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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밭에 섰다. 바다를 보기 위해 가파른 하루를 내던지고 달려왔다. 통성명을 생략한 채 다짜고짜 성내며 달려드는 바람으로 휘청인다. 속내를 터놓기도 전에, 옷깃을 풀어헤치고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린다. 이방인의 침입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싸늘한 한기까지 몰고 와 겁박한다. 바람과 내통한 파도는 거세게 밀어닥치며 모래톱을 후려친다. 어스름이 다가와 사위를 다독여보지만, 뿌리라도 뽑을 것처럼 포효하며 요동치는 바람으로 속수무책이다.

바다를 쟁여 넣으려 호기롭게 나섰던 나는 주춤한다. 쪽빛 숨결을 들이마시는 건 고사하고 숨통을 틀어쥐는 바람의 위력에 뒷걸음친다. 허둥대다가 뭔가에 툭 걸린다. 돌이다. 주먹만 한 돌이 모래밭에 처박혀 있다. 발꿈치에 걸리지 않았다면 알아채지 못했을 외진 곳에 오도카니 붙박였다.

유배라도 당한 걸까. 온갖 고초에 기력이 다한 걸까.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곰보 돌이 모래사장에 파묻혀 옴짝 않는다. 외따로이 내쳐져 막다른 곳에 틀어박힌 신세다. 격랑이 이는 바다를 삼킨 것도 모자라는지, 바람은 바닷가 한 귀퉁이에서 더부살이하는 돌까지 집어삼키려고 갈기를 세운다. 저항하면 싹쓸이해 버리는 게 누천년에 걸친 바람의 습성이다. 상처받은 이의 가슴처럼 뼈대를 드러낸 채 숭숭 뚫린 구멍으로 들이치는 바람을 맞는 돌이 황막하다.

칠흑 같은 밤엔 파도 소리를 들으며 한숨이 깊어졌으리. 뭇사람들의 발길질에 채여 살가죽이 까지고 코쭝배기가 깨졌을 테다. 밀물에 수장당하고, 성난 파도에 휩쓸려 떠돌기도 했을 것이다. 제 한 몸 허물며 억만년을 넘어왔을 돌이 묵묵하다.

왠지 마음이 쓰여 돌을 주워 든다. 오래 묵은 기억이 손끝에 와 닿는다. 억만년 전의 뜨거운 용암의 기운이 스쳐 가고, 천지를 흔드는 폭발의 굉음이 흘러나온다. 용암 속의 가스가 빠져나간 자리마다 구멍이 들어앉아 우둘투둘하다. 태생부터 얽둑빼기였으니 지나는 이의 눈길을 사로잡을 나이테를 그리지 못했다. 흠모할 만한 특출한 모양도 아니었다. 자잘한 구멍으로 둘러친 몸피는 어둡다 못해 거무칙칙했다.

누군들 구멍이나 품고 싶었을까. 반드러운 모양새로 독에 들어앉아 한가로이 시간을 삭히는 누름돌이 되고 싶었다. 내로라하는 집안의 위세를 드러내는 주춧돌로 기억되어도 좋겠다. 까뒤집히는 속내를 가라앉히며 숨을 골라주는 댓돌의 위엄이 부러웠다. 매끈한 몽돌처럼 벼려져 어우렁더우렁 왁자하게 수다라도 떨고 싶은 소망이 왜 없었으랴.

이름 없는 돌로 숱하게 무명의 시간을 건너왔다. 불에 탄 시간을 뒤로하고 땅속에 묻혀 있을라치면 곡괭이가 날아들고 호미가 파고들었다. 등짝에서 시퍼런 불꽃이 일고 거죽이 패였다. 여기저기 치이고 받친 채로 땅속에서 내쫓기기 일쑤였다. 어디에도 쓸모없다며 방패막이로 내몰렸다. 얼기설기 허튼 층으로 쌓인 돌담에 등때기를 내주어 창과 화살을 막아내는 성벽으로, 들이치는 바람을 다독이며 여염집을 지키는 담으로 뼛골이 닳도록 보초를 섰다. 지각변동으로 세상이 뒤집히자 유랑민이 되어 이곳저곳을 떠돌다 예까지 왔다.

모진 풍파에 살점을 덜어내고 구멍투성이로 뒹굴지언정 살아야 할 의미를 찾아 버티는 돌이 가련하다. 더는 갈 곳 없어 휘몰아치는 바람을 안고 생을 견뎌낸 여인이 밀물져 온다.

할머니는 박색에다 제 이름 석 자도 쓸 줄 모르는 까막눈이었다. 날 때부터 얼굴의 반을 가리는 반점으로 점박이라고 불렸다. 타고난 흠은 운명을 얽둑배기로 옭아맸다. 할머니가 장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날은 할아버지의 노기 서린 목소리가 담을 넘었다. 셈법을 몰라 장사치의 상술에 손해를 보는 할머니가 남부끄럽다고 역정을 냈다. 얼굴의 흉 때문에 낮잡아 보여 덤터기를 씌우는 거라며, 타박을 일삼았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고개를 숙이고 한쪽으로 물러나 있었다. 첫 결혼에서 소박맞고 재를 넘어 시집온 할머니는 죄인이었다. 종부로 들어왔지만, 혈육을 얻지 못해 작은집에서 양자를 들였다. 그마저 홍역을 앓다가 죽게 되자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등을 돌렸다. 있는 자식도 보듬지 못하는 무지렁이라며 도포 자락 휘날리게 찬바람을 일으켰다. 가문에 흠집을 낼 수 없었던 할아버지는 안방에 시앗을 들여 기어이 종손을 보았다.

생과부로 골방에 거처하게 된 할머니의 가슴엔 시린 바람이 불었다. 어려서부터 무녀리라는 사람들의 수군거림과 멸시를 받아 온 구멍 숭숭한 가슴이었다. 구들장이 끓어오르도록 군불을 때 봐도 찬기가 사그라지지 않았다. 방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젖먹이의 울음소리를 따라 지아비의 너털웃음 소리가 새어 나오면, 소용돌이치는 바람을 다독이느라 속이 타들어 갔다.

숱한 상처로 곰보가 된 세월. 단 한 번도 호시절을 누려보지 못한 할머니의 나날은 비루했다. 백면서생이나 다름없던 할아버지가 가산을 탕진하고 만주로 떠나버렸을 적엔 빈 곳간을 지키며 생계를 꾸리느라 몸 성할 날이 없었다. 소여물을 썰다가 작두에 손가락이 잘리고, 땔감을 구하러 산에 갔다가 굴러 떨어져 피딱지가 들러붙어도 들여다봐 주는 이 없어 홀로 아물렸다. 친정에 발걸음 말라는 증조부의 냉대로 마음 한 자락 둘 데 없었다.

할머니라고 왜 항변하고 싶지 않았겠는가. 차라리 맞닥뜨린 바람에 내동댕이쳐져 깨지고 부서지고 싶었다. 가슴팍에 박힌 절망으로 나뒹굴고 싶었다. 운명에 차여 제 몸뚱이를 구박데기로 몽글려야 했던 고행이 섧다. 허나, 온몸에 형틀이 파여도 포기할 수 없는 게 목숨 아니던가. 세상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지라도 살아보자고 사나운 마음 거뒀다. 기우는 해를 바라보며 탄식을 쏟아내고 차오르는 어둠 속에서 별자리를 세며 설움을 달랬다. 고인 울음이 사그라지고 거친 숨이 잦아들고 나서야 구멍을 품은 가슴이 담담해졌다.

가만히 돌을 손으로 쓸어본다. 생의 의지를 분지르는 싹쓸바람에 부딪혀온 생애가 서느렇게 감지된다. 구멍마다 속속들이 들여다보이는 시련이 까슬하다. 언감생심 우러르는 돌이 되어보지도 못하고, 상처투성이로 굴러온 기억들이 고스란하다. 세월은 시간에 풍화되어 바스러진다. 모래밭의 자국들은 너울거리는 파도에 쓸려나간다. 살아온 흔적으로 남은 구멍만이 얽은 무늬로 궤적을 긋는다.

저 멀리 소쿠라지는 포말 위로 푸른 어둠이 내려앉는다. 싸한 바람이 불어온다. 하릴없이 집어 든 돌을 제자리에 놓아둔다. 적막 천지인 바닷가에서 또다시 한뎃잠을 자게 될 돌이 쓸쓸하다.
// 제10회 등대문학상 최우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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