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시詩 느낌

나석중 시인

부흐고비 2022. 5. 10. 07:32

나석중 시인
1938년 전북 김제에서 태어났다. 2004년 《신문예》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숨소리』, 『나는 그대를 쓰네』, 『촉감』, 『물의 허』, 『풀꽃독경』, 『외로움에게 미안하다』와 전자시집 『추자도 연가』 전자디카시집 『그리움의 거리』 등이 있다. 한국문인협회 김제지부, 한국신문예문학회, 빈터, 석맥회(石脈會), 스토리문학관 회원

 



테이크아웃 / 나석중
이젠 스릴도 즐기게 되었다/ 뛰어내릴까 말까/ 시작은 먹빛이었으나 지금은 보랏빛으로 익숙해졌다/ 정처 없는 바람을 믿지 않기로 했다/ 구름의 천의 얼굴도 보지 않기로 했다/ 마주 앉은 대화는 언제나 뜬구름만큼 부풀리고/ 다정했던 표정도 스쳐간 바람이었다/ 욕심 없는 생은 언제나 한 발 늦었고/ 환송은 기차를 타고 멀리 떠났다/ 어쩌다 행복의 옷자락이 저만치 뒤돌아서 갈 때에야/ 뒤늦게 엄지손톱을 물어뜯었다/ 이명을 자르는 고흐의 귀에서는 검은 피가 흘렀을까/ 혼자 맞이하는 손바닥에/ 블랙커피의 따뜻한 외로움이 스며들었다/ 이제 외로움도 습관이 되었다/ 혀끝을 홀리던 단맛에서 황폐해가던 정신을/ 가까스로 구원하게 되었다/ 혼자 늙어가는 낙낙 장송을 청승맞다 하지 마라/ 아슬아슬한 절벽 끝에 서보면 당신도 알게 될 것이다/ 인생은 누구나 단독자라는 것을/ 이제는 바쁠 것도 없지만 더 진보하라고/ 등 떠미는 그 누구도 없다//

나이테를 위한 변명 / 나석중
그의 일생은 어느 여름날/ 심심해서 던진 물수제비의 흔적이 아니었다/ 그건 나무의 울음이었다/ 나무가 울고 간 파문이었다// 붙박인 삶이라고/ 사는 것이 고만고만한 나무는/ 슬프고 괴로울 것 없을 것이라 단정하지만/ 뿌리는/ 하루에도 몇 리를 물 길러 나갔다 와서/ 끙끙 앓는 것이었다/ 생이 아파 우는 것이었다/ 저 수만 마리 이파리들이 뙤약볕 아래 나와/ 아우성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 우듬지에/ 새의 둥지를 무상으로 세들이고 바깥소식을 듣긴 하지만,/ 저 산 너머가 궁금하여/ 마음으로 가서 세상을 읽고 오는 것이었다// 한 덩이 파문을 던져보는 것이 소원인/ 나무는/ 인내심 많은 시인이었던 것이었다//

수석론(壽石論) / 나석중
돌 한 점 만남은 필연이다/ 여기까지 이끼 낄 새 없이 굴러온 돌이 빛난다/ 이 돌 한 점이 가슴 속에 깊이 박힌 돌 하나 파낸다/ 수석은 하나님이 퇴고를 마친 시(詩)이다/ 세상을 둘러보신 하나님이/ 깊은 슬픔에 빠지실 때 미처 퇴고를 끝내지 못하고/ 밀어놓은 석편(石篇) 한 권도 있겠지만/ 수석을 만지다 보면 질긴 목숨의 희열을 느끼나니/ 작은 돌 속에다 큰 자연을 묻어둔 뜻을 깨치나니/ 스승이 없는 이 시대에 돌 스승을 만나서/ 무량겁의 고독을 일깨우는 일, 그것 또한 창조의 기쁨/ 당신도 그 무량겁의 고요를 일으켜보심이 어떨는지,/ 그리하여 내가 세 번 허리 굽혀 돌 한 점 들어올리듯/ 당신도 세 번 찾아가 모신 돌 한 점이/ 당신이 퇴고를 마친 필생의 시(詩)임을 알 것이니//

건널목 / 나석중
굽어보는 강물이 세차다/ 수장을 당할지 모르지만/ 건너지 못하면 반드시 죽는다// 생이란 슬픈 짐승이 되어/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가거나/ 저쪽에서 이쪽으로 건너오는 것// 등에 배낭을 메고/ 가슴에 어린 것을 안고 어르는/ 젊은 어미가 그곳에 서 있다//

딸그락딸그락 / 나석중
붕ㅡ붕ㅡ/ 조금 전, 여객선 뱃고동 울리며 넘어간 수평선 끝자락에 아직도 몇 알의 알섬들 풍뎅이같이 가물가물하다./ 이도 저도 더 나아가거나 물러설 수 없는 데까지 흘러온 각진 제 몸과 마음이 있다/ 닦고/ 깎고/ 용맹정진하고 있는 몽돌밭이 있다/ 예까지 와서 그들은, 한세상 되는 대로 살고 싶은 생각도 불쑥, 불쑥 나기도 하겠지만, 그때마다 철썩, 철썩 서로 뺨을 때리며 기울어 가는 정신을 깨운다. 일으킨다/ 내 몸도 기꺼이 거기에 섞이고 싶다 섞이어 온몸 몽그라지고 둥글어지고 싶다// 딸그락 딸그락····//

성냥 / 나석중
우중충한 봄날// 언제 어느 개업집에서 가져온// 작은 성냥 곽 하나를 열어본다// 그간 소지(燒紙)에나 쓰고 남은/ 몇 알의 성냥개비들/ 참새주둥이 같이 짹짹거린다/ 꽃을 품고 얼마나 목이 탔으랴/ 저들을 활활 태워줌으로 다시 사는 것/ 서슴없이 한 개비 그어대는 순간/ "살았다!" 소리치며 환생하는 불꽃/ 지난 시절 고향 냄새 같은 유황 냄새/ 징 울음처럼 길게 이명(耳鳴) 하나 남기는데/ 정작 누가 다비(茶毘) 같은// 내 몸 깡마른 성냥개비를 그어라/ 우중충한 봄날//
* 2005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하반기 문예지 게재 우수시 선정.

 

더위가 한풀 꺾였다는 말 / 나석중
엊그제 모란시장에 가서 여기저기를 기웃거린 적 있다/ 사람과 상품과 시끄러운 소리가 요리조리 섞이는 걸 보는 재미로/ 어릴 적 어머니 꽁무니를 놓치고 지금 내가 무얼 구하러 왔나를 잠시 잊는/ 그렇게 복작대던 여름 끝에 와서, 더위가 한풀 꺾이었다는 말은/ 한철 잊힌 외로움이 다시 시작된다는 말// 홀로 산성을 오르는 길/ 떡갈나무 숲을 지나 산사의 풍경 소리를 내고 살갗에 와 닿는 이 서늘한 바람은/ 지금 어디서부터 오는 길인가?// 불현듯, 더위가 한풀 꺾이었다는 말 속에는/ 짐승이 살찌고 나무가 마르고 나무 같은 사람도 꾸둑꾸둑 여위어갈 것이니/ 하염없이/ 빽빽한 토란잎 그늘에서 기어나온 작은 풀벌레 같을 것이니//
* 모란시장: 성남에 있는 5일장

산수유나무 / 나석중
시월은 무른 생/ 젖 먹던 힘까지 보태어/ 붉게 여물게 하는 달이다// 요 나란한 열매들을 보면/ 토끼 눈 치켜뜨고// 감탄사 연발하던 사람 생각난다// 잎도 내지 않고/ 노란 꽃 우산살 펼치어/ 맨 먼저 봄 소식 전해주던 그,// 산수유나무,/ 산수유꽃,/ 산수유,// 이 나무에 얽힌/ 가상한 사연들 오래 듣다 보면/ 서서도 편히 잠이 오는 나무다//

자작나무 인생 / 나석중
흰 허물을 벗는 것은/ 전생이 뱀이었기 때문이다// 배때기로 흙을 기는 고통보다/ 붙박이로 서 있는 고통이 더 크리라// 눈은 있어도 보지 않는다/ 입은 있어도 말하지 않는다// 속죄를 해도 해도 죄는 남고/ 허물 벗는 참회의 일생을 누가 알리// 몸에 불 들어올 때나 비로소/ 자작자작 소리를 내는//

부부나무 / 나석중
아아 우라지겠네/ 나는 이토록 간절하고도 처절한/ 사랑을 처음 보겠네/ 우두둑/ 살갖터지고/ 뼈마디 풀어지고/ 환장 용쓰며 끙끙 애쓰고 있네/ 밑동하나에서 두 줄기 나왔으니/ 나는 이를 선남선녀라고 부르네/ 때마침 두 몸이 한몸 되었으니/ 나는 이를 부부 나무라고 부르네/ 한 그리움이 한 그리움으로 끌어잡고/ 몸 비틀며 더 큰 그리움으로 꽈리를 틀며/ 가는 이나무에서는/ 뜨거워진 기름 냄새나네//

마로니에 블루스 / 나석중
지나놓고 보면/ 사랑과 이념과 혁명도 불분명하다// 세상은 수상하지만 역시 대학로에는/ 사각사각 깨물어먹고 싶었던/ 실패한 청춘의 달고나가 있다// 토요일 마로니에공원 15시/ 은행나무는 가을의 늦은 퇴직서를 쓰지만/ 자연에 실직이란 이름 없다는 것쯤은 안다// 나는 솜사탕을 들고 싶고/ 공갈빵에도 한참 동안 시선을 빼앗기는 것은/ 잊은 추억을 다시 살고 싶은 걸까// 재잘거리며 걷는 연인들은 소양강 향어 같고/ 아이들이 공중을 걷어차는 태권도를 보면/ 내 휴경기에 들었던 가슴 밭은/ 파릇파릇 그 무엇으로 싹이 트나니// 당신의 다크서클은 당신의 깊은 기도/ 우리는 이미 사랑을 앓을 나이를 지났지만/ 개밥바라기 스러진 이른 저녁 비로소/ 맑은 밀월이다//

밤꽃 / 나석중
초면에 말 붙여오는/ 당당한 사랑은 들키고 싶은 속성이 있는 것인지// 겹겹으로 무장한 밤톨 같은 노인이 획 돌아보며/ 묻지도 않았는데 당신 나이 올해 96세라 하시네/ 나 당신 뒤를 걸어가다가 순간 황당했으나/ 이내 웃으며 어디 가시냐, 고 웃으며 물었더니/ 애인 만나러 간다며 밤꽃을 피웠네/ 애인은 연세가 얼마신지 또 물으니 90이라 하시며/ 왜 무슨 할 말이라도 있냐는 듯/ 눈 치켜뜨고 기세도 당당히 웃는 낯빛이 붉었네// 일찍 사랑을 포기한 사내는 사내도 아니라고 난/ 느슨 허리띠 졸라맸네//

호박꽃 / 나석중
이제야 호박꽃을 깨달았다// 한 마리 호박벌이 되어서/ 나 호박꽃하고만 살리라// 저 환한 속 깊은 곳으로/ 나 캄캄하게 실종되리라// 귀신도 모르는 무덤되리라//

노루귀* / 나석중
너무 아득한 산 속은 말고/ 너무 비탈진 장소도 말고// 실낱같이라도 물소리 넘어오는 곳/ 간간이 인기척도 들려오는 곳/ 메마른 설움도 푹 적시기 좋은 곳// 귀 하나는 저승에다 대고/ 귀 하나는 이승에다 대고//
* 미나리아재비과에 속하는 다년생초. 잎보다 꽃이 먼저 핀다.

달맞이꽃 / 나석중
늦은 달맞이꽃이 젖느냐/ 한밤중에 일어나 듣는 빗소리// 장마는 이제/ 누구 눈치를 보며 떼쓰듯이 온다// 아니 누구를 시방 붙잡고/ 토닥토닥 달래듯이 오는 비여// 이 밤에 진통제를 맞아도/ 소리 짓누르며 우는 이가 있느냐// 바마다 하염없는 빗소리에 묻혀/ 잠 못 드는 이가 있느냐//

상추 / 나석중
"혼자 살면서/ 이 많은 상추는 무슨····"/ 지나가는 실바람에 한 마디 보냈더니// "이렇게 찾아주면/ 고마워서 드리려고····"// 오늘은/ 고마워서 드리려고 한다는 이 한 말씀이 詩다// 시가 별거냐/ 이렇게 쉬운 말로 감동먹이는 참말이 시 아니더냐// 상추는 제 잎 아프게, 아프게 내놓지만/ 즐겁게, 즐겁게 따는 주인을 보고 참는다. 잘 참는다.// "사나흘 지나면/ 새 잎 돋아나는데/ 그때는 누가 또 오실 때까지는 손 안 대지요"/ 이 집주인이 또 한 연을 잇는다// 모두 시인들이지만/ 아직은 영혼의 배창자가 헛헛한 사람들/ 올망졸망 상추 봉지 받아들고/ 상추같이 부드러워진다. 상추쌈같이 배부르다//

가정(家庭) / 나석중
장독대를 보니 장독대가 그리워져// 언저리에는 별꽃부터 차례로 왔어/ 한낮에는 낮달이 장독대를 열어보고 갔지/ 암탉이 장독대 그늘에 알을 급히 낳고/ 맨드라미는 볏을 들고 괜히 붉어졌지/ 빈 장독은 밑바닥에 원을 눌러놓고/ 잔 실뿌리 같은 목숨과 지렁이를 다독였지/ 귀뚜라미가 제일 맑은 소리를 냈어/ 보릿고개 넘어온 겨울 아침의 고요/ 고봉밥을 퍼 올리던 장독대가 보고 싶어/ 저 혼자 늙어가는 냉장고는 서러워// 문득, 옹기종기 장독대가 그리워져//

입정(入定) / 나석중
쥐 오줌 얼룩진 방 천장을/ 파리 한 마리가 겨우 받치고 있다// 손을 놓으면/ 천장이 주저앉을 듯이 끙끙 떠받치고 있다// 더 자세히 올려다보니/ 빈 껍질만 그대로 말라 있다// 오히려 천장이 파리의 초라한 박제를/ 안간힘으로 끌어 잡고 있다//

사월 / 나석중
정신 차리라고 눈발도 내렸지만/ 순결의 표상으로 우러러보았던 목련의/ 낙화는 보지 말았어야 했다/ 불쑥 일어난 뱀밥이 붓을 꺼내/ 제비꽃에게 보랏빛 연서를 쓰는 동안/ 벚꽃은 시나브로 미완의 문장에/ 또박또박 마침표를 찍는지/ 내가 사랑하는 당신의 하루가/ 개화가 늦은 수선화만큼 밝고 환하기를/ 꽃다지만큼 고요하기를 바란다/ 냉이는 왜 늦게/ 상처를 받고서야 향기를 내는지/ 이제 내 오래된 사랑을 자백해야 하리/ 아직 멀고도 먼 당신은 듣는지/ 저만큼 산골에서 멧비둘기 운다//

천 년 / 나석중
천 년을 굴러온 돌이 있었다/ 천 년을 굴러왔으므로 잠이 깊었다/ 잠이 깊었으므로 꿈도 길었다/ 꿈속에서 조선의 한 사내를 보았으니/ 하얀 명주옷에 검은 의관을 쓴 선비였다/ 아이와 어른처럼 서로 웃으며 즐겼다/ 아, 그러나 어느 날 꿈 깨어보니/ 꿈 깨어보니 선비는 온 데 간 데 없고/ 시끄러운 세상에 돌 한 덩이만/ 덩그러니 남아서/ 또 천 년을 굴러가게 되었다//

바다 / 나석중
누가/ 짭짤한 슬픔같이/ 항구의 솟대처럼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펑 뚫린 가슴으로/ 뚝 부러진 날개로/ 무수히 뒤척이며 파닥거리고 있는 파도// 하늘 높이 구름군단에 속했던/ 무적의 천군만마의 병사들이/ 어느 날/ 하늘 그리움의 총을 맞고/ 후두 둑 떨어졌겠다, 새떼들// 환생의 햇빛을 받아/ 지금 반짝이며 물안개 몰려오고 있다/ 그 속으로, 나의 전생의/ 새 한 마리 날아들고 있다.//

수평선 / 나석중
홀리듯 사람이 멀리 온 까닭은/ 먼저 발자국을 찍고 바다 위를 걸어간 사람이 있기 때문// 둥근 북 위에 한 줄의 팽팽한 현을 한 번 힘껏 잡았다 놓는 것만으로도/ 그리움은 북을 찢고 바다를 쏟게 할 것이지만// 하늘 끝을 바라보던 저 사람이 마침내/ 뚜벅뚜벅 걸어서 홀로 건너가는 바다 너머 저쪽//

물의 혀 / 나석중
저 달덩이 같은 몽돌을 보면/ 물의 혀가 대단하다/ 물의 혀는 그 촉감 얼마나 보드라운지/ 돌은 돌끼리 부딪쳐 깨지고/ 솟아난 날카로운 모서리들을/ 통증조차 느낄 수 없도록/ 가만 가만 핥아 주었을 것이다/ 오히려 돌의 상처를 씻어내던 혀가/ 갈기갈기 해지고/ 닳고 닳았을 것이다. 아팠을 것이다/ 그러나 물의 혀는 참는 게 미덕/ 잘도 참아주었으므로 물의 혀/는 돌을 깎는 서생(鼠生)의 치열처럼 정연하고/ 닳으면서 또 길어났을 것이다/ 바닷가에 와서 나 하나의 몽돌로/ 누워 물의 혀를 받아들인다//

창 / 나석중
열어놓은 창을 통하여 // 옆집 갓난이 울음소리가 나팔꽃처럼 넘어온다/ 배가 고픈지 무서운 꿈을 꾸었는지/ 보채며 우는 아가 울음소리에도 애 엄마는 어디 갔는지/ 울음소리는 더더욱 가시에 찔린 듯 자지러진다/ 안타까움을 넘어 은근히 부아 끓어오르고 가슴 졸이고/ 지금 한밤중 남한산성 너머 잠 멀리 달아났어도 아가야/ 제발 소용없는 울음을 멈추어라. 아가야,/ 나는 아가를 마음으로 보듬고 간절히 다독여 준다/ 아가는 울면서도 창 넘어간 내 마음을 받았는지/ 금세 거짓말처럼 조용해진다. 적막해진다/ 옆집 아가는 신통하다. 나도 이제 마음의 창 열어놓고/ 집 나간 그를 맞아야겠다//

절정(絶頂) / 나석중
의무를 마친 것들은 아름답다/ 홀가분하다, 홀가분하다/ 두려움 없이 몸을 던지는/ 뭇시선을 사로잡는 단풍잎들//

문득 / 나석중
물방울 한 알/ 이마에 떨어졌네// 내가 산길을 무심코 내려오는/ 그 지점// 나무도 얼떨결에 손 뻗쳐/ 무거운 물방울 내려놓는/ 그 순간// 톡, 떨어져/ 앞이 환해졌네//

고요의 소리 / 나석중
외딴 숲 속 길/ 무심으로 혼자 걸어가면서/ 돌 위에 돌 올려놓고/ 고요 위에 침묵을 올려놓는다// 돌 위에 돌/ 고요 위에 침묵/ 이걸 적막강산이라 부르는가// 숨 한 번 크게 들이쉬고/ 가만가만 고요의 소리 재운다/ 고요의 소리와 함께 사라진다//

왜목에서* / 나석중
둥근 앞바다는 작은 수틀인 듯/ 올망졸망 선박들 졸고 있다/ 이글이글 배롱나무 불꽃 타오르고/ 엊그제 들어선 입추는 거짓말 같다/ 이 갯마을의 여유라는 게 평화라는 게/ 왜가리의 목만큼은 길다/ 어디서나 은밀한 모퉁이/ 미상불 뒤돌아간 거친 돌밭은 뜬구름/ 아쿠아슈즈를 신고 정독하는데 문득/ 내 누가 그리워서 여기에/ 돛단배처럼 흘러들었는지/ 하룻밤 정박해야 얼큰한 일출과 일몰의/ 대갈을들을 수 있다는데/ 곱씹은 생각을 맷돌로 갈아 봐도/ 한 달에 한 번씩 같이 밥 먹던 식구/ 돌연사한 오랜 친구의 부음이 맹랑하다/ 외로워 말자 망구쯤 되면/ 이제 혼자 걸어도 죽음과 동행하느니/ 왈칵 치솟는 슬픔 한 마리/ 날 퍼런 수평선에 목을 매단다//
* 충남 당진시 석문면 왜목길 26 왜목마을

우화(羽化) / 나석중
들꽃 찾아가는 한적한 길/ 숲 그늘에 빈 목관 하나 걸려있다/ 섬뜩했으나 그것은 빈 고치일 뿐/ 오랜 죽음에서 깨어나/ 새 날개를 얻어서 날아간 이는 누군지/ 이제는 내가 빈고치 안에 들어가 눕는다/ 바람이 뚜껑을 덮고 텅텅 못질을 한다/ 죽은 다음에야 죽음을 알겠지만/ 이대로 영원한 잠에 든다면 관 밖/ 기억을 사로잡는 세상의 그립고 낯익은 것들/ 과연 망각의 두려움을 잊을 수 있을까/ 웅크리고 파들던 유년의 아랫목 같아/ 사람의 끝이 무섭지는 않다//

재회 / 나석중
울 때 더 아름다운 얼굴이 있다/ 서서 소리 없이 울 때/ 볼을 타고 내리는 눈물을/ 버들 같은 머리가 가려줄 때/ 힐끗힐끗/ 이별일까/ 부질없는 상상을 했었다/ 공중 속에 오직 혼자이던/ 불과/ 사흘 전에 본 이름 모를 꽃/ 조금 전/ 야탑역에서 타고/ 정자역에서 내리고/ 전차는 아무것도 모르고/ 달린다//

저녁이 슬그머니 / 나석중
어스름을 입은 저녁이 슬그머니 이녁으로 오고/ 푸르른 봄날 뜬구름에 실려 간 황금수틀은 아름다웠네// 노란색 일색으로 황사에 흐려지는 눈총을 외면할 수밖에 없는/ 꽃다지며 산수유며 수선화 물릴 수 없는 봄은 누구의 봄입니까// 지난해 바싹 마른 낙엽 한 장이 빈 소리를 굴리는 저녁이 오니/ 서쪽 하늘을 바라보는 얼굴이 살굿빛으로 물들어도 좋겠습니까// 이제 오늘을 다독이며 안아줄 수 있는 내일은 없으니/ 저녁이 슬그머니 와도 후회할 저녁이 아니오니//

컷 / 나석중
여자가 긴 머리를 자를 때/ 가위를 들고 눌린 가위를 잘라요// 싹둑싹둑/ 싹둑싹둑// 제 남자를 자르는 소리 단호해요/ 여자의 눈썹이 젖어있어요// 여자가 머리를 자를 때/ 한 번 죽고 한 번 사는가요// 여자가 머리를 자르는 일은/ 세상에 그 누구도 말릴 수 없어요//

​묵은 사과 / 나석중
주춤거리던 사과/ 살짝 칼등으로 사과를 노크한다/ 단박에 사과 칼날 들이밀면 놀라서/ 아픈 사과가 되겠지/ 근육주사를 놓듯 기억을 환기하는 게 좋겠지/ 묵은 사과가 육향이 짙은 것은/ 수치와 민망과 미안과 무안이 섞여/ 한몸으로 푹, 숙성된 때문일까/ 사과는 좀 더듬더듬 서툴다/ 사과는 시야가 뚫린 고속도로처럼 탄탄대로로/ 사과를 받아주지 않겠다는 듯/ 사과껍질이 과속방지턱을 넘으며/ 툭 끊기곤 한다//

​그럭저럭 / 나석중
명절 잘 쇠셨느냐는 인사말에/ 그럭저럭 지냈다는 대답이시다, 그럭저럭/ 이 어쩡쩡한 말은 쌍봉낙타의 구릉 같은 말/ 잘 지내지도 않고 못 지낸 것도 아니란 말씀이지만/ 어쩐지 조금은 쓸쓸한 쪽으로 살짝 기우는/ 무릎 아픈 할머니가 엉거주춤 일어서는 걸 지금/ 보는 것 같다/ 골목길을 왔다갔다 주름잡는 저 노인의 뒷짐에는/ 무슨 여유와 사색이라도 깊어져 가시는지 약간의/ 웃음과 약간의 서글픔과 약간의 문안과 소란으로/ 버무려진 설날 하루해가 두루뭉술/ 서산으로 슬쩍 넘어가신다//

연애하고 싶다 / 나석중
우거진 숲속에서/ 검은등뻐꾸기 소리를/ 벙어리뻐꾸기 소리가 덮어쓴다// 조물주가 하나 실수한 것은/ 늙어 단풍 든 몸에 마음은 초록이라는 것// 푸르른 날의 성급한 연애보다도/ 인제는 늦은 만큼 철든 연애할 수 있다// 인두를 품은 화로 같은 연애를/ 불쑥 시린 손 내밀어/ 쬐고 싶은 내 당신//

저녁 / 나석중
문밖 모퉁이 길에/ 터벅터벅 걸어오는 발걸음 소리/ 시장기 속으로 저녁이 돌아온다/ 매서 털어내도 가난은 남아/ 고개 숙인 초췌한 몸들/ 풀 죽어 집에 돌아오면/ 하나하나 씻겨주고 싶은 발/ 무엇을 밟고 왔느냐 묻지 않는다/ 오늘도 무사히 돌아왔으니/ 이제 밥상을 차리자//

사랑과 분노 / 나석중
당신은 먼저 사랑을 맹세한 사람/ 당신은 이별도 먼저 선언한 사람// 그런데 당신은 장마철 낙숫물처럼 울다가도/ 폐가의 불 안 땐 굴뚝처럼 조용하고// 뜻밖에 피어오르던 사랑과 분노는/ 피나물꽃과 매미꽃만큼 구별이 어려운가// 그건 한몸의 가슴과 등처럼 가까우면서도/ 서로 뒤돌아볼 수 없는 안면을 가지고// 한때 나로서도 울음이 많은 사람/ 꾹 울음을 감추려다 들켜본 사람//

바람의 기원 / 나석중
바람은 어디서 오는지/ 보이지 않아도 실체를 확신케 하는 바람은// 바닷가 몽돌을 보면/ 점차 내 가슴도 파도를 친다/ 마침내 나 하나의 단단한 돌이 되어/ 달그락달그락/ 그지없는 파도의 노래가 된다// 그 누가/ 한 그릇의 바다를 기우뚱 들고 있어서/ 파도의 손바닥을 펼치고/ 바람을 일게 하는지// 바람은 보이지 않으면서도 정녕 믿고 싶은/ 신의 숨결이 분명하다//

경이로운 독거 / 나석중
충북 음성군 생극면 임곡리 품실마을 어르신/ 잎도 꽃도 열매도 뽕나무와 닮은 구석이 없는데도/ 구지, 뽕나무라 불러 주길 바랐는지/ 구지뽕이 꾸지뽕으로 불리게 되었다는데/ 결코 요즈음 풋것들에게 핀잔 받을 곤대가 아니시다/ 옆구리가 터져 내장이 보여도/ 받은 목숨 함부로 버리지 않고 사는 게 부욕 때문일까/ 가족도 없고/ 이웃도 없고/ 전설도 없고/ 내력을 물어볼 마을에 세수 400년 되신 분은 없었기에/ 당신이 남쪽 고향에서 천 리를 떠나왔을 때는/ 결코 혼자서만 걸어온 건 아니라는 것을 추측할 뿐/ 오직 놀란 노인이 고개 숙여 깊숙이 절을 한다//

목마른 돌 / 나석중
바짝 말라서 희미하다/ 물세례 몇 번에 부르르 더는 돌/ 이내 본색을 회복한다/ 주름이 젖고 요철(凹凸)의 굴곡마다/ 물 밭는 소리는 꿈인 듯/ 아니 유년의 검은 노트에 몽당연필/ 침 묻혀 꾹꾹 눌러쓰던 아니/ 오래된 고요가 허물을 벗는/ 석잠 째 자고 있는 누에의 숨소리/ 아니 극지에 피어오르던 오르라의/ 머나먼/ 색감, 정감,// 새까맣게 탄 돌의 입술//

동편(冬篇) / 나석중
저것을 시간의 박제라고 읽는다/ 흘러가던 흰 물의 손발이 검은 바위의 목덜미를 붙잡고 깡깡 멈췄다// 솔밭에 기어는 바람이 마구 보를 터뜨려 팔십 년 묵은 난청이 뻥 뚫린다/ 이걸 소리의 부활이라고 듣는다// 건너편 공동묘지의 누런 양지머리에는 둥근 봉분들이 나와서 졸고 있다/ 저것을 주검이 꿈꾼다고 믿는다//

비루한 식욕 / 나석중
식욕 앞에서는 외로움과 슬픔에게 미안하다// 외롭지 않기 위하여 밥을 많이 먹지 않고/ 괴롭지 않기 위하여 술을 좀 마시지 않는다*// 허청허청 공복은 푹푹 꺼지는 검은 싱크홀/ 발동한 식욕 앞에 외로움이나 슬픔이란 것들/ 식후경으로 잠시 들이미는 낯익은 얼굴일 뿐// 하늘에 염치없고 땅에 비루한 하루 세 끼니/ 때맞춰 엄습하는 식욕이 지겨울 때도 있지만/ 독거의 숟가락 곡기를 아주 끊고도 싶지만// 내 오늘은 말 못할 서러움조차 꼭꼭 씹는다//
* 최슬자 시인의 「외롭지 않기 위하여」 중에서

어떤 새 / 나석중
초면인 그는 일찍 산에서 내려오고 나는 늦게 산을 오르고 있었다/ 새 닮은 나무토막을 그냥 들고 가도 될 것을 날아갈까 봐 줄을 묶었다 했다/ 40년 나를 쪼아 먹던 나의 새가 내 빈껍데기만 남기고 멀리 날아간 날이었다//

'시詩 느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봉교 시인  (0) 2022.05.12
정선우 시인  (0) 2022.05.11
박은형 시인  (0) 2022.05.09
윤진화 시인  (0) 2022.05.08
오성인 시인  (0) 2022.05.06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