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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아름다운 여자들 / 김태길

부흐고비 2023. 4. 27. 09:12

나의 청소년 시절에 유행했던 노래의 가사 가운데 '울어도 사랑이요 웃어도 사 랑, 거리 거리 등불 아래 여자가 있네' 라는 것이 있었다. 앞과 뒤의 가사는 생각 이 나지 않고, 이 구절만 이 가락과 함께 기억에 남아 있다. 몸과 마음이 안주할 곳을 얻지 못하고 방황하는 남정네의 시야를 파고든 등불 아래 여인들의 모습, 매우 통속적이기는 하나 그런대로 정취가 서린 한 폭의 그림이다.

요즈음의 우리나라 여자들은 40년 전 또는 50년 전보다 훨씬 더 아름다워진 듯한 인상이다.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거리를 지나면서, 또는 텔레비전 화면을 바라보면서, 어쩌면 이토록 미인이 흔한가 하고 감탄할 때가 있다. 영양과 의상이 좋아지고 화장술까지 발달한 덕분일까.

사람들이 모이는 곳의 종류에 따라서 만나게 되는 미인들의 유형도 가지각색이다. 일류 백화점이나 국제공항 또는 칵테일 파티와 같이 비교적 부유한 계층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서 만나는 미인들은 대체로 우아하고 세련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대학의 교정이나 소극장 또는 화랑 주변에서 만나는 미인들은 젊고 발랄하며 명랑하다. 서민층이 많이 모이는 변두리 시장 또는 버스 종점 근방에서 만나는 미인들은 건강하고 소박한 아름다움으로 호감을 일으킨다.

집과 여자는 꾸미기에 달렸다고 한다. 정성들여 꾸미고 가꾸면 아름답고, 되는 대로 내버려두면 거칠고 초라하다. 미인 노릇을 하는데도 돈과 시간의 여유가 앞서야 한다는 이야기가 될 것도 같다. 그러나 화장 또는 의상과 장신구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다. 정원사의 손길을 모르고도 저절로 아름다운 심산의 수목과 자연미를 풍기는 사람들도 간혹 존재한다.

해방된 지 수년 후에 청주에서 어떤 고무신 공장을 견학한 적이 있었다. 장시 간에 걸쳐서 여러 가지를 두루 보았지만, 가장 인상이 깊었던 것은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여공들의 손놀림이었다. 일의 성과에 따라서 보수가 결정되는 임금체제 때문이었을까, 여공들은 숙달된 솜씨를 있는 대로 발휘하여 부지런히 일하고 있었는데, 그 작업하는 모습이 신성함을 느낄 정도로 아름답게 보였다.

화장과 의상으로 돋보이는 부유층의 아름다움이든, 건강과 자연스러움을 자랑하는 서민층의 아름다움이든, 그 바탕이 되는 것은 역시 젊은이다. 꽃의 아름다움이 시한부의 그것이듯이 여자의 미모도 세월과 함께 조만간 흘러간다. 남자도 늙은 모습이 보기에 좋을 수는 없지만, 젊어서도 그림처럼 아름다웠던 것은 아니므로, 변화에서 오는 허무감이 그토록 심각하지는 않다. 꽃보다도 아름답고 그림보다도 아름답던 여자가 늙는다는 것은 종교의 달관으로도 체념하기 어려운 삶의 아쉬움이다.

인생의 스승들은 정신의 아름다움을 가꾸어 노화에 따르는 육체의 아름다움의 쇠퇴를 보완하라고 가르쳤다. 육체의 아름다움은 20세를 고비로 떨어지기 시작하지만, 정신의 아름다움은 평생을 두고 기를 수가 있으며 죽은 뒤까지에도 생명을 유지하게 된다고 힘주어 가르쳤다. 정신의 아름다움은 늙은 소나무의 그것처럼 연륜과 더불어 값이 더해 간다고도 하였다.

그러나 정신의 아름다움을 기른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한 해 한 해 수양을 쌓고 덕을 닦으면 나이가 더할수록 정신의 아름다움도 값을 더할 수 있을 것 같으나, 그것이 생각과 같이 되지 않는다. 혼탁하고 저속한 세상을 살다 보면 자연히 탁류에 오염되기가 쉬워서 나이가 들수록 도리어 정신도 추하게 될 경우가 허다하다. 연륜이 늘수록 자연히 운치가 더해 가는 노송의 경우와는 사정이 좀 다르다.

몸의 아름다움과 마음의 아름다움 사이에 어떠한 상관관계가 있는지 정확한 것은 알지 못한다. 두 가지 아름다움 사이에 정비례의 관계가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나 전혀 관계가 없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덕이 높고 교양이 깊은 사람은 그 아름다움이 얼굴에도 나타난다. 여자가 외모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겉모습을 흐트러뜨리면, 마음도 거칠어지고 흐트러지기 쉽다.

겉으로 나타나는 외모의 아름다움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어서 요염하고 천한 아름다움과 덕스럽고 고상한 아름다움은 크게 다를 것이다. 그러나 남자의 안목으로 그것을 당장에 식별하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 보기에 외모가 빼어나게 아름다우면 속속들이 아름다운 여자로 속단하기 쉬운 것이 남자의 심리가 아닐까 한다. 다만, 오랜 시간을 두고 겪게 되면 겉과 속의 차이가 점차 나타나게 마련이다.

비단 보자기에 싸인 알맹이가 보잘것 없는 내용이라는 사실이 비교적 빨리 드러나는 경우도 있다. 상당히 교양이 높고 고상한 듯한 첫인상에 끌려서 존경하고 싶은 생각을 자아내던 사람이 여러 사람들 앞에서 껌을 질겅질겅 씹거나 쌍스러운 말을 거침없이 사용함으로써 곧 환멸을 느끼게 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그러나 외모가 워낙 아름다우면 다소의 흠은 흠으로 보이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인생을 일종의 예술이라고 볼 수 있다면 개인의 생애는 한 점의 작품에 해당한다. 각 개인은 평생에 한 점의 작품만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엄숙한 예술의 전당. 우리 모두가 각각 아름다운 작품으로 살기에 성공할 때, 우리나라 전체도 아름답고 자랑스러운 고장이 될 것이다.

겉으로 몸을 아름답게 가꾸는 것이 생애의 예술적 가치를 높이는 데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할 것인가? 아마 남자의 경우는 별로 중요하지 않을지 모르나, 여자의 경우는 외모의 비중도 결코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자의 경우에도 역시 속마음의 아름다움이 생애라는 작품 전체의 가치를 결정함에 있어서 단연코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보아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김태길(1920~2009): 수필가, 철학자. 호는 우송(友松). 충북 충주 출생. 일본 동경대학 법학부 수학, 서울 문리대 철학과 졸업. 동 대학원 졸업, 미국 Johns Hopkins 대학원 철학과 졸업(철학박사). 도의문화저작상 수상했으며, 서울대학교 교수, 철학연구회 회장, 대한민국학술원 회장 등을 지냈다. 주요 저서로는 『윤리학』, 『한국 대학생의 가치관』, 『존 두이』, 『새로운 가치관의 지향』, 『웃는 갈대』, 『변혁 시대의 사회 철학』, 『빛이 그리운 생각들』, 『검은마음 흰마음』, 『마음의 그림자』, 『삶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흐르지 않은 세월』 등 다수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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