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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그 여자의 업보와 운명 / 한승원

by 부흐고비 2022. 5. 3.

어제인가 그 여자는 나에게 자기의 유년시절에 있었던 사건 하나를 이야기했다.

“화창하게 맑은 날 한낮 때쯤에 뒷산 앞산 소나무 숲속으로 낙엽을 긁으러 갔어요. 쇠갈퀴하고 멱서리를 가지고, 어른 나무꾼들을 따라서, 아마 내가 여섯 살 되던 해의 늦은 가을이었을 거예요. 멱서리를 무덤 앞에 놓아두고 숲속에 들어가서 낙엽을 한 줌씩 긁어가지고 와서 멱서리에다 담곤 했어요. 낙엽이 멱서리 시울까지 차올라왔을 때 그것을 머리에 이고 집으로 돌아왔어요. 그런데 그 낙엽을 담은 멱서리가 얼마나 무거웠던지 끙끙 안간힘을 쓰면서 땀을 뻘뻘 흘리고 왔어요.

우리 집 사립에 막 들어서니까는 어머니가 '아이고 내 새끼! 땔나무 많이 해오는 것 좀 보소! 하고는 그 멱서리를 받아들었어요. '아니, 무슨 놈 갈퀴나무 조금 담은 멱서리가 이리도 무겁다냐?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그 멱서리를 부엌으로 가지고 가더니 낙엽을 나무청에 쏟았어요.

그때 멱서리의 낙엽 속에서 웬 주먹만 한 돌덩이들 열 개가 나무청 바닥으로 떨어진 것이었어요. 어머니가 그러면 그렇지! 하고, 멱서리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는 부엌 바닥에 주저앉으면서 소리를 지르셨어요. 아이고! 어떤 못된 것이 이렇게 심술을 부렸다냐!"

어머니는 나무청 바닥에 떨어져 있는 돌덩이들을 멱서리에 주워 담더니 골목길 한쪽에다가 버리셨어요. 그것도 그냥 버리는 것만으로는 분이 풀리지 않았던지, 큰 돌덩이 하나를 집어들고 다른 돌덩이들을 꽉꽉 쪼아대고, 발바닥으로 으깨버릴 듯이 밟아대고, 그것들을 향해 퉤퉤 침을 뱉고, ‘아이고, 이 죄돼 자빠질 사람!’ 하고 저주의 말을 퍼부으시고 나한테로 오더니, 내 머리꽁지를 어루만져주고, 목덜미와 팔과 다리를 주물러주면서 ‘아이고 아이고, 얼마나 무겁더냐! 그 못된 것들 쯧쯔쯔’ 이러셨어요.”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 나는 허허허허 하고 웃었다. 그러다가 웃음을 그치고 진저리를 쳤다. 자기의 낙엽 담은 멱서리 속에 누군가가 돌덩이 아홉 개를 넣어놓은 줄도 모르고, 그 무거운 것을 머리에 인 채 땀을 흘리며 가고 있는 어린 계집아이의 모습이 머리와 가슴속 깊은 곳에 아프게 각인 되고 있었다.

나는 중얼거렸다.

“업보와 운명이다. 남편 시어머니까지 합하면 모두 열이지 않은가.”

그 여자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하나뿐인 딸을 장남에게 시집보내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자기네 귀한 딸이 한 집안의 무거운 살림살이를 짊어지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 땅의 가난한 집의 장남들과 그 장남에게로 시집온 큰며느리들은 아버지 어머니가 하여오던 넉넉지 못한 살림살이를 고스란히 넘겨받아야 하고, 밑에 달린 모든 동생들을 키우고 성혼시키고 분가시켜야 하고, 조상의 제사를 지내야 하므로 죽는 날까지 짓무른 손이 마를 날이 없고, 모두 뜯기고 빼앗기고 누더기를 걸친 채 거친 음식을 먹으며 살아야 하는 것이었다.

그 여자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팔방으로 애를 쓴 나머지 한 집안의 둘째 아들을 그 여자의 남편감으로 택했다.

그런데 그분들의 그러한 노력은 허사가 되고 말았다.

그 여자가 그 둘째 아들과 결혼식을 한 지 두 해 뒤에, 그 여자의 시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러자 맏아들인 그 여자의 큰시숙이 동생들을 떠맡기를 거부하고 자기 아내와 아들 셋만을 데리고 분가를 해버렸다.

그리하여 그 무거운 짐을 둘째 아들인 그와 그 여자가 떠맡아 짊어진 것이었다. 둘째 아들에게 시집온 그 여자는 뜻밖에 큰며느리 노릇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여자의 ‘멱서리 속에 알 수 없는 어떤 귀신인가가 이제야말로 정말 힘에 버거운 돌덩이들을 넣어놓은 것이었다. 여덟이나 되는 시동생들 다 키워 시집 장가 보낸 다음 분가시키고 집 사주고…. 어떤 귀신이 심술 부리듯이 짐 속에 넣어놓은 그 돌덩이가 무거운 줄 모르고, '아이고, 감오 네가 일등이다. 최고다' 하는 주위 사람들의 칭찬 몇 움큼에 어지러움을 느끼고 실눈 해가지고 웃으며 앞장서서 집안일을 떠맡아 하곤 한 그 여자.

젊은 시절 내내 플라스틱 슬리퍼와 싸구려 옷을 면하지 못하고, 시장에 나가도 자기 먹고 싶은 자장면 한 그릇 사 먹지 못하고, 좋아하는 고등어 한 마리도 마음 놓고 사다가 가족들과 더불어 지지고 볶아 먹지를 못한 그 여자.

그 여자가 지금의 내 늙은 아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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