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선 청도 임당리 마을을 들어서 고샅길을 따라간다. 고택의 흙돌담을 끼고 걸으니 솟을대문이 버티고 섰다. 좌우로 마구간과 방을 거느려 여느 대갓집 대문 못지않다. 이리 오너라 외치면 금방이라도 누군가가 나올 것 같다. 활짝 열린 대문 안으로 들어서니, 인적 없고 쓸쓸한 기운만 감돈다. 바깥마당 넓은 터에 사랑채가 휑하니 홀로 서 있다. 사랑채를 한 바퀴 돌아보니 뒤쪽 바람벽에는 오래된 벽에서 흙이 부서져 내리고 있다. 오랜 비바람의 흔적이다. 사람의 온기가 사라진 빈집은 바람에 흩어지는 구름처럼 허허롭다. 큰 사랑채의 구조가 특이하다. 홑처마 팔작 기와지붕으로 정면 네 칸 좌측 두 칸 규모의‘ㅡ’자형 평면 형태이다. 우측 두 칸은 대청이고, 좌측 두 칸은 온돌방이다. 사..
2020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선 나는 지금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어느 무덤 앞에 숙연한 마음으로 서 있다. 비록 시골 밭둑 한구석에 자리한 초라한 무덤이지만, 그 어느 제왕의 거대하고 위엄찬 왕릉보다 더 귀중한 문화유산이라고 뜻매김을 해본다. 이 안에는 금은보화나 황금왕관 따위의 물질적 보물이 아닌, 인간의 정신적 유물이 묻혀있기 때문이다. 예천군 지보면 한대마을에 있는 언총은 사오백 년 전에 만들어진 무덤이다. 사람이 타고 다니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날마다 내뱉는 ‘말(言)을 묻은 무덤’이다. 마을 어른의 말에 의하면 한대마을은 예전부터 각성바지들이 모여 살고 있었는데, 문중들 서로 간의 싸움이 그칠 날이 없었다고 한다. 사소한 말 한마디가 씨앗이 되어 큰 싸움으로 번지는 말썽이 잦자, 마을..
2020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선 햇볕 쨍쨍 한낮에 연지 해자 뜰을 걷는다. 잎자루를 든 연잎이 잎을 길쭉하게 오므리고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을 다 마실 듯하다. 더러는 잎을 납작하게 펼치고 검게 고인 물을 덮었다. 분홍 메꽃과 태극 문양 흙길 따라가니 또 하나 둥근 해자가 펼쳐진다. 성 둘레길을 따라 걷는다. 거대한 돌, 작은 돌, 잘생긴 돌, 못생긴 돌덩이로 쌓은 성벽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졌다. 돌과 돌 틈에 작고 납작한 돌이 균형을 잡아 울퉁불퉁한 성 벽면을 자로 잰 듯 평평하다. 내가 서 있는 눈높이에 네모난 돌은 모퉁이가 부드러운 곡선을 띤다. 그 위에 각이 진 반듯한 인공 돌이 층층 놓였다. 오목하고 볼록한 직선으로 번갈아 길게 이어졌다. 검버섯이 핀 큰 돌들로 반룡의 몸통이 꿈틀거리는 ..
2020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선 하늘이 몸을 연다. 주산主山이 붉은 눈을 뜬다. 크고 작은 무덤들이 섬처럼 떠 있는 산등성이에도 햇발이 비친다. 시공간을 넘어 천년을 오갈 수 있는 길, 왕릉 길 문턱을 조심스레 넘어선다. 과거를 잇는 탯줄 같은 좁은 길이 산잔등까지 이어진다. 낯익은 듯 낯선 땅. 태고의 숨소리로 가득한 신비롭고 비밀스러운 길에 발을 들여놓는다. 잿빛으로 박제된 옛 도시 곁에서 흐르고 있는 오늘의 풍경이 기묘하다. 삶과 죽음, 과거와 현재가 아무렇지 않게 공존하는 길에서 문득 현실로 돌아오는 데는 길 중간 중간에서 스치는 사람들을 볼 때다. 천오백 년이 넘도록 비바람에 씻기고 깎이면서도 제 모습을 잃지 않은 무덤은 단순한 비경이 아니었다. 그때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역사였다. 이채로..
2020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선 물 위에 섬처럼 떠 있는 마을. 내성천이 삼면을 휘감고 도는 물도리동 마을은 차라리 비현실적이다. 무섬마을 초입에 들어서니 그제야 사람들이 발붙이고 사는 곳이란 현실감이 온다. 마을에는 반가의 기품이 흐르는 고택이 여러 채 있다. 세월의 화살을 비켜간 듯 정정한 집들은 그 후손이 거주하는 곳도 있다. 내 발길은 마을의 한 집 앞에서 멈췄다. 만죽재 고택 바로 옆의 김덕진 가옥이다. 성채처럼 견고해 보이는‘ㅁ’자형 본채와 작은 방앗간채가 어깨를 맞대고 있는 구조다. 남정네들의 공간인 사랑채와 여인들의 거소인 안채가 한 몸처럼 붙어있는 게 독특했다. 규방 여기저기를 기웃거린다. 현대식으로 개조한 탓에 고졸한 맛은 덜하다. 하지만 거처하는 사람의 불편을 담보로 하는 고택..
2020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선 도포를 입은 양반이 선비를 만나 통성명을 하려고 마주 엎드려 절을 하는데, 초랭이가 달려와서 엉덩이로 양반의 머리를 깔고 앉는다. 정자관을 쓴 양반의 이마가 흙바닥을 찧는다. 그래도 양반은 웃는다. 양반이 사대부의 자손이라고 말하니, 선비는 팔대부의 자손이라고 비꼬고, 양반이 사서삼경을 읽었다고 하니, 선비는 팔서육경을 읽었다며 빈정댄다. 그래도 양반은 웃는다. 웃을 때는 턱이 먼저 덜렁거린다. 콧등 좌우에 붙어있는 밤톨보다 굵은 콧방울에는 움푹 뚫린 콧구멍이 벌름댄다. 눈 아래에서 광대뼈로 이어지는 길고 두툼한 근육이 입꼬리를 당겨서 귀에 건다. 실눈을 감싸고 있던 눈꺼풀이 길게 호를 그리며 내려오다가 볼록한 애교살의 끄트머리를 잡고 관자놀이까지 휘달린다. 미간에..
2020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장려상 굴뚝에서 피어난 연기가 하늘로 치솟는 듯하더니 주흘산을 향해 허리를 굽힌다. 낯익은 냄새가 코끝에 스며든다. 달덩이가 망댕이가마 속에서 떠오를 채비를 하는 걸까. 열기와 사투를 벌이는 것은 아닐까. 입술 앙다물고 어금니를 질끈 깨물며 각기삭골(刻肌削骨)의 시간을 견디느라 밤잠을 설쳤으리라. 문경 초입에 들어서니 조령천변 운무가 화들짝 가슴에 안긴다. 계곡에 부는 산바람과 더불어 닿은 곳은 국가 무형문화재 전수관이다. ‘중요 무형문화재 105호 사기장’이라고 쓴 석조 조형물이 눈앞에 들어온다. 조선 영조 이래 300년 맥을 이어온 사기장인 백산 김정옥 도예 명장의 전수관이다. 어디선가 발물레 돌아가는 소리가 바쁘게 들린다. 작업장에 들어서니 수비를 거친 흙덩이를 치..
2020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장려상 삼강주막 툇마루에 걸터앉아 속절없이 내리는 빗줄기를 바라보고 있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일까? 이 비는 그칠 줄도 모른다. 유난히도 긴 장마다. 나루터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조차 비를 머금어 후텁지근하다. 한때 보부상들과 사공들로 북적였던 이곳은 이젠 전설처럼 이야기만 전해올 뿐 예전 일을 기억하는 이는 거의 없다. 그 많은 나그네는 다 어디로 흘러간 것일까? “주모, 여기 막걸리 한 통 주시오.” 부엌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늙은 주모가 화들짝 놀라 황급히 술상을 차리고, 막걸리 한 사발에 얼굴이 불콰해진 길손들의 왁자한 삶의 애환들이 환영처럼 허공으로 흩어진다. 30대 초반에 남편과 사별한 유옥연 주모가 자식들을 건사하기 위해 60여 년을 운영했던 예천 삼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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