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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대전 발 영시 50분 / 유병근

부흐고비 2021. 1. 12. 12:35

무엇인가 써야 하는데 꼬투리가 잡히지 않는다. 무슨 의무감처럼 마음은 부질없이 써야한다는 쪽으로 기운다. 왠지 불안하고 소화불량에라도 걸린 느낌이다. 무슨 덩어리 같은 것이 내 배속에서 꿈틀대는 것 같다. 이상하지만 그런 꿈틀대는 것 같은 정체불명에 시달리고 있다. 얄궂은 병일 것이라고 혼자만의 서툰 진단을 한다.

무엇인가를 쓰겠다는 방향으로 다시 생각에 잠긴다. 눈사람을 굴리듯이 머리를 굴린다. 등치가 점점 커지는 눈사람을 골목에 세워두고 눈과 코 그리고 덥수룩한 수염을 단다. 세상 이야기를 들어보자고 귀를 단다. 벙거지를 얹어준다. 눈사람 곁에 서서 사진을 찍고 싶다. 그러나 사진을 찍지 못하고 어영부영하는 사이 눈사람은 사라졌다.

존재하는 것은 눈사람처럼 사라진다. 평생을 함께 하리라고 믿었던 사람도 사라진다. 언제 어디서 어쩌다 사라졌는지 그걸 찾으려 쓰는 일에 몰두하고자 한다. 시인은 찾는 자라고 했다. 램보는 견자見者라고 했다. 보는 자 또한 찾는 자다. 시인은 시인視人이다.

무엇인가를 써야하는 나는 무엇인가를 보아야겠다. 본 것을 어떻게 보았다고 써야겠다. 그런 점 보는 것을 어찌 게을리 하겠나. 하지만 보는 방식이 문제다. 내면천착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사물의 내면 그 내면의 세계를 보고 짚어내는 수공업적 혹은 감성적 방식이 문제다. 겉보기만으로는 뻔한 수작에 지나지 않는다.

쓰러진 나무, 망가진 가지, 잎이 다 떨어진 추위를 본다. 나무만의 문제는 아니다. 나무 저편의 진통을 귀담아 듣고 읽어야 한다. 쓰러진 나무속에는 쓰러진 통증이 있다. 통증의 고달픔에 귀를 기울인다. 누가 또 나무발치에 쓰러지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쓰러지는 소리는 나무가 쓰러질 때의 아픔을 훨씬 초월하는 것 같다.

평균대에 올라서서 체조를 한 적이 있다. 그때 몸이 흔들렸다. 몸을 따라 마음이 흔들렸다. 중심을 잡지 못한 탓이라고 체육선생님이 꾸짖으셨다. 몸이 중심을 잃으니까 마음이 흔들린다. 마음이 중심을 잡지 못하니까 몸이 흔들린다. 몸은 마음에게 마음은 몸에게 서로 책임을 떠밀었다. 몸도 마음도 모두 내 안에서 나오는 내 것인데 나는 몸 따로 마음 따로라는 핑계를 대고 있었다. 나는 진솔하지 못한 가면주의자였는지도 모른다. 무엇인가를 써야 한다. 어제 쓴 것은 어제 것이고 오늘은 오늘을 써야한다. 그런데 오늘은 무엇인가. 멀리 둘러볼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런 점 나는 초점이 흐린 근시안이다.

언젠가 주례역을 지나 냉정역 방향으로 지하철이 가고 있었다. 냉정역에 대해서 쓴 적이 있다. 냉정冷井이라고 쓰는 냉정에는 여름에도 차가운 시원한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도시개발로 우물은 존재를 잊었으나 냉정은 냉정冷情아닌 달고 시원한 우물시대를 그리고 있을 것이다. 문명의 발달은 새로운 문명으로 옛것을 따돌리고 추억이라는 갈피에 집어넣는다. 주택구조가 그렇다. 가마솥을 걸어놓고 불을 때던 시절의 부뚜막이 사라지고 아궁이 또한 흔적을 감춘다.

사라진 것은 시 속에 혹은 수필 속에 살아난다. 시인과 수필가는 그런 점 예를 기리고 새 것을 추구한다. 온고이지신주의자溫故而知新主義者다. 쓰면 쓸수록 자꾸 깊어지는 시를 쓰고 수필을 쓴다. 하루는 비유를, 하루는 상징을, 하루는 설화를 생각한다.

쓰러진 나무는 시 속에 있고 수필 속에도 있다. 그것은 쓰러지고 쓰러져가는 아쉬운 역사다. 다만 시는 역사 이전과 이후의 세계를 넘나들지만 수필은 역사 이후의 세계에서 생명을 건다. 수필이 역사 이후라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수필의 사주팔자다. 운명은 고칠 수 없다고 한다. 수필의 운명을 인위적으로 고치려 보톡스를 맞힐 경우 수필은 수필 아닌 다른 무엇이 된다. 얼굴의 무엇을 가리고자 보톡스를 맞은 얼굴은 문학성이란 변명으로 허구를 들이대는 기만행위와 같다. 허구는 적당히 들어댈 경우 수필의 문학성을 살린다고 한다. 수필을 모르는 어처구니없는 망발이다.

살아가면서 나는 적당히라는 말을 생활에 끌어 붙인다. 집안 청소를 할 때 이 적당히는 더욱 부지런히 나타난다. 대강대강 해치우는 내 청소습관을 아내는 못마땅해 한다. 내 집 청소이기 망정이지 만약 다른 집에서 그런 대강대강을 내비친다면 영락없이 퇴짜깜이라는 것을 안다. 그런데 한 편의 글을 쓸 때만은 대강대강정신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에 확 끌린다. 글 속에는 글을 쓴 사람의 정신이 들어박힌다. 그런 점 시나 수필의 경우 허투루 하지 말아야겠다는 깨달음이 나를 자못 긴장케 한다. 나도 모르는 무엇인가에 끌리는 나를 생각한다. 그래 그렇다. 기적소리 슬피 우는 하필이면 기적소리를 생각한다.

지금 나는 어디론가 지망없이 가고 있는 부질없는 환상에 잠긴다. 대전역에서 대전발 영시 50분을 기다리고 있는 나를 생각하는 건 좀 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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