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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고향 근처에 조용하고 경치 좋은 저수지가 있으니 낚시질도 할 겸 방학 동안에 한번 가지 않겠느냐는 어떤 젊은 친구의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마음이 솔깃했다.

서울 근교의 산만 당일치기로 오를 것이 아니라 삼박 사일 정도로 지리산을 종단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누가 제안했을 때도 좋은 의견이라고 찬성하였다. 이제는 함께 늙어가는 마당이니 좀 자주 만나자고 어느 동창 친구가 전화를 걸었을 때도 나는 참 좋은 생각이라고 말하였다.

정년 퇴임을 한 뒤에도 쉬지 말고 학문을 위해서 또는 그 밖의 문화 영역을 위해서 많은 일을 하라는 격려의 말을 여러 번 들었다. 지나가는 인사말일 수 있겠지만 나 자신도 하고 싶은 일들이 아직은 태산 같다. 이미 손을 대놓은 일도 몇 가지 있고, 또 앞으로 하고 싶다는 생각 만 가지고 있는 일들도 있다. 혼자서 할 일도 있고 여럿이 힘을 합해서 할 일도 있다. 젊은 사람들의 경우는 하고 싶은 일들이 더 많을 것이다.

견물생심의 심리 때문일까, 당장 순간의 충동을 따라서 하고 싶은 것들도 흔히 있다. 광고 선전의 자극에 끌려 어떤 구경을 하고 싶을 때도 있고, 친구들에 휩쓸려 '강남'까지 따라가고 싶은 유혹을 느낄 때도 있다. 대체로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일들은 먼 장래에 걸친 일들보다도 더 강한 힘으로 우리를 당긴다.

하나하나 떼어서 볼 때는 모두가 하고 싶은 일들이고 모두가 할 만한 일들이다. 그러나 그것들을 모두 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누구에게나 하루는 24시간밖에 없다는 사실이 우리를 크게 제약한다.

하고 싶은 일이 많으나 그것들을 모두 할 수는 없는 까닭에 우리가 불가불 그 가운데서 일부만을 골라서 할 수밖에 없다. 이때 중요한 것은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리느냐 하는 선택의 문제이다. 원칙을 정하지 않고 당장 마음이 끌리는 일에 시간을 쓰게 되면, 우 리는 당장의 사소한 만족을 얻는 데 그치고 장래의 더 큰 가치를 놓칠 공산이 크다. 따라서 우리가 하고 싶은 일들의 경중(輕重)을 가리는 우선순위(優先順位)를 슬기롭게 정하고 그 우선 순위에 따라서 시간을 안 배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아마 이것은 삶의 성패가 걸려 있는 중요한 문제의 하나일 것이다.

어떤 일이 더 중요하고 어떤 일이 덜 중요하느냐 하는 문제에 대한 대답은 각 개인의 인생 설계에 따라서 다를 것이다. 학자들은 학문 연구에 우선적으로 시간을 배정해야 할 것이고, 예술가는 창작 활동에 가장 큰 비중을 두고 시간을 안배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원칙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으나, 이 원칙을 실천에 옮기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우리 한국과 같이 개인의 사생활에 대한 주위로부터의 간섭이 비교적 심한 사회에 있어서 시간 사용의 우선순위를 지켜가며 살기 위해서는 강한 의지력과 확고한 중요성이 필요하다.

시간 사용에 있어서 둘째로 중요한 것은 일의 성과가 오르도록 유의해야 한다는 점이다. 예컨대 학자에게 연구가 중요하다고 해서 모든 시간을 연구에만 사용하도록 시간을 안배하는 것은 반드시 현명한 처사가 아닐 것이다.

연구 생활을 오래 계속할 수 있도록 건강을 증진하기 위하여 운동하는 시간을 마련할 필요도 있을 것이고, 연구의 능률이 높아지도록 휴식을 취하거나 기분 전환을 꾀하는 것도 중요할 것이다.

운동, 휴식, 오락 등을 위해서 사용되는 시간이 지나치게 많은 것은 물론 바람직하지 않으나, 생활 전체가 조화를 얻도록 시간을 안배해야 할 것이다.

사용하는 시간에 비례해서 일이 많이 되는 것은 아니다. 정신을 집중하면 짧은 시간에도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경우가 있고, 산만한 기분으로 일을 하면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도 성과가 부실할 수가 있다. 일할 때는 잡념을 버리고 정신을 집중하도록 습관을 들이는 것은 제 한된 시간을 값지게 사용하는 데 필요한 또 하나의 유의 사항이다.

하루 24시간이 부족해서 절절매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시간이 남아서 곤란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일선에서 은퇴한 노인들에게 흔히 있는 일이며, 젊은 사람들 가운데도 더러는 시간이 남아서 삶이 지루한 경우가 있다. 주체하기 어려울 정도로 시간이 남는 것은 휴식할 틈이 없을 정도로 시간에 쫓기는 것보다 오히려 더 큰 문제이다.

남과 같이 가지고 있는 24시간이 너무 많다는 것은 할 일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에게 일거리가 없다는 것은 어디엔가 잘못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 잘못은 주로 본인 자신에게 책임이 있을 경우도 있고 사회에 책임이 있을 경우도 있다. 시간이 남아돌지 않도록 자신에게 맞는 일거리를 찾는 것은 각자의 책임이요, 일거리를 찾는 사람에게 최대한의 기회를 고르게 나누어주는 것은 사회의 책임이다.

하루는 누구에게나 24시간이다. 이 24시간이 너무 부족하지도 않고 너무 남아돌지도 않도록 알맞게 생활을 설계하는 것은 행복으로 가는 삶의 슬기로운 출발점이다.



김태길(1920~2009): 수필가, 철학자. 호는 우송(友松). 충북 충주 출생. 일본 동경대학 법학부 수학, 서울 문리대 철학과 졸업. 동 대학원 졸업, 미국 Johns Hopkins 대학원 철학과 졸업(철학박사). 도의문화저작상 수상했으며, 서울대학교 교수, 철학연구회 회장, 대한민국학술원 회장 등을 지냈다.
주요 저서로는 『윤리학』, 『한국 대학생의 가치관』, 『존 두이』, 『새로운 가치관의 지향』, 『웃는 갈대』, 『변혁 시대의 사회 철학』, 『빛이 그리운 생각들』, 『검은마음 흰마음』, 『마음의 그림자』, 『삶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흐르지 않은 세월』 등 다수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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