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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나라 사랑의 허실 / 김태길

부흐고비 2023. 4. 19. 08:35

한국산 자동차가 캐나다와 미국 등 외국에서 잘 팔리는 이유의 하나는 그곳으로 이민간 교포들이 솔선하여 국산차를 사기 때문이라고 들었다. 한국산 자동차의 판매소가 없는 미국 어느 시골에 사는 교포는 포니 차를 구하기 위하여 수천 리 먼길을 달려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역만리 해외에서 한국산 자동차를 몰고 달릴 때 우리 교포들은 형언하기 어려운 환희와 긍지를 느낀다. 그만큼 우리 한국인은 겨레와 나라에 대한 향념이 강한 것이다.

국제 운동 경기가 있을 때마다 나는 우리 한국인의 나라 사랑을 피부로 느낀다. 어느 나라 국민인들 제 나라 선수들에 대하여 뜨거운 응원을 보내지 않을까만, 우리 한국인의 응원은 보통 이상으로 열기에 넘친다. 텔레비전 앞에 모여서 박수를 치며 목청을 높일 때, 온 국민은 글자 그대로 하나가 된다.

해외에 이민간 교포들이 한국산 자동차를 애용하듯 국내외의 모든 국민이 항상 그리고 한결같이 국산품을 애용한다면, 한국 경제에는 별다른 걱정이 없을 것이다. 미국의 보호무역 정책이 우리나라의 시장을 공개하라고 아무리 압력을 가하더라도, 상술에 능한 일본인들이 별의별 농간을 부리며 파고든다 하더라도, 우리나라 경제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우리 한국 사람들은 외국 제품을 좋아하기로 이름이 났다. 해외로 여행을 나가면 어느 나라 사람들보다도 많은 물건을 사 가지고 돌아온다. 한국에서 수출한 물건을 외국 제품으로 알고 비싸게 사들이는 경우가 많을 정도로 외국 상표쯤은 붙어 있어야 만족해 한다. 외국의 유명한 회사의 상표조차도 없을 경우에는 서양식 이름만이라도 서양 글자로 붙어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 선수들을 응원할 때 보여 준 그 일치된 나라 사랑의 절반만 평소에 발휘하더라 도, 우리 발전과 번영은 보증수표처럼 확실할 것이다. 그러나 평상시의 우리 한국 사람들은 세포가 분열하듯 이리 갈라지고 또 저리 갈라진다. 여당과 야당이 갈라지고, 같은 정당 내부에서도 다시 파벌의 분열이 생긴다. 사람들은 지방을 따라서 나누어지고, 세대를 따라서 나누어지며, 또 출신 학교를 따라서 나누어진다. 남과 북이 통일을 이룩해야 한다고 소리 높여 외치는 사람들이 남한 내부에서 사분오열하며 구심점을 찾지 못한다.

우리 한국인에게 겨레를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 피가 일부에게만 흐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남녀 노소 모두에게 도도히 흐르 고 있다. 그러나 우리들의 겨레 사랑과 나라 사랑에는 꾸준한 일관성이 부족하다. 일관성이 부족한 까닭에 겨레와 나라에 대한 사랑이 한갓 감정 표출의 차원에서 멈추고, 실질적인 역량 으로서 살기 좋은 나라를 실현하는 데 결정적 역할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개인에 대한 사랑이든 나라에 대한 사랑이든, 사랑의 심리의 바탕은 감정이다. 감정의 심리는 그것이 뜨거울 수 있다는 장점도 가지고 있지만, 상황에 따라서 흔들리기 쉽다는 단점도 가지고 있다.

한국 사람의 나라 사랑에 일관성이 부족한 것은 이 단점이 작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단점을 보완하여 우리들의 나라 사랑에 일관성을 부여할 수 있다면, 한국의 내일은 태양처럼 밝을 터인데.

감정과 아울러 인간의 마음을 구성하는 또 하나의 심리 작용인 지성(性)에는, 감정이 갖는 뜨거움의 장점은 없으나, 감정에는 결여된 일관성과 냉철함의 장점이 있다. 만약 우리가 한국인의 뜨거운 나라 사랑의 감정에 냉철하고 논리적인 지성을 접목하는 데 성공한다면, 우리들의 나라 사랑은 일관성과 안정성을 얻을 것이며, 우리 한국을 진정 살기 좋은 나라로 건설하기에 필요한 기반을 얻게 될 것이다.

도대체 ‘나라’라는 것이 무엇인지 한번쯤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거기에는 사람들이 있고 자연이 있으며 또 여러 가지 문화가 들어있다. 나라를 구성하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며 또 문화를 사랑할 때, 나라 사랑은 실질과 구체성을 갖게 된다. 특히 같은 나라의 사람들, 즉 국민에 대한 사랑이 없을 때, 나라 사랑은 막연한 이름에 대한 애착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우리들은 ‘한민족’이니 ‘조국’이니 하는 말에 대한 사랑이 뜨거운 데 비해서, 한국의 사람들과 산과 들과 문화를 사랑하는 마음은 몹시 미지근하다. 특히 사람들끼리는 서로 미워하는 경향조차 현저하다. 겨레란 무엇이고 나라란 무엇인지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김태길(1920~2009): 수필가, 철학자. 호는 우송(友松). 충북 충주 출생. 일본 동경대학 법학부 수학, 서울 문리대 철학과 졸업. 동 대학원 졸업, 미국 Johns Hopkins 대학원 철학과 졸업(철학박사). 도의문화저작상 수상했으며, 서울대학교 교수, 철학연구회 회장, 대한민국학술원 회장 등을 지냈다.
주요 저서로는 『윤리학』, 『한국 대학생의 가치관』, 『존 두이』, 『새로운 가치관의 지향』, 『웃는 갈대』, 『변혁 시대의 사회 철학』, 『빛이 그리운 생각들』, 『검은마음 흰마음』, 『마음의 그림자』, 『삶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흐르지 않은 세월』 등 다수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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