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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쇠물고기 / 홍윤선

부흐고비 2023. 6. 18. 11:56

화장실이 부뚜막 같다. 수선사 주지 스님의 뜻이라고 한다. 해우소나 뒷간이 주는 절집 인상이 여기서는 무너진다. 실내화가 얌전히 놓였는데도 맨발로 들어가는 이가 적지 않다. 옆으로 길게 뻗은 화장실 창은 거치적대는 바깥경치를 잘라내 액자가 되고, 근심을 푸는 속인은 틀 안에 들어온 풍경화를 제 것인 양 누린다. 고졸한 대웅전이 살림집 안채 같고 곳곳에 놓인 돌그릇이며 고른 잔디와 소담한 연못은 한옥 마당처럼 인정스럽다. 신들의 집이 예사로워 오히려 신성하다. 그리 높지 않아도 산바람이 있어 지글거리는 도시 더위와는 사뭇 다르다. 눈앞에 놓인 첩첩의 산을 바라보며 해를 피해 앉았는데 희미한 풍령 소리 들려온다. 나도 모르게 두리번거린다. 지리산 웅석봉 자락, 변두리 작은 사찰, 거기 추녀 끝에 조그마한 풍경이 흔들린다.

언제부터였나. 대문에 걸어둔 쇠종이 제대로 울리지 않는다. 현관문 버튼의 기계음에 밀렸는지 뭉툭한 탁음마저 나는 둥 마는 둥 해도 언죽번죽 태연하다. 한때는 레이스와 반짝이를 붙인 치마폭을 나붓이 펼치고 문을 여닫을 때마다 고관대작 부인처럼 방문객을 맞았었다. 스무 해 가까이 출입문을 지키는 동안 색은 얼룩덜룩 바래고 먼지는 사이사이 박혀 과거의 영예는 어디로 갔는지 그새 흉물스러워졌다.

처음부터 그러지 않았을 터. 종의 외피가 진동을 방해하나 싶어 걷어냈다. 화려했던 치맛자락은 가위에 난도질당하고 남은 큐빅마저 후두둑 떨어져 바닥에 낭자하다. 몸통을 드러낸다. 속에 든 구슬에도 때가 주버기로 끼어 오래 돌보지 않은 사람의 몸뚱이 같다. 혹시나 해서 다시 울려본다. 여전히 시큰둥하다. 제대로 울지 않으니 버릴까 하다 이리저리 살펴보니 보일 듯 말 듯 미세한 금이 여러 군데 생겼다. 그 틈으로 소리가 새고 있다. 결이 깨진 몸에서 앓는 소리가 났다. 고통에 찬 신음일지도 모른다.

이름난 사찰의 범종은 가만히 있어도 위엄있다. 규모에 걸맞게 팔작지붕을 얹은 종각이 사방으로 호위하고 거기에 듬직한 법고와 날렵한 운판, 여의주를 문 목어까지 어우러져 쳐다만 보아도 숭고하다. 당목으로 타종하면 큰스님의 가르침이 파동을 따라 금세라도 산 아래까지 퍼져나갈 듯하다. 그에 비하면 주먹만 한 풍경은 종잇장 같은 물고기 한 마리 겨우 제 몸에 매달았다. 절간이 아니라도 바람이 드나드는 곳이면 여염집 처마 끝도 마다하지 않는다. 살찬 햇발에 달궈지고 교교한 달빛에 식은 날들이 수두룩하건만 뜨거운 불에 제련된 범종에 비할 바 못 되어 울림마저 미미하다. 갈 길이 서로 다른 것을 어이할까.

볼 꼬집어 주는 사람 있으면 핑계 삼아 제 설움을 얹어 통곡이라도 해볼 텐데 밖에서 두드려주는 이가 없다. 혼자 글썽대는 눈물은 주저앉아 안으로 맴돈다. 토해낼 수 없는 처지가 기막혀 그토록 많은 오열을 삼켰던 걸까. 섬약한 목소리로 신호를 보내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옛날 먼 산에서 들짐승이 가늘게 울부짖으면 마을은 주변을 살피고 단속을 하였듯 어떤 여음은 잊고 있던 존재를 끄집어낸다. 누군가 옆에서 흐느끼고 있을 때 내가 누리는 평안을 돌아보게 된다. 풍탁은 그렇게 범종과 다른 방법으로 울어 생각을 깨운다. 범종의 빈 시간을 메우며 무시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게 한다.

쇠물고기 한 마리가 파란 하늘을 푸른 바다처럼 누빈다. 바다와 하늘이 맞닿은 수평선까지 가본 물고기일 테다. 그 끝도 별반 다르지 않아 갈 길을 잃고 새로운 세계로 뛰어올랐겠지. 모든 꿈꾸는 이가 그토록 무모하듯, 본토와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신이 지시하는 새 땅으로 향했던 성경의 아브라함처럼 처음에는 그저 그런 물고기였을 것이다. 이유가 무엇이든 떠난 데는 지금의 자리에 균열이 생겼기 때문이겠다. 누구는 패배자라고도 했겠지. 나섰다 한들 익숙했던 지난날로 돌아가고 싶은 고집이 어찌 없었을까. 매 순간 헤매며 묻고 내디디어 첫 조상이 되었으리라. 물고기는 바다로 가려하는 관성을 끊고자 등지느러미를 묶어 종어(鐘魚)가 되었다.

집을 찾지 못하는 꿈을 자주 꾸었다. 분명히 왔던 곳인데 집으로 가는 방법을 몰라 파들파들 분투하며 꿈속을 바장거렸다. 얕은 잠 끝, 새벽이면 번번이 깨었다. 성벽, 절벽, 층벽, 장벽이 앞을 가로질렀다. 그런 날에는 세상이 온통 견고한 철벽 같았다. 영문도 모른 채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앞날이 보이지 않아 자꾸 뒷걸음질치고 싶은데 시간은 나를 억지춘향으로 끌고 나와 함부로 내달렸다. 어설피 봉합해서도 서둘러 끝낼 수도 없다. 속심이 흔들릴 만큼 앓아내고 온몸이 갈라질 만치 치러내야 다른 세계를 찾는다. 잔금 사이로 귀를 기울이면 낯선 소리가 들리고 숙였던 고개를 들면 빠끔한 틈으로 가려있던 생생한 길이 어렴풋이 보인다. 마침내 쇠물고기가 바닥을 힘껏 휘저어 틈서리로 돋쳐 오른다.

마음이 가는 대로 하여도 사리에 어긋나지 않으면 좋으련만. 선택은 명확하고 후회는 덜 하게 세월이 그렇게 빚어주면 안심이 될 텐데. 살아가는 일에 정해진 답이 있기나 할까. 은사님과 통화를 했다. 노교수님은 내 이름을 다정히 부르며 당신의 나이가 되어도 모르겠다고 수줍게 고백한다. 질문받지 않아도 되는 때란 없다는 뜻이겠지. 여든의 교수님도 다가오는 것들에 머뭇거리며 지금도 멈추지 않고 나아가는 중일 거라 헤아린다. 쇠물고기가 틈새기로 본 도약은 자신만의 속도로 자기 걸음을 걷는 자가 오목오목 새긴 발자국이었을 게다.

그러쥐고 있는 것이 전부는 아니라고, 다른 세계가 있으니 너머 세상을 상상해도 된다고 쇠물고기가 미풍 따라 하늘을 유영하며 울려준다. 산사에 미약한 종어성이 바람결을 타고 명징하게 퍼진다.
/ 제6회 스틸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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