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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시간은 지우개 / 박일천

by 부흐고비 2022. 5. 21.

벼가 치자 빛으로 물들어 간다. 들녘의 메밀꽃은 하얗게 솜사탕을 풀어내고 소슬한 바람이 차창 가로 스친다.

긴 세월 얽매인 직장의 매듭이 풀리자마자 남편은 부모님을 모시고 여행을 떠나자고 했다. 그 말에 “이왕이면 홀로 계신 시이모님 두 분도 같이 모시고 가요.” 하는 내 말에 그 사람은 “어머니가 더 좋아하겠네.” 하며 소년처럼 들떠서 완도 여행길에 올랐다. 나이 들어 거동이 자유롭지 못한 시어머니는 이모들과 전화만 할 뿐 만나지 못해 답답하다고 넌지시 푸념을 했다. 폐를 갉아먹는 병마에 지쳐 바람 불면 날아갈 듯한 가랑잎 같은 시어머니. 잠시나마 파리한 그 얼굴에 웃음 띠게 할 수 있다면 맘의 부담쯤이야…. 앞에 앉은 세 여인은 소풍이라도 나온 듯 끝없이 말 꾸러미를 풀어낸다. 모처럼 만났으니 못다 한 이야기가 켜켜이 쌓였으리.

시간이 세 자매의 고운 모습은 가져갔으나 기억 속에선 지나간 일을 그림처럼 그려낸다. 어린 시절 친정집 옛 얘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비 내리는 날 익산 미륵사지 근처 저수지에 가면, 물고기들이 새 물 내를 맡고 상류인 도내 골 냇가로 거슬러 온단다. 몰려오는 고기들을 대나무로 엮은 용수를 물속에 넣고 건져 올리면 바가지로 퍼 담을 정도로 많이 잡혔다. 보리새우, 쏘가리, 붕어 등이 가득 담긴 양동이를 들고 그네들은 신바람이 나서 집으로 갔다. 어느 보름날 밤에는 친구들과 귀신 잡기 놀이를 하다가 동네 어귀 느티나무 아래 당집 근처에 갔는데, 하얀 수염에 흰옷을 입은 장대처럼 큰 남자가 지팡이를 들고 나타났다. 호들갑스러운 여자애들은 귀신이 정말 나타났다고 혼비백산하여 친구 집으로 몰려가는 소동을 벌였다. 아마도 당집 무속인이 아니었나 싶다. 그때를 떠올리면 그네들은 지금도 모골이 송연해진단다. 세 자매는 번갈아 가며 세월의 그물에서 추억을 건져 올렸다.

완도 수목원에 도착하여 호숫가를 걸었다. 큰이모는 지팡이에 의지하여 내 손을 잡고 걷고 작은이모는 관절염으로 오리걸음으로 쩔뚝이며 다녔다. 시어머니는 제일 허약하지만 그나마 걸음은 비틀거리지 않았다. 기우뚱한 그들의 뒤에 걸린 그림자는, 시름에 겨운 생의 무게인 듯 절룩이며 따라갔다. 육신은 서걱거려도 마음만은 소녀라 눈앞에 보이는 산들이 고향 동산처럼 정겹다며 그네들 얼굴에 동심이 흘렀다. 해 질 녘에 전망대에 오르니 유리창을 통해 한눈에 다도해가 들어왔다. 크고 작은 섬들은 바위와 나무, 바다가 어우러져 수려했다. 산 너머로 해가 숨어들고 있다. 세 자매의 하얀 머리 위로 노을이 내려앉아 붉게 물들어 간다.

다음날 새벽 숙소에 있는 해수탕에 갔다. 말 그대로 바다가 보이는 곳이었다. 짭조름한 온탕에 몸을 담갔다. 곱상하게 생긴 한 여자가 말을 건넨다.

“친정어머니 모시고 여행 왔나 봐요?” 호기심에 그녀의 눈이 반짝거린다.

“아니요. 시어머니하고 시이모님들이세요.”

“와, 지금 세상에 친정어머니하고도 어려운 여행을 시이모까지….”

그네는 친정어머니 생전에 손잡고 여행 한번 못해 봤다며 지나간 날을 아쉬워했다.

남남이 만나 시어머니와 인연을 맺은 지 어언 삼십여 년. 색색의 사연이 층층으로 쌓여 무지개가 뜨기도 하고 먹구름이 몰려올 때도 있었다. 이제 세월의 더께만큼 마음자리도 헐렁해져 야위어 가는 어머니를 감싸 안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여행을 좋아하는 시어머니와 완도에 오는 길에 이모님도 겸사 모시고 왔는데……. 머지않아 누구나 기우뚱거리며 걸어가야 할 그 길 위에서 손잡아 줄 사람 있다면 외로움에 휘청거리지 않으련만.

해수탕의 열기로 얼굴에 복사꽃을 피운 세 여인과 땅끝 마을을 찾았다. 땅끝 표지석 앞에서 그녀들은 사진을 찍었다. 흰머리 날리며 배시시 천진하게 웃는 세 자매. 언제 다시 손잡고 여행할까. 그네들의 얼굴에 서글픈 빛이 언 듯 스쳐 간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세 자매에게 수수께끼를 냈다.

“할머니들이 싫어하는 악기는요?” 생각해보지도 않고 셋이서 “몰라.”

“비올라. 비 오면 다리 아프니까요.” “으하하” 세 분은 손뼉 치며 웃었다. “경찰서의 반대말은?” “모르죠. 경찰 앉아.”

“맞다 맞아!” 어린아이처럼 눈물까지 흘리며 세 자매는 즐거워하셨다. 운전석 옆에 시아버님은 미소 짓고, 남편은 그네들을 돌아보며 싱그레 웃었다.

큰이모는 치매기가 있다 하여 염려했는데 나만 보면 그저 “고마워.”를 입에 달고 미소 지었다. 심심하면 “오늘이 무슨 요일여.” 하고 물어보신다. “월요일.” 잠시 뒤 또 물어본다. 자꾸 같은 말을 물어보는 걸 보면 큰이모가 약간 치매기가 있는 것 같기는 하다. 한데 아흔두 살에 식사 잘하고 사람도 알아보며 화장실 잘 가면 되지 무얼 더 바라겠는가. 사는 데 지장 없는 잡다한 걱정일랑 잃어버릴 수 있다면 오히려 즐거운 삶이 될 것이다. 난센스 퀴즈에 함박웃음 짓고, 맛있는 것 드시며 즐거워하는 어린아이 같은 세 자매. 나쁜 기억만 지워가는 치매라면 시간은 참으로 고마운 지우개다.

흘러가는 크로노스*는 그네들의 젊음을 데리고 갔다. 지금 이 순간도 시간이라는 지우개는 우리의 기억을 지워가고 있으리라. 하지만 그네들에게 특별한 순간은 잊을 수 없는 카이로스*가 되어 문득문득 생각날 것이다. 웃음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이번 여행이 우울할 때, 세 자매에게 한 모금 청량제가 되었으면.

 


* 크로노스 : 그리스 신화 시간의 신. 똑같이 적용되는 객관화된 흘러가는 24시간, 365일 등
* 카이로스 :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신의 아들. 주관적인 시간. 행복한 순간, 고통스러운 순간 이든 흐르는 시간. (크로노스)을 벗어나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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