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선 천둥 번개가 요란하다. 하필 장마철에 그 먼 곳을 간다고 약속을 잡았을까. 하염없이 쏟아지는 빗줄기를 앞에 두고 새벽 창가에 섰다. 심상찮은 분위기다. 네 시간 이상 걸리는 길이기에 마음이 갈팡질팡이다. 번뇌의 물결 앞에서 한참을 망설였다. 훌훌 털고 나서 보니 어느새 팔공산 입구다. 마음이 걱정을 만들었다. 1천365개 계단을 알리는 푯말 앞에 섰다. 일 년이라는 숫자에 눈길이 머문다. 삼백육십오일 지켜주고 있으니 마음을 편히 가지라는 의미로 만든 계단일까. 그도 아니면 매일 고민에 부대끼며 살아가는 중생의 마음을 표현한 걸까. 계단을 다 오르면 한 가지 소원을 이룰 수 있다니 걷는 수고쯤은 기꺼이 감내할 수 있으리라. 정오에 가까워진 햇볕은 따갑고 깎아지른 듯 ..
2020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선 문지방을 밟고 넘는다. 바닥에 경사면이 느껴진다. 움푹 닳아 파인 면과 닳지 않아 불룩한 바닥 면이 시차를 두고 신발에 닿는다. 올려다보니 정문에 이인문(履仁門)이란 현판이 당당하게 걸려있다. 인(仁)을 밟고 있는 내 발끝이 잠시 무거워진다. 수봉정(경북기념물 제102호)은 경북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에 자리한 수봉 이규인의 고택이다. 수천 평 면적에 수봉정, 홍덕묘, 전사청, 열락당, 무해산방, 중간 사랑채, 안채, 곳간 등이 정답게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지형 따라 둘러쳐진 담장이 이웃과 인정을 나누었던 주인의 따뜻한 마음을 전해준다. 경북문화재로 지정한 후 수리한 공간과 세월 따라 무너진 담벼락에서 지난날 융성했던 가문의 현주소를 보는 듯하다. 불국사 가는 한적..
2020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선 솟을대문의 빗장을 푼다. 삐거덕 소리를 내며 대문이 스르르 열린다. 오수에 잠겼던 고택이 기지개를 켜며 낯선 이에게 품을 내어준다. 천하의 길지, 운문산 시루봉 기스락에 자리 잡은 내시 종택이다. 조선 마지막 내시로서 정3품 통정대부를 지낸 김일준의 집이다. 국가 민속 문화재 제245호로 지정되었으며 운림고택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대문에 들어서니 왼쪽 편 큰 사랑채가 안채를 향해 날아갈 듯 서 있다. 대문 맞은편으로는 중 사랑채가 안채를 지키는 호위무사인 것처럼 가로로 앉았다. 아니나 다를까. 중 사랑채 마지막 칸에 안채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문인 중문을 달았다. 큰 사랑채와 중 사랑채에서 안채로 출입하는 모든 사람을 볼 수 있는 구조다. 내시 고택에 어째서 ..
2020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선 영양 두들 마을에 갔다. 입구에서 보면 앞집 뒤로 뒷집의 지붕이 보이는 지형이다. 골목을 훑고 가는 바람이 가만가만 지나간다. 담장 안은 소란한 것을 멀리한다는 듯 고요가 내려앉은 처마가 푸르게 살아있다. 저절로 발소리를 죽이고 매무시를 단정히 하였다. 장계향문화체험교육원에서 해설사를 만났다. 그는 장계향이 반가의 여인으로 시가와 친정을 일으킨 서사, 시·서·화에 빼어난 실력, 자녀 교육에 있어 학식보다 착한 행동의 실천을, 어려운 사람을 돕는데 아낌없는 지원을 한 군자라고 열변을 토했다. 한 가지를 잘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다방면에 출중한 능력을 갖췄다니 뛰어난 사람임이 분명했다. 유교적 환경이 선한 영향을 주었겠지만 스스로 노력하고 수양하지 않았다면 가능했을까...
2020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선 민속박물관을 둘러보고 월영교를 건넌다. 조선 시대 원이 엄마의 애절한 사연이 깃들어 있는 나무다리이다. 먼저 떠난 지아비를 그리워하는 여인의 애틋한 절규를 아는지 모르는지 강물은 바람 따라 유유자적 노닌다. 다리 마주한 저편에 밥집이 보이는 것을 보니 마침 점심때인 것을 알리는 듯하다. 안동 하면 헛제삿밥이지 하는 말이 저절로 떠오른다. 기와를 올려 고풍스러운 두 밥집이 나란히 이웃해 있다. 다정해 보이는 모습이 과연 선비의 고장답다. 어느 집이나 내가 살던 고향의 옛집을 닮았다. 자리에 앉자 밥보다 먼저 구수한 숭늉이 나온다. ‘숭늉’이라는 말 그 자체가 예스럽다. 숭늉은 제례를 행할 때 반드시 뒤따르는 물이다. 옛날에는 ‘익은 물’이라 해서 숙수라고 불렀다. 솥..
2020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선 구름이 지구를 수백만 번 감고 돌았으리라, 헤아리지 못할 정도로. 사계절은 또 몇 번이나 오고 갔을지 모르겠다. 시간이라는 감각이 없어지고 주변의 풍광이 생경할 정도로 바뀌어갈 즈음, 낯선 두려움에 얼굴이 사색이 되어도 꿋꿋이 돌 위의 글씨를 붙잡고 버텨온 것이었다. 깊은 땅에 거꾸로 처박혀 있어서 숨이 안 쉬어질 때면, 차분히 호흡을 고르고 예전 기억을 떠올렸으리라. 본인의 몸통에 아로새겨진 그때의 기록을 품고, 다시 빛 볼 날을 기다렸을 것이다. 1988년 추운 겨울에서야 땅속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하니, 잘 견뎌냈다고 혼잣말을 내뱉어보았다. 처음 만난 세상은 참으로 이질적인 시공간이었을 터. 기뻐할 새도 없이 포클레인으로 온몸이 들려져 길옆 개울에 무참..
2020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선 산속에 바다가 펼쳐졌다. 육중한 전각을 떠받치는 기단에 게와 거북이, 온갖 물고기가 바다를 가로질러 뒤따른다. 기단과 기단으로 이어진 사다리 문양은 틀림없는 배의 용골이다. 측면 바다에 그려진 용비어천도에는 용이 여의주를 물고서 바다를 뚫고 하늘로 솟아오르고 있다. 그 기묘함에 조심스럽고 엄숙해진다. 계단에 새겨진 성난 파도는 금방이라도 산을 삼킬 듯하다. 파도를 타고 한 치 흔들림 없이 굳건히 자리 잡은 전각은 극락전이며 극락정토로 안내하는 반야용선이었다. 극락전을 세울 때 이미 반야용선 사상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닐까. 극락전(보물 제836호)이 자리한 곳은 청도 화양읍 송금리 대적사이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다시 중창하는 등 전란 때마다 고초를 겪었으며 지..
2020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선 문득 고향이 그리울 때가 있다. 화사한 봄기운에 떠밀려 가볍게 길을 나선다. 고향 마을에서 멀지 않은 성밖숲이 나를 부른다. 성밖숲, 왕버들에 가만히 손을 대어 전설을 듣는다. 투박하고 거친 세월이 손끝에 전해온다. 자세히 바라보노라면, 밑둥치가 마치 얼굴이 동그란 전설 속의 아이가 왕버들관을 머리에 쓰고 있는 형상으로 보인다. 나무의 정령이 쉬고 있을 것만 같다. 숲길을 걸으면서 오랜 시간을 무언의 대화를 나누었다. 이윽고 자연의 소리에 이끌려 선석사로 방향을 잡았다. 선석사 전경을 살피다 특이한 법당이 눈에 띄었다. 태실법당이라는 이름도 생소한 전각이다. 다소곳이 합장을 하며 태실법당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태를 봉안한 곳이라는 선입견 때문일까, 산실의 비릿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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