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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이원하 시인

부흐고비 2022. 6. 23. 07:55

이원하 시인
1989년 서울 출생. 연희미용고 졸업. 송담대학 컬러리스트과 졸업.

201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에세이 『내가 아니라 그가 나의 꽃』을 펴냈다.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 이원하
유월의 제주/ 종달리에 핀 수국이 살이 찌면/ 그리고 밤이 오면 수국 한 알을 따서/ 착즙기에 넣고 즙을 짜서 마실 거예요/ 수국의 즙 같은 말투를 가지고 싶거든요/ 그러기 위해서 매일 수국을 감시합니다/ 나에게 바짝 다가오세요/ 혼자 살면서 나를 빼곡히 알게 되었어요/ 화가의 기질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매일 큰 그림을 그리거든요/ 그래서 애인이 없나봐요/ 나의 정체는 끝이 없어요/ 제주에 온 많은 여행자들을 볼 때면/ 내 뒤에 놓인 물그릇이 자꾸 쏟아져요/ 이게 다 등껍질이 얇고 연약해서 그래요/ 그들이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사랑 같은 거 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제주에 부는 바람 때문에 깃털이 다 뽑혔어요,/ 발전에 끝이 없죠/ 매일 김포로 도망가는 상상을 해요/ 김포를 훔치는 상상을 해요/ 그렇다고 도망가진 않을 거예요/ 그렇다고 훔치진 않을 거예요/ 나는 제주에 사는 웃기고 이상한 사람입니다/ 남을 웃기기도 하고 혼자서 웃기도 많이 웃죠/ 제주에는 웃을 일이 참 많아요/ 현상 수배범이라면 살기 힘든 곳이죠/ 웃음소리 때문에 바로 눈에 뜨일 테니깐요//

물 잔에 고인 물 / 이원하
보일 듯 말 듯한 물을 마셨어요/ 이 느낌이 그 느낌이 맞는다면/ 나는 바랄 것이 없을까요// 젖은 하늘에서/ 비가 오지 않네요/ 뭐라도 던져서 반응을 보고 싶은데/ 내가 가진 건 말뿐이네요// 하고 싶은 말을/ 허공에 수차례 던져도/ 아무도 손대지 않네요// 비는 왜/ 섬에 오지 않을까요// 뜬구름이 나를 그늘진 사람으로/ 만들어버렸는데도 왜 오지 않을까요// 기다리다 기다리다 마지못해/ 비가 내리면/ 그땐 우산으로 나를 가릴 거예요// 우산 아래서는/ 그를 만난 표정을 지어도,/ 어떤 고백을 해도, 물건을 훔쳐도,/ 숨어 있어도, 눈에 띌 테니까요//

​풀밭에 서면 마치 내게 밑줄이 그어진 것 같죠 / 이원하
나는 밝은 곳에 갇혀 살면서도/ 바라는 것이 많아요/ 빛이 나를 뒤흔들었으면 좋겠어요// 주머니에 갇혀 살면/ 과일이 되고 싶을 거고요// 소원이 이루어진 다음날 아침에는/ 또다른 소원을 빌 것 같아요// 아픔도 거뜬히 원해요// 아픔이 그리운 날엔/ 베개 모서리로 내가 나를 긁죠// 그런데요, 최근에/ 난생처음 뒷모습이란 걸 봤는데요/ 말문이 막힐 뻔했어요// 그림자라면 발목이라도 잡고/ 끌고 다닐 텐데 뒷모습은/ 잡으려 할수록 쪼개지고 있었거든요// 나는 내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비가 겨울엔 쉬어가는 것처럼/ 겨울이 오기 전에/ 내게도 어떠한 조치가 필요해요// 같이 걸을 사람은 없지만/ 풀밭에 나가볼까요/ 풀밭은 꽃을 들고 서 있지 않아도/ 내게 밑줄을 그어주는 곳이니까요//

달을 찌는 소리가 나를 부르는 소리였다니 / 이원하
술집에 유일한 사자성어인/ 해물파전을 먹으며/ 빛이 드는 창문은 창문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나는 말했어요// 하수구가 입맛 다시는 소리를 들은 지 오래지만/ 능력을 무기로 삼은 지 오래지만/ 퍼렇게 살아 있지만/ 자주 손을 뻗지만,// 어디 시든 이파리 따온 거 마음에 살라 해봐요/ 옆집에 누가 사니까 마음 편히 먹으라 해봐요/ 노래를 크게 부르고 싶을 땐 참으라 해봐요,/ 세상이 과연 그렇게 돌아가나// 그래서 아까 그렇게 말한 거예요// 해물파전을 다 먹었을 땐 이렇게 말했어요/ 앞으로 나는 누굴 만날 수 있을까요?// 찐 굴 같은 대답을 들었지만/ 역시 그럴싸하게 잘 모르겠어요/ 바닥으로 턱을 괴도 모를 거예요// 모르는 사실이지만/ 세상은 나를 포함하여/ 느린 것들을 탓할 수 없을 거예요// 당기라고 써진 문을 당겨도/ 당분간은 여러가지가 동시다발일 거예요//

환기를 시킬수록 쌓이는 것들에 대하여 / 이원하
한라봉 입술엔 쌓인 것들이 많다/ 나도 그 위에 함께 쌓여 있다/ 앞으로 한동안은 이렇게 쌓여 있을 것이다/ 겹쳐 있는 게 좋아서가 아니라/ 한동안, 이라는 기간이 좋은 것이니까// 수건은 젖었던 순간들을 기억한대/ 불은 자기를 흔들었던 초의 색을 기억한대/ 발전은 그 사람의 과거를 기억한대// 영원히, 말고/ 잠깐 머무는 것에 대해 생각해/ 전화가 오면 수화기에 대고/ 좋은 사람이랑 같이 있다고 자랑해/ 그 순간은 영원하지 않을 테니까/ 지금 자랑해// 손금을 따라 흐르던 바람의 색이 변하면/ 그때부터 비를 기다려/ 기다리다가 손바닥에 비가 찾아오면/ 손바닥의 온도로 인해 미지근해질 거야/ 사람들이 그러하듯 말이야// 외로움은 커질수록 두꺼워지는 것이 아니라/ 얇아진다고 했어// 때려치우고 싶은 인연/ 이미 친해진 사람들 중에 있지/ 고르지 말고 익숙한 것들을 먼저 없애/ 편하지 않고 낯선 것들을 남겨/ 얇은 외로움을 유지해// 모든 것을 떠올리기 싫어해봐/ 아까운 게 아니야/ 없애고 없애도/ 청소하다가 가끔 발견되고 그래//

산수국이 나비인 줄 알고 따라갔어요 / 이원하
반딧불의 출현이 간절한 한밤중의 산속/나비 한 마리의 출현이 반가운 한낮의 숲 속// 항상 낮이 먼저였으니/ 밤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할게요// 울면, 구두가 망가져요/ 구두가 망가지면서 낸 소리가/ 별을 처지게 만들었어요/ 별이 많아 밝아졌으니 지금이 어찌 밤인가요// 항상 산이 컸으니 숲을 키워볼게요// 숲에서 크게 웃다가/ 흰 종이에 묻어 나온 먹물을 보고/ 웃음도 말의 한 종류라고 정했어요/ 우린 말을 많이 했어요/ 말이 선명한 검은색으로 보이는 낮에/ 말을 많이 했어요// 자주 지름길로 가려 했어요/ 그때마다 길들여지지 않은 나비들이/ 파랗게/ 여기는 아직 가을이 아니라고 말했어요// 때를 잘못 맞춰 왔지만/ 괜찮아요// 우린 그냥 산수국이 나비인 줄 알고/ 따라왔을 뿐이니까요//

나비라서 다행이에요 / 이원하
꿈에 나타난 할아버지// 내 할아버지가 맞나/ 얼굴을 하나하나 살펴보니/ 광대 근처에, 낯선 구멍 하나// 어쩌다 눈이 세 개가 되셨냐고 물으니/ 내가 보고 싶어 그러셨단다// 아프지 않으셨냐고 물으니/ 나비가 앉았다 날아간 정도라며 웃으신다// 내가 눈으로도 마음으로도/ 억장이 무너지는 듯해/ 침만 삼키고 있으니// 까닭을 알게 해서 미안하다고 하신다//

눈 감으면 나방이 찾아오는 시간에 눈을 떴다 / 이원하
남의 집 마당에 빨래가 널려있는 시간이 있고/ 유채꽃이 개나리로 보이는 시간이 있고/ 자꾸 물건을 떨어뜨리는 시간도 있어요// 입술을 자꾸 놓치는데 그 아래서/ 평면으로 된 렌즈를 끼는 시간이 있고/ 내가 다섯 걸음 걷는 동안/ 한 걸음 걷는 할머니의 시간도 있죠// 파꽃을 보면 웃음이 나던 시간 다음에/ 파꽃을 봐도 하나 웃기지 않은 시간이 잠깐,/ 혼나고 돌아와서/ 한 며칠// 굳은살 없는 빵을 먹다가/ 배에 흘린 것을 집는데/ 나보다 자꾸 먼저 가는 신발 때문에/ 할 수 없는 일들과 말들이 있다는 걸 눈치챘어요// 촘촘하고 빽빽해서/ 썼다가 지웠어요// 목이 길어지면 할 말도 많아지고/ 키도 커지지 않을까요// 목이 긴 파는 아무 말을 하지 않지만/ 뭐가 자꾸 펴요/ 대본에 없는데 펴요//

잘 만든 거짓말보다 더 깨끗하게 / 이원하
새처럼 허공에 풀어둔 기억이/ 가슴에서 시작된 습한 기운이/ 둥지를 찾는 파도의 거품이/ 섬의 난간으로 모인다// 간직할 것이 많아서 긴 바다/ 추모할 것이 많아서 긴 오로라/ 그 무엇보다 긴 한숨이/ 난간에 걸쳐진 것들의 손을 잡고 사라진다// 이제 내게 과거는 없다// 해변에 발 닿을 곳은 많지만/ 닦아낼 바닥은 없다/ 과거가 없으니 추해질 것도 없는 것이다// 지상에서 벗어나 바다의 열매가 되자/ 열매를 터뜨려 꽃을 피워내자/ 꽃이 펴지는 모습보다 더 크게 웃자// 꽃의 계절에 눈이 내리면/ 하얀 눈 덮인 빨간 우체통의 색을/ 궁금해하면서/ 기다리면 올 것 같은 것들을 기다려보자//

하고 싶은 말 지우면 이런 말들만 남겠죠 / 이원하
바다에 지금/ 물만큼이나 많은 바람이 있어요/ 생긴 걸 그대로 유지해도 되련만/ 물이 물을 더 부르네요// 그렇게 뜬 무지개// 무지개는 절대/ 바람에 밀리지 않네요// 무지개가 무슨 힘이 있겠어요/ 그저 힘을 빼버리니/ 무엇에도 밀리지 않는 거겠죠// 나도 무지개처럼 살까요// 그럴 수 있을까요, 고민하고 있는데/ 말이 한 마리 지나가네요/ 말의 발자국이 검어요 말도 고민을 하나봐요// 무지개는 다시 뜰까요/ 알고 싶어요// 핑계 맞지만 알고 싶어요/ 움직일 줄 모르고/ 사라질 줄만 아는 무지개에 대해서// 왜 오래 머물면 안 되는지//

말보단 시간이 많았던 허수아비 / 이원하
죽은 나무를 구해다 마당에 심었어요/ 죽은 목숨이었지만 발전이 있어 보였거든요// 죽은 나무는 절대/ 그 누구에게도, 하늘에게도/ 먼저 다가가지 않았어요// 덕분에 나는 죽은 나무를 보며/ 매일 안심할 수 있었죠// 대화를 위해 죽은 나무 위에/ 공을 매달았더니 생명이 됐어요// 그걸 허수아비라고 부르기 시작했어요// 드디어 내게도 친구가 생겨서/ 촛불을 켜고 축하하다가/ 그만/ 허수아비의 몸에 불이 붙어버렸어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요//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지만/ 허수아비는 그때 한마디했어요//

바다를 통해 말을 전하면 거품만 전해지겠지 / 이원하
물결은/ 내 근처에 다다라서야/ 입에 거품을 문다​// 물결은 그 거품을/ 다시 겪고 싶지만/ 돌이키지 못한다​// 며칠 춥더니/ 감기가 풀렸다​// 확실히 이번 가을은/ 나만 고독한 것 같다​// 확실하다는 말은/ 그다지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사용하며 그게 참 상관이 없다​// 감기에겐 용기가 없는데/ 나에겐 용기가 많다​// 용기가 없다면/ 어느 표정 하나를 챙겨 섬을 떠날 텐데/ 그러지 못한다​// 섬을 떠나는 일이/ 뭐가 그리 어려울까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말해주고 싶다​// 그건 너에게만 그런 일이다​//

마음에 없는 말을 찾으려고 허리까지 다녀왔다 / 이원하
하늘에 다녀왔는데/ 하늘은 하늘에서도 하늘이었어요// 마음속에 손을 넣었는데/ 아무 말도 잡히지 않았어요// 먼지도 없었어요// 마음이 두 개이고/ 그것이 짝짝이라면 좋겠어요/ 그중 덜 상한 마음을 고르게요// 덜 상한 걸 고르면/ 덜 속상할 테니깐요// 잠깐 어디 좀 다녀올게요// 가로등 불빛 좀 밟다가 왔어요// 불빛 아래서/ 마음에 없는 말을 찾으려고 허리까지 뒤졌는데/ 단어는 없고 문장은 없고/ 남에게 보여줄 수 없는 삶만 있었어요// 한 삼 개월/ 실눈만 뜨고 살 테니// 보여주지 못하는/ 이것/ 그가 채갔으면 좋겠어요//

약속된 꽃이 오기만을 기다리면서 묻는 말들 / 이원하
지금 여기는 물밖에 없어요// 물이 몇 장으로 이루어져야 바다가 되는지/ 수분은 알까요/ 오늘따라 바다가 이름처럼 광야처럼 잔잔해요// 잔잔해서 결이 없으니/ 바다가 몇 장인지 어떻게 셀까요// 이와 비슷한 여러 어려운 일들을/ 어려운지 몰라주며 세다보면/ 순간순간이 별거 아닌 것처럼/ 세다보면/ 선배처럼 될 수 있어요?// 지금 거긴 꽃밖에 없어요/ 책에서 읽었는데 수분의 기운만 있다면/ 바다를 건너 꽃밭에 갈 수 있대요/ 선배처럼// 다른 소리지만/ 자다가 들었는데 파도가 잔잔해지면/ 가슴을 쓸다가 마음이 미끄러진대요/ 선배를 바라보다보니 밤낮이 바뀌네요/ 밤하늘 촘촘 박힌 별을 보고 있자니/ 버리자니 많이 그런 어둠이네요/ 이 어둠처럼 내일 낮을 살아갈 거예요// 선배,/ 이렇게 말해본 적 있으시죠// "약속된 꽃이 왔어요."//

털어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어요 / 이원하
오늘은/ 바다가 바다로만 보이지 않네요/ 살면서 없던 일이에요// 견뎌야 하는 것들을 한편에 몰아두고/ 우연만 기다려요/ 살면서 없던 성격이에요// 사흘 전부터/ 운에 대해 생각하고 있어요// 참새가 나무줄기에 앉을 때/ 제비가 낮게 날다가 꽃에 스칠 때/ 백로가 작은 돌에 안착할 때/ 이 흔한 사건들이 매번 운이라면,// 왜 살면서 운을 못 믿었을까요/ 알처럼 생겨서 그랬을까요// 알에 금이 가듯/ 운에도 금이 간다면// 땀을 닦던 손이 차가워질 테고 이것은/ 운을 넘어선 행운이니 이 틈을 타/ 손에 앉은 서리를 녹이기 위해/ 어딘가를 툭 건드릴 텐데// 건드리면/ 들킨 마음에 맛과 냄새가 있을까요//

잘 산 물건이 있나 가방을 열어봤어요 / 이원하
먼 나라에 혼자 가는 방법은/ 나도 알고 있어요/ 재미있는 이야기 해드릴게요// 지난번에 비행기를 타고/ 어디를 좀 다녀왔는데/ 그곳 사람들이 전부 나만 쳐다봤어요// 분명 제주에서는 예쁜 천인데,/ 설마 욕은 안 했겠죠// 비가 내리는 집을 보면서/ 집을 잘 샀다고 집주인을 칭찬했어요/ 그러고 났는데, 해가 져서/ 나도 잘 산 물건이 있나 가방을 열어봤어요// 여기에 들은 것들 전부 하얗게 얼려뒀다가/ 겨울에 뿌릴 거예요// 빵을 혀로 씹어먹었어요/ 녹여 먹는 시간보다 오래 걸릴 것 같아서// 내 앞에 앉은 사람이/ 줄어드는 빵을 시계 쳐다보듯 보길래/ 이 시계는 느리게 가니까/ 다른 것 쳐다보라고 했어요// 꽃 붙었을 때 한 번 다녀왔으니/ 꽃 떨어졌을 때 한 번 더 갈 거예요//

참고 있느라 물도 들지 못하고 웃고만 있다 / 이원하
이미 하얀 집에 눈까지 내리는 건/ 어떤 소용이 있어서 그러는 건가요// 금방 사라졌다고 며칠 만에 다시 눈이 내려요/ 이번에는 오래 흘리다 가줄까요?// 눈이 쌓이는 만큼 빛은 자기를 최대한 펼쳐놓아요/ 펼쳐서 얻는 게 별로 없을 텐데도/ 사람 좋은 사람처럼 자신을 바닥에 널어놓아요/ 저렇게 물도 들지 못하고 웃으며 사는 것 좀 보세요// 눈은 그렇듯 쌓이듯 모여서/ 골목까지 아낌없이 생기를 펼쳐놓아요// 불편하면 고개를 저어도 될 텐데/ 절대 그러지 않아요/ 사랑받고 싶은 것이겠지요// 눈이 저러는 동안/ 바다는 꾸준히 여전히/ 줄었다 늘었다 반복해요/ 사느라 정신이 없는 것이겠지요// 눈 쌓인 섬도/ 살결이 푸른 바다도/ 전부 사람의 마음을 흔들지만/ 내겐 아무 소용이 없어요// 당신과 함께 보면 좋을 일들이 전부/ 사느라/ 아무 소용이 없어요//

눈물이 구부러지면 나도 구부러져요 / 이원하
메밀이 물기를 털 때 메밀은 시끄럽게 떠들어요 이곳은 메밀꽃밭이에요 메밀꽃을 사람으로 바꿀 순 없지만 구름으론 바꿀 순 있어요 바꾸고 나면 마음이 아파지죠 여러 명의 구름 안에는 내가 찾는 사람이 없으니까요 구름 위는 걷기 좋아요 걷다보면 그를 만나는 과정이 생기며 여태 이렇게 살아왔어요 걷다보면 도로도 나오고 고라니도 나오고 문제도 발생하지요 매일 밤 열두시에 발생하지요 오늘은 부디 메밀꽃을 그 사람으로 바꿔 주세요, 라고 말하게 되는 문제요// 메밀꽃을 손에 넣는 일은/ 며칠 뒤에 반드시 후회를 불러옵니다/ 꽃이란 평범한 것이니까요/ 그 사람은 사 년째 시들지 않았습니다/ 섬에 없을 뿐이지 사 년째 모래알 같습니다// 새벽을 지나가겠다고 한 적 없는데/ 시간이 새벽을 지나갑니다/ 눈물이 구부러져서 나도 허리를 구부립니다// 보고 싶다고 말하면 볼 수 있는 게/ 꽃과 해와 달입니다 술 한잔이 생각납니다// 사랑하고 싶은 잘못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나는 못됐습니다// 물기는 물방울이 되어 구를 수 있습니다/ 그걸 눈물이라 부를 수 없습니다// 이별은 풀밭처럼 생겼습니다/ 꽃이 바닥난 것처럼 말입니다//

코스모스가 회복을 위해 손을 터는 가을 / 이원하
제가 가을을 봄이라 부른 건요/ 실수가 아니에요/ 봄 같아요 봄 같아서// 얼굴에 입은 거 다 벗고/ 하늘에다 바라는 걸 말해봅니다// 하지만 하늘에다 말한 건 실수였어요/ 실수를 해버렸으니/ 곧 코스모스가 피겠네요// 코스모스는 매년 귀밑에서 펴요// 귀밑에서 만사에 휘둘려요/ 한두 송이가 아니라서/ 휘둘리지 않을 만도 한데 휘둘려요// 어쩌겠어요// 먹고살자고 뿌리에 집중하다보니/ 하늘하늘거리는 걸 텐데/ 어쩌겠어요// 이해해요/ 나름의 의미와 가치가 있잖아요/ 귀밑에서 스스로 진리에 도달하고/ 질문도 없잖아요// 그 좁은 길/ 무게 넘치는 곳에서// 질문이 없잖아요// 꺾어다 주머니에 찔러넣어도/ 내년에 다시 회복할걸요// 휘둘리며 사는 삶에는/ 애초에 비스듬하게 서 있는 것이 약이니까요//

가만히 있다보니 순해져만 가네요 / 이원하
몸을 녹이기 위해 창문을 닫으니/ 잘살아 보라는 것처럼 /뜨거운 기운이 속을 드러냅니다// 나는 가뿐해진 몸으로/ 개 대신 기르는 신경초를 건드립니다// 건드리니 신경초의 어깨가 움츠러듭니다/ 내 손이 아직 차가은가 봅니다// 몸을 제대로 녹이기엔 난방이 좋지만/ 가스통은 회색이라 아껴야 합니다/ 속을 알 수 없으니 일단 아껴야 합니다/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게 사람을 닮았습니다// 닮았다니까 좋은가요?// 움직이는 신경초가 얼마나 예민하게요// 대답해줄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눈이 내려도/ 밖으로 나와볼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무너지듯 주저앉아 울 수 있는/ 의자를 하나 살까요/ 사람 때문에 무너져본 적 없는/ 잘 살던 의자를요// 아니다. 앞으로 자주 울지 않을 거니까/ 아무 의자나 살까요/ 고민이네요/ 자고 일어나서 다시 생각할까요//

크리스마스 마켓 / 이원하
다들 마스크 크키 만큼의 자유를 잃었음에도 행복한 표정으로 질서를 지키며 분위기를 즐기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행복한 기운이 퍼져 밤하늘은 유난히 맑고 파랬다. 행복이란 감정은 참 대단하다. 다른 어떠한 감정으로도 행복한 에너지를 억누르거나 파괴할 수 없다. 파괴하려 하지 않고 질투하지 않으며 행복한 감정에 함께 물들다 보면 결국엔 세상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다. 이 감정은 고무줄처럼 늘어나고 공기처럼 퍼져 사람들 마음속 불행을 말끔히 없애준다. 행복의 힘은 강력하며 공평하다. 우리가 크리스마스만 되면 괜스레 설레고 발걸음이 가벼워지며 웃음이 터지는 이유가 행복에 전염되었기 때문이다.

동경은 편지조차 할 줄 모르고/ 이원하
첫 장면을 들추면 보인다/ 나는 알면서도 그랬다// 섬에서 살겠다고 집도 다 구했다고/ 떠들던 날의 첫 장면/ 나는 그 장면을 후회할 수 없다// 모든 첫 장면은 양초와 같으니까/ 미워하기 전에 사라지니까/ 평생 입 열지 않으니까// 낮이란 낮은/ 다 사라졌으면 좋겠다// 낮에는 자꾸 다짐하게 되니까/ 새 마음 먹게 되니까/ 내가 잘 보이니까// 자주 무섭다가/ 그 상태 그대로 매번 웃는다// 섬에 살다보니/ 섬과 처지가 같아진 것이다// 혼자 한가해서 매번 혼자 회복하는 것이다/ 섬이 되어버린 것이다// 섬이 되어버린 입장에서 말하자면/ 바다가 아름다운 이유는/ 동경이 꾀기 때문이다// 이리와서 물결을 보라/ 물결이 어떤 존재를/ 쫓는 것처럼 보이는데 잘 보라// 존재가 있을만한 자리에/ 아무 존재토 없는 것을//

여전히 슬픈 날이야, 오죽하면 신발에 달팽이가 붙을까 / 이원하
하도리 하늘에/ 이불이 덮이기 시작하면 슬슬 나가자/ 울기 좋은 때다/ 하늘에 이불이 덮이기 시작하면/ 밭일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 혼자 울기 좋은 때다// 위로의 말은 없고 이해만 해주는/ 바람의 목소리/ 고인 눈물 부지런하라고 떠미는/ 한 번의 발걸음/ 이 바람과 진동으로 나는 울 수 있다// 기분과의 타협 끝에 오 분이면 걸어갈 거리를/ 좁은 보폭으로 아껴가며 걷는다/ 세상이 내 기분대로 흘러간다면 내일쯤/ 이런 거, 저런 거 모두 데리고 비를 떠밀 것이다// 걷다가/ 밭을 지키는 하얀 흔적과 같은 개에게/ 엄살만 담긴 지갑을 줘버린다/ 엄살로 한 끼 정도는 사먹을 수 있으니까/ 한 끼쯤 남에게 양보해도 내 허기는 괜찮으니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 검은 돌들이 듬성한 골목/ 골목이 기우는 대로 나는 흐른다/ 골목 끝에 다다르면 대문이 있어야 할 자리에/ 거미가 해놓은 첫 줄을 검사하다가/ 바쁘게 빠져나가 집 안으로 들어간다//

서운한 감정은 잠시라도 졸거나 쉬지 않네요 / 이원하
추억하는 일은 지쳐요// 미련은 오늘도 내 곁에 있어요// 내가 표정을 괜찮게 지으면/ 남에게만 좋은 일이 생겨요// 복잡한 감정을 닦아내기엔/ 내 손짓이 부족해요// 용서는 혼자서 할 수 없죠/ 하는 수 없이/ 새벽 늦게 잠이 들죠// 이번 문제 때문에/ 단 몇 초 만에 터널이 막혔어요/ 괜찮은 척 해서도 어떻게든/ 터널은 뚫리지 않았어요// 영영 마주치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던 적 없으니 만나야 했어요.// 속은 한번 상하면 돌이킬 수 없어서/ 아껴야 하는데, 이미 돌이킬 수 없어서/ 목요일은 잔뜩 풀이 죽어야 했어요.// 당신은 왜 일을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외치고 싶을 때마다/ 나는 제법 멀리에 서서/ 되도록 비좁은 자리에 서서/ 가능한 당신이 없는 길에 서서// 겉보기에만 괜찮은 표정으로/ 남 좋은 일 시켜줍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겨울만 온다 / 이원하
복잡한 부분을 긁어보았지만/ 여전히 복잡해요// 나중이 되면/ 볼품 있을 건데 지금은/ 마당에 널린/ 잔가지나 다름없어요// 봄/ 여름/ 가을을/ 잔뜩 공들였는데// 이게 웬 겨울인가요// 산뜻한 걸 기대했는데/ 입 비뚤어진 겨울이라니요// 엄살에도 쉽게 따뜻해지지 않아요/ 구석에서 더 구석으로 자릴 옮겨도/ 차가운 구석뿐이에요// 삼 년 버틴 겨울이지만/ 아직 인사 나누는 사이 아니에요// 남들은 말하죠 소복하게 쌓인/ 백지 위를 걷고 넘어지는 것이/ 얼마나 괜찮냐고// 전 괜찮지 않아요// 거짓말로는 녹지 않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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