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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형 시인
경상남도 창원에서 태어났다. 부산대 대학원 국문과를 나왔다.
2013년 《애지》를 통해 등단했다.
시집 『흑백 한 문장』을 썼다.
제17회 김달진 창원문학상 수상.
주걱 / 박은형
개망초 흰 머릿수건 사이 여름 오후가 수북한/ 그 집은 가득 비어있다/ 인기척에 반갑게 흘러내리는 적막의 주름/ 컴컴한 부엌으로 달려간 빛이/ 삐걱, 지장을 놓으며/ 눈썹처럼 엎드린 먼지를 깨운다// 밥상을 마주했던 날들을 배웅한 징표일까/ 남은 것들로는 그림자도 세울 수 없는 회벽/ 그을음으로 본을 뜬 그늘 주걱 하나가 거기,/ 테 없는 액자처럼 걸려 있다// 무쇠솥이며 부엌 바닥의 벙어리 주발들/ 눈이 침침한 채 아직 남은 밥 냄새, 만지작거린다/ 누군가와 마주앉아 먹던 모든 첫 밥에는/ 허밍처럼 수줍고 고슬한 기억이 들었을 것이다// 선명한 그을음이 빚은 밥 냄새의 화석에서/ 뭉클한 식욕의 손잡이가 돋는다/ 멀리 수평의 여름 저녁이 이고 오는/ 고봉밥 한 그릇/ 산마루를 지나 평상으로 식구들 불러들인다//
* 2013년 《애지》 신인상 당선작
천리향 전언 / 박은형
해가 바뀌고 이내/ 천리향 나무에 전입목록이 배달되었다/ 여기는 누구하나 지폐를 지녀본 적 없는 양탄자 주민센터/ 고방에 들인 빛의 두께로 인품을 재단하지도 않는다/ 시세라고 불리는 검열제도도 발병전이어서/ 광대뼈 마음껏 투명한 백성들의 허리는 곧다// 발코니는 훤하게 쏟아지는 동쪽의 이마를 숭배하지만/ 굳이 사지가 발광체인 태양이 아니더라도/ 발열 성분을 가졌다면 누구나 다녀가도 좋은 곳// 마음 묶인 검정색도 이곳에선 포승을 풀고 환심을 산다/ 고장 난 난로 옆에서 새우잠을 잔 쿠션이나/ 주인 아가씨의 주정을 업느라 잇몸이 잔뜩 부은 구두/ 눈의 결정이 되어 돌아온 동백꽃 입김과/ 아직 두근거림이라는 궁륭을 걸어보지 못한 외진 마음 몇이/ 새로 거주지 이전 신청을 해 왔다// 차일피일 차양 걷기를 미루는 겨울도 곧 돌아갈 것이다/ 무단 방전을 위세 삼는 관록 높은 시간수용소를 떠나/ 헐거워진 심박 한 량쯤 몰고 너도 천리를 찾아와 다오/ 번번이 놓친 뒤에 비애의 정표로 눈부시게 왔던/ 금 간 유리잔 하나 품속에 놓고 와 다오/ 마개가 없는 저 뜨거운 향기, 그 잔에 부어 마시면/ 돌아올지도 몰라/ 탄환같이 빠르게 박동하던 단 한번, 네 앞의 그 빛//
작약 / 박은형
고향 집 마당에 함박 핀 작약을 못 보았다 늦었다는 건 여지없이 함부로 당신을 떠나 있었다는 말 충실한 꽃의 작별을 일별할 때 흰나비가 날아 작약 푸른 잎에 날개를 접는다 나비 옆에서 열무가 자라는 것을 어여삐, 마침내 동그랗게 등을 완성한 어머니가 바라본다 꽃이 가고 나비가 일고 어머니 곰곰 지는 일 착란처럼 찬란한 찰나가 일순 점 하나로 정지하는 일 봄은 저렇게 무심한 풍경들로 이루어져 있다//
박꽃 / 박은형
저녁의 단문이어서 흰, 태생이 후렴이어서 흰, 들키지 말라고 아니 들키라고 흰, 될 때로 되라고 문틈에 끼워 놓은 조바심이라서 흰, 등대처럼 한 송이로 무성해서 흰, 꽉 들어찼음에도 자꾸 쏠리는 눈자위라서 흰, 모르게 져버리는 미혹이라서 흰,// 당신이라는 단 한 번의 미지//
도화복음 / 박은형
복사꽃에 눈을 쪼인다 끔벅이는 눈가에 덜컹 괴는 영원 멀어져야 한다면 바라건대 때는 지금이다 달아나려고, 울게 두려고 꽃 시절은 처음부터 최종의 속도를 켜 놓고 있다 때를 놓친 뒤에는 당신이여, 진부한 대로 이 어름 어느 수순에선가 기약 없이 그저 심심하게 잊히어야 하리라// 탁한 물속에 잠을 청한 사내의 장화였던가 왕버들 툭툭 종아리를 꽂아 달콤한 연두를 피운다 무덤이 저리 풍성하고 연한 질감이라면 아침마다 죽음을 못 알아볼 리 없지 멀리 청보릿골에 바위처럼 얼룩이는 아낙은 오래된 초상 보드랍게 일어나는 풋바람에 느릿한 춘몽이 넘실댄다// 풍경이 어긋나 다음 역에 도착할 수 없다 해도 당신이여, 오늘만은 행선을 묻지 말자 그저 무릎이나 베어 주자 꾹꾹 참았다 뛰어들면 그곳, 꽃잎이려나 아무것 못 들은 척 감감 눈뜨지 말자 지고 또 질 이 봄날엔 아까 꾸다 만 그대나 잇대어 보자 여벌 없는 한 시절 덜컹이는 차창 밖 도화 사월은 예나 지금이나 맹 전설 속 눈부신 영원의 귀퉁이//
꽃의 선고 / 박은형
관상용 구름 씨앗을 몰래 판다는 종묘상을 지났다 반도단추구멍가는길이라는 삐뚤한 입간판도 지나고 몇 번인가 더 길을 물었다 그러는 사이 바꿔 달 수 있는 단추의 계절도 줄었다 가느다란 길에서 공중으로 한 번 꺾인 뒤 닿은 오후의 화분은 귀가 없다 홀쭉해지는 영혼의 약도를 잘 따라온 꽃잎이 한 장, 코끼리 그림자처럼 쿵, 지고 있을 뿐이다 백만 개의 찢긴 마음을 벗어 놓는 소멸의 뺨에 잠 냄새의 심금이 새로 태어난다 별일 아니란 듯 세상의 염문은 성수기를 지속하고 때를 놓치지 않은 누군가는 아주 잠깐 아름다워지기도 한다 밀정 같은 마음의 포획기와 죽음같이 황홀한 밀어내기를 거친 뒤 마침내 애인들은 자기애로 가득찬 결별의 지침서를 유포할 것이다 사랑을 맹목하던 때, 애인이라는 무국적 천국에 닿기 위해 한 줄 해명도 없이 무단 투기한 것은 아니었나 나라는 지옥을 당신에게 한 번의 천국인 당신에게 떨어지는 꽃잎과 한번도 내통하지 못한 것처럼 당신에게// 다락같이 좁다란 영원의 잠을 찾아가는 꽃잎을 만진다// 주검에 쓰일 리본 씨앗도 밀매한다는 종묘상 쪽으로 돌아갈 시간은 충분하다 이제 마음을 흉내 내는 일로 평판을 채우지 않아도 되겠다 떠도는 위증의 나무에 큼지막하고 달콤한 열매가 맺히기 전에 마블링처럼 잘 위장된 울음살갗에 감염되기 전에 지금은 내게로 돌아갈 때일 뿐 반도단추구멍처럼 좁아드는, 시야에서 벗어나는 길 하나를 버리고//
꽃집이 있었다 / 박은형
생활의 맞은편 첫 번째 횡단보도를 건너면/ 왼발의 그늘 지점에 잎이 머금은 산소 면적과/ 꽃의 윙크 무게를 궁구하던 녹색지대가 있었다/ 겨울이면 어깨가 좁아지는 식물들 사이에서/ 마음껏 둥글어지는 연탄난로 허리를 목격하던 집/ 당신을 만나러 가는 길, 동승할 볕을 기다리다/ 마치 청혼의 정류장처럼/ 신비하면서도 쉬이 무료해지는 순간들이/ 그 집에서 선뜻 꽃이 되는 장면을 보았다/ 한때는 모든 꽃집을 두고/ 지상의 북극성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그것은 단골 점성가인 흰나비 떼의 점괘로 판명되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사람들 덩달아 그 소문에 희망을 올려놓고/ 세계의 접경이 죄 꽃집이면 좋겠다 설레발치기도 하였는데/ 지금, 눈치 챌 수 없게 천천히 당신과 내가/ 오래 지녀왔던 사이가 짤막해지고 있는 것일까/ 내 아이들 복사뼈처럼, 여름 저녁 박꽃처럼/ 선명한 별자리 되어주던 꽃집이/ 얼룩의 흔적도 남기지 않고 밤사이 사라지고 없다//
연두 / 박은형
주남지 왕버들이 연두를 시동 겁니다/ 넌짓한 마음을 단숨에 뜯어내는 승냥이 떼 같습니다// 늦으면 늦은 대로 연두를 따라붙으려/ 두툼하게 녹이 난 슬픔이나/ 생애 첫 연서의 무용한 형식에 대해 고심합니다// 일몰의 긴 회랑이라면 눈부신 졸음/ 폐역의 늦은 당신이라면 단팥죽 한 그릇/ 빈 식탁이라면 먼지를 보여 주는 흑백 한 문장// 다발로 묶어 연두를 실어 갈 당나귀 어디 없을까요/ 당신과 나의 담장에도 뭉개질 만큼만 놓아기르기로 해요// 연두가 그저 몇 걸음의 눈 배웅에 관여하는 거라면/ 나는 말할 수 없이 쓸쓸해서 꼭 살겠습니다// 전승된다면 사랑/ 죽음이라면 끄덕끄덕 자장가까지/ 저수지 너른 고독에 찔려 신접의 병상처럼 에는 것// 내 마음을 따라잡는 연두였다고 중얼거립니다//
그 나무 붉은 지문 밑 / 박은형
그럼에도 그 꽃나무 아래서 만나자 했다/ 그러니까 더욱 그 꽃나무 아래로 찾아오라 했다// 새 옷 입는 꿈을 꾸었다는 당신은/ 차디찬 이월의 매화에 눈썹을 그려 넣자 했다/ 달콤한 맹세 같은 향기에 부빈 눈과 귀 멀어 보자 했다// 나무는 방금 잊히어서 죽었다 울었다 하는 구원과/ 첫 꽃 구사하는 물색없는 사랑들에 둘러싸여 있다// 삼백 년을 저렇듯 기다려서/ 한 가지 말과 일색의 마음인 꽃잎을 짓는 중이다/ 제발 만지지 말아 달라는 간청을/ 헛된 다짐으로라도 지켜 주고 싶게 하는 것이다// 붙들 수 없는 꽃잎경을 알아듣게 고쳐 건네는/ 그 나무 붉은 지문 밑/ 우리는 그렇게 잠시 서로를 알아보았다//
소식 / 박은형
처서 지나 몸 속 물결 옅어진다/ 투신 소식 날아든 매미울음 맹렬히 엎질러지고/ 허공과 눈부시게 충돌한 건 후일에도 완결되지 않을/ 희망이나 약속이라는 머나먼 이름/ 열어둔 창을/ 엊저녁 밥물 끓을 때보다 조금 더 당겨놓고/ 당신이라는 신념에 대해 잠깐 또 잠깐씩 딴전을 피운다/ 오이 같은 것들에 양념을 섞으며 수수방관을 배고/ 느릿느릿 벗어나는 여름에 묶어 허세 같은 것 뿔뿔이 지운다/ 외딴 비와 산나리 구두코와 나비농막을 배회하던/ 뭉게구름에 끼워 깨진 하루를 세워두고/ 세상의 모든 음악에 맞춘 난청의 저녁을 들인다/ 양말 한 켤레 찾아 신으며 당신이라는 점화를 배웅하고/ 떠돌던 마음들, 날아가 보고 싶었던 데로 떠나는 동안/ 몸 속 물결, 꺼졌다 넘어졌다 한다/ 한없이 꺼졌다 넘어졌다 한다//
사슬나무 / 박은형
오래전 비워진 집 문간에 나무 한 그루 서 있다/ 나무는 몸에 걸린 체인을 복부에 켜켜이 저며 넣는다/ 무심은 표 내지 않고 야금야금 힘이 세지는 족속이어서/ 시나브로 나무를 먹어치우고도 멀뚱한 낯빛이다// 이제 보니 쇠사슬의 둥근 알맹이는 눈물의 인상을 빼다 박았다/ 몇 개의 결정은 무럭무럭 길들어 이미 나무의 내면으로 사라진 뒤다/ 나무는 어쩔 수 없었다는 듯 물기 많은 감정에 녹 냄새를 배양한다// 마모되는 심정으로 무연히 나무를 바라보는데/ 심장에 체인을 감아주며 친친,/ 요즘 내 사랑은 단 한 번의 진짜여요 입버릇 하던 여자/ 짓무른 녹 냄새 울음마다 풍기던 여자 생각이 난다// 작은 나무였을 때/ 그저 햇빛에 반짝이는 것만으로 좋았을 어여쁜 나무였을 때/ 옆구리 철렁 장전된 것이 쇠사슬 다발이라니/ 몸통 단단해질수록 우지끈 쇠고랑을 만발하는 나무는/ 몸에다 두툼하고 뼈아픈 덩이슬픔 함께 매몰한다// 아주 잊힌다는 것은 심연을 몽땅 파 먹히는 일/ 생애를 다해 꾸역꾸역 몰두해야 하는 차디찬 슬픔을 피우는 일// 나무 옆에 한참 서서 나는/ 그 여자의 눈물에서 맡던 쇳내를 다시 잊는다//
먼나무 편지 / 박은형
하지 무렵 저녁나절엔 먼나무 아래로 오세요/ 수호초 명자나무 목서와 남천/ 이름도 단단한 꽝꽝나무 번지를 건너면/ 푸른 깃털의 해거름 자리로 비워 놓는 곳/ 수종(樹種) 따로 없는 득실한 고요에/ 내 졸음은 먼 표정 하나 새로 얻지요/ 입자 큰 정색일랑 꽝꽝 밀봉해 두어요/ 어제의 통곡이나 고장 난 날씨 따위는/ 흐물흐물 욕조에 풀어 두고 오세요/ 존재의 빛으로는 짧게,/ 무익한 실마리로는 오래 퇴화하는/ 나와 당신의 분주한 풍경은/ 소지의 빛 충만한 먼나무에 탕진해 버리자구요/ 들뜬 목울대와 쉰 창자와 치렁한 주머니/ 잘못 배운 어른 말투들 변기에 흘려 버려요/ 이제 그만 무리의 서열을 떠나 먼나무에 연루돼 보세요/ 딱 슬픔 하나만 개종하지 말고 오세요/ 하지 무렵 저녁나절이 제격이랍니다/ 낭창하고 깨끗한 먼나무 피안에 드는 일 말입니다//
율마 / 박은형
한 번도 숲을 가져보지 못한 난민의 수종이라죠// 내가 데려 가겠다 했을 때/ 식물원 여자는 눈초리 가득 내 안의 의심을 힐끔거리며 말했어요// 물기를 떼어 놓으면 이 아인 죽어요// 죽어요는 단 한 번 유용한, 모든 순간의 고백이죠/ 수문장처럼 의젓해서 대번에 창을 완성해 주는/ 기름하고 숱 많은 변방의 초록에다 나는 자꾸만 손바닥을 묻히게 돼요// 그러면 밤사이 혼자 져 버린 빗소리 같은 것이 툭, 내 손바닥에 지곤 하죠// 맹목에 가까운 살결은 변명이라곤 없이 간결해서/ 바람에 머리칼 헝클릴 때 나도 모르게 감게 되는 눈의 온도를 닮았어요// 세계의 비탈에서 오늘도 주저 않고 터지는 갖가지 악몽들 좀 내쳐 주세요/ 아까 헤어지고 밤에 새로 헤어지는 애틋한 악다구니가 나쁜 철학은 아닌 거 맞죠// 잔가지 하나 내지 않고 우뚝, 홀로 숲이 되는 나무에게 나는 매번 무언이 길어요/ 물끄러미 오래 보아도 뒤탈 없는 성품이 귀한 시대니까요// 무엇이든 슬쩍 들키고 싶다면 당신도 꼭 한 번 찾아가 보세요/ 긴 긴 말없음만 챙겨간다면 창가의 오후는 결코 끝나지 않을지도 몰라요//
검은 꿈 / 박은형
꿈을 꾸었네/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길 때 매번 다르게 구겨지는 손의 꿈/ 무례하게 낚아 챈 목덜미에 잇자국을 심는 긴 타인의 꿈/ 묵주를 화관처럼 베껴 쓴 어둑한 뒤통수의 꿈/ 깨진 꽃병의 신분을 뱃속에 감춘 선동자의 음역에 관한 꿈/ 산산조각의 애인을 매만졌다 무릎 꿇렸다 하는 자선가의 꿈/ 태연한 수줍음으로 정면을 바꿔치는 노련한 입술의 꿈/ 미사여구를 도모하지 않은 죄명의, 찢긴 마음을 닦아내는 꿈/ 신부의 떨림을 구현하는 눈부신 변장술에 관한 꿈/ 젖은 화약에 몸을 묶는 허풍쟁이 마술사의 꿈/ 바닷물을 퍼 마신 갈증에 몇날 며칠 신을 바꿔 신는 꿈/ 돌아오는 길이 없는 미지의 물가만 떠도는 꿈/ 떠밀려 온 폐선에 발아되지 않을 풀씨를 모으는 꿈/ 칭송하는 것마다 사금파리로 물방울로 흔적을 바꾸는 꿈/ 철로변에서 들리지 않는 색색의 돌을 캐는 아이의 꿈/ 이름 높은 마녀의 사원에서 공공연하게 쫓겨나는 꿈/ 유전되지 않은 표정으로 지은 이름과 깃발을 내다 거는 꿈/ 한순간 벼랑으로 사라질 나와 모든 내 저쪽을 물끄러미 보는 꿈/ 눈을 뜨고도 꾸게 되는 슬픔 검은 꿈//
낭만 관리소 / 박은형
창이 열려 있다 이층 관리소 오는 동안 따라붙던 조붓한 그 비도 나무 곁에 열려있다/ 토닥토닥, 직원이 키보드를 두드릴 때 창 가차이 발바닥 번지는 비를 너머다 본다/ 매달리는 습성이 물방울에 도진다 창에 기대 새로 배우는 울컥한 낭만이라니/ 늙는 것이 일과 중에 제일 고요한 일이어서 살아서 매일매일 죽어라 고요해진다 마술처럼 스르륵 잎사귀 큰 나무 한 그루의 기분으로 비에 입술을 묻히는 오늘은 죽어라 죽을 것도 같다/ 사람이라는 오지가 되기 전 아니면 너라는 잦은 외로움에 기거하던 그 언저리 곧잘 차려먹던 낭만들/ 손 올려놓을 아름다운 허공을 찾아 우물쭈물 헤매는 동안 낭만의 행색은 기적과 동의이음이 되고 내 안에 들어찬 타인의 부위는 즐겨 베끼는 언어가 되었다/ 빗소리 조붓하게 열리는 관리소 창문에 머리를 붙이고 오늘은 오늘의 방식으로 빗물에 섞이는 짧은 고요에 붙들린다//
디아 / 박은형
동이 트지 않은 강가에서 여자가 디아*를 내민다// 속눈썹이 가장 깨끗할 때의 갓 난 잠을 껴안고/ 한 번도 들은 적 없는 천둥을 장전한 눈매를 건넨다// ‘나는 이 어린 것에게 무엇을 해도 될까요?’// 젖은 캥거루같이 강가를 헤매는 몸피에/ 모성과 가난의 정면을 압정처럼 박아 둔 여자는// 세상에 왔다가는 가파른 기도를 대변하는 꽃과 불로 있다// 주검 넘치는 강물을 타고 내가 사서 버린 기원들이 흘러간다/ 미리 와 기다린 어둠은 쓸리는 디아를 몰래 강기슭으로 끌어다 준다// 긴 속눈썹 아래 깊은 눈빛을 갓 난 잠에도 물려준 이여// 그대가 버린 무수한 기원은 이 세상 어떤 기슭으로 그대를 끌어다 주었나/ 아직 멀었다면 멀리 올 죽음에게는 원대로 끌어다 줄 수 있을까// 신의 후손들이 밤낮없이 갠지스 강에 둘러앉아/ 불을 피우고 꽃을 던져 영혼을 고치는 그 곳에 여자는 서 있다//
* 디아(Dia); 소원을 빌며 어두운 밤 강가에 띄우는 작은 꽃불.
소녀 / 박은형
나디아, 오늘도 엄마가 사 준 빨간 장화를 신었구나// 어둠 속 쓰레기산을 뒤지려면 발을 아껴야 하니까/ 오물 속을 잘 오르려면 발에 기분을 묻히지 않아야 하니까// 장화에다 너의 소녀를 신겨 놓고 아빠는/ 아무것도 못 보는 척 온종일 조롱 속 새소리를 가꾼다지// 어둠과 어둠과 어둠이 열한 살 탐스러운 네 졸음을 내리치는데도/ 네가 줍는 플라스틱같이 썩지 않을 명랑을 찾아 악취를 헤매는데도// 잘 벼려진 지옥이 천진한 네 몸짓에 자욱한데/ 너의 소녀는 처음부터 커다란 짐승의 입 속에 내던져진 것 같은데// 물에 담가두면 투명하게 자라는 깨끗한 손톱같이 너는 웃는구나/ 빙산에 갇힌 신기루 같은 웃음 모양으로 너는 우는구나// 물의 불꽃같이 매일 깨어나야 하는 나디아,/ 빨간 장화를 네 작은 소녀에다 신기는 나디아,// 나는 다 자라지 않은 네 슬픔의 두께를 멋대로 다 재어본다/ 나만의 어른으로 꽁꽁 치장돼 있는 나는,/ 멀쩡한 정신으로/ 닳고 닳아 거추장스러운 어른의 눈물이나 이렇게 쓴다//
미간 / 박은형
봄날이라는 처소와/ 고독이라는 미간 사이// 촌로는/ 여름이 오면/ 도라지꽃 반점을 벌겠다고// 밭고랑 촘촘한 적막을 들춰/ 생을 찔러 넣는다// 뻐꾸기 부추기는 산그늘 외로움/ 종일 혼자 솎는다//
물외라는 말 / 박은형
거긴 촛대처럼 나란히 선 모개낭게*에 듬성듬성 뭉게구름이 재금을 나던 곳이었다. 애장터를 지날 때면 누구랄 것도 없이 무덤에 작은 돌 하나씩을 얹어 주고는 퉤에 퉤 시늉 침을 뱉으며 니 말 안 한다 니 말 안한다 전수받은 주문을 외었다. 문지방 밟지 말라던 금기와 빳빳하게 풀 먹인 홑청냄새 섞일 때도 그 말은 노랗고 작은 꽃잎 끝에 매달려 꼭 왔었다. 그러나 이제 그곳은 펄럭 사라진 것들로 요약된 세계일 뿐이다. 서답**이나 당산목, 새미 같은 말들과 함께 끝물 지나도 한참 지난 말이 된 것이다. 구불텅하고 구석진 자리에 놓인 물외라는 말. 한 세대가 사라지려 할 때 말은 소멸 증상을 앓는지도 모른다. 얼굴에분粉기라곤 누릴새 없이 산자락 깊은 계절을 바꾸며 직진으로 늙기만 한 여자들이 물외처럼 있는 곳을 안다. 대물린 전답 대신 고층 아파트에 에워싸여 짜부라지고 귀가 나간 생의 전경을 처음으로 고치는 여자들. 통뼈감자탕, 24시편의점 같은 생경한 말의 전경을 수습해야 하는 여자들. 니 말 내 말 더 할 것도 안 할 것도 없어진 구순 들머리, 여자 안 가진 여자들이 내걸린 간판을 더듬더듬 따라 읽으며 물외物外를 향해 굽어가고 있는 그 곳을.//
* 모과나무의 방언, ** 빨래의 방언.
아직 우리는 / 박은형
순전히 타이밍의 항목일 수도 있겠다. 동시에 현관문을 나선 뒤 봄날처럼 딸깍 목례하는 일. 저 문 안에 누군가 산다고 들었다. 나도 문 안의 누군가이다. 근근이 버티는 낡은 외등같이 딱 발치만 비추며 오늘도 창문 없는 시간을 보수한다. 문과 집 사이, 침목 같은 간격이 세를 키운다. 그나마 모르긴 해도 물구나무 소나기나 한 칸 주차를 지시하는 흰 금들, 목적 없이도 오는 자정 따위는 공유하는 게 분명하다. 저 문 안에 흩어져 있을지도 모를, 어쩌면 조급한 파랑이나 석양예배당 같은 것들이 궁금한 것은 아니다. 그물 없는 시간에 좀체 걸려들지 않는 이 세계의 윤곽과 우연으로라도 오지 않는 우연의 희소성 사이를 어슬렁거려 볼 뿐. 그도 이 문 안쪽의 척박한 구름어항이나 그 안에 마음 접질려 버둥대는 붉은털늑대 같은 것에 무심하긴 매한가지다. 우리는 터무니없이 먼, 집 앞의 문으로 유예돼 있다. 어느 날 타이밍의 문제를 원만히 극복한다면 딸깍, 그래서 청동처럼 푸른 녹이 난, 사람이라는 최초의 망명지에서 마주치게 된다면 파랑이나 구름어항의 안부쯤 물을 수도 있을까. 점멸등으로 깜빡이기만 할 뿐 아직 저 문을 건너가 보지 않는 우리는.//
여름 / 박은형
꽃다발이려니 했다/ 이마를 짚고 누운 이의 머리맡 파 한 단/ 석양이 아니었으면 벼랑 같은 벤치 밑 막걸리 병도/ 통정이려니 했을 것이다/ 유리와 플라스틱, 빈 상자들을 골똘히 분리하면서/ 목마처럼 잘 깎은 내 방식의 오해는 암초라 분류했다/ 바퀴가 삭아가는 자전거를 문지기로 청한 일과/ 모자의 빛깔로 부여받은 세계의 조망권은 아직 건재하다/ 관목사이 풀벌레 울음 곁을 여름이 찾아 눕는다/ 기다림은 없지만 서쪽으로 창을 낸 이곳을 떠난다는 신호다/ 손가락이나 기록을 필요로 하는 약속은 구식이 되었다/ 뜨겁던 살갗이 수풀 속에서 어떻게 흩어지는지 알 수 없어도/ 돌아올 때는 지난여름처럼 다시 뜨거울 것을 오해하지 않는다/ 보러 가지 못해 미안하다는 전화로 방금 헤어졌다/ 서늘해진 바람 안에서 번성하는 나의 고백은/ 모두 늦여름의 일이다//
내게 있는 여름 / 박은형
저녁이 음악과 겹치는 지점에서 주로 잘 무르는 체질이다. 갈등의 입자를 여러 번 고쳐 썼다. 찐 호박잎과 깻잎에 나를 데리고 다니던 재래종 여름이 남아있다. 잠시 다녀가는 소나기에 새의 항문처럼 재빨리 오그리던 마른 흙냄새 같은 것들이 그렇다.// 딸아이는 내 그때보다 주섬주섬 일찍 어른을 배우기라도 한 듯이 머리 색깔을 바꾸고 혼자 공항을 찾아 갔다. 잠자리 돋는 공중을 여러 번 올려다보는데 석양이 눈빛을 엎질러 내 등에다 덧댄다. 문 밖에 버티던 덩치 좋은 몸을 반쯤 털어내는 여름. 그리고 해 떨어지는 쪽으로 불쑥 고이려 드는 내 오래된 버릇들.// 치자꽃 흰 가지를 꺾어 더 늘여 놓는다. 혼자라는 녹 슨 버릇.// 저녁과 섞이려는 낮의 끄트머리가 수도원 입구처럼 낭만적이다. 어쩌자는 건지 눈이 자꾸 머들거린다. 물끄러미 서서 좁아지는 타인들. 물 가장자리를 찾아가 신발을 벗는다. 젖지 않은 돌들이 따뜻하다. 물에서 만들어진 딱딱한 검정들. 여기 남아 있지 않을 것들로 생이 넘친다. 거절당하지 않아서 멀리 가는 여름처럼. 내 안의 딱딱한 검정들처럼. 나를 자주 헛딛는 나 혼자처럼.//
무지 / 박은형
무지(無地)는 여름용 화두다/ 꽃치자 흰 내음도 무지의 일족이다/ 여름이면 채도 낮은 침묵을 설파하는 일몰을 기다린다/ 민무늬 감각을 어떻게든 얻어 보려고 조바심 한다/ 기억 안에 깊숙이 버려진 나쁜 장면을 벗겨 낸다면/ 흉터는 무지로 둘 것이다/ 애인이라는 지위가 우울한 애인들에게/ 선호도 낮은 이 절기를 권한다/ 초록 물갈퀴 우거진 중국단풍나무는 마른 잎을 매달고/ 색깔 빠지는 기분을 내년 봄까지 고수한다/ 식탁에 둘러앉은 일가족의 여름이 훤히 열려 있다/ 툭하면 밀려오는 낭떠러지를 수선해서 무언가를 지켜야만 산다/ 끝나지 않는 사랑을 발명한다 해도/ 몰(沒) 혹은 졸(卒)의 발목에 차이는 설계도는 오차가 없다/ 입술이 즐겁게 침묵할 오늘의 방향은 민무늬 감정/ 이별도 꽤 쏠쏠한 감정이 꽃치자에 붐빈다/ 기다리던 일몰이 겹치고 나는 조금, 무지를 얻었다/ 더운 바람에 뭉개진 얼굴에 무지가 들러붙는다//
가을 공작소 / 박은형
나는 나의 방식으로 애틋하다/ 한 덩이 드릴처럼 밤공기를 배색하는 중이거든// 하늘을 나는 꿈 따위는 진작부터 꾸지 않아/ 죽을힘으로 날개를 비벼 보는 것이 내 최선의 구애// 그것을 울음이라는 낡은 보적이라고 뭉뚱그려도 개의치 않아// 가을밤은 벽이 없는 창문처럼 활짝 벌어져 있어/ 도무지 애칭으로는 숨을 수 없는 구조야// 작고 구석진,/ 풀벌레라는 이 체구를 단숨에 헐어 버리고 싶어/ 진저리 나게 떨어야 하는 몸의 목청을 비축해 둘 재간이 없어// 절걱절걱 칫칫칫,// 말뚝처럼 돌올하게 키운 말투를 온밤 저지르는 건/ 심장을 찌그러뜨리고 싶어 구사하는 가을밤의 공작이야// 아, 빌어먹을//
겨울 서랍 / 박은형
장갑 한 쪽을 또 잃고 왔다/ 맨손에 관한 간략한 처방전을 받은 외짝들이/ 마저 헤어지지 못하고 서랍 안에서 소신껏 없어진다/ 습기의 왼쪽이나 오른쪽, 혹은 허물의 정면에/ 갖가지 상실의 부위를 담아두기 적절한 서랍은 놓인다/ 무정형의 거울 속에 집을 지은 일몰은 내 취향의 서랍/ 서쪽들 또는 강물소리나 변장한 저녁들이 들어가 오지 않는다/ 깨진 사랑은 영영 오지 않는 것들에 의해 완성되기도 한다/ 꺼내서 어루만져 주지 않으면 모두 모래언덕의 후예일 뿐/ 재봉선도 없이 계절과 맞닿았다 멀어진 천 년이/ 고분 앞 석상으로 서서 부동의 서랍을 산다/ 전력을 다한 추위가 잠들던 장갑 한 짝의 체온을 돌아보는 일이나/ 시간의 손잡이를 당신 눈물에다 꽂아 두던 일도 그렇다/ 부추꽃같이 작은 서랍 하나를 마름하는 일이고/ 서랍으로 접혀서 마침내 소슬해지는 일/ 오늘을 살아냈다는 자전적 안부와/ 미루나무 그늘처럼 조금, 당신만 편애하던 때를 추억하며/ 가까이 있지 않아 미덕이 되는 겨울무지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뒤였을 것이다/ 아무도 모르게 장갑 한 짝을 흘린 그 때는//
태풍일기 / 박은형
세차게 붓던 비가 긋고 바람만 남았다/ 다행히 내겐 젖지 않은 신 한 켤레 남아 있다/ 회화나무에겐 맥없이 떨어진 꽃들이 남았고/ 그 꽃내 물어가느라 끙끙 맴을 도는 개미들도 남았다// 머잖아 아래 읍성에 당도한다는 너의 파국을 기다리며/ 공기처럼 얌전하게 앉아 조금, 깊게 마음을 긁어낸다/ 바람에게서만 자라는 회유의 머리카락은 숱이 짙어/ 긁어낸 마음을 슬어놓기엔 안성맞춤이다/ 손거울을 묻던 제의의 시간에게도 기별을 넣는다// 내 이별통고 따위, 한 번도 격식으로 치지 않던 네 앞에/ 흰죽처럼 엎질러지던 때가 있었다/ 눈을 떴을 땐 다른 무엇이 되어 있기를 반복해서 외웠다/ 그것은 미로의 성급한 입구 같은,/ 생의 기쁨과 슬픔에 관한 또 다른 복습이었을 것이다// 너는 아까보다 조금 더 가까이 왔다/ 점령을 거쳐 잠식, 눈부신 침묵이 너의 마지막 행색임을 안다/ 그간의 연애를 자복하는 것으로 다시 격식을 갖춰야겠다/ 그리고 오늘 처음 딱딱하다 느꼈던 의자를 바꿔야겠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파국을 나눠 가져야만 하니까//
울음사막 / 박은형
여자가 운다/ 사막에서 죽어 사막을 뒹구는 흰 뼈처럼 운다// 오던 길을 돌아보던 발끝까지 쿵쿵 떨며 울다가/ 주문 같은 혼잣말 화상처럼 쏟아내며/ 어쩌지 못하는 천 개의 흉터를 운다// 인파가 여자의 모래바람처럼 쏠렸다 흩어지면/ 재빨리 울음을 차지하고 눅는 뙤약볕과 습기는/ 쉬 썩지 않을 절망과 불안의 화음으로 등극한다// 그늘도 없이 우지끈 부러지기만 하는 곡성/ 여자가 깨 버렸거나 여자에게서 깨어진 것은 무엇일까/ 염천을 옭아매 내장의 물기 바짝 걷기라도 하듯/ 제 안의 울음, 짐승처럼 도려내는 여자에게서/ 울 자리를 분별할 수 없을 때라야/ 생이 보다 간결해진다는 한 마디를 옮겨 적는다// 뇌성같이 무너지며 여자는 오래 운다/ 진종일 폭염인 대로변을 서성이며/ 극진하고도 가득한 타인으로 목이 쉬는 여자// 연대를 잴 수 없는 고대로부터/ 왕창 깨진 것들의 무덤으로나 쓰이는,/ 여전히 기도처럼 캄캄하고 아름다운 동굴인 울음을/ 종유석처럼 빽빽하게 매달고/ 여자가 사막처럼 운다//
북쪽 얼굴 / 박은형
생이 뜯겨 나오듯 기침하는 어머니/ 봄을 기다리면 낫겠거니 한다/ 동무들 남쪽 섬구경 갈 약속의 봄,/ 아직 남았다 한다/ 북쪽얼굴로 이름난 가계의 분홍신으로/ 기침의 맨 마지막 진동지인 발을 덮어드린다/ 뻗친 겨울 정수리를 건너지 않고는 오지 않는 분홍/ 그 분홍 거진 다 써 버린,/ 앞섶에 북쪽만 그득한 어머니 늙은 기침이 까무룩해진다/ 자꾸 신을 쓰다듬는 저 손끝에 어쩌면 분홍물 배어/ 어머니의 북쪽, 조금 줄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요일들 / 박은형
밤새 부음이 들었다 창은 여전히 동쪽으로 나 있고 절판이라던 겨울 바람이 산발한 애인처럼 돌아와 죽은 자와 죽을 자들로 나누는 혹독한 아침이다 언 눈자위가 거울에 비치는 건 내가 후자에 속한다는 증거다 고양이 그림이 있는 찻집에서 그녀와 함께 일요일 오후를 보냈지만 실제로 고양이와 마주치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대신 한가한 찻집 주인에게서 고양이 발톱을 기획하고 도모하는 신종업종에 대해 들었다 가맹점에 관해 실없이 나눈 농담이 우리의 마지막 논의가 될 줄은 지금까지도 까맣게 알지 못할 뿐이다 화요일의 한 끼 식사를 같이하자고 그녀가 월요일에 제의했지만 딱 한 번 세상에 오던 날 남몰래 화요일을 쓴 이력이 있는 나는 따로 밥을 먹었다 우리는 거미의 전술*을 익히려 크게 고심한 바 없어도 왕왕 서로의 내심을 들락거리곤 했는데 그럼에도 우리는 실제로 어제 같은 잔인한 밤이 올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해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눈치채거나 논의하지 못했다 다만 공교롭게도 고양이 발톱같이 잘 기획된 연장에 호된 자상을 얻은 처지여서 만날 때면 빨간약을 구해다 서로의 상처에 발라줄 뿐이었다 오늘 아침은 수요일이고 모든 부음처럼 그녀의 것 또한 확정적으로 날아들었다 귓속으로 흘러든 눈물에 웅크린 어젯밤의 소식이 붓는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그녀와 나 사이에 남은 마지막 요일들을 배웅하러 가야 할 시간이다 그곳은 맹렬한 생의 바람골짝을 지나간 그녀가 이틀 밤 빌려 눕게 되었다는 마지막 침상이 있는 곳 그녀가 무릎 꿇어버린 화요일의 밖에 죽을 자의 신분으로 내가 찾아가야 하는 서러운 곳이다 내 머리칼도 상냥하게 헝클어 줄 바람골짝을 지나야 닿는 그곳은//
* 故 김하경 시인의 시집명.
머나먼 이름 / 박은형
처서 지나고 몸숙 물결 옅어진다// 투신 소식에 /남은 매미 울음이 후생의 방향으로 튄다// 허공과 눈부시게 충돌한 건/ 후일에도 완결되지 않을/ 희망이나 약속 따위 머나먼 이름// 엊저녁 밥물 끓을 때보다 조금 더 당겨 놓은 창으로/ 당신이라는 잘 모르는 신념과/ 굳게 닫혀 버린 허공이 은유 없이 흐르는 늦여름// 외판 비와/ 산나리 구두코와/ 나비 농막을 배회하던 구름을 끌고/ 세상의 모든 음악 속으로 난청의 저녁이 돌아오고// 나는 흰 양말 한 켤레 찾아 신는다/ 꺼졌다 넘어졌다 하는, 몸속 물결을 오래 듣는다//
똑같은 질문 / 박은형
더 외진 것들에 슬어보려고 저녁은 온다. 미루나무 키 큰 독백과 입장할 수 없는 월요일의 도서관이 어떻게 외지나 귀뜸하듯 온다. 그 눈 안에서 외질 수만 있다면 늦었다 해도 찾아갈 것이다.// 생활은 문 앞에 나침반을 맞춰놓고 새 주문(呪文)을 작명한다. 사랑은 언제나 당분간 한쪽으로 머는 외눈의 후예. 미루나무 근방에는 월요일의 주문이 한 걸음도 오지 않는다. 나무가 허공을 깊숙이 흔들어 줄 뿐이다. 한 그루 또렷한 바람이 나무에 선다.// 공공연하게 지목된, 나라는 똑같은 자세를 풀어준다. 몰골의 습관은 바람에만 슬어놓는 나의 외진 얼굴, 희열은 쓸쓸한 데서 북받치듯 나부낀다. 월요일의 낭만을 차려입고 도서관은 나무 앞에 그대로다. 살구꽃여자가 몰래 도서관 벽을 타다가 실족해서 봄이 짧아졌다는 풍문은 진짜 진짜다. 믿지 않아서 우리는 더 외롭게 죽기도 한다.// 영원한 낙인을 얻은 시들이 서가에 꽂혀 있다. 요즘 유행하는 오해는 몇 페이지에 고여 있을까. 살 오른 침묵을 찾아 어슬렁대다 나무와 저녁과 도서관과 같은 길에 서서 혼자 헤어진다. 조금 더 오래 우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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