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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이불의 숨결 / 이정자

부흐고비 2022. 5. 6. 09:03

해맑은 날씨에 눈이 부시다. 봄물이 번져가는 벚나무 둥지에 꽃망울이 브로치처럼 앙증맞다. 간절기 이불을 빨래하고 의류 건조기 안에 넣으려다 꺼낸다. 이불을 베란다 창틀에 툭 걸쳐놓고 하늘을 바라보니 나비 구름이 흘러가며 유혹한다. ‘이불은 햇살 좋은 날, 마당 어귀 담에 널어서 말리는 게 최고야.’ 하는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오는 듯하다.

아득한 날, 나의 요람은 헌 이불이었다. 어머니는 푹신한 이불을 마주하면 “네가 태어나던 순간이 떠오른다.”라고 하며 애잔한 눈빛이다. 할머니는 태아의 탯줄을 자르고 이불로 핏덩이를 감싸서 밀쳐 두었다. 아버지는 외동아들인데 내리 딸이 태어나 푸대접을 받은 것은 아닐까 하는 서운함이 웅크리고 있다. 하지만 파란만장한 엄마의 일생을 들춰보면 가슴 먹먹한 일들이 스르르 풀린다.

어린 시절, 해맑은 날이면 어머니는 올레 어귀 담에 이불을 펼쳐 널었다. 밤이면 좁은 방에서 형제들은 이마를 맞대고 이불자락을 당기며 장난을 쳤다. 가끔 누군가는 잠꼬대하며 멋진 지도를 그려놓아 딴전을 피웠지만 모르는 척 눈을 감았다. 어머니는 투덜거리다 이불 홑청을 벗겨내고 이부자리를 손질하였다. 잘 마른 이불이 방안을 차지하면 제비 새끼들처럼 재잘거리며 뒹군다. 자매는 잠자리에서 소곤소곤 이야기 나누며 파랑새를 쫓아 꿈나라로 갔다.

연로하신 할머니는 풀 먹인 옥양목 이불을 햇살 좋은 날 손질하였다. 그 이불은 누군가를 맞이하기 위한 보물처럼 단정하게 벽장 위에 올려놓았다. 손녀들은 고운 이불을 덮고 싶었지만 허락하지 않았다. 이불과 하얀 고무신은 저승길에 가져갈 유품이었을까. 할머니는 하얀 수건을 동여매고 마당에서 뛰어노는 손자를 바라보며 웃으셨다. 때로는 이승보다 저승을 더 생각하는 회한의 눈빛으로 중얼거리며 창문을 닫았다.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친구와 손뜨개를 배우며 몰려다녔다. 서툰 솜씨지만 하얀 털실로 할머니의 푹신한 털모자를 완성하고 하얀 머리에 곱게 씌워 드렸다. 할머니는 매우 기뻐하며 이불속에 감춰 놓은 돈을 손에 쥐여 주면서 흐뭇해하셨다. 벽장 위 이불속은 요술램프처럼 소중한 물건이 자꾸 나왔다.

추운 겨울, 눈 내리는 초저녁에 할머니는 애지중지하는 모든 것을 놔두고 저승길로 홀연히 떠나셨다. 할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는 동안 나는 관속에 털모자도 넣어 달라고 애원하였다. 상주들이 곡소리 내며 이별의 손수건을 관속에 넣을 때, 매우 떨리는 손으로 모자를 깊숙이 넣었다. 할머님의 장례를 치르고 유품을 소각하는 불길은 이어도에 날아갔을까. 석양으로 날아가는 연기는 하얀 머릿결처럼 힘없이 사라졌다.

오랜만에 이불장을 정리하며 두툼한 목화솜 이불을 만지작거린다. 사십 년 전 어려운 형편이지만 혼수품으로 마련해 준 다섯 채의 이불에 한없는 모정이 담겨있다. 어머니는 늦가을 잔치를 앞두고 목화솜을 직접 사들이어 좋은 날을 선택하고 마당에 멍석을 펼쳤다. 친지들과 솜뭉치를 층층이 펼쳐놓으며 이부자리를 곱게 만든다. “목화솜 이불은 오랫동안 푹신할 거야. 눅눅해지면 다시 솜을 태워 사용할 수 있다.”라고 하며 평온한 삶을 응원하였다. 맏며느리가 된 딸에게 어떠한 고난이 닥쳐도 이부자리만 넉넉하면 막을 수 있다는 덕담도 잊지 않았다. 시댁과 친정은 농촌 마을이라 사회와 상급 학교에 첫발을 내딛는 동생은 함께 지냈다. 어려운 시절 형제들과 미운 정, 고운 정이 쌓여갈 때 흉허물을 감싸준 것은 이불의 포근함이다. 같이 지내는 동안 큰 파도가 밀려와도 이불속에서 흐느끼며 해결하고 원만한 생활을 함께하였다. 지난한 세월에 이불은 거의 교체하고 한 채만 소중히 남아있어 추억을 회상한다.

몇 년 전 며느리의 혼수 예단 이불을 받았다. 새로운 가족의 희망과 사랑이 포근히 포장된 것이라 흐뭇하다. 이부자리 색감이 화려하고 포근하여 흡족한 마음으로 펼쳤다. 어떠한 순간에도 며느리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안온히 감싸주리라 다짐한 순간 무지개가 떠오른다. 흔히 예단 이불은 “고부간의 갈등을 풀어주고 집안의 액운과 흉허물을 막아준다.”라고 한다. 천생연분 인연의 끈을 보금자리에 펼쳐 놓으니 무한한 사랑이 피어났다.

어느 날, 서울역 지하도에서 지인을 만나기로 하였다. 시간에 맞춰 약속 장소에 갔는데, 친구는 갑작스러운 일로 늦어진다는 것이다. 지하도를 천천히 구경하며 걷다 보니 건너편 구석진 곳에 종이상자를 펴고 신문을 덮어 누워있는 거리 노숙자가 계셨다. 한때는 사회와 가정의 주역이었던 저분들도 포근한 잠자리가 그리울 것이다.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며 사회의 큰 문제로 대두되는 현실을 걱정하며, 보금자리를 다시 찾을 수 있으면 하는 소망이다.

사방은 어느새 연녹색 물결로 넘실거리며 계절을 노래한다. 들녘에는 유채꽃 물결과 찔레꽃 향기가 나비와 벌을 유혹하며 평화롭다. 코로나19 전염병은 자욱한 안갯속에서 희망을 움켜쥐고 있는 나날이다. 사회적 거리두기 안전 수칙이 예방책이지만 일상의 변화는 모두의 불안한 현실이다. 온 세상을 포근한 이불로 감싸고 덮으면 어떠할까. 액운을 막아주는 이불의 안온함으로 새로운 희망이 움트기를 소망하며 이부자리를 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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