠는지.//

미술관 달빛 아래 / 유현숙
동치미 국물처럼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도 잠시/ 녹슨 철사 같은 바람이 상처를 들쑤시는데/ 들쑤신 자국마다 덧나고 부푸는데// 아는 것이 많아 사랑하는 것도 많던,*/ 그리하여 한 표적으로 나를 울렸던 각진 혓바닥 위로/ 은방울꽃들 장그랑 피어나는데/ 핥고 쓰다듬는 자리마다/ 죽은 말들이 동이 째 굴러다니는데// 클림트의 그림들이 내려지기 전날 멀리서 왔다/ 너를 만나듯 황금빛 은유로 베토벤 프리즈** 를 만난 날/ 악마성 앞에서 예술은 탄생하는 것이라고 했던가// 미술관 귀퉁이를 타 내리는 저 수정 달빛 같은 것이/ 호박마차의 바퀴소리 같은 것이/ 산(山)처럼 짐승처럼 아구리 벌리고 선/ 지난 시간의 뜨거운 교향곡인가// 이별 앞에서 나는 더욱 아름다워져도 좋으리/ 잠시, 아주 잠시/ 그리웠던 그대//
* 레오나르드 다빈치의 ‘아는 것이 없으면 사랑하는 것도 적다’에서 패러디.
** 쉴러의 시 ‘환의의 송가’에 베토벤은 곡을 붙여 교향곡 ‘합창’을 만들었으며 구스타프 클림트는 그것을 그림으로 남겼다.

샤샤와 지하철 퍼즐 / 유현숙
1.// 플랫폼 구석진 의자에 여자가 앉아 있다 끝물 더위에도 무거운 겨울 옷차림으로 몇 계절을 저 구석 의자에 앉아 복귀 명령을 기다린걸까 손바닥보다 작은 여행용 카메라를 귀에 대고 5,2,4,4,6,6,3,7……, 모스 부호 같은 숫자들을 불러낸다/ 여자가 건너갈 강의 암호인지 허공을 여는 지문인지, 유창한 러시아어로 혀끝을 궁글려 제 내부를 타전한다, 젊고 아름답다/ 그런 여자가 느닷없이 가시 선 모국어로 폐부를 찌른다/ 제발 사람 몸에 손대지 마세요!,/ 저녁 뉴스에는 연일 마약파티, 성 스캔들, 폭행, 자살 같은 검은 낱말들이 난무하고 있다//
2.// 당나귀를 타고 온 여자의 땅에도 사철 매운바람이 불까 정교회 대성당 지붕 위에도 흰 눈이 쌓였을까/ 식구들은 오늘도 창가에 모여/ 대륙을 횡단해 올 딸과 누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겨울 볕은 그곳에도 여전히 눈부신지 몰라/ 조각난 발랄라이까의 연주를 퍼즐 맞추듯 잇대면/ 말라버린 해바라기 꽃대 같은 저 쓸쓸한 로망이 열릴까/ 해독할 수 없는 암호가 붉은 당나귀의 고삐나 잡아채고 있는 건 아닌지/ 닳아 무너진 여자의 편자는 지금 어느 시베리안 레일을 달리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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