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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토막 생각 / 박연구

부흐고비 2021. 1. 12. 17:28

Ⅰ.

문학이란 진실의 표현이어야 한다. 다만 소설은 허구를 설치해서 진실 표현을 하고, 수필은 허구를 설치하지 않고 진실 표현을 한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수필도 부분적으로는 허구적인 것을 가미하여 작품한다는 이도 있다고 들었지만, 그것마저 용납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상상의 세계를 그리는 것은 몰라도, 체험 세계를 그리는 것은 허구를 용납하면 안 된다는 얘기이다.

그래서 나는 문예작품의 심사를 위촉받으면, 수필의 경우 ‘거짓말’을 쓴 것은 아닌가 하고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왜냐하면 체험 사실을 거짓말로 쓰면 그 글은 이미 수필로서는 실격이 되는 때문이다.

얼마 전 일이다. 어느 기관이 모집한 현상 문예작품의 수필 부문을 심사한 바 있는데, 짜장면 그릇을 두고 쓴 대목이 누군가의 글에서 본 기억이 있는 표현이어서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가 없었다.

‘희고 납작한 테가 두어 줄 그어져 있고, 한두 군데 이가 빠져 있는’ 사기그릇을 쓰고 있는 중국집 풍경은 내 친구 정모 교수가 ‘짜장면’이란 수필에서 표현한 바대로 20년 전에나 맞는 얘기이고, 지금은 ‘거짓말’이 되는 것이다. 더욱 아연을 금치 못할 일은 제목에서부터 내용 전부가 표절이라는 사실이다.

다른 사람 소유의 물건을 훔쳐오면 도둑이 된다는 사실은 알아도, 남의 글을 통째로 베껴서 자기 이름을 붙여 상금을 타게 되면 괜찮다고 생각을 하고 저지른 것인지 본인을 앉혀놓고 물어보고도 싶다. 남의 체험 사실을 자기의 체험 사실인 양 쓰는 것도 ‘거짓말’일진대, 이런 글을 표절인 줄도 모르고 뽑았을 경우를 떠올려 보았을 때는 상상하기도 싫을 만큼 불유쾌할 뿐이다.

우리는 자기 의지대로 이 세상에 나온 것은 아니지만, 되도록 남에게 이로운 일을 하도록 노력하며 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는 못하더라도 남에게 폐를 끼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그는 나에게 금전적인 피해를 준 것은 아니지만, 그 이상으로 피해를 준 것임을 알기나 하려는지…….

더 중요한 얘기가 있다. 설령 남의 글을 표절한 것이 발각되지 않아 이름도 내고 돈도 벌었다고 치자. 그런데 그 기분은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양심을 속였다는 자책감으로 얼마동안, 아니 평생을 괴로워할지도 모른다.

수필을 일러 ‘마음의 산책’이라고도 하고 ‘마음의 나체’라고도 한다. 그만큼 수필은 쓰는 이의 마음을 거짓 없이 표현하는 것에 생명이 있고 매력이 있는 문학이다. 자기를 속이면서 사는 사람은 아예 수필은 쓸 생각을 말아야 한다.

Ⅱ.

노시인(老詩人) 한 분이 들려준 이야기가 떠오른다.

시인이 밖에 나갔다가 들어왔는데, 며느리가 제 방에서 나오지도 않고 윗몸을 조금 일으키는가 싶더니 인사말만 하고 도로 앉아 버렸다. 시인은 문학 강의를 마치고 온 길이라 피곤하기도 하고 며느리의 소행이 야속하기도 해서,

“에미야, 이리 좀 나와 봐라?”

하고 며느리를 불러 보았다. 그런데도 며느리는,

“네 아버님, 조금 있다가 나갈게요.”

하고, 즉각 대령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조금 있다’ 나온 며느리의 변명인즉, 교육방송의 중요한 대목을 시청하고 있던 중이어서 아이에게 설명해 주느라고 그리 되었다고 하더란다. 그러니까 며느리의 태도인즉, ‘당신 손자를 교육시키느라고 그랬는데, 뭐가 잘못되었느냐’고 반문하는 것과 같았다.

노시인은 며느리에게 이렇게 타일렀다고 한다. 교육방송을 들으며 아이에게 설명을 해주는 일도 교육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아이에게 한 자를 덜 가르치는 한이 있더라도 얼른 일어나서 시아버지의 가방을 받아들며 인사를 잘하는 것이 아이를 위해서는 더 좋은 교육이 되는 것이다.

뒷날 며느리도 자식에게 효도를 받으려면 자식 보는 데서 자기 부모에게 효도를 잘하는 본을 보여야 한다. 지식만 주입하는 교육의 폐단으로 오늘날 문제아들이 많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은 비단 노시인만의 생각이 아닐 줄 안다. 나 또한 구세대에 속하는 사람이어서 전적으로 노시인의 교육 방법에 찬동을 표했음은 물론이다.

한 마디 덧붙이고자 한다. 설령 부모 세대의 교육 방법이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도 할지라도 부모 생각을 따라주는 것이 효도라고 본다. 왜냐하면 부모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것이 가장 좋은 효도라고 보아 하는 말이다. 부모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일이 그리 어려울 것도 없다. 시아버지가 출타했다가 들어오면 얼른 나가서 손에 든 것을 받아주며 공손하게 인사를 드리면 그뿐이다.

일찍이 노시인은 “풀씨만한 사랑 하나를 사람의 가슴속에 심어준다는 일, 그 일이 어느 것보다도 값지다.”고 역설한 바 있다. 그가 쓰는 시에 있어서나 며느리에게 타이르고 싶은 말은 바로 그 풀씨만한 사랑 하나를 사람의 가슴 속에 심어주기 위함이었는지도 모른다.

Ⅲ.

B선생님은 고등학교 때 나의 은사이시다. 그때 교지 같은 데 쓰신 글이 학생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정년을 하고 무료하게 지내시는 그분에게 내가 주간하는 잡지에 수필을 쓰시게 한 것이다.

B선생님의 수필은 유머도 있고 페이소스도 있어서, 잡지가 나갈 때마다 그분의 수필을 감명 깊게 읽었다는 독자가 적지 않아 조금은 ‘효도’를 한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번에도 나는 다음 잡지 편집을 기획하면서 B선생님께 원고 청탁도 할 겸 전화를 드렸더니, 그러잖아도 상의를 할 일이 있었노라면서 이런 얘기를 하셨다.

대학 교수로 있는 아들이 팔순 기념으로 아버지의 수필집을 내자고 하는데 어찌 했으면 좋으냔다. B선생님의 말씀인즉, 하릴없는 노인이 파적(破寂)삼아 쓴 글들이어서 책으로 출판할 가치가 없다고 하셨지만, 내 생각으로는 퍽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분의 글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질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B선생님의 아들이 효자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물론 B선생님은 글을 잘 쓰시는 분이지만, 설령 글을 잘못 쓰는 분이라 할지라도 그분의 아들은 기필코 아버지의 수필집을 내자고 했을 것이다. B선생님의 아들뿐 아니라 누구라도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서 뭐라고 평가를 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불효인 것이다. 나는 그런 불효자를 한 사람 알고 있다. 역시 그도 대학 교수로 있는 사람인데, 작가인 자기 아버지의 작품을 두고 형편없는 졸작이라고 학생들 앞에서까지 말했다니……. 자기 아버지가 쓴 작품에 대한 평가는 다른 사람이 할 일이지 자식 스스로가 할 일은 아니지 않은가. 비단 문학작품에 한해서만도 아니다. 자기가 하는 일을 두고 자식한테마저 형편없는 평가를 받게 될 때, 인생을 헛살아 온 것만 같아 그 고적감(孤寂感)이야말로 어떤 말로도 표현하기 어려울 것이다.

조금 다른 얘기가 될지 모르지만, 문단의 원로에 대해서도 작품 평가는 삼가는 것이 예의가 아닐까 싶다. 한 작가가 전성시대에 주목할 몇 작품 남겨 놓았으면 되는 것이지, 그 작가가 노년에 쇠잔한 기운으로 작품 한 것까지 후배로서, 아니 자식 같은 처지에서 노선배의 글을 평가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노후를 위해서도 삼가야 한다는 것을 졸고(拙稿)를 마치며 덧붙이고 싶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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