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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네 박자 한 소절 / 박흥일

부흐고비 2022. 5. 5. 05:57

쿵작쿵작 쿵따라쿵짝, 악단이 전주를 연주하며 흥을 돋운다. 가수는 전주의 끝자락을 놓칠세라 발 박자를 치며 리듬을 탄다. 전주는 1절의 멜로디를 무대에 깔아놓고 암막 뒤로 비켜선다. 가수가 노랫말을 음미하며 감정을 잡는다. 가수가 1절의 멜로디를 손끝으로 낚아채며 객석을 휘어잡는다. 가수가 생로生老의 아름답고 숭고한, 병사病死의 연약하고 덧없는 서사를 숨김없이 토해낸다. 1절의 노래를 끝낸 가수가 가쁜 숨을 고른다. 악단은 그 틈새를 놓치지 않고 감미롭게 간주를 연주하고, 2절의 멜로디를 가수에게 넘긴다. 가수가 2절을 열창하면 악단은 오선지를 박차고 나올 엔딩을 준비한다. 가수가 청중의 희로애락을 멜로디에 실어 노래한다. 트로트의 신내림이 빙하의 피오르가 되어 청중의 가슴을 후벼 파며 객석을 휘몰아친다. 단기 기억상실의 오싹한 전율에서 깨어난 객석은 기립 앙코르를 외친다.

모 방송사가 기획한 트로트 오디션 프로그램이 트로트 열풍에 불을 지폈다. 무대가 익숙한 현역 가수와 노랫말조차 제대로 깨닫지 못할 것 같은 앳된 출연자가 트로트의 한恨을 겨룬다. 우리가 트로트에 열광하는 이유는 왜일까. 트로트의 리듬과 가사가 구구절절 가슴을 파고드는 이유는 왜일까. 한 번쯤은 잔잔한 봄바람 같은 전주로, 소나기 같은 사랑의 멜로디로 오늘을 열창하고 싶은 바람 때문인가. 트로트가 일상에 찌들어 지친 심신을 웅변하기 때문일까.

트로트가 왜 들불처럼 번져갈까. 음식은 간이 맞아야 하고, 사랑은 가슴이 설레야 한다. 노래는 박자가 맞아야 하고, 트로트는 꺾어 넘는 애잔함이 곁들어야 감칠맛이 난다. 트로트의 인기가 들불처럼 번지는 것은 3분 남짓한 짧은 곡조에 인생 여정의 회한을 치유할 수 있는 휴식처가 있고, 돌덩이로 퇴적된 삶의 옹이를 녹여내는 위로가 샘솟고, 숨이 막힐 듯 꺾어 넘는 가락의 소절마다 인생극이 회상되기 때문이리라. 트로트에 중독되어 자리에 눕는 일이 생긴다 해도 트로트만큼 용한 명약을 찾기란 당분간 어려울 성싶다. 그래서 트로트가 '동의보감' 반열에 오르나 보다.

트로트 광풍의 발원지는 어디인가. 타향살이의 외로움, 이루지 못한 사랑, 기약할 수 없는 재회, 빈털터리 인생살이의 푸념, 흘러간 청춘의 야속함, 불효의 눈물, 사랑의 고백, 구구절절 내 가슴을 헤집어 본 듯한 노랫말의 가락인가.

전주가 엄마 품에 안긴 아기의 꿈길이라면, 1절은 광야를 맨발로 달리는 청년의 함성일 테다. 간주가 중후하고 세련된 중년이라면, 2절은 곰삭은 완숙미로 엔딩을 준비하는 노년의 여유로운 미소이리라. 트로트는 전주, 1절 메들리, 간주, 2절 메들리, 엔딩의 순서로 잘 엮어진 인생 교본이다. 지금, 이 순간 누구는 전주를 듣고 있을 테고, 어떤 이는 2절까지 모두 부르고 엔딩의 화려한 마무리만 남겨 둔 사람도 있을 터이다. 또 어떤 사람은 후회 없이 인생을 노래하고 옷깃을 여미며 무대를 내려서고 있을 것이다.

전주의 잔잔한 선율이나 엔딩의 화려한 선율이나 모두 오선지를 벗어날 수 없다. 마음 편하게 유복한 인생을 산 사람도, 후회스러운 삶을 살았던 사람도 모두가 아름다운 마무리를 꿈꾸고 희망한다. 엇박자 쉼표로 뜀박질의 출발이 남들보다 뒤처졌다고 낙심하거나, 높은 음정이라고 고함치며 우쭐대거나, 낮은 음정으로 태어났다고 기죽을 필요가 없다.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저음의 가르침이 고함치며 악을 쓰는 고음의 싸움꾼을 다독인다.

인생은 오선지의 그물 그네를 타는 짧은 음표이다. 지금, 이 순간 트로트 멜로디에 맞춰 어깨를 흔들자. 어차피 인생은‘쿵작쿵작 쿵따라쿵짝’에 울고 웃다가 아침 이슬처럼 홀연히 사라지는 네 박자 한 소절의 트로트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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