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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가해자 / 이혜영

부흐고비 2022. 5. 23. 08:23

복숭아나무에 꽃이 피었다. 죽은 줄 알았는데. 지난해 멧돼지가 들이받아 나무둥치가 찢긴 채 땅에 누워버렸던 나무다. 그렇게 상처를 입었던 나무가 올봄 꽃을 소담하게 피워냈다. 콩알만 한 복숭아가 맺혔다.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목숨을 움켜잡고 있었다는 것이 신비스러움을 지나 경외스럽기까지 하다. 뭔가 부여된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수행자 같다. 복숭아나무를 바라보며 그만도 못한 자신이 더없이 부끄럽고 마음의 회한으로 남는다.

오랫동안 가꾸어 온 농장이 너무 방대한 탓에 관리가 소홀해졌다. 야산을 개간해서 만들었던 농장이 그동안 나무와 숲이 우겨져서 다시 야산으로 변해간다. 이제는 다시 날고 기는 짐승들의 터전이 되어버렸다. 농장에 심어진 복숭아는 익을만하면 멧돼지가 주인이었고, 맛이 든 감은 새들이 먼저 쪼아댔다. 아침저녁으로 모이를 놓치지 않고 준 닭이 이제는 알로 보답한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까마귀가 물고 갔다. 둥주리에서 나서는 암탉이 전갈을 넣기가 무섭게 달려가 보지만, 까마귀는 그 앞에서 지키고 있었나 보다. 닭장 문을 열고 들어서면 까마귀는 벌써 알을 마시고 있다. 정성을 다해 노력해 보지만, 그곳의 원주인들은 쉽게 우리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정말 텃세가 심했다.

특히 멧돼지가 천적이 없는 탓인지 개체수가 늘어만 간다. 집집마다 멧돼지 피해로 농작물 관리가 걱정이었고, 심지어는 작물을 마음대로 심을 수가 없음을 탄식하였다. 농작물에 그치는 일이 아니었다. 이제는 생각지도 않던 일까지 벌어진다. 해마다 농장에서 직접 수확한 매실을 설탕에 재워두고 발효 중이었다. 짧게는 2, 3년부터 오래된 것은 십 년 이상 숙성된 청들이 항아리 안에 들어 있었다. 보물처럼 아끼던 항아리들이 하루아침에 풍비박산이 났다. 쪽박이나 깨지 말 일이지. 항아리 안의 매실청을 모두 먹어 치운 것은 어찌해야 할지… 항아리가 몽땅 깨져버린 것은 더 참을 수가 없었다. 더는 방관만 하고 있을 수가 없다.

전문 수렵인에게 그들의 만행을 고해바치기에 이르렀다. 다음 날 새벽 수렵인으로부터 동영상을 보내왔다. 산속 웅덩이에서 목욕 중이던 멧돼지 한 쌍이 사냥개들에게 포위된 채 사투를 벌이다가 쓰러지는 장면이었다. 포획된 멧돼지는 90킬로그램이 넘는 육중한 몸무게였다. 막상 거대한 몸집의 멧돼지 한 쌍이 쓰러진 모습을 보니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못 할 짓을 했다는 생각이 일었다. 그런 거대한 몸집이니 농작물이 남아날 리가 없었을 것이다. 오랫동안 시달리던 일에서 벗어나 후련할 일이었으나 마음은 편치 않았다. 그동안의 소행은 미웠지만, 목숨까지 앗아버렸다는 것이 왠지 마음에 걸려 안쓰럽고 미안했다.

전원생활을 한 지 스무 해가 되어간다. 열린 공간에 살면서 그동안 얼마나 많은 생명을 빼앗았는지 정확히는 알지 못한다. 차를 몰고 귀가하는 길에 두꺼비가 차에 깔려 죽은 일, 그러자 또 다른 두꺼비 한 마리가 제 짝을 찾으러 나온 듯, 온 마당을 헤집고 다닌 일, 울음소리도 내지 못하고 허둥대며 다니는 그 모습에 어찌나 마음이 아팠던지…. 한번은 닭장 앞 너른 마당에서 자유로이 놀던 닭들을 솔개가 채가는 일이 벌어졌다. 더는 솔개에게 넘겨줄 수 없다는 생각은 방어막을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닭들이 노는 마당 위로 기둥을 세우고 그물을 덮었다. 이러한 방책은 엉뚱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솔개는 닭을 덮치지 못하였으나 생각지도 않게 다른 새들이 그물에 묶이는 일이 자주 벌어졌다. 하늘을 날던 작은 새가 피해를 봤다. 이처럼 의도하지도 않았는데 생명을 빼앗는 일이 자주 벌어졌다.

최근에는 집 주변에 쥐 잡는 끈끈이를 놓아두었다. 붙으라는 쥐는 붙지 않고 작은 새가 미끼를 쪼아 먹다가 붙어 버렸다. 겨우 끈끈이에서 떼어내니 높이 날지 못하고 조금 날아오르려다 종종걸음을 치며 달아난다. 이 모습 또한 얼마나 가슴이 아프던지. 어찌 되었든 전원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겠다는 생각은 발목을 잡히고 말았다. 본의 아니게 전원에서 힘 자랑하는 가해자가 되었다. 천국으로만 여겼던 터전에 그늘이 엉기기 시작한다. 저 끝은 지옥밭이 아닐까.

전원에는 무수히 많은 생명들이 함께 숨 쉬고, 먹이 활동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전원에서 자연과 더불어 즐기며 살겠다는 꿈은 사람들의 이기일지 모른다. 우리는 로망으로 여기지만, 그동안 그곳에서 삶을 영위하여 온 생명체들에게는 목숨을 걸고 위험 속에서 연명해야 하는 고통의 삶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엄습한다. 원래 자연은 그네들의 삶터였다. 그 삶터에서 함께 어울리며 산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배려를 준비하는 마음이 필요할 것이다. 어찌하면 함께 웃으며 공존할 수 있을까. 자꾸만 희생된 생명체들의 아우성이 고막을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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