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시詩 느낌

윤진화 시인

부흐고비 2022. 5. 8. 10:00

윤진화 시인
1974년 전라남도 나주시 명하쪽빛마을에서 태어나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명지대학교 일반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 수료했다. 2005년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우리의 야생소녀』, 『모두의 산책』이 있다. 詩川 동인.

 



손금을 풀다 / 윤진화
당신이 이생에서 지금껏 연주한 가락이 들리거든요/ 손금도 악기 같아서/ 대금, 중금, 소금처럼 가로 불지요/ 당신의 비가(悲歌)는 끝이 없군요/ 휘몰아치는 장단이 꽤 오래됐어요/ 협곡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쉴 곳이 없어요/ 바람이 쉴 곳이 없으니 푸른 나뭇잎이 흔들리지 않아요/ 나뭇잎이 신명에 겨워야 휘파람새가 몰려오고, 사람이 와요/ 당신에게선 사람이 보이지 않아요, 죄다 죽은 영(靈)이에요/ 당신은 영가를 불러야 할 사람이에요/ 희로애락생로병사길흉화복흥망성쇠,/ 모두 단조로 흘러요/ 당신을 위해서 당신이 야단법석이어야 해요/ 당신이 웃으면 삼라만상이 웃고/ 당신이 울면 천지가 울어요/ 당신이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려요/ 당신이 당신의 손금에/ 흐르는 음악의 꼬리를 풀어놓고 도망친다면/ 당신은 사랑을 잃을 거예요// ;손금쟁이가 내 손에서 흐르는 곡조를 짚다가/ 다시 곱게 접어 내게 주었어요/ 난 받아 든 가락이 흩어지지 않도록 주먹을 쥐었어요/ 백팔 번 맞춰 내 가슴을 때렸어요, 굵게 생긴 손금 사이로/ 눈물이 스며들어요, 주먹을 풀었어요. 허공으로 풀어진 길/ 손안에 숨어 있는 이 길을 따라가면 거기/ 사랑이 있다고 내 손을 맞잡고 연주해 주세요/ 당신의 손금을 내게 들려주세요/ 두 손을 악보처럼 펼치고,//


안단테 에스프레시보 / 윤진화
지구라는 둥근 빵에서// 아이스커피 들고/ 지구를 산책하고 있어요/ - 감정을 갖고 천천히/ 안단테 에스프레시보// 어제 없던 풀이 돋아나고/ 그제 없던 이가 내일 온대요/ 모레 꽃이 피고/ 다음 날 잊히는 것// 지금 마시는 커피가 사라지고/ 작은 행성이 부서지려고 지구로 온대요/ - 감정을 갖고 천천히/ 안단테 에스프레시보// 죽은 친구가 보낸 편지를 읽고/ 태어날 아이를 떠올리는 것처럼/ 팔다리를 흔들어 보다/ 눈을 떴다 천천히 감는 것// - 수많은 어제 울어요/ 하나뿐인 오늘은 울지 않으려고//

소주 / 윤진화
누군가의 말처럼 실패한 혁명의 맛에 동의한다./ 타오르는 청춘의 맛도 꺼다오./ 우리의 체온을 넘을 때까지/ 우리는 혁명을 혁명으로 첨잔하며/ 동트는 골목길을 후비며/ 절망과 청춘을 토해내지 않았던가./ 거세된 욕망을 찾던 저, 개봐라./ 우리는 욕망에 욕망을 나누며/ 뜨거운 입김으로 서로를 핥지 않았던가./ 삶이 이리 비틀, 저리 비틀거리더라도/ 집으로 가는 길을 명징하게 찾을 수 있다./ 혁명과 소주는/ 고통스러운 희열을 주는,/ 잔인하게 천진한 동화와 같다./ 기억하고 싶지 않을 오욕(汚辱)/ 죄 없는 망명자처럼 물고 떠돈다./ 누군가의 말처럼 다시는 도전하지 말 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소주의 불문율이란/ 투명하고 서사적인 체험기이므로/ 뒤란으로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첫, 사랑처럼.//

히말라야시다 구함 / 윤진화
봉제공장 박 사장이 팔십만 원 떼먹고 도망을 안 가부런냐, 축 늘어진 나무맹키로 가로수 지나다 이걸 안 봔냐, 히말라야믄 외국이닝께 돈도 솔차니 더 줄 거시다. 안 그냐 여그 봐라 아야 여그 봐야, 시방 가로수 잎사구에 히말라야 시다 구함이라고 써 인냐, 니는 여즉도 흐느적거리는 시 나부랭이나 긁적이고 인냐, 그라지 말고 양희은의 여성시대에 글 보내봐야, 그라믄 대하꾜 사 년 대학원 이 년 글 쓴다고 독허게 징했으니께 곧장 뽑힐 거시다, 거그는 김치냉장고도 준다니께, 그나저나 아야 여그 전화 좀 걸어봐야, 누가 시다 자리 구했음 어찌냐. 히말라야도 조응께 돈만 많이 주믄 갈란다, 아따 가시내 전화 좀 해봐야, 포돗이 구해온 거시랑께, 여그여 여그, 볼펜 놔두고, 그려//

안부 / 윤진화
잘 지냈나요?/ 나는 아직도 봄이면서 무럭무럭 늙고 있습니다./ 그래요, 근래 ‘잘 늙는다’는 것에 대해 고민합니다./ 달이 ‘지는’ 것, 꽃이 ‘지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합니다./ 왜 아름다운 것들은 이기는 편이 아니라 지는 편일까요./ 잘 늙는다는 것은 잘 지는 것이겠지요./ …/ 부끄럽지 않게 봄을 보낼 겁니다./ 그리고 행복하게 다음 계절을 기다리겠습니다.//

초경(初經) / 윤진화
검은 숲에서 북소리 들려온다 짐승의 정강이뼈를 들고 북치는 봉두난발 소녀가 나온다 벗겨 말린 털로 버찌 같은 젖꼭지 가리고 솜털 솟은 아랫도리 숨겼다 소녀의 목에는 송곳니로 엮은 목걸이 걸려 있다 머리 위로 초생달이 떠 있다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매 한 마리, 설화 가득 핀 나뭇가지의 잔설(殘雪) 떨구며 날아오른다 멀리 별똥별이 밤공기를 세차게 가른다 소녀가 달을 꺾어 손에 쥔다 둥 두둥 붉은 달이 떠오른다 유년의 숲속에선 사라진 달을 찾는 장작불이 타오른다 밤하늘을 숨죽이며 날고 있는 매가 머리 위에서 춤춘다 허공에서 휘이익, 한 바퀴 돌던 달이 날개를 펼친 매 대가리에 꽂힌다 깃털이 소녀의 머리 위로 내려앉는다 숲속 마을까지 비릿한 사냥꾼의 냄새가 술렁인다 허리춤에 사냥한 매를 단단히 꿰는 소녀, 매의 피가 소녀의 가랑이를 타고 흐른다//

초야(初夜) ㅡ전갈 / 윤진화
나는 굴곡진 갈고리를 달고, 활처럼 휘어진 낚시 바늘을 달고. 바람을 낚는 조사(釣師)의 손끝에서 깊은 땅에 던져진 -거칠 것 없는 성격, 활동적이고 야생적인 아시안 자이언트 블루 전갈이다. 당신이 한가로이 숨을 쉬거나 벤치에 앉아 담배연기를 내뱉을 때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조용히 낚시줄 드리우듯 꼬리를 내리며 당신에게 다가가도 놀라지 마라. 나는 그저 관계 맺고 싶을 뿐이다. 내가 술자리나 예기치 못한 곳에서 당신을 향해 독을 쏘아댈 때 당신은 나를 밟거나 가래침을 뱉으며 지나치지 마라. 당신의 몸에 내 꼬리를 잠시 박아 두고 싶을 뿐이다. 오랫동안 정착하지 못할 빛이 어둠을 갉아먹는 방에서, 시시각각 당신의 눈빛에 의해 변하는 내 몸. 내 푸른 몸. 내 짙은 몸. 깊이를 알 수 없는 내 검은 몸. 그 몸을 끌고 서서히 문지방을 넘어 고개 돌려 당신을 떠나더라도 붙잡지 마라. 굽은 갈고리에 당신의 목을 꿰어 살고 싶지만 내 스스로 당신을 죽이지 못할 것 알기에 간다. 나는, 내 독은, 내 사랑은 당신을 죽일 만큼 강하지 못하다. 당신이 뒤척이는 것을 멈춘 한참 후에야 나는 비로소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린다. 아무렇지도 않게 모래알 같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틈을 기어간다. 당신의 살점이 붙은 꼬리가 천형(天刑)처럼 내 머리를 향해 점점 굽는다.//

초야(初夜) ㅡ호랑이 / 윤진화
나는 호랑이다. 아가리를 벌리면 백두산 호랑이냄새— 아버지의 냄새가 난다. 두근대는 설산의 심장에서 아버지가 부르는 서푼짜리 타향살이가 흘러내린다. 뼈와 근육의 매듭 단단한 사냥꾼이 축축한 혀로, 떠도는 네 박자 음표를 핥는다. 벌어진 내 몸에서 아버지가 꼬리를 흔들며 어슬렁 나간다. 나이 든 아버지의 근육이 산등성이를 맴도는 운무처럼 뒤척인다. 질긴 바람이 인다. 사냥꾼의 총구가 아버지를 겨냥한다. 힘이 빠진 아버지는 뒷걸음친다. 예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러하듯 세찬 계곡을 따라 아버지가 사라진다. 숨겨둔 샘터에 고개를 박고 목을 축이는 사냥꾼. 나무 뒤에서 송곳니를 날카롭게 세우는 나, 사냥꾼의 등을 올라탄다. 그의 등뼈를 훑어오르다 아가리를 벌리고 이빨을 쑤셔박는다. 성난 내 머리를 붙잡고 바위를 향해 무두질을 하듯 추켜올렸다 내리치는 사냥꾼. 한번 물면 놓지 않는다. 내 아버지는 호랑이다. —사냥꾼의 너덜해진 살점에서 붉은 피가 솟아난다. 피를 할짝할짝 핥으며 살점을 씹는다. 몸 속 가득히 들어온다. 오지의 산맥을 뛰어다니던 젊은 사내가 들어온다.//

검객 / 윤진화
당신을 기다리다/ 투명 유리에 비친 여자를/ 보았다, 벌써 수 시간/ 그 자리다// 여자와 눈이 마주친 나는/ 냉큼 눈길을 피하다/ 다시 본다// 나다,/ 검붉은 꽃 한 송이를/ 대검처럼 들고 선//

아줌마를 위하여 / 윤진화
배추를 사서 김치를 담그자. 칼을 긋고 벌린다. 은밀한 속살에서 원시림의 향기가 살아서 살아서 다른 몸으로 전이된다. 이 참을 수 없는 원죄를 꼭 붙들라, 누군가 성호를 긋고 있다. 배추를 벌리고 소금을 넣으며 떠올리는 야릇한 경계, 신을 모방하는 손길. 대개 배추는 속부터 간이 들어야 제 맛이다. 신은 내 머리를 벌리고 밀어 넣는다. 채 썬 무, 엇비슷한 키를 가진 갓을 섞어 밀어 넣는다. 대개 본연의 형태를 저버린 것들이지만 그것들이 속을 더 꽉 채운다. 그렇다. 그렇다 치자. 사내인 당신이 나를 가르고 내 속을 채우던 날을 기억하자. 그 속에 매운 고추, 파, 다진 마늘을 넣는 것은 기본이다. 그것은 신도 알고 나도 안다. 가끔은 달콤한 과일을 넣는다. 혀를 속인다. 몸을 속인다. 익어가는 모든 것들은 맛있다. 알맞게 간이 밴 내 몸과 또 다른 배추를 찾으러 시장을 기웃거리는 신처럼, 우린 맛있게 익을 권리와 의무가 있는 김치를 담근다.//

동백꽃 / 윤진화
오필리어가 간다 육자배기 가락 시끄러운 막걸리 집에서 젊은 시인과 잔 치던 목 쉰 년이 간다 칼춤 추던 사내에게 두들겨 맞은 뺨 벌그레하던 년이 간다 멍든 젖가슴 부끄러운지 모르고 자꾸 열어 보여주던 그 년이 간다 칼등에 날세워 자른 듯 제 목숨 달린 모가지 툭. 깨끗이 저버린 독한 년, 땅에 고꾸라져서야 툭. 외마디 뱉어내던 질긴 년, 冬 - 冬 발 구르며 붙잡는 생을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꽃잎 벌려 웃으며 간다 노란 중심 발기한 몹쓸 년이 저기, 저어기,// …… 시끄러워라, 동백,//

모란 / 윤진화
1.// 보인다, 책을 펼친 사람에게서 향기가 들린다/ 안타까워하지 않고 눈 밝혀 바라본다/ 읽고 또 읽는다// 꽃이 질 때까지,//
2.// 어떤 꽃은 향기가 없어요/ 그 말은 거짓말이죠/ 아니요, 일부러 향기를 내지 않아요/ 아니요, 향기가 없는 책은 없습니다/ 향기가 없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말은 거짓말이죠/ 그래요, 함부로 손을 내밀고 싶지 않아요/ 그래요, 닮은 상처를 보여주기 싫을 겁니다// ― 가끔 문장에서 그 꽃, 향기가 나요/ 그 말은 거짓말이죠/ 아니요, 그 향기를 듣는 사람이 있어요/ 그래요, 그 향기가 소리로만 들리나요/ 향기를 글로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 말은 참말이죠/ 그래요, 그 사람이 내내 잊히지 않아요/ 그래요, 당신의 상처가 그 꽃,/ 향기로 피는 겁니다// 그때 왜 활짝 핀 상처를 들켰을까//
3.// 그 책을 펼치면 질 때까지,/ 하루가 일 년 같다/ 향기 없지 않은데/ 향기 없는 것으로 오해를 보내고/ 찾아오는 사랑 없지 않은데/ 사랑 없는 것으로 오해를 얹는다/ 냄새와 향기를 구분하는 사람과/ 다시 오해를 보내고/ 중심 가운데 비켜선 채로 활짝 피어/ 또다시 오해를 더 했다//

21세기 마녀 되는 법 / 윤진화
옆집 사내가 쓰레기봉투 버리듯 계집을 던진다. 복도에선 옆집 가계(家系) ㅡ계집의 머리채를 잡는 나이 많아 보이는 여자, 맷돌 같은 시멘트 바닥에서 계집을 돌린다. 짓이겨지는 계집, 조금 젊어 보이는 여자가 빗자루로 계집을 후려친다. 우리 집안으로 스며들어 숨을 곳을 찾는 계집의 피 섞인 소리 ㅡ잘못했어요, 어머니, 잘못했어요, 애기씨, 자진모리가 구성지다. 계집의 잘못이란 사내의 숨겨둔 여자를 만나 헤어져달라, 하소연한 일이란 것을 아는 나, 감시창 달린 현관문을 연다. 나와 눈이 마주친 계집, 살풋 벌어진 옷섶을 가린다. ㅡ13층 아파트 난간에서 튕겨나간 계집, 두둥실 검은 하늘을 난다. 노란 보름달에 걸린 계집, 보습학원에서 돌아온 옆집 꼬마가 112에 전화를 한다. 우리 아파트에 마녀가 살아요. 우리 엄마가 마녀였어요. 그 찰나! 잘못했어요. 라는 주문이 틀렸는지 이내 땅으로 곤두박질하는 마녀와 빗자루.//

나의 가장 처음 지닌 것 / 윤진화
횃불을 들고 처음처럼 기다린다, 스스로 벗긴 내 처음을 말아 들고 불 피우고 당신을 기다린다// 잘도 탄다, 양날 작두 타는 만신처럼 잘도 탄다, 털이 타고 팔다리가 타고 입이 바싹 타고나면 나는, 불을 품은 숯처럼, 당신을// 함부로 버린 처음을 돌려주기 위해 기다린다, 후회를 생각하고 또 후회하며 당신을 기다린다// 칼날 솟은 혀에 스쳤을 뿐인데, 창자를 베고 심장을 베고 삼킨 눈물 베고 나면 나는, 신원을 알 수 없는 부둣가의 시신처럼, 당신을// 그러나 나는 안다/ 당신은 앞이 캄캄해서야 온다, 물비린내 가득 품고서야 온다, 지금의 나처럼//

천수관음(千手觀音) / 윤진화
1.// 시장 좌판에서 배 보이며 누운 암게들을 본다/ 배딱지가 황금 알로 누렇다/ 황금색 옷을 입은 천수관음 무희들처럼/ 팔을 벌리고 세로로 촘촘히 진열돼 있다//
2.// 눈먼 여자가 그물을 손질할 때, 아얏!/ 똑바로 하라고 손끝을 물던 집게 달린 손/ 내 정신줄에 엉켜 이마에 숨겨둔/ 빛나는 눈을 꺼낸다//
3.// 술을 마시고야 고작/ 눈을 부릅떴던 분노의 새벽길/ 나를 보고 달려오던 어머니의/ 벌린 팔이 삼십육 개였다가/ 구십구 개였다가, 백팔 개였다가,/ 이윽고 천수(千手)가 되어 부둥켜안았다/ 희디흰 눈알이 눈밭이 되어 부딪쳤다//
4.// 어머니의 어머니,/ 그 어머니의 어머니,/ 또 그 어머니의 어머니의 까마득한 그 어머니가,/ 일제히 팔 벌리고 나를 붙들었다/ 경계 없고 한갓지다//

일식 / 윤진화
중대부속 용산병원 길 건너/ 24시간 편의점이 있어요/ 나는, 깡통으로 포장된/ 백도白道, 황도黃道를 보며/ 달이 지금 어디쯤 가고 있나를 생각하고/ 그 속에 들어가 진줏빛 코로나를 마시지요/ 카운터의 소형 텔레비전에서는/ 흑백영화가 한창이에요/ 영화 속 십자가를 짊어진 사내는/ 가파른 언덕을 오르고 있어요/ 통유리 너머 보이는 공사장, 일일 잡역부도/ 월계관 수건을 머리에 두른 채/ 아슬한 구조물을 타고 있어요/ 그 위에는 태양이/ 위태롭게 매달려 있어요 태양이/ 두 사내의 팔뚝에 솟아오른 전선을 따라/ 그들을 붉게, 붉게 물들여요/ 편의점 문짝이 바람에 꺼덕이는 동안/ 아버지의 위급을 알리는/ 남동생의 목소리도 전선을 타고 물들어가요/ 24시간 편의점 불빛을 보며/ 맥주가 피식, 피식, 김빠진 웃음을 지어요/ 깡통 속에서 부풀어오르는 달을 봐요/ 유통기한을 훨씬 넘겨버린 차가운 달/ 가야 할 길을 읽어버린 저 달을 들어/ 고열에 시달리는 태양을 조심히 가려봐요//

신이 다니는 길 /윤진화
남영동 민주인권기념관 앞에서 파란불을 건너/ 가다 보면 갈월동 시민의원이 나올 거야// 영(靈)들이 드나들던 곳이야/ 피를 뽑힌 후, 흰 국화 같은 얼굴로/ 이곳을 오가던 귀신들// 시민의원이라 걸린 목판에서/ 투명한 얼굴들이 보여/ 그들을 따라/ 둥근 무덤을 얹은 서울역으로 걸어// 소주 한 병/ 북어 한 마리 놓고/ 절하고 또 절하고 또 절하고/ 제 무덤 앞에서 쓰러지지// 흰 꽃들은 무덤을 향해 두는 거야// 사람의 길과 신의 길/ 한 뼘 차이인데/ 피를 주고/ 누구는 귀신이 되고/ 피를 마시고/ 누구는 겁에 질려서 굴러다니지//

독수리 사냥 십계명 / 윤진화
1 구름 위에 걸터앉지 말라./ 조울증이 쉽게 전염된다.//
2 해와 달 가까이 날아가지 말라./ 외로운 것들을 건들면 더 외로워진다.//
3 바람에게 안부를 묻지 말라./ 정착하지 못할수록 그것에 간절하다.//
4 비와 눈을 조심하라./ 어느 때, 갑자기 돌변해서 뒤통수를 적실지 모른다.//
5 특히 시인과 아이들을 조심하라./ 순수할수록 망설이는 시간 내내 고통스럽다.//
6 가급적 무리 지어 다니지 말라./ 당을 지으면 비린 소문과 먹이 때문에 다투게 된다.//
7 가난하고 높게*지내는 것을 부끄러워 말라./ 시간과 공간이 나를 위해 열린다.//
8 나무에 기대어 배워라./ 한자리에서 꼼짝 않고 있는데도, 먹이를 찾는다.//
9 사냥감의 목을 단번에 물어뜯어라./ 냉정은 서로의 과거를 묻지 않는다.//
10 사냥한 곳을 다시 기웃거리지 말라./ 후회가 기다렸다는 듯 웃는다. 그러면 죽는 수가 있다.//
*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에서

그렇다고 우리를 데려가실 건 아니잖아요 / 윤진화
초원의 코끼리는/ 똥 무더기에 긴 코를 박고선/ 쩍쩍 갈라진 발바닥의 가뭄을/ 아파하고 있지요// 썩어가는 상아 노려보며/ 장총을 든 사냥꾼이/ 연발사격 준비를 끝냈는데도/ 우두커니 서 있지요// 사바나에서 태어난 코끼리 가네샤/ 신의 영험이 지전(紙錢)을 들고 파르르/ 이승을 지켜보고 있지요// 고개를 주억이면서도 부르짖는 닭,/ 하얗고 긴 꼬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지켜보지요// 코끼리 발목에선 가시덤불이 자라고/ 버드나무 아래에선/ 빈 탄환이 굴러다니고// 늙은 신을 향한 총성이 들리고요/ 떠나온 고향을 생각하는 코끼리와/ 피 칠갑 날개 퍼덕이는 닭이/ 서로 부둥켜안고 쓰러지고요// 코끼리 발바닥처럼/ 신과 인간의 주술관계/ 쩍쩍 갈라져 굳어가고요/ 썩은 이빨도 눈길에 쓰러지고요//

분노 / 윤진화
육중한 무게의 분노가 헐떡인다/ 조그만 더 가면 저 분노를 낚아챌 수 있다/ 분노가 운동화 끈을 더 단단히 동여맨다/ 출발선에서 나와 함께 출발했던 분노,/ 언제부터인가 나보다 먼저/ 앞서간다/ 유유자적 신문을 꺼내 읽는다/ -재개발지역 철거민 참사, 연쇄살인범 강호순,/ 주한미군 만취상태 방화, 장애인 쇠사슬 감금/ ……/ 또박또박 큰소리다/ 나이보다 커져가는 붙잡고 싶은 저 분노,/ 뒤돌아서 웃는 야멸친 분노/ 비워둔 수신함에 쌓이는 스팸 메일 만큼이나/ 지워버리고 싶은 분노가/ 다시 뛴다/ 속도를 낸다/ 분노가 내 손에 잡힐 듯 말 듯,/ 가까이 다가가 놈의 목을 감싸 넘어뜨린다/ 허방에서 뒹굴다 진흙이 묻은 분노,/ 고개를 서서히 꺾는다/ 분노가 입가의 피를 쓰윽 훔치더니/ 내 목을 짓누른다, 속삭인다/ -이제 그만 쉬고 싶다,/ 나도 저 뒤에서 남들처럼 살고 싶다./ 분노의 눈물이 내 몸을 적신다//

잃어버린 여자에게 / 윤진화
널 생각하면 버려진 항구/ 쓸쓸하게 회 뜨는 젊은 여자의 손/ 반쯤 감긴 눈, 잘려나간 지느러미/ 살점 없는 여자는 맛없어,/ 널 버린 사내의 저주받은 입맛/ 저기 바다 아니, 여기서는 숨쉬기 편한 곳/ 아기주머니 같은 태양이 바다 속으로 떨어진 그 끝/ 안으로 밀려드는 파도에/ 수신자 없는 편지를 띄우던 너/ 미안하다, 미안하다 조문(弔問) 가듯 찾아간 바다/ 태양 하나를 떨어뜨린 널 생각하면/ 새끼 밴 검은 개,/ 모래사장으로 밀려오는 파도를 핥은 그 날/ 네 얼굴을 비추던 기차 창문, 순식간에 늙은 여자/ 사형장의 올가미 같은 둥근 손잡이,/ 어떻게든 견뎌보려고 꽉 붙들고 있는 사형수처럼/ 감형되지 못 할 죄, 버려진 배의 선주/ 네 빈 배를 쓰다듬지 못한,/ 잘라버렸어야 할 내 더러운 손//

두 개의 꿈 / 윤진화
참외// 어머니의 꿈속에서 나는 참외다 동그랗게 부풀어 터질 것 같은 참외다 인적 없는 산 속, 집 잃은 청년에게 목덜미 잡힌 참외다 그를 따라 기다란 날개 숨기고 길 찾아 헤매다 혼자 사는 여인의 집에 여장 푼 참외다 야심한 밤 그녀의 발칙한 입술 위를 구르다 부푼 젖무덤 위로 날개 펼친 참외다 한 입 베어 물면 아삭, 울음 내는 참외다 나는 사십구일 동안 구천 떠돌며 우는, 소리 잃은 노란 새다.//
어머니// 그녀는 날 갖고 시인을 꿈꾸기도 하였다는데, 착한 사람을 꿈꾸기도 하였다는데… 그녀의 뱃속 떠나서 나는 참외도 착한 사람도 아무것도 아니다. 태몽을 펼치고 다시 들어오라 손 흔드는 어머니. 외로운 것은 죽기보다 싫어요, 나는 뒤돌아서 도망쳤다. 어느 잠 못 드는 시인이 내 목덜미를 잡아 그녀의 꿈속으로 구겨 넣었다. 다시 외롭고… 배고프다.//

모녀(母女)의 저녁식사 / 윤진화
배추김치.... 파김치.... 상추겉절이.... 오이소박이.... 어머니...../ ... 어머니.... 우리 집 식탁에는 온통 풀뿐이네요/ 우리의 저녁 식사는 말들이 좋아하겠어요/ 보세요? 하얀 접시 위에 그려진 말이 우리보다 먼저/ 우리의 저녁 식탁에 와 있잖아요. 그래요. 거기요. 가만히,/ 아이처럼 귀를 기울이면,/ 어디선가 또 다른 말이 들길을 지나 마을 건너/ 가난한 우리 식탁으로 달려와요. 들리세요?/ 주인을 버리고 달려오는 말울음 소리요/ 저기 먼 곳에서는,/ 젖가슴 하나 달린 여자들이/ 안장도 없는 말을 타고/ 드넓은 대지를 흔들며 산다던데... 히잉! 어머니/ 주홍빛 하늘이 몰려와 대지를 덮으면/ 동그랗게 몸을 웅크린 여자들이/ 말갈기 같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우리 식탁을 향해 자신의 말들을 찾아/ 고단한 하루치 태양을 쉬게 하고 달려와요/ ... 히잉! 어머니/ 당신이 좋아하는 딸기 아이스크림이 녹을 때처럼/ 하늘이 물들어갈 때, 그녀들이 달려와요/ 가슴 하나를 도려낸 그녀들이, 자꾸만 자꾸만/ 초대받은 손님처럼 달려와요/ 어머니, 유방암에 걸린/ 아마존의 여왕, 히폴리테여/ 듣고 계신가요?/ 전사들이/ 우리의 밀림으로 몰려오는 소리,/ 그 침묵의 소리들이요/ … 히잉! 어머니.//

뱀 ㅡ산부인과에서 2 / 윤진화
오줌을 쌀 때마다/ 쉬이익 쉬이익 소리가 들려 싫었는데// 그것은 방울뱀 소리// 초음파를 보는데/ 아이의 중심에 뱀 대가리가 보인다// 화장실 갈 때마다/ 쉬이익 쉬이익// 내 안에 또아리를 튼/ 내 아이// 누구도 해치지 말자, 쓰다듬는다//

꽃뱀 / 윤진화
어머니의 꿈속에서 나는 뱀이다 비자나무가 있는 절, 장난 많은 동자승의 눈을 피해 달아나다 우물에 빠진 뱀이다 메마른 우물가 목마른 청년에게 살며시 교태부리는 뱀이다 청년을 따라 대가리가 큰 꽃망울이 그려진 접시를 몰래 혀로 핥아먹는 뱀이다 어느 선 고운 새색시 치마 자락에 수놓아진 꽃을 핥다 그녀의 빈 꽃대 깊은 곳으로 냉큼 들어가 앉은 뱀이다 나는 백칠 개의 그녀를 먹고 자란 백팔 번째의 그녀다.//

불면증 / 윤진화
첫사랑이 내 품에서 뛰쳐나갔어 밤이었어 깜깜한 밤 거룩한 밤 시계는 열두시로 가고 큰바늘은 작은바늘을 덮쳤어 온종일 큰바늘은 작은바늘과의 정사를 기다렸을거야 작은바늘은 오븐 속에 드러누운 사과파이를 기억해야 했어 녹는다는 것과 겹친다는 것은 같아 사과파이를 보면 알 수 있어 밤이 왔어 사과파이를 먹는 밤 내 몸을 먹는 밤 큰바늘이 작은바늘을 덮칠 때 울리는 열두 번의 비명 열세 번이 울리면 추억들이 찾아오지 추억은 언제나 단정하게 두 손을 모으고 내게 공손히 인사를 해 아치형 창문 너머 멀리서 의미와 의미의 간극에서 눈썰매를 타고 한 소녀가 지나가지 소녀의 이름은 청춘이야 청춘은 어느 처마 밑에서 비를 맞고 있는 첫사랑을 쓰다듬고 있지 강간당한 작은바늘아, 피 흘리는 사과파이야 내가 있는 이 집에서는 따뜻한 차가 끓고 있는데 비에 젖은 몸을 감쌀 수 있는 두터운 모포가 있는데 내 위대한 사랑이 청춘의 품에서 녹고 있어 나는 알지 그들은 다시 오지 않아 열세 번의 비명은 수없이 찾아오지만, 기다리는 모든 것들은 언제나 건너편 처마 밑에서 자기들끼리 끌어안고 오돌오돌 떨지 어디서도 노래는 들려오지 않고, 나는 한밤에도 눈부시게 늙어가지.//

오독(誤讀)의 거리 말이지 / 윤진화
오만원 신권을 오천원 구권인 줄 알고 택시비를 냈는데 말이지, 택시 번호는 기억 안 나고 말이지 화도 나고 말이지, 온다는 당신은 오지 않고 말이지, 마침 우씨 파는 할마씨가 보이더란 말이지, 우발적으로다 씨를 달라고 했는데 말이지, 뭔 우씨를 팔 길래 한참을 뒤적이더란 말이지, 팔짱을 끼고 옆을 지나치는 원조교제 커플 보는데 말이지, 한숨이 나오더란 말이지, 여고생으로 보이는 계집년이 저쪽 편으로 손 흔드는데 말이지, 포주처럼 보이는 여자한테 엄마라고 부르더란 말이지, 여고생 파트너였던 사내가 여보라고 부르더란 말이지, 눈알이 파래지는데 말이지, 씨 파는 할마씨는 아직도 뒤적거리고 있더란 말이지, 고개를 들어 올려보았는데 말이지, 새파랗게 질린 하늘에 새가 사랑사랑 날더란 말이지, 그 아래로 백화점 낯짝에 ‘Dream sale'이라고 박혀있었는데 말이지, 그게 ’드림 살래‘로 읽히더란 말이지, 할마씨가 나를 슬깃 보더니 말이지, 그 안으로 들어가더란 말이지, 백화점 따위에서 파는 꿈이야 뻔한 거 아닌가. 한정된 꿈과 특가된 꿈, 대량유통되는 꿈 따위 말이지, 역 앞 노숙자들처럼 흔한 꿈 아닌가. 서비스마인드는 아귀의 뻗은 손처럼 섬뜩하고 말이지, 나까마꾼들은 순환하는 꿈 유통을 함부로 하고 말이지, 그러니 내 씨나 얼른 팔 것이지, 할마씨는 뭔 미련이 남아서 꿈을 사러 갔단 말인가. 백화점에서 나온 할마씨를 보고 빨리 내 씨를 주세요, 라고 말을 건넸는데 말이지, 할마씨가 내 앞으로 옛다 네 씨다! 툭툭 글자들을 던지더란 말이지, 할마씨가 던진 씨, 씨, 씨를 받아들고 말이지, 오만원이고 오천이고 원조교제고 부녀사이고 꿈이고 나발이고 입안에 털어 넣으니 말이지, 오독오독 씹히더란 말이지, 입과 머릿속을 울리는 오독오독 그건 말이지, 새벽에 잠에서 깬 몇 가닥의 털을 가진 초라한 새의 울음소리처럼 심장을 주무르더란 말이지, 생의 절반을 죽음과 닮은 잠을 자는 새를 당신은 사랑이라 생각하느냔 말이지, 그렇다면 나의 새는 당신의 겨드랑이에 고개를 파묻고 거리를 배회하고 있는데 말이지, 당신은 오지 않고 말이지, 나의 새는 날개짓도 어설퍼라, 결국 이러자고 사랑사랑 퍼덕이다 백화점 피뢰침에 찔려 흘러내리는 아픔을 반복하잔 말이지, 나의 자발적인 부주의에서 비상하는 새는 말이지, 거리에서 오독오독거리고 말이지, 오독오독! 나는 말이지, 말없이 새를 보고 말이지, 내 사랑은 또 고개를 파묻고 말이지, 내 머리 위로 깃털 하나가 무의미하게 내려앉더란 말이지, 오독오독! 당신은 언제 오느냔 말이지.//

기억의 형벌 / 윤진화
춘식이가 죽었다. 무슨 교육대를 졸업하고 소주병을 베개 삼아/ 윗마을 가겟집 평상에서 잠을 자던 춘식이. 태권도가 4단이고/ 유도가 3단이고 전두환, 노태우를 때려눕혔다던 붉은 코 아저씨./ 아저씨라 부르지 말고 춘식이라 불러달라던 앞니 빠진 사내./ 벚나무가 살비듬을 털던 어느 해, 그늘 진 돌담 밑에서 깜박/ 잠이 든 나를 깨워 바람개비를 만들어 달랬다./ 아줌마가 죽었다. 새벽마다 야쿠르트 두개를 문 밖에 세워두고/ 가던 한국 야쿠르트 아줌마. 내가 다니던 학교, 가을 운동회에/ 와서 빈 야쿠르트 병을 줍는데 풍선장수의 헬륨가스통이 폭발했다./ 아줌마의 몸속에서 살던 것들이 이제 죽은 것은 필요 없다고/ 그녀의 몸밖으로 뛰쳐나왔다. 붉은 피가 뱀처럼 수챗구멍으로/ 기어갔다./ 우리 동네 꼬마도 죽었다. 세발자전거를 타고 큰 길 달리다가/ 미군 스낵카 밑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날, 학원을 다녀오는/ 길에 녀석이 낸 붉은 길을 따라 걸었다. 빈 음료수 깡통을/ 미 8군 담벼락 벽돌 사이로 구겨 넣고 어디론가 잡혀갈까/ 뛰기도 했다. 소나기가 왔으나 꼬마가 만든 길은 몇 주가/ 지나서야 사라졌다./ 대용 선배도 죽었다. 산에서 신혼집을 향해 목을 매달았다./ 군인이었던 선배는 행군에 지친 병사처럼 내게 삶은 어떻게/ 사느냐보다 왜 사느냐가 중요하다고 했다. 선배가 챙겨준/ 비상 전투 식량을 먹으며 대학로를 걸었다. 서울을 장악한/ 황사를 피해, 선배를 북한강에 몰래 침투시키고 김지하의/ 새를 불렀다./ 할머니가 죽었다. 상고를 졸업하고 첫 월급 삼십오만원을/ 받아서 예수쟁이 할머니에게 성경책을 선물했었다./ 성경구절을 읽고 찬송가 460장을 펴서 ‘지금까지 지내온 것’을/ 같이 불렀던 할머니는 까막눈이었다. 국화를 가득 넣은/ 향나무 속으로, 할머니가 붉은 지혜를 신고 들어가는데/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기섭이가 죽었다. 출판사에 다니던 내 동생의 지갑 속에는/ 책을 산 영수증이 그득했다. 그 사이에 식당영수증이 딱 세장/ 보였다. 내게 밥을 여러번 사줬는데 그것 밖에 보이지 않았다./ 남편 잃은 어린 색시가 펼쳐놓은 소복처럼 희디흰 눈이 조선/ 팔도를 뒤덮었다, 쌓였다. 눈을 손안에 가득 담고 내가 밟는/ 걸음마다 골고루 뿌렸다./ 모두 죽었다. 내가 기억하는 모든 시들은 죽었다./ 당신들을 묻고 돌아오는 길, 서울역 지하도에 있는 공중화장실/ 양변기에 앉았다. 그 위에 남아있는 누군가의 체온 탓이었을까./ 한달에 한번씩 내 몸에서 피고 지는 꽃이 때 이른 꽃잎을 흘렸다./ 가거라, 내 것이되 내 것이 아닌 것들아. 계절이 뒤척여도,/ 아직도 나는 마지막 봄날이었음으로.//

천형(天刑)에게 / 윤진화
고양이 묻은 감나무에서 야옹야옹 우는 열매가 맺히고/ 들개 묻은 밤나무에서 멍멍 짖는 열매가 맺혀요/ 왜 그런지 나는 잘 몰라요/ 발가락 잃은 비둘기가 어디에서 태어났는지/길가에 구르는 돌이 왜 바다로 가 부서지는지/ 왜 항상 아빠보다 엄마가 슬픈지/ 때로 내 행복을 옆집 고양이가 왜 물고 달아나는지/ 난 그런 거 몰라요/ 죽은 사람들의 입김이 한꺼번에 바람이 되어/ 나의 머리칼을 헤치고 운다는 것/ 어느 모텔 하수구로 떠나간 정액이 내 몸속에서/ 시가 되어 짖는다는 것/ 왜 그런지 나는 잘 모르는데,/ 감 먹고 밤 먹으면서/ 왜 잃어버린 언어는 이리도 달콤한지요/ 야옹야옹 멍멍//

죽음의 형식 / 윤진화
생선의 눈알을 건져 입에 넣고 굴리다가/ 붉은 구슬을 품은/ 여우를 떠올렸는데/ 지느러미를 품고 누웠을/ 그 버린 육신을 떠올렸는데// 어느 바람이 꽃에 머무르는 동안/ 해일이 이 동굴을 훑어 갔는데/ 바다 가운데를 둥둥 떠가던/ 여우 구슬을 냉큼 집어삼킨 하얀 가시가 다시/ 입안으로 들어와 나는/ 오랜만의 숨을 쉬고// 젓가락을 열십자로 놓고/ 오늘도 무사히, 기도를 올리고/ 냉큼 내 눈알을 떠먹고/ 떠먹이고// 생선 눈알을 입안에서 굴리며/ 다시 무수한 오늘을 이어 가고/ 일터로 난 문을 열어 헤엄치고//

코끼리 똥을 머리에 이고 / 윤진화

아버지가 매일매일 내 목에 식칼을 디밀었으나, 나는 시베리아 호랑이라서 똥을 싸고도 살아남았다. 어린 호랑이였지만 매일매일 굴속에 갇혀 있었지만 나는 발톱을 갈고 이빨 갈기를 멈추지 않았다.// 어느 날은 아버지가 칼을 내려놓고 "돌아가는 삼각지"를 들으며 누워 있었다. 나도 따라 돌고 있었다. 발톱을 세운 호랑이는 덜 여문 이빨로 가만히, 아버지의 목덜미를 바라 봤다. 연하고 부드럽고 혈관이 모여 있는 먹음직한 곳. 지금이다!// 이빨은 목뼈에 박히지 않았다. 발톱은 쉽게 부서졌다. 아버지가 나를 밀치고 목을 한번 털더니 화장실로 도망쳤다. 뒤를 쫓았다.//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는 늙어봤잖아// 손가락 사이에 칼을 끼우고, 문을 그었다. 끼기기기 -마음의 칼이 뼈와 만나는 소리! 이 환희! 더욱 날을 세워 다가갔다. 처음부터 잠기지 않았던 문, 그 문짝도 길을 스르르 내며 꼬리를 내리더라. 그 길을 칼로 성호를 그으며 걸었다. 아버지가 수십 년을 키워온 초원에 숨겨둔 늙은 코끼리 한 마리. 축 처진 검은 귀, 늘어진 코를 가진 초식 동물, 우 워워어 우워워어 변기에 앉아 소리를 질렀다.// 코끼리가 호랑이를 피해, 검불에 숨어 울고 있었다. 똥을 머리에 이고//아버지, 아버지.... 아버지는 늙어봤잖아// 손가락 사이에 칼을 끼우고, 문을 그었다. 끼기기기 -마음의 칼이 뼈 와 만나는 소리! 이 환희! 더욱 날을 세워 다가갔다. 처음부터 잠기지 않았던 문, 그 문짝도 길을 스르르 내며 꼬리를 내리더라. 그 길을 칼로 성호를 그으며 걸었다. 아버지가 수십 년을 키워온 초원에 숨겨둔 늙은 코끼리 한 마리. 축 처진 검은 귀, 늘어진 코를 가진 초식 동물, 우 워워어 우워워어 변기에 앉아 소리를 질렀다.// 코끼리가 호랑이를 피해, 검불에 숨어 울고 있었다. 똥을 머리에 이고//

'시詩 느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석중 시인  (0) 2022.05.10
박은형 시인  (0) 2022.05.09
오성인 시인  (0) 2022.05.06
유현숙 시인  (0) 2022.05.05
정한아 시인  (0) 2022.05.04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