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교육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1. 집 정리를 하다가 옛날 앨범이 하나 나왔다. 접착식이다 보니 잘 붙어있는 것까지는 좋은데 문제는 너무 달라붙어버린 데 있다. 사진과 앨범이 한 몸이라도 된 듯 찰싹 붙어버린 것이다. 이러다가는 사진을 다 버릴 것 같아서 지체 없이 떼어내기 시작했다. 딸애가 인터넷을 검색하더니 헤어드라이어로 열을 가한 후 떼면 잘 떨어진단다. 다행히 잘 떨어지는 편이어서 조심조 심 한 장 한 장 떼어냈다. 그러다가 초록빛 한복을 입고 환하게 웃고 계신 아버지 사진을 한 장 발견했다. 평소와 다르게 곱게 입고 계셨다. 아버지의 회갑날이었던 것 같다. 그런 날이 아니고서야 저렇게 차려입고 계실 리가 없다. 왼손으로는 술잔을 든 채 오른손으로 누군가를 가리키시는 포즈였다. 잔뜩 취기가 오..
2024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작은 것이라도 굴곡이 생기면 오류를 일으킨다. 괜찮다 싶다가도 어딘가에 걸리면 그대로 멈춘 채 꼼짝하지 않는다. 재빨리 손가락을 움직여보지만 미세한 엉킴에도 상처투성이다. 습기를 먹는 날엔 갈래갈래 찢겨 회복조차 힘들다. 용지함을 열어 엉킨 종이를 빼내고 상태를 확인 후 다시 인쇄를 누른다. 조금 더 두꺼웠다면 걸림이 덜했을 것을. 얇고 가벼워 곧게 굴러가는 것도 힘들고 때론 들러붙기도 해 내부 센스가 존재를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다. 비침이나 번짐도 심하다. 양면으로 인쇄할 땐 한쪽이 물을 먹은 듯 흐느적거려 다음 길을 제대로 걸어올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 이런 일이 되풀이되면 결국 멀쩡한 종이를 들어내고 결이 좀 더 튼튼한 용지로 바꿔 넣는다. 사람도 인쇄용지처럼 무..
2024 경남신문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꿈결인가. 등이 따뜻하다.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정신을 가다듬자 내 등에 맞닿은 그의 등이 느껴진다. 침대 위아래에서 잠이 들었건만 등과 등 사이 바람 한 톨 비집고 들 틈 없을 정도이다. 그러고 보니 어느 사인가 서로 다른 높이에서도, 등을 돌리고도 편안하게 각자의 잠속으로 빠져들곤 한다. 등을 돌리면 큰일이라도 날 것 같았다. 그러기라도 하는 날에는 마치 우리만의 세상이 끝장나기라도 하는 듯 애틋하던 시절이었다. 세상에 둘만이 존재하는 듯 누구도 끼어들 수 없었던 신혼의 단꿈을 꾸던 때였다. 서로의 앞만 바라보느라 등이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다. 등이 있어도 등이 보이지 않던 시절이 분명, 있었다. 조금씩 거리가 느껴졌다고 할까. 등과 등 사이 거리가 마치 그와..
오태환 시인 1960년 부천 출생. 고려대학교 사범대 국어교육과, 동대학원 국문과 석사, 박사. 198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계해일기」가, 한국일보에 「최익현」이 당선하여 등단, 시집으로 『북한산』, 『수화(手話)』, 『별빛들을 쓰다』, 『복사꽃, 천지간의 우수리』가 있으며 시론집 『미당 시의 산경표 안에서 길을 찾다』, 비평집 『경계의 시 읽기』, 세상읽기 『오늘의 빵에 관하여』 등이 있다. 제2회 윤동주 서시 문학상, 2017 시와 표현 작품상 수상. 최익현 / 오태환 1/ 엎드려서 울고 있다/ 낮게 내려 앉은 대마도의 하늘/ 성긴 눈발, 춥게/ 뿌리고 있다./ 바라보고, 또 바라보아도/ 서릿발 같은 바람소리만/ 어지럽게 쌓이는/ 나라의 산하/ 불끈 쥔 두 주먹이 붉은/ 얼굴을 감춰서/ 설악 같은..
잠실蠶室로 쓰던 헛간에 세간을 전부 옮겨 놓고 나자 하루해가 설핏했다. 둘째와 막내는 돌아가고 나는 안방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기로 했다. 아침 일찍 포클레인이 집을 헐러 오기로 되어 있기도 했지만 나는 내일이면 허물어질 이 집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고 싶었다. 세간을 비워 낸 빈집은 마치 공연을 끝내고 장소를 옮겨 가기 위해서 내부를 비워 낸 서커스단의 빈 천막처럼 썰렁했다. 기우는 늦가을 엷은 저녁 햇살이 아쉬운 듯 마루 끝에 잠시 머물렀다. 마음 둘 곳이 없어 마당에 서성거렸다. 세간이래야 할머니와 어머니가 시집올 때 해 가지고 온 낡은 장롱을 비롯해서 이불과 옷가지 그리고 옹기와 사기들이 전부지만, 우리 식구들의 기쁜 웃음과 허망한 한숨이 밴 피붙이 같은 세간들이다. 그 세간을 비워 낸 집은 집이 아..
근본주의 혹은 원리주의라 하면, 초기 기독교 정신에 기초해 부패의 소굴 바티칸을 매섭게 질타하다가 화형을 당한 피렌체의 수도사 사보나롤라, 아니면 주자학의 원리에 따라 임금 언행을 꼬치꼬치 간섭하다가 사약을 받은 조선의 거유 조광조 선생을 떠올리실지 모르겠습니다. 한데 고교 시절 제 친구 가운데도 두 분 못지않게 근본주의자라 불러 전혀 손색이 없을 녀석이 하나 있었습니다. 기말고사가 박두했는데도 삶의 근본은 시험에 있지 않다며 엉뚱한 개똥철학서나 읽다가 시험 종료 땡 하면 바로 책상머리에 앉아 다음 시험 계획표를 날짜별 분 단위로 짜느라 밤샘을 하는데, 그 계획이란 게 고3이란 놈이 공부를 근본부터 한답시고 중1 과정 제1과부터 새로 시작하는 식이었습니다. 물론 계획표 작성에 기진맥진해 정작 본 게임은 ..
1. 나뭇가시 어느 시인이 말했다. 한숨이 화가 되어 깊은 병이 들면 엄나무 생가시를 가마솥에 삶아 마시라고. 세상 가시에 찔려 죽을 만큼 아플 때는 가시나무의 가시가 곪은 상처 터트려 주는 명약이라 하였다. 어릴 적 손가락에 가시가 박히면 어머니는 탱자나무 가시로 가시를 빼내었다. 바늘은 쇳독이 있지만 나뭇가시는 독이 없다고 늘 나뭇가시를 챙기셨다. 엄나무, 유자나무, 두릅나무, 석류나무 대추나무도 가시를 가지고 있다. 모두 제 몸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나무는 열매를 버릴지언정 가시는 버리지 않는다. 2. 바늘쌈지 “봄 두릅은 금이요. 가을 두릅은 은”이라는 말이 있다. 가시가 억센 것일수록 약효가 좋다는 두릅나무는 당뇨병 환자에겐 생명의 나무라고도 불린다. 우연히 산기슭에서 만난 두릅나무는 가시투성이..
소백산 기슭 부석사의 한낮, 스님도 마을 사람도 인기척이 끊어진 마당에는 오색 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이 적고 있다. 무량수전, 안양문, 조사당, 응향각들이 마치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 무량수전은 고려 중기의 건축이지만 우리 민족이 보존해 온 목조 건축 중에서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오래된 건물임이 틀림없다. 기둥 높이와 굵기, 사뿐히 고개를 든 지붕 추녀의 곡선과 그 기둥이 주는 조화, 간결하면서도 역학적이며 기능에 충실한 주심포의 아름다움, 이것은 꼭 갖출 것만을 갖춘 필요미이며 문창살 하나 문지방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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