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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이 턱밑으로 다가서면 나는 부엌칼부터 손본다. 제물祭物을 준비할 때마다 칼날이 무디다는 집사람의 타박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의도도 있지만, 그보단 철철이 이어지는 종갓집의 기제忌祭를 모시고 있는 내 정성의 단초이기도 해서이다.
칼을 갈려면 우선 숫돌부터 챙겨야 한다. 숫돌은 칼이나 낫 따위를 갈기 위한 천연 석재를 이용한 살림도구의 하나로, ‘수’와 ‘돌’이 어우러져 형성된 합성어合成語이다. 이때 ‘수’는 어원적으로 돌石의 의미를 내포한다.
일찍이 우리 조상들은 석질이 부드러운 퇴적암 등을 채취하여 거친 숫돌과 고운 숫돌로 구분하여 사용해 왔다. 그런데, 근자엔 탄화규소나 산화알루미늄을 활용한 인조 숫돌을 선호하는 편이다.
지금도 고향집에 내려가면 뒤란 샘가에 웅크리고 앉아 터줏대감 노릇을 하고 있는 숫돌을 만난다. 쇠죽솥 아궁이에 쟁일 생솔가지 치러 갈 때에 할아버지가 육철낫 쓱싹쓱싹 문댄 돌이요, 아버지가 올벼 천신薦新하기 위해 다랑논 오르기 전에 도장 찍고 나갔던 권솔眷率이다.
우리 속담에 “호박떡도 정성을 들여야 익는다.”는 말이 있다. 하찮은 일이라도 정성을 쏟지 않으면 어떠한 일도 성사되지 않는다는 의미렷다. 하면, 칼갈이 또한 이에서 외예일 수 없다.
칼을 갈기 위해선 우선 숫돌 앞에 앉는 자세부터 정좌해야만 한다. 숫돌과의 거리는 춘향아씨 가는 허리 보듬을 수 있는 그 아름으로 너무 멀면 칼날이 앵돌아져 날 넘기 일쑤요, 그렇다고 바짝 다가앉으면 칼등만 문대다가 서산마루에 해 넘기기 십상이다.
우리가 일상 사귀는 대인관계 또한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십년지기 구우舊友라도 발길이 뜸하면 소원해지기 마련이고, 그렇다고 줏대 없이 붙어살다 보면 허파에 쉬 슬는 줄을 모른다. 역병疫病이 아니더라도 적당한 ‘거리두기’를 유지하며 사귀다 보면, 너와 나의 관계가 정립되어 오래도록 선인선과善因善果를 이룰 수 있지 않을까?
칼날을 세우는 요령은 우선 인내심부터 발동할 일이다. 급하다고 서두르면 불을 품은 돌인지라, 냉기 어린 쇠붙이를 여들없는 의붓자식 밀어내듯 하고 만다.
팔만대장경의 말씀에 돌이 있는 한 불씨는 결코 근절되지 않는다고 했다. 인류 문명 발상의 근원이 된 숫돌이 품고 있는 불은, 오행의 상승설相勝說에 의하여 금金은 목木을 이기고, 화火는 금金을 이긴다. 하여, 무쇠가 제아무리 강해도 1,200도가 넘는 용광로 속에 들어가면 황금빛 쇳물로 풀어지고 만다.
허리 잘록한 숫돌을 볼 때면 나는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의 굽은 등이 통증으로 다가온다. 칠남매의 허기를 달래주기 위해 평생 살점을 갈린 숫돌 같은 당신! 오죽했으면 입관시入棺時 바로 눕히지 못해 모로 눕혀드렸을까.
육신이 허물어지면 허물어질수록 자식들의 가녀린 몸피에 새살이 돋아 오르는 것이 그리도 흐뭇했을까? 숨결 잦은 옥안玉顔이 그렇게 평온하실 수가 없었다.
흐르는 세월에 씻기고 갈려 마모된 숫돌, 나는 그 유장한 물결에 서린 헌신獻身의 현상학現象學에 옷깃을 여민다. 휘영청 달빛 쏟아져 내려 숫돌의 패인 가슴팍에서 은파 만파로 출렁일라치면, 나는 오늘도 채움과 비움의 이중주二重奏에 솔깃하여 귀 기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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