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장려상 가을 속에 여름이 갈마들어 있다. 그 여름 염천 뙤약볕 속의 짙푸른 은행나무를 보면서도 내심은 달포가 좀 더 지나면 샛노란 황금나무로 물들어 있을 그 휘황찬란함을 떠올렸다. 그러니 저 황금빛 노랑의 갈무리 속에 저 여름의 진초록 생색이 다스려져 있다. 어머니의 생전에 한 번 다녀왔으면 싶어 내심 점지해 둔 곳이 운문사 도량이었다. 그 경내의 늦가을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의 정취를 당신 눈 안에 넣어드리고 싶었다. 수백 년 된 샛노란 노거수(老巨樹)는 당신이 보셨더라면 저승에 가셔서도 눈에 삼삼하니 수시로 아들 생각을 하기에 맞춤한 선처가 아니었을까. 사람으로 치면 지워지지 않는 눈부처 같았을 것이다. 혼자 갔지만 어머니 생각이 오롯하니 내 마음에 팔짱을 끼고 풀지 ..
2020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장려상 강물은 개경포에 이르러 긴 숨을 고른다. 철석, 철석, 연둣빛 물결이 밀려왔다 밀려가기를 반복하다가 강둑 포구를 살짝 때리고 가기도 한다. 산 그림자가 내려앉은 적막한 낙동강의 해 질 녘, 무심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그 옛날, 이 나루터에서 일어났던 전설적인 이야기가 수면 위로 여울져간다. 조선 초(1398년) 봄, 한적하던 고령 개경포에는 때 아닌 시끌벅적한 소리로 강마을은 부산했다. 구름같이 모인 사람들. 고을 원님도 행차하고, 승려, 구경나온 포구 사람들과 어린아이들까지, 심지어 소달구지까지 동원되어 줄지어 서 있다. 길 한쪽에는 조선팔도에서 오늘의 이 행사를 참관하러 온 의관을 갖춘 선비들도 보이고, 또 한편으로는 이번 이운 행사에 육신 공양을..
2020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장려상 밤꽃이 피는 유월이다. 군위 한밤마을 밤나무도 한창 밤꽃 향기를 흩날린다. 밤이 크다고 해서 ‘한밤’인데, 밤보다는 돌담에 더 눈길이 간다. 멀리서 보면 담도 마치 알밤으로 쌓은 듯한 착각이 든다. 가벼운 행랑 하나 메고 미로처럼 마을을 돌고 도는 돌담길로 들어간다. 마을에는 유서 깊은 곳이 많다. 부계홍씨종택, 대청마루, 남천고택에서 옛사람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다. 250년 동안 마을을 지킨 노거수 잣나무의 위용과 대율사 석불입상의 자비로운 미소를 만날 수도 있다. 목마르면 예주가에 잠깐 들러 잘 빚은 술 한 잔으로 목을 축이는 재미도 있다. 하지만 이를 찾아 골목을 걷다 보면 돌담의 매력에 빠져든다. 돌담에서 돌들은 자리를 다투지 않는다. 아랫돌, 윗돌, 누..
2020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장려상 제2라는 말이 슬쩍 거슬렸다. 그래도 내친김이라 차는 한티재를 거쳐 어느새 팔공산 터널을 통과하고 있다. 말로만 듣던 군위 석굴암은 대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석굴암이라고 하면 신라 경덕왕 때 만들어진 경주 석굴암이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그보다 1세기 전에 만들어진 석굴암이 군위군 부계면 남산리에 있다. 군위 삼존석굴은 국보 제109호로 지정된 통일 신라 초기의 석굴암이다. 경주 석굴암이 먼저 발견되어 유명해지는 바람에 제2석굴암이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형이 동생이 돼버린 셈이니 군위 석굴암으로서는 억울할 법도 하겠다. 사물의 이름은 대상의 정체성을 나타낸다. 삼존석굴에 알맞은 새로운 이름이 붙여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존석굴은 팔공산 비..
2020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장려상 청량대운도는 봉화의 청량산을 옮겨놓은 진경산수화다. 무려 넓이가 46m, 폭이 6.7m나 되는 세계 최대의 그림이다. 야송미술관에 걸린 이 풍경화는 이쪽에서 저쪽까지 살펴보려면 적어도 100보의 걸음을 떼야 겨우 진경을 눈에 담을 수 있는 대작이다. 이원좌 화백이 2m의 장대 끝에 붓을 매어 혼신으로 점을 찍고 선을 그어 완성했다는 청량대운도, 그 속에 나는 지금 한 점이 되어 서 있다. 그림은 청량교를 막 지나는 모자의 모습으로부터 시작한다. 젊은 어머니와 어린 자식 하나가 손을 꼭 잡고 다리를 건너고 있다. 모자가 무슨 깊은 사연을 안고 깊은 산길을 가려 하는가, 얼핏 산마루턱에는 청량사 절 지붕이 보이는 것도 같다. 두 모자가 거길 가려는가. 나는 어른들의 ..
2020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장려상 꿈자리가 뒤숭숭해도 이 자리에 오지 않는다. 도시락밥도 4주걱은 담지 말란다. 아침 일찍 여자의 방문은 금한다. 출근길 아녀자가 가로질러 가면 그날은 일찍 퇴근을 서두른다. 또 남편의 신발은 항상 방 안쪽으로 향하게 놓는다. 어떤 힘든 일이 있어도 아내의 아침 잔소리는 절대적 부정을 낳으니 가능하면 웃는 얼굴로 배웅을 하여야 한다. 탄광촌 광부들의 생활 금기 사항들이다. 언제 지하에 묻힐지 모르는 앞날의 운명을 어떤 보이지 않는 힘에 의지해보려는 뜻이기도 하다. 이 항목들이 있기에 그들에겐 위로가 되었는지 모른다. 다행히 장애물을 겪지 않으면 분명 안전한 하루가 될 것이란 기대를 가질 수 있으니까. 또 힘의 원천이 되었을 것 같다. 서로서로 조심하는 자세는 물론이..
2020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장려상 산 중턱을 오르자 뿌연 안개를 걷어 올리며 적막했던 성전의 터, 검정 부리 하나를 쑥 내민다. 1천500여 년을 이어오는 승가람임에도 세상에 그렇게 알려지지도 않으면서 경이로움이 스민 그곳에 귀한 문화유산이 있었다. 여름 절집의 운치도 느낄 겸 수미단의 숨은 뜻을 알아보려고 아들과 함께 길을 나섰다. 경산 시내를 조금 벗어나 청도 쪽 자동차로 십여 분 달리다 보면 남천면 산전리 이정표가 나온다. 옛 압독국의 젖줄인 남천을 따라 아담한 마을로 접어들다가 모골 길 2km 정도 가면 그 끝인가 싶은 곳, 학의 부리쯤에서 천년고찰 경흥사를 만난다. 열기가 이곳만은 비켜 가는지 제법 신선하다. 도심의 경쟁에서 한 걸음 물러 서 있는 듯하다. 수미단(須彌壇)이 불교 공예품이..
2020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동상 재산은 인간만이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도 아닌 나무가 재산을 가졌다. 토지를 가졌다고 부자나무라고 한다. 국내 최초로 재산을 보유한 나무이기에 누구나 호기심을 가질 법하다. 영험한 기운을 가진 예천 천향리의 석송령(石松靈)은 석평 마을의 상징수이다. 반송인 이 소나무는 위대한 유산을 가졌기에 사람처럼 주소와 주민등록 번호도 가졌다. 재산을 가졌기에 석송령은 사람처럼 해마다 재산세와 방위세를 낸다. 또한 장학금도 조성하여 학생들에게 장학금도 준다.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석송령은 인간과 똑같은 권리를 가졌다. 이러하기에 석송령은 인간 못지않게 존재의 가치를 가졌다. 낮은 키에 수많은 가지를 달고 있는 이 소나무는 반원을 그리고 있다. 마을을 포근하게 감싸 안는 듯..
- Total
- Today
-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