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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가 긴 잠에서 깨어, 훨훨 날아 나에게로 왔다.

신라에서 오늘날의 청주까지 1600년이라는 멀고 먼 세월을 달리고 날아서 왔다. 나를 찾아 긴 시간 달려오느라 피곤한지 박물관 한쪽에 얌전히 누워 자고 있다.

앞에는 ‘촬영 금지’라는 경고문구가 있다. 빛에 의해 훼소될까봐 조심하라는 말이려니 생각했다. 천마는 금방이라도 깨어나 땅을 박차고 하늘로 훨훨 날아갈 것만 같다. 천마문 말다래는 진품인데 제한 공개되었었다. 그런데 그 귀한 것을 세 번이나 볼 수 있어 행운이었다.

천마를 보는 순간, 너무나 아름다웠다. 건강하고 두툼한 엉덩이, 구름 위를 나는 듯 부지런한 발놀림, 날개가 된 것 같은 말갈기와 꼬리, 신비롭고 은은하게 그려져 있었다.

청주까지 1600년을 쉼 없이 달려온 천마는 숨 가쁜 입김, 바람을 가르며 달려오는 저 힘찬 생동감, 고구려 벽화에서나 볼 수 있는 당초무늬와 불가에서 볼 수 있는 연꽃 문양을 가장자리 사면에 화려하게 거느리고 왔다.

이 만남이 필연이 아니라면, 긴 시간을 뛰어넘어 오늘 만날 수 있었을까. 질기고 질긴 인연의 실타래이지 싶다.

옛날 신라 건국 설화를 보면 말을 신령스런 존재로 인식하는 내용이 나온다. 죽은 사람을 하늘의 세계로 실어 나르는 역할을 하던, 신령스런 동물의 모습으로 천마가 표현되었다고 전한다.

천마도와 천마문 말다래, 금관, 관모 꾸미개 등 국보 4점도 함께 청주 박물관으로 화려한 나들이를 오는 동안 보험금만도 30억, 50억이라고 한다. 옮기는 것도 3개월이나 걸렸다고 하니 얼마나 귀하신 몸인가.

천마총에서 나온 많은 유물과 왕의 무덤은 발굴 당시의 모습 그대로 옮겨 왔다. 천마문 말다래 못지않게 금관의 웅장함과 화려함은 왕의 위엄을 나타내고도 남았다. 금 허리띠와 드리개의 화려함과 찬란함에서도 왕의 위엄을 그대로 보는 듯하다. 사람의 몸과 뼈는 흙으로 돌아가 흔적도 없지만, 많은 유물들은 소멸되지 않고 화려하게 부활했다.

세계적으로 남아있는 금관은 14개가 있는데 신라에만 국보급 금관이 6개가 있다고 하니, 신라의 천년 영화가 찬란하고 화려했으리라 짐작된다.

사후세계도 생시처럼 생각했기에, 고인이 쓰던 모든 것과 생활 용품을 함께 묻어서,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영광을 누리고 있다.

천마총은 무덤 주인을 알려주는 문자 기록이 나오지 않아 누구의 무덤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부장품으로 본 무덤 연대를 5세기 말이나 6세기 초로 보고 소지왕이나 지증왕으로 추정할 뿐이라고 한다.

천마문 말다래는 말 안장의 좌우 양쪽에 늘어뜨려 사람에게 진흙이 튀지 않도록 만든 것이다. 말다래에 천마를 아름답게 그려서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지위가 높은 신분이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천마문 말다래의 비상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며 오랜 세월 동안 땅속에 묻혀 있었는데도, 그 모습을 간직하며 현대를 살고 있으니 그저 감격할 뿐이다. 썩기 쉬운 자작나무 껍질에 그렸는데도 소멸되지 않고 지금까지 숨 쉬고 있다. 당시의 안료 기술과 공예기술과 그림의 솜씨가 얼마나 뛰어난 것인지 짐작이 가지 않는가.

아득한 세월을 거치며 소멸되지 않고 부활한 말. 고구려, 백제, 신라가 통합되고 대한민국이라는 현대의 역사 앞까지 힘차게 날아온 천마!

천마문을 그린 화가는 16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당신이 그린 말이 부활하고 비상하리라 상상이나 했을까. 당신의 육신은 흙으로 돌아갔지만, 영혼과 함께 천마가 비상할 수 있으리라 믿었을까.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말이 마음에 잔잔하게 울려 퍼진다. 태고의 신비가 내 앞에 나타나기까지 천마는 쉼 없는 말발굽 소리를 내며 날아서 나에게 왔다. 나 또한 천마를 만나기 위해 1600년이라는 시간을 기다리다 만났으리라.

천마문 말다래를 보니, 과거와 현재 미래는 분리되지 않는 고리에 매여 있는 듯했다. 천마와 나는 서로를 알아보았다. 맑고 아름다운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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