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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동확 시인
1959년 광주에서 태어나 전남대 국문과 및 같은 대학원, 서강대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87년 시집 『매장시편』을 펴내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살아있는 날들의 비망록』, 『운주사 가는 길』, 『벽을 문으로』, 『처음 사랑을 느꼈다』, 『나는 오래전에도 여기 있었다』, 『태초에 사랑이 있었다』, 『길은 한사코 길을 그리워한다』, 시론집으로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이유』, 『매장시편』 『누군가 간절히 나를 부를 때』, 시 해설집 『우린 모두 시인으로 태어났다』 등이 있다.
나의 애국가 / 임동확
이제 우리들의 애국가를 ‘봄날은 간다’로 하자// 더 이상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보우하는 하느님의 나라가 아니라/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던 날의 까닭 모를 서글픔과 아련한 그리움으로 눈물 글썽한 살아있는 하느님의 나라를 노래하자// 무궁화 꽃으로 온통 뒤덮인 삼천리 화려강산 혹은 철갑(鐵甲)을 두른 듯 바람과 서리에도 불변하는 남산 위의 소나무가 아니라/ 철 따라 살구꽃, 봉숭아꽃 피고 지는 우리나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을 가뭇없이 걸어보는 한 순정한 마음,/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어줄 줄 아는 너와 나의 가슴 속 하늘을 만나보자//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려는 혈통의 겨레붙이 또는 그 어떤 새 한 마리도 날지 않은 구름 한 점 없이 높고 공활(空豁)한 가을 하늘과 밝은 달의 우리나라가 아니라,// 지켜질 수 없으나 포기할 수 없어 더욱 아름답고 애틋한 그 맹서 또는 그 일편단심을 사랑하는 나라,// 괴로우나 즐거우나 무자비한 기상과 무조건적인 충성을 강요하는 저들만의 나라가 아니라,/ 사뭇 못 잊을 사랑 이야기 하나쯤 새파란 풀잎에 담아 강물 위로 흘려보낼 줄 아는 낭만의 우리나라를 세워보자// 그리하여 우리들 모두 제 마음속의 애국가를 ‘봄날은 간다’로 하자// 너무도 오랫동안 개인은 없고 국가만 있는, 누군가 애타게 기다리며 슬퍼하거나 기뻐할 대상조차 없는 지루한 장송곡을 그만두고/ 오늘도 청노새 짤랑대는 역마차 길의 목로에 주저앉아 꽃 편지 내던지며 한 잔의 술을 마실 줄 아는 그 하염없음과 어쩔 수 없음을 합창하자// 기껏해야 동해물과 백두산에 멈춰 있는 바다와 국경의 경계를 넘어 저 시베리아 벌판으로, 파미르 고원으로 넘어가는 고갯길마다 서 있는 봄날의 성황당,// 그저 무겁기만 한 의무감이나 밑 모를 책임감에서 벗어나 문득 별이 뜨면 서로의 등을 두드리며 웃고 또 별이 지면 서로 껴안고 울던 그 아득한 신화 속의 날들을 기억하자// 기껏해야 제 핏줄과 뱃속만을 챙기는 힘센 자들만의 나라가 아니라 행여 실없는 맹서조차 끝내 저버릴 수 없어,/ 오늘도 눈물겨운 봄날의 찬란함 또는 덧없음을 국가(國歌)로 하는 그 알뜰한 우리나라로 어서 가자//
진경산수도(眞景山水圖) / 임동확
더러 애교 섞인 목소리로 타박하기도 하는 한 인솔자의 손과 등을 붙잡은 채 겸재정선미술관 뒤편 나무의자에서 쉬고 있던 발달장애인들,/ 그러나 얼른 어른이 되고 싶었지만, 미처 어른이 되지 못한 두 어린이들이 힘겹게 올라온 초여름의 비탈길을 도로 주춤주춤 내려가고 있다.// 이따금 까닭 없이 밀려오는 슬픔의 뒷모습이 언제나 걸작인 시간의 화폭 속으로 가만 스며드는 사이.//
큰 산에 피는 꽃은 키가 작다 / 임동확
드디어 여기에 도착했다./ 아지 만질 수 없고/ 닻지 않는 거리지만/ 기억하라, 수고로운 땀의 능선/ 긴 탄식의 강물을 지나/ 도처에 일어서는 철쭉의 시위/ 그리고 은밀한 안개의 방해를 뜷고/ 뿌리 깉숙히 이어지는 햇살을,/ 이제 더 이상의 악몽은 없다/ 그대여 상처받기 쉬운/ 지난날들을 되돌아보지 말자/ 그러나 한 생명도 빠뜨리지 않고/ 제각기 피어나 강력한 군집을 보라// 거기 진리의 꽃무덤을 쌓고/ 다시 비바람치고 새 우는 저녁/ 스스로를 벼랑 위에 세운 채/ 자비를 구하며 지는 그늘 하나여.//
한 줌의 도덕 / 임동확
타클라마칸 사막을 횡단하던 도중 중간 휴게소였던가/ 사막을 길게 가로지르는 도로 한 켠의 수로를 파기 위해,/ 단 한 명의 인부가 허리 굽힌 채 연신 곡괭이질 해대고,/ 단 한 명의 감독관이 그걸 바짝 감시하는 풍경과 마주친/ 어느 여성시인이 버스에 올라타려다 그만 펑펑 울음을 쏟아냈다//
사월의 바다 / 임동확
검고 힘센 수심의 아가리가/ 입 벌리고 있을 뿐인 사월 바다엔/ 나는 없다, 나를 찾을 길 없다/ 힘없는 시간의 난간마다 펄럭이는/ 빛바랜 노란 리본들만 펄럭일 뿐/ 난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오히려/ 결코 피할 수 없는 큰 눈이 깜박일 뿐이다/ 이제 세상의 눈길이란 눈길을/ 하나의 망막으로 결집하는,/ 더 이상 그 어떤 예언도, 기도도/ 가닿지 못하는 시선의 사월 바다엔//
너를 기억하는 동안 / 임동확
간밤에 네가 흘리고 간 머리칼 하나가 갑자기 동아줄 되어 날 꽁꽁 묶는다. 벌써 네 몸을 떠난, 너와 무관해진 하찮은 사물 하나가 화물선을 꼼짝없이 붙드는 닻줄처럼 돌연 목을 휘감고, 마치 용서받지 못할 중죄인이라도 된 듯 두 손을 결박해 거칠게 거리로 끌고 간다.// --- 그렇게 어딘가에 스며져 있을 네 한 방울의 땀과 피는 모든 불순물을 녹여 황금빛 추억을 걸러내는 수은과도 같은 것. 진정 피하고 싶지 않은 고독 혹은 양보할 수 없는 자존 속에서 저를 관통해간, 그러나 먼지처럼 가벼운 네 흔적일지라도 살아 가슴 속에 머물러 있는 그것만이 진실인 것을.// 보라, 그러니 너를 기억하는 동안에는 이미 진부해진 가난한 시대의 희망마저 가장 아름다운 이상으로 반짝인다. 너와 사랑의 키스를 나누는 동안에는 얼핏 흘러나온 FM 라디오 음악이 모든 비속한 열정마저 천국처럼 드높인다.// 순간적이나마 검은 네 곱슬머리에 꽂힌 머리핀 하나가 세상의 모든 꽃으로 엮은 화관처럼 다가온다면 난 홀연 광인처럼 불가능한 자유 또는 죽음에 홀리거나 사로잡힌 자.// 이제야 난 앞서간 고구려 탐사단 일행이 알몸으로 타클라마칸 사막의 모래언덕을 소리치며 뛰어다닌 이유를 깨닫는다. 우연히 창문을 두드리는 빗방울 하나가 자꾸 고쳐가며 완성해가는 원고 같은 생의 한 순간을 붙들거나 정지시키는 걸 느끼면서.//
용산역 / 임동확
제가 가진 최후의 염치와 자존을 지켜갈 줄 아는 미래가 남아 있는 한,/ 용산역은 더 이상 동정의 눈길과 연민의 거처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던 그날 밤.// 광주발 서울행 마지막 열차에서 내려 광장 한 구석에서 서서 담배 한 대 피우고 있을 때였습니다. 행색 초라한 칠십대 후반의 노숙자 노인이 다가와 담배 두 개비만 구걸했습니다. 때마침 팔십 노모의 간곡한 부탁을 듣고 난 후여서, 난 별다른 주저 없이 몇 개비 남지 않은 담뱃갑을 통째로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노숙자는 한 개비는 자신의 입에 물고, 한 개비는 나란히 앉아있던 오십대쯤 보이는 여성 노숙자에게 건넸습니다. 그리곤 곧장 일어서더니, 그 노인은 필시 대리석 계단의 냉기를 막아줄 방석이자 시월 밤의 찬 이슬을 막아줄 침구이기도 할 영주 사과박스 골판지에 앉아 편안히 남은 담배를 다 태우라고 했습니다. 마치 꺼져가는 불빛처럼 희미한 그의 체온이 분명 스며 있을 그 자리에 잠시 쉬었다가기를 정중히 청했습니다.// 적어도 그 누구에게든 나눠가질 답례품 같은 예의가 하나쯤 남아있다는 듯 한사코 바쁜 발길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은 하루였습니다.//
이수역 / 임동확
왜 후회는 늘 몇 구간씩 늦는 것일까/ 그때의 준비 없는 이별만큼 뜻밖의 재회 또한 그 어떤 말로도/ 변명되지 않아 망연자실 서 있던 이수역// 그러나 널 그리기에 내 속에 네가 살아 있는 건 아니다/ 연이어 들어오는 오이도 또는 당고개행 전철처럼/ 어차피 되돌아오지 않거나 순환하지 않는 것들이란/ 저 두려운 터널 같은 기억 속에서 제 힘으로 푸르른 것// 그렇듯 너와 난 처음부터 하나가 아니다/ 혹은 넌 어긋난 나의 열망을 채우는 저당물도 아니다/ 내가 네가 아니듯 넌 나의 소유물이 될 수 없는 것/ 끝내 되돌리거나 이뤄질 수 없는 운명만이 진실이다// 너와 나 사이엔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있기에/ 아무것도 잊지 못한 채 장승처럼 변변한 작별인사조차/ 건네지 못한 한 시절의 열망과 금기를 노래한다/ 제아무리 원한다고 해도 상관없다는 듯 잔인하게/ 흘러가며 호소하는 것들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결코 하나일 수 없기에 붙잡을 수 없는 널 보내며/ 길어진 후회의 간격만큼 내가 아닌 너를 부른다/ 결국 너일 수밖에 없는 너를 통해 난 멈춰진/ 그 추억의 바깥으로 노숙자처럼 거칠게 끌려나간다/ 내 안에 더욱 커진 부재 속에서 소경처럼 널 찾으며//
말뚝망둥어 / 임동확
누군가 보기에 필시 목선 한 척 갯벌에 처박힌 채 대책 없이 낡아가는 순천만 한 구석// 위태롭고 초라한 오막살이 구멍 한 채는, 노을 지는 가을 하늘보다 붉고 성난 파도보다 힘센 영혼의 식구들이 깃들기에 넉넉한 크기와 체온을 가진 살림집이었지요// 거기서 난 밀물 드는 밤이면 아가미로 숨 쉬며 비할 데 없이 평화로운 침묵을 즐겼던 게으름뱅이,// 잘 발달한 가슴지느러미를 끌과 정으로 찰진 갯바닥에 일생의 비밀을 새겨놓거나 꼬리지느러미를 치켜세운 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그만 먼 수평선 혹은 지평선에 갇혀 어쩔 줄 몰라 하던 어린 말뚝망둥어,// 때로 발정기의 암컷을 두고 등지느러미를 꼿꼿이 세운 채 꼬박 한 나절 동안 으르렁거렸던 한갓 불량한 수컷일 뿐이었지만,// 때때로 먹이를 잊은 채 물 밖 갈대줄기에서 몸 말리며 벅찬 자유의 아침 공기를 맘껏 호흡하던 난 정녕 행운아였던가요// 결코 어느 수족관에서도 사육될 수 없는 소중한 꿈 하나를 품에 끌어안은 채 연신 물거품이 솟구쳐 오르는 버블 어항의 한 모퉁이 죽음보다 깊은 겨울잠을 청하고 있는, 뭍과 바다 그 어느 곳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튼튼한 영혼의 폐를 가진 난.//
희미한 시간 너머로 우거진 / 임동확
너를 떠나보내야 했던/ 지난 세월 동안에도/ 다시 보이지 않는 너로 하여/ 나는 오래 아파오고,/ 지루한 장마의 구름층을 비집고/ 쏟아지는 여름 햇살처럼 따갑게/ 때때로 격정의 순간들을 반추하며/ 감당할 수 없이 깊고 푸르던/ 너의 들숨을 느낀다. 그리하여/ 차츰 부끄럼에 둔감해져가는/ 소년처럼 그렇게 대담한 표정을 지으며/ 너의 이름을 나직이 불러본다/ 그러나 내 수고는 헛되고 헛되/ 어느새 희미한 시간 너머로 우거진/ 그래 우린 억울하게도/ 옛사랑의 오솔길을 거슬러오른다/ 죄 없는 청춘의 한때를 마구 학대했으나/ 벌써 아무렇지 않다는 듯/ 세상은 여전히 딴청이다/ 그 골 깊은 그리움의 가을길엔/ 이미 팔짱낀 연인들로 떠들썩하고/ 정녕 돌아갈 때마저 놓치며/ 서로의 매력을 탐하는 환한 웃음 소리들/ 전혀 새로운 열망으로 달아오른/ 낯선 세대들의 입맞춤만 가득하다/ 그러나 난 그게 좋아졌다/ 어디서도 위로받을 수 없어/ 낙엽처럼 뒹구는 기억들이여/ 우리 제각기 아름다운 상처로 꽃피어/ 더욱 무성한 동산을 이루었나니/ 너로 하여 더 먼 들길로 나가/ 황혼 무렵 둥지로 무리지어 날아드는/ 즐거운 새떼의 환영을 보았나니//
희망사진관 / 임동확
-아직-아님으로서의 아님은 생성된 존재를 가로질러간다 (에른스트 블로흐)//
단지 그렇게 기억되고 있을 뿐/ 결국 방향이 없는, 그리하여 종말이 없는, 단 한 번도 인화되지 않은 것들이 추억일까/ 어느 정지된 순간에 대한 덧없는 집착이 희망의 정체였을까/ 서울 출장길 늦은 귀가의 택시 속에서 만난 신안동 고갯길/ 희망사진관의 입간판이 낯설다; 아니, 정확히 말해/ 희망이란 낱말이 왠지 낡고 생소한 느낌이다// 그런데도 길거리로 향한 형광 불빛 속에 드러난 사진의 얼굴들은/ 어찌하여 모두들 오래 행복한 표정들을 짓고 있는 것일까/ 어찌하여 그 많은 잊고 싶은 것들 속에서도/ 저처럼 끄덕없이 변치 않은 열망들로 살아 있는 것일까// 그러나 이제 죽도록 미워할 사람도/ 사랑할 사람마저도 없는 내게 지금 묻는다면,/ 내가 짓뭉기고 외면해온 시간의 흔적들밖에 더 말할게 없다/ 심지어 죽음마저도 뚫고 들어가지 못한 마음속으로/ 여전히 아니라고 도리질치며 지나가는 매서운 북풍소리/ 가장 가까운 것들조차 따스하게 대하지 못했던 불구의 시간들을 고백하고 싶어진다// 보라, 그러니 저 사진틀 속에 영원히 멈춰 있는 것들조차/ 이미 존재했던 것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그건 오히려 미처 드러나지 못한 요청이었을 뿐// 여전히 우릴 살아 불타게 하는 것들은/ 저 스러질 듯 서 있는 현실의 희망사진관 너머/ 아직 기억되거나 생각나지 않는 낯설음 속에/ 모든 희망들이 추문이 된 바로 이 세월의 그리움 속에/ 끝내 지워지지 않을 무모한 절정의 섬광들로 빛날 뿐//
무영탑 / 임동확
흔적 없는 슬픔도 때론 저렇듯 천년의 수직탑으로 우뚝 서 있다/ 그러나 이제 나의 안식은 목구멍에 피가 넘어오도록 게우고 난 뒤의 회한 같은 거/ 그 부질없는 시간의 속량속에서 나는 잊혀져 가는 것들에 저항하는 법을 배웠고,/ 동시에 그림자 속의 그림자로 남는 추억의 아름다움을 알았다/ 여기, 지상의 모든 희망이 절망의 다른 얼굴임을 보여주듯/ 오직 측량할 수 없는 과거만이 진실인 기억의 층계여/ 아무리 기다려도, 누군가 몸을 던진 그 늦가을 못물 위로 몸/ 체 없는 그리움의 석불 아로새길 돌덩이 하나 떠오르지 않아/ 그래도 다 어쩌지 못한 마음의 발자취를 따라 여기에 이르렀느니/ 재빨리 제 그림자를 거두워가는 저 11월의 저녁노을 속에서/ 도 홀로 남아, 끝끝내 지켜내야 할 그리운 약속이 있었으니//
북 / 임동확
원하기만 한다면, 난 미래의 시간을 낚는 어부, 영광된 과거를 놓아주지 않는 거만한 황제, 늘 재고로 쌓이곤 하는 현재를 서둘러 처분하려는 상인, 혹은 때와 장소에 따라 난시청지대의 TV 안테나를 타고 기어오르는 나팔꽃이거나 적대적인 세계의 장력 가속을 아무렇지 않다는 듯 가로질러가는 도둑고양이. 내리칠수록 더욱 힘을 내는 팽이처럼 난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생의 소용돌이를 반긴다. 단 한 번의 상처도 받지 않는 것처럼 돌연 푸른 강물로 흘러가거나 때로 그 어떤 슬픔도, 부정도 없는 절정의 난타를 즐긴다. 난 빠르고 세차게 두들기면 두들길수록 미처 예기치 못한 불꽃의 리듬, 말할 수 없는 말의 맥박들로 불끈 일어선다. 아예 처음부터 고통이나 아픔 따위와 무관하다는 듯 매 순간 극단에서 극단의 율동으로 치달으며 길가의 미루나무처럼 뻔뻔하게 굴어댄다. 도대체 염치라곤 모르는 철부지들의 열애처럼 낯선 이들의 눈치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연신 소리의 혓바닥을 내밀기에 급급하다. 오직 타격하는 손길과 속도에 따라 여전히 하늘과 땅 사이를 새처럼 겉돌거나 불현듯 나조차 알 수 없는 영원한 시간 속으로 질주해 가는 내가 보일 뿐, 끝없는 부재가 부재를 부르는 나의 진동 속엔 풀리지 않은 원한이나 원망은 없다. 이제 더 이상 종족의 울음이, 결핍의 역사가 새겨져 있지 않다. 억제하기엔 너무나도 힘든 무한한 긍정과 자유의 내 살가죽 속엔.//
저녁의 노래 / 임동확
눈 감으면 날마다 반복되는 저녁이/ 전혀 다른 저녁의 얼굴로 다가오리/ 그 저녁이 깊어질수록 아주 단순해진 외로움만/ 그만 꿈을 잊는 머리 위에 새벽별처럼 빛나고/ 더러 용서받지 못할 열애의 날들도/ 덧없이 숨죽인 강물처럼 흘러가리/ 결코 제 것이 아닌,/ 소유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는 것들이/ 그래서 더욱 아름다워지리/ 곧잘 검은 세월의 거울 깊숙이 출몰하던/ 저 무거운 기억의 편린들마저도/ 불현듯 여름 밤하늘의 천둥 번개처럼 번쩍이리// 아아, 그러나 유한한 너와 내가 어쩌다가/ 온갖 부조리한 운명과 사나운 무한이 기다리는/ 이 찬란한 고요와 함께 마주하고 있는가/ 정녕 환하기에 더욱 놀랍고 두려운 사랑의 밤이여// 더 오래 견디기 힘들면 별빛 쏟아지는 강가로 나가/ 네가 남기고 간 한 권의 책 같은 남빛 우산을 펴리/ 그러면 비로소 맹목인 내 입술이며 그토록 사납게 뛰던 심장마저/ 수줍은 흑암처럼 눈을 감고/ 드디어 제 안에서 터져 나오는 소리에 귀 기울이리/ 눈 감을수록 더 생생한 침묵의 빛 속에서만 온전히 넌/ 네 차지리.//
지상의 가을날 / 임동확
잠시 세들어 사는 지상 어디서든/ 갓 살림 차린 새색시가 처음 내다 말린/ 빨랫감같은 미처 여물지 못한 색색의 꿈들이 요동친다/ 필요 이상으로 사들이고 쌓아둔 현세의 소유물들을/ 가차없이 폐기처분하고 혹은 나눠주면서// 돌아보면 독촉장 날아드는 빚더미뿐인/ 생의 기억들이었으나마 잘 염습해 장례 지내며/ 저 눈부신 폐허와 위대한 모순의 꽃향기들/ 다급하게 보챌수록 더 늑장 부려서/ 마지막까지 오래 빛나는 남도의 낙엽들/ 수줍음으로 더욱 벌겋게 얼굴 달아오르고// 아직도 다 오르지 못한 저 푸른 하늘 너머/ 그만큼 고단했을 꿈의 사다리를 편다/ 결코 다르지 않을 세월의 골목길마다/ 도대체 기대하지 않은 불행의 앰뷸런스가/ 경적을 울리며 기세 좋게 달려나간다/ 그러나 하느님 보시기에 틀림없이/ 누구든 충분히 너희들 세상이었다고 단정했을/ 찬란한 날들이 무작정 흘러가고 있었으니//
나는 오래 전에도 여기 있었다 / 임동확
누가 이 깊은 밤 핸드폰 벨을 다급히 울리나// 나 한 순간도 수꿩 울음 끊이지 않은 사월의 뒷동산/ 금세 피었다 지는 개나리꽃이나 그 울타리 아래/ 수줍게 고개 내민 제비꽃처럼 그렇게 너와 함께/ 질긴 그리움의 천을 짜며 노래하고 있었거늘// 누가 슬피 울며 어디로 날 찾아다니는가/ 네 집앞 은행나무 사이 나트륨 가로등처럼 그렇게/ 곧잘 술 취해 담벼락을 더듬으며 귀가하곤 하는/ 너의 모습을 가만 지켜보며 여기까지 왔거늘// 아, 그러나 어느새 이리 늙고 병들고 눈먼 것,/ 오늘 다시 너와 마주앉아 오래 아파하는 것/ 그 어떤 몸짓 하나 너와 무관하지 않거늘// 급기야 그 누가 잠긴 방문을 차고 들어오려는가// 피할 수 없는, 피해갈 수 없는 세월 속에서/ 오래 전에도 나는 여기 있었고,/ 앞으로도 차마 떠나지 못해 여기 남아있을 것이거늘/ 단 한번도 쉬지 않고 오직 너는 나의 너였거늘//
만경평야 / 임동확
견디기 힘든 그리움 같은 거/ 노여움 같은 거, 그만 잊으라는 듯/ 새마을호는 건성으로 세상 속을 가로지르며/ 낡고 초라한 기억의 역사(驛舍)들을/ 빠르게 후진시킨다. 그러면서 한결 안락한/ 지정석에 오랜 격정으로 덧난/ 지난 세월들을 털썩 주저앉힌다/ 그러나 잔정에 붙들린 세속의 날들이여/ 우린 아무 것도 뿌리치지 못해/ 이렇게 끌려가듯 멀리 떠나가고 있다/ 서로가 서로를 모르는, 아니 모른 체하는/ 심연의 고속 열차에 피해가듯 몸을 맡긴다/ 그런데 어쩐 일인가, 그 슬픔과/ 절망의 넓이만큼 너른 초여름의 들녘/ 오후 6시의 창 밖으로 틈입한/ 한 아낙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논바닥에서 허리를 꼿꼿이 편다/ 그 막막한 생의 한가운데로 집중되는/ 폭염을 머리수건 하나로 막아내며/ 힐끗 고개를 돌린다/ 에잇, 잡것들 뭐가 그리 심각해/ 야유의 손사래라도 보낼듯한 그런 얼굴로/ 무심히 손에 쥐었던 방동사니며/ 논풀들을 힘껏 강둑으로 내던진다/ 그까짓 해묵은 아픔 같은 거/ 치욕 같은 거야, 한낱 엄살이고/ 사치라는듯 상행선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문득 거대한 비유로 부풀어 오는/ 만경평야 한 구석을 지켜서 있다/ 그리하여, 삶엔 어떤 기적도/ 지름길도 없을 수 없다는 듯이/ 아직도 이곳엔 얼마든지 변하면서/ 또 변하지 않는 중심이라도 있다는 듯이/ 그렇게 오래 진흙탕에 붙박혀 서서,//
끝나지 않는 시간 / 임동확
비록 아주 늦는다 해도/ 서릿발 성성한 이 밤을 지나, 십 년/ 아니 그보다 세월이 더 흐른다 해도/ 그대 정녕 안녕만 하다면/ 그저 막막한 예감이 아니라/ 꼭 온다는 확신만 선다면/ 내 외롭지 않으리, 아무리 힘에 부쳐도/ 저 불 켠 그리움의 택시가/ 자꾸만 초조해진 기다림을 배반한 채/ 다른 아파트 입구로 들어서더라도/ 내 미워하고 탄식하는 일조차/ 오래 사랑하리, 위로받을/ 단 하나의 별빛마저 어두워져/ 날 밝은 세상 속으로/ 저 혼자서만 야속하게 합세해가도/ 천 길 절벽의 진달래처럼 홀로 붉으리/ 못내 꽃피는 그날이 최후인/ 대꽃 같은 운명이라고 해도/ 더딘 그대의 소식 원망하지 않으리/ 끝끝내 살아만 온다면/ 그리하여, 이 못 믿을 내 마음 안으로/ 그대 구원의 초인종 소리 한 번/ 아주 길게 울려줄 수 있다면//
방어할 수 없는 부재 / 임동확
세월이 세월인지라/ 모든 게 물 속의 잉크가 풀리듯/ 무엇이든 자꾸 묽어가는 게/ 탈이라면 탈이다. 어떤 식으로든/ 그만큼의 시간이 흐른 것이다/ 그래 이제들 내가 아니라/ 네놈이 누구냐고 是非를 걸고/ 그렇듯 우린/ 마치 고장난 축음기판이라도 되는 듯/ 여기저기 찌지직, 긁히는 소리, 악다구니다/ 지나온 자리를 더듬어가듯/ 제 뱃속으로 죽은 고기의 내장을/ 꾸역꾸역 밀어넣거나 혹은 토해내며/ 막 깐 새끼거북이처럼 온몸에 진흙을 처바른 채/ 모두가 필사적으로 시간 속을 기어오른다/ 차마 그런 축에 못 끼는 자가/ 추하게 보일 만큼 절정인 食道인 것이다/ 살아 있는 것만이 전부라는 듯/ 당한 자만이 억울하다는 듯/ 그 동안 의례적이라도 비워둔 자리마저/ 전혀 낯선 얼굴이 차지해버린 것이다/ 아니 방어할 수 없는 부재를 불러내어/ 멋대로 처벌까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새벽녘에 꺼져가는 화톳불과도 같이/ 망각의 재로 풀풀풀, 꺼져가는 존재들이여/ 그래 살아만 있거라, 오물 범벅의 양복 깃을/ 화장실 수돗물에 씻으며 목숨의 신을 섬겨라/ 어짜피 악연인 세상 속에서/ 그것 외에 별다른 방책이 없으리라/ 누구든 두 번 몸 받지 못하리라//
손금 / 임동확
그건 헤아릴 수 없는 눈물선들을 풀어놓은 길// 그건 고향 들판을 가로질러오던/ 희미한 기억 속의 삼종 기도 종소리 같은 거-// 이제 병상에 누운 늙으신 어머니의 손을 잡고/ 이내 허공 속으로 사라져갔으나/ 내 마음 깊숙이 남아 흐르는 그 노랫소릴 듣네// 살아 있는 한 어쩔 수 없이 허리 굽혀/ 지나가거나 통과해야 할 시간의 성문 아래서/ 어디로 방향을 잡든 그 무한의 흰 물줄기와/ 맞닿아 있는 내 영혼의 자궁을 더듬어가네// 어느새 그 경계가 불투명해진 손금마다/ 튀어 오르는 꺼지지 않는 푸른 인광을 보네//
눈길 / 임동확
나만의 길을 찾다보면/ 자칫 다른 길로 접어들 수 있겠구나/ 눈발 흐리던 십이월의 퇴근길/ 뻔한 구역이었는데도 한참을/ 남의 아파트 입구서 헤매다니/ 실수라고 치부하기엔/ 자꾸만 늘어가는 나의 해프닝들/ 그러나 인력으로도 안 되는 게/ 운명이라는, 역사라는 금기의 말들이/ 불쑥불쑥 고개를 쳐들수록/ 세상을 일사천리 질주하는 것만이/ 생의 전부는 아니지, 자위하곤 했는데/ 그날이다; 그저 버릴 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 삶의 한구석/ 찢긴 비닐 하우스 속을/ 어슬렁거리던 똥개 한 마리/ 컹컹, 제 갈 길을 엿보며 짖어댄다/ 마치 웬 방해물이냐는 듯/ 아니면 내 공포심의 증폭을 기대라도 하듯/ 제법 사나운 기세를 취한다/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뜻밖의 미로에 닿을 수 있음을,/ 결국 나를 넘어서지 않고선/ 어느덧 벼랑으로 내몰릴 수 있음을/ 경고한 그날 저녁에//
폐어(肺魚) / 임동확
살아 있는 화석이라는, 교활하기 그지없는 폐어엔 여느 물고기처럼 지느러미와 부레가 달려 있다. 그래서 용존산소가 풍부한 물 속에선 당연히 아가미로 숨을 쉰다. 그러나 건조기가 되면 물웅덩이 바닥에 가만 엎드려 있거나 아예 진흙 구멍 속에서 부레로 공기호흡하며 긴 휴면에 들어간다. 평소 제 몸이 물 속에서 뜨고 가라앉는 것을 조절하는 부레가 인간의 폐처럼 기능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폐어는 어찌하여 평소 담수어로 지내다가 다급하면 양서류처럼 부레로 공기호흡하는 생물이 되고자 했을까. 고문으로 숨진 포로 곁에서 환하게 웃으며 태연히 기념사진 찍는 병사와 신의 이름으로 참수한 시체에 부비트랩을 설치하는 광신도가 공존하는 이 잔혹극의 시대. 어류와 고등척추동물의 진화를 연구하는 척도라는 폐어의 이 놀라운 생존술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다시금 폐를 부레로 사용할 수 없는 한뎃잠의 포유류들이 집단으로 해병대 극기 훈련을 받는 장면이 TV 화면에 클로즈업되던 날. 여전히 용불용설(用不用說) 또는 진화론과 사통(私通)해 낳은 미숙한 한 세기의 폭식증 또는 거식증을 과연 뭐라고 두둔해야 하나.//
바다로 가는 길 / 임동확
돌아보면 끝없이 등 떠밀려 오면서/ 바다에 이르는 길이었음을 깨닫느니/ 때로 제 뜻이 아니었을 운명의 협곡을 거슬러 오르는 물고기 같은 긴 여행의 모험에 기꺼이 따라 나서며 기뻐하기도 하고/ 내 그걸 애써 추억이라 부르며 눈물 글썽이기도 했었으리/ 한 줄기 바람에도 쉽게 들뜨거나 절망하며 오래 방황하기도 했거니와/ 어쩔 수 없이 넘쳐나던 마음의 지류들로 흐르고 흘러/ 기어이 더 크고 물살 센 강물로 합류하던 나날들이었나니/ 더할 수 없는 치욕 속에서도 나의 뼈는 굵어갔고,/ 여전히 놓아주지 않는 그 어둠의 양식이 내 영혼을 흠뻑 살찌웠으리/ 끝내 붙들지 못해 떠나 보내고, 차마 뿌리치지 못해 여기까지 끌고 오는 동안/ 어느새 내 사랑의 수심은 더욱 깊고 고요해져갔으리니/ 지금도 내게 더러운 모욕과 차거운 조소의 눈길을 던지고 가지만/ 그러니 어떠한 말로도 날 위로하려 들지 마라,저 거친 물결은/ 내 온몸 곳곳에 박힌 성난 개 이빨 자국들을 부드러이 핥아주고/ 진정 항의 한 번 제대로 못한 세월의 징검다리를 훨훨 건네주는 뗏목의 흰 돛폭이 되어주었으리니/ 설령 도대체 썩을 줄 모르는 플라스틱 병 같은 슬픔의 잔해뿐이었을지라도,/ 잠시도 쉴 새 없이 소용돌이치는 크고 작은 물목을 거쳐오는 동안/ 마침내 그 누구든 기적처럼 깨끗해져 아름다워져 있을지니/ 미처 제지할 틈 없이 잘게 바수어지고 구겨진 채 여기에 다다랐을지라도,/ 그새 낮고 둥그러져 더욱 자유로운 그 바다와 마침내 만날지니//
길은 한사코 길을 그리워한다 / 임동확
다가설수록 멀어지는 지평선처럼 단지 접근 불가능한 절대 고독의 근원 혹은 알 수 없는 전망의 바탕을 암탉처럼 품고 있는 길.// 험하거나 평탄한 길들이 안겨주는 가장 값진 선물은, 놀랍게도 예정된 결말이나 확신에 찬 기대를 가차 없이 저버리는 뜻밖의 경험이다.// 해피엔드로 끝나기 마련인 싸구려 영화와 달리, 어떤 길이든 늘 아직 때가 이르지 않는 출발 혹은 이미 지나쳐버린 종말을 들키고 싶은 비밀처럼 감추고 있다.// 뒤늦게야 조수 겸 아내인 착한 젤소미나를 잃고 만취한 채 바닷가에서 회한의 눈물을 흘리는 차력사 짐파노의 속죄이든*, 감옥에 간 자신을 기다리다 못해 배고파 외간남자에 몸을 판 아내의 불륜을 끝내 용서하지 못하고 고향 가는 눈길 속에서 죽어가게 한 남편 세이트알리의 절규이든,**// 결코 원하지 않았을 그 사태들조차 들판 지나 산맥을 넘어가는 전선들처럼 또 다른 비밀의 정점으로 길게 뻗어 있다.// 지금 내 앞에 끝이 보이지 않는 한계 또는 방랑이 또 다른 출발의 경계라는 듯 내륙의 길이 끝나는 곳에 물길이, 물길이 다하는 곳에 하늘의 길이 다시 한 번 미지의 지상과 길게 입맞춤하고 있다.// 한사코 길을 그리워할 따름인 길들이 길과 만나지 못하면 결코 길이 아니라는 듯 힘든 처방의 이정표처럼 서성거리고 있다.//
* 이탈리아 영화 <길>의 주인공들
** 터키 영화, <욜(yol)>의 남자 주인공
별사(別詞) / 임동확
너를 생각하면/ 아직 다 용서받지 못한/ 세월 너머로/ 떠도는 슬픔의 유령선들// 밑 모를 그리움만/ 千里萬里 뻗어가고/ 도대체 꿈에라도/ 反轉이 없는 심연// 너를 생각하면/ 벌건 대낮에 죄 없이/ 막다른 골목으로 쫓기다가/ 네 몸 깊숙이/ 파고들던 그날들// 물 한 모금 못 넘기며/ 하숙방에 누워 있을 때/ 문득 방문을 열고 들어와/ 병든 날 일으켜 세우던/ 네가 떠오른다// 그러나 이젠/ 갑작스런 폭우에/ 놀라 깬 그 여름 밤/ 등에 업어 급류를 건네주던/ 네가 없다// 불쑥 들어서면/ 앞마당을 쓸다가도/ 환한 웃음을 건네주던 대신/ 사월의 꽃그늘 아래/ 응답 없는 푸른 무덤만/ 동그마니 남아 있다// 너를 생각하면/ 필사적으로 도망쳐도/ 끝내 제자리를 맴도는/ 시간의 소용돌이가 보인다//
우린 어떻게 무너지고 있는가 / 임동확
금가고, 갈라지고, 무너져 간다/ 결코 용서할 수 없어 시멘트 덩이처럼 굳어버린/ 마음의 담장 너머로 다시 바람이 들이치고/ 그래도 다 못지운 깨끗한 희망처럼 눈이 내린다/ 모든 것을 내다버리고만 싶은/ 12월의 창문 밖으로/ 어쩌면 부인하고만 싶던 내 핏빛 청춘의 중심에/ 우뚝 서있던 슬픔의 구층탑이 서서히 기울어가고/ 어쩌면 처음부터 감당할 수 없는 제 무게로/ 끝간 데 없는 해저의 심연 속으로 침하하고 있었거나,/ 지레 거슬러 오를 수 없는 해류 위를 떠돌았을 기억의 빙산들/ 그렇게들 살아오긴 했겠지만, 그러나 들여다볼수록/ 그럴듯한 확신이 아니라 제각기 다른 인내와 슬픔의 뿌리로/ 더욱 깊고 높게 직립할 수 있었던 생의 가로수며/ 끝내 주저앉을 수없었던 삶의 교각들이 보인다/ 그러나 갑자기 아비의 품에 안기길 꺼려하는/ 딸들처럼 어느새 허벅지가 굵어져 있고/ 남몰래 초경을 겪으며 날로 새롭고 낯설어 가는/ 시간 속에서 나는 쉴 새없이 제공되는 화면에/ 이리저리 채널만을 돌리고 바꾸고 있을 것인가/ 세상의 틈새란 틈새를 메꾸고 가득 채우며/ 어지럽게 쏟아지는 흰 눈발의 들판에 서니/ 빌어먹을!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린 조금씩/ 제 의지와 상관없이 죽음의 하구 쪽으로 밀려나왔다니/ 그리하여 늘 처벌받듯 서잇는 나목처럼/ 기껏해야 자비나 빌며 여기에 이르렀다니// 모든 것을 또다시 시작할 수도 있음을/ 문득 생각해보는 歲慕의 유리문 너머로/ 때아닌 폭설 속에 점차 희미하게 가려지는 길,/ 때로 터지고, 찢겨나가고, 쪼개지면서/ 늦터지게 꽃을 피우고 향기를 발하는/ 한 세기가 역사처럼 흘러가고 또 밀려온다/ 찢기고 허물어져 가는 육신의 주름살 속에/ 안간힘하듯 새겨진 지난 세월의 주름살들/ 누구도 비켜 갈 수 없는 거울의 증언대를 본다//
그날의 일기 / 임동확
오늘은 우리가 졌다고 하고/ 어느 날쯤 어딘가에 램프라도 켜 두었다고 하자/ 마침내 우리가 쓰러지고 죽어 가/ 아픈 기억만 남았을 때/ 길고 오랜 싸움에 지쳐 외로울 때/ 흐르는 강물 마른 갈대숲에/ 다소곳이 누워 보기라도 하자/ 어차피 돌고 도는 세상의 승패에 대하여/ 역사에 대하여/ 꿈꾸는 것과 침묵하는 일만 남았다고 써 두자/ 풀잎 같은 이 목숨/ 풀잎처럼 작고 쓰린 환한 미래를 위하여/ 올바른 증오를 위하여/ 언젠가 착한 소녀가 울며 기도하고/ 용서받을 수 있는 고해소가 있는 나라를 생각해 두자/ 내 땅의 이웃들이 서로 미워하고/ 헐뜯고 꼬집으며 살아온 모든 비애와 슬픔이/ 모두 우리들 운명이라 해 두자/ 아무도 이날의 뜨거움과 분노를/ 그날의 죽음과 함성을 못 잊는다고 해 두자/ 서로가 서로의 증인이 되어/ 가고자 하는 길은 하나이고/ 그 길은 바뀔 수도 없었다고/ 멈출 수도 없는 것이라고 다짐해 두자/ 기다림과 그리움이 전부인 내 나라/ 보리죽만 먹던 서러운 하늘에 서서/ 오늘은 졌다고 하고/ 오늘은 아무것도 안 보았다 하자/ 그대여, 오늘은 무효라고 해 두자//
금남로에 서서 / 임동확
그대와의 결별을 선언할 땐 그랬습니다/ 다시 피 흘리는 전쟁이 죽기보다 싫어/ 기다림과 그리움으로 채워진 조국의 밤이 너무도 고되고 길어/ 아, 이제는 피비린내 가득한 거리를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그 후 나는 석삼년 동안을 군대 생활로 메웠습니다/ 그럭저럭 복학해 뒷전에 물러나 일 년을 보내다가/ 그것마저 포기하고 해남 대흥사 암자에 은거하다가/ 어느덧 9년 만에 대학 졸업장마저 손에 쥐었습니다// 나를 그토록 초라하게 만든 도시,/ 스스로 일어서야 했던 거센 운명의 싸움터/ 그곳에 서서 그대들에게 묻습니다/ 우리는 그때 사랑의 전부를 보지 않았던가요/ 우리는 또한 사랑의 최후를 목격했던 것 아닌가요// 그러나 섣불리 우리들의 과거와 미래를 단정해선 안 됩니다/ 우리의 싸움은 현재 분명히 진행 중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사랑은 싸움의 시작이고/ 싸움의 완성임을 이제사 깨닫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길은 그대와 내가 다시 만나는 길입니다/ 그 길은 그대와 내가 스스로를 이기는 길이기도 합니다/ 모든 억압과 억지와 자존심과 이별하고/ 물빛 맑은 가을 강의 달맞이꽃으로 피어나는 길입니다/ 한 번쯤 소중한 자신을 위해 눈물 흘리는 길이기도 합니다// 모두에게 그 길은 일방적인 생사(生死)의 통로였으며/ 오욕이었으며 유보된 큰 희망의 거점이었습니다/ 모두에게 그 길은 아름답고 자발적인 익명의 길이었으며/ 기쁨이었으며 동시에 거대한 죽음의 바다였습니다// 나에게 구속과 해방의 경계를 체험케 해 준 도시/ 나에게 사랑의 쓰고 단 열매를 깨물게 해 준 도시/ 나의 감시자여; 모두가 주인이 된 거리의 시가행진을 기억합니다/ 그날의 궐기대회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음을 믿고 있습니다/ 아무도지지 않은 채 푸른 은행나무 이파리로 흔들리고 있음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가족도(家族圖) / 임동확
너무나도 가깝고도 멀어서/ 아침마다 고기반찬을 나눠 먹고도/ 여태 서로의 꿈을 모른다/ 너무나도 멀고도 가까워서/ 각자의 방문을 걸어 잠그고서야/ 벌써 궁금해진 안부를 묻고 있다/ 더는 가까워질 수도,/ 혹은 멀어질 수도 없어서/ 더러 꼭 껴안거나 다리 하나 걸친 채/ 밤새 저마다의 병명으로 끙끙 앓으며//
방어할 수 없는 不在 / 임동확
세월이 세월인지라/ 모든 게 물 속의 잉크가 풀리듯/ 무엇이든 자꾸 묽어가는 게/ 탈이라면 탈이다 어떤 식으로든/ 그만큼의 시간이 흐른 것이다/ 그래 이제들 내가 아니라/ 네놈이 누구냐고 是非를 걸고/ 그렇듯 우린/ 마치 고장난 축음기판이라도 되는 듯/ 여기저기 찌지직, 긁히는 소리, 악다구니다/ 지나온 자리를 더듬어가듯/ 제 뱃속으로 죽은 고기의 내장을/ 꾸역꾸역 밀어넣거나 혹은 토해내며/ 막 깐 새끼거북이처럼 온몸에 진흙을 처바른 채/ 모두가 필사적으로 시간 속을 기어오른다/ 차마 그런 축에 못 끼는 자가/ 추하게 보일 만큼 절정인 食道인 것이다/ 살아 있는 것만이 전부라는 듯/ 당한 자만이 억울하다는 듯/ 그동안 의례적이라도 비워둔 자리마저/ 전혀 낯선 얼굴이 차지해버린 것이다/ 아니 방어할 수 없는 부재를 불러내어/ 멋대로 처벌까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새벽녘에 꺼져가는 화톳불과도 같이/ 망각의 재로 풀풀풀, 꺼져가는 존재들이여/ 그래 살아만 있거라, 오물 범벅의 양복 깃을/ 화장실 수돗물에 씻으며 목숨의 신을 섬겨라/ 어차피 악연인 세상 속에서/ 그것 외에 별다른 방책이 없으리라/ 누구든 두 번 몸 받지 못하리라//
가을산 / 임동확
다시 그리운 수림 사이로 아쉬운 듯/ 추억처럼 몇 개의 열매를 남겨놓은/ 그 가을산에 오르면/ 제 그림자 하나 맘껏 뻗지 못하는/ 검게 그을린 산등성이/ 키 작은 관목숲의 호위를 받으며/ 몸이 커 버림받은 불새가 앉아 있다/ 마치 져버린 붉고 노오란 낙엽처럼/ 그렇게 휩쓸려가는 시간 속에서/ 날지 못하는 기다림의 깃털을 부풀리며/ 억센 뿌리의 갈대꽃만 온통 절정인/ 그곳에 저만의 크기로/ 아주 오래 숨죽여 울고 있다/ 그렇다 한 번 날기 위해/ 아니 두 번 죽지 않기 위해 천년을/ 저렇듯 자세조차 틀지 않은 채/ 돌처럼 견딜 수도 있겠구나/ 그러다가 절박하면 제 안 깊숙이/ 파고들어 거기 그대로/ 順命해갈 수도 있겠구나//
먼산 / 임동확
그리움으로 더욱 희어진/ 기억의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너는 마르고,/ 길고 험한 마음의 능선마다/ 잡목숲이나 거느리며 너는/ 계곡처럼 아프게 패여만 간다/ 그러나 후회하지 않으련가/ 그대여, 아무리 불러봐도/ 좀처럼 성한 시절의 메아리를/ 되돌려주지 않는 먼 산이여/ 방부 처리된 생선 통조림 같은/ 세월의 빈 깡통들만 걷어채이는데/ 못 잊힐 그날의 흔적조차/ 거의 판독할 수 없는 문자로/ 희미하게 푸른 바위손에 덮여가는데/ 허나 누구도 그걸 원한 건 아니었는데,/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여전히 하나되지 못하고/ 그렇다고 둘이 되지도 못한 채/ 그냥 이대로 늙어갈 것인가/ 그저 붉은 입술만 꽃처럼 달싹이며/ 그 캄캄한 침묵의 스무고개를/ 넘어가고 또 넘어갈 것인가/ 그러므로 도라보지 말자 /그대여, 아직도 슬픔의 잔등 너머엔/ 수직의 기다림으로 발 한번/ 편히 뻗지 못한 채 새우잠 드는/ 이름 모를 수목들로 빽빽하다/ 그토록 썩지 않는 열망의 아우성만/ 너처럼 아득하게 깊어져 있다.//
노제, 밤으로의 긴 여정 / 임동확
태어나기도 힘든 일인데/ 죽기는 또 이다지 힘든 것이냐// 음이월 물오른 복숭아 나뭇가지에/ 흰 상여꽃 하나 덜렁 걸쳐 두고// 어화, 그저 아쉬울 것 없다는 듯/ 다시는 못 올 산비탈 길 잘도 넘어가는데/ 일어나소, 일어나소 처자가 울부짖고/ 땅바닥에 주저앉아 딸들이 넋놓아 울고/ 어린 상주들 먼 산만 하염없이 쳐다보는데/ 쓰러질 듯 서 있는 주인 잃은 안가/ 살아 생전 종종걸음치던 동네 고샅길/ 앞 강물 뒷산 나그네처럼 휘 둘러보고/ 차마 다 끊어내지 못한 독한 인연들/ 짐짓 모른체 만가 소리 서둘러 앞서가는데/ 모두들 다 용서하시라/ 굳이 가는 자의 허물일랑 따져 묻지 말고/ 누구에게든 한때나마 가장 젊고/ 예뻤던 생의 날들만 기억되게 하라/ 어쩔 수 없는 태산 같은 미련이나 회한일랑/ 아예 헤아림없이 꾹꾹 다져 묻어 버리고/ 그래도 남은 아픔일랑 울타리가/ 노오란 수선화 한 떨기로 피어나게 하고//
부분은 전체보다 크다 / 임동확
한 마디 말이 천 냥 빚을 갚는다는 게 사실이라면,/ 한 개의 정자와 또 하나의 난자가 만나/ 한 아름다운 소녀와 한 튼튼한 소년의 몸과/ 정신으로 마침내 인류의 대열에 합류한다면/ 부분은 전체를 위한 합이 아니다/ 부분은 늘 전체보다 크다/ 연초록 느릅나무 이파리 하나가 보이지 않는,/ 흘러간 모든 시간의 흔적을 증명하는 것이라면,/ 철길 아래 깔린 무수한 포석(鋪石)의 하나가/ 더할 수 없는 쓸쓸함의 하중을 넉넉히 견뎌내며/ 시속 3백 km의 고속열차를 넉넉히 감당하는 중이라면,/ 때로 제지할 틈 없이 흘러내린 눈물 한 방울,/ 어떤 경우의 수에도 포함되지 않은 예외 하나가/ 문득 새로운 세계의 심장을 닿는다면/ 부분이 전체보다 먼저다, 악마도/ 천사도 이 부분 안에서만 날뛰거나 자유롭다면/ 부분은 전체의 합이다, 아니 부분이/ 그 모든 전체보다 무겁거나 거대하다/ 백 권의 역사서보다 김종삼의 「민간인」 한 편이/ 더 깊고 슬픈 얘기를 들려주는 것이라면,/ 마침내 풀뿌리까지 누워버린 김수영의 「풀」이/ 하늘과 대지, 바람과 비의 합창을 부르고 있다면/ 모든 전체는 허구다,/ 모든 부분 그대로가 전체다/ 한 개의 조사(助詞), 한 구절의 문장이/ 혹은 한 편의 시가 단숨에 저 멀리/ 몇 백 광년의 우주로 달려갈 수 있다면,/ 한 시인의 눈이 여전히 광속보다 빨리 사라지는/ 영원의 어깨를 붙들고자 밤새 앞서 달려가고 있다면.//
작아지는 것도 무한하다 / 임동확
마치 당연하다는 듯 모두들 고독한 임산부처럼/ 끙끙대며 살아가지만, 정말이지 그 무엇도 고립되어/ 있지 않다// 패각류 같은 세월의 미세한 등껍질을 거듭 확대해/ 가다보면 전혀 예상치 못한 선과 색들이 소리지르며/ 뻗어가고// 헤아릴 수 없는 그 무엇이 수억 광년의 별과 별처럼/ 갈라지고 멀어진 사이를 아교처럼 잇고 있다// 더욱 작고 깊게 더듬어 갈수록 슬금슬금 뒷걸음쳐 가는/ 풍경 뒤로 종달새처럼 울부짖으며 전혀 낯선 무한의/ 얼굴이 나타나고// 더는 가벼워지거나 나눠질 수 없을 떼까지 파고들면/ 작고 희미한 슬픔의 모래알 속에 어느새 저를 낳은/ 바다의 물방울이 맺혀 있다.//
내 애인은 왼손잡이 / 임동확
저도 모르게 왼손이 편하고 좋아/ 왼손으로 밥 먹고 글씨를 쓰다가/ 오른손은 늘 바르고 옳으니/ 오른손만 사용하라며 어릴 때부터/ 엄마한테 사랑의 회초리 맞고 자란/ 내 귀여운 왼손잡이 애인은 이제/ 왼손 오른손을 능숙하게 사용하는/ 양손잡이가 되어 있지요/ 왼손은 부정하다고, 틀렸다고/ 오른손만 고집하다가/ 왼손을 거의 쓸 수 없는 나보다/ 훨씬 두 손이 자유로운 사람이.//
세상의 모든 나무들은 / 임동확
세상의 모든 나무들은 틀림없는 분수// 오직 그 자체의 동력만으로 다함없이,/ 조정자 없이 두 팔을 한껏 벌린 채/ 연초록 물줄기를 사방천지로 마구 쏟아내고 있다// 그러나 단 한 방울도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는 분수/ 그때 꽃이란 순결한 물의 진액으로 짜 엮은 꽃다발,/ 그때 열매란 순수한 물의 결정이 탄생시킨 보석들// 세상의 나무가 어떤 형태로 서 있거나 흔들리고 있는/ 끊이질 않은 물의 응결, 물의 연금술로 찬란하다// 가까이서 보면 낱낱이 외로운 물방울의 육화인,/ 그러나 멀리서보면 연봉(連峰)의 파도로 출렁이는/ 미처 그늘을 알지 못하는 절정의 어린 이파리들이//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서로를 닮지 않은 채/ 오직 하나의 존재였을 뿐인 지상의 나무들이,// 저마다의 수압(水壓)으로 굵고 가는 분수의 가지마다/ 가장 소중한 순도의 색채를 마구 쏟아내는 봄날엔//
희망의 시절 / 임동확
아주 잠시, 한 세계가 구약처럼 밀려날 때/ 그때 오직 우리가 오직 바랐던 건,/ 무너져 내린 어느 제국의 한 귀퉁이 구원 없이/ 여전히 버림받거나 쫓겨난 자로 살아가기,/ 아니면 쓸개즙 같은 근원의 물기를/ 연신 핥는 혀들의 낯선 느낌을 지속하기,/ 하지만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우리가 내내 사랑하고 의지한 건/ 일체의 희망 없이 희망의 전부를 꿈꾸기,/ 뿌리치기 힘든 국가의 명령보다 힘세고/ 더 완벽한 한 세기의 몰락의 아름다움,/ 또는 그 황홀한 불가능의 덧없음과 의기양양함./ 아니면 미처 물러가지 않은 밤의 저주와/ 자꾸 질 나쁜 예감으로 뒤숭숭하던 그 시절,/ 우리가 그토록 간절히 찾아 헤매던 건/ 다가갈수록 멀어지는 지평 같은 절대 고독,/ 혹은 실상 어느 것 하나 포기할 수 없어/ 다시 펼쳐든 신약 같은 순간적인 사랑의 윤리.//
끝나지 않은 시간 / 임동확
비록 아주 늦는다 해도/ 서릿발 성성한 이 밤을 지나, 십 년/ 아니 그보다 세월이 더 흐른다 해도/ 그대 정녕 안녕만 하다면/ 그저 막막한 예감이 아니라/ 꼭 온다는 확신만 선다면/ 내 외롭지 않으리, 아무리 힘에 부쳐도/ 저 불 켠 그리움의 택시가/ 자꾸만 초조해진 기다림을 배반한 채/ 다른 아파트 입구로 들어서더라도/ 내 미워하고 탄식하는 일조차/ 오래 사랑하리, 위로받을/ 단 하나의 별빛마저 어두워져/ 날 밝은 세상 속으로/ 저 혼자서만 야속하게 합세해가도/ 천 길 절벽의 진달래처럼 홀로 붉으리/ 못내 꽃피는 그날이 최후인/ 대꽃 같은 운명이라고 해도/ 더딘 그대의 소식 원망하지 않으리/ 끝끝내 살아만 온다면/ 그리하여, 이 못 믿을 내 마음 안으로/ 그대 구원의 초인종 소리 한 번/ 아주 길게 울려줄 수 있다면//
식물들의 외로움 / 임동확
한사코 어미의 품에서 떼쓰는 아이들처럼 찰진 논바닥에 도열한 벼를, 낱낱이면서 하나인, 또 하나이면서 낱낱인 식물들의 일생을 좌우하는 건 결코 내부의 의지나 선택이 아니다.// 홀연 태풍처럼 밀려왔다가 그 자취를 감추고 마는 낯선 동력, 누구에게나 단호하고 거침없는 죽음 같은 바깥의 힘./ 필시 하나의 정점이자 나락인, 끝없는 나락이자 정점인 푸른 줄기마다 어김없이 같으면서도 같지 않을 외로움의 화인(火印)이 찍혀 있는,// 여럿이면서 홀로인 벼 포기들이 끝내 제 운명의 목을 쳐 내는 낫날 같은 손길에 기대서야 겨우 고단한 직립의 천형을 벗어나고 있다.//
잘 가라 내 청춘 / 임동확
미친 개들의 입에서 입으로 뺏고/ 빼앗기며 핥고 깨물어도 아직 삼켜지지 못한/ 뼈다귀 같은 슬픔뿐이어도// 제대로 된 긴 전망 하나 없이도/ 끄떡없이 저 피의 세기를 건너왔느니// 끝내 신원 될 기약조차 없이/ 생매장된 검은 기억의 꽃밭 위를 맴돌다가/ 금세 날아가버린 나비처럼/ 나의 눈길은 저 언덕 너머 양떼구름을 쫓고 있느니// 검고 윤기 나던 긴 머리칼 한번/ 뽐내지 못한 채 죄 없이 쥐어뜯다가/ 어느새 새하얗게 세어버린 청춘의 날들이여// 잘 가라// 그 어느 연대, 땅에선들/ 청춘의 날들은 억지로라도/ 괴롭고 힘들어 하지 않았으랴// 잘 가라 내 청춘// 다가오는 날들이 결례 같은 죽음뿐일지라도/ 무작정 떠밀려온 채 살아 애쓰는 여기가 나의 거점/ 그때 그 패배와 나락의 순간들이 없다면/ 이토록 깊고 서늘한 사랑의 완성을 꿈꿀 수 없으리//
화원을 지나며 / 임동확
오직 거기 그대로 있을 뿐인 비애의 그림자를 보았다 가던 발길을 멈추고 온갖 사랑과 아픔의 출발지며 귀향지인 大地母神의 쭈그러든 가슴에 안겨 죽어가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뿌리의 상처를 오래 생각했다 늘 푸른 하늘만 동경하며 살아왔다는 붓꽃, 꽃필 때마다 먼저 간 임을 그리워하며 슬픔에 젖는 과꽃, 끝내 꽃과 잎이 서로 만날 수 없어 안타까운 상사화 그리고 호수에 비친 제 얼굴에 반한 미소년을 닮은 수선화, 그 밖에 저마다 소중하고 절박한 사연의 전설을 하나씩 가진 채 필사적으로 지상의 날들을 그리워한, 가엾은 땅속의 영혼들을 엿보았다 크고 화려할수록 더욱 가혹하게 작열하는 땡볕과 거의 말라죽지 않을 정도의 가뭄을 반복하여 강요당하는 한 순교자의 소리없는 절규를 들었다 그것도 모자라 보호받아야 마땅할 심연마저 쇠꼬챙이로 들쑤셔온 모질고 거친 담금질의 시간과 마주쳤다 그러나 한량없이 칭얼대는 꽃봉오리의 투정, 제 어미의 살을 뚫고 나오는 살모사같이 잔인한 줄기와 잎과 열매의 수탈을 끝내 거부하지 못하고 뼈마저 삭아내려 허리 굽힌 한 세월의 영광을, 모두 내 것이 아닌 것으로 치부하며 팔려나온 여러해살이 슬픔의 근원을 들여다보았다 그럴수록 다양하고 풍성한 형상과 빛깔을 지닌 세상의 아름다움도 함께 지켜보았다.//
헌화가 / 임동확
저 꽃을 내 기꺼이 그대에게 꺾어 바치리 미처 뒤돌아볼 새 없이 앞만 보고 과속해도 끝없이 추월당하는 잘못 든 생의 고속도로를 비웃듯 순식간에 늙음도, 흐르는 시간도 멈춰버린 수로여 어찌 그저 발만 동동 구르거나 더 이상 어쩔 수 없음을 변명 삼아 맨주먹으로 땅바닥이나 내리치며 탄식하고 있으리/ 어찌 즐겨, 한때 내 비록 자랑스럽지는 않았으나 결코 포기할 수 없었던 내 청춘의 붉고 흰 추억의 꽃타래 한 묶음쯤 그대에게 엮어 바치지 않으리 귀신도, 물짐승도, 공중을 나는 수컷의 새 한 마리도 육향에 취해 그저 부끄럼도 잊은 채 앞다투어 발정하며 길을 막는데, 아무도 생각해 내지 못할 마로니에 공원 미끄럼틀 아래 매달린 쇠줄그네를 약속 장소로 택한 그대 위해, 내 어찌 꽉 쥔 생의 핸들을 놓치지 않으려 머뭇거리리/ - 지금 불로 익힌 지상의 어떤 음식보다 달고 향기로운 제 몸 속의 훈향에 제가 먼저 감동 해, 어딘론가 서둘러 닿으려는 모든 발길을 멈추게 하며 홀연 가는 곳마다 황홀한 천리향으로 타오르는 수로여 -/ 살아서 닿을 수 없는 저 그리움의 절벽을 발판 삼아 그 찬란하고 뜨거운 열반의 정화수에 내 아픈 한 몸 누이리 차라리 육탈해 멈추지 않는 노래의 향기로 둥글게 퍼져오는 그대 위 해, 어찌 저 죽음의 파도 일렁거리는 천길 낭떠러지인들 마다하리//
걸레질을 하다가 / 임동확
헛발 내디디면서도 자꾸 나아가다 보면 절벽이라도 뛰어넘을 날개를 원했던가 마지못해 앞으로 주춤거리며 떠밀려가는 동안 단 한 번만이라도 제 삶을 역전시켜줄 그 무엇이 기다릴 줄 알았지만,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생은 투자 없는 끝없는 소비 즐겁거나 쉬 지워지지 않은 기억들만 떨어져나간 단추 자리처럼 뚜렷하다 문득 사랑하는 일마저 어느새 닮고 더러워진 옷소매처럼 감춰야 할 부끄럼, 쉬 역전되지 않은 궁색 같은 골칫거리가 되어 있다. 아니다. 얼마만큼 타협하고 물러서는 동안 부러진 한쪽 날개의 희망이라도 꿈꾸는 동안 시간의 빗물은 차라리 모든 것들 속으로 스며들어가 화려했던 한때의 열망들을 부식시키고 있다. 그러나 쉿, 함부로 다루거나 버리지 마라 어쩔 수 없이 조금씩 양보하며 무릎 꿇어 가는 동안 그새 어느 곳 하나 성치 않은 걸레 같은 영혼들이여 스스럼없이 더러운 먼지와 얼룩들을 닦아가고 지워가며 제 존재를 확인하는 저 걸레의 마지막 꿈을 이내 버려질 운명이라도 그 운명마저 버릴 수 없어 끝내 걸레이길 고집하는 저 세상 의 눈부신 외로움을//
게임의 법칙 / 임동확
무조건 시간에 맞춰 자거나 마치 때가 되어서 밥을 먹는 게 아니라 우린 원래 잠이 오거나 배가 고파서 자고 먹는/ 따라서 세상의 모든 규범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필요에 따라 지우거나 다시 그을 수 있는 어떤 선에 불과하다./ 우린 오직 자식들을 낳기 위해 결혼하거나 돈과 일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때로 참을 수 없는 본능의 욕구에 따라 목숨 건 사랑을 하거나 기꺼이 번지점프대에 스스로를 세우기도 하는 것/ 그러니까 모든 법과 이념, 시민 윤리와 혁명의 법칙 또한 우리가 잠시 묵인한 놀이의 공리(公理)에 불과하다./ 예컨대 한 청년이 지하철 선로에 떨어진 취객을 위해 뛰어들거나 어느 여승무원이 침몰하는 세월호 안에서 기꺼이 구명조끼를 한 여학생에 넘긴 채 죽어간 것은, 딱히 그게 옳거나 당위여서가 아니다./ 순전히 그건 우리들 자신도 모르게 하나씩 더 달고 있는 심장의 명령이었거나 그때그때마다 저들의 등을 떠밀거나. 죽음으로 내몰게 한 미지의 힘./ 왜 그렇지 않겠는가. 아주 잠깐, 마치 고무줄놀이 하듯 문재인과 김정은이 손잡은 채 삼팔선을 넘나들 듯/ 이제 그가 누구든 달라지지 않는 국경과 엄연한 실정법 속에서도 스스로의 선택과 의지에 따른 저만의 질서와 법칙 속에서 살아갈 의무가 있다./ 오로지 더 이익을 얻거나 잘 교환하기 위한 협상이 아니라 오직 낭비하고 즐기기 위해 사는 축제의 시간이 있다./ 때로 국가도, 민족도, 가족도 잊은 채 항상 반복되지만 항상 다른 식으로 추는 나만의 춤, 그러나 결코 리듬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리듬을 지배하기 위해 리듬에 몸 맡기는 놀이의 시간이.//
남쪽에 내리는 비 / 임동확
아 눈부셔, 눈부셔라/ 눈물이 스스로를 다스리듯/ 제 힘으로 길을 내며 자유로운/ 이 거리의 빗물은 아름다워라/ 이리 오셔요 저리 가요/ 그 끝모를 소환에 맘 사리며/ 큰 슬픔의 덤으론 가지를 흔들고/ 절름발이 기쁨으로 속잎을 적시는 비/ 한낱 꿈이라도 깨어나/ 오래 아픈 기억을 씻으며/ 천년에 천년을 흐느끼는 그대여/ 누가 남아 견디어가랴/ 흠빕 풍성한 미앙을 잠재우고/ 모두가 온전한 모습을 수줍어할 그 날까지/ 칭칭 감겨오는 햇살에 키마 웃자란/ 가지마다 흰 비둘기떼를 날리며,/ 그러나 이곳에선 증도도 삶인 것을/ 모든 것 다 내주고/ 제 울음 하나 낮게 뿌리며/ 세상 뒷켠, 가문비나무에 숨은 새여/ 이제 조금은 사납게 노래해다오/ 결코 사랑에 함정이 없다고/ 여전히 저 너머엔 평화가 있다고//
내릴 곳이 아닌 곳에 ㅡ심경(心經) 3 / 임동확
얼마나 짐승처럼 비굴하게 굴어야/ 삶은, 겨우 길을 허락하는가/ 오래 버려둔 폐가 같은 탄전지대의 고갯길/ 미끄런 빗길을 막 넘어가려는데/ 한쪽 눈이 성하지 못한 한 아낙네/ 결코 지정된 정류장으로 보이지 않는/ 검문소 근처에 자신을 내려달라 하소연한다/ 무너진 갱도에서 방금 기어나온 듯한/ 더할 수 없이 낮게 깔린 어투로/ 비안개 길을 조바심하며 헤쳐나가는/ 버스 운전사 등뒤로 주춤주춤 다가선다/ 행여 거부해도 전혀 항의할 수 없는 거기에도/ 절박하나마 버젓한 인기척이 있다는 듯/ 설령 그곳이 곧장 붕괴될 막장일지라도/ 그녀에겐 꼭 돌아가야 할 곳이라는 듯/ 급기야 성한 다른 한쪽 눈에/ 눈물까지 비칠 듯 애원하기 시작한다/ 누가봐도 내릴 곳이 아니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을 게 뻔한/ 그날의 합승객들을 보기 좋게 배반이라도 하듯/ 어떻게 하든 목적지에 하차할 수 있었던/ 그녀는 언제 그랬느냐 하는 뒷모습으로,/ 낯선 자에겐 여전히 어둠이고/ 절망일 뿐인 그 길을 대명천지 가듯 간다/ 마치 애써 거부하고 외면해온 그곳이/ 미처 가늠하지 못한 생의 여백이었고,/ 측량할 수 없었던 또 하나의 통로였다는 듯/ 그렇게 깊숙이 합장한 마음으로 무성한/ 처녀림 저쪽으로 조금은 당당하게//
벽을 문으로 ㅡ심경(心經) 19 / 임동확
날 가로막는 것은 더 이상 네가 아니다/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매듭짓지 못한 지난 일,/ 아니면 처음부터 나 때문이었다/ 그래서 내 마음의 결가부좌를 풀지 못한 채/ 난 면벽중이다. 문이란 문 죄다 걸어잠근 채/ 이미 더럽혀진 生을 찬찬히 곱씹으며/ 더욱 생생한 상처의 한가운데 좌정하고 있다/ 그곳에서 현실은 또 다른 추억의 그림자다/ 낡은 고물 축음기 위에 올려진 레코드판이 다 닳도록/ 바흐의 선율과 난폭하게 몰아가는 자동차 엔진음이 함께 뒤섞여 흘러나오던 영화 음악「페드라」를 들으며/ I want to die……, 맹목적으로 반복하여 따라 합창하던 그날들이여/ 그러나 결국엔 의붓아들과 의붓엄마간의 이루어질 수 없는 불륜 같은 사랑의 금기를 범하며 끝나버린 죽음의 시대여/ 하지만 그것마저 여전히 완강하고 싸늘한 현재에 비하면 너무도 초라한 환영,/ 날마다 절규하듯 울부짖어보아도 꿈쩍 않던 벽면에 그려진 세월의 음화였다// 연민도 공개적인 비판 대상이 되던 시절,/ 그렇기에 혼자서만 오랜 망각의 술을 마셔왔다/ 변명할수록 더 구차스럽던 치욕의 세월이었으므로/ 퍽이나 오래 잘못 살아버린 삶의 기억을/ 이제 벽을 문삼아 한꺼번에 토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토록 옥죄인 마음의 빗장을 열려 하니/ 여기저기 아파온다,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슬픔의 독이 한꺼번에 목구멍으로 치밀어오른다//
길 위에서 ㅡ심경(心經) 24 / 임동확
어디로 다들 가버렸나. 가파른 수직성으로 메마른/ 수목들만 뾰족하게 솟아오른 마음의 능선이여/ 모두들 아니라고 돌아서버린 산굽이를 넘어가노라니/ 지나온 연대의 계곡마다 함부로 사랑하고 버림받은,/ 또 그만큼 빨리 뒤집혀진 이념의 나무 뿌리로 가득하다/ 그새 그친 눈사태 같은 사나움의 세월도 잊은 채/ 떼지어 개종한 하산객들이 연호하는 공허한 메아리,/ 지레 수다스런 변명을 늘어놓는 골바람 소리만 차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이젠 누군가 아주 당당하고/ 여유롭게 피 흘려 싸워온 지난날들을 야유하고/ 그리고 깊게 찔려 덜 아문 영혼의 생채기를 비웃고 있다/ 느닷없이 해산령을 받은 구한국의 병사처럼 쓸쓸하고/ 비장해진 우릴 저 밑 모를 죽음의 낭떠러지,/ 무장 해제의 설원으로 무작정 내몰고 있다/ 겨울산이여. 그래서 더욱 억울하기만 하는 대장정이여/ 그러나 그러기에 오직 스스로의 아픔으로 밝고/ 어두운 밤별 같은 지나온 길의 추억, 혹은 아름다움/ 아예 벽을 향해 도열한 결빙의 시간과 마주친다/ 그럴듯한 해탈도, 초월의 날개도 없이 그렇게/ 무한히 다양하고 경이로운 유일성의 우주를 이루는/ 마음의 별빛을 벗삼아 흐트러진 들메끈을 고쳐 매며/ 결코 유행일 수 없는 삶의 중심을 옹호한다/ 발등 찍을 후회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설목지대/ 찬란한 슬픔의 연봉 너머 거기 그대로 천년을/ 홀로, 여럿이 짝을 이루며 당당한 기억의 樹林을 본다//
소리로 듣다 ㅡ심경(心經) 25 / 임동확
그러하니 일일이 말로 설명하고/ 헤아리는 게 부질없어 내 소리로 듣네/ 누군가 가르쳐준들 배울 길 없어/ 느낌만으로 끈질기게 유전하는/ 한 세월의 얘기를 속울음으로 전하네// 그러나 섞이면서 섞이지 않는 빛과/ 어둠 같은 마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사물놀이여/ 제아무리 광풍처럼 천만 변화를 일으킨들/ 저 거친 역사가 남긴 삶의 굵고 섬세한/ 상처의 실핏줄까지 점령하려 드는 건/ 얼마나 난폭하고 무리한 욕망인가/ 전체를 균열내는 꽹과리의 휘몰아치는 질주 속에서도/ 필사적으로 서로의 音域을 간섭하지 않으며/ 북은 북, 징은 징, 장구는 장구대로 아름다운/ 불협화음을 내기란 얼마나 무서운 고뇌를,/ 얼마나 오랜 인욕의 수고로움을 요구하는가// 그리하여 더는 낮거나 높을 수 없는/ 생의 음계마다 새겨진 손톱자국을 보네/ 말할 수 없었기에 모든 기억을 난타하며/ 끝내 노래가 되고 춤이 되어 허공으로 치솟는/ 격렬한 말의 소용돌이에 내 몸을 맡기네//
불타는 책 ㅡ심경(心經) 31 / 임동확
누군가 잘못 살아온 것이 아닌가/ 행여 뒤처진 것은 아닌가 후회하고 자학하는 순간에도/ 굴절 없이 성장한 패기만만한 젊은 학자가/ 단숨에 노스승의 학설을 뒤집기라도 하듯이/ 수천 수만의 잎새를 잘도 까불거리는 나무숲,/ 혹은 잠시도 부동 자세를 취하지 못하고/ 대열짓지 못해 야단맞는 학동들처럼/ 일정한 지표가 없는 숲속의 오솔길들// 그처럼 명확하거나 사변적이지 않은 곳에,/ 아니 끝없이 논리를 배반하고 넘어서온 곳에서야/ 비로소 죽음은 제 크기만큼의 무게를 견디고/ 생은 결코 사고로써 측량할 수 없는 깊이와/ 사과나무 열매 같은 향과 맛을 알게 한다// 그러기에 얼마나 어리석었는가/ 그 많은 저자들의 책과 책 사이로 난 빽빽한 회로들이/ 스스로가 들어섰다 겨우 빠져나온 미로의 흔적임을 모르고/ 자진하여 점점 헤어날 길 없는 행간 속으로 들어갔다// 좀더 분명하고 강렬한 자극의 믿음과 이념을 원하며/ 걸신들린 아귀들처럼 절망과 슬픔을 대서할 손길을 기대하며/ 어쩌면 쓸모 없는 의미의 시체 더미들을 뒤적여왔다/ 제가 넘긴 책장의 수와 지식의 크기를 재며 싸우기도 했다// 그러나 관념은 이제껏 엄연한 현실의 하수인,/ 단지 단축될 수도, 늦출 수도 없는 모든 생의 행보를/ 너무 오랫동안 잊고 지내왔을 뿐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최신 유행가를 흥얼거리듯/ 번역서를 고르고 까다로운 논쟁에 휘말리며/ 갑자기 눈먼 사람의 표정이 되어 제 발밑의 함정을,/ 아주 구체적인 사랑의 느낌들을 외면해왔다// 세상엔 이론이 먼저 오지 않았다/ 모든 경전들보다 오래 된 삶이 늘 우선했다//
살아있는 개펄 ㅡ심경(心經) 35 / 임동확
아무도 도움을 줄수없음을 알았을 때/ 끝모를 절망의 밑바닥으로 빠져들던 살의 미궁,/ 그러나 한없이 밀치고 들어서고 싶던 농밀한/ 침묵의 회음부같이 빠져드는 회색의 점토층이다./ 모든 조심스러운 믿음이 한순간에 폭파당한 시절에/ 유난히크게 들리던 저들의 냉기 어린 비웃음 소리/ 성난 정신의 밀물이 빠져나간 기억의 퇴적층이다/ 곤두선 그리움으로 짓눌려 오던 거대한 물이랑도,/ 절벽같은 가슴을 할퀴며 달겨들던 파도도 사라지고/ 미처떠나 보내거나 묻지 못한 조가비껍질만/ 아프게 밟히는 막막하고 흐릿한 내삶의 기항지여// 언제인가 난 여기서 첫울음을 터트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 이미 슬픔의 근원을 알아버렸다는 듯/ 처연하게 사지를 버둥거리며 빠져 나가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난 저 죽음의 회항지를 한발자국도 못떠나거 말았구나/ 더할 수 없이 바스러진 일체의 영혼이 응집하는,/ 파고들수록 맑고 따뜻한 물이 고이는 웅덩이/ 결국 비좁고 뻑뻑한 膣(새살이 돋을 질)의 입구로 되돌아 왔구나/ 온갖 비밀한 생의 아픔들이 자진하여 모여드는 개펄이여// 그러므로 난 여기에서 행복하게 죽어갈 것이다/ 어느 틈엔가 붉은 햇덩이 같은 말을 토해 내는/ 광대무변한 생명의 운하를 거슬러오르고 있을 것이다/ 이제 지난 세월동안 책임질 수 없어 아파하고/ 괴로워하던 모든 희망의 채찍도 놓아버리고/ 몸부림 칠수록 더욱 깊숙이 빠져드는 상실의 늪지/ 이 무례하고 파괴적인 추억의 긴 배수관이 묻혀있는,/ 그러기에 아직도 부를 노래가 남아있는 이곳에서/ 난 실상 저 무한 천공보다 더 아득한 마음속의 은하를/ 몸붉은 갯지렁이처럼 오래도록 헤집고 다닐 것이다.//
원효의 물 ㅡ심경(心經) 46 / 임동확
제 아이의 똥이 더럽다고 느끼는 아버지가 있다면/ 그는 이미 한 아비의 자격을 잃은 것이다/ 한때 그렇게 생각하며 제가 눈 똥에 겸연쩍어 하는 아이의 표정을/ 보는 것조차 행복으로 느꼈는데/ 그러나 남의 아이 똥이 더럽지 않게 느껴질 때가 있을까/ 멋 모르고 해골바가지 속의 물을 마신 원효조차/ 그게 환한 대낮에 바가지 속의 물을 마시게 했다면 가능했던 일이었을까// 그처럼 나는 지금 남의 똥 같은 역사의 시간을 觀하고 있다/ 제 새끼 것만이 아닌 삶의 복도에 쌓인/ 지독한 냄새의 똥 속에서 당대의 건강을 체크하는,/ 그러나 결국엔 치워질 상처의 시간들을 禪하고 있다//
밤으로의 긴 旅程 ㅡ심경(心經) 56 / 임동확
오, 이제 알겠네/ 얼마나 외로워져야/ 저 밝기와 크기의 별이 된다는 것을/ 이제 추억할 틈도 없이/ 또다시 수축하고/ 거듭 팽창해가는 이 은하계의 변방/ 얼마나 그리워져야/ 저토록 제각기 독립하여/ 서로가 아름다울 수 있는지/ 그만큼 팽팽한 引力으로/ 저마다 다른 이름을 부여 받으며/ 저렇듯 조화롭게 빛나는지/ 그러기에 가장자리 나/ 경계가 있을 리 만무한/ 저 우주보다 넓을/ 마음의 처소/ 그 사이사이 숨겨진/ 측량할 수 없는 심연이 어둠/ 그러나 점점 뜨거워져 가는/ 마음의 중심핵들/ 오직 자체 중력에 의해/ 늙은 여자처럼/ 더 할 수 없이 쭈그러들 때야/ 영혼의 가스 구름은/ 더 젊고 새로운 추억을 탄생시키는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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