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송이가 들썩인다. 달빛에 젖은 만개한 꽃송이 속, 조수간만으로 넘쳐나는 바다가 되었다. 자기완성을 알리는 환희가 강할수록 맹렬해지는 것이 생명의 세계가 아니던가. 꽃의 운우지정에 몰입된 나는 은근슬쩍 염탐꾼이 된다. 꽃송이 속으로 시선을 돌린다. 팔등신 몸매에 왕관을 쓰고 드레스를 걸친 암술이 수술들의 거동을 살핀다. 왜소한 몸체에 턱시도로 단장한 수술들이 암술을 한가운데에 두고 원을 그리고 있다. 발뒤꿈치를 치켜세워도 암술에 다다르기에는 역부족인 수술들. 암술 하나를 에워싼 수술들이 피 토하는 경쟁을 벌인다. 외양으로는 향기롭고 아름답게 보이지만 파고들면 이곳만큼 치열한 짝짓기 경쟁도 없을 것 같다. 꽃의 교접, 암술의 애타는 기다림과 수술들의 숨 막히는 겨룸이다. 암술과 수술이라 하지만 생식적으로 ..
나는 암탉이다. 첫 문장을 써놓고 골똘히 바라본다. 짧고, 의미도 간결해 첫 문장으로 제격이지 싶다. 근데 다시 읽어보니 사람인 내가 암탉이 될 수는 없다. 도대체 무슨 말인가. 나와 암탉 사이가 너무 멀다. 어린 시절 나는 외갓집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외할머니는 장독대의 눈이 녹기가 무섭게 양계장을 청소하고, 날개에 갓 깃털이 돋은 삼십여 마리의 병아리들을 채워 넣었다. 그때부터 물과 모이를 주는 것은 나의 소임이었다. 병아리들은 쑥쑥 자랐다. 솜털이 빠져 민들레 갓털처럼 양계장을 휘휘 돌아다녔다. 꽁지깃이 나고 봉숭아꽃색 벼슬이 맨드라미꽃처럼 붉어지면 중닭이 되었다는 표시이다. 나는 할머니가 시키는 대로 산란용 사료부대를 헐고 푸성귀를 썰어 부지런히 모이를 주었다. 그리고 여름방학을 맞았다. 그날의..
칼을 들고서 경계를 생각한다. 남겨야 할 것과 버릴 것을 가늠 중이다. 사는 일이란 매일 뭔가를 버리고 남기는 일의 반복일지도 모르겠다. 도마 위에 아직 상품의 가치가 없는 가공 전의 제품이 놓여 있다. 이제 막 재료를 조합해 놓은 원형의 상태, 다듬지 않은 물건이다. 양은 오히려 넉넉하다. 그대로 판매한다면 수고를 들이지 않고 음식물쓰레기를 만들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정해진 규격과 모양이 있으니 가공을 거쳐야 상품으로 거듭난다. 성질과 감촉, 색과 크기가 다른 재료들은 이제 하나의 맛으로 통일될 것이다. 글쓰기에서의 주제와 다를 바 없다. 소재와 제재, 구성과 단락, 문장과 어휘가 어우러져 의미를 생성하듯이 말이다. 주제가 중심을 잡아야 작품이 안정적이다. 샌드위치도 각각 독특한 맛이 있다. 양과 크..
장석남 시인 1965년 인천광역시 덕적도에서 태어나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인하대학교대학원 국문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8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새떼들에게로의 망명』,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젖은 눈』,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뺨에 서쪽을 빛내다』, 『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 『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가 있다. 제11회 김수영문학상, 제44회 현대문학상, 제10회 미당문학상, 제23회 김달진문학상, 제28회 상화시인상, 제18회 지훈문학상, 제28회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한양여자대학 문예창작과 교수. 내일 / 장석남 걸어서 다는 갈 수 없는 곳에/ 바다가 있었습니다// 날개로 다는 날..
체신이 강건한 것도 아니다. 농기구 중에서 가장 왜소하고, 인물로 따지면 꾀죄죄한 것이 어디 내놓고 자랑할 만한 게 없다. 성품마저 온순하니 창고 속에 있을 때는 있는 줄 모르게 구석에 처박힌다. 남들이 자리 다 차지한 뒤 겨우 궁둥이 붙일 곳을 찾아 숨어든다. 욕심이란 말도 모르고 그냥 차분할 뿐이다. 옆 친구의 큰 키를 바라보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에 만족하며 더 이상의 중책을 꿈꾸지 않는다. 허접스러운 일만이 자신의 몫이라 해서 투덜거리거나 원망하는 법도 없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 아주 미천하다는 것을 알기에 늘 자족하며 살아간다. 그는 대장장이의 뜨거운 담금질 속에서 태어났다. 용암처럼 이글거리는 화덕 속에서 견딜 때는 왜 그리 뜨겁던지. 풀무가 숨을 내쉴 때마다 치솟던 열기에 가슴..
현직에서 수많은 사람과 어울려 지냈다. 여러 사람과 마주하느라 가족을 잊고 산 것 같다. 이제는 눈앞에 아른거리는 이들은 사라지고 아무도 없다. 처음에는 낯선 세상에 나 홀로 내 동댕이쳐진 기분이었다. 가보지 않은 길을 가려니 생경하다. 더욱 난데없는 역병으로 어디 가나 빗장이 걸려있어 난감했다. 갈 곳 없어 서재에 앉아 책을 뒤적이다가 무릎을 ‘탁’ 쳤다. 강돈묵 작가의 를 읽으며 잊고 지냈던 반쪽을 찾았다. 체신이 강건한 것도 아니다. 농기구 중에서 가장 왜소하고, 인물로 따지면 꾀죄죄한 것이 어디 내놓고 자랑할 만한 게 없다. 성품마저 온순하니 창고 속에 있을 때는 있는 줄 모르게 구석에 처박힌다. 남들이 자리 다 차지한 뒤 겨우 궁둥이 붙일 곳을 찾아 숨어든다. 욕심이란 말도 모르고 그냥 차분할 ..
시(詩)를 쓰려거든 여름바다처럼 하거라. 그 운(韻)은 출렁이는 파도에서 배울 것이며 그 율조(律調)의 변화는 저 썰물과 밀물의 움직임에서 본뜰 것이다. 작은 물방울의 진동(振動)이 파도가 되고 그 파도의 진동이 바다 전체의 해류(海流)가 되는 신비하고 신비한 무한의 연속성으로 한 편의 시(詩)를 완성하거라. 당신의 시(詩)는 늪처럼 썩어가는 물이 아니라, 소금기가 많은 바닷물이어야 한다. 그리고 시(詩)의 의미는 바닷물고기처럼 지느러미와 긴 꼬리를 지니고 있어야만 한다. 뭍에서 사는 짐승과 나무들은 표층(表層) 위로 모든 걸 드러내 보이지만 바다에서는 그렇지가 않다. 작은 조개일망정 모래에 숨고, 해조(海藻)처럼 물고기 떼들은 심층(深層)의 바다 밑으로 유영(遊泳)한다. 이 심층 속에서만 시(詩)의 의..
이다희 시인 1990년 대전에서 출생하였다. 조선대 문예창작과 대학원 석사과정 수료하였다. 201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등단하였다. 시집으로 『시 창작 스터디』가 있다. 백색소음 / 이다희 조용히 눈을 떠요. 눈을 뜰 때에는 조용히 뜹니다. 눈꺼풀이 하는 일은 소란스럽지 않아요. 물건들이 어렴풋한 덩어리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눈길로 오래 더듬으면 덩어리에 날이 생기죠. 나는 물건들과의 이러한 친교에 순응하는 편입니다.// 벽에 붙은 선반에 대하여/ 나에게 선반은 평평하지만 선반 입장에서는/ 필사의 직립(直立)이 아니겠습니까?// 옆집에서는 담을 높이는 공사가 한창입니다. 점점 높아지는 담에 대하여, 시멘트가 채 마르기 전에 누군가 적어놓는 이름에 대하여. 며칠째, 습한 날씨가 계속되고 투명한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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