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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백일몽 / 김창수

부흐고비 2022. 5. 9. 07:10

한 해가 또 저물어간다. 소마세월 탓인가 착잡한 마음은 가랑잎처럼 바삭하다. 마음속 갈증을 풀어 줄 청량제가 필요했다. 아내와 함께 길을 나서다 희한한 일을 겪는다. 묘한 기시감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

편도 2차로에서 내 차는 우회전하려는 참이었다. 1차로에는 직진·좌회전 차량이 줄을 섰다. 1차로 맨 앞에서 대기 중인 차량의 뒷자리 번호 두 개만 비스듬히 보인다. ‘○○53’이다. 문득 앞자리 두 개 숫자는 ‘68’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서 차량번호는 ‘6853이다.’라고 혼자만의 최면을 건다. 아내에게 그 상황을 말하려는 순간 신호가 바뀌고 차량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저만치 앞서가는 그 차량의 번호가 내 생각 대로였다. 착시가 아니었다.

내 안에 어떤 영적인 존재가 있는 건지, 깜짝 놀랐다. 흰 사슴이 태어나는 것과 같은 길조라는 생각이 든다. 뭔가 일을 낼 것만 같다. 이런저런 의미를 부여하니 마음이 달뜨기 시작한다. 이럴 때는 뭘 해야 하는지 골똘히 짚어 본다. 하루를 그냥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룬 것이 변변찮아 오늘따라 빈손인 것 같아 초라한 생각이 든다. 그때 언뜻 복권 생각이 떠올랐다.

우선, 어떤 종류의 복권을 선택해야 할지가 고민이다. 거금의 로또에 당첨된 사람 대부분은 가정이 파탄 나고, 삶이 망가지는 사례를 매스컴에서 많이 접했다. 그것은 큰돈을 만져보지 못한 사람의 돈 관리 능력 미숙이 아닌가 싶다. 당첨금을 어떻게 써야 할지에 관한 세심하고도 철저한 잡도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당첨금은 수십억 정도로 상정한다. 큰아들 개업하는 데 모양 나게 보태고, 둘째 며느리 힘든 교편생활 그만두고 전업주부로 들여앉히는 데 좀 써야 하고…. 또 네 명의 손주 녀석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당첨금 배분하기가 정말 어렵다. 아니다, 두 아들네 식구가 각각 네 명씩이니 똑같이 나누는 것이 좋겠지. 연신 또 걱정이 생긴다. 큰아들이 섭섭해하면, 형제간의 우애에 금이 생길지도 모를 일이다. 가정의 화목이 우선인데 싶어 로또만은 피하기로 했다. ‘잘되면 거금을 거머쥘 수도 있는데….’

다음 과제는 어디서 사야 하는가이다. 그래서 ‘복권명당 투어’까지 생기지 않았던가. 한 친구는 타지에 갈 때마다 복권방에 먼저 들르곤 했다. 주택복권을 찍어내던 시절에 그것을 사러 이곳저곳을 다니는 이도 있었다. 평소와 다른 씀씀이를 본 적이 없어 아마 큰 것에 당첨은 안 되었을 성싶다. 복이 까지라 허방만 집다 말겠지 했다. 큰아들 집에 다니러 가는 체하면서 서울에서 살까. 아니면 여우 같은 손녀 용돈 주러 가는 척 부산에서 살까. 전국을 뒤져 복권명당으로 갈까. 내 안에서 갈등이 갈마든다. “비 오는 세월엔 돌도 자란다.”라고 했는데, 장소가 문제이랴. 결국, 내 거주지 주변에 1등 당첨 번호가 나온 매장을 찾기로 한다.

술도 괼 때 걸러야 하듯이 때를 잘 선택하는 것도 당첨의 관건이리라. 이 뭔가 이루어질 것 같은 기회가 연기처럼 사라져 버릴 것 같아 불안하다. 장고 끝에 이튿날 점심을 먹고 난 후 아내 몰래 슬그머니 자리를 뜬다. 좀 떨어진 곳에 로또 1등 당첨 번호 두 번 나온 복권방에 갈까 하다가 어차피 될 건데 싶어 가까운 곳으로 발길을 돌린다. 아무도 모르게 간다고 갔는데, 그곳에서 내 사는 아파트 경비원을 만난다. 인사를 건넨 후 다른 물건을 사는 척하면서 시간을 끌다 보니 그가 보이지 않았다. 로또복권을 제외하고도 여러 종류가 있었지만 일단 연금복권 5장을 손에 쥐었다.

꿈이 아닌 바로 내 눈앞에서 일어난 일이라 확신이 섰다. 새가 알을 품듯이 그것을 지갑 속에 품고 구름 위를 걷는다. 그런데도 잠시 추첨일을 잊어버리고 지냈다. 열흘 만에 확인해보니 끝자리 수 두 장이 당첨되었다. 맨 꼴찌 등수다. 두 장을 바꾸었다. 일주일 후에 맞춰보니 한 장만 걸렸다. 또 그 끝자리 수다. 그다음 남은 한 장은 맞는 번호가 하나도 없었다. 허해진 마음 탓인가 겨울바람이 몹시 차가웠다.

살아오면서 행운을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노력한 수준 이상의 대가를 얻어 본 기억이 없다. 아내도 요행 바라기에는 삭풍처럼 쌀쌀한 성미다. 알면 핀잔을 놓을 게 뻔했다. 하지만 이런 행운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꿈은 원래 허무한 것이라 이루지 못해도 스스로 위로가 되지만, 묘하게 맞힌 숫자에 대한 확신이 무위로 끝나니 허탈하다.

백일몽白日夢이었다. 미몽 속에서 잠시나마 행복했다. 보는 이도 없는데 민망했다. 지금까지 살아낸 것이 로또인 걸, 뭘 더 바라겠는가. 늘 걸어왔던 익숙한 길 위에서 소소한 행복을 찾는 것이 참다운 꿈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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