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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깃장부리지 않고 차분히 살다가도 쳇바퀴 같은 삶을 벗어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남편과 나는 부산의 낯선 길로 차를 몰곤 했다. 길섶으로 우거진 나무를 끼고 달리다 산중턱에 이르면 시가지를 내려다보면서 우리 자신들을 돌아보게 된다. 언젠가는 우연히 금련산 산마루를 넘어 과거 속으로 들어선 듯한 마을을 지나게 되었다. 비탈에 층을 이룬 슬레이트 지붕 집들은 시골이나 과거 모습을 복원해 놓은 것처럼 딴 세상 같았다. 하나같이 단조롭고 소박한 집들 사이사이로 빨래가 널려있고 도란도란 장독들도 가족처럼 둘러있었다. 그러나 내려가는 길은 경사지고 좁아 차가 마주오기라도 하면 어떻게 할까 불안하기까지 했다. 부산에도 이런 곳이 있었던가, 한편으로 신기하게 생각하며 돌아왔다.
그 뒤 ‘골목 에세이’라는 TV다큐프로그램을 통해 그 마을이 이름만 듣던 ‘물만골’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해설하는 사진작가의 얘기를 들으며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았을 때 나의 선입견이 편견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 마을은 사람들이 생각하듯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 남루한 곳이 아니었다. 오래된 이발소의 주인은 그 나름의 직업 정신으로 정답게 마을 사람들의 머리를 매만졌다.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회관도 있었고 아이들 놀이터와 공부방도 있었다. 오솔길과 실개천은 현대인들이 잃어버린 옛 삶을 되돌아보게 했다. 도시의 화려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곳에는 사람 사는 정이 넘쳐나고 있었다.
내가 부모님을 따라 이곳 부산으로 이사를 온 것은 중 3때였다. 고향인 대구나 잠시 살았던 서울과는 달리 부산은 내게 참 생소한 도시였다. 특히 내륙에서 볼 수 없는 바다와 자갈치시장, 부두도 인상 깊었지만 나의 시선을 강하게 사로잡은 것은 산 위의 즐비한 집들이었다. 분지인 대구나 평지가 많은 서울과는 달리 층을 이룬 부산의 주거 형태에 적잖이 놀랐다. 마치 계획도 없이 벽마다 기분 내키는 대로 못을 박아 사진을 걸어놓은 것처럼 그때그때 되는 대로 산에다 집을 박아 놓은 듯했다. 밤에 부산항으로 들어온 외국인들이 하늘로 치솟은 건축물의 현란한 조명에 감탄했지만 아침에 바라보니 그것이 모두 산비탈에 지은 집이라 놀랐다는 말도 있다. 산중턱까지 다닥다닥 붙은 집들은 얼기설기 골목을 끼고 있었고 초라한 그 모습은 보기조차 민망스러울 정도였다.
그러나 그런 주거 형태의 역사적 배경을 알게 되면서부터 내 생각은 조금씩 달라졌다. 6·25전쟁 당시 수많은 피난민들이 몰려 살면서 지은 판잣집들이 실핏줄 같은 골목을 만들어 내고 주거지를 형성했다고 한다. 난리 통에 변변한 거처조차 없이 간신히 입에 풀칠만 하고도 끈질긴 생명력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던 시대의 상흔이다. 가난하고 절박한 살림살이는 산을 뒤덮고 외곽으로까지 옮겨 가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렇게 구석구석 돌고 돌아 이어진 골목은 부산만의 특이한 주거 형태가 되었다.
최근 우리나라는 재개발 바람이 불어 낡은 집들이 헐리고 아파트가 들어서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오래된 마을의 주거 문화와 역사를 관광 아이템으로 개발하고 보존하려는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물만골도 그중의 하나였다. 그 매력에 이끌려 다시 마을에 들렀을 때에는 전에 지나쳤던 예쁜 벽화와 조형물들로 밝게 꾸며진 환경을 눈여겨 볼 수 있었다.
부산은 이뿐 아니라 지형적 특성을 잘 살려 좀 더 전문적이고도 다양한 콘텐츠를 갖춘 감천 마을이 있다. 감천 마을은 천마산과 아미산 사이의 산자락을 따라서 물만골보다는 훨씬 폭넓게 자리 잡고 있다. 어질어질할 정도로 층층이 골목이고 겹겹이 집들이 들어서 있지만 눈앞이 탁 트인 마을과 바다를 향한 전망은 가슴을 시원하게 열어주고 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걸어 들어간 마을은 색감 있는 조형물들로 방문객을 맞이했다. 골목길을 미로처럼 오르락내리락하니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된 기분이었다. 특히 발길이 머문 곳은 <사람 그리고 새>란 작품이었다. 옥상 난간의 설치된 작품은 정서적으로 메말라진 이들에게 하늘을 올려다보고 싶은 마음을 심어주는 것 같았다. <꿈꾸는 물고기>란 작품도 하늘을 날아오르고 있는 것이었다. 그 비상의 꿈은 마을 사람 모두의 소망처럼 다가왔다.
부산은 지난 시절의 지우고 싶은 흔적들을 외면하지 않고 부산만의 골목 문화를 만들어 왔다. 약점을 잘 가꾸면 그 사람의 장점이 될 수 있고 얼굴의 흠 같은 점 하나가 매력의 포인트가 될 수도 있는 것. 최근에는 외국 관광객들까지 감천 마을을 찾아들고 있다고 한다. 부산에 온지도 어언 30년, 삶의 굽이굽이에는 골목길처럼 답답하고 숨이 막힐 때도 있었지만 나는 그 골목길을 다시 거닐어 보며 내일의 더 성숙해진 나의 모습을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고유진 님은 1971년 대구 출생. 1993년 부산대학교 음악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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