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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착하지 못한 충혼(忠魂) / 일성록

by 부흐고비 2022. 5. 18.

정착하지 못한 충혼(忠魂) 
-성삼문(成三問) 신주 봉안 논쟁-

 

번역문


또 아뢰기를,
“홍주(洪州) 노은서원(魯恩書院)의 유생인 유학 최건(崔謇) 등의 상언(上言)에 ‘충문공(忠文公) 성삼문(成三問)의 사판(祠版)은 그 부인이 직접 쓴 필적인데, 오랫동안 묻혀 있다가 다행히 다시 나타났습니다. 다만 제(題)한 방법이 또 예식(禮式)과 달라 가묘(家廟)에서 모시기에는 적합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차마 다시 묻을 수도 없어 그대로 노은서원의 위판(位版) 뒤에 봉안하였으니, 후세의 사람들이 감회를 일으키는 것은 진실로 여기에 있고, 선현이 의기(義起)하여 깊은 뜻을 둔 것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대신 제사를 지내는 자손이 모시고 갈 것을 청하였으니 이는 선현이 이미 정한 의론에 크게 위배되는 것이요, 신주를 고쳐 쓰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은 너무도 놀랍고 망령된 일입니다. 비록 그의 청에 따라 이미 허락한 일이라 할지라도 지금 다시 바로잡되, 명령을 번복한다는 것에 구애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충신(忠臣)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받드는 것은 살펴서 신중을 기해야 할 일입니다. 대신(大臣)에게 문의하여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여,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대신에게 문의하니 우의정 김재찬은 ‘성삼문의 신주를 노은서원의 위패 뒤에 옮겨 봉안한 것은 곧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의 정론입니다. 지금 만약 제사를 받들어서는 안 되는 방손(傍系)에게 옮겨 봉안하게 할 경우, 충문공이 지각이 있다면 어찌 예에 맞지 않는 제사를 흠향하려 하겠습니까. 더구나 분칠하지 않고 성명을 쓴 것을 혹시라도 멋대로 고친다면 몹시 놀랍고 한탄스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충문공의 신주를 도로 노은서원에 봉안하는 것이 사리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였습니다. 상께서 재결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여, 전교하기를,
“대신의 논의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원문

 

又啓言: “洪州魯恩書院儒生幼學崔謇等上言以爲, ‘忠文公成三問祠版, 卽其夫人親書手蹟, 而幾年幽晦之餘, 幸得復顯. 第其所題, 又與禮式有異, 旣不可於家廟, 亦不忍使還埋, 仍安魯恩之院位版之後, 則後人興感亶在是矣, 先賢義起深意所存, 亦不外此. 中間攝祀之孫, 請其奉去, 大違先賢已定之論, 至若改題之境, 則萬萬駭妄. 雖是依渠請已許之事, 到今更爲釐正, 不必以銷刻爲拘云.’ 忠臣妥靈, 所宜審愼, 請問議大臣處之.” 允之. 又啓言: “問議大臣, 則右議政金載瓚以爲, ‘成三問神主, 移奉于書院位版後, 卽先正臣宋時烈之定論也. 今若移奉於不當祭之旁孫, 則忠文有知, 其肯就享於非禮之享乎? 況不塗粉而題姓名者, 若或擅改, 大可駭歎. 忠文神主, 還奉於魯恩書院, 恐合事宜云.’ 請上裁.” 敎以: “依大臣議施行.”

- 『일성록(日省錄)』 순조 8년 3월 19일

일성록(日省錄)은 1752년 (영조 28년)부터 1910년 (융희 4년)까지의 국왕 동정과 국정 제반사항을 기록한 일기체 연대기. 흔히 '왕의 일기'라고 표현한다.

 

해설


1672년(현종13) 4월, 호조의 서리 엄의룡(嚴義龍)이 인왕산(仁王山)의 무너진 벼랑 밑 돌무더기 사이에 놓여 있던 자기(磁器) 안에서 성삼문(成三問)과 그의 외손 박호(朴壕) 부부의 신주를 발견하였다. 이 성삼문의 신주는 1456년(세조2) 그가 단종(端宗) 복위를 기도하다 발각되어 처형되었을 당시 부인 김씨(金氏)가 손수 마련한 것으로, 김씨의 사망 뒤 박호의 집으로 넘어갔다가 그 집안 역시 후사가 끊어지는 바람에 결국 이곳에 매안(埋安)되고 만 것이라 알려졌다. 성삼문의 사망으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난 시점에, 더구나 단종 및 사육신(死六臣)에 대한 재평가와 현양‧복권 논의가 점차 본격화되어 가던 시기에 그의 신주가 새로이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당시 사림 사회의 비상한 관심을 얻었다.

유생들로부터 신주 봉안 문제에 대해 문의를 받은 송시열(宋時烈)은 이 일을 두고 하늘이 성삼문의 충심에 감응한 결과라 하며, ‘혼령이 집으로 돌아온다.[神返室堂]’는 『주자가례(朱子家禮)』 구절에 의거해 홍주(洪州) 노은동(魯恩洞)에 있는 성삼문의 옛집에 이를 봉안하도록 하였다. 이후 1676년(숙종2) 이곳에 사육신을 제향하는 노은서원(魯恩書院)이 건립되고 1692년(숙종18) 이에 대한 사액(賜額) 조치까지 행해지면서, 그의 신주는 단종조 여러 충신의 위패와 한 곳에 모셔지게 되었다. 실로 사후 216년 만에 이루어진 충혼(忠魂)의 안식이었다.

그렇게 100여 년 동안 모셔져 있던 신주는 정조(正祖) 연간에 이르러 봉안과 관련한 한 차례 논란에 직면하게 되었다. 1788년(정조12) 4월, 충청도 비인(庇仁)의 유학(幼學)이자 박호의 후손인 박사동(朴師東)이 상언(上言)하여 자신의 외선조인 성삼문을 위해 사우(祠宇)를 세우고 서원에 있는 신주를 그곳으로 이봉(移奉)하게 해 달라고 청한 것이다. 이에 대해 정조는 “이는 상언할 일이 아니다. 그에게 분부하여 즉시 제사를 주관하게 함으로써 충신의 굳센 혼백이 의지하여 편히 쉴 곳을 얻을 수 있게 하라.”라고 판하(判下)하여, 박사동의 요청대로 성삼문의 신주를 외예(外裔) 쪽으로 옮겨 주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로부터 5개월이 지난 뒤, 이번에는 노은서원이 있는 홍주의 유생 김방언(金邦彦) 등이 상언하여 박사동의 집안으로 이봉한 신주를 다시 서원으로 옮겨와 모시게 해 달라고 청하였다. 사육신을 주 배향인으로 삼고 있는 노은서원의 입장에서는, 아무리 후손의 청이 있었다 하더라도 오래도록 자신들이 받들고 있던 신주를 갑작스레 다른 곳으로 이봉한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다. 상언을 접한 정조는 이것이 가벼이 처리할 사안이 아니라 여겨 대신(大臣)에게 수의(收議)할 것을 명하였고, 이에 영의정 김치인(金致仁), 좌의정 이성원(李性源), 우의정 채제공(蔡濟恭) 등 조정의 중신들이 의견을 제출하였다. 이들은 모두 과거 선정신(先正臣) 송시열의 주장에 의해 노은동 봉안이 결정된 이래 약 100여 년 동안 신주가 이곳에 모셔져 있었다는 점, 그리고 대수(代數)가 멀리 떨어진 외가 후손에게 섣불리 제사를 맡길 수는 없다는 점 등을 주요한 근거로 들며, 신주를 서원으로 환봉(還奉)해야 함을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건의가 받아들여져, 수개월 동안 노은서원을 떠나 있던 성삼문의 신주는 다시 본래 장소로 귀환하게 되었다. 잠시 신주를 모셔왔다가 곧바로 반환하게 된 박사동은 1790년(정조14)에도 두 차례 상언하여 신주를 받들 수 있기를 바랐으나, 판결이 또다시 뒤집히지는 않았다.

그런데 신주 천봉(遷奉) 논쟁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1804년(순조4) 상주(尙州)의 유생 성억주(成億柱) 등의 상언으로 인하여, 성삼문의 방손(傍孫)으로 하여금 별도의 사우를 지어 제사를 지내도록 허락하는 조치가 내려진 것이다. 이에 성삼문의 신주는 박사동의 상언 이후 16년 만에 다시 서원을 떠나 방손의 집안으로 옮겨졌다. 그러자 이번에도 서원 측에서 강한 반발이 일어났다. 1807년(순조7)에는 홍주의 유학 조억기(趙億基) 등이, 이듬해에는 같은 지역의 유학 최건(崔謇) 등이 상언하여 신주를 다시 서원에서 모실 수 있기를 청하였다. 특히 최건은 성삼문의 사판(祠版)은 제(題)한 방법이 예식(禮式)과 달라 가묘(家廟)에서 모시기에 적합하지 않고, 또 이미 오랫동안 노은서원에 봉안하여 후세인들의 감회를 일으킨 바가 적지 않으므로, 이곳에 모시는 것이 사리에 마땅함을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호소에 대해 순조는, 선정신 송시열이 의견을 내 결정한 사안이고 방손(傍孫)에게 제사를 받들게 하는 것도 예에 맞지 않는 일이므로 도로 노은서원에 봉안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우의정 김재찬(金載瓚)의 의견을 받아들여, 성삼문의 신주를 또 한번 서원으로 돌려보내도록 하였다. 이 결정이 내려진 이후에야 비로소 그의 신주는 더 이상 이봉 논란을 겪지 않고, 1871년(고종8) 노은서원이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될 때까지 이곳에 모셔질 수 있었다. 20여 년에 걸쳐 이어진 봉안 논쟁이 마침내 종결된 것이다.

정조~순조 연간 성삼문의 신주 봉안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이와 같은 논쟁의 양상은,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충혼을 자신의 손으로 받들고자 한 후대인들의 성심, 또는 그러한 충절의 상징을 자신의 공간에 모셔둠으로써 그 권위를 높이고자 한 각 주체의 치열한 노력들을 살필 수 있게 한다.

글쓴이 : 정용건(강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BK21사업팀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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