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철 나물 중 흔한 머위는 주로 그늘진 대나무 숲이나 언덕에 자생한다. 대체로 이파리나 줄기를 먹는다. 맛은 쌉싸름하지만 입맛 돋우는 데 좋다는 나물이다. 몸에 좋은 것이 입에 쓰다는 말이 있으니 일부러라도 그 맛을 즐길 일이다. 작고 여린 잎은 데쳐서 된장 양념에 참기름 두어 방울 떨구고 깨소금 솔솔 뿌려 반찬으로 먹으면 별미다. 줄기는 껍질을 벗겨 삶았다가 무치거나 볶거나 탕에 넣어 먹기도 한다. 특히 육개장이나 오리탕을 끓일 때 넣으면 특별한 맛이다. 하지만 나는 삶은 줄기에 생새우와 함께 들깻가루 두 스푼 정도 섞어서 자작하게 볶은 것을 가장 좋아한다. 친정어머니가 보낸 택배 상자 속에 튼실하게 삶아져서 묶인 머위 대가 듬뿍 들어 있었다. 유난히 색깔도 누르스름하고 통통했다. 무슨 요리를 하든지 ..
박소란 시인 1981년 서울에서 태어나 경남 마산에서 자랐다.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2009년 《문학수첩》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심장에 가까운 말』, 『한 사람의 닫힌 문』, 『있다』가 있다. 2015년 신동엽문학상, 2016 내일의 한국작가상, 2020년 노작문학상을 수상했다. 모르는 사이 / 박소란 당신은 말이 없는 사람입니까/ 이어폰을 꽂은 채 줄곧 어슴푸레한 창밖을 내다보고 있군요/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를 태운 7019번 버스는 이제 막 시립은평병원을 지났습니다 광화문에서부터 우리는 나란히 앉아 왔지요/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나는 인사하고 싶습니다/ 당신이 눈을 준 이 저녁이 조금씩 조금씩 빛으로 물들어 간다고/ 건물마다 스민 그 빛을 덩달아 환해진..
영화 야말로 ‘코로나 블루’를 한방에 날려주는 진정 반가운 봄소식이다. 미증유의 이 끔찍스런 상실의 시대에 그나마 위안물이 되어주었다. 1. 영화를 보기 전 영화를 보기 전, ‘미나리’라는 영화 제목을 듣는 순간 내 머릿속엔 미나리꽝 근처에서 놀았던 유년의 추억들이 활동사진처럼 펼쳐졌다. 우리 마을 한가운데에 지붕이 있는 커다란 우물이 있었다. 20여 가구 남짓한 동네에 유일한 우물터였다. 양쪽에 우람한 버드나무가 우물을 향해 맞절하듯 기울어져 있어 제법 운치있는 풍광이었다고 기억된다. 축축 늘어진 버들가지는 빨래하는 여인들에겐 그늘이 되어 주지만 꼬마들의 손아귀에 잡히는 가지들은 어김없이 찢기고 꺾이는 수난을 당했다. 어머니가 빨래하러 갈 때나 물 길러 갈 때면 나는 걸레 바구니라도 들고 쫄랑쫄랑 따라..
글을 쓰면 세상일에 대들고 싶은 의식이 꿈틀거린다. 내 얼굴에 물음을 던지는 일이다. 한편의 글 상이 떠오르면 눈이 아프고 머리가 어질하도록 달려든다. 하지만 붙잡은 글은 장타령 노랫가락을 풀고 난 각설이의 내민 손이 허하듯 그렇다. 홀로 흔드는 글 품바다. 글 쓰는 연유를 헤집으려니 무춤해진다. 밭둑길에 자욱했던 아지랑이를 잡는 것 같다. 어쨌든 뭔가 쓰고 싶었다. 이 쓰고 싶었다는 것은 유년부터 내게 어룽대었던 아지랑이 그림자 같은 거였다. 그것은 내 고향의 산천이 내게 심은 심상이요, 우렁각시 이야기를 실타래처럼 풀어내시던 할머니의 품이었다. 내 고향은 경주에서 오십여 리 떨어진 산골 심곡深谷이다. 사랑메기라는 산 고개에서 내리뻗은 산자락이 소쿠리처럼 감싼 십여 호 좀 넘는 작은 마을이다. 앞엔 심..
신미나 시인, 웹툰 작가 1978년 충청남도 청양군에서 태어났다. 강릉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200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를 쓸 때는 ‘신미나’ 그림 그릴 때는 ‘싱고’이다.시집으로 『싱고,라고 불렸다』, 『당신은 나의 높이를 가지세요』와 시툰 『詩누이』, 『안녕, 해태』(전3권) 등이 있다. 2008 문화예술위원회 문화예술진흥기금, 2016 서울문화재단 문학창작집발간지원금 수혜 싱고 / 신미나 십년 넘게 기르던 개가/ 돌아오지 않았을 때/ 나는 저무는 태양 속에 있었고/ 목이 마른 채로 한없는 길을 걸었다/ 그때부터 그 기분을 싱고, 라 불렀다/ 싱고는 맛도 냄새도 없지만/ 물이나 그림자는 아니다/ 싱고가 뿔 달린 고양이나/ 수염 난 뱀일지도 ..
엄마 손을 잡고 캄캄한 밤길을 걸었다. 대여섯 살 먹은 아이가 겁을 먹을 만도 한데 엄마가 있어서 괜찮았다. 어른들 말을 들으니 무서운 것은 귀신이 아니라 인민군이라고 했다. 인민군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인민군에 발각되지 않게 조심조심 빙판길을 걸어야 한다고 엄마는 작은 소리로 말씀하셨다. 그런데 가죽 구두 굽에서 들리는 “똑똑 딱딱.” 소리가 골짜기에 더욱 크게 울렸다. 아버지가 사주신 구두였다. 한 짝이 언제 없어졌는지 쭈그려 신은 한쪽 발에서 소리를 냈다. 사람들은 구두 소리에 화를 내며 잰걸음으로 앞질러갔다. 엄마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욕을 먹으며 길을 걸었다. 밤하늘에 별들은 잠도 없는지 초롱초롱 빛을 품어내고 있었다. 엄마 등에서 동생도 잠이 들었는지 숨소리마저 내지 않았다. 엄마는 앞서가는 사..
오늘은 하늘도 맑고 투명하다. 오랜만에 가까운 친구들과 봄나들이에 나섰다. 들녘은 온통 노란 유채꽃으로 물들었고 연초록의 싱그러운 보리 물결이 봄 정취를 만끽하기에는 충분하였다. 머릿속을 메우던 잡념도 슬며시 물러간다. 서귀포 중문의 ‘지삿개’에 도착하여 산책로에 접어들었다. 해송 사이로 멀리 수평선이 보였고, 두 눈에 담을 수 없을 만큼 넓은 바닷가가 끝없이 펼쳐졌다. 해안선 끝자락에는 중문 해수욕장과 산방산도 눈에 들어와 멋스러운 풍치를 더해 주었다. 몇 발짝 더 다가서서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해안선 아래로 병풍을 둘러놓은 듯 펼쳐진 절벽과 어우러져 바다 풍경의 독특함을 보는 순간 와!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와 해변의 현무암이 오묘한 조화를 이루며 마음을 사로잡는다. 자..
황인숙 시인 1958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였다. 198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데뷔했다. 시집으로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슬픔이 나를 깨운다』, 『우리는 철새처럼 만났다』,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자명한 산책』, 『꽃사과 꽃이 피었다』, 『리스본行 야간열차』, 『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가 있으며 『해방촌 고양이』 등 산문집과 소설 『도둑괭이 공주』가 있다. 동서문학상(1999), 현대문학상(2018), 김수영문학상(2004)을 수상했다. 강 / 황인숙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찬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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