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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신춘단상 / 김태길

부흐고비 2023. 4. 5. 22:35

새해를 맞으며 우리들은 서로 행운을 빌고 덕담을 나눈다. 그러한 덕담이 실제 어떤 영향력을 발휘할 것 같지는 않으나, 듣기 싫지 않다.

나는 요즈음 운수라는 것을 무시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한때는 모든 것이 사람 하기에 달렸다고 방자하게 생각하는 버릇도 있었으나, 근자에는 인력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곤 한다.

그러나 역시 많은 것이 인간의 슬기와 노력에 달려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며, 한 번밖에 없는 나의 삶을 부끄럽지 않은 작품으로 키우고 다듬을 책임은 나 자신에게 지워야 할 것이다. 서양의 선철(先哲)은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였고, 동양의 성현은 "사람이 할 바를 다하고 천명을 기다리라."고 가르쳤다.

속담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도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다. 여기서 '이름(名)'이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저 속담이 암시하는 인생관에 큰 차이가 생긴다. '이름을 남긴다'는 말은 본래 인간다운 업적을 찬양한 뜻으로 보아야 할 것이나, 글자 그대로 '이름'이 알려짐을 숭상하는 뜻으로 받아들인 많은 사람이 어리석은 속물근성의 노예가 되곤 하였다.

옛날부터 많은 사람이 명성을 사랑하였다. 명성의 근거인 뛰어난 업적은 뒷전으로 미루고 명성을 얻는 일에 급급하였다. 명성은 본래 큰 업적에 따르는 부수적 현상이었으나, 사람들은 명성 그 자체를 삶의 직접 목적으로서 추구하기를 좋아하였다.

명성이라는 것이 사람의 업적 내지 진가와 일치하는 것이라면 업적을 쌓으려는 태도와 명성을 추구하는 태도는 비슷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그러나 인물에 대한 평가란 주관에 따라서 다르기 쉽고 우연스러운 조건의 영향을 받기 쉬운 까닭에, 업적을 사랑하는 길과 명성을 사랑하는 길은 결과에 있어서도 차이가 큰 두 갈래의 딴 길이다.

신문과 방송 등 대중 매체의 영향력이 막대한 현대 사회에 있어서는 특히 이름과 사실 사이의 거리가 멀어지기 쉽다. 사람들이 애써 추구하는 것이 이름이냐 일이냐에 따라서 사회의 양상 전체가 크게 달라질 것도 같다.

흐지부지한 삶을 넘어서서 뭔가 뚜렷한 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생활의 목표를 세우고 계획을 짜야 한다. 움막이나 초가삼간을 짓기 위해서는 설계도가 없어도 되겠지만, 크고 아름다운 건물을 짓기 위해서는 반드시 설계도가 있어야 한다. 사정은 생(生)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여서 목표와 설계 없이 큰 업적을 남기기는 어려울 것이다.

건축물의 설계도는 애초에 완벽하고 세밀하게 만들어서 그대로 시공(施工)에 옮긴다. 그러나 인생의 설계는 처음부터 세밀하고 완벽하게 확정하기가 어렵다. 수십 년의 긴 세월을 두고 실천해야 할 설계이며 그 긴 세월 동안에 일어날 변화를 미리 내다볼 수 없는 까닭에, 인생의 설계는 우선 큰 방향만을 정하고 돌아가는 상황에 적응해 가며 목표에 접근하게 마련이다.

따라서 인생의 설계는 해마다 그 해의 중간 목표와 그 해의 계획을 세우는 것이 바람직하며, 그 해의 계획은 정초에 마련하는 것이 옛날부터의 상식이다.

계획을 세우는 일은 비교적 용이하나 그것을 실천에 옮기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처음 며칠 동안은 그런대로 계획에 따라서 행동하지만 얼마 안 가서 흐지부지 되고 만다. 당장 편하고 즐거운 시간을 갖는 쪽으로 기울어지기 쉬운 것이 우리들 평범한 사람들의 심리이고, 이 심리에 이끌리다 보면 작심삼일의 용두사미가 된다.

산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일종의 투쟁이다. 남과의 싸움에서 이기기를 꾀하기 전에 우선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일이 중요하다. 남과의 싸움에서 강한 사람은 겉으로 보기에 큰일을 하고 자기와의 싸움에서 강한 사람은 안으로 보람이 가득한 일을 한다.

너무 욕심을 부려서 거창한 계획을 세우면 실천이 뒤따르기 어렵다. 겉으로 보기에 화려한 일을 하여 세상에 알려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인지 분수나 실정을 무시하고 지나치게 큰 계획을 세워서 뒷감당을 못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지나치게 소극적이어서 패기가 너무 없는 것도 탈이지만, 허황한 꿈에 부풀어 과욕을 부리는 것도 슬기로운 태도가 아니다.

1년이라는 세월은 짧지도 않고 길지도 않은 시간이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이 시간에 맞추어서 차분한 계획을 세울 일이다. 지나치게 큰 계획을 세워서 용두사미가 되느니 다는 차라리 여유를 가지고 알뜰하게 실천할 수 있는 계획이 바람직할 것이다.

1년의 계획은 일생의 계획의 한 고리에 해당한다. 1년의 계획만을 따로 떼어서 보면 별로 대단할 것이 없더라도 일생의 계획의 일환으로서 볼 때 큰 의의가 있는 계획이라면 그것은 훌륭한 계획이다. 단번에 정상으로 뛰어오르고자 욕심을 부리는 사람들보다도 한 켜 한 켜 벽돌을 쌓듯 정진하는 사람들이 결국에 가서는 더 큰일을 한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사회 속에 살게 마련인 우리는 남에게 주기도 하고 남으로부터 받기도 한다. 빼앗기다시피 강요당하여 주는 것은 불쾌한 일이나 주고 싶은 마음에서 흔연히 주는 것은 기쁜 일이다. 원치 않는 것을 받거나 호의가 없는 사람으로부터 받는 것은 괴로운 일이나, 사랑이 담긴 것을 요긴하게 받는 것은 흔쾌한 일이다.

주는 편이 더 많게 사는 사람도 있고 받는 편이 더 많게 사는 사람도 있다. 내가 준 것이 얼마나 되고 받은 것은 얼마나 되는지 정확하게 계산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직관적 판단만으로도 어느 정도의 짐작은 할 수 있음직하다.

나는 이제까지 남에게 준 것보다는 남에게서 받은 것이 많은 삶을 살아온 듯한 느낌이 강하다. 사랑이 담긴 것을 받는 기쁨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큰 것이지만, 평생을 두고 받는 편이 많도록 산다는 것은 내가 못생긴 사람이라는 뜻도 될 것 같다.

이제라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 받는 편보다 주는 편이 많은 떳떳한 삶을 가져 보고 싶은 생각이 가끔 떠오른다. 새해의 계획 가운데 이 생각을 반영하여 어느 정도 실천에 옮길 수 있다면, 보람된 한 해를 갖는 결과가 될 것 같기도 하다.



김태길(1920~2009): 수필가, 철학자. 호는 우송(友松). 충북 충주 출생. 일본 동경대학 법학부 수학, 서울 문리대 철학과 졸업. 동 대학원 졸업, 미국 Johns Hopkins 대학원 철학과 졸업(철학박사). 도의문화저작상 수상했으며, 서울대학교 교수, 철학연구회 회장, 대한민국학술원 회장 등을 지냈다.
주요 저서로는 『윤리학』, 『한국 대학생의 가치관』, 『존 두이』, 『새로운 가치관의 지향』, 『웃는 갈대』, 『변혁 시대의 사회 철학』, 『빛이 그리운 생각들』, 『검은마음 흰마음』, 『마음의 그림자』, 『삶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흐르지 않은 세월』 등 다수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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