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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둘이 마주 앉아 비밀에 가까운 이야기를 털어놓는 친구에 대해서 나는 깊은 정을 느낀다. 친구로 믿기에 그런 이야기까지 숨기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고마움에 젖은 귀를 기울인다. 그것은 아무에게나 알려서는 안 될 소중한 이야기 같아서, 나만 알고 다른 사람에게는 전하지 않겠다고 속으로 다짐한다.

묵묵히 미소만 지으며 말이 없는 친구도 좋지만 쉴새 없이 떠들어대는 친구도 싫지 않다. 다만 그 말끝마다 가시가 돋힌 이야기는 신경을 괴롭히며 은근히 자기 자랑만 늘어놓는 이야기에는 흥미가 적다.

가시가 돋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내가 미워하는 사람을 내려치는 풍자일 경우에는 속이 시원하다.

비록 자기 자랑이라 할지라도 내가 아끼는 사람이 나도 몰랐던 성공담을 처음 들려줄 경우에는 더없이 기쁘다. 그러나 아무리 듣기 좋은 풍자나 성공담도 두 번 거듭 듣게 되면 역시 지루하다.

거드름을 피우며 교만이 뚝뚝 떨어지는 사람, 또는 관료적인 태도가 농후한 사람을 존경하고 사랑할 수 있을 정도로 나는 관대한 성품이 못 된다. 관등(官等)이나 직위가 높이 올라간 뒤부터 갑자기 태도가 달라진 친구를 대할 때는 실망과 연민의 정을 느낀다. 그러나 그 실망과 연민을 대담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마치 구정이 새로운 듯 비굴한 미소를 짓고 섰는 나 자신에 대한 실망과 연민에 비하면 저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세상에 명성이 자자한 특출한 인물에 대하여 존경심을 느끼는 것은 그가 아주 평범한 사람처럼 소박하고 겸손하게 거동하는 것을 목격했을 때이다. ‘나는 보통 사람과는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는 듯 거드름을 피우는 친구를 볼 때마다 현대 매스컴의 폐단이 크다는 것을 통감한다.

세상에 별로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 가운데 정말 존경받을 만한 인물이 묻혀 있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야심에 가득 차고 공격적이며 잔망하고 약삭빠른 친구들이 명성을 떨치기 쉬운 오늘의 가치 풍토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별다른 용건은 없지만 궁금하다고 전화 한 통 걸어주는 친구에 대해서 나는 정말 깊은 감사를 느낀다.

여행 갔던 길에 그곳 토산물 따위를 정표(情)로 사 들고 찾아온 친구에 대해서 느끼는 고마움도 마음에 파문을 일으킨다. 삶이 외롭지 않다는 증거를 보는 것 같아서 가슴이 따뜻해 온다.

그러나 "고맙다"는 인사를 입 밖에 내는 일은 적다. 다음 기회에 ‘나도 행동으로 보답하리라.’ 하고 마음속으로 다짐하지만, 사실 그렇게 실천하기가 용이하지 않은 까닭에 결국 멋대가리 없는 위인이 되고 만다.

누구나 그렇듯이 나도 역시 아름다운 여자에 호감을 느낀다. 그러나 외모만 아름답고 속이 텅텅 빈 여자를 만나면 몹시 아까운 생각이 든다. 그리고 얼굴이나 몸매가 아름다움을 내세워 교만이 똑똑 떨어지는 여자를 보았을 때 나는 그를 속이 빈 여자라고 추측하는 나쁜 버릇을 가졌다.

가슴이 풍만한 여자는 보는 사람의 마음에도 풍족감을 안겨 준다. 가슴이 풍만한 여자는 두뇌가 좋지 않다는 말이 있지만, 여자의 머리가 너무 좋으면 냉냉한 바람을 일으켜 그 매력에 가시가 돋는다.

남녀를 막론하고 머리가 좋다는 것이 정말 그토록 중요한 것인지에 관하여 가끔 회의를 느낀다. 같은 값이면 머리도 좋은 것이 바람직함에는 틀림이 없지만, 사람에게는 재능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매양 절실하게 느끼곤 한다. 숭굴숭굴하게 생긴 얼굴에 입술 연지를 바르지 않은 여자를 보면 마음이 부드러워진다. 왠지 모르게 복을 받을 사람 같아서, 남의 일이라도 기쁘다. 사람이란 누구나 복을 받아야 할 귀중한 존재이지만, 특히 여자는 복을 받아야 한다는 생 이 내 가슴을 점령한 지 벌써 오래다.

입술 연지를 바를 경우에는 아주 맵시있게 발라야 한다. 색깔도 알맞는 것을 사용해야 하지만, 칠이 그 영역을 벗어나도 보기에 흉하다. 입술이 아닌 곳에까 지 붉은 칠을 하고 마치 거기도 입술인 것처럼 시선을 끄는 것은 좋은 취미가 아니다.

나는 ‘남녀동등’의 주장에 대하여 쌍수로 찬성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람이지만, 투사형 여성에 대해서는 별로 호감을 갖지 못한다. 마치 세상의 모든 남자들이 결속해서 고의적으로 여자를 학대하기나 한 것처럼 기회마다 물고 늘어지는 ‘여성 지도자’에 대해서는 의문을 금치 못한다. 여성의 남성화와 그리고 남성과의 정면충돌을 통하여 여성의 지위를 향상 시킬 수 있다고 믿는 신념에 대해서 회의를 느끼는 나는, 여성을 위해서 큰일을 할 수 있는 진정한 여성 지도자는 참으로 여자다운 여자들 가운데 숨어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관계를 경쟁의 측면에서 볼 때, 우열을 판가름하는 궁극의 관건은 역시 실력이다. 여자가 남자를 실력으로 누르는 길은 여성의 특성과 특기를 살리는 방향으로 모색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좋은 사람’과 ‘싫은 사람’을 외람되이 갈라가며 부질없는 붓장난을 일삼는 가운데 다른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두려움이 문득문득 떠오른다. 오해와 시기심 그리고 이해관계의 대립 등으로 어지럽기 짝이 없는 오늘의 세 태 속에서, 어찌 남들의 대중 없는 의견을 일일이 개의하랴. 다만 내가 좋아하는 일부의 사람들로부터만이라도 과히 험악한 소리를 듣고 싶지 않다는 인간적인 욕망만은 버리지 못한다.

 



김태길(1920~2009): 수필가, 철학자. 호는 우송(友松). 충북 충주 출생. 일본 동경대학 법학부 수학, 서울 문리대 철학과 졸업. 동 대학원 졸업, 미국 Johns Hopkins 대학원 철학과 졸업(철학박사). 도의문화저작상 수상했으며, 서울대학교 교수, 철학연구회 회장, 대한민국학술원 회장 등을 지냈다.
주요 저서로는 『윤리학』, 『한국 대학생의 가치관』, 『존 두이』, 『새로운 가치관의 지향』, 『웃는 갈대』, 『변혁 시대의 사회 철학』, 『빛이 그리운 생각들』, 『검은마음 흰마음』, 『마음의 그림자』, 『삶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흐르지 않은 세월』 등 다수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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